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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자주, 성실하고 착하고 인내심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자문하곤 한다. 이 질문에 대한 절대적인 답은 찾지 못했지만, 이러한 질문을 통해 자문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나 자신에 대해 많은 ...최근 소셜 네트워크에서 팔로우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다가 여러 곳에서 불협화음이 심한 걸 목격했다. 모두들 타인을 향해 날을 세우고 ...우리는 누구나 아름다움에 마음을 쉽게 빼앗긴다. 아름다운 순간, 아름다운 사람과 사물은 우리의 특정한 감정을 자극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일의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그 결과에 앞선 어떤 행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행동에는 결과가 따르기 마련이다. 사람의 행동에 ...SBS 예능프로그램 '집사부일체'가 미국 현지 주민들과 법적 분쟁에 휘말렸다. 지난 17일 KBS의 보도에 따르면, 미국 캘리포니아주 터스틴·어바인 지역 ...예술가(화가)로서 나는 때때로 자기애에 빠진 나를 발견하고 죄책감을 느끼곤 한다. 사람들이 내 작품을 많이 보고 또한 좋아하기를 바란다.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는 19세기 프랑스 상징주의 화가였다. 상징주의자들은 18세기 예술이 너무 과학적이라고 여겼고, 주제와 제작과정에서 그들이 영성을 버렸다고 ...1940년 5월, 독일군은 프랑스와 영국군을 차례로 격파하며 프랑스를 질주하고 있었다. 그달 말, 독일군은 40만 명이 넘는 영국-프랑스 연합군을 ...코로나바이러스의 대유행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방면에서 대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중독과 싸우는 사람들 역시 혼란과 ...명나라는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의 총 17년 재위 기간, 15년에 걸쳐 7차례나 역병을 겪었다. 수도 북경은 백성 60%가 페스트로 ...역사는 되풀이 된다. 그래서 현재를 비추는 가장 좋은 거울이 된다. 역사적으로 발생했던 옛 사건들을 살펴보는 것은 오늘날 발생하는 ...최근 폼페오 바토니(Pompeo Batoni)의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를 우연히 접했다가 받았던 놀라움을 잊을 수 없다. ...17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이탈리아 화가 루카 조르다노(Luca Giordano, 1613-1699)는 특출난 두 가지 재능 때문에 오히려 손해를 본 경우다. ...성서의 이야기를 작품화했던 바로크시대 초기 대표적 이탈리아 화가인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는 1600년 티베리오 체라시(Tiberio Cerasi) 추기경의 의뢰로 ...많은 사람이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에 강한 반감을 느낀다. 그러나 남존여비는 사실 남성은 고귀하고 여성은 비천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존(尊)'과 '비(卑)'는 <역경(易經)>의 음양 평형 개념에서 유래한다. 남존여비의 의미는 ‘남성에게는 남성의 특징이 있고 여성에게는 여성의 특징이 있으니 가정에서 남녀의 역할이 서로 다르게 마련이고, 각자 그 소임에 충실하면 자연히 가세(家勢)가 흥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남존여비'의 진짜 의미 '남존여비'의 출전은 <역경>이다. <역경 계사전>에는 '하늘은 존(尊)하고 땅은 비(卑)하니 이것으로 하늘과 땅이 정해지고, 낮고 높음이 펼쳐짐으로써 귀하고 천함이 자리 잡는다(天尊地卑,乾坤定矣。卑高以陳,貴賤位矣)… 건(乾)의 도는 남자를 낳고 곤(坤)의 도는 여자를 낳는다(乾道成男,坤道成女)'라는 구절이 있다. 이 중 '존(尊)'은 높다는 의미이고 '비(卑)’는 낮다는 의미로, 방위를 나타내는 단어다. '천존지비'란 '하늘은 위에 있고 땅은 아래에 있으며, 하늘은 높고 땅은 낮다'는 의미로, 자연 상태를 묘사한 것이다. <설문해자>에 의하면 '존(尊)'은 고(高)와 뜻이 통한다. <광야(廣雅)>는 '비(卑)'를 '비(庳)'와 같다고 설명한다. <광운(廣韻)>에 따르면 '비(庳)'는 아래(下)를 의미한다. <역경>은 우주와 천체의 운행 원리를 묘사한 경전으로서 그 핵심 사상은 음과 양의 평형으로 귀결된다. 평형과 조화 상태에서 벗어난 사물은 결국 모두 정상 궤도를 이탈하게 되고, 우주 만물은 최종적으로는 조화와 평형 상태로 돌아오게 된다. <역경>의 또 다른 핵심 사상은 음과 양이 각자 제자리를 지킨다는 것이다. 하늘은 하늘 자리에, 땅은 땅 자리에, 음(陰)은 음의 위치에, 양(陽)은 양의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천지, 음양, 남녀는 옛 사람들이 세상을 '분류'하는 방식이다. 사람의 이치도 천지간의 이치를 본받았으니, 남존여비는 곧 '천존지비(天尊地卑)'에서 파생된 것이다. ‘남존여비’의 본래 뜻은 '남녀는 서로 다르다'는 것으로, 이는 자명한 구분이자 자연 그대로의 상태다. '남존(男尊)'의 의미는 대자연의 특별한 산물인 남성이 '도(道)'에 부합하려면 반드시 하늘과 같이 당당하고 공정해야 하며, 자강불식(自強不息‧스스로 강해지기 위해 쉬지 않는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여비(女卑)'의 의미는 대자연의 특별한 산물인 여성이 '도'에 부합하려면 반드시 땅처럼 겸손하고 포용해야 하고, ‘후덕재물(厚德載物‧덕을 두텁게 해 만물을 포용한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존여비'는 음과 양이 각자 제자리를 지키는 자연의 조화를 제창한 것이다. 그러므로 '남존여비'란 남녀가 평소 생활 및 혼인관계 속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도리를 말하는 것으로, 남녀가 불평등하다는 함의를 담고 있지 않다. 남성의 품행이 고상하다면 여성도 자연스럽게 그를 존중하고 따를 것이다. 남성은 정직하고 고상하며, 여성은 겸손하고 관용적이면 그 가정은 조화롭지 않을 리 없다. 이러한 가정과 사회라면 여성도 자연히 차별받지 않고 상응하는 지위를 누리게 된다. 남녀가 유별하니 각자 소임에 충실하라 맹자는 “어버이와 자식 사이에는 친함이 있어야(父子有親) 하며,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로움이 있어야(君臣有義) 하며, 부부 사이에는 구별이 있어야(夫婦有別) 하며,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질서가 있어야(長幼有序) 하며, 친구 사이에는 신의가 있어야(朋友有信) 하나니, 이는 인륜의 대도다”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오륜(五倫)이다. 남편은 하늘과 같고, 아내는 땅과 같다. 하늘에는 해와 달이 뜨고 구름이 오가며 비가 내려 땅을 윤택하게 한다. 땅은 산과 강을 품고 만물을 길러 세대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번성하게 된다. 남편은 가정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아내는 후대를 낳아 기르고 교육한다. 이는 음양의 이치에 정확히 부합하는 것으로, 남녀가 제 특성에 따라 임무를 분담한다. 이렇듯 각자가 소임에 충실하면 가정이 자연히 화목하게 된다. 반대로, 만일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땅은 말라붙게 되고 인류의 생활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남편이 가족을 부양하지 않으면 아내는 기댈 곳을 잃게 되고 가정은 정상 궤도를 이탈하게 된다. 초목이 땅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갓난아이 역시 어미 곁을 벗어날 수 없으니, 그 속의 이치가 참으로 오묘하다. 이로부터 우리는 부부 각자가 서로 다른, 그리고 서로 대체할 수 없는 책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는 ‘주나라의 세 태비(周朝三太)’, 즉 시조모 태강(太姜), 시모 태임(太任), 며느리 태사(太姒)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주나라 왕실의 세 군왕, 즉 태왕(太王), 계력(季歷), 문왕(文王)의 아내였다. 이 세 군왕은 모두 어질고 총명했고, 그 아내들은 모두 성심으로 남편을 공경했다. 세 태비는 천하의 국모로서 나라를 교화하고 군왕을 도와 주나라 800년 태평성세의 기틀을 닦았다. 또한 중국의 빛나는 유교 문화를 낳았다. <열녀전(列女傳) 모의전(母儀傳) 주실삼모(周室三母)> 편에서는 이런 기록이 있다. 태사는 문왕 부인이 된 후 한층 더 현숙해졌다. 시조모 태강과 시어머니 태임의 훌륭한 덕망을 흠모해 그들의 덕행을 이어나갔다. 근면하고 검소한 그녀는 힘써 자녀들을 교육하고 성심성의껏 문왕을 도왔으며, 궁 안의 일들을 조리정연하게 처리했다. 이에 문왕은 아무런 근심 없이 나랏일에 정신을 집중할 수 있었고, 덕정(德政)을 널리 베푸니 문화가 크게 흥했다. “문왕은 바깥을 다스리고, 문모는 안을 다스렸다(文王治外,而文母治內)”는 말처럼, 태사는 ‘문모(文母)’로 칭송받았다. 인덕(仁德)의 내조자 장손황후 “좋은 아내를 둔 것은 나라에 좋은 재상을 둔 것과 같다.(家之良妻,猶國之良相)” 그 인품을 칭송받는 역사 속 황후들 가운데서도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아내 장손황후는 단연코 가장 훌륭한 황후라고 할 수 있다. 장손무기(長孫無忌)는 장손황후의 오빠다. 그는 이세민과 절친한 사이로, 이세민이 천하를 얻도록 보좌했다. 당 태종이 장손무기에게 재상직을 맡기려 하자 장손황후가 오히려 말렸다. “소첩이 황후 자리에 올라 있으니, 그 존귀함이 이미 지극합니다. 소첩의 형제와 조카들이 조정에 나아가기를 진실로 바라지 않습니다. 한나라 때 여후(吕后)와 곽광(霍光) 가문의 전례가 좋은 교훈이 됩니다. 부탁하옵건대 제 오라버니를 재상으로 삼지 마시옵소서.” 이처럼 장손황후가 재삼 만류함으로써 당 태종은 장손무기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같은 빈 직책만을 하사했다. 장손황후의 친딸 장락공주가 시집갈 당시, 당 태종이 하사한 혼수품이 당 고조의 딸 장공주 때보다 곱절이나 많자 위징(魏徵)은 당 태종에게 직접 이의를 제기했다. 이를 안 장손황후는 위징을 질책하기는커녕 크게 칭찬했다. 장손황후의 안배하에 장락공주는 지나치지 않은 정도의 혼수를 가지고 출가했다. 장손황후는 평소 언행의 도리와 예법을 성실히 지켰고, 조정의 정사에 간섭하는 법이 없었다. 또한 인품이 반듯하고 도리가 있었다. 당 태종은 황후를 무척 신임해서 나라의 큰일과 상벌에 관한 사항을 자주 상의했다. 장손황후가 특수한 신분임에도 나랏일에 간섭하고자 하지 않은 것은 남녀 간에는 구별이 있으며 각자 소임에 충실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송나라 때 사마광이 저술한 사서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재주와 덕을 온전히 갖춘 사람을 성인이라 일컫는다”는 구절이 있다. 광활한 중국 문명의 역사를 돌아보면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선성(仙聖)이 배출돼 뛰어난 공적을 남겼다. 음악, 회화, 문학, 서예, 의약, 다도, 병법 등 도처에 신의 흔적이 보이며 선기(仙氣)가 가득하다. 5천 년 신전문화(神傳文化)는 신의 땅을 윤택하게 했고 온세상에 혜택을 주었다. 고대 선성들의 전기와 빼어난 성취는 전통 철학과 도덕 정신을 빛나게 하는 동시에 인심을 교화하고 후대를 계도하는 작용을 한다. 의학 대작 《상한잡병론(傷寒雜病論)》 장기(張機)는 자(字)가 중경(仲景)이며 동한 말기의 유명한 의사다. 210년경 《상한잡병론》 16권을 저술했다. ‘상한졸병론(傷寒卒病論)’이라고도 하는 이 위대한 책은 중의학 역사상 최초로 이(理), 법(法), 방(方), 약(藥)을 두루 갖춘 경전으로, 육경변증논치(六經辯證論治)의 원칙을 확립했다. 그뿐만 아니라 뛰어난 처방을 많이 기록해 역대 의가들은 물론이고 외국 의학계에서도 존경한다. 흔히들 ‘뭇 처방의 근본이자 원조(衆方之宗 羣方之祖)’라 부른다. 이 책은 후세에 《상한론(傷寒論)》과 《금궤요략(金匱要略)》으로 나뉘었다. 청나라 때의 명의 장지총(張志聰)은 “사서(四書)에 밝지 않으면 선비라 할 수 없고, 상한론을 제대로 모르면 의사라 할 수 없다”고 했다. 진(晋)나라 때부터 지금까지 이 책을 정리하고 주석하거나 연구한 학자만 천 명이 넘는다. 이 책과 수록된 방제(方劑‧처방)는 한국, 일본, 베트남,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몽골 등의 의학 발전에 영향을 끼치고 추동작용을 했다. 일본 의학회 ‘최고공훈상’을 수상한 한방의사 오츠카 케이세츠(大塚敬節)은 일찍이 “상한론은 치료학을 논술한 세계 최고의 고전 의서다”라고 했다. 장중경은 원나라와 명나라 때부터 ‘의성(醫聖)’으로 존중됐고 심지어 사찰에서 향불을 피워 공양할 정도였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이 발동한 문화대혁명 시기에 허난성 난양(南陽)에 있던 장중경의 무덤과 비석이 파괴됐다. 지금 장중경 기념관에 전시된 물품들은 한 차례 겁난을 거친 것들이다. 옛것을 부지런히 익혀 뛰어난 의술을 이루다 장중경은 소년 시절부터 편작을 흠모해 의학을 사랑했다. 그가 열 살 되던 해 같은 군(郡)의 명의 장백조(張伯祖)를 스승으로 모시고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의학을 배웠다. 장중경은 이렇게 ‘근구고훈(勤求古訓‧부지런히 옛사람의 가르침을 구함)’하고 고대 의서를 자세히 연구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지식과 의술이 스승보다 낫다”고 했다. 그는 또 ‘박채중방(博採衆方‧처방을 널리 채집함)’하고 고금의 약재를 널리 수집했으며 민간의 다양한 치료법들까지 연구해 대량의 자료를 축적했다. 병을 진찰하고 학습할 때 그는 매번 ‘고교이구험(考校以求驗‧임상시험을 거쳐 바로잡음)’함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장중경의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는 상한론 서문에 잘 드러난다. “공자는 ‘나면서부터 아는 자가 으뜸이고, 배워서 아는 자는 그다음이며, 많이 보고 들어 아는 것이 많은 자는 또 그다음이다’라고 하셨다. 나는 오래전부터 방술을 숭상했으니 이 말씀대로 해보련다.” 서진(西晋)시대 명의 황보밀은 《침구갑을경(鍼灸甲乙經)》 서문에서 장중경이 ‘건안칠자(建安七子‧중국 후한 건안 때의 유명한 시문가 7인)’의 한 사람인 왕찬(王粲)을 치료한 일화를 기록했다. 왕찬이 20대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장중경이 그를 보고는 “그대는 병에 걸려 40이 되면 눈썹이 다 떨어질 것이고 또 반년이 지나면 죽을 것이다. 지금 오석탕(五石湯)을 복용하면 이 난을 면할 수 있을 것이네”라고 말했다. 왕찬이 이 말을 듣고는 불쾌하게 여겨 약을 먹지 않았다. 사흘 후 장중경이 그를 만나 약을 먹었는지 물었다. 왕찬이 이미 먹었노라고 거짓말을 했다. 장중경은 그가 약을 쓰지 않았음을 간파하고는 말했다. “그대는 왜 자신의 생명을 소홀히하는가?”라고 말했다. 왕찬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20년 후 정말로 그의 눈썹이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했고 180일 후 사망했다. 장중경은 이처럼 20년 후의 질병과 그 세부 증상까지 예견했고, 심지어 그 시간까지도 정확히 맞혔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또 각종 질병을 없앨 수 있는 묘방(妙方)을 제공했다. 애석한 것은 환자가 그의 진단을 따르지 않아 결국 의성(醫聖)의 예언을 사실로 입증시켰다는 점이다. 중국 전통의학은 아주 절묘하고 비범하며 천인합일‧음양오행‧신통력 등 여러 가지 현기(玄機)를 담고 있는바, 이는 현대의학이 절대 따라갈 수 없는 것이다. 후세인을 일깨운 《상한론》 서문 장중경은 진단의 원리와 처방뿐 아니라 인생의 중요한 철리(哲理)도 남겨주었다. 상한론 서문에는 “무릇 하늘이 오행을 펼쳐 만물을 운행함에 사람은 오상(五常)을 받아 오장이 있으며, 경(經)‧락(絡)‧부(府)‧유(俞)와 음양이 만나고 통함이 현묘하고 심오해 그 변화를 다 알기 어렵다. 재주가 높고 지식이 빼어나지 않고서야 어찌 그 이치를 탐구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장중경은 또 “괴이하게도 지금 세상의 선비들은 신의(神醫)의 약을 보존하지 않고 의술도 제대로 궁구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위로는 임금과 부모님의 병을 치료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빈천한 이들의 고통을 구제하지 못하며, 그 가운데서 자신의 몸도 보전하고 양생할 줄 모른다. 오직 영화와 권세만을 좇아 권력자에게 빌붙고 명리를 구하기에 급급하다. 말단을 숭상하되 근본에는 소홀하고, 겉은 화려하되 안은 초췌하다. 가죽이 없으면 털이 제대로 붙어 있겠는가?”라고 했다. 장중경은 확실히 성인이다. 그는 의학을 논술할 때도 인간의 도리를 천명했다. 그는 당시 지식층이 의약을 중시하지 않고 의술도 애써 연구하지 않은 채 오히려 영화와 권세를 좇아 권문세가를 우러러보며 명리를 유일하게 중요한 것으로 여김으로써 결국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쇠잔하고 됐다고 지적했다. 가죽이 없는데 털이 어디에 붙겠는가? 이 문제는 오늘날의 중국 사회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중국 공산당의 무신론과 투쟁철학의 작용하에서 사람들은 전통 도덕과 조상들이 남겨준 가르침과 문화, 그리고 기술의 정화(精華)를 포기한 채 앞 다퉈 근본을 버리고 지엽적인 것을 쫓아 위험한 길로 가고 있다. ...캐스퍼 데이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는 독일의 낭만주의 화가다. 그는 ‘운무를 바라보는 방랑자’(Wanderer Above the Sea of Fog)라는 그림으로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프레스코화의 한 부분인 ‘아담의 창조’는 드라마나 문학작품에서 흔히 상징적인 이미지로 언급된다. HBO에서 방영한 공상과학 드라마 ...5. 화폐 및 도량형을 통일하다 전국 시대에는 각국의 문자와 화폐, 도량형이 제각기 달랐다. 제나라와 연나라 등 국가에서는 도폐(刀幣)를 발행했고, 조나라, 위나라, 한나라 등 국가에서는 삽 모양의 지폐가 통용되었으며 진나라와 동주에서는 사각형의 구멍이 뚫린 원형 동전이 유통되었으나 초나라에서는 조개 화폐가 사용되었다. 진시황은 전국적으로 사각형의 구멍이 뚫린 원형 동전을 발행해 사용하도록 하고 거북이 등껍질, 조개, 옥 등으로 만든 6국 각자의 화폐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전국적으로 통일해서 금, 동으로 만든 원형 화폐를 사용하도록 했는데, 그중 금으로 만든 화폐는 상폐(上幣), 동으로 만든 화폐는 하폐였다. 이런 동전들은 2천여 년이 지난 청나라 때까지도 사용되었다. 도량형은 화폐(교환수단)과 함께 국가의 세수와 관련된 중요한 요소다. 도량형의 도(度)는 길이, 양(量)은 용적, 형(衡)은 중량을 가리킨다. 당시 중국은 7개국의 도량형이 제각각이었다. 나라마다 사용하는 길이의 단위와 양을 제는 도구의 크기와 단위도 달라 상품 교역과 세금 부과에 혼선을 피할 수 없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바로 직후 조령을 내려 진나라의 제도를 기준으로 도량형을 통일했다. 또한 길이·부피·무게의 단위를 십진제로 변경한 후 실제 바뀐 도량형을 사용하는지 정기감찰을 실시했다. 또한 관부의 책임 하에 각종 기구를 개선하거나 새로 제작해 전국에 배포, 사용하도록 했다. 수레바퀴 폭을 통일한 ‘거동궤(車同軌)’ 역시 이 같은 노력의 하나였다. 6. 문자를 통일, 후대를 이롭게 하다 ‘문이재도(文以載道)’라는 말처럼 문자는 사람과 신(神) 사이의 소통에 이용된다. 상나라 갑골문 단계에 이르렀을 때 한자는 성숙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그러나 전국 시대에 이르러 각 열국이 오랜 기간 분열된 후 같은 글자를 다르게 발음하는 현상이 늘어나 문자의 형태까지 달라지는 현상이 발생, 사람들 간의 문화적 교류에 지장이 생기고 서로 오해하는 일이 발생했으며 문화 역사를 정확히 기재하는 데도 지장이 있었다. 6국을 멸망시킨 후 진시황은 도량형을 통일하는 한편으로 6국의 옛 문자를 폐지하도록 명령하고 정위(廷尉) 이사(李斯)로 하여금 문자 통일 사업을 담당하도록 했다. 이사는 원래 진나라 자체를 기초로 하여 자형이 일정하고 획수가 간단하며 쓰기 편리한 소전(小篆·진전[秦篆]이라고도 함)체를 표준 문자로 삼아 전국에 보급함으로써 ‘서동문(書同文)’을 실현했다. 소전체는 6국 문자의 우수한 부분을 취해 계승했을 뿐만 아니라 획 수가 간단하다는 특징을 갖추고 있어 보급하기 쉬웠다. 한편 민간에는 소전체보다도 한층 간단한 문자인 예서(隸書)가 유행했는데, 이것이 바로 현대 중국 문자의 전신이다. 문자 통일은 역사 문화가 정확히 보전되도록 함으로써 후대 사람들이 신전 문화와 정법(正法), 정리(正理)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 후손들을 이롭게 하였다. 후세에 ‘만불이 속세에 내려오고, 만법이 하나로 돌아갈(萬佛臨凡·萬法歸一)’때가 오면 후대 사람들은 오해 없이 대법(大法)과 대도(大道)를 얻고 본연의 모습으로 회귀, 인류의 마지막 사명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7. 궁과 왕릉, 천문대를 건설하다 진시황은 인류 역사를 창조하고 중화 문화의 찬란함을 떨치고자 하늘의 궁전을 인간 세계로 옮겨옴으로써 유명한 아방궁(阿房宮)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란과 후세 사람들에 의한 파괴로 인해 끝내 준공되지 못했고 후세에 전해지지도 못했다. 청나라 원요(袁耀) <아방궁도> 12첩, 채색 견본, 높이 194.5cm, 가로폭 60.5cm, 베이징 고궁박물관 소장 | 위키피디아 커먼스한 왕조의 천자와 민중, 문화와 복식, 사회상과 특징은 모두 그 왕조에만 국한되는 것이다. 따라서 수많은 성군과 훌륭한 임금들은 궁전, 왕릉, 지하 궁전들을 지어 당대의 가장 훌륭한 문화를 집대성한 후 지하에 매장, 해당 왕조의 문화적 성취를 보존하고자 했다. 이는 즉 각 왕조 및 각 왕조에 대응되는 천국 문화의 특징을 보존하는 것이기도 했다. 1974년 진시황 여산묘(驪山墓) 동쪽에서 발견된, 총면적 2만여㎡에 달하는 병마용에는 신장 1.8m 가량의 도자기 인형 7천여 개 및 실제 말 크기의 도자기 말 7백여 필, 전차 130승가량이 진열되어 있었다. 인류 문명의 보물이자 문화, 예술, 기술의 정수인 이들 유물은 2천여 년간 지하에 안전하게 잠자고 있었다. 현대인들은 병마용에 들어가 발굴 작업을 시작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천여 년 전 후세인들 및 전 세계를 위해 이처럼 귀중한 유물을 남겨 준 진시황의 업적에 대해 감탄하고 감사하게 되었다. 하늘과 별을 관찰하는 것, 신의 계시를 얻는 것은 인류가 신을 믿고 경배하며 신령의 계시를 얻는 데 있어 가장 적합한 방식이다. 고대 서적에서는 사람들이 하늘과 별을 관찰하고 점성술을 통해 인류의 변화와 길흉화복을 알고 각종 행위와 활동에 있어 참고로 삼았다.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 3대 왕조 모두 별을 관찰하는 천문대를 다수 지었다. 수많은 지상 천문대는 천인합일의 높은 경지에 다다를 수 있도록 하늘 위의 별자리에 대응해 지어졌다. 천문대 가운데 다수는 신령들에게 제사 지내기 위한 용도의 제대(祭臺) 부근에 있었다. 진나라를 건립한 이후 진시황은 천문대를 진나라 전역으로 확대 보급했다. <한서 지리지>에서는 산시(陝西) 위린(榆林)을 ‘정림(楨林)’이라고 일컫고 있는데 ‘정(貞)’은 ‘정복(貞蔔)’, ‘성점(星占)’이라는 뜻으로, ‘정림’이라는 지명은 곧 천문대가 무척 많아 숲을 이룰 정도라는 의미다. 천문대 건설은 진 제국 시기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았다. 진시황은 일년 내내 볼 수 있는 별자리 332개(성수(星宿) 1424개)를 지면 위에 그대로 옮기고 흙을 다진 것으로 외곽선을 만들거나 흙을 깎아 토대(土臺)를 만들어 표시했다. 총 1424개에 달하는 원형 혹은 타원형 모양의 이들 토대는 2만8천㎡의 면적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 진나라 당시 상군(上郡) 지역의 절반에 해당하는 천문대의 분포 범위는 동쪽으로는 황하, 서쪽으로는 장성, 남쪽으로는 수연하(秀延河) 하류, 북쪽으로는 우르도스 고원 동북부에 이르며 천문대의 수량이 무척 많다. 2008년 산시성 위린에서 발견된 진나라 천문대 유적은 그 윤곽이 여와보천(女媧補天·여와가 하늘을 보수하다)의 형상을 띠고 있다. 여와의 머리는 북쪽, 다리는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옆으로 기울인 몸과 높이 치켜든 머리, 팔을 구부려 평평하게 받치고 있는 모습이 그야말로 보천(補天)하는 모습이다. 여와의 신장은 809진리(秦裏·진나라의 길이 단위, 1진리=0.42㎞)로 약 337㎞에 해당하며, 사타구니 폭은 365진리로 약 152㎞다. 여와의 신장은 곤륜산의 거대함을 상징하고, 사타구니 폭은 하늘 전체의 위도를 나타낸다. 키와 신체 각 치수를 합하면 구오지존(九五之尊)이 되는데 이는 여와의 존귀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와 형상을 띠는 천문대는 아래쪽(남쪽)에서부터 위쪽(북쪽)으로 분포하며 총 아홉 가지 부분으로 나뉘는데 부분마다 약간씩 분포된 성수 혹은 성관(星官)은 각각 9층천(天)을 상징, ‘하늘은 9개 층이 있음(天有九層)’을 표현했다. ...1. 천하를 평정하고 영토 확장하다 진시황은 원대한 포부와 큰 뜻을 지닌 성군(聖君)으로서 평생 나랏일을 돌보는 데에 힘썼다. 사서에는 진시황이 ‘낮에는 옥사를 판결하고 밤에는 업무를 보았다(晝判獄而夜理書)’다고 기록해 밤낮없이 부지런히 일했다고 전했다. 기록에 따르면 진시황이 매일 처리한 각종 상소문 간찰은 무게가 130여 근에 달했다고 한다. 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룬 후에도 진시황은 비상한 재능과 원대한 계략을 통해 영토 확장을 계속해나갔고, 새로운 법령과 조치를 빠르게 제정·반포함으로써 중국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통일 황조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진시황이 제정한 황조의 예절은 이후 2천 년간 이어지는 중국 역사에 있어 같은 튼튼한 기틀이 되며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진나라 이전의 하(夏)·상(商)·주(周)는 모두 대국이었다. 중간 규모의 국가를 가리켜 방국(方國) 혹은 제후라고 하고, 촘촘히 분포되어 있던 소규모 국가는 민족명을 따라 이름 붙였다. 이러한 국가들 사이에는 융·병합이 끊임없었다. 하나라 영토는 오늘날의 황하 중류의 남북 양측 일대였다. 상나라는 하나라를 멸망시킨 후 영토를 황하 중하류 양측 일대로 확장했으나 국경을 명확히 설정한 적은 없었다. 서주(西周)는 상나라를 멸망시킨 후 “천하에 왕토 아닌 곳은 없다”(溥(普)天之下,莫非王土)’(<시경·소야·북산>)고 자처했다. 춘추시대 전기 왕실 대부였던 첨환백(詹桓伯)은 “우리(주나라는) 하나라 때 후직(後稷)의 공로로 위(魏)·태(駘)·예(芮)·기(岐)·필(畢) 지방을 서쪽 영토로 삼았고, 무왕이 상나라를 이긴 후 포고(蒲姑)·상(商)·엄(奄) 지방을 동쪽 영토로 삼았고, 파(巴)·복(濮)·초(楚)·등(鄧) 지방을 남쪽 영토로 삼았고, 숙신(肅慎)·연(燕)·박(毫) 지방을 북쪽 영토로 삼았다”(<좌전·소공9년>)고 말했다. 주나라 왕실은 이러한 범위 내에서조차 통일을 이루지 못했던 관계로, 왕실은 다만 방기(邦畿) 이내의 구역만을 점거했고 이외에는 모두 크고 작은 제후국들로서 독립 혹은 반독립 상태를 유지했다. 춘추시대 왕실이 쇠퇴함에 따라 대국들이 서로 패권을 다투기 시작했다.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7웅이 서로 다투니 통일을 논할 상황이 아니었다. 이러한 영토 판도는 진시황 당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본질적인 변화를 나타냈다. 진시황은 6국을 멸망시킨 이후에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초나라를 멸망시킨 군사통수 왕전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동남쪽으로 진군하도록 했다. 동월(東越)이 투항한 이후 그 영토를 회계군(會稽郡·오늘날의 장쑤성 쑤저우)으로 편입시켰다. 민월(閩越)이 투항한 이후에는 그 영토에 민중군(閩中郡·오늘날의 푸젠성 푸저우)을 세웠다. 이후 장군 도휴(屠睢) 등을 보내 영남(嶺南) 지방에 진군, 남월 북구에 남해(南海·오늘날의 광둥성 광저우), 계림(桂林, 오늘날의 광시성 구이핑), 상(象, 오늘날의 충쭤(崇左)) 3군을 설치했다. 또한 상안(常頞)을 서남이(西南夷)로 보내 오척도(五尺道)를 열었는데, 오척도는 오늘날의 쓰촨성 이빈(宜賓) 남쪽에서부터 윈난성 취징(曲靖)을 포괄했다. 진시황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중원 남북의 영토 대통일을 이루어냈다. 진나라 영토는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조선에 미쳤으며, 서쪽으로는 임조(臨洮)와 강중(羌中)에 다다랐고 남쪽으로는 북향호(北向戶, 오늘날의 베트남 중부), 북쪽으로는 황하를 요새 삼아 음산(陰山)에서 요동까지 이르렀다.”(<사기 진시황본기>) 이는 서주 시대 영토에 비해 최소 5배 이상 확대된 것으로, 현대 중국의 영토 판도에 있어 기틀이 되었으며 중화 문화가 보다 많은 종족들과 지역까지 포괄하도록 하였다. 기원전 770년부터 기원전 221년까지 총 549년간 지속된 춘추전국시대 동안 제후국들 간에는 혼전이 끊이지 않았으며 백성들이 전란을 피하느라 갈 곳 없이 이곳저곳 떠돌아다닌 탓에 경작지가 대량으로 황폐해지는 등 농업이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중원 각지에서 전쟁을 벌이느라 북방을 신경 쓸 여력이 없던 틈을 타 남쪽으로 진격해 온 흉노족은 진나라, 조나라, 연나라 3국의 북쪽 변경 지대를 공략, 주변 지역의 백성들을 괴롭히고 화하 민족의 자손들에게 경제 및 생활상의 각종 재난을 안겨주었다. 진시황 32년(기원전 215년), 명장 몽염(蒙恬)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북진, 흉노족을 공격하여 하남(河南, 오늘날의 내몽고 이커자오멍(伊克昭盟))을 수복하고 34현을 설치했다. 그 후 북쪽으로 황하를 건너 음산을 기반으로 옛 진나라, 조나라, 연나라의 장성을 하나로 이었다. 이렇게 연결된 장성은 서쪽으로는 임조(오늘날의 간쑤성 민(岷)현), 동쪽으로는 압록강까지 약 1만 리에 달했으며 북방의 흉노족을 방어하는 용도로 쓰였으니 이것이 바로 유명한 만리장성이다. 흉노족의 위협을 제거한 직후 진시황은 곧바로 공격 방향을 전환, 월족(越族) 거주 지역을 굴복시켜 대거 개발하고자 했다. 그는 50만 명에 달하는 인구를 월족 지역, 월인 잡거 지역으로 이주시킴으로써 중화 문화를 주변 지역과 그 거주인들에게 전파시켰다. 진시황 재위 기간의 영토는 전국시대의 지도를 기준으로 볼 때 전국 7웅의 세력 범위의 거의 2배에 달한다. 진시황은 군현을 설치해 정복한 토지에 대한 관리와 제도 수립에 힘썼는데 이는 통일한 토지에 대한 통치를 안정시키기 위함이었다. 후세 사람들은 진시황과 한 무제의 공이 가장 크다고 평가하는데 이는 진시황의 역사적 업적이 한 무제와 나란히 평가될 정도라는 의미다. 2. 황제 아래 3공과 9경을 두다 황제를 국가의 원수로 삼다 : 진시황은 왕(王)이라는 호칭을 폐지하고 황제(皇帝)로 이를 대신했는데 이는 역사를 새로 연 위대한 업적이다. 옛날에는 삼황과 오제만 있었을 뿐 황제라는 칭호는 존재하지 않았다. 황제는 이미 옛 제도상의 원주민 중 대종(大宗)을 넘어선 지고 무상의 국군(國君)이었다. 이에 걸맞도록 황후 역시 옛 제도상 국왕의 여러 비빈 중 정실에 불과했던 존재에서 6궁을 관장하는 천하의 어머니 격인 존재로 탈바꿈했다. 황태자 또한 더 이상 옛 제도상 원주민 가운데 종자(宗子)가 아니라 법률상 황위 계승자인 저군(儲君)이 되었다. 황제는 군(君)과 왕(王)의 위에 위치한 존재로, 군과 왕에 대한 임명권을 가졌다. 황권은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었기에 황제는 인간 세상에서 가장 높은 존재였다. 진시황은 2천여 년에 걸친 선진(先秦)시기를 종결시킨 동시에 이후 2천여 년의 역사를 개창함으로써 이번 인류의 중화 역사상 최초의 황제가 되었다. ...진시황은 천시(天時)·지리(地理)를 얻어 순식간에 중국을 통일했고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끝냈다. 이 시기의 역사는 언뜻 복잡하고 무질서해 보이지만 신(神)께서는 전쟁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정의를 지키고 하늘을 경외하며 분쟁을 종결짓도록 가르치셨다. 동시에 진시황의 천하통일로 혼란이 일단락됐다는 사실은 ‘하늘의 뜻은 거스를 수 없다’는 이치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제2장 진시황, 천하를 통일하다 1. 진나라 6대에 걸쳐 부국강병 달성 기원전 361년 왕위를 승계받은 진나라 효공(孝公)이 적극적으로 현인을 찾아 나서니 순식간에 천하 인재들이 서쪽으로 몰려들었다. 진나라에서 등용된 승상과 주요 책사들 가운데는 범수(範睢), 여불위, 이사(李斯) 등 다른 제후국 출신이 많았다. 이들은 본국에서는 중용되지 못했으나 진나라에 와서 주요한 재상이나 고위 관리가 됐다. 전국시대 중기, 두 강국인 진나라와 제나라는 동서로 대치하고 있었는데 진나라의 군사력은 당대 최강이었다. 이러한 대치상태에 강한 불안감을 느낀 각국은 소진(蘇秦)이 제시한 합종전략을 받아들여 서로 연합해서 진나라에 대항했다. 진나라는 장의(張儀)가 주장한 연횡전략으로 연맹에 맞섰다. 기원전 318년부터 269년까지 진나라는 주변 6개국과 정복전쟁을 벌이면서 나날이 강성해져 갔다. 6국은 여러 차례 합동으로 진나라를 공격했으나 진나라의 기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진나라는 이미 6대에 걸친 왕들의 노력을 통해 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춘 상태였다. 이는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탄탄한 기반이 됐다. 2. 천하통일의 예언과 진시황의 탄생 진시황은 기원전 259년 책력 정월 조나라 수도 한단(邯鄲)에서 태어났다. <사기·진시황본기>에서는 “태어났을 때 이름은 정(政)이고 성은 조(趙)씨였다”고 기록했고 <동주열국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태어나던 때 온 방 안에 붉은빛이 가득하고 온갖 새들이 날아올랐다. 태어난 아이를 보니 코는 오똑하고 눈은 가늘고 길며, 이마는 네모지고 눈동자가 두 개였으며 입안에는 치아가 여러 개 있었다. 등에는 용비늘이 돋아 있었고 울음소리가 아주 커서 길 가는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천하를 통일할 영웅이 진나라에서 탄생할 것이라는 예언은 예전부터 있었다. 진나라 사람들은 문공 4년(기원전 762년)에 견하(汧河)와 위수가 만나는 지점에 도시를 건설하고 정주하기 시작했다. <사기·봉선서(封禪書)>에는 이런 기록이 전해졌다. “어느 날 밤, 문공은 꿈에서 누런 뱀을 보았는데 그 몸은 하늘에서 땅까지 이어져 있었고 입은 부현(鄜縣·오늘날의 산시성 옌안 부근) 일대까지 뻗어 있었다. 문공이 태사 돈(敦)에게 물으니 돈은 상제께서 보여주시는 징조라며 제사를 지낼 것을 권했다. 이에 문공은 부현에 제단(鄜畤)을 세우고 소·양·돼지를 바쳐 백제(白帝)께 제사 지냈다.” <사기·봉선서>에는 문공 19년 진보(陳寶)를 얻은 일에 대해서도 기록했다. “제단을 세운 지 9년 되던 해, 문공은 옥석을 하나 얻게 되어 진창산(陳倉山) 북쪽의 산비탈에 성을 짓고 그 옥석을 모셔 제사를 지냈다. 옥석의 신령은 어떤 때는 한 해가 다 가도록 오지 않았고 어떤 때는 한 해에 여러 번 오기도 했다. 신령은 항상 밤에만 왔는데 마치 유성처럼 광채를 발했다. 동남쪽에서 사성(祠城)으로 들어왔는데 모습은 수탉 같았으며 밤중에 큰 소리를 내니 들꿩들이 놀라 울었다. 짐승을 한 마리 바쳐 제사 지내고 옥석을 가리켜 진보라고 했다.” <사기·봉선서>에는 진보에 대한 주석도 달렸는데 “질감이 돌 같고 허파를 닮았다”, “옥으로 된 닭 혹은 돌으로 된 닭 같았다”고 적었다. 진보에 지내는 제사를 보계신사(寶雞神祠)라고도 불렀는데, 오늘날의 산시성 바오지(寶雞)시 이름의 유래가 됐다. 또한 진보를 얻는 자는 패왕이 될 운명이었다. <사기·봉선서>에서는 “진나라 문공은 사냥을 나갔다가 흑룡을 얻었는데 이는 그 수덕(水德·오행 중 물에 상응하는 왕자의 덕)의 길상물이었다”고 했다. 진나라가 수덕에 힘입어 불(火), 즉 주나라를 대체하리라는 것을 암시한 것이었다. ...백년 전쟁으로 도탄에 빠졌던 백성들이 순식간에 태평천하 얻었고 백가(百家) 난립으로 정도가 흐리더니 단숨에 재가 되어 사라졌네 부흥을 고대하던 대업이 시작되니 모든 분야의 정통이 확립됐나니 백세(百世)의 기반 닦아 기본을 바로 세운 진시황은 대대로 찬양받으리 百年征戰, 生靈塗炭, 一朝得太平. 百家亂世, 惑擾正道, 一炬化灰揚. 百廢待興,, 大業初始, 萬端啟正統. 百世築基, 本正源清, 萬代讚始皇!. 제1장 혼란한 분쟁의 시기 신전(神傳) 문화 지구상의 어떤 민족이든 모두 역사를 거쳐오면서 신령의 존재와 인과응보의 법칙을 굳게 믿어왔다. 그렇기에 나쁜 일을 하지 않도록 자발적으로 자신을 통제하고 사회의 도덕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류의 도덕성이 점차 악화됨에 따라 신에 대한 신앙도 줄어들었고, 신 역시 사람들에게 기적을 잘 보여주지 않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에 노자가 세상에 나와 도를 전파했으며 다른 국가에서는 석가모니와 예수가 출현해 이번 인류에게 부처와 도, 신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수련을 통해 인간의 본연으로 되돌아가고 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를 가르치는 한편 인류의 도덕성을 회복시켰다. 이러한 시기가 지나간 이후 춘추 오패가 앞다투어 흥기, 전국 칠웅이 서로 패권을 다투더니 진시황이 6국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했다. 이는 ‘무력으로 천하를 제패하고 왕이 나라를 다스린다’는 이치가 발현된 것이기도 했다. 1. 도가와 유가의 출현, 백가의 어지러운 논쟁 수많은 나라들이 서로 다투며 세상을 어지럽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했던 춘추전국시대. 창세주 및 여러 신은 선각자를 조용히 인간 세상으로 내려보냈으니 그 분이 바로 노자다. 성은 이 씨, 이름은 이(耳), 자는 담(聃)이었던 노자는 법과 도를 설파하는 한편 도가 수련법을 담은 경전인 <도덕경>을 남겼다. 노자는 인간 세상에 내려와 사람들을 가르치며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가장 궁극적인 목표는 본연으로 회귀하는 것(返本歸眞)”임을 알려 주었다. 노자가 쓴 <도덕경>은 5천 자라는 적은 분량 속에 ‘도생만물(道生萬物)’이라는 도리를 여래 부처의 차원에서 설명했다. 또한 우주의 특정한 공간 속에서 운용되는 상생상극이라는 원리를 해설, 수련자들에게 인간 세상에서 무위의 경지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도를 얻고 성불할 수 있으며 결국 신통을 얻어 무불위(無不為)에 이른다고 설명했다. 형태가 없는 큰 도는 무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무불위로서, 도를 따르는 자는 흥하지만 도를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 노자는 왕도와 유가사상 그리고 용병의 묘를 몇 자 되지 않는 언어 속에 모두 담아냈다. 명나라 <공자성적도(孔子聖跡圖)> 화책 중 <문례노담도(問禮老聃圖)> | ...수천 년 중화역사를 살펴보면, 창세주께서는 성황(聖皇), 진인(真人), 명신(名臣), 전신(戰神), 시선(詩仙) 등을 통해 화하(華夏)민족에게 살아갈 터전을 열어 주고 도덕 기준을 정해 줬으며 사상의 깊이를 풍부하게 해주고 전통문화의 기초를 닦아 주셨다. 또 직접 나라를 세우고 체제를 수립했을 뿐만 아니라 누대로 천국 중생들을 인간세상에 내려보내 연을 맺게 함으로써 중화 세계에 다양한 천국 문화가 전파되고 재해석되게 해 신전(神傳) 문화를 보다 풍부하게 하셨다. 중토(中土) 신주(神州)가 비록 넓다고는 하나 우주 곳곳의 천조(天朝) 중생들을 이곳에 모두 모이게 하기에는 역부족이고, 오천 년 화하민족 역사가 비록 길다고는 하나 모든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을 한 세대 안에 담아낼 방도는 없다. 그런 이유로 한 세대의 천자, 민중, 문화, 복식, 풍속 그리고 특징과 의미들이 한데 모여 찬란히 빛나고 사방 곳곳으로 퍼져나가 온 세상이 우러러보니 이로써 눈부시고도 방대한 오천 년 신전 문화가 완성되었다. 이것이 바로 신전 문화, 즉 전통 혹은 정통 중화문화다. 지구상의 모든 민족 가운데 조상을 섬기지 않는 민족은 없으며, 어느 국가라도 자신들만의 문화를 소중히 여기고 추앙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하늘의 점지를 받고 신의 선택을 받아 천혜의 자원을 갖추고 유사 이래 역사 기록이 끊임없이 이어져 온 유구한 오천 년 중화문화만은 유독 지난 수십 년간 신주(神州) 본토에서 비방과 악의적인 묘사, 자의적인 왜곡, 모욕을 받아왔으며 근본을 망각한 이들에 의해 화하민족의 생명의 근원이 훼손되어 왔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존경과 경외, 그리고 뿌리를 되찾겠다는 의지를 갖고 오천 년 눈부신 신전 문화에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이십여 인물을 조심스럽게 골라 ‘천고영웅인물’ 시리즈를 완성했다. 오천 년 눈부신 신전문화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들어가며 4천여 년 전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대홍수는 인류를 거의 궤멸 상태로 몰고 갔다. 창세주께서는 중국 땅에 요, 순, 우 세 성군을 보내 차례대로 역사의 새로운 기원을 열도록 계획하셨다. 창세주께서는 줄곧 화하민족의 자손들을 보우하셨으며, 반신(半神) 문화 시기였던 이 당시에는 수많은 신선과 진인들이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어울리며 사람들에게 각종 문화, 기예 등을 전수한 한편 인류의 도덕 및 사상적 깊이를 형성, 인류로 하여금 수련을 통해 참된 인간의 본원으로 돌아가도록 지도했다. 이 시기 사람들의 도덕 수준은 매우 높았으며 수련을 통해 신선이 된 사람들이 많았다. 화하민족의 자손들은 요, 순, 우 세 성군 재위 이후에도 하나라, 상나라 두 왕조를 겪었으며 천여 년의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주나라 무왕이 주나라를 건국한 이후로 서주, 동주, 진나라에 이르기까지 다시 800년 동안 화하 선민(先民)들은 수많은 혼란과 분쟁 그리고 풍부한 문화를 향유하는 중요한 역사적 시기를 보냈다. 특히 춘추전국시대와 진나라 건국 초기에는 춘추 오패(五霸)와 전국 칠웅(七雄) 그리고 진나라의 천하 통일이라는 현상들이 ‘무력으로 천하를 제패하고 왕이 나라를 다스린다[兵征天下, 王者治國]’는 이치가 인간 세상에서 문화가 전파되는 방법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또 도가와 유가 등 백가가 나타나 반본귀진(返本歸眞)의 의미 즉 수련하여 도를 얻는 것이 사람의 근본 목적임을 알려줬다. 그러나 ‘생겨나고 머무르고 나빠지고 사라진다(成住壞滅)’는 우주법칙에 따라 인류의 도덕성 역시 점점 내리막길을 걸었다. 당시 사람들의 도덕성은 삼황오제 시기에 훨씬 못 미치는 상태였다. 인류 사회가 도덕적인 위기 상태에 처할 때마다 창세주께서는 신(神)과 부처로 하여금 인간 세상에 내려가 법과 도를 전파, 인류의 도덕성을 회복하고 사람들을 선한 방향으로 이끌어 본연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한편 인연이 닿는 이들을 천국으로 돌아가게 하셨다. 함곡관(函谷關)을 지나 서쪽 방향으로 떠나 종적이 묘연해지기 전 노자는 5천자 분량의 진언을 남겼는데, 이번 인류에게 도가 수련의 규범을 정해준 것이었다. 공자는 여러 나라를 주유하며 중용지도(中庸之道)에 대해 설파, 일천 년 중국 유가에서 말하는 사람된 도리를 재정의 했다. 그러나 음양선악은 상생상극하는 법, 전국시대 말에 이르러 제자백가가 어지러이 일어나 세상을 혼란케 하니 정도(正道)가 흐려지고 사상이 혼란해진 데다 수백 년간 계속된 전란으로 민심이 흉흉해졌다. 진나라 왕 영정(嬴政·진시황)은 천시, 지리, 인화를 모두 얻어 일순간에 전란을 일소했으니 부흥을 고대하던 여러 가지 대업들을 처리하는 동시에 천하를 통일, 기본이 바로 서게 함으로써 화하 역사에 바른길을 닦고 훌륭한 기초를 다지는 위대한 공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