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정치적 ‘올바름’?…PC는 어떻게 우리를 침묵시키는가

황효정
2024년 04월 22일 오후 10:50 업데이트: 2024년 04월 23일 오전 10:19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지구물리학을 가르치는 도리언 애벗 교수는 자연과학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석학이다.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은 과학자들에게 큰 영예인 존 칼슨 강연에 그런 애벗 교수를 연사로 초청했다가 취소했다. 애벗 교수가 ‘모든 학생을 똑같이 대해야 한다’고 발언하면서다.

애벗 교수는 대학 지원자들을 인종이나 성별이 아닌 오로지 ‘학자로서 얼마나 유망한가’만 따져 선별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러자 소셜미디어(SNS)를 중심으로 애벗 교수에 대한 일종의 인민재판이 집행됐다.

정치색은 과학자라는 애벗 교수의 직업과 전혀 무관하다. 애벗 교수는 강연에서 다른 행성에서의 생명체 존재 여부를 다룰 예정이었다. 그러나 애벗 교수는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는 이유로 과학자로서 처벌을 받았다.

애벗 교수는 자신의 의견이 진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물론 자신과 다르게 볼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어쩌다 과학자가 자신의 정치적 견해 때문에 견책을 당하는 지경까지 왔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애벗 교수를 인민재판에 회부한 이들은 소위 ‘좌파’였다. 현대 미국 사회에도 노예제가 잔존해 있고 차별이 만연하다며 대학 입학생 선발에서 소수자에게 유리한 출발점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었다.

애벗 교수는 “자격만을 보지 않고 자동으로 정치화되는 모든 선발 과정”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러면 누가 최고의 자격을 갖췄느냐는 중시되지 않아요. 여성이 나을까, 아니면 차라리 라틴계가 나을까만 따지게 됩니다.”

애벗 교수의 동료 중에는 자기 자신이 공산주의자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교수들이 있다. “마르크스 사진을 자신의 웹사이트 배경 화면으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고요. (…)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이 비윤리적 정치 견해를 가진 것 같으니 그의 과학 작업을 취소해야 한다고 절대 말하지 않을 겁니다.”

기사의 이해를 돕는 자료 사진.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의 브루클린 센터에서 시위대가 경찰차에 올라타 BLM(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깃발을 흔들고 있다.|연합뉴스

미국에서 수정헌법 제1조가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가 위기에 빠졌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PC)이라는 잣대 때문이다.

정치적 올바름을 지킨다는 미명 아래 진보 이데올로기가 절대적 선으로 자리 잡았으며 사회 곳곳에서 표현의 자유를 검열하는 도구로 작동하고 있다. 단어 하나만 잘못 말해도 “후진적”이라며 격렬한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물론, 직장에서 쫓겨나는 등 커리어가 끝장나고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조차 없게 타격받는 사례가 부지기수로 급증하고 있다.

‘깨어 있다’고 자부하는 목소리 큰 소수가 모든 정의와 진리를 독점하고 도덕적 위계를 매긴다. 그리고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고 보는 의견을 억압하기 위해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부으며 표현의 자유를 위협한다.

이러한 극단적 흐름은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결과적으로 이는 자유민주주의에 위협을 불러온다. 평등과 자유를 자청하는 세력이 모순적이게도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인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기이한 현상이다.

독일 언론 ‘슈피겔’의 워싱턴 특파원 르네 피스터는 전체 미국인 중 약 절반이 ‘정치적 분위기 때문에 내 신념을 솔직하게 말할 수 없다’고 답한 여론조사 결과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피스터는 이른바 ‘잘못된 단어’를 사용하며 이견을 표현하는 이들을 공격하는 일에 사활을 거는 좌파 진영의 독선이 학교, 기업, 공공기관, 언론, 심지어는 가장 자유로워야 할 문화예술계 등 미국의 모든 곳에 광범위하게 스며들었다고 진단한다.

이어 진보 세력이 더 나은 주장을 펼치려 애쓰는 대신 자신들이 ‘정의’라고 부르는 독단적인 신념에 갇혀 자신들의 생각·행동 체계를 사회 전반에 강요함으로써 자유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고 고발한다. 사방의 모든 표현들을 ‘잘못된 단어’로 간주하면서 사회에서 필요한 논의를 위축시킨다는 것이다.

자신들만 옳고 이견은 틀렸다는 좌파의 목소리에 그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마음속에 있는 진심을 말하고 공격받기보다 침묵을 택했다. 사실상 침묵을 강요당한 대중 사이에서는 분노가 쌓였다.

합리적인 정치문화는 실종됐고 미국 사회는 극단적 진보와 극우 보수라는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세계로 쪼개졌다. 양극화된 두 세계는 상대 진영에 서로 분노라는 연료를 공급하며 더 나은 사회로 발전해 나아가기는커녕 사회를 극단적 분열과 갈등의 장으로 전락시켰다. 이런 악순환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그것을 분노의 연료로 사용하지 않는 쿨하고 여유로운 자유 개념이 이 나라에서 사라지고 있다.” 피스터의 지적이다.

우리나라라고 다를까? 미국 사회의 이 같은 모습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사회가 극단적 분열과 갈등으로 얼룩져 가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은 미국을 닮아가고 있다. 르네 피스터의 저서 ‘잘못된 단어’가 보내는 경고 메시지는 한국의 독자에게도 유효하다.

잘못된 단어|문예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