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맹목적인 중국 부역자 도려내야 건전한 한중 관계 만들 수 있어”

최창근
2024년 04월 25일 오후 1:54 업데이트: 2024년 05월 4일 오전 10:53

중국부역자들출간한 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서해를 가운데 두고 마주한 ‘중국’은 지리적으로 인접한 불변의 이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중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한국 사회의 영원한 난제이기도 하다. 일각에서는 역사상 유대관계, 경제·무역관계를 들어 “중국과 가까이 지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대 진영에서는 “공산주의 중국은 자유 대한민국과 함께할 수 없다.”며 반박한다. 이 속에서 중국, 중국 공산당 체제를 바라보는 색다른 시각을 제시하는 중국 연구자가 눈길을 끈다. 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서명수 대표는 언론인 출신 중국 연구자이다. 고려대 불어불문학과 졸업 후 동(同) 대학원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매일신문에 입사하여 24년간 취재 현장에서 일했다. 중국 현지 취재를 계기로 중국과 인연을 맺었고 중국사회과학원 사회학연구소 고급진수반에서 연수했다. 이후 중국 관련 저술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저서로는 ‘인민복을 벗은 라오바이싱’ ‘허난 우리는 요괴가 아니다’ ‘산시 석탄국수’ ‘후난 마오로드’ ‘제국의 초상 닝샤’ ‘지금 차이나 신중국 사용설명서’ ‘충칭의 붉은 봄’ 등이 있다. 한국교육방송공사(EBS) ‘세계테마기행’ 중국편에 4회 출연하기도 했다.

서명수 대표는 최근 ‘중국부역자들’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책에서 그는 “한국 사회 전반에 친중, 종중을 넘어 이적 행위를 하는 부역자들이 다수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대학, 대학원에서 불문학을 전공하셨는데 중국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1990년부터 매일신문 기자로 일했습니다. 1998년 통일부를 출입했고요. 그해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남북 차관급 회담을 개최했습니다. 당시 정세현 한국 통일부 차관과 전금철 북한 정무원 책임참사가 만났습니다. 김영삼 정부 시절 김일성 북한 주석 사망 후 냉랭해졌던 남북한 관계 해빙(解氷)의 첫 결실이었습니다. 통일부 출입 기자로서 회담 취재를 위해 베이징을 방문했습니다. 회담장이던 중국국제무역센터 주변, 베이징 시내를 둘러보았습니다. 중국과 본격적인 인연의 시작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서명수 대표는 1990년대 당시 베이징 민중의 삶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전후로 현대화된 오늘날 베이징 시내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는 설명이다.

“중국국제무역센터를 조금 벗어난 베이징 후퉁(胡同·뒷골목)은 1970년대 한국을 연상케 할 정도로 낙후돼 있었습니다. ‘베이징’이라는 중국 수도라는 같은 공간에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것을 보고서 ‘중국’의 실체가 새삼 궁금해졌습니다. 중국어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요. 귀국하자마자 중국어 학습을 시작했고 중국에 다시 가서 직접 현장을 체험하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중국어를 공부하며 중국행을 꿈꾸던 서명수 대표에게 기회가 왔다. 삼성언론재단 해외 연수자로 선발된 것이다. “당시 절대다수 기자는 미국 연수를 택했지만 저는 중국행을 결정했습니다. 중국사회과학원(中國社會科學院) 고급진수생(高級進修生) 과정에 등록하여 본격적인 중국, 중국어 학습을 시작했습니다. 중국사회과학원은 국무원 직속 국립연구기관입니다. 한국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도 주도했습니다. 연수 시 개혁 개방 정책 시행 후 중국 사회, 인민, 사회 구조 변화에 관심을 쏟았습니다.”

중국 연수 후 서명수 대표는 중국 관련 저술에 매진했다. 그 결과물이 ‘인민복을 벗은 라오바이싱’ ‘허난 우리는 요괴가 아니다’ ‘산시 석탄국수’ ‘후난 마오로드’ 등이다. 해당 저서는 중화권에서 ‘라오바이싱(老百姓)’이라 칭하는 민중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라오바이싱(老百姓)이라 불리는 민중의 삶에 관심이 많아 보입니다. 특별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리식 표기로 ‘노백성(老百姓)’인 라오바이싱에서 ‘라오(老)’는 다양한 의미를 지닙니다. ‘늙었다’는 의미보다는 ‘오래된’이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대표적인 예로 오래된 친구라는 뜻의 ‘라오펑유(老朋友)’가 있죠. 라오바이싱은 ‘예전부터 백성으로 살아온 사람’ 의미에 가깝습니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인민’ ‘민중’을 통칭합니다. 1949년 성립한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 공산당원, 군인, 라오바이싱 등 3개 계층으로 구성된 사회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서명수 대표는 이른바 신(新)중국 성립 이전 라오바이싱의 삶과 이후의 삶은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다고 했다. “사회주의 공화국 성립 후 중국에서 1950년대 대약진운동과 대기근, 문화대혁명(1966~1976), 1989년 6·4 톈안먼 사건 등 격동기를 라오바이싱은 몸소 겪었습니다. 이들의 삶의 현장으로 걸어 들어가서 중국의 진짜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일련의 저서들은 그 결과물이고요.”

1949년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여 이른바 신중국을 성립한 중화인민공화국이 민중의 삶에는 어떠한 영향을 끼쳤다고 보나요? 역대 봉건 왕조와 비교해 준다면요.

“중국사의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는 1949년 마오쩌둥의 중국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여 본토를 장악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신중국은 이전의 중국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유물론(唯物論)·무신론(無神論)에 기반한 사회주의 공화국이 성립했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중국인의 철학이 근본적으로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서명수 대표는 5000년 중국사는 한족(漢族)이 아닌 이민족(異民族)의 역사였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오늘날 ‘차이나(中國·China)’라는 국호의 연원은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를 종식시키고 중원을 통일한 진(秦)입니다. 진은 ‘서쪽 오랑캐’라고 멸시받던 서융(西戎)에 연원합니다. 통일왕조 진은 단명하고 한(漢)이 성립했고요. 오늘날 한족(漢族)의 연원이죠. 이후 중원(中元)이라 칭하는 대륙을 지배한 봉건왕조는 이민족 왕조가 주를 이룹니다. 한 멸망 후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무대가 된 삼국시대를 거쳐 새로운 통일왕조 진(晉)이 성립했지만 얼마 가지 못해 오호십육국시대(五胡十六國時代)를 맞이합니다. 흉노(匈奴), 갈(羯), 선비(鮮卑), 강(羌), 저(氐) 등 오호(五胡)로 불리던 북방 이민족들이 중원의 패권을 다퉜습니다. 이후 다시금 중국을 통일한 수(隋)·당(唐) 왕조는 선비족과 한족이 융합한 호한(胡漢)융합 왕조였습니다. 당 멸망 후 오대십국(五代十國時代)의 분열기를 종식시킨 한족 왕조 송(宋)은 중원을 온전히 영유하지 못 했습니다. 거란(契丹)족의 요(遼), 여진(女眞)족의 금(金), 탕구트(黨)족의 서하(西夏) 등의 침략에 시달렸고요. 금에 의해 북송(北宋)은 멸망하고 몽골족이 남송(南宋)마저 멸망시킨 후 몽골족 정복왕조 원(元)이 중국 전역을 지배합니다. 원 멸망 후 한족 왕조 명(明)이 성립하지만 다시금 만주(滿洲)족의 청(淸)이 중국을 통치합니다. 지난 세월 동안 한족은 피지배자였고 이민족이 지배해온 역사를 침소봉대(針小棒大)하거나 견강부회(牽强附會)하며 ‘중국사=한족사’로 포장해 온 것입니다.”

그는 ‘인민공화국’을 표방한 신중국 성립 이후에도 통치 체제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고 했다. “마오쩌둥의 신중국은 봉건왕조 시대 청산을 주창했지만 중국 공산당이라는 새로운 봉건왕조 지배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마오쩌둥 집권기(1949~1976)는 중국 공산당이 아닌 마오쩌둥이라는 신황제 1인 독재 시대였습니다. 이후 덩샤오핑 집권기 이후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의 집단 지배체제가 이어지다 다시금 ‘시(習)황제’로 불리는 시진핑 독재 시대가 열렸습니다.”

초기 중국 민중의 삶에 초점을 맞추었던 서명수 대표는 중국 공산당 최고 지도자들의 삶을 조명하기도 했다. ‘후난 마오로드’ ‘충칭의 붉은 봄’ 등의 저서가 그 결과물이다.

마오쩌둥, 보시라이 등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의 삶을 추적했습니다. 보시라이는 마오쩌둥의 계승자를 자처했었는데 두 사람이 현대 중국사에 끼친 의의는 무엇이라 보시나요?

서명수 대표는 “난제(難題)이자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라며 대답을 이어갔다. “마오쩌둥의 공과(功過)는 역사 평가가 마무리됐습니다. 중국 공산당 관점에서 마오쩌둥은 혁명을 성공시키고 사회주의 신중국을 건설한 아버지 같은 존재입니다. 대표적인 공이라 할 수 있죠. 다만 대약진운동 실패로 인한 리더십 위기 속에서 권력 재탈환을 위하여 문화대혁명을 발동하여 20세기 최대 비극을 조장한 주인공 역시 마오쩌둥입니다. 문화대혁명은 중국인들이 상기하고 싶어하지 않는 깊은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1976년 마오쩌둥 사망 후 중국 공산당은 1981년 11기 6전회에서 ‘건국 이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를 통과시켰다. 문화대혁명을 정리하고 평가하기 위한 결의에서 마오쩌둥의 공을 7, 과를 3으로 평가했다. 이른바 ‘7 대 3 결의’이다.

“보시라이 전 충칭시 중국 공산당 서기의 행적을 다룬 다큐멘터리 소설 ‘충칭의 붉은 봄’의 여정을 따라가다보면 보시라이가 충칭에서 행한 이른바 ‘창홍타흑(唱紅打黑)’이 좌파 혁명의 선전선동 구실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충칭을 기반으로 최고권력자를 꿈꾸던 보시라이는 아내 구카이라이의 내연남 살해 등으로 정치적 몰락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쿠데타, 부패 혐의 등으로 재판을 받고 수감됐고요. 다만 그가 내세웠던 ‘붉은혁명’은 경쟁자 시진핑이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서명수 대표는 최근 ‘중국 부역자들’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책에서 한국 내 일부 인사들이 친중(親中), 종중(從中) 행태를 넘어 부역자(附逆者)가 됐다고 비판했다. 저명 인사 실명 비판도 빠지지 않는다.

책을 쓰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중국을 오랫동안 공부하고 여행도 했습니다. ‘중국’을 좋아하게 됐고요. 그러다 어느 순간 한국 사회에서 중국 이미지가 급격하게 나빠졌고 중국을 대하는 인식도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반중(反中) 정서라고 하기보다는 무관심에 가깝다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서명수 대표는 문재인 정부 출범 후 한중 관계가 급변했다고도 했다. 중국은 한국을 노골적으로 무시했고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 관계자는 어쩔 줄 몰라했다는 취지이다.

“2017년 12월, 중국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베이징대학에서 ‘중국몽을 함께하고 싶다’는 취지의 연설을 했습니다. 발언을 듣고서 피가 거꾸로 솟구침을 느꼈습니다. ‘한국 대통령이 중국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책에서 고 리영희 교수, 김용옥 교수, 문재인 전 대통령 등을 대표적인 친중 부역자로 지목했습니다.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는 대학 시절 읽은 책들입니다. 나름 좋은 기억을 갖고 있죠. 중국을 알면 알수록 리영희 교수의 ‘중국관’이 잘못됐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특히 문화대혁명(1966~1976)을 ‘인류 역사상 최대의 인간성 개조 실험’이라며 칭송한 리영희 교수의 오류가 지금껏 단 한 번도 고쳐진 적이 없었습니다. 리영희 교수 스스로도 오류를 공식 인정한 적도 없습니다.”

고 리영희 교수는 문화대혁명을 ‘이때까지의 자본과 물질 중심의 세계에서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보려는 세계관으로의 전환’이라고 하거나 ‘물질주의에서 정신적 실존적 인간의 본연을 고민하는 단계로 세계가 변화한다.’는 식으로 표현했다. 그는 마오이즘(마오쩌둥주의)을 인민주의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는 1976년 발생한 중국 탕산(唐山) 대지진과 미국 뉴욕 정전 사태를 비교하며 “탐욕에 물들어 약탈이나 하는 미국인들보다 중국 인민들의 시민 수준이 높다.”며 사회주의와 마오쩌둥 문화대혁명 체제의 우수성이라고 칭송했다. 자본주의의 미개함을 비교하며 인간주의를 앞세운 마오쩌둥 체제가 우월하다고 하는 한편 문화대혁명 체제가 20년은 더 갈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자서전 ‘문재인의 운명’에도 리영희 교수를 언급한 대목이 있습니다. 리영희 교수는 한국 운동권의 대부이자 불가침의 성역인 셈입니다. 문제는 그가 오도(誤導)한 ‘중국 서사’가 한국 운동권을 시작으로 하여 지식인 사회를 오염시켰다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이를 어느 누구도 그의 오류를 지적하거나 수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명수 대표는 리영희 교수의 모든 저작, 학문적 업적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라며 덧붙였다. “저는 단지 리영희 교수의 신중국에 대한 오류를 지적하고자 했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마오이스트(마오쩌둥주의자)를 자처한 리영희 교수는 한국 사회 ‘중국 부역자’의 원조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서전에 리영희 교수를 언급한 문재인 전 대통령도 비슷한 유형이라고도 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리영희 교수의 제자라고 하겠습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리영희 교수의 책을 읽고서 ‘의식화’된 1세대 운동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명수 대표는 1980년대 대학을 다닌 이른바 ‘86세대’이다.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시진핑 예찬론자’로 꼽히는 김용옥 교수의 수업을 수강하기도 했다.

1980년대 대학을 다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운동권의 바이블로 통했던 ‘8억인과의 대화’ ‘해방전후사의 인식등을 접했을 때 어떤 느낌이었나요? 현재 이 책들을 재평가한면요?

“저는 1982년 대학에 입학한 이른바 운동권 세대의 핵심세대에 속합니다. 격렬한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시대의 아픔을 공유했던 열혈 청년이었습니다.”라며 지난날을 회고한 서명수 대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단지 그뿐입니다. 저는 ‘사상의 자유인’입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만 맹목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는 ‘전환시대 논리’ 등 고 리영희 교수의 저작들은 모두 금서(禁書)였기에 구하기 쉽지 않았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리영희 교수의 책들이 시대의 우상을 깨뜨렸다는 점에서 여전히 의미 있지만 중국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 리영희 교수의 관점은 맹목적인 사랑을 바탕으로 한 탓에 오류투성이였습니다. 당시에는 정보나 자료가 제한적이었기에 누구도 공개적으로 반박하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에는 리영희 교수는 성역과도 같은 우상이어서 누구도 비판하지 못했습니다.”

서명수 대표는 김용옥 교수에 대해서도 평했다. “김용옥 교수는 건드리기 어려운 학자입니다. 그의 동양 철학을 논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가 전공 분야가 아닌 시진핑 관련 저서에 드러난 지독한 시진핑 찬가와 중국 사대주의를 지적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한국인의 중국관을 주제로 한 대담은 지난해 출간된 ‘짱깨주의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저자 김희교 광운대 교수는 책에서는 “일제강점기부터 형성된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인종주의적 편견,이른바 ‘짱깨주의’ 탓에 우리가 중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왜곡됐다.”고 주장했다. ‘짱깨(짱꼴라)’는 한족이 청나라의 만주족 지배자들 앞에서 무릎을 끓고 절을 하면서 자신들을 ‘노재(奴才)’라 부르던 것을 비꼬는 ‘청국노(淸國奴)’에서 유래했다. 이후 일본이 중국을 식민지배하면서 일본에 유입됐고 한국에도 전해져 중국을 비하하는 대표적인 표현으로 자리 잡았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지난해 6월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짱깨주의의 탄생’ 책을 추천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중국을 어떻게 볼 것이며 우리 외교가 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 다양한 관점을 볼 수 있다. 언론이 전하는 것이 언제나 진실은 아니다, 세상사를 언론의 눈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는 눈을 가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준다.”

김희교 광운대 교수의 짱깨주의의 탄생이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책에서 한국인의 반중 정서를 미국 시각이 투영된 인종주의라고 정의했습니다.

“짱깨주의라는 논쟁적인 제목을 붙인 것이 어떤 의미인지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짱깨주의라는 실체가 우리 사회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김희교 교수의 이른바 뇌피셜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중 간 갈등이 중첩되면서 우리 사회에는 반중정서가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를 뭉뚱그려서 인종주의의 일종인 짱깨주의라고 등치(等値)시킬 수는 없습니다. 저자의 주장은 100% 중국의 시각이라고 보면 될 듯합니다. 중국을 20년 이상 연구해 온 한국인 학자의 시각이라고 믿을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책을 정독하고 내린 결론입니다.”

서명수 대표는 이러한 현상이 생긴 원인에 대해서 한국 내 중국 연구자의 중국 공포증을 꼽았다. “국내 중국 연구자들은 기본적으로 중국을 두려워합니다. 중국을 비판하거나 비판적 시각에서 글을 쓰고 언론 매체를 통해 지적하는 것에 대해서는 두려움이 존재합니다. 중국의 눈 밖에 날 경우 블랙리스트에 올라 중국과 관계가 끊기거나 악화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친중, 종중, 부역자의 차이를 정의해 준다면요.

서명수 대표는 “쉽지만 한편으로 어려운 구분”이라고 전제하며 설명을 이어갔다. “이웃 나라 중국, 일본과는 기본적으로 선린우호(善隣友好)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친미(親美), 친중(親中), 친일(親日)은 옳고 그름 혹은 선악(善惡)의 가치로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개인 혹은 국가의 선호도 차이이기도 하고 대외 관계에서 충분히 취할 수 있는 자세라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 여행을 좋아하고 일본 문화를 선호한다고 하여 친일이라 규정하지는 않습니다. 요즘 인기를 더해가는 톄무, 알리, 셰인 등 중국 인터넷 쇼핑 사이트를 자주 이용한다고 하여 친중이라 매도할 수도 없고요. 종중(從中)은 무조건적으로 중국을 추종하는 극단적 중국 사대주의와 동의어입니다. 부역(附逆)은 불편한 용어입니다. 반역(反逆)은 적극적으로 적국을 이롭게 하기 위해 이적 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역은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반역행위에 동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역과 부역과 이적은 백지 한 장 차이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중국부역자들’에서 서명수 대표는 다음과 같이 썼다. “부역(附逆)은 반역에 버금가는 이적행위다. 우리는 ‘친일부역’이라는 용어에 익숙하다. 그러나 ‘중국부역’이라는 낯설고 날선 단어는 이미 우리 사회를 장악한 좌파·진보세력을 규정하는 또 다른 본색이다. 친중과 친북은 쌍(雙)이다. 그들이 친미·친일을 동색(同色)으로 보듯이 말이다. 친일(親日)과 친중(親中), 혹은 친미(親美), 친러(親俄) 등 한반도 주변 4강과의 관계는 구한말 이래 우리 생존을 가늠하는, 풀어야 할 외교전략이자 숙제였다. 구한말 청나라 주일공사 황준헌이 ‘조선책략’을 통해 제시한 ‘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 연미국(聯美國)’이라는 방책은 위정척사파와 개화파 사이에 격렬한 논쟁을 야기하면서 온 나라를 흔들었다. 함께 망해가던 청나라의 외교관이 제시한 ‘중국과 친하게 지내고 일본과 결탁하고 미국과는 연대하라.’는 외교방책 중에서 ‘친중‘은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외교의 기본 중의 하나인 것만은 틀림없다. 외교전략의 하나인 친중을 넘어 무조건 중국을 추앙하는 종중(從中)과 ‘부역’이라고 여길 정도로 비굴한 중국 사대행위가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다.”

한국 내 친중부역자의 실체는 어떠하다 진단하나요?

“국내 중국 부역자 규모는 상상 이상으로 많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들에게 포섭되다시피 한 적극적 스파이가 존재합니다. 약점을 잡혀서 동조하는 부역자들도 있고요. 자발적 부역자들도 상당수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한국에 거주하는 중국 공산당이 전개하는 초한전(超限戰)이 전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하고 효과적으로 전개되는 되는 곳이 한국이라는 것입니다.”

‘중국부역자들’ 책에서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친중 행태도 지적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해 싱하이밍 대사 회동 파문에 이어 최근엔 셰셰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한 행동과 발언이라 보나요? 아니면 친중 혹은 종중 행태의 발로인가요?

“두 가지 다가 아닐까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친중, 종중, 부역의 경계를 모를 리 없습니다. 운동권 출신이 아닌 그는 정략적으로 친중 노선을 걸어왔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우리 사회 진보 진영의 기본 노선이 친중·친북이라는 것도 십분 영향을 주었을 겁니다. 이재명 대표의 선출직 공직자로서의 행태는 중국에 기울어진 행보입니다.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과거 중국의 포섭 대상이 되었으리라고 짐작합니다.”

“책을 쓴 목적은 중국 부역자들을 공격해서 사회적으로 비난하거나 격리하자는 주장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한 서명수 대표는 다음을 강조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국익(國益)은 것은 사익(私益)과 달리 공공의 안전에 직결되는 공공선(公共善)입니다. 지도자들의 그릇된 대중국 인식이 나라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다는 것을 모든 국민이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중국과도 보다 대등한 관계에서 한중관계를 심화시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