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에서 시작한 182년의 역사…빈 필하모니 관현악단

앤드루 벤슨 브라운 (Andrew Benson Brown)
2024년 04월 13일 오전 11:38 업데이트: 2024년 04월 13일 오후 2:06

현대에는 문명과 기술의 발달로 공연장을 직접 찾지 않아도 온라인에서 양질의 공연 영상을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직접 공연장을 방문해 관현악단(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체감하는 것은 영상 관람과는 다른 차원의 감동을 준다. 특히 빈 필하모니 관현악단의 연주는 듣는 이에게 형언할 수 없는 감동과 울림을 전한다.

음악의 도시

1842년 창단된 오스트리아의 빈 필하모니 관현악단(이하 빈 필하모니)은 18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계 최고의 관현악단 중 하나로 손꼽힌다.

빈 필하모니가 탄생하기 전 19세기 초, 빈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들이 활발히 활동했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등 수많은 작곡가가 빈을 기반으로 유럽 전역에 아름다운 음악을 전파했다. 그러나 당시 교향곡을 전문적으로 연주하는 정규 관현악단이 없었기에 음악의 도시 빈에서 탄생한 완벽한 곡을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연주하기란 어려웠다. 또한 오페라가 더 많은 인기를 끌던 시기라 교향곡은 수요가 많지 않아 전문 연주자를 양성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천재 지휘자의 등장

‘카를 오토 니콜라이의 초상화’(1842), 작자미상 | 퍼블릭 도메인

음악의 도시 빈에는 유럽 각지에서 음악가들이 모여들었지만, 이들을 지도하고 이끌 유능한 지휘자는 부재했다. 그러던 중 혜성처럼 나타난 카를 오토 에렌프리드 니콜라이(1810~1849)는 빈 음악계에 한 줄기 햇살이 되었다. 독일 출신의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니콜라이는 어린 시절부터 독보적인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환상 교향곡’의 작곡가이자 근대 관현악의 아버지로 불린 베를리오즈(1803~1869)는 그에 대해 자신이 만난 위대한 지휘자 중 한 명이라며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 음악적 우위를 부여하는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다”라고 평했다.

베를리오즈에 따르면 니콜라이는 음악에 대한 학구열이 강했고, 강력한 리듬감을 바탕으로 곡 진행 세부 사항을 모두 주의 깊게 신경 썼으며 지휘 방식은 정확했다.

니콜라이는 1842년 빈 궁정 오페라단을 이끌기 위해 빈으로 이주했다. 이후 그는 오페라 교향악단 연주자들 중에서 교향곡 연주에 전념할 인원을 뽑는 등 빈 필하모니 결성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빈 필하모니를 결성하며 ‘창립 선언문’을 발표했다. 선언문에서 ‘아폴론(태양의 신)의 아들들아, 모두 함께 단결하여 위대한 일을 위해 손을 움직여라!’라고 포부와 결의를 밝혔다.

그가 빈 필하모니를 창단한 가장 큰 목적은 베토벤의 교향곡을 완벽하게 연주하는 것이었다. 베토벤의 교향곡은 새로운 차원의 구성과 복잡함으로 인해 전문 연주자들에게도 난도가 높기로 악명이 높았다. 당시 베를리오즈는 “거장의 작품이 제대로 연주되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곳이 전 세계에 여섯 군데밖에 없다”며 불평하기도 했다.

실패의 무덤 위 피어난 성공

‘루트비히 반 베토벤의 초상’, C. 예거 | Hulton 아카이브/getty image

빈 필하모니 창단 1년 후, 니콜라이는 빈 필하모니 역사상 중요한 순간 중 하나인 베토벤 9번 교향곡 연주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9번 교향곡은 1824년에 초연됐다. 이 곡은 대규모 관현악단이 필요했는데, 당시 정규 관현악단이 제대로 조성돼 있지 않아 아마추어 관현악단이 모여 연주해야만 했다. 게다가 이 아마추어 관현악단에 단 두 번의 리허설만 허용됐지만, 완성도 높은 연주로 곡을 소화해 기립 박수 속에 공연이 마무리됐다.

하지만 이후 거의 20년 동안 이 작품은 제대로 연주되지 못했다. 베토벤의 다른 교향곡들은 비교적 난도가 낮아 무대에서 자주 연주됐지만, 9번 교향곡은 큰 규모의 관현악단과 합창단을 필요로 했기에 완성도 높은 연주를 해내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난도가 높고 곡의 길이가  70분에 달할 정도로 긴 데다 ‘환희의 송가’가 포함된 마지막 악장은 당시 획기적인 구성이어서 많은 비평가에게 이질적이며 이해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니콜라이는 9번 교향곡에 대한 이러한 인식을 바꾸고자 했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관현악단원들을 독려했다. 수많은 연습과 총 13번의 엄격하고 혹독한 리허설 끝에 연주자들은 곡에 대한 높은 이해력과 단합력을 갖추게 됐다.

성공과 유산

베토벤 9번 교향곡의 초판 사진 | 이안 윌디/게티 이미지

니콜라이와 빈 필하모니의 베토벤 9번 교향곡 연주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궁정 무도회장에서 열린 연주회에서 첫선을 보였다. 그들의 연주는 엄청난 성공을 거둬 왕실과 많은 귀족, 대중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평단은 거장 베토벤의 대작을 창작자의 의도에 맞게 해석한 최초의 대중적 공연이라며 극찬했다.

하지만 빈 필하모니와 니콜라이의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교향곡을 성공적으로 선보인 이후, 니콜라이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을 각색한 오페라를 작곡했다. 하지만 빈의 오페라 감독, 극단들은 이 작품이 귀족을 풍자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작품 제작을 거부했다.

당시 그는 궁정 오페라 지휘자였지만, 연주자들의 선곡에 대한 전권을 갖진 못했다. 결국 그는 1847년 지휘자직을 사임하고 빈을 떠나 베를린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을 무대에 올려 대성했고, 이 작품으로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에 한 획을 그었다. 이후 그는 빈을 이어 베를린에서도 국립 오페라단의 지휘자로 임명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뇌졸중으로 생을 마감했다.

빈 필하모니의 부활

니콜라이의 부재로 빈 필하모니는 유능한 지휘자 자리를 메우지 못한 채 10년 이상 쇠락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1860년, 빈 필하모니는 초대 지휘자 니콜라이의 오페라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을 무대에 올리며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 빈 필하모니의 시작을 열어준 선구자에 대한 경의의 표현을 통해 그들은 다시금 대중과 평단에 사랑받기 시작했다.

빈 필하모니는 니콜라이 이후 한스 리히터(1875~1882), 구스타프 말러(1898~1901) 등 많은 상임 지휘자뿐만 아니라 폰 카라얀(1908~1989) 등 걸출한 객원 지휘자를 선임하며 건재한 실력과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관현악단의 모습 | Canva

학계는 빈 필하모니에 대해 ‘서양 음악사의 역사와도 같다. 세계 음악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하다’고 말한다. 베를리오즈는 1845년 빈 필하모니 객원 지휘자로 참여한 후, “다른 관현악단이 빈 필하모니와 동등할 수는 있어도 결코 능가할 순 없다”라고 평가했다. 그의 평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앤드루 벤슨 브라운은 미국 미주리주에 거주하는 시인이자 저널리스트입니다. 그는 음유시인 부엉이 출판사의 편집자이자 미국 혁명에 관한 서사시인 ‘자유의 전설’의 저자입니다.

*류시화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