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를 이겨낸 러시아 음악가…피아노 거장 리히터의 일생

앤드루 벤슨 브라운 (Andrew Benson Brown)
2024년 04월 23일 오전 11:01 업데이트: 2024년 04월 23일 오전 11:01

과거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즉 소련에서 예술가로 살았던 이들은 자유로운 예술 활동이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당시 예술적 재능을 꽃피웠던 이들은 대부분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많은 예술가가 박해를 받다

러시아의 시인 오시프 만델스탐(1891~1938)은 스탈린에 대한 풍자시를 썼다는 이유로 굴라크(1930~1955년 소련에서 설립한 강제 수용소)에서 고통스러운 최후를 맞이했다.

195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1960)는 ‘닥터 지바고’를 썼다는 이유로 국영 언론의 비난을 받고 수상을 거부해야 했다. 또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소설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1918~2008)은 장교로 근무하던 중, 스탈린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을 쓴 편지가 검열에 걸려 체포됐다. 이후 그는 8년가량의 시간을 굴라크에서 보내야 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1960) | 퍼블릭 도메인

미국으로 망명해 작품 활동을 펼쳤던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1899~1977)는 수필 ‘러시아 작가, 검열관, 독자’에서 당시 예술 경향이 왜 처참했는지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는 “예술가들은 영혼을 지키기 위해 정부와 투쟁해야 했다”며 당시 시대상을 설명했다.

음악계에도 뻗친 고난

당시 작곡가들 또한 항상 위협과 걱정에 시달렸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 중 한 명인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는 작품 속에 자신이 느끼는 불안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 현악 사중주 8번 4악장의 도입부에는 불협화음으로 공산정부에 체포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공포가 사실적이며 슬프게 묘사돼 있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1915~1997)는 우크라이나계 독일인 아버지와 러시아 귀족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다른 예술가들과는 조금 다른 삶을 보냈다. 리히터는 다른 예술가들에 비해 비교적 덜 노골적인 박해를 당했지만, 그 또한 많은 고통과 고난에 시달렸다.

고립된 천재

리히터는 피아노에 타고난 재능을 보였다. 그는 피아니스트이자 음악 교수로 활동했던 아버지에게서 재능을 물려받아 어린 시절부터 천재성을 보였다. 처음 본 곡을 단숨에 연주해 내고, 짧은 시간 내에 곡을 전부 외워 50년 후에도 기억했다. 이후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음악을 배우며 본격적인 활동을 펼쳤다.

위험 속에서 음악을 꽃피우다

소비에트 군사들에게 체포된 게르만족 포로들 | Canva

리히터의 명성은 러시아 전역을 넘어 동유럽, 중국에도 뻗어갔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그는 음악을 통해 시민과 군사들의 사기 진작에 기여했다. 1944년 겨울, 그는 공습으로 피폐해진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부르크)에서 시민을 위해 피아노를 연주했다. 공연장 창문은 포탄에 깨져 찬바람이 들어왔지만, 관객들은 두꺼운 외투로 몸을 감싸고 음악에 귀 기울였다.

연주가 끝나면 그는 많은 박수갈채를 받는 동시에 비난에 떠밀려 공연장을 떠나야만 했다. 러시아와 독일 이중국적을 가진 그에게 러시아인들은 “넌 독일인이잖아”라며 그를 배척했고, 독일인들은 그에게 “당신은 러시아인이군”이라며 그를 밀어냈다. 또한 아버지에게서 받은 독일 국적 때문에 그는 정부로부터 끊임없이 감시당했다.

다행히 그는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으며 다른 예술가들에 비해 자유롭게 해외를 오갈 수 있었다. 동시에 공산당이 배척하는 서양의 곡을 연주할 권한도 얻었다. 이를 통해 그는 자유로운 예술을 지속할 수 있었고, 공산당 정부 치하 사회에서 용기 있는 행동을 보일 수 있었다.

위대한 음악가의 자질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 세르비닌 유리/CC BY-SA 3.0

그는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한 여러 자질을 갖췄다. 그는 한 옥타브 이상을 넘나들 수 있는 길고 가는 손가락을 지녔고, 탁월한 기억력으로 바흐, 베토벤부터 수많은 위대한 피아노곡 전체를 머릿속에 저장했다.

그는 매우 높은 음악적 공감 능력을 발휘해 작곡가의 의도를 카멜레온처럼 받아들였다. 덴마크의 작곡가 겸 작가 카를 라스무센(1947~)은 리히터에 대해 “슈만을 연주할 때는 따뜻하고 노래하는 듯한 피아노 소리가 나고, 리스트를 연주할 때는 반짝반짝 빛나거나 격렬한 소리가 나며, 브람스를 연주할 때는 무게감 있고, 드뷔시를 연주할 때는 반짝이는 파스텔 색채의 소리가 난다”라고 묘사했다.

또한 그는 곡에 대한 내면의 깊은 이해 덕에 각 곡마다 필요한 음색과 강도, 섬세함을 민감하게 반영해 연주했다.

의도치 않은 반체제 인사

리히터는 주로 평소 자신이 원하는 곡을 연주했으며, 국가 체제에 고의로 반대한다는 비난을 부인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곡들은 공산당 체제에 반대하는 의미를 암시했다. 한 예로 1945년 그가 연주했던 곡은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1889~1966)가 스탈린주의적 공포에 관해 쓴 시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당대엔 한 예술가가 ‘인민의 적’으로 지정되면 그의 작품은 전면 금지됐고 언급조차 못하도록 했다. 1948년 이후 소비에트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1891~1953)를 서구의 형식주의로 몰아가며 금기시했다. 당시 프로코피예프의 추종자였던 리히터는 “이러한 국가의 방침을 이해할 수 없다”며 진실한 목소리를 냈고, 나아가 정부 방침에 저항하며 프로코피예프의 곡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공연은 호평받았고, 현장에 참석했던 프로코피예프는 “죽은 내 작품을 되살려줘서 감사하다”라며 감사를 표했다.

신념을 지킨 천재

자신만의 철학과 신념을 지킨 천재 음악가 리히터는 수수께끼 같은 성격과 변덕스러운 음악 스타일, 그만의 매력으로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또한 외부의 압력과 위협,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켰기에 그의 음악과 이야기는 전설처럼 남아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앤드루 벤슨 브라운은 미국 미주리주에 거주하는 시인이자 저널리스트입니다. 그는 음유시인 부엉이 출판사의 편집자이자 미국 혁명에 관한 서사시인 ‘자유의 전설’의 저자입니다.

*류시화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