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혹한 운명에 맞선 인내의 승리…베토벤 ‘환희의 송가’

레베카 데이(Rebecca Day)
2024년 03월 6일 오전 8:23 업데이트: 2024년 03월 6일 오전 8:30

루트비히 반 베토벤(1770~1827)은 독일 고전 음악계 최고의 작곡가로 꼽힌다. 악성(樂聖)이라고도 불린 그의 작품 중 9번 교향곡은 단순한 음악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특히 마지막 4악장 ‘환희의 송가’는 일생의 고난과 승리를 나타낸 최고의 걸작이다.

베토벤의 삶과 천부적인 재능의 정점은 그의 마지막 교향곡인 9번 교향곡이 초연된 1824년 5월 7일 밤에 발현됐다. 이 곡이 초연되기 얼마 전 그는 청력을 잃었고, 서양 음악계의 기념비로 꼽히는 이 곡을 그는 실제로는 듣지 못했다.

거장의 탄생

‘루트비히 반 베토벤의 초상’(1820), 조셉 칼 스틸러 | 공개 도메인

쾰른 선제후국(현재 독일)의 수도 본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이 음악에 대한 재능을 보였다. 특히 피아노 연주에 두각을 나타낸 그는 아버지에게 처음 음악을 배웠고 이후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주해 본격적으로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21세 무렵, 당시 음악계에서 존경받는 작곡가 중 한 명인 요제프 하이든(1732~1809)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좋은 스승의 영향으로 그는 눈부신 성장을 이뤘고, 그의 첫 교향곡 1번을 발표했다.

당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대중은 과감히 목관악기를 사용하고 새로운 화음이 등장하는 그의 음악에 매료됐다. 그는 엄청난 열정으로 대중의 귀와 동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특히 피아노 연주에 넘치는 자신감과 실력에 대한 확신을 지녔다. 그를 두고 피아노 조율사들은 ‘현을 끊는 사람’이라 부르기도 했고, 스승 하이든은 ‘대황제’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당시 예술의 수도였던 빈에서 그의 존재감은 음악의 신동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맞먹었다. 그러나 베토벤은 겨우 30세를 앞둔 나이에 서서히 청력을 잃어갔다.

고난 속에서 빛을 찾다

‘서재의 베토벤’(1918)의 일부, 칼 슐뢰서. 판화 | 공개 도메인

당시 의사들은 그가 청력을 잃어가는 원인을 진단하지 못했다. 현대 학자들은 그의 유해에서 추출한 DNA 분석을 통해 그 원인이 납 때문이라는 의견을 내놨다. 학자들은 그가 납이 포함된 식기를 사용해 서서히 건강을 잃은 것으로 추측한다.

베토벤은 청력을 서서히 잃어가는 것에 대해 ‘운명의 망치’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의 음악 인생은 망치에 직격타를 맞았지만, 그의 의지는 운명보다 강했다. 그는 창의력을 발휘해 혁신적 기술을 개발했고 작곡가로서의 수명을 연장했다.

그는 나무 막대의 한쪽 끝을 피아노에 연결하고, 다른 쪽 끝을 치아 사이에 끼웠다. 이 방법은 현대의 골전도 이어폰과 같은 원리로, 나무를 통해 전해진 진동이 고막이 아닌 내이에 직접 소리를 전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이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피아노와 메트로놈 | Canva

현대 음악계에서도 즐겨 쓰는 메트로놈(Metronome)은 베토벤을 위해 발명됐다. 베토벤의 친구였던 요한 네포무크 멜첼(1772~1838)은 청력 악화로 힘들어하는 그를 위해 박자를 시각화해 주는 장치인 메트로놈을 만들었다. 베토벤은 이에 매우 감사하며 메트로놈을 애용했다.

그는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모든 고난과 도전에 맞섰다. 청력을 잃어가는 슬픈 상황에서도 6개의 교향곡과 72개의 곡을 완성했다.

역사 속 한 장면을 장식하다

‘환희의 송가’ 원고(1785), 프리드리히 실러 | 공개 도메인

52세의 베토벤은 아홉 번째이자 마지막이 된 교향곡을 쓰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그는 독일 대문호 프리드리히 실러(1759~1805)의 시 ‘환희의 송가’를 통해 큰 영감을 얻었다. 그는 시에 나타난 자유와 아름다움, 행복에서 이상(理想)을 발견했고 이를 예술적 이상의 지표로 삼았다. 그리고 9번 교향곡 마지막 악장을 ‘환희의 송가’로 지정하고 시의 구절을 인용해 가사를 붙였다. 이는 자기 인생관과 경력에 큰 영향을 미친 실러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다.

9번 교향곡은 베토벤이 쓴 곡 중 가장 큰 오케스트라 작품이자 합창 성악이 포함된 곡 중 악보가 현존하는 최초의 교향곡이다. 그가 청력을 거의 상실할 무렵 창작된 이 곡은 음악 이론과 악기 소리의 기억에 의존해 쓰였다.

이 작품은 1824년 5월 7일, 빈 케른트너토르 극장에서 초연했다. 베토벤은 자신이 지휘하겠다고 고집했지만, 결국 공동 지휘자 미하일 움라우프(1781~1842)에게 지휘봉을 넘겨줬다. 그 대신 베토벤은 곁에서 지휘를 참관하며 미하일을 도왔다.

당시 오케스트라의 일원이었던 조셉 뵘(1795~1876)은 초연 당일 베토벤에 대해 “미친 사람 같았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베토벤이 온몸으로 악기 소리와 노래를 표현하듯 손과 발을 휘저었다며 당시 감상을 전했다.

오케스트라는 베토벤이 아닌 미하일의 지휘에 맞춰 연주했다. 하지만 연주를 듣지 못함에도 음악에 대한 열정을 거칠고 자유롭게 표현하는 베토벤의 뒷모습은 청중에게 깊은 감동을 줬다. 관객들은 악장 내내 여러 번 박수를 치며 멋진 음악과 베토벤의 열정에 찬사를 보냈다.

9번 교향곡 4악장 ‘환희의 송가’의 마지막 음이 장내를 가득 채우자, 관객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관객의 환호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공연이 끝났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지휘를 계속했다. 오케스트라 단원은 그의 몸을 돌려 관객석을 보게 했고, 그제야 베토벤은 자신이 이룩한 음악적 성과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깨달았다. 그날 밤 베토벤은 비록 소리를 듣진 못하지만, 관객의 박수와 호응이 만든 울림을 통해 성취감을 만끽했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잇다

(왼쪽) ‘실러의 신격화’(1898), (오른쪽) ‘베토벤의 신격화’(1900), 에두아르드 마히쉬 | 공개 도메인

베토벤의 음악은 고전주의 시대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낭만주의 사조의 첫 불꽃을 일으켰다. 그의 음악은 사람들에게 자유와 아름다움, 행복을 전한다. 그가 음악에 담았던 메시지는 지금까지 남아 긍정적 파장을 일으키고 있으며 9번 교향곡은 현재 전 세계에서 많이 연주되는 교향곡 중 하나로 남아있다.

레베카 데이는 독립 음악가이자 프리랜서 작가입니다. 컨트리 그룹 The Crazy Daysies의 리더이기도 합니다.

*류시화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기사화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