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역경을 딛고 마침내 빛을 보다…작곡가 막스 브루흐

앤드루 벤슨 브라운 (Andrew Benson Brown)
2024년 04월 16일 오전 8:22 업데이트: 2024년 04월 16일 오전 9:45

역사상 세계적으로 위대한 작곡가 중, 이름이 ‘B’로 시작하는 3명의 작곡가를 꼽으라면 대부분 바흐, 베토벤, 브람스를 언급한다. 그러나 4명을 꼽을 경우, 막스 브루흐(1838~1920)를 추가하곤 한다. 많은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에게 브루흐의 ‘바이올린 1번 협주곡 G단조’는 바이올린 협주곡의 표준으로 꼽히며 지금까지도 자주 연주되고 있다.

‘유명한 작곡가들과 그들의 작품’(1891), J.B. 밀레 | 퍼블릭 도메인

하지만 브루흐의 위상은 생전 여러 이유로 인해 크게 흔들렸다. 19세기 화가 J.B. 밀레의 화집 ‘유명한 작곡가들과 그들의 작품’(1891)에는 브루흐에 대한 많은 언급이 실려있다. 밀레는 브루흐의 협주곡과 교향곡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6장에 걸쳐 브루흐의 전기를 나열하며 “그의 위대한 합창곡은 그를 거장의 반열에 올려놨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책이 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브루흐의 위대한 작품들은 더 이상 연주되지 못했다.

위대한 시작, 절망적인 운명

1838년 독일 쾰른에서 태어난 브루흐는 1848년 독일혁명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직접 목격한 인물이다. 유럽 사회에는 수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자신만의 음악 스타일을 변함없이 유지했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 신동으로 불린 브루흐는 9세 무렵부터 작곡을 시작했다. 그의 부모는 음악적 재능을 펼치도록 좋은 환경을 제공했고, 14세 때 첫 교향곡을 발표했다.

브루흐의 ‘오디세우스’ 초판 표지 | Hobbypianist/CC BY-SA 4.0

그는 35세 때 호머의 ‘오디세이’를 각색한 합창곡 ‘오디세우스’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당시 독일에는 아마추어 합창단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도시로 유입됐고 여가 활동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음악과 합창의 인기가 높아졌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이르러 합창은 유행에서 멀어졌고, 브루흐의 인기 또한 함께 사그라들었다.

요하네스 브람스의 사진 | 퍼블릭 도메인

동시대를 살았던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는 브루흐와 절친한 사이였다. 이들은 서로 음악적으로 교류하며 비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브람스는 브루흐의 곡 ‘오디세이’를 듣고는 작품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대신 “악보를 쓴 종이가 최고급이다”라며 재치 있게 자신의 견해를 전했다.

또한 그들은 서로의 운명에 대해서도 견해를 나눴다. 브루흐는 1907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 작품 대부분은 점점 더 외면받는 반면 브람스는 더 높이 평가될 것”이라는 생각을 전했다. 그의 예견은 결국 사실이 됐다.

바이올린 협주곡 1번 G단조 op.26

브루흐와 동시대를 살았던 작곡가 중 대다수는 지금까지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브루흐 또한 그 이름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작품 ‘바이올린 협주곡 1번 G단조 op.26’은 클래식 역사상 뛰어난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1악장에서 오케스트라는 대부분 우아하고 차분한 진행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에서 오케스트라는 활기를 띠며 솔로 바이올린의 극적인 강렬함을 화려하게 보완한다.

2악장은 부드럽고 아름다운 선율로 솔로 바이올린이 연주되고, 그 배경에 오케스트라가 서정성을 더한다. 마지막 3악장에서는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가 대화를 나누듯 소리를 주고받으며 활기차고 극적인 분위기를 조성해 황홀한 절정을 완성한다.

슬픈 예견이 실현되다

많은 위대한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브루흐 또한 자기 작품에 대한 물질적 보상을 많이 받지 못했다. 그의 대표작 바이올린 협주곡 1번에 대한 대가는 로열티 대신 일시금으로 받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매우 적은 금액이었고, 그 대금은 그가 사망한 뒤에야 지급됐다.

또한 그가 협주곡 위주로 작곡을 계속하는 동안, 당시 음악계의 경향은 모더니즘으로 바뀌었고 낭만주의 사조를 계속 지켜온 그의 음악은 대중에게 외면받았다.

또한 그의 음악 중 한 곡에 의해 그의 모든 작품이 연주 금지 처분을 받았다는 설도 전해진다. 1881년 그가 쓴 작품 ‘콜 니드라이(Kol Nidrei)’는 유대교 음악에서 영감받아 쓰였는데, 이 곡을 통해 독일 나치는 그를 유대인으로 의심했고, 그의 모든 곡은 연주 곡목에서 제외됐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모든 악재로 인해 그는 곤궁하고 고독한 말년을 보냈고,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사후에 얻은 승리

영화 ‘이퀄리브리엄’의 한 장면 | MovieStillDB

2003년 개봉작 ‘이퀄리브리엄’에는 예술 관련한 명장면이 등장한다. 영화 속 배경은 모든 예술이 금지된 전체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다. 영화 주인공의 직업은 경찰로, 비순응주의자 집단을 제거하라는 임무를 맡아 수행한다. 그들의 은신처를 수색하던 그는 낯선 독일인의 이름이 적힌 레코드판을 발견한다. 그것을 축음기에 걸자 베토벤 교향곡 9번이 재생된다.

평생 음악을 들어본 적 없었던 주인공은 음악에 빠져 넋을 잃는다. 음악이 끝나자, 그는 자신이 배워온 모든 것이 완전히 틀렸음을 깨닫고 자리를 뜬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아름다움을 금지하는 억압된 사회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다.

이처럼 진정한 예술은 불합리하고 파괴성을 지닌 모든 것을 결국에는 이겨낸다. 대중들 또한 눈과 귀를 가리고 있는 모든 거짓을 떨쳐내고 진실한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는 분별력을 지니고 있다.

악성(樂聖)으로 불리는 베토벤의 작품은 당대에는 어렵고 난해한 음악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곧 대중은 그 음악의 예술성과 가치를 알아봤고 그의 사망을 슬퍼했다. 브루흐 또한 비슷한 삶을 살았다. 그는 당대에는 동시대를 살았던 다른 작곡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명성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대표곡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은 여전히 청중의 귀를 사로잡는다. 현대에는 그에 대한 연구가 재개되며 많은 곡이 음악계와 대중에게 사랑받고 있다.

앤드루 벤슨 브라운은 미국 미주리주에 거주하는 시인이자 저널리스트입니다. 그는 음유시인 부엉이 출판사의 편집자이자 미국 혁명에 관한 서사시인 ‘자유의 전설’의 저자입니다.

*류시화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