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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침체의 진정한 원인은 코로나19 확산이 아니라 사회 폐쇄와 각종 제한 등 과도한 대처 때문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미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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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애리조나에서 투표지 210만 장과 선거 장비에 대한 감사를 허용하라는 지방법원 판결이 나왔다. 애리조나의 마리코파 카운티 고등법원은 25일(현지시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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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테크가 중국 공산당의 글로벌 초강대국 목표 달성을 지원하고 있다." 미국 보수진영 최대 연례행사인 '보수정치행동회의'(CPAC) 이틀째인 27일(현지시각) 연설자로 참석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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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최대 보수진영 연례행사인 '보수정치행동회의'(CPAC) 첫 연설자로 강단에 오른 플로리다 주지사가 폐쇄 일변도를 벗어난 코로나19 대응의 장점과 성과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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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궈펑(華國鋒) 출생 100주년, 중국 당국은 ‘크게 기념’했지만, 시진핑 중공 총서기는 참석하지 않았다. 지난 20일 중공 당국은 왕후닝(王滬寧), 한정(韓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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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브러햄 링컨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중 하나다. 그는 자유를 존중하고 천부인권(天賦人權)을 믿었다. 그가 반포한 흑인노예해방선언 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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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업데이트 됩니다 : 마지막 업데이트 2020년 11월 22일 주요 소송 현황 우드 대 라팬스퍼거 사건(사건번호 20-cv-04651) 트럼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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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업데이트 됩니다 : 마지막 업데이트 2020년 11월 21일 주요 소송 현황 셰릴 코스탄티노 대 디트로이트市 사건 (사건번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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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업데이트 됩니다 : 마지막 업데이트 2020년 11월 22일 주요 소송 현황 *업데이트 예정 주요사건 일지 1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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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등장하고 흔적없이 사라지는 역병. 팬데믹 사태 속에서 불확실성은 커지고 있습니다. 인류는 수많은 전염병 사태 속에서 생존해왔지만 이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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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사적 맥락에서 역병을 탐구하는 다큐멘터리 ‘역병이 도래할 때’(When the Plague Arrives)가 12일(현지시각) 에포크타임스(영문) 홈페이지와 NTD, 유튜브와 페이스북 채널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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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맨해튼과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뉴저지주는 현재 미국에서 우한 폐렴(중공 바이러스 감염증) 피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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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은 신종코로나(중공 바이러스) 사태 초기 위험성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고 자국 내 확산을 감췄으며 외국의 입국 차단을 막았다. 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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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중국 공산당(중공)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세계는 전례 없는 위기 상황을 맞고 있다. 바이러스의 발생이 팬데믹(pandemic), 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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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는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의 총 17년 재위 기간, 15년에 걸쳐 7차례나 역병을 겪었다. 수도 북경은 백성 60%가 페스트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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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되풀이 된다. 그래서 현재를 비추는 가장 좋은 거울이 된다. 역사적으로 발생했던 옛 사건들을 살펴보는 것은 오늘날 발생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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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지난 2014년 '관리간통지도(官员通奸地图)'라는 자료를 공개했다. 이 자료에서는 12개 지역에서 31명의 관리들이 "두각을 나타냈다"고 신문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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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자유에 대한 또 한 차례의 테러 공격이 가해졌다. 이번에는 홍콩 민주화 시위대를 지지하고 중국 정부와 공산당의 탄압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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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0월 1일, 중국 공산당이 ‘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에 폭정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선언이었다. 5천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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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경찰이 시위진압 작전에 실탄이 든 총으로 무장하고 물대포를 투입한 가운데, 맨몸으로 총구를 막아선 남성에 세계인의 눈길이 모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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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경찰이 송환법 반대 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실탄을 발사했다. 25일 AP통신은 이날 오후 9시께 홍콩 경찰이 췬안 일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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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과 베이징은 얼마나 가까운 것일까? 지난해 구글이 사훈에서 '악해지지 말자(Don't be evil)'라는 격언을 빼버린 것은 뭔가 근본적인 변화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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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담에 ‘한 대(代) 좋은 아내가 없으면 십 대 걸쳐 좋은 자식이 없다’는 말이 있다. 여성은 자식을 낳고 기르고 가르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신이 준 도덕을 유지해 인류사회가 부패하지 않게 하는 책임도 맡고 있다. 고대에 맹자 어머니가 아들 교육을 위해 이사를 세 번 하고 또 ‘베틀의 날실을 잘랐다(孟母斷機)’는 이야기가 있다. 또 악비의 어머니가 아들 몸에 나라에 충성하길 바라는 글자를 새긴 이야기도 있다. 어머니는 늘 자녀에 대한 관심과 뛰어난 덕성으로 자녀엑 지대한 영향을 준다. 정결(貞潔)은 여성의 자기 사랑, 그 자체이자 생명 본원의 요구다. 또한 신이 자신의 형상을 본떠 사람을 만들 때 주입한 생명 요소일 수도 있다. 따라서 순결한 여자라면 누구라도 정조를 자신의 생명보다도 더 중하게 여긴다. 4. 여성은 인류 도덕을 수호하는 구심점이다 사물이 발전하는 데는 사회가 변하든 사물을 인식하는 인간의 관념이 변하든 물리화학적 변화가 있든 그 변화 과정에 모두 관건적인 요인이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도덕이 세대를 거쳐 전승되는 데도 핵심축(linchpin)이 필요한데, 바로 여성이 그런 역할을 한다. (1) 정조 윤리 도덕 관점에서 ‘정조를 지킨다(守貞)’는 것은, 결혼 전에는 순결을 지킴을 뜻하고 혼인 이후에는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성 접촉을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1] 전통문화 속에서 이 의미는 개인적인 요구에서 사회적인 요구로 확대됐다. 즉, ‘정조’는 여성의 개인적 순결에서 사회적 ‘성실’, ‘충성’이란 개념으로 확장됐다. 다시 말하면 남녀 모두에게 요구하는 기본적인 인격 요소가 됐다. 정조에 관한 인식과 관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또 종교(정교)·문화(전통문화)와 관계없이 모두 일치한다. 이는 여성이 인류 도덕을 수호하는 특수한 역할과 특별한 작용을 담당한다는 것을 설명한다. 여성은 인류 도덕을 수호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조물주는 정조와 관련해 여성에게 특수한 요구를 했다. 유혹과 욕망에 쉽게 빠지지 않도록 정조를 목숨처럼 여길 것을 요구했다. 신이 사람을 만들 때 처녀의 몸에는 표시를 하고는 감정에 쉽게 이끌리지 않도록 영예와 수치심을 첨부했다고 한다. (2) 정결의 영예 인류 역사상 전통문화에서는 여성의 숭고한 절조(節操)에 대한 기록이 많다. 남편을 위해 평생 수절했거나, 순절한 여성을 표창하고 그 부덕(婦德)을 기려 패방(牌坊‧일종의 ‘열녀문’)을 세워주었다. 이는 진시황 때부터 시작됐다. 《사기 화식열전》에는 “파(巴‧지명)에 청(淸)이라는 과부가 있었다. 그 선조가 주사(朱沙) 광산을 얻어 대를 이어 이익을 독점하니 가산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청은 과부였으나 가업을 유지하고 재산으로 자신을 지켜내 침범당하지 않았다. 시황제가 정조 있는 부인으로 여겨 손님 대하듯 예우했고, 그녀를 위해 여회청대(女懷淸臺)를 만들었다”[2]는 기록이 있다. 이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정조 있는 부인을 기리려고 비석을 세우거나 기록을 남긴 사례에 속한다. 정결 자체는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감정의 본원적인 요구이다. 또한 신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 주입한 생명 요소다. 순결한 여자는 정조를 목숨보다도 더 중하게 여긴다. 청나라 때 여자의 정절은 보편적인 관념이었다. 군왕은 그것은 임금에 대한 충성만큼이나 중시했다. 예를 들어 항주부지(杭州府志)의 기록에 따르면 항주 일대에만 매년 정절부인이 50여 명이 나왔다. 기록에 따르면 이런 열녀가 있었다. 강희제 시대에 인화현(仁和縣) 사람 임방기(林邦基)가 증(曾)씨 성을 가진 처를 얻었다. 증씨는 시부모를 공경했으나, 혼인한 지 12년이 되도 자식을 낳지 못했다. 나중에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임방기가 너무 슬퍼한 나머지 중병에 걸렸다. 임종 전에 증씨에게 “내가 죽은 후 당신은 나를 따라 함께 가겠소?”라고 물었고, 증씨는 눈물로 맹세했다. 증씨는 남편의 장례를 치른 후 몇 차례나 목을 매달아 자진하려 했지만 매번 가족들에게 발견돼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시아버지가 이 사실을 관아에 알렸다. 현령이 남편을 대신해 효를 다해야 하니 죽지 말라며 ‘절효쌍전(節孝双全‧정절과 효 둘 다 완벽하다는 의미)’이란 편액을 걸어 널리 알리게 했다. 5년 후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증씨는 장례를 치른 후 14일간 곡기를 끊어 죽었다.[3] 정결(貞潔)은 태평성세와 왕조의 흥성기를 결정하는 가장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즉 태평성세일수록 정결을 강조한다. 《청사고(清史稿)》 열녀전에도 이런 일들이 아주 많다. 절개를 지킨 아내 때문에 남편이 영광을 얻은 사례도 많다. 청나라 건륭 52년 유근(劉謹)이란 벼슬아치가 병사하자 그의 아내 탕씨가 순절했다. 이 일이 조정에 보고되자 유근에게는 ‘홍려사경(鴻臚寺卿)’이라는 시호와 은 백 냥을, 그리고 탕씨에게는 특별히 ‘특지정표(特旨旌表)’를 내렸다. 아내 덕분에 남편이 영예를 누린 이 일화는 중앙 관청에서도 특별한 사례다.[5] 사실 고대에는 서방이나 동방이나 여성의 정조에 대한 요구가 유사했다. 혼인 전에는 처녀성을 지키고 혼인 후에는 절개를 지켜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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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1일 파룬궁 박해를 보도하는 웹사이트인 밍후이왕이 중요한 통지를 내보냈다. 통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최근 미국의 일부 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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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톈안먼 사태 당시 베이징 학생들은 중국 공산당의 탄압 항의, 부패 반대, 민주화 요구 단식으로 많은 민중의 지지를 얻었다. (류젠 제공) 1989년 봄,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민주화운동'이 베이징에서 시작돼 중국 전역으로 번졌다. 운동에 참여한 베이징의 한 대학생은 역사적인 순간을 카메라에 포착했다. 그리하여 당시 학생과 시민들의 애국 열정 및 중국 공산당이 자행한 '6.4 대학살'을 역사의 증언대에 세웠다. 중국 공산당은 지금도 당시 학생들의 평화 시위를 ‘반혁명 폭란(暴亂)’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심지어 계엄군의 총기 난사 사실도 부인으로 일관하고 있다. 현장에 있었던 류젠(劉建, 19세, 학생)은 “역사는 지울 수 없다! 어떤 정부도 역사를 지울 수 없다. 우리는 중국인으로서, 또한 산증인으로서 진상을 밝혀 후대에 진실을 알릴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몇 년 전 해외로 이주한 그는 최근 자신이 중국 공산당에 세뇌당해 왔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들의 거짓말과 박해를 폭로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30년간 묻어두었던 '톈안먼 사건' 기록사진 2천 장을 공개하며, 발표 권한을 에포크타임스와 신탕런(NTD)에 위임했다. 다음은 그중 일부다. 이 ‘톈안먼 사건’ 관련 기사는 류젠의 진술에 근거해 작성하고, 톈안먼 사건을 직접 겪은 우런화(吳仁華)의 저서 <톈안먼사건대사기(天安門事件大事記)>에서 일부 가져왔다. 베이징 당국, 단식 대학생과의 대화 ‘결렬’ (4편에서 계속) 5월 13일 베이징대, 칭화대, 베이징사범대, 정법대 등 단식 청원에 참가한 13개 대학생 300여 명은 톈안먼 광장으로 행진햔 뒤 오후 5시 40분부터 단식 돌입했다. 이후 민중들의 지지와 성원이 이어졌다. 학생들은 정부에 대화단 대표와의 신속한 대화를 요구하면서 ‘동란’으로 매도한 학생운동의 명분을 바로잡고 애국 민주화 학생운동을 긍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베이징 당국은 5월 14일 오전 2시 반, 리톄잉, 리시밍, 천시퉁 등이 톈안먼 광장으로 출동해 단식 학생들에게 학교 복귀를 권유했다. 일부 학생들은 "너무 늦었어. 너무 늦었어" "오늘이 올 줄 알면서 애초에 왜 그랬어!"라고 외쳤다. 단식 학생 수는 천여 명으로 단번에 늘어났다. 톈안먼 광장은 낮에는 2만 명, 밤에는 10만 명의 시민과 학생이 함께 참여했다. 사회 각계각층에서도 단식 학생들을 지지하고 나섰고, 특히 베이징 지식층의 반향이 컸다. 사진=류젠 제공 사진=류젠 제공 사진=류젠 제공 사진=류젠 제공 사진=류젠 제공 베이징 소재 대학생들은 수업을 중단하고 단식 청원 학생들을 성원하고 나섰다. 베이징대, 베이징사범대 등 일부 교수는 '모든 교수에게 수업 중단을 제의한다'는 대자보를 붙여 "오늘 밤 11시 이전에 정부가 학생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15일 수업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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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학생들의 행진 대열이 톈안먼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1989년 톈안먼 사태 당시 베이징 학생들은 중국 공산당의 탄압에 항의하고 부패를 반대하고 민주를 요구하는 단식을 시작해 많은 민중의 지지를 얻었다. (류젠 제공) 1989년 봄, 수도 베이징에서 시작된 애국 학생 '민주화운동'이 중국 전역으로 번져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모든 과정에 참여한 베이징의 한 대학생이 이 역사적인 순간을 카메라에 담아 학생과 시민들의 애국 열정 및 중국 공산당의 잔인한 '6.4 대학살'을 증명했다. 중국 정권은 지금까지도 진상을 봉쇄하고 학생들의 평화 시위를 ‘반혁명 폭란(暴亂)’으로 몰아붙이고 있으며, 계엄군의 총기 난사 사실도 부인하고 있다. 당시 19세 학생이었던 류젠은 “역사는 지울 수 없다! 어떤 정부도 역사를 지울 수 없다. 우리는 중국인으로서, 또한 산증인으로서 사람들에게 진상을 밝히고 후대에 진실을 알릴 의무가 있다”고 했다. 몇 년 전 해외로 이주한 그는 최근에서야 자신이 중국 공산당에 세뇌됐음을 깨닫고 중국 공산당의 거짓말과 박해를 폭로하기로 결심했다. 최근 류젠은 30년 동안 묻어두었던 '톈안먼 사건' 기록사진 2천 장을 공개하며, 그 발표 권한을 에포크타임스와 신탕런(NTD)에 위임했다. 다음은 그중 일부다. 이 ‘톈안먼 사건’ 관련 기사는 류젠의 진술에 근거해 썼으며, 톈안먼 사건을 직접 겪은 우런화(吳仁華)의 저서 <톈안먼사건대사기(天安門事件大事記)>에서 일부 가져왔다. (3편에서 계속) 1989년 4.27 대행진은 베이징 각계의 폭넓은 지지를 받아 약 100만 명의 학생과 시민이 참여했다. 이들의 항의 시위를 외지의 대학생들이 응원하고 해외 유학생이 지원함으로써 규모가 크게 확대됐다. 중국 공산당의 국무원 대변인 위안무(袁木)는 압력에 못 이겨 학생들과 '대화'를 하면서도 가오쯔롄(高自联‧베이징대학교자치연합회) 학생들을 소외시켰다. 가오쯔롄은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의 겉치레 대화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베이징 대학생 대화단(團)을 별도로 구성해 정부에 탄원서를 보냈다. 이어 5월 4일에는 베이징 대학생 수만 명이 다시 한번 시위행진을 벌였고, 군경이 상징적으로 저지했으며, 민중 수십만 명이 연도에서 응원했다. 당시 전국 30개 도시에서 교사와 학생 9만 명이 시위행진을 벌였다. 당시 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은 학생의 애국정신을 인정하면서 ‘민주와 법제의 궤도상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오쯔양은 또 덩샤오핑에게 학생운동을 ‘동란’으로 규정한 '4.26' 사설을 거둬들이도록 설득하려 했지만, 리펑(李鹏)은 물러서지 않겠다고 했다. 정부도 대학생 대화단과의 대화를 거부했다. 단식 시작, 학생 선서 5월 12일, 가오쯔롄은 단식 결행을 발표하면서 세 가지 요구를 제출했다. 1.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신문 발행 금지 조치를 취소할 것을 요구한다. 2. 정부와 학생의 대화를 촉구한다. 3. 민주화 진전을 촉구한다. 당시 이미 왕단(王丹), 우얼카이시(吾爾開希), 슝옌(熊焱) 등 근 100명이 단식 대자보에 서명했다. 학생들은 단식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첫째, 수업을 거부한 채 벌이는 학생들의 항의 시위에 냉담하게 대응하는 정부의 태도에 항의한다. 둘째, 정부가 베이징 대학생 대표단과의 대화를 지연시킨 데 대해 항의한다. 셋째, 학생들의 민주화 애국 운동을 ‘동란’으로 매도한 당국의 일련의 보도 행태에 항의한다. 5월 13일 10시 30분, 베이징대 학생 단식단 100여 명은 머리에 흰 끈을 두르고 단식 선서를 했다. "조국 민주화를 촉진하고 조국 번영을 위해 자의적으로 단식한다." 베이징 학생들은 베이징대학교자치연합회(고자련)를 만들고 스스로 깃발을 만들었다. (류젠 제공) 13일 오후 1시경, 베이징대, 칭화대, 베이징사범대, 정법(政法)대, 베이징과기대, 베이징이공대, 베이징항공항천대, 베이징의대, 베이징농업대, 중앙민족대학, 베이징경제대학, 베이징기계공업관리대학, 중국청년정법학원 등 13개 대학의 단식 청원에 참가한 학생 300여 명이 베이징사범대에 모여 단식 결의를 다지며 맹세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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톈안먼 사태 당시, 베이징 각 대학의 학생들이 시위행진을 벌였고, 일부 베이징 시민도 이 대열에 동참했다. (류젠 제공) 1989년 봄, 수도 베이징에서 시작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애국 학생 '민주화운동'이 중국 전역으로 번졌다. 모든 과정에 참여한 베이징의 한 대학생이 이 역사적인 순간을 카메라에 담아 학생과 시민들의 애국 열정 및 중국 공산당의 잔인한 '6.4 대학살'을 증명했다. 중국 공산당은 지금까지도 진상을 봉쇄하고 학생들의 평화 시위를 ‘반혁명 폭란(暴亂)’으로 몰아붙이고 있으며, 계엄군의 총기 난사 사실도 부인하고 있다. 당시 19세 학생이었던 류젠(劉建)은 “역사는 지울 수 없다! 어떤 정부도 역사를 지울 수 없다. 우리는 중국인으로서, 또한 산증인으로서 사람들에게 진상을 밝히고 후대에 진실을 알릴 의무가 있다”고 했다. 몇 년 전 해외로 이주한 그는 최근에서야 자신이 중국 공산당에 세뇌됐음을 깨닫고 중국 공산당의 거짓말과 박해를 폭로하기로 결심했다. 최근 류젠은 30년 동안 묻어두었던 '톈안먼 사건' 기록사진 2천 장을 공개하며, 그 발표 권한을 에포크타임스와 신탕런(NTD)에 위임했다. 다음은 그중 일부다. 이 ‘톈안먼 사건’ 관련 기사는 류젠의 진술에 근거해 썼으며, 톈안먼 사건을 직접 겪은 우런화(吳仁華)의 저서 <톈안먼사건대사기(天安門事件大事記)>에서 일부 가져왔다. (2편에서 계속) 시민들, 학생들의 4·27 대규모 시위행진 적극 지지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胡耀邦)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세상을 떠나자, 베이징 각 대학의 학생들은 여러 차례 집회와 시위행진을 벌였다. 또한 23일 결성된 학생 조직인 ‘가오쯔롄(高自聯)’은 ‘민주화’ 등 7가지 항목의 요구사항을 제기하며 ‘애국무죄(愛國無罪·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죄가 없다)’ ‘부패척결’ ‘언론자유’ ‘독재반대’를 외쳤다. 4월 20일에는 일부 학생이 신화먼(新華門)에서 경찰과 충돌해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학생들은 분노했으며, 이때부터 시위 행렬이 수만 명 규모로 늘어났다. 4월 26일,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반드시 기치를 선명하게 하고, 동란(動亂)에 반대해야 한다'는 사설을 발표하자, 가오쯔롄은 대규모 시위행진을 준비했다. 그들은 앞선 요구사항을 두 가지로 변경했다. 첫째는 ‘동란’이라는 오명을 벗겨달라는 것이고, 둘째는 ‘평등한 대화’를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각 대학 총장들은 이들을 강력히 저지하고 나섰다. 당시 장핑(江平) 정법(政法)대 총장은 “너희들이 오늘 시위행진을 벌이다 다치기라도 하면, 너희 부모님께 이를 어떻게 설명하느냐?”며 학생들을 막아섰다. 그러나 4월 27일 오전, 베이징 지역 38개(54개라는 보도도 있다) 대학의 학생 수만 명이 반대를 무릅쓰고 베이징 주요 거리를 따라 시위행진을 벌였으며, 이 상황을 시민 수십만 명이 지켜봤다. 베이징 지역 대학생들이 대규모 시위행진을 벌이는 모습. (류젠 제공) 베이징 지역 대학생들이 대규모 시위행진을 벌이는 모습. (류젠 제공) 베이징 지역 대학생들이 대규모 시위행진을 벌이는 모습. (류젠 제공) 베이징 지역 대학생들이 대규모 시위행진을 벌이는 모습. (류젠 제공) 베이징 지역 대학생들이 대규모 시위행진을 벌이는 모습. (류젠 제공) 베이징 지역 대학생들이 대규모 시위행진을 벌이는 모습. (류젠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