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역병②] 명나라 말 창궐했던 역병에 청나라군이 감염되지 않은 이유

구위원
2020년 4월 8일
업데이트: 2020년 4월 8일

명나라는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의 총 17년 재위 기간, 15년에 걸쳐 7차례나 역병을 겪었다.

수도 북경은 백성 60%가 페스트로 죽었다.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던 소주(蘇州)에서는 23만 가구 중 5만 가구만 살아남았다.

나라 전체적으로는 인구 절반 이상이 페스트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명나라가 청나라가 아니라 쥐(페스트) 때문에 멸망했다고 한다.

흥미로운 점은 명나라를 공격한 군대는 감염 피해가 적거나 없었다는 점이다.

북경성을 침입한 이자성(李自成) 군대는 감염자가 적었고, 산해관으로 진입한 청나라 대군은 단 한 명도 역병에 걸리지 않았다.

이자성의 부대는 명나라 군대와 여러 곳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역병에 걸린 자는 소수에 그쳤다.

청나라 문헌에는 틈왕(闖王‧이자성)의 군사 중 역병으로 죽었다는 기록이 전혀 없고 명나라 지방지에 약간 기록됐다.

그 외 어떤 사료에도 이자성 군대의 역병에 관한 기록이 없다.

더 신기한 건 청나라 군대가 명나라 군대와 여러 차례 교전했지만, 역시 역병에 걸렸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페스트는 감염자의 침 등을 통해 호흡기로 감염되며 전염성이 아주 강하다. 게다가 당시 사람들은 격리조치를 할 줄 몰라 단 1명만 감염돼도 삽시간에 전군에 퍼질 수 있었다.

어떤 학자는 페스트를 옮기는 벼룩이 만주족이나 몽골족 군사들의 생활 수단인 말의 지린내를 무서워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명나라 명화 ‘출경입필도(出警入圖)’에서 황제를 그린 부분. | 퍼블릭 도메인

하지만 페스트는 전쟁터에서 고함을 지르며 육박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비말을 통해 전파될 수 있다.

중세 유럽의 흑사병 역시 칭기즈칸의 몽골 기병을 봐주지 않았다.

그렇게 창궐하던 페스트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기록에 따르면, 숭정제가 승하하고 청나라 군주 순치(順治)가 황제를 칭하며 명나라의 종말을 선포하자 수년간 기승을 부렸던 페스트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명나라 페스트, 한때 사망률 최고 100%

명나라 말에 유행한 페스트는 무시무시한 감염력과 치명력을 보였다.

여름, 겨울 환자들은 겨드랑이 등에 림프샘이 붓다가 딱딱해지는 증상(가래톳페스트)을 보이다가 몇 시간 내에 사망했다. 봄에 발병한 환자들은 가래 섞인 피나 수박즙 같은 핏물을 토하고 곧 사망했다. 어떤 약도 효과가 없었다.

청나라 때의 기록 중에 명나라 말기의 페스트 상황을 묘사한 내용이 있다.

“북경 군대 소속 조직량(曹直良)과 고유정(古遺正)이 찻집에서 손님을 만났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건네며 인사를 나누고는 몸을 똑바로 일으키기도 전에 숨이 막혀 사망했다.”

“병부(兵部) 관원 주념조(朱念祖)는 손님을 배웅하러 집 밖으로 나갔다가 막 대문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사망했다.”

 

왕조 말 부패와 재난으로 얼룩졌던 명나라

페스트는 청나라와 싸워야 하는 명나라 군대의 전투력을 크게 떨어뜨렸다.

명나라 군인은 ‘비쩍 말라 숫자만 채울 뿐’이었다. 북경성을 수비하는 병력 역시 5만에 그쳤지만, 그마저도 군량이 부족해 굶주리다 보니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고 한다.

‘명사기사본말(明史紀事本末)’에는 “북경성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에 15만 4천여 개의 타구(활 쏘는 구멍)가 있었지만, 병영에 역병이 발생하자 그나마 정예 병력은 환관이 선발해 갔기에 나머지 허약한 병사 5~6만 명과 환관 수천 명으로는 수비하기에 역부족이었다”고 기록했다.

역병이 닥치기 전 조정은 이미 회생불능 상태였다. 숭정제 자신은 비록 근면했지만, 신하들은 나태했고 관리는 부패했다.

장군들은 지방 세력과 결탁해 토지를 빼앗았고 백성들은 온갖 재난에 시달렸다.

숭정제는 이를 되돌리려 했지만 이미 몇 세대 전부터 환관의 무리가 조정을 어지럽혀 방법이 없었다.

중국 고대에는 하늘, 땅, 사람의 조화를 중요하게 여겼다.

청나라 진매(陳枚)가 그린 ‘경직도(耕織圖)‧제신(祭神)’. | 퍼블릭 도메인

황제와 제후,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하늘을 공경하고 신을 숭배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다.

덕(德)을 베풀고 하늘을 따르면 번창하고 덕을 잃고 하늘을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고 믿었다.

고대의 황제와 제후들은 권력은 신이 준 것임을 알았다.

큰 재난이 닥치면 잘못을 자신에게 돌리고 반성했으며, 동시에 신하들에게도 마음을 가다듬고 자신을 돌아보도록 했다.

기록에 따르면, 명나라 277년간 총 75차례의 역병이 발생했다. 말기를 제외하면 대부분 국지적인 역병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그리 자주 발생한 것은 아니다.

영락 9년(1411년) 7월 섬서(陝西)에 큰 역병이 발생했다. 영락제는 호부시랑을 지역으로 보내 신에게 제사를 올리게 했다. 제문에는 “하나라도 제자리를 잃게 하면 이는 모두 짐의 근심이 되나이다”라며 성심껏 간곡한 마음으로 신의 보살핌을 구했다.

황제와 제후들이 반성하며 치세에서 도리에 어긋난 점은 없었는지 돌이켜보는 동안, 백성은 서로 도우며 재난을 극복했다.

명나라 초기에 막원(莫轅)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이웃 마화(馬華) 가족이 역병에 걸려 죽고 오직 어린 아들만 살아남았다. 다른 이들은 역병에 걸릴까 봐 아이를 거두려 하지 않았지만, 막원은 의연하게 아이를 데려다 성인이 될 때까지 키워주었다.

가정(嘉靖) 시기에 광동 고주부에 서지부(徐知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친모와 서모가 역병에 걸렸다. 두 모친의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이 되자 가족들은 도피하기 바빴다. 하지만 서지부는 홀로 남아 두 사람을 지성껏 돌봤고, 마침내 병세가 호전됐다.

역병이 유행하는 시기에 역병을 다스리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역시 관리의 덕행과 어진 마음이었다.

가정(嘉靖) 시기 기록에 따르면, 형주지방 관리 이중계(李中溪)는 공사현장 일꾼들이 역병으로 죽자 직접 약재시장에서 인삼, 황기 등을 사다가 달여 먹여 수많은 환자를 구했다고 한다.

기록을 남긴 국자감 박사 이지(李贄)는 이중계가 쓴 약값은 4~5백금에 불과하지만, 수많은 역병 환자를 구해낸 건 그의 어진 마음이 천지를 감동시켰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늘날 역병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군주는 자신을 낮춰 스스로 돌아보고 널리 의견을 받아들이고 어진 정치를 베풀어야 한다. 그래야 천지신명을 감동시키고 많은 사람의 뜻을 모을 수 있다. 옛사람들의 방식이다. 때로는 구관이 명관인 법이다.


참고문헌
古金 《大明劫中的大疫之劫》, 張廷玉 《明史》, 羅欽順 《整庵存稿》, 黃宗羲 《明文海》, 李攀龍 《滄溟集》, 谷應泰 《明史紀事本末》, 曹樹基 《鼠疫流行與華北社會的變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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