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역병①] 역병에 무너진 로마제국, 그 역사가 전하는 메시지

진순천
2020년 3월 29일
업데이트: 2020년 4월 8일

역사는 되풀이 된다. 그래서 현재를 비추는 가장 좋은 거울이 된다. 역사적으로 발생했던 옛 사건들을 살펴보는 것은 오늘날 발생하는 사건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광활한 영토를 거느렸던 강대한 로마 제국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말을 맞았다. 거리 곳곳에서 사람들이 쓰러졌다. 어떤 이는 대화 도중 느닷없이 쓰러져 죽었고, 어떤 이는 물건을 사다가 갑자기 고꾸라졌다. 어떤 인부는 손에 공구를 쥔 채 급사했다.

도시는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 찾기가 더 어려워졌다.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 열에 아홉은 시체를 짊어지고 있었다.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은 집에 숨어지내며 죽어가는 이들을 보살폈다.

호화로운 저택은 무덤으로 변했고 귀족이나 천한 자나 죽음을 피해 가지 못했다. 거리에는 시신을 수습할 사람이 없어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갑작스러운 역병에 번화했던 도시는 순식간에 폐허가 됐다. 역병 뒤에는 기근과 내란이 찾아왔다. 흥청거렸던 거리는 적막에 빠졌고 도처에는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었다.

역사적으로 로마에는 대규모 역병이 네 차례 창궐했다. 현대 과학자들은 이 역병을 선페스트, 발진티푸스, 천연두와 같은 악성 전염병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이 역병들이 왜 특정 지역에 연달아 나타났고 또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한다.

기독교에서는 로마에 역병이 창궐한 건 로마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바른 신앙(正信)을 견지한 기독교도에게 피비린내 나는 박해를 가해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로마인의 죄와 거짓 신앙, 도덕성 타락에 대한 하느님의 응징이라는 것이다.

조스 리페랭스(Josse Lieferinxe) ‘역병 희생자를 위해 탄원하는 성 세바스티아누스’. 미국 볼티모어의 월터스 미술관 소장. 1497년 작품. | 퍼블릭 도메인

서기 79년의 대역병

서기 33년 예수는 로마의 유대 집정관 빌라도에게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 하지만 그 후로도 신도는 날로 늘어났다.

기독교 신자, 즉 예수의 제자들에 대한 박해는 다섯 번째 로마황제 네로에게서 시작됐고, 그 후 10명의 제왕에 의해 수백 년간 지속됐다.

서기 64년 7월 17일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했다. 음탕하고 잔혹하기로 유명한 네로가 궁전을 짓고 싶어 불을 지르라고 명령한 것이다. 6박 7일간 화마에 휩싸인 로마는 도시 3분의 2가 재로 변했다. 네로는 화재의 책임을 기독교도에게 돌리고 대량의 학살을 자행했다.

이때부터 로마인들은 기독교도들이 네로 황제를 숭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독교를 이단시하면서 박해하기 시작했다.

네로는 기독교도를 콜로세움에 처넣어 사자의 밥이 되게 했고, 심지어 건초더미에 묶어 놓고 불을 질러 황실 정원을 밝히기도 했다. 타락한 로마인들은 갈채를 보내며 광분했다.

68년 로마시에 폭동이 일어났고, 네로는 도주하던 중 자살했다. 79년 대역병이 빠르게 캄파냐 평원을 휩쓸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매일 로마인 만 명 이상이 죽었다.

로마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였던 타키투스는 ‘연대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로마… 집 안에 시체가 가득 쌓여 있고, 거리 곳곳에 장례 행렬이 이어진다.”

당시 황제 티투스도 이 역병으로 사망했다.

장 레옹 제롬 ‘기독교 순교자들의 마지막 기도(The Christian Martyrs Last Prayer)’, 1883년. 미국 볼티모어 월터스 미술관 소장. | 퍼블릭 도메인

안토니우스 역병

기독교 박해는 네로 황제 당시 로마시에 국한됐지만, 서기 161년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가 황제가 된 후에는 전국으로 확대됐다.

당시 로마인들은 정부의 거짓말에 속아 기독교인들이 미신을 유포한다며 증오했다.

안토니우스는 기독교인을 고발하는 사람에게 그들의 재산을 준다는 조서를 내렸다. 유혹에 빠진 로마인들은 기독교인들을 찾아내 고발했다.

안토니우스는 온갖 고문으로 기독교인들에게 신앙을 포기하라고 강요하고 포기하지 않으면 무차별 학살했다.

안토니우스가 집권한 지 5년째 되던 166년, 역사적으로 ‘안토니우스 역병’이라 불리는 대역병이 찾아왔고, 그의 이름은 영원히 이 역병과 함께 묶이게 됐다.

165년부터 180년까지 로마 전역을 휩쓴 이 역병은 천연두로, 동쪽 변경의 파르티아와의 전쟁 후 로마로 돌아온 병사들에 의해 유입됐다. 기독교인들은 로마 시민 수백만 명이 죽고 황제 안토니우스의 목숨까지 앗아간 이 안토니우스 역병을 기독교 박해에 대한 천벌로 여긴다.

1년이 지나지 않아 역병으로 죽은 사람이 전장에서 사망한 사람보다 훨씬 많았다. 평균 사망률은 7~10%였고, 로마 시민과 군인의 사망률은 13~15%에 달했다. 매일 로마 시외로 실어나른 시신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각지의 민중들은 공황에 빠졌다. 뿔뿔이 숲이나 광야로 도망가는 바람에 이탈리아와 주변 도시들은 텅 비었다. 농촌은 인적이 끊겼고, 곡식이 익어도 수확하는 사람이 없었다. 면양, 염소, 소, 돼지는 방목할 사람이 없어서 다시 야생으로 돌아갔다. 이어서 기근이 왔다.

많은 귀족이 죽었다. 서기 169년, 안토니우스와 공동 황제였던 루시우스 베루스(Lucius Verus)가 군대에서 역병으로 죽었다. 이어서 180년, 안토니우스 황제 역시 원정 도중 역병에 걸려 막사에서 앓다가 7일 만에 죽었다. 바로 이 해에 역병이 잠시 수그러들었다.

9년 후, 다시 한번 역병이 창궐했다. 이때는 광범위하게 퍼지지 않고 로마 시내에 집중적으로 발병했는데, 가장 심할 때는 하루에 2000명 넘게 죽었다.

이 역병은 16년간 기승을 부렸다. 역사학자들은 총사망자 수가 500만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콘스탄티노플 주민 절반이 죽는 등, 로마 제국은 인구 3분의 1을 잃어 병력이 크게 약화됐다. 이로써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 3대륙을 지배했던 고대 로마제국은 쇠락으로 치닫기 시작했고, 황금시대는 이것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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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프리아누스 역병

로마제국에 위기가 겹친 서기 249년 데시우스가 즉위했다.

그는 제국이 쇠락한 원인을 종교‧신앙의 자유 탓으로 돌리고 강제로 신앙을 통일해 민중이 기독교를 믿지 못하게 했다. 그는 기독교도 박해를 최우선 임무로 삼고 국가 권력을 동원해 기독교 교리와 계율 및 신앙심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서기 250년, 데시우스는 모든 로마 시민에게 로마 신상(神像)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칙령을 내리고 모든 시민에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기독교를 포기하게 했다. 이를 거부하는 자는 감옥에 가두거나 재산을 몰수하거나 노예로 삼거나 사형에 처했다.

많은 성소가 파괴됐고, 다른 신에 대한 제사를 거부하고 신앙심이 강했던 많은 기독교도가 처형됐다. 당시 감옥의 간수였던 성 이폴리트(Saint Hippolyte)는 기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데시우스 황제에게 사지가 찢어지는 형벌을 당해 순교했다.

데시우스는 즉위 2년 만에 전사했다. 서기 250년에 역병이 다시 찾아왔다. 초기 기독교 저술가인 키프리아누스가 발견하고 기록했다고 해서 ‘키프리아누스 역병’으로 불리는 이 악성 전염병은 발진티푸스일 가능성이 높다.

이 역병은 20년 가까이 창궐했다. 누적 사망자가 2500만 명에 달했고, 당시 황제였던 클라디우스 2세 고티쿠스(재위 268-270년)도 사망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역병은 제국의 질서를 무너뜨렸다. 인구가 격감했고, 경제는 몰락했으며, 내전이 끊이지 않았다. 이를 ‘3세기의 위기’라고 부른다. 이후 로마제국은 쇠락하기 시작해 다시는 전성기를 구가하지 못했다.

Kenny Goh Wei Kiat/Fotolia

키프리아누스 대역병 때도 안토니우스 역병 때와 마찬가지로 로마 정부는 역병을 구실로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기독교를 박해했다.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여러 신들을 멸시했기 때문에 로마 신들이 분노해 역병을 내렸다고 소문을 퍼뜨린 후, 이를 구실로 로마 역사상 가장 큰 종교 박해를 감행했다. 당시 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모든 로마인에게 로마교를 믿도록 요구했고 기독교를 믿는 사병은 군대에서 축출했다.

서기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기독교 모임을 불허하고 교회와 성물(聖物)을 파괴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많은 교회가 파괴되고 성경이 불태워졌으며 수많은 신도가 학살당했다.

서기 312년 겨울에 기근이 든 후, 로마제국 서부에서 다시 역병이 발생했다. 이 병은 후세에 천연두로 확인됐다. 감염되면 전신에 고통스러운 악성 종기가 생겼고, 도시에서는 역병과 기근이 겹쳐 시골보다 사망률이 훨씬 높았다.

여러 가지 위기가 겹친 로마제국은 역병으로 심한 타격을 받은 후 90년을 채 버티지 못했다. 395년, 제국은 동서로 양분됐다.

서로마제국은 410년 수도 로마가 처음으로 서고트족에게 약탈당했다. 412년에 스페인이 함락됐고, 439년에 북아프리카 영토를 잃었고, 446년에는 브리타니아가 떨어져 나갔다. 455년에 로마가 다시 약탈당했고, 468년 북아프리카 원정에서 참패한 후 476년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했다.

소아시아 지역을 지배한 동로마제국(비잔티움제국)은 1453년까지 존속했다.

로마의 원형 경기장 콜로세움(Colosseo). | Diliff/위키피디아

유스티니아누스 역병

서기 6세기에 세계적인 대역병이 동로마제국에서 발생했다. 이 역병은 흑사병(선페스트)으로,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483-565)’ 시대에 발생했다고 하여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으로 불린다.

541년에서 542년 사이에 유행한 이 역병은 북아프리카에서 발생해 이집트로 퍼진 후 동로마제국 전체를 휩쓸었다. 역병이 맹위를 떨칠 때는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만 매일 5천 명 이상이 죽었고, 최종적으로는 수도 거주민 40%가 죽었다.

한때는 사망하는 속도가 시신을 매장하는 속도보다 빠를 정도였다. 일가족이 모두 죽고 한 마을이 전멸하는 사례가 속출하면서 동로마제국의 인구가 20~25% 줄었다.

수확기가 돼도 곡식을 추수할 사람이 없자 기근이 더 심해졌고 도시에 식량 공급이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행정 업무는 마비됐고 상공업도 완전히 중단됐다. 공중도덕이 붕괴해 약탈과 폭력이 급증했고, 곳곳에서 충돌이 발생해 사회가 불안해졌다. 물가가 상승하자 국가 재정에도 압력이 가중됐고 중앙집권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말년에는 군사력마저 70% 이상 줄어들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역병은 전례 없이 규모가 컸으며 계절에 상관없이 연중 내내 발생해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다. 543년에는 이탈리아, 안티옥, 시리아, 파키스탄과 페르시아로 전파됐고 나중에는 유럽의 영국, 아일랜드에까지 퍼졌다. 이후 200~300년간 여러 지역을 휩쓸었고 6세기 내내 5차례나 주기적으로 발생해 총 3000만~5000만 명이 사망했다. 이는 당시 로마제국 전체 인구의 40%에 달하는 수치다.

당시 로마인들은 생명을 경시하고 도덕이 타락했으며 문화가 병들고 백성들의 풍속이 문란했다. 특히 음란이 극에 달해 난륜과 간통이 일상사가 됐다.

당시 로마 지식인들은 모두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을 하느님의 징벌로 여겼다. 로마인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자신들을 심판한 것으로 여긴 것이다.

그러자 비관적인 정서가 만연했다. 하느님 외에는 그 누구도 역병의 추세나 결말을 알 수 없고 통제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 퍼블릭 도메인

당시 역병을 직접 겪었던 요한은 성도(聖徒)들의 행보를 기록한 경서에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의 펜으로 우리의 후손들에게 ‘하느님이 우리가 범한 셀 수 없이 많은 사건 중 일부에 벌을 내리셨음’을 알려야 하는데 이렇게 하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 후손들은 우리 자신의 범죄로 인해 우리가 당한 끔찍한 재앙에 대해 앞으로 남은 세월 동안 두려워하고 놀라워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같은 불행한 사람들이 받은 벌로 인해 더 현명해질 것이고 또 그렇게 됨으로써 하느님의 분노와 미래의 고난으로부터 그들 자신을 구해낼 수 있을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도 59세 때 역병에 걸렸다. 하지만 공황 상태에 빠질까 봐 궁중 소식을 엄밀히 봉쇄해야 했다.

그는 565년에 사망했다. 야심만만하게 제국의 부활을 꿈꿨던 이 로마 황제는 세상이 자신의 손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그가 죽은 후 동로마제국은 날로 기울었고, 결국 오스만제국에 의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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