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전제정권 지도부의 성문란은 ‘여기’에서 비롯됐다

편집부
2020년 03월 22일 오후 4:11 업데이트: 2020년 03월 22일 오후 5:56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지난 2014년 ‘관리간통지도(官员通奸地图)’라는 자료를 공개했다. 이 자료에서는 12개 지역에서 31명의 관리들이 “두각을 나타냈다”고 신문은 전했다.

국무원 산하 신문판공실의 뉴스웹사이트 중국망(chian.org.cn) 영문판은 반부패 운동 기간 낙마한 관리 95%가 내연녀를 두고 있었다는 내용을 실었고(링크) 이 내용은 BBC와 뉴욕타임스 등에도 인용됐다.

중국 공산당(중공)의 공직자감사기관인 중앙기율검사위원회는 부정부패로 체포된 국장급 이상 간부 90%가 내연녀를 거느렸고, 여러 부패관료가 1명의 내연녀를 공유하기도 했다는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중공 관리들의 음란과 성문란은 일부가 아니라 거의 모든 관리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2015년 남방도시보(南方都市報)는 선전(深圳)시 공무원 루모룽(盧某榮)이 내연녀에게 고발을 당해 일주일에 3회 잠자리를 갖기로 하는 각서를 쓴 사건을 보도했다.

바람피우기에 앙심을 품은 내연녀에게 부정부패 사실을 고발당한 희한한 사건이었다. 고발장에서 루씨는 유부녀와의 간통, 허위증명서 발급, 고리대금 등으로 고발됐다.

중국 온라인에는 반부패 과정에서 극악한 성적 타락이 밝혀진 관리들의 명단도 나돌아다닌다.

공직생활의 목표를 부정축재에만 두었던 장쑤(江蘇)성 건설청장 쉬치야오(徐其耀)는 총 146명의 정부를 둔 것으로 드러났고, 충칭시 선전부장 장중하이(張宗海)는 고급호텔에 미혼 여대생 17명을 투숙시켜두고 관계를 맺은 것으로 밝혀졌다.

성생활 일기 95권을 작성하고 복사본을 배포한 하이난성 방직국장 리칭산(李慶善), 고등학생 미성년자로만 정부 20명을 거느린 러산(樂山)시장 리위수(李玉書), MBA 학위를 살려 77명 정부를 ‘관리’한 안후이성 쉔청(宣城)시 부서기 양펑(楊楓) 등이 명단에 올랐다.

이러한 중국 공산당의 음란함은 수십 년 전부터 이어졌다. 공산주의 혁명이 한창이던 1930년대 공농홍군(中國工農紅軍)의 모집포스터에는 ‘밥을 먹고 싶은가? 세내지 않고 농사를 짓고 싶은가? 지주와 부자의 첩들과 자고 싶은가? 홍군에 참가하라’는 문구가 실려 있었다.

둥방훙 원래 가사 | 바이두 화면 캡처

마오쩌둥의 찬양하는 혁명가 ‘동방홍(東方紅)’의 원본 가사는 ‘팔로군(중공군의 하나)에 입대한 사람은 아내가 없는데, 위린(榆林)성을 함락시키면 얼씨구나! 사람마다 여학생 하나씩이다’라는 내용이다. 이후 가사는 오늘날 동방훙 노래처럼 성적인 내용이 삭제되고 새롭게 고쳐졌다.

첩을 두고 여대생을 정부로 거느리는 것은 중국 공산당이 발동한 공산주의 혁명의 초심(初心)이었다.

이런 초심은 더욱 깊은 기원이 있었다. 바로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의 음란함과 성문란이다.

마르크스는 1843년 남작가문의 딸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결혼했지만, 아내의 집안에서 보낸 임신 중인 아내를 도우라고 보낸 22세 처녀 가정부 헬레네 데무트를 성적으로 착취했다. 마르크스는 평생 착취를 극도로 증오하는 척했지만 그 자신은 ‘자본가’ 엥겔스가 착취해온 돈을 거리낌 없이 쓰고 가정부를 성착취해 1850년 사생아를 낳았다.

이로 인해 아내와 불화가 생긴 마르크스는 독신이었던 엥겔스에게 ‘공산주의자 동맹’의 명예를 위해 희생할 것으로 요구했다. 엥겔스는 사생아에게 자신의 성(프리드리히)를 붙여 한 노동자 집안에 양육을 맡겼고, 죽기 직전 후두암으로 말을 할 수 없게 되자 ‘헨리 프리드리히는 아들’이라는 메모를 남겨 억한 심정을 드러냈다.

AP Photo, File

엥겔스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가정도 원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맨체스터에서 사실혼 관계였던, 메리의 동생 리디아 번즈, 그리도 두 사람의 조카들과 한 방에서 생활하며 초기 공산주의 집단생활을 했다. 엥겔스는 메리가 숨지자 리디아와 연인인 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셋은 모두 동거생활을 하고 있었다.

레닌은 구소련이 붕괴된 후 공개된 기밀문서를 통해 사망원인이 매독으로 밝혀졌다.

레닌은 청소년 시절부터 음란한 생활 때문에 매독에 걸렸고 25세부터 매독 치료를 받았지만 평생 치유되지 못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옥화칼륨이라는 당시 매독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약물을 대량으로 투약했다. 레닌은 신경성 매독으로 인해 뇌 기능에 심각한 손상을 입어 결국 사망에 이르렀다.

레닌 사후 부검에 참여한 의사 27명 중 8명은 체내 탄두와 뇌동맥경화라는 사망진단서에 서명해 레닌의 명예를 보호하려 했다. 그러나 주치의 2명 등 나머지 19명이 거부했다. 구소련 고위 의사들은 이를 알았지만 국가의 힘 앞에 발설하지 못했다.

스탈린은 23세에 알릴루예바에게 반해 관계를 맺었다. 스탈린이 이후 전우 아랴오샤의 여동생 카잘을 아내로 맞이했고, 카잘이 죽고 나자 안나라는 여자와 비밀리에 결혼했다. 그러나 6년만에 스탈린은 25세 연하의 스베틀라나를 아내로 맞이했다. 자신의 부인이었던 알릴루예바의 딸이었다. 스탈린은 스베틀라나가 자신의 친딸인 것을 알고 있었다. 훗날 스베틀라나는 자살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공산주의 지도자 가운데 가장 방탕하고 지저분한 성생활을 한 인물이다. 첫째 부인이 살아 있을 때 둘째 부인을 뒀고, 다시 바람을 피워 배우출신 이혼녀와 세번째 결혼을 했다. 평생 성병을 앓았으며 순박한 10대 소녀와 유부녀들을 건드려 병을 옮겼다.

그래픽=에포크타임스

중국 공산당 관료사회 부정부패와 성적타락은 장쩌민(江澤民) 전 총서기 집기시기에 대거 확산됐다. 반부패 숙청의 주된 대상들이 모두 장쩌민 시기 요직을 꿰찬 인물들이었다.

장쩌민 전 총서기는 집권 10여 년 동안 앞장서서 음란한 생활을 했다. 장쩌민의 정부는 매우 많다. 쑹주잉(宋祖英), 리루이잉(李瑞英), 천즈리(陳至立), 황리만(黃麗滿) 등과의 추잡한 스캔들은 언론을 통해 해외에도 여러 차례 보도됐다. 그중 가수 쑹주잉은 장쩌민의 후원에 힘입어 국민여가수로 군 소장 계급까지 달았다.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시장의 사생활은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그의 재임기간 이를 다룬 언론기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지독한 언론 검열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보시라이는 청렴한 이미지로 여성들의 환심을 샀다. 그러나 낙마한 뒤 수백명과의 스캔들이 터져나왔다. 이중 28명은 가수, CCTV 아나운서, 모델 등 인지도가 높은 여성들이었다.

저우융캉(周永康) 전 정법위원회 서기는 심복인 보시라이가 상납한 여성들과 내통했는데 명단이 확인된 인물은 30여명으로 가수, 연예인, 여대생이 포함됐다. 저우융캉은 베이징에만 6곳의 비밀궁전을 두고 음탕한 생활을 벌였다.

한국 사회의 경우 90년대 운동권과 노조에서 벌어졌던 여학생을 강간, 윤간 사건이 공산주의 성문란과 궤를 같이한다. 당시 운동권에서는 ‘통이 커야 한다’ ‘운동관이 철저하지 못하다’ ‘여성성을 버려라’ 등 해괴한 논리로 운동권 내부 여성 성폭력을 묵인, 은폐한 사건들이 존재했다.

2008년 발간된 전희경의 책 ‘오빠는 필요 없다’에서는 이러한 운동권 여성 성폭력 관행들이 잘 드러나 출간 후 화제가 됐었다.

오늘날 공산주의 체제하의 대대적인 성 스캔들은 일반적인 국가에서의 개인, 일부 집단의 일탈과는 규모나 질적인 악랄함에서 차이가 있다. 공산주의 시스템이 존재하는 한 이런 스캔들은 끊임없이 벌어질 것이다.

이 기사는 지난 2018년 본지에서 보도한 ‘中 고위 관리들의 타락한 성생활은 어디서 왔나’를 기반으로 했습니다.

*이 기사는 저자의 견해를 나타내며 에포크타임스의 편집 방향성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