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 선포하고 군사법정 세워 ‘구국의 위인’ 평가받은 美대통령

량웨이
2020년 12월 31일
업데이트: 2020년 12월 31일

에이브러햄 링컨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중 하나다. 그는 자유를 존중하고 천부인권(天賦人權)을 믿었다. 그가 반포한 흑인노예해방선언 및 그가 남긴 정신과 형상은 후대 자유민주 세계의 상징과도 같이 되었고 그가 떠난 후 1백년이 지난 미소 냉전기간에도 공산주의 정권하에서 압박받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희망을 주었다.

하지만 자유란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링컨은 남북전쟁이란 위기의 순간에 인생 최대의 고험에 직면해야 했다. 자유를 숭상하던 그였지만 사분오열의 위기에 처한 미국을 구하기 위해 단호하게 11주에 걸친 계엄령을 발표해 정세를 만회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그가 이런 좋은 선례를 남겼기 때문에 이후 미국은 안전과 자유를 함께 고려하고 순조롭게 2차례 세계 대전을 넘겼으며 세계 최강대국이자 자유세계의 모범이 될 수 있었다.

힘겨웠던 어린 시절

어린 시절 링컨의 삶은 몹시 힘겨웠다. 어려서부터 부친을 따라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지어야 했으며 젊어서는 정원사, 상점 점원, 목수 등 밑바닥부터 일을 했다. 하지만 그는 순박하면서도 정직했고 아주 성실한 태도를 지녔다. 한번은 상점에서 물건을 산 고객이 잔돈을 두고 간 일이 있었다. 그는 약 2.4km를 뛰어가 고객을 만난 후 돈을 돌려주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성실한 에브’라 불렀다.

비록 생활은 어려웠지만 링컨은 독서에 큰 노력을 기울여 어려서부터 이미 학식을 갖췄다. 그가 가장 좋아한 책은 ‘워싱턴 전기’였는데 이 책의 부록에 나오는 미국을 건국한 선현들이 쓴 ‘미국 독립선언서’의 서두는 “사람이 추구하고 쟁취하는 모든 것은 다 신이 사람에게 부여한 권리에 따라 진행된다”고 했다. 소년 링컨은 이때부터 그와 평생을 같이할 ‘천부인권’에 대한 신념을 갖게 되었다.

성년이 된 후 블랙호크 전쟁(미국 정부와 원주민 사이의 전쟁)이 발발하자 징병에 응해 군대에 들어가 중대장을 맡기도 했다. 전역 후에는 또 인연에 따라 휘그당에 가입해 정치무대에 진출했다. 25세의 링컨은 일리노이 주 하원의원에 당선되었고 변호사 자격도 취득했다. 하지만 이후 몇 차례 낙선한 후에는 변호사 업무에 열중했다. 이 기간에 그는 변호사로서 정의와 성실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는 오직 정의로운 소송만을 맡았고 궤변에 의지해 소송을 이기려 하지 않았다. 설사 소송에서 이겼더라도 의뢰인에게 보너스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링컨은 또 무료로 가난한 사람들의 소송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1863년 54세 당시 | Public Domain

1854년 공화당이 탄생하면서 링컨은 노예제에 반대하는 이념에 따라 이 신생정당에 가입했다. 그는 100여 차례 연설을 통해 공화당 대통령 후보 존 프레몬트의 선거운동을 헌신적으로 도와주었고 이를 통해 공화당 내 지위를 확고히 했다. 다음 선거인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링컨은 공화당의 추천을 받아 대통령후보가 되었다. 4명의 후보를 두고 치러진 대통령 경선에서 링컨은 결국 40%의 지지를 받아 승리했고 미국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남북전쟁과 링컨의 계엄

링컨은 노예제 폐지론자 중에서 온건파에 속했다. 그는 미국 전역의 노예제 확산에는 반대했지만 이미 노예제도가 있던 기존 주들에 대해서는 기득권을 인정했다. 하지만 대선 전부터 그를 믿지 못했던 많은 남부의 지도자들은 “만약 노예제 확대에 반대하는 링컨이 당선되면 남부 여러 주들은 곧 미합중국을 탈퇴할 것이다”라고 위협했다.

1861년 2월 4일 결국 남부 일곱 개 주가 남부 연방을 만들어 남과 북에서 두 개의 정부가 대치하는 상태가 형성되었다. 링컨은 정식으로 대통령에 취임한 후 자신의 결심을 분명히 드러냈다. “모든 힘을 다해 미국의 분열을 저지하고 미국 역사상 최대의 분열위기를 구해낼 것이다.” 4월 12일 남부 군대가 북부 소속의 섬터 요새를 공격하자 링컨이 이끄는 연방정부는 어쩔 수 없이 응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미국 역사상 가장 큰 내전인 남북전쟁이 시작된 계기다.

전쟁이 터졌을 때 의회는 마침 휴회 중이었기에 링컨은 의회의 비준 없이 즉각 징집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일련의 단호한 조치들을 취했다. 이중에는 우체국에 반군의 편지전달을 금지하고 남부 항구를 봉쇄하며 군대에 반란자들에 대한 체포권한을 부여해 임시적으로 인신보호영장(Habeas Corpus)을 중단한 것 등이다.

인신보호령(Habeas Corpus)의 임시 중단

1861년 4월 전쟁으로 인한 남부의 반란활동을 효과적으로 제지하기 위해 링컨은 필라델피아에서 워싱턴에 이르는 일선부대 지휘관들에게 인신보호영장을 임시 중단할 권한을 부여했다. 심지어 북부 일부 주의 위험지역에 대해서는 계엄을 실시해 인신보호영장을 중단하고 또 파괴분자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하게 했다.

당시 메릴랜드주의 반란상황이 심각했기 때문에 연방군은 볼티모어 시장과 경찰서장, 의원 및 존 메리먼(Merryman)을 우두머리로 하는 일부 반란자들을 체포했다. 메리먼이 군대의 체포에 불복하자 대법원장 로저 브룩 토니(Roger Brooke Taney)에게 서신을 보내 영장 발부를 요청했다. 토니는 이에 응해 인신보호영장에 서명하고 당시 그를 수감하고 있던 맥켄리(McHenry) 요새의 조지 캐드월러더(George Cadwalader) 장군에게 메리먼을 법원으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원래 인신보호영장은 법원이 불법으로 구금된 시민을 심사하거나 또는 재판지역이나 안건을 옮길 때 발부하는 영장이다. 하지만 캐드월러더 장군은 링컨의 명령을 이유로 그의 요구를 거부했다. 결국 토니는 법정모독죄로 법원 경위를 파견해 그를 체포하게 했지만 장군 휘하의 병사들에게 가로막혀 영장을 집행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이렇게 강하게 대치했다.

토니는 링컨이 인신보호영장을 중지한 것에 대해 비난하며 백악관으로 판결문을 보내 답변을 요구했다. 7월 링컨은 의회의 질문에 응답하는 과정에서 대법원장에게 자신이 한 방법은 헌법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반란행동이 확실히 존재했으며 또 공공의 안전을 위해 잠시 인신보호영장을 중단할 필요가 확실히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미국 연방의 와해는 미국인뿐만 아니라 결국 인류가 피해를 보는 하나의 비극이 될 것입니다. 미국의 제도는 일종의 시민자치능력 실험을 대표하며 이 실험은 세계 인류의 생활방식이 될 것입니다.

만약 그것(미국의 제도)이 실패한다면 독재자와 그들을 옹호하는 자들은 말할 것입니다. 시민은 그들 자신을 관리할 능력이 없으니 반드시 강한 사람이 그들을 통치해야 한다고. 이 내전은 세계민주정치의 운명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오직 하나의 법률 때문에 모든 법률을 집행할 수 없고 그 법률을 위배하지 않기 위해 정부 자체를 조각내야 할까요? 설사 그런 경우라 해도 만약 내가 정부가 전복되게 한다면 이는 내가 대통령 취임선서를 위배하는 것이 아닙니까!”

링컨은 이처럼 세계 민주정치의 운명을 마음에 담고 나라와 헌법을 수호할 태도를 단호히 드러냈다. 그러자 베티스 검찰총장은 링컨의 정책을 지지한다고 했고 의회 역시 대통령의 권력임을 인정했다. 나중에 의회에서 인권보호영장 일시 중단을 추인해 링컨을 지지하자 토니도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사법정에서 반란자 심판

하지만 전쟁이 계속 확대되면서 링컨 대통령은 현행 법률만으로는 반란 군중들을 다스리기에 부족하다고 여겨 1862년 9월에 진일보로 계엄령을 내렸다. 그 내용은 반란에 참여하거나 교사한 자들에 대해 계엄법을 적용해 군사재판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군대 장교들이 각지에서 반란에 가담한 민중들을 체포했으며 최종적으로 14000여 명의 정치범들이 체포되었다. 이 기간에 각 지역의 법원은 링컨의 행동에 대해 묵인했고 군사당국과 아무런 충돌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들 대부분은 전쟁이 끝난 후 석방되었지만 일부는 교량폭파, 도로 및 군사시설 파괴 등 심각한 범죄행위를 저질러 형기가 연장되었다. 하지만 이들조차 보편적으로 자신들에게 죄가 있다고 인정했다.

언론과 출판 자유의 제한

전쟁이 진행되고 계엄령이 발동됨에 따라 많은 매체들이 링컨 정부를 공격하는 기사를 발표했다. 링컨을 독재자로 비판하거나 심지어 인신공격을 하는 경우까지 나타났다. 뉴욕의 ‘데일리 뉴스’ 등 야당성향의 여러 매체들이 수많은 사설을 발표해 정부의 노예 석방과 국가통일정책을 공격했다. 초기에 링컨 대통령은 이런 보도에 대해 용인하는 동시에 정부부문에 매체의 언론자유를 간섭하지 말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수많은 매체들의 비판이 더 심해지고 끊임없이 거짓말을 만들어 먹칠하거나 공개적으로 군사기밀을 누설하면서 민중들에게 정부에 대항하라는 반란선동을 부추겼다. 결국 링컨은 어쩔 수 없이 반격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고 1년 사이 수백 개 매체가 폐간되었고 관련 설비를 몰수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군사기밀을 누설한 매체 책임자 1명만이 판결을 받았다.

국가의 구원자

링컨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반란에 대처해 11주에 달하는 계엄령을 선포했고 자유를 제한하는 일련의 행동들을 발표했다. 그러나 반대파들의 초기 사소한 비평을 제외하면 당시 의회는 정식으로 그에게 반대하지도 않았고 나중에는 오히려 입법을 통해 링컨의 모든 조치들을 추인해 주었다. 대법원도 결국에는 링컨의 조치가 헌법위반이라고 판단하지 않았다. 백년이 지난 후 2차례 세계대전에서 미국 정부는 여전히 링컨 대통령의 당시 선례를 따라 수많은 비상조치를 채택해 국가안전을 보호할 수 있었다.

1863년 11월 19일 남북전쟁이 도처에서 우세한 상황에서 링컨은 게티즈버그 국립묘지봉헌식에서 저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을 했다. 첫 시작은 그가 어릴 때 즐겨 읽던 독립선언서와 같다.

“87년 전 우리의 선조들은 이 대륙에 자유의 정신으로 잉태되고 만인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신념이 바쳐진 새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지금 우리는 바로 그 나라가, 아니 이러한 정신과 신념으로 잉태되고 헌신하는 어느 나라이든지, 과연 오래도록 굳건할 수 있는가 하는 시험대인 거대한 내전에 휩싸여 있습니다. …
이 자리에서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있는 그 위대한 사명, 즉 고귀한 순국선열들이 마지막 신명을 다 바쳐 헌신했던 그 대의를 위해 더 크게 헌신해야 하며, 이분들의 죽음을 무위로 돌리지 않으리라 이 자리에서 굳게 결단해야 하며, 이 나라가 하나님 아래에서 자유의 새로운 탄생을 누려야 할 뿐 아니라,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가 지상에서 소멸하지 않아야 한다는 그 위대한 사명에 우리 스스로를 바쳐야 합니다.”

이 연설은 대대로 전해지는 고전이 되었고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설의 하나이다.

1865년 4월 9일 남부 연맹이 투항하면서 4년을 끌어온 남북전쟁은 마침내 끝났고 미국은 다시 통일국가가 되었다. 링컨은 성공적으로 미국을 이끌어 역사상 가장 심각했던 도덕, 헌정 및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고 노예제를 폐지해 미국을 현대 민주국가의 모범으로 만들었다. 또 미소 냉전기간에 링컨의 이미지는 자유의 상징이 되었고 그가 지키고자 했던 민주정신 역시 공산정권 치하에서 박해받는 수많은 민중들에게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후대 미국 역사가들은 그를 이렇게 평가한다.

미국 최초의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국부(國父)였다면 제16대 대통령 링컨은 나라를 구원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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