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결(貞潔)’은 도덕의 초석이자 인류 행복의 근원②

Ling Xiaohui
2019년 06월 10일 오후 10:32 업데이트: 2019년 12월 5일 오후 4:02

속담에 ‘한 대(代) 좋은 아내가 없으면 십 대 걸쳐 좋은 자식이 없다’는 말이 있다. 여성은 자식을 낳고 기르고 가르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신이 준 도덕을 유지해 인류사회가 부패하지 않게 하는 책임도 맡고 있다. 고대에 맹자 어머니가 아들 교육을 위해 이사를 세 번 하고 또 ‘베틀의 날실을 잘랐다(孟母斷機)’는 이야기가 있다. 또 악비의 어머니가 아들 몸에 나라에 충성하길 바라는 글자를 새긴 이야기도 있다. 어머니는 늘 자녀에 대한 관심과 뛰어난 덕성으로 자녀엑 지대한 영향을 준다.

정결(貞潔)은 여성의 자기 사랑, 그 자체이자 생명 본원의 요구다. 또한 신이 자신의 형상을 본떠 사람을 만들 때 주입한 생명 요소일 수도 있다. 따라서 순결한 여자라면 누구라도 정조를 자신의 생명보다도 더 중하게 여긴다.

4. 여성은 인류 도덕을 수호하는 구심점이다

사물이 발전하는 데는 사회가 변하든 사물을 인식하는 인간의 관념이 변하든 물리화학적 변화가 있든 그 변화 과정에 모두 관건적인 요인이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도덕이 세대를 거쳐 전승되는 데도 핵심축(linchpin)이 필요한데, 바로 여성이 그런 역할을 한다.

(1) 정조

윤리 도덕 관점에서 ‘정조를 지킨다(守貞)’는 것은, 결혼 전에는 순결을 지킴을 뜻하고 혼인 이후에는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성 접촉을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1]

전통문화 속에서 이 의미는 개인적인 요구에서 사회적인 요구로 확대됐다. 즉, ‘정조’는 여성의 개인적 순결에서 사회적 ‘성실’, ‘충성’이란 개념으로 확장됐다. 다시 말하면 남녀 모두에게 요구하는 기본적인 인격 요소가 됐다.

정조에 관한 인식과 관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또 종교(정교)·문화(전통문화)와 관계없이 모두 일치한다. 이는 여성이 인류 도덕을 수호하는 특수한 역할과 특별한 작용을 담당한다는 것을 설명한다.

여성은 인류 도덕을 수호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조물주는 정조와 관련해 여성에게 특수한 요구를 했다. 유혹과 욕망에 쉽게 빠지지 않도록 정조를 목숨처럼 여길 것을 요구했다. 신이 사람을 만들 때 처녀의 몸에는 표시를 하고는 감정에 쉽게 이끌리지 않도록 영예와 수치심을 첨부했다고 한다.

(2) 정결의 영예

인류 역사상 전통문화에서는 여성의 숭고한 절조(節操)에 대한 기록이 많다. 남편을 위해 평생 수절했거나, 순절한 여성을 표창하고 그 부덕(婦德)을 기려 패방(牌坊‧일종의 ‘열녀문’)을 세워주었다. 이는 진시황 때부터 시작됐다.

《사기 화식열전》에는 “파(巴‧지명)에 청(淸)이라는 과부가 있었다. 그 선조가 주사(朱沙) 광산을 얻어 대를 이어 이익을 독점하니 가산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청은 과부였으나 가업을 유지하고 재산으로 자신을 지켜내 침범당하지 않았다. 시황제가 정조 있는 부인으로 여겨 손님 대하듯 예우했고, 그녀를 위해 여회청대(女懷淸臺)를 만들었다”[2]는 기록이 있다. 이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정조 있는 부인을 기리려고 비석을 세우거나 기록을 남긴 사례에 속한다.

정결 자체는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감정의 본원적인 요구이다. 또한 신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 주입한 생명 요소다. 순결한 여자는 정조를 목숨보다도 더 중하게 여긴다.

청나라 때 여자의 정절은 보편적인 관념이었다. 군왕은 그것은 임금에 대한 충성만큼이나 중시했다.

예를 들어 항주부지(杭州府志)의 기록에 따르면 항주 일대에만 매년 정절부인이 50여 명이 나왔다. 기록에 따르면 이런 열녀가 있었다. 강희제 시대에 인화현(仁和縣) 사람 임방기(林邦基)가 증(曾)씨 성을 가진 처를 얻었다. 증씨는 시부모를 공경했으나, 혼인한 지 12년이 되도 자식을 낳지 못했다. 나중에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임방기가 너무 슬퍼한 나머지 중병에 걸렸다. 임종 전에 증씨에게 “내가 죽은 후 당신은 나를 따라 함께 가겠소?”라고 물었고, 증씨는 눈물로 맹세했다. 증씨는 남편의 장례를 치른 후 몇 차례나 목을 매달아 자진하려 했지만 매번 가족들에게 발견돼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시아버지가 이 사실을 관아에 알렸다. 현령이 남편을 대신해 효를 다해야 하니 죽지 말라며 ‘절효쌍전(節孝双全‧정절과 효 둘 다 완벽하다는 의미)’이란 편액을 걸어 널리 알리게 했다. 5년 후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증씨는 장례를 치른 후 14일간 곡기를 끊어 죽었다.[3]

정결(貞潔)은 태평성세와 왕조의 흥성기를 결정하는 가장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즉 태평성세일수록 정결을 강조한다.

《청사고(清史稿)》 열녀전에도 이런 일들이 아주 많다. 절개를 지킨 아내 때문에 남편이 영광을 얻은 사례도 많다. 청나라 건륭 52년 유근(劉謹)이란 벼슬아치가 병사하자 그의 아내 탕씨가 순절했다. 이 일이 조정에 보고되자 유근에게는 ‘홍려사경(鴻臚寺卿)’이라는 시호와 은 백 냥을, 그리고 탕씨에게는 특별히 ‘특지정표(特旨旌表)’를 내렸다. 아내 덕분에 남편이 영예를 누린 이 일화는 중앙 관청에서도 특별한 사례다.[5]

사실 고대에는 서방이나 동방이나 여성의 정조에 대한 요구가 유사했다. 혼인 전에는 처녀성을 지키고 혼인 후에는 절개를 지켜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르네상스 시기의 유럽은 상류사회에 정조 개념이 엄격했다. 미혼 여성은 순결을 상징하기 위해 머리 장식을 하지 않았고 결혼 후에야 머리를 올릴 수 있었다. 만약 여성이 혼인 전에 정조를 잃으면 커다란 치욕으로 여겼다. 혼인 이튿날 아침 신혼부부는 가족, 하객들과 함께 조찬을 한 후 피 묻은 시트를 보여줌으로써 순결을 증명했다.

정조대가 출현한 시기도 있다. 십자군 원정 기간에 기사가 전장으로 떠나기 전 아내에게 정조대를 채웠다.[6] 정조대는 혼란한 시대에 강간을 피하는 수단으로, 유혹을 억제하는 도구로 선택한 시대의 산물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그것이 일정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가령 1998년 인도네시아에서 화교 배척운동이 발생했을 때 일부 화교 여인이 강간을 피하기 위해 가죽으로 만든 정조대를 착용한 적이 있다.[7]

19세기 빅토리아여왕 시대에 이르러 당시 의학은 보편적으로 자위의 해로움을 인정했고 많은 의학연구소에서 정조대를 이용한 자위 방지를 제창했다. 남자의 자위 문제가 두드러졌기 때문에 남성용 정조대가 먼저 발명됐다.[8]

유럽에서는 전통 정조대 의식이 여전히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일부 여성은 정조대를 찬 채 혼례를 치르고 신혼 첫날밤에 정조대 열쇠를 신랑에게 주어 신뢰와 헌신을 표현한다. 다시 말해 사랑하는 아내가 정조의 영광을 누리는 방식이다.

물론 현대사회에서는 정조대가 남녀평등, 여성해방’ 정치적 올바름에 이끌려 추악하게 그려지거나 심지어 증오하는 방식으로 비판받는다. 사실 그것은 역사의 노정 중에서 정결을 보호하는 하나의 형식이었고, 특수한 상황에서 몸과 마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물리적 방식이었다. 마귀는 사람의 정결을 훼멸하기 위해 음란한 환경을 조성했고, 욕망의 깊은 늪으로 끌고 가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마귀는 현대가 이미 버린 과거 역사 속의 현상마저 핑곗거리로 삼는다. (9)

 

[1] 《정조(貞操)》,https://zh.wikipedia.org/zh-cn/贞操

[2] 《사기 화식열전(史記 貨殖列傳)》漢·司馬遷, http://www.guoxue.com/shibu/24shi/shiji/sj_129.htm

[3]  이야기원: (清)陳康祺: 《郎潜纪闻三笔》2권, 中華書局1984년판, 675-677쪽.

[4]  (清)陳康祺:《郎潛紀聞二筆》8권,469-470쪽。

[5] 《정조대(貞操帶)》,https://zh.wikipedia.org/zh-cn/贞操带

[6] 《정조대(貞操帶)》,https://baike.baidu.com/item/贞操带

[7] 《정조대(貞操帶)》,https://baike.baidu.com/item/贞操带

[8] 악마란 공산주의 유령, 공산사령을 지칭한다. 그것은 ‘증오’와 우주 저층 공간의 썩은 물질들이 결합되어 형성된 사악한 생명이다. <공산주의의 최종 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