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포토] 30년 만에 깨어나는 진실…’톈안먼 사건’ 기록사진 공개③

2019년 05월 29일 오후 6:00 업데이트: 2022년 06월 2일 오후 2:47
톈안먼 사태 당시, 베이징 각 대학의 학생들이 시위행진을 벌였고, 일부 베이징 시민도 이 대열에 동참했다. (류젠 제공)

1989년 봄, 수도 베이징에서 시작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애국 학생 ‘민주화운동’이 중국 전역으로 번졌다. 모든 과정에 참여한 베이징의 한 대학생이 이 역사적인 순간을 카메라에 담아 학생과 시민들의 애국 열정 및 중국 공산당의 잔인한 ‘6.4 대학살’을 증명했다.

중국 공산당은 지금까지도 진상을 봉쇄하고 학생들의 평화 시위를 ‘반혁명 폭란(暴亂)’으로 몰아붙이고 있으며, 계엄군의 총기 난사 사실도 부인하고 있다.

당시 19세 학생이었던 류젠(劉建)은 “역사는 지울 수 없다! 어떤 정부도 역사를 지울 수 없다. 우리는 중국인으로서, 또한 산증인으로서 사람들에게 진상을 밝히고 후대에 진실을 알릴 의무가 있다”고 했다. 몇 년 전 해외로 이주한 그는 최근에서야 자신이 중국 공산당에 세뇌됐음을 깨닫고 중국 공산당의 거짓말과 박해를 폭로하기로 결심했다.

최근 류젠은 30년 동안 묻어두었던 ‘톈안먼 사건’ 기록사진 2천 장을 공개하며, 그 발표 권한을 에포크타임스와 신탕런(NTD)에 위임했다. 다음은 그중 일부다.

이 ‘톈안먼 사건’ 관련 기사는 류젠의 진술에 근거해 썼으며, 톈안먼 사건을 직접 겪은 우런화(吳仁華)의 저서 <톈안먼사건대사기(天安門事件大事記)>에서 일부 가져왔다.

(2편에서 계속)

시민들, 학생들의 4·27 대규모 시위행진 적극 지지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胡耀邦)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세상을 떠나자, 베이징 각 대학의 학생들은 여러 차례 집회와 시위행진을 벌였다. 또한 23일 결성된 학생 조직인 ‘가오쯔롄(高自聯)’은 ‘민주화’ 등 7가지 항목의 요구사항을 제기하며 ‘애국무죄(愛國無罪·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죄가 없다)’ ‘부패척결’ ‘언론자유’ ‘독재반대’를 외쳤다.

4월 20일에는 일부 학생이 신화먼(新華門)에서 경찰과 충돌해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학생들은 분노했으며, 이때부터 시위 행렬이 수만 명 규모로 늘어났다.

4월 26일,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반드시 기치를 선명하게 하고, 동란(動亂)에 반대해야 한다’는 사설을 발표하자, 가오쯔롄은 대규모 시위행진을 준비했다. 그들은 앞선 요구사항을 두 가지로 변경했다. 첫째는 ‘동란’이라는 오명을 벗겨달라는 것이고, 둘째는 ‘평등한 대화’를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각 대학 총장들은 이들을 강력히 저지하고 나섰다. 당시 장핑(江平) 정법(政法)대 총장은 “너희들이 오늘 시위행진을 벌이다 다치기라도 하면, 너희 부모님께 이를 어떻게 설명하느냐?”며 학생들을 막아섰다.

그러나 4월 27일 오전, 베이징 지역 38개(54개라는 보도도 있다) 대학의 학생 수만 명이 반대를 무릅쓰고 베이징 주요 거리를 따라 시위행진을 벌였으며, 이 상황을 시민 수십만 명이 지켜봤다.

베이징 지역 대학생들이 대규모 시위행진을 벌이는 모습. (류젠 제공)
베이징 지역 대학생들이 대규모 시위행진을 벌이는 모습. (류젠 제공)
베이징 지역 대학생들이 대규모 시위행진을 벌이는 모습. (류젠 제공)
베이징 지역 대학생들이 대규모 시위행진을 벌이는 모습. (류젠 제공)
베이징 지역 대학생들이 대규모 시위행진을 벌이는 모습. (류젠 제공)
베이징 지역 대학생들이 대규모 시위행진을 벌이는 모습. (류젠 제공)

시위 대열이 한데 모이자 이들은 베이징시의 동서장안가(東西長安街)로 이동했다. 중난하이(中南海) 류부커우(六部口) 부근에서 베이징 경찰은 천 명이 넘는 군인들로 수십 겹의 인간 장벽을 만들어 장안가 전체를 차단했다. 그러나 서로 대치한 지 한 시간여 만에 이 인간장벽은 뚫렸고, 지켜보던 수많은 시민이 시위 대열을 따라 톈안먼 앞으로 몰려들었다.

시위행진을 벌이는 대학생들을 지켜보던 베이징 시민들도 시위에 동참했다. (류젠 제공)
시위행진을 벌이는 대학생들을 지켜보던 베이징 시민들도 시위에 동참했다. (류젠 제공)
시위행진을 벌이는 대학생들을 지켜보던 베이징 시민들도 시위에 동참했다. (류젠 제공)

시위대 학생들은 ‘의법치국(依法治國·법에 의거해 나라를 다스림), 특권반대’ ‘국민을 속여선 안 된다’ ‘관리가 돼서 백성을 위해 일하지 않을 바엔 고향으로 돌아가 고구마를 파는 것이 낫다’ ‘물가 안정’ ‘부패를 근원적으로 뿌리 뽑자’ 등의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했다.

도로마다 인파로 가득 차 교통이 마비되자 도로 표지판이나 나무 위에 올라가서 시위행진을 구경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도로를 가득 메운 사람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자, 많은 사람이 도로 표지판이나 나무 위에 올라가서 구경했다. (류젠 제공)
도로를 가득 메운 사람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자, 많은 사람이 도로 표지판이나 나무 위에 올라가서 구경했다. (류젠 제공)

학생과 시민들이 톈안먼 광장으로 몰려들자 광장 안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처음의 예상과는 달리 많은 시민이 학생들을 지지하자 위안무(袁木) 중국 공산당 대변인은 ‘대화를 하자는 학생들의 요청을 환영한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4·27 대규모 시위행진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입장 표명이었다.

학생들의 시위행진을 지켜보던 베이징 시민 중 일부도 학생들을 따라 톈안먼 광장으로 몰려갔다. (류젠 제공)
학생들의 시위행진을 지켜보던 베이징 시민 중 일부도 학생들을 따라 톈안먼 광장으로 몰려갔다. (류젠 제공)
학생들의 시위행진을 지켜보던 베이징 시민 중 일부도 학생들을 따라 톈안먼 광장으로 몰려갔다. (류젠 제공)

4월 27일, 학생들은 대부분 아침 8시경 자신들의 학교에서 출발해 밤 10~11시가 돼서야 학교로 돌아갔으며, 거의 모든 학생이 끝까지 걸어서 전 과정을 마쳤다. 정말로 걷기 힘든 일부 학생은 틈틈이 앉아서 휴식을 취했다. 길가에 있던 시민들도 학생들에게 파이팅을 외치며 한목소리로 응원했다.

베이징 각 대학의 학생들이 대규모 시위행진을 벌이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모습. (류젠 제공)
베이징 각 대학의 학생들이 대규모 시위행진을 벌이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모습. (류젠 제공)

4·27 시위행진은 89년 시위행진 중 시간상으로나 거리상으로나 가장 길고 비장한 행진이었다. 많은 학생이 심지어 유서까지 쓰고 시위행진에 나섰다. 이에 감동한 수많은 시민이 거리로 나와 학생들을 지지했는데, 그 수가 백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