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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배려했으면” 프랑스 화가, 5개 대륙 잇는 대형 인간사슬 그린다
직접 1년간 개발한 생분해성 친환경 페인트 사용 한 달이면 지워져…작품은 사라져도 메시지 남길 세계에서 가장 큰 인간 사슬을 그리는 대지 예술가가 화제다. 프랑스 출신 길리엄 레그로스(Guillaume Legros ·33)의 그림은 거대한 ...인도 점성술사 “다음달 트럼프가 승부 역전해 재선”
미국 대선이 한달 이상 혼선을 거듭하며 내년 1월 결말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한 인도계 점성술사는 최근 자신의 트위터를 ...“모든 좋은 것들은 다 정원 안에 있다”
좋은 은유는 좋은 이해를 낳는다. 서양의 지성과 철학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은유의 달인이 되는 ...“‘응팔’처럼 재미있고 공감할 수 있는 드라마 많이 나왔으면”
지난 2015년 11월 6일 국내 케이블TV 채널 tvN에서 첫 방송된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 20부작으로 방영된 응팔은 그 시대에 ...‘신필’ 김용이 쓴 무협소설에 담긴 의미
많은 사람이 김용(金庸)의 무협소설에 빠졌지만 당신은 소설 속에 현대 정치에 관한 풍자가 있다는 걸 알고 있는가? 김용은 ‘녹정기(鹿鼎記)’ ...네 자매의 보석 같은 성장기, 소설 ‘작은 아씨들’이 남긴 것
소설 ‘작은 아씨들’(Little Women)은 미국 문학계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대중의 큰 사랑을 받으며 연극무대와 영화로도 옮겨졌지만, 어린이를 ...‘2020년 NTD 국제 인물화 공모전’ 금상수상작 ‘1999년 4월 25일’
1999년 4월 24일, 토요일 밤이었다. 쿵하이옌은 한잠도 못 자고 깨어 있었다. '갈 것인가, 집에 있을 것인가?' 만약 그녀가 ...세계 유명음대 교수들, 제주 함덕고서 국내 음악 전공생들과 ‘사제의 연’
세계 유명 음악대학 교수를 초빙해 음악 꿈나무들에게 새로운 교육과 경험을 제공하는 자리가 청정 자연을 자랑하는 제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거대 도시 생태계 속… 우리의 미래를 생각하다
수백만 인구가 사는 거대 도시의 출현은 계층의 고립과 빈곤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아파트로 우거진 도시라는 공간, 이 거대해진 도시에서 ...비엔나 ‘신년음악회’, 그 특별함의 美學
“그대는 아는가 , 저 레몬꽃 피는 나라를, 짙은 잎사이로 황금빛 오렌지가 이글거리고 푸른하늘엔 한가닥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는 ...“미륵을 향한 천년의 기다림” … 천년 古都 익산서 국립박물관 개관
103년 만에 공개되는 무왕의 나무관 등 최초 공개 유물 '눈길' 미륵사지 석탑서 발견된 사리장엄구 등 3천여 점 전시 ...문인화 전통의 맥을 같이 했던 두 거장의 만남 ‘남농과 월전’
한국의 근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큰 족적을 남긴 두 사람, 남농(南農) 허건(許楗: 1908~1987)과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1912~2005). 20세기 초 두 차례 ...렘브란트는 공감의 예술가…”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내면을 생생하게 전달”
렘브란트, 주인공과 함께 느끼는 기쁨과 삶의 분투 현재 뉴욕 맨해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그림 찬미: 네덜란드 명작"을 전시 중이다(2018년 ...‘정결(貞潔)’은 도덕의 초석이자 인류 행복의 근원④
사람이 신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는 날이 바로 자신을 단속하는 도덕을 잃는 때다. 정결은 도덕을 수호하는 초석이자 도덕 가운데서 가장 지켜내기 어려운 부분이다. 악마가 정결을 허물어버리면, 사람의 활짝 열린 욕망이 음란의 구렁텅이로 끌어들인다. 악마는 공산주의 유령, 공산사령(共産邪靈)을 지칭한다. 그것은 ‘증오’와 우주 저층 공간의 부패한 물질이 결합해서 만들어낸 사악한 생명이다. 6. 악마가 사람의 영혼과 육신을 부패시키려 음란은 부추긴다 악마가 조종하는 매체가 집요하게 정결을 부정적으로 묘사함으로써 현대사회는 이미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성이 개방됐다. 여론에 휩쓸린 정부 역시 법률을 수정해 정결을 포기하게 함으로써 국민의 영혼과 육체를 타락하게 했는바, 이는 이미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1) 성병은 음란에 대한 징벌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문화 속에는 모두 ‘음란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가르침이 있다. 그것은 주로 성병이라는 직접적인 징벌로 나타난다. 이 성병은 음란에 대한 대가를 쉽게 알 수 있게 해주는 특수한 징벌이다. 현대 의학 역시 이 점을 충분히 입증한다. 그것은 다른 질병과는 확연히 다른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성병이 여타 질병과 전형적으로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사람에게는 성병 감염을 예방할 ‘선천성 면역’이 거의 없다. 백신도 없다. 성병에 걸린 후에도 ‘획득성 면역’이 생기지 않는다. 다시 감염되면 병이 재발하기 때문에 평생 예방해야 한다. 성병은 성 접촉으로 전염된다. 성병의 원인이 되는 미생물은 외부 저항력이 낮아서 인체를 떠나면 바로 죽는다. 따라서 간접적으로 전염될 가능성은 아주 낮다. 성병은 배우자와 자녀에게도 위험을 끼칠 수 있다. 부부가 동시에 치료하지 않으면 반복해서 발병하며, 기형아를 낳을 수도 있다. 이상은 모두 의학 상식에 속하는 내용이다. 매독, 임질, 에이즈 등의 성병은 다른 질병과 달리 성 접촉에 의해 전염된다. 따라서 성병 감염은 전적으로 성생활의 건전성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하면 정결을 지키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다. 무신론자들은 어떤 일을 하든 모두 자신의 주관에 따라 한다. 그들은 신불(神佛)을 믿지 않고 인과응보의 천리(天理)를 믿지도 않는다. 머리 석 자(尺) 위에 신령이 있음은 더욱 믿지 않는다. 그러니 성병이 음란을 겨냥한 현세현보(現世現報: 현세에 악보를 받음) 현상임을 알 턱이 없다. 사실 공산주의 무신론자들은 완전히 사령(邪靈)에게 통제당해 자아를 상실한 피해자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성병이 전염되는 것처럼 여러 사람에게 독해(毒害)를 전파한다. 현재 성병은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유행하는 흔한 전염병이 됐고, 전염 범위도 확대되고 발병 연령도 낮아지고 있으며, 항생제에 내성을 갖춘 균이 증가하는 추세다. 특히 에이즈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2019년 2월 28일 자료에서 뽑은 다음 자료들을 통해 성병의 유행 상황과 중요한 사실들을 살펴볼 수 있다. 세계적으로 매일 100만 명 이상이 성병에 감염되고 있다. 매년 3억 5700만 명이 클라미디아, 임질, 매독, 트리코모나스 등의 성병에 새로 감염되는 것으로 추산된다. ...‘정결(貞潔)’은 도덕의 초석이자 인류 행복의 근원③
‘음란’은 정결의 반대 개념으로, 성적 욕망이 홍수처럼 넘쳐 재앙이 될 지경인데도 통제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한다. 음란은 독과 같아 일찍이 거의 모든 고대 문명이 파멸한 주요 원인이다. 속담에 “만 가지 악 중에서 음란이 가장 나쁘다”고 했다. 인류가 신이 준 계명을 준수하지 못한다면 신 역시 인간을 포기할 것이고, 그러면 인류 문명은 급속히 쇠락해 훼멸에 이르게 된다. 5. 음란은 인류 문명을 훼멸하는 독약 (1) 중국 역대 왕조의 멸망을 부추긴 음란 중국 역대 왕조의 멸망은 예외 없이 모두 부패, 타락, 음란에서 시작됐다. 《봉신연의(封神演義)》는 한 왕조가 어떻게 음란으로 인해 멸망했는지를 보여주는데, 주왕(纣王)이 자기 민족을 창조한 여와(女娲) 신상(神像)에 음란한 시를 써서 모독죄를 범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이후 달기(妲己)가 나타나 조정에 재앙을 가져오고 나중에 절대다수의 귀족이 음란하고 사치하고 부패했다. 결국 여러 제후가 주나라 무왕(武王)의 인도하에 반란을 일으켜 상(商) 왕조를 무너뜨렸다. ‘봉화로 제후를 희롱하다’는 전고(典故)는 2천 년 넘게 전해오는, 음란이 왕조의 멸망을 야기한 고사다. 《사기》에 따르면 포사(褒姒)가 잘 웃지 않자 주(周)나라 유왕(幽王)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 그녀를 웃기려 한다. 하지만 포사는 시종 웃음을 보이지 않았다. 일찍이 유왕은 적의 침입을 알리기 위해 봉화대와 큰 북을 설치해 놓았는데, 어느 날 유왕이 봉화를 올렸다. 그러자 제후들이 병사들을 이끌고 도성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그들이 발견한 것은 적군이 아니었다. 포사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제후들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유왕은 아주 기뻐하면서 이때부터 여러 차례 봉화를 올렸다. 나중에 제후들은 봉화를 믿지 않게 됐다. 주유왕 11년(기원전 771년) 신(申)나라 연합국과 서이(西夷)인 견융(犬戎)이 합세해 유왕을 공격해왔다. 유왕은 봉화를 올렸지만 구원하러 달려온 제후는 없었다. 결국 견융은 유왕을 여산 아래서 죽이고 포사를 포로로 잡아갔다. 서주(西周)는 이렇게 멸망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서주가 멸망한 주요 원인을 “유왕이 무도하고 음란했기 때문”이라고 했다.[1] 한편 위진남북조시기(220~589년)는 삼국양진남북조라도도 하는데, 중국 역사상 300~400년에 걸친 혼란기였다. 왕조의 교체도 그 어느 때보다 빨랐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예외 없이 조정이 부패하고 군주가 황음무도했다. 북제(北齊) 4번째 황제(561~565년)인 무성제(武成帝) 고담(高湛)은 몹시 잔인하고 황음무도한 인물이었는데, 여기서는 그중 한가지 사례를 들어보자.[2] 《북제서(北齊書)·열전》에 따르면 북제의 문선제(文宣帝) 고양이 사망한 후 동생인 고연이 황제가 됐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도 사망하자 고담이 제위를 이었다. 고담 역시 고양의 친동생이었다. 그는 호씨(胡氏)를 황후로 책립하던 날 밤에 고양의 황후였던 이조아(李祖娥)의 궁에 들어가 음란한 짓을 강요했다. 이 씨가 거부하며 “폐하께선 천자이신데 어찌 시동생과 형수의 도리를 돌보지 않으십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고담은 화를 내면서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당장 주살하겠다”고 했다. 당시 이 씨에게는 아들 고소덕이 있었다. 그녀는 아들이 화를 입을까 봐 두려워 어쩔 수 없이 고담의 말에 따라야 했다. 이후 고담은 공개적으로 이 씨의 궁에 출입하며 그녀를 후궁 대하듯 했다. 머지않아 이 씨가 임신을 해서 딸을 낳자 몰래 아이를 버렸다. 고담이 이 소식을 듣고 화가 나서 궁궐에 들어가 칼등으로 이 씨를 때리면서 욕을 했다. “네가 내 딸을 죽였는데 내 어찌 네 아들을 죽이지 않으랴!” 곧장 고소덕을 끌고오게 해 이 씨가 보는 앞에서 때려죽였다. 이 씨가 큰 소리로 울부짖자 고담이 더욱더 화가 나서 이 씨의 웃옷을 벗기고 직접 채찍으로 때렸다. 이 씨가 까무러치자 고담은 이 씨를 자루에 담아 도랑에 버리게 했다. 나중에 건져올렸을 때 이 씨는 이미 숨이 끊어질 지경이었다. 며칠 후 궁녀들이 이 씨를 소 수레에 실어 묘승사로 보내 비구니가 되게 했다. 무성제 고담은 간사한 소인배들을 총애했고 자신도 조정에서 음란한 짓을 일삼았으며 멋대로 종실과 대신들을 죽였다. 순식간에 조정이 아수라장이 되고 사회도 혼란에 빠져 국력이 신속히 쇠퇴했다. (2) 음란은 세계 문명국가의 재난과 훼멸의 원인 3쳔여 년 전에 세워진 바빌로니아는 당시 상당히 문명이 발달한 나라였다. 그러나 성 풍속은 상당히 특이하고 음란했다. 심지어 방탕하기 그지없던 알렉산더 대왕마저 놀랄 정도였다. 성경에서 바빌로니아를 음란의 소굴처럼 묘사한 것은 도덕 파괴의 오욕(汚辱)을 대표하기 때문인데, 이는 이 나라의 특수한 제도에서 비롯됐다. 그리스의 철학자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바빌로니아 여인은 모두 아프로디테 신전에서 ‘신성한 창녀’가 돼 낯선 남자들과 성관계를 가져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신전 안에서는 창녀가 아니라 신성한 대역으로 간주됐다. 즉, 아프로디테 여신을 대신해 신전 내에서 음행을 했다. 바빌로니아는 ‘신성한 창녀’ 외에도 또 정식으로 매춘하는 창녀가 있었고, 보통 부녀자라 해도 성 관념이 아주 개방적이었다. 당시 여인들은 혼전 성관계가 아주 유행했다. 하지만 혼인 후에는 일부일처제를 유지했고 남편에게 충절을 표현해야 했다. 만약 여성이 간통죄를 범했을 때는 가벼우면 나체로 수영하게 하고 무거우면 물에 빠뜨려 죽였다. 심지어 어떤 학자들은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매일 음욕 속에서 살았으며 남자들은 매일 신전에 가서 음행을 했다고 한다. 욕망의 나락으로 떨어졌기 때문에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외부 종족의 침입에 저항할 정신이 없었다. 결국 바빌로니아는 페르시아에 멸망하고 말았다. 고대 이집트가 멸망한 원인 또한 다르지 않다.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여왕은 바로 클레오파트라 7세였다. 그녀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프톨레마이오스 12세와 클레오파트라 5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다. 당시 이집트의 전통에 따라 이복동생과 결혼해 정권을 잡았다. 하지만 근친결혼과 남편의 성 기능 문제로 후사가 없었다. 그러다 로마 집정관 카이사르의 눈에 들어 그의 애인이 됐고 아이까지 낳았다. 카이사르가 사망한 후 그녀는 또 로마 집정관 안토니우스의 정부가 됐다. 하지만 안토니우스가 전투에서 패배한 후 클레오파트라는 아들과 함께 피살당했고, 그로 인해 고대 이집트 왕국은 사라졌다. 근친결혼은 후대로 갈수록 번식능력을 떨어뜨려 결국 자손이 끊어지고 제국이 사라지는 원인이 된다.[3] ...‘정결(貞潔)’은 도덕의 초석이자 인류 행복의 근원②
속담에 ‘한 대(代) 좋은 아내가 없으면 십 대 걸쳐 좋은 자식이 없다’는 말이 있다. 여성은 자식을 낳고 기르고 가르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신이 준 도덕을 유지해 인류사회가 부패하지 않게 하는 책임도 맡고 있다. 고대에 맹자 어머니가 아들 교육을 위해 이사를 세 번 하고 또 ‘베틀의 날실을 잘랐다(孟母斷機)’는 이야기가 있다. 또 악비의 어머니가 아들 몸에 나라에 충성하길 바라는 글자를 새긴 이야기도 있다. 어머니는 늘 자녀에 대한 관심과 뛰어난 덕성으로 자녀엑 지대한 영향을 준다. 정결(貞潔)은 여성의 자기 사랑, 그 자체이자 생명 본원의 요구다. 또한 신이 자신의 형상을 본떠 사람을 만들 때 주입한 생명 요소일 수도 있다. 따라서 순결한 여자라면 누구라도 정조를 자신의 생명보다도 더 중하게 여긴다. 4. 여성은 인류 도덕을 수호하는 구심점이다 사물이 발전하는 데는 사회가 변하든 사물을 인식하는 인간의 관념이 변하든 물리화학적 변화가 있든 그 변화 과정에 모두 관건적인 요인이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도덕이 세대를 거쳐 전승되는 데도 핵심축(linchpin)이 필요한데, 바로 여성이 그런 역할을 한다. (1) 정조 윤리 도덕 관점에서 ‘정조를 지킨다(守貞)’는 것은, 결혼 전에는 순결을 지킴을 뜻하고 혼인 이후에는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성 접촉을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1] 전통문화 속에서 이 의미는 개인적인 요구에서 사회적인 요구로 확대됐다. 즉, ‘정조’는 여성의 개인적 순결에서 사회적 ‘성실’, ‘충성’이란 개념으로 확장됐다. 다시 말하면 남녀 모두에게 요구하는 기본적인 인격 요소가 됐다. 정조에 관한 인식과 관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또 종교(정교)·문화(전통문화)와 관계없이 모두 일치한다. 이는 여성이 인류 도덕을 수호하는 특수한 역할과 특별한 작용을 담당한다는 것을 설명한다. 여성은 인류 도덕을 수호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조물주는 정조와 관련해 여성에게 특수한 요구를 했다. 유혹과 욕망에 쉽게 빠지지 않도록 정조를 목숨처럼 여길 것을 요구했다. 신이 사람을 만들 때 처녀의 몸에는 표시를 하고는 감정에 쉽게 이끌리지 않도록 영예와 수치심을 첨부했다고 한다. (2) 정결의 영예 인류 역사상 전통문화에서는 여성의 숭고한 절조(節操)에 대한 기록이 많다. 남편을 위해 평생 수절했거나, 순절한 여성을 표창하고 그 부덕(婦德)을 기려 패방(牌坊‧일종의 ‘열녀문’)을 세워주었다. 이는 진시황 때부터 시작됐다. 《사기 화식열전》에는 “파(巴‧지명)에 청(淸)이라는 과부가 있었다. 그 선조가 주사(朱沙) 광산을 얻어 대를 이어 이익을 독점하니 가산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청은 과부였으나 가업을 유지하고 재산으로 자신을 지켜내 침범당하지 않았다. 시황제가 정조 있는 부인으로 여겨 손님 대하듯 예우했고, 그녀를 위해 여회청대(女懷淸臺)를 만들었다”[2]는 기록이 있다. 이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정조 있는 부인을 기리려고 비석을 세우거나 기록을 남긴 사례에 속한다. 정결 자체는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감정의 본원적인 요구이다. 또한 신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 주입한 생명 요소다. 순결한 여자는 정조를 목숨보다도 더 중하게 여긴다. 청나라 때 여자의 정절은 보편적인 관념이었다. 군왕은 그것은 임금에 대한 충성만큼이나 중시했다. 예를 들어 항주부지(杭州府志)의 기록에 따르면 항주 일대에만 매년 정절부인이 50여 명이 나왔다. 기록에 따르면 이런 열녀가 있었다. 강희제 시대에 인화현(仁和縣) 사람 임방기(林邦基)가 증(曾)씨 성을 가진 처를 얻었다. 증씨는 시부모를 공경했으나, 혼인한 지 12년이 되도 자식을 낳지 못했다. 나중에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임방기가 너무 슬퍼한 나머지 중병에 걸렸다. 임종 전에 증씨에게 “내가 죽은 후 당신은 나를 따라 함께 가겠소?”라고 물었고, 증씨는 눈물로 맹세했다. 증씨는 남편의 장례를 치른 후 몇 차례나 목을 매달아 자진하려 했지만 매번 가족들에게 발견돼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시아버지가 이 사실을 관아에 알렸다. 현령이 남편을 대신해 효를 다해야 하니 죽지 말라며 ‘절효쌍전(節孝双全‧정절과 효 둘 다 완벽하다는 의미)’이란 편액을 걸어 널리 알리게 했다. 5년 후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증씨는 장례를 치른 후 14일간 곡기를 끊어 죽었다.[3] 정결(貞潔)은 태평성세와 왕조의 흥성기를 결정하는 가장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즉 태평성세일수록 정결을 강조한다. 《청사고(清史稿)》 열녀전에도 이런 일들이 아주 많다. 절개를 지킨 아내 때문에 남편이 영광을 얻은 사례도 많다. 청나라 건륭 52년 유근(劉謹)이란 벼슬아치가 병사하자 그의 아내 탕씨가 순절했다. 이 일이 조정에 보고되자 유근에게는 ‘홍려사경(鴻臚寺卿)’이라는 시호와 은 백 냥을, 그리고 탕씨에게는 특별히 ‘특지정표(特旨旌表)’를 내렸다. 아내 덕분에 남편이 영예를 누린 이 일화는 중앙 관청에서도 특별한 사례다.[5] 사실 고대에는 서방이나 동방이나 여성의 정조에 대한 요구가 유사했다. 혼인 전에는 처녀성을 지키고 혼인 후에는 절개를 지켜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정결(貞潔)’은 도덕의 초석이자 인류 행복의 근원①
사람은 불성(佛性)과 마성(魔性)을 지닌 채 세상에 온다. 만약 마성을 잘 억제하고 불성을 드러낼 수 있다면 행복해지는 반면, 마성을 방종하면 고통의 심연 속으로 떨어지거나 심지어 스스로를 훼멸하게 된다. 만약 마성을 없애고 불성이 주재하게 한다면 생명이 승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는 민족이나 인종과 관계없이 자신들의 선조로부터 내려오는 전통문화나 종교가 있다. 그리고 전통문화나 종교에서는 신이 자신의 모습을 본떠 인류를 창조했다고 알려준다. 하느님이나 여와가 진흙으로 사람을 만들었고, 신불(神佛)과 프로메테우스 및 여타 신이 다양한 민족의 사람을 창조했다. 하지만 더욱더 중요한 것은 신이 사람을 만든 동시에 사람이 지켜야 할 행위 준칙과 규범을 제정해 줬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도덕’인 바 사람이 의지해 생존하는 법칙이다. 정결(貞潔)은 바로 이 도덕의 초석이자 인류 도덕의 핵심이다. 정결은 풍속과 사회의 건강과 조화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다시 말해 태평성세(太平盛世)나 왕조의 전성기를 결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는 바로 ‘정결’이다. 반면, 음란은 마치 독약처럼 인류의 오랜 문명에 재난을 안긴다. 1. 정결(貞潔) ‘貞(정)’이란 점을 쳐서 신령에게 묻는 것이다.[1] ‘潔(결)’이란 깨끗함(淨)이다. 정결(貞潔)은 정결(貞絜)이라고도 한다. ‘絜(결)’은 명주실을 만들 때 지저분한 것들을 잘라냄을 뜻한다. ‘潔(결)’은 사람이 정조에 아무런 오점이 없음을 뜻한다. 중국 고대의 예교(禮敎)에서 제기하는 것은 순정하고 고결한 도덕 관념이다.[2] 바꿔 말하면 오직 신을 믿으면서 신의 뜻에 따라 실천하는 사람만이 순결하고 고상한 도덕을 가진 사람인바 이를 정결하다고 한다. 2. 정결은 인류 행복의 근원 (1) 인류의 행복 현대인들은 행복이란 지속 시간이 비교적 긴, 일종의 영혼의 만족이라고 본다.[3] 인류는 줄곧 이런 행복을 추구해왔을 것이다. 아울러 이런 바람을 실현하기 위한 각종 방식을 찾는 와중에 세상 풍속이 날로 떨어지는 시대가 되자 완전히 주객이 전도됐다. 즉 이른바 행복을 만족시키기 위해 닭을 잡아 계란을 취하는 우를 범하여 오히려 행복을 철저히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전통문화에서는 사람이 각자 타고나는 복인 ‘덕(德)’을 갖고 이 세상에 오며 덕을 잘 지켜야만 자신의 행복을 보호할 수 있다고 한다. 반면, 욕망과 탐욕은 사람을 유혹해 복을 잃게 한다. ‘행복’이란 말의 원래 뜻을 알면 개념을 좀 더 깊이 이해할 것이다. ‘행(幸)’의 원래 뜻은 세인을 각성시키는 데 쓰는 형벌 기구, 즉 죄인에게 채우는 족쇄와 수갑이다. ‘복(福)’의 원래 뜻은 술을 올려 신에게 제사 지내며 부귀와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선조들의 행복관을 보면 ‘행’이란 제왕이 내리는 것으로, 죽음에 이르러 사면받아 살아나는 것이고, ‘복’이란 하늘이 주는 것으로, 신의 가호로 부귀와 안녕을 누리는 것이다.[4] ...이소룡 부자가 요절한 이유는 ‘인과응보’ 때문?
옛 서적에 인과응보에 관한 실화가 많이 등장한다. 여기서는 이 관점에서 이소룡 부자가 요절한 비밀을 파헤쳐 본다. 많은 사람이 이소룡이 중국인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그는 194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미국인으로, 말하자면 재미 화교다. 그는 할리우드에서 활약한 최초의 화교 배우였다. 그가 주연한 쿵푸영화 <당산대형(唐山大兄)>이 큰 호평을 받았고, 이어서 출연한 <정무문(精武門)>, <맹룡과강(猛龍過江)>, <용쟁호투(龍爭虎鬪)>및 <사망유희(死亡游戱)>가 영화계를 뒤흔들었다. 그는 곧바로 국제적으로 큰 명성을 얻었다. 이소룡은 대만 금마장 최고연기자상, 홍콩 금상장, 영국 영화제작자협회의 전설대상(传奇大奖) 등 많은 상을 받았다. 1967년에는 스스로 절권도를 만들어 중국 전통무술 쿵푸를 널리 알렸으며, 미국 <블랙벨트>잡지에서 선정한 20세기 10대 무술가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전 복싱 헤비급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는 “이소룡은 위대한 사람이다. 그는 자기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다. 나는 정말로 그의 무술을 좋아하며 그를 만나고 싶다. 그는 그의 시대를 초월했다”라고 평가했다. 한편 미국 유도의 대부로 불리는 제니 레벨은 “그의 공격 속도는 일반인보다 두 배는 빠르고 권법과 보법 및 발기술도 뛰어나다. 만약 무술가에 왕이 있다면 소룡은 왕 중의 왕으로, 그 시대에 가장 뛰어난 정상급 고수다”라고 평가했다. 이소룡은 중국인들뿐만 아니라 서양인들에게도 부르스 리란 이름으로 아주 익숙하다. 그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한마디로 당대 쿵푸의 대명사와도 같았다. 그의 영화는 전 세계 화인들은 물론이고 세계 각지에서 큰 영향력이 있었고, 그의 이름은 무술영화 내지는 중국 쿵푸의 상징이 됐다. 요절한 이소룡 부자(父子) 하지만 이소룡은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33세에 영화 <사망유희>를 촬영하던 중 홍콩 구룡의 집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1973년 7월 20일이었다. 이 사건은 대중들에게 큰 충격과 관심을 불러일으켰는데, 특히 그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설이 분분하다. 어떤 사람은 피살당했다고 하고, 어떤 이는 병으로 죽었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약물 부작용으로 사망했다고 하며, 또 어떤 이는 ‘복상사’했다고 한다. 한편 이소룡의 아들인 브랜던 리(李國豪, Brandon Lee, 1965년 2월 1일~1993년 4월 1일)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다. 그가 8세 때 아버지 이소룡이 사망했다. 브랜던 리는 부친으로부터 재능과 끼를 물려받았고, 그의 모친 역시 무술에 조예가 깊었는데 브랜던 리는 어렸을 때부터 모친에게 무술교육을 받았으며, 성년이 되자 그의 무술 실력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 나중에 보스턴 에멀슨 영화학교에 진학해 영화와 연출을 전공했다. 그는 부친의 뒤를 이어 배우가 됐고 TV영화 <쿵푸영화(功夫圈 Kung Fu: The Movie)>에서 이소룡의 대역으로 데뷔했다. 브랜던 리는 준수한 외모와 뛰어난 무술 실력으로 할리우드 영화사들의 주목을 받았고 이소룡의 공백을 메꿔줄 인물로 평가받는 등 전도가 유망했다. 특히 1400만 달러가 투자된 영화 ‘크로우(The Crow)’에서 그는 감독의 요구에 따라 고난도 동작들을 직접 연기했다. 하지만 한창 영화를 촬영 중이던 1993년 4월 1일 밤 12시 30분 총성 1발이 울렸고, 복부 관통상을 입은 브랜던은 출혈 과다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28세 때다. 그의 죽음은 부친 이소룡의 비극을 재연한 것으로, 한창 떠오르던 쿵푸 스타가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렇다면 이소룡 부자는 왜 이렇게 젊은 나이에 죽었을까? 우선 이소룡의 부친 이야기부터 해보자. 인질을 납치해 살해한 이소룡의 부친 이해천 ...醫聖 장중경이 남긴 처방과 명언…”가죽이 없는데 털이 어디에 붙겠는가?”
송나라 때 사마광이 저술한 사서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재주와 덕을 온전히 갖춘 사람을 성인이라 일컫는다”는 구절이 있다. 광활한 중국 문명의 역사를 돌아보면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선성(仙聖)이 배출돼 뛰어난 공적을 남겼다. 음악, 회화, 문학, 서예, 의약, 다도, 병법 등 도처에 신의 흔적이 보이며 선기(仙氣)가 가득하다. 5천 년 신전문화(神傳文化)는 신의 땅을 윤택하게 했고 온세상에 혜택을 주었다. 고대 선성들의 전기와 빼어난 성취는 전통 철학과 도덕 정신을 빛나게 하는 동시에 인심을 교화하고 후대를 계도하는 작용을 한다. 의학 대작 《상한잡병론(傷寒雜病論)》 장기(張機)는 자(字)가 중경(仲景)이며 동한 말기의 유명한 의사다. 210년경 《상한잡병론》 16권을 저술했다. ‘상한졸병론(傷寒卒病論)’이라고도 하는 이 위대한 책은 중의학 역사상 최초로 이(理), 법(法), 방(方), 약(藥)을 두루 갖춘 경전으로, 육경변증논치(六經辯證論治)의 원칙을 확립했다. 그뿐만 아니라 뛰어난 처방을 많이 기록해 역대 의가들은 물론이고 외국 의학계에서도 존경한다. 흔히들 ‘뭇 처방의 근본이자 원조(衆方之宗 羣方之祖)’라 부른다. 이 책은 후세에 《상한론(傷寒論)》과 《금궤요략(金匱要略)》으로 나뉘었다. 청나라 때의 명의 장지총(張志聰)은 “사서(四書)에 밝지 않으면 선비라 할 수 없고, 상한론을 제대로 모르면 의사라 할 수 없다”고 했다. 진(晋)나라 때부터 지금까지 이 책을 정리하고 주석하거나 연구한 학자만 천 명이 넘는다. 이 책과 수록된 방제(方劑‧처방)는 한국, 일본, 베트남,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몽골 등의 의학 발전에 영향을 끼치고 추동작용을 했다. 일본 의학회 ‘최고공훈상’을 수상한 한방의사 오츠카 케이세츠(大塚敬節)은 일찍이 “상한론은 치료학을 논술한 세계 최고의 고전 의서다”라고 했다. 장중경은 원나라와 명나라 때부터 ‘의성(醫聖)’으로 존중됐고 심지어 사찰에서 향불을 피워 공양할 정도였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이 발동한 문화대혁명 시기에 허난성 난양(南陽)에 있던 장중경의 무덤과 비석이 파괴됐다. 지금 장중경 기념관에 전시된 물품들은 한 차례 겁난을 거친 것들이다. 옛것을 부지런히 익혀 뛰어난 의술을 이루다 장중경은 소년 시절부터 편작을 흠모해 의학을 사랑했다. 그가 열 살 되던 해 같은 군(郡)의 명의 장백조(張伯祖)를 스승으로 모시고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의학을 배웠다. 장중경은 이렇게 ‘근구고훈(勤求古訓‧부지런히 옛사람의 가르침을 구함)’하고 고대 의서를 자세히 연구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지식과 의술이 스승보다 낫다”고 했다. 그는 또 ‘박채중방(博採衆方‧처방을 널리 채집함)’하고 고금의 약재를 널리 수집했으며 민간의 다양한 치료법들까지 연구해 대량의 자료를 축적했다. 병을 진찰하고 학습할 때 그는 매번 ‘고교이구험(考校以求驗‧임상시험을 거쳐 바로잡음)’함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장중경의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는 상한론 서문에 잘 드러난다. “공자는 ‘나면서부터 아는 자가 으뜸이고, 배워서 아는 자는 그다음이며, 많이 보고 들어 아는 것이 많은 자는 또 그다음이다’라고 하셨다. 나는 오래전부터 방술을 숭상했으니 이 말씀대로 해보련다.” 서진(西晋)시대 명의 황보밀은 《침구갑을경(鍼灸甲乙經)》 서문에서 장중경이 ‘건안칠자(建安七子‧중국 후한 건안 때의 유명한 시문가 7인)’의 한 사람인 왕찬(王粲)을 치료한 일화를 기록했다. 왕찬이 20대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장중경이 그를 보고는 “그대는 병에 걸려 40이 되면 눈썹이 다 떨어질 것이고 또 반년이 지나면 죽을 것이다. 지금 오석탕(五石湯)을 복용하면 이 난을 면할 수 있을 것이네”라고 말했다. 왕찬이 이 말을 듣고는 불쾌하게 여겨 약을 먹지 않았다. 사흘 후 장중경이 그를 만나 약을 먹었는지 물었다. 왕찬이 이미 먹었노라고 거짓말을 했다. 장중경은 그가 약을 쓰지 않았음을 간파하고는 말했다. “그대는 왜 자신의 생명을 소홀히하는가?”라고 말했다. 왕찬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20년 후 정말로 그의 눈썹이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했고 180일 후 사망했다. 장중경은 이처럼 20년 후의 질병과 그 세부 증상까지 예견했고, 심지어 그 시간까지도 정확히 맞혔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또 각종 질병을 없앨 수 있는 묘방(妙方)을 제공했다. 애석한 것은 환자가 그의 진단을 따르지 않아 결국 의성(醫聖)의 예언을 사실로 입증시켰다는 점이다. 중국 전통의학은 아주 절묘하고 비범하며 천인합일‧음양오행‧신통력 등 여러 가지 현기(玄機)를 담고 있는바, 이는 현대의학이 절대 따라갈 수 없는 것이다. 후세인을 일깨운 《상한론》 서문 장중경은 진단의 원리와 처방뿐 아니라 인생의 중요한 철리(哲理)도 남겨주었다. 상한론 서문에는 “무릇 하늘이 오행을 펼쳐 만물을 운행함에 사람은 오상(五常)을 받아 오장이 있으며, 경(經)‧락(絡)‧부(府)‧유(俞)와 음양이 만나고 통함이 현묘하고 심오해 그 변화를 다 알기 어렵다. 재주가 높고 지식이 빼어나지 않고서야 어찌 그 이치를 탐구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장중경은 또 “괴이하게도 지금 세상의 선비들은 신의(神醫)의 약을 보존하지 않고 의술도 제대로 궁구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위로는 임금과 부모님의 병을 치료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빈천한 이들의 고통을 구제하지 못하며, 그 가운데서 자신의 몸도 보전하고 양생할 줄 모른다. 오직 영화와 권세만을 좇아 권력자에게 빌붙고 명리를 구하기에 급급하다. 말단을 숭상하되 근본에는 소홀하고, 겉은 화려하되 안은 초췌하다. 가죽이 없으면 털이 제대로 붙어 있겠는가?”라고 했다. 장중경은 확실히 성인이다. 그는 의학을 논술할 때도 인간의 도리를 천명했다. 그는 당시 지식층이 의약을 중시하지 않고 의술도 애써 연구하지 않은 채 오히려 영화와 권세를 좇아 권문세가를 우러러보며 명리를 유일하게 중요한 것으로 여김으로써 결국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쇠잔하고 됐다고 지적했다. 가죽이 없는데 털이 어디에 붙겠는가? 이 문제는 오늘날의 중국 사회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중국 공산당의 무신론과 투쟁철학의 작용하에서 사람들은 전통 도덕과 조상들이 남겨준 가르침과 문화, 그리고 기술의 정화(精華)를 포기한 채 앞 다퉈 근본을 버리고 지엽적인 것을 쫓아 위험한 길로 가고 있다. ...자녀에게 클래식 음악을 소개하는 법
아이들의 피아노 연주를 듣는 행복한 가족.(셔터스톡) 많은 사람이 음악의 힘과 장점을 들며 클래식 음악을 옹호한다. 고대 중국에서는 음악으로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한자의 약(藥)은 음악의 악(樂)에서 왔다고 한다. 프랑스 연구원 알프레드 A. 토마티스가 1991년에 창안한 "모차르트 효과"라는 말은 모차르트를 듣는 것이 인지 능력을 향상한다는 여러 연구에 근거한 아이디어다. 다른 연구에 따르면 클래식 음악은 범죄율을 낮추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3년 런던 엘름 공원 지하철역에 클래식 음악을 틀었을 때 강도 행위가 33%, 파괴 행위가 37% 감소했다는 보고가 있다. 오늘날 음악 치료법은 성장 중인 분야다. 간질, 자폐증, 치매 등 여러 질환 환자를 치료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2016년 독일의 연구팀은 모차르트와 요한 슈트라우스의 음악이 혈압과 심장 박동을 줄이는 것을 발견했다. TV 및 라디오에서 늘 접할 수 있는 음악은 단순히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만 아니라 우리 삶에 영향을 준다. 아름다운 음악을 찾아보고 자녀와 음악 경험을 나누라. 많은 부모가 자녀들이 클래식 음악을 접하길 원한다. 그러나 부모가 클래식 음악을 듣지 않고 자랐거나 클래식 음악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는 경우 아이에게 강압적으로 음악 취향을 강요하게 될 위험도 있다. ‘클래식 라디오 보스턴’의 방송인이자 Classical.org의 이사 앤서니 루델에게 자녀에게 클래식 음악을 소개하려는 부모에게 통찰을 제공할 조언을 부탁했다. -클래식 음악을 접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루델 : 고전음악에는 상상력과 탐구심, 지적 호기심과 관련 아이들의 마음을 열어주는 풍부함과 깊이가 있다. 고전 음악이 만들어내는 두뇌 화학반응이 존재하므로 뇌 자체가 고전음악이 주는 자극에 더 개방적이다. -클래식 음악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부모가 자녀에게 클래식 음악을 안내하고 싶다면, 어떤 조언을 해 주겠나? 루델 : 클래식 음악은 우리 주위에 널려 있다. TV 광고와 인터넷이 아닌 오락으로 어린이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소개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자녀가 클래식 음악에 노출되도록 하는데 유용한 단계적인 접근 자료가 있나? 루델: 온라인에서 좋아하는 음악을 찾아서 자기 생활의 한 부분이 되도록 해보라. 4 세기 동안의 음악을 폭넓게 다루는 ClassicalWCRB.org로 시작하는 것도 좋다. 모든 이들이 다양한 클래식 음악에 접근할 수 있게 하기 위해 WGBH 교육 재단이 새로 시작한 Classical.org도 권한다. Classical.org의 계절별 선곡도 훌륭하다. -시작하는 부모들에게 곡이나 작곡가를 추천한다면? 루델 : 모차르트의 초기 작품으로 시작해 아이들에게 작곡가가 어렸을 때 작곡했다는 것을 알려주라. 위대한 삶을 살았던 작곡가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도 역사를 좋아하는 아이에게는 클래식 음악을 접하는 좋은 방법이다. 또한 합창곡을 연습하거나 소품을 연주하며 아이들과 당신이 같이 즐길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탐색해보라. 가장 중요한 것은 가르치려 하지 말고 같이 즐겨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라.이란서 수천 년 전에 만든 풍차 현재까지 운행
나쉬티판(Nashtifan)은 이란의 동북부 호라 산(Khorasan province) 지역의 작은 마을이다. 천연소재로 만든 풍차가 매우 유명한 곳이다. 사용한 지 수 천년이 되었으며 이 중 몇몇은 아직까지도 운행이 되고 있다. 이 지역의 일부 풍차에서 고대인이 도구를 만드는 지혜와 내구성을 발견할 수 있다. 나쉬티판 지역은 바람이 매우 강하며 특히 9~12월까지가 특히 심하다. 수 천년 전 당시 페르시아인들이 점토와 짚 그리고 나무로 풍차를 만들었으며 풍력을 만들어 곡식을 갈고 물을 공급했다. 이러한 풍차들이 건설된 산언덕에서는 풍력을 이용할 수 있으며 또한 마을을 보호할 수 있다. 수 세기 동안 사용했지만 아직까지도 일부 풍차는 완벽하게 기능이 보존되어 있어 오늘날까지도 사용하고 있다. 이 풍차의 팬은 원래 목재로 만든 것으로 강풍이 불어오면 풍차의 팬 부분은 빠르게 회전하고 회전축의 힘으로 아래 맷돌을 움직이게 한다. 그렇게 되면 밀이 밀가루로 갈아진다. 회전축과 맷돌의 연결부위는 매우 정교해야 하며 1cm라도 차이가 날 경우 맷돌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전기 또는 연료를 사용하는 현대화된 도구와 비교하여 순수하게 대자연의 힘을 이용하는 풍차는 당시 빈궁한 생활을 하는 주민들에게 적합했다. 나쉬티판의 풍차는 전문가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남은 전문가는 알리 무함마드 예테보리(Ali Muhammad Etebari) 라는 노인뿐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풍차는 자동차와 달리 공기오염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은 예테보리의 자식이나 현지 주민들 모두 그의 일을 이어받으려 하지 않고 있으며, 그에게서 풍차에 관한 전문적 지식을 배우는 제자도 없어 역사적인 유산을 다음 세대가 전승할 수 없게 된 사실이다. 고대 중국의 굴기 원인을 말하다
1971년 어느 날, 독일 뮌헨에 거주하는 폴 운슐트 씨의 아파트 단지 도어벨이 울렸다. 문을 연 운슐트 씨는 한 젊은 남성과 마주쳤다. 남성은 간단한 영어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CIA(미국 중앙정보국)에서 나온 제임스 퀸이라고 합니다. 침술의 군사적 활용에 대해 알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폴 운슐트 씨는 서양 학자로서는 드물게 체계적으로 그리고 진지한 태도로 중국 전통 의학을 연구한 독일 학자다. 중국 문명에 관한 그의 설명은 단순히 현대 의학 속에서 중의학의 역할을 설명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고대 중국의 위대한 중의학 저서를 원문 그대로 꼼꼼하게 번역했는데, 그 번역의 엄밀성은 한학자(漢學者)의 그것에 뒤지지 않는 수준이다. 운슐트 박사가 소장하고 있는 친필 중의학 원고 1,100개 속에 포함된 4만 여개의 처방은 중의학이 약초를 통해 질병을 치료하는 메커니즘을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문헌이다. 이들 문서 및 그가 수집해온 우수한 중국 의학자들의 조각상은 모두 독일에 현재 건설 중인 비(非)유럽문화 박물관에 전시될 예정이다. 운슐트 박사의 집념과 직설적인 태도, 그리고 중의학에 대한 독자적인 견해는 종종 서양 과학계에서 논쟁과 토론을 불러일으켰다. 많은 사람들은 중의학을 단지 산업화와 서양의학 보급 이후 대두된 대안적 치료방법으로만 여긴다. 또한 어떤 이들은 중의학이 가끔 효과를 나타내더라도 이는 다만 플라시보 효과로 인한 것이거나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두 종류의 의견에 대해 운슐트 박사는 모두 직설적으로 반박해왔다. 지난 28년간 중의학에서 가장 중요한 저작인 <황제내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진력해온 운슐트 박사는 최근 그 중 주요 내용 세 가지를 완성, 캘리포니아대 출판사에서 출판할 예정이다. 다수 서양 국가에서 사용하고 있는 중의학 교과서와 달리, 운슐트 박사의 영문 번역은 ‘에너지’ 같은 현대의학 용어나 ‘병원체’ 같이 자주 사용되는 서양의학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운슐트 박사는 이러한 용어를 사용할 경우 고대 중국의 중의들과 그들의 세계관을 공정하게 전달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천여 년의 역사를 가진 중의학에 대한 그의 존경심과, 원문에 충실하기 위한 영문 번역어들은 비록 무척 선구적이기는 하지만 서양 과학을 신봉하는 업계 종사자들에게 있어서는 읽기가 쉽지 않다. 중의학을 가르치는 중의사인 로젠버그는 이렇게 말한다. “운슐트 박사는 초심자들을 겁먹도록 합니다. ‘학습자들은 중의학 원전에 나오는 용어를 이해해야만 한다’고 책에 쓰고 있으니까요.” 운슐트 박사에 따르면 중의학이 서양에서 관심을 받게 된 경위는 냉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1971년인데, 당시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제임스 레스턴은 자신이 중국 체류 중 급성 맹장염에 걸린 후 침술과 쑥으로 치료받은 이야기를 보도했다. 당시는 마침 미국이 중국과 관계를 유화하고자 시도하던 시점이자 중국 측이 대외 개방 의사를 가지고 있던 시점이었다. 외부 세계와 중국 간의 접촉이 갈수록 빈번해짐에 따라 중의학 역시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고, 서양 국가들에서는 중의학을 가르치는 과정이 개설되었으며 동양에서 온 중의학 서적들이 다수 영역되어 출판됐다. 운슐트 박사는 의학자 집안 출신으로, 그의 가족들은 증조부 대에서부터 모두 의학 분야에 종사해왔다. 젊은 시절 그는 뮌헨에서 약학과 중문학 분야 학위를 취득하는 한편 아내를 만나게 됐다. 1년간 중국어를 배울 요량으로 1969년 아내와 함께 대만으로 건너갔으나 그 곳에서 중의사들을 다수 만나게 됐다. 이 시절의 경험은 그가 박사 논문을 완성하고 중의학 전문가가 되는 데 도움이 됐다. 이후 20년간 그는 뮌헨 대학에서 의학역사연구소를 이끌었다. 중국 정부는 순수 학술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운슐트 박사를 곱게 보지 않는다. 그의 중의학 지식 및 중의학 서적을 영문으로 번역하는 능력은 널리 인정받고 있지만, 중의학을 중국의 소프트 파워로 홍보하려는 중국 정부에 협력하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대륙에서 출판한 중의학 번역서적들이 “완전히 사기”라며 비난하는 그는 이들 서적의 편역자들이 오직 정치적 목적만 염두에 두고 성의없이 번역했다고 말한다. 운슐트 박사에게 있어서 보다 의미 있는 것은 중의학 이론을 사용해 중국인의 정신세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황제(黃帝)’ 같은 중국 역사상의 유명 인물들은 중국인의 뿌리 깊은 실용주의 정신을 보여 준다. 질병과 마음 간에 관계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는 2천여 년 전 중국 서적들은 ‘질병에 걸리는 것은 자신의 행위 때문이며, 치료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르네상스 운동과 무척 닮아 있습니다.” 운슐트 박사의 말이다. 그에 따르면 중국에는 ‘내 운명은 나에게 달려 있지 하늘에 달린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의학과 정치가 서로 유사성을 띠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타인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책망하는 것이 그것이지요. ‘내가 뭘 잘못했을까?’ ‘내가 이렇게 쉽게 공격당한 것은 왜일까?’ ‘어떻게 해야 할까?’ 등의 반성적 사고는 (고대) 중국이 굴기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시집 낸 궁중요리연구가 한복선, “詩에 한국 전통음식문화 버무렸죠”
강연과 요리책으로 한국음식을 알려온 궁중음식 연구가 한복선(韓福善·64) 씨가 이제는 우리 음식문화를 시(詩)로 풀기 시작했다. 지난 3월 계간 ‘문파문학’ ...‘마오의 라스트 댄서’ 실제 주인공 리춘신 “중국 무용가들, 정치적 영향서 자유로워야”
올해로 개최 5회를 맞는 NTDTV ‘전세계중국무용대회’가 10월 뉴욕에서 막을 올린다. 그에 앞선 8월 18일, 아시아 지역예선이 대만이 아닌 ...[책과 사람] 사기열전에 이어 ‘사기본기’ 번역한 김원중 교수
인간의 내면과 본질 탐구한 인간학 교과서<史記> 김원중 교수는 요즘 심심찮게 서울 나들이를 한다. 그가 번역한 삼국유사에 이어 사기열전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