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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봄의 전령 매화(梅花)
봄을 알리는 전령 매화(梅花). 봄부터 피어나는 여러 꽃 중에 가장 빨리 피는 매화를 가리켜 예로부터 봄의 전령이라 칭했다. 매화는 '난초·국화·대나무' 와 함께 사군자라 하여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기도 한다. 매화의 꽃말은 '인내, ...[포토 에세이] 2023년 계묘년(癸卯年)에 만나보는 토끼
2023년은 계묘년 (癸卯年)이다. 태음력에 따르면 설날은 음력 1월 1일이다. 우리나라도 전통적으로 음력 1월 1일을 새해 첫날로 정하고 설을 쇠 ...[포토 에세이] 꽁꽁 언 수원 광교호수공원
수원시 하동에 위치한 광교호수공원은 경기도시공사가 시행하고, 삼성물산이 시공해 2013년 11월 3일 개장했다. 이 공원은 광교신도시가 조성되면서 신도시의 랜드마크로 ...[포토] 중국발 황사에 미세먼지까지…이번주 중반까지 기승
새해 첫 주말인 지난 7일 환경부가 강원 영동을 제외한 17개 시도에 미세먼지 비상저감조치를 시행한다고 밝혔다. 중국 고비사막에서 유입된 ...[포토] 서울광장 스케이트장 3년 만에 문 연다…입장료 1천 원
서울광장 스케이트장이 3년 만에 개장한다. 서울시는 서울광장 스케이트장을 오는 12월 21일부터 내년 2월 12일까지 54일간 운영한다고 밝혔다. 서울광장 ...[포토] 전국 첫 황사 위기 경보 발령… 서울 미세먼지 ‘매우 나쁨’
지난 13일 환경부가 올해들어 첫 황사 위기경보를 발령한 가운데 서울 도심도 희뿌연 미세먼지로 뒤덮였다. 대기 중 미세먼지 농도가 ...[포토] 캐나다 영화 ‘배우의 꿈’ 출연진 시사회 참석 위해 한국 찾아
캐나다 신세기필름 제작 영화 '배우의 꿈' 출연진이 5일 저녁 7시 인천국제공항으로 입국했다. 이번 입국은 7일 저녁 7시 30분 ...[포토 에세이] ‘사유의 방’에서 ‘반가사유상’을 만나다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한국 사람이라면 학창 시절 역사 교과서에서 한 번쯤은 접했을 우리나라의 국보다. 반가사유상 특유의 아름답고 자비로운 미소는 ...[포토 에세이] 공군 특수비행팀 블랙이글스, 화려한 에어쇼!
대한민국 공군의 유일한 특수비행팀 블랙이글스(Black Eagles). 블랙이글스는 1966년 창설돼 현재까지 국가 행사와 대형 민간 축제에서 멋진 에어쇼로 많은 ...[포토] 제주의 가을 ② 제주시 조천읍 함덕해수욕장
제주올레 19코스를 따라 걷다 보면 에메랄드빛 바다를 가진 함덕해수욕장을 만날 수 있다.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에 자리한 함덕해수욕장은 해수욕장 ...[포토] 제주의 가을 ① 산굼부리 ‘갈대’
은빛 억새 물결이 장관을 이룬 제주 '산굼부리'에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이곳은 새별오름과 함께 제주 억새 명소 하면 ...[포토] 나무에 색색 니트를 입힌 분당중앙공원 ‘그래피티 니팅’
성남 분당중앙공원 나무에 색색의 니트를 입혀 전시하는 ‘그래피티 니팅’ 행사가 열리고 있다. 그래피티 니팅은 나무에 뜨개옷을 입히는 친환경 ...[포토] ‘청계산 맑은숲 공원’으로 메타세쿼이아 보러 오세요~
의왕시 청계산 자락에 위치한 '청계산 맑은숲 공원'의 메타세쿼이아가 장관이다. 메타세쿼이아는 낙엽침엽교목으로 최고 높이는 35m까지 자라며 공원용으로 많이 식재된다. ...[포토] 거미줄에 딱 걸린 빨간 단풍잎
단풍잎이 거미줄에 걸릴 확율이 얼마나 될까? 지난 9일 오전에 찾은 청계산 맑은 숲 공원. 단풍잎 하나가 가느다란 거미줄에 ...[포토] 단풍으로 물든 도심
완연한 가을 날씨를 보인 지난 8일 오후 분당 신도시. 색색의 가을 단풍이 도심을 수 놓고 있다.[포토] 경기도 지정 기념물 ‘하우현성당 사제관’
하우현성당은 청계산과 광교산맥을 잇는 골짜기에 위치한 곳으로 19세기 초반 천주교인의 피난처로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1884년 알릭스 신부와 하우현 성당 ...의왕 백운호수 둘레길 단풍 절정
의왕 백운호수 전체가 단풍으로 곱게 물들었다. 호수 주위 총 3km로 조성된 생태탐방로를 따라 걷다 보면 환상적인 단풍을 만끽할 ...분당 율동공원 ‘만추’
분당율동공원 만추(晩秋). 11월로 접어들면서 분당율동공원 일대가 오색단풍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다.‘운중지’ 가을 정경
성남시 분당에 위치한 운중지(雲中池)의 가을 정경. 운중지가 색색의 단풍으로 곱게 물들어 있다. 운중지는 인근 농지에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포토] 코로나 19 때문에 사람들 발길 뚝 끊겨 현실감 없어진 명동 풍경
중국 후베이성 우한에서 시작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전 세계로 확산하고 있는 가운데, 지난 6일 서울 명동은 사람들이 ...[단독포토] 30년 만에 깨어나는 진실…’톈안먼 사건’ 기록사진 공개⑤
1989년 톈안먼 사태 당시 베이징 학생들은 중국 공산당의 탄압 항의, 부패 반대, 민주화 요구 단식으로 많은 민중의 지지를 얻었다. (류젠 제공) 1989년 봄,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민주화운동'이 베이징에서 시작돼 중국 전역으로 번졌다. 운동에 참여한 베이징의 한 대학생은 역사적인 순간을 카메라에 포착했다. 그리하여 당시 학생과 시민들의 애국 열정 및 중국 공산당이 자행한 '6.4 대학살'을 역사의 증언대에 세웠다. 중국 공산당은 지금도 당시 학생들의 평화 시위를 ‘반혁명 폭란(暴亂)’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심지어 계엄군의 총기 난사 사실도 부인으로 일관하고 있다. 현장에 있었던 류젠(劉建, 19세, 학생)은 “역사는 지울 수 없다! 어떤 정부도 역사를 지울 수 없다. 우리는 중국인으로서, 또한 산증인으로서 진상을 밝혀 후대에 진실을 알릴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몇 년 전 해외로 이주한 그는 최근 자신이 중국 공산당에 세뇌당해 왔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들의 거짓말과 박해를 폭로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30년간 묻어두었던 '톈안먼 사건' 기록사진 2천 장을 공개하며, 발표 권한을 에포크타임스와 신탕런(NTD)에 위임했다. 다음은 그중 일부다. 이 ‘톈안먼 사건’ 관련 기사는 류젠의 진술에 근거해 작성하고, 톈안먼 사건을 직접 겪은 우런화(吳仁華)의 저서 <톈안먼사건대사기(天安門事件大事記)>에서 일부 가져왔다. 베이징 당국, 단식 대학생과의 대화 ‘결렬’ (4편에서 계속) 5월 13일 베이징대, 칭화대, 베이징사범대, 정법대 등 단식 청원에 참가한 13개 대학생 300여 명은 톈안먼 광장으로 행진햔 뒤 오후 5시 40분부터 단식 돌입했다. 이후 민중들의 지지와 성원이 이어졌다. 학생들은 정부에 대화단 대표와의 신속한 대화를 요구하면서 ‘동란’으로 매도한 학생운동의 명분을 바로잡고 애국 민주화 학생운동을 긍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베이징 당국은 5월 14일 오전 2시 반, 리톄잉, 리시밍, 천시퉁 등이 톈안먼 광장으로 출동해 단식 학생들에게 학교 복귀를 권유했다. 일부 학생들은 "너무 늦었어. 너무 늦었어" "오늘이 올 줄 알면서 애초에 왜 그랬어!"라고 외쳤다. 단식 학생 수는 천여 명으로 단번에 늘어났다. 톈안먼 광장은 낮에는 2만 명, 밤에는 10만 명의 시민과 학생이 함께 참여했다. 사회 각계각층에서도 단식 학생들을 지지하고 나섰고, 특히 베이징 지식층의 반향이 컸다. 사진=류젠 제공 사진=류젠 제공 사진=류젠 제공 사진=류젠 제공 사진=류젠 제공 베이징 소재 대학생들은 수업을 중단하고 단식 청원 학생들을 성원하고 나섰다. 베이징대, 베이징사범대 등 일부 교수는 '모든 교수에게 수업 중단을 제의한다'는 대자보를 붙여 "오늘 밤 11시 이전에 정부가 학생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15일 수업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단독포토] 30년 만에 깨어나는 진실…’톈안먼 사건’ 기록사진 공개④
베이징 학생들의 행진 대열이 톈안먼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1989년 톈안먼 사태 당시 베이징 학생들은 중국 공산당의 탄압에 항의하고 부패를 반대하고 민주를 요구하는 단식을 시작해 많은 민중의 지지를 얻었다. (류젠 제공) 1989년 봄, 수도 베이징에서 시작된 애국 학생 '민주화운동'이 중국 전역으로 번져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모든 과정에 참여한 베이징의 한 대학생이 이 역사적인 순간을 카메라에 담아 학생과 시민들의 애국 열정 및 중국 공산당의 잔인한 '6.4 대학살'을 증명했다. 중국 정권은 지금까지도 진상을 봉쇄하고 학생들의 평화 시위를 ‘반혁명 폭란(暴亂)’으로 몰아붙이고 있으며, 계엄군의 총기 난사 사실도 부인하고 있다. 당시 19세 학생이었던 류젠은 “역사는 지울 수 없다! 어떤 정부도 역사를 지울 수 없다. 우리는 중국인으로서, 또한 산증인으로서 사람들에게 진상을 밝히고 후대에 진실을 알릴 의무가 있다”고 했다. 몇 년 전 해외로 이주한 그는 최근에서야 자신이 중국 공산당에 세뇌됐음을 깨닫고 중국 공산당의 거짓말과 박해를 폭로하기로 결심했다. 최근 류젠은 30년 동안 묻어두었던 '톈안먼 사건' 기록사진 2천 장을 공개하며, 그 발표 권한을 에포크타임스와 신탕런(NTD)에 위임했다. 다음은 그중 일부다. 이 ‘톈안먼 사건’ 관련 기사는 류젠의 진술에 근거해 썼으며, 톈안먼 사건을 직접 겪은 우런화(吳仁華)의 저서 <톈안먼사건대사기(天安門事件大事記)>에서 일부 가져왔다. (3편에서 계속) 1989년 4.27 대행진은 베이징 각계의 폭넓은 지지를 받아 약 100만 명의 학생과 시민이 참여했다. 이들의 항의 시위를 외지의 대학생들이 응원하고 해외 유학생이 지원함으로써 규모가 크게 확대됐다. 중국 공산당의 국무원 대변인 위안무(袁木)는 압력에 못 이겨 학생들과 '대화'를 하면서도 가오쯔롄(高自联‧베이징대학교자치연합회) 학생들을 소외시켰다. 가오쯔롄은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의 겉치레 대화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베이징 대학생 대화단(團)을 별도로 구성해 정부에 탄원서를 보냈다. 이어 5월 4일에는 베이징 대학생 수만 명이 다시 한번 시위행진을 벌였고, 군경이 상징적으로 저지했으며, 민중 수십만 명이 연도에서 응원했다. 당시 전국 30개 도시에서 교사와 학생 9만 명이 시위행진을 벌였다. 당시 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은 학생의 애국정신을 인정하면서 ‘민주와 법제의 궤도상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오쯔양은 또 덩샤오핑에게 학생운동을 ‘동란’으로 규정한 '4.26' 사설을 거둬들이도록 설득하려 했지만, 리펑(李鹏)은 물러서지 않겠다고 했다. 정부도 대학생 대화단과의 대화를 거부했다. 단식 시작, 학생 선서 5월 12일, 가오쯔롄은 단식 결행을 발표하면서 세 가지 요구를 제출했다. 1.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신문 발행 금지 조치를 취소할 것을 요구한다. 2. 정부와 학생의 대화를 촉구한다. 3. 민주화 진전을 촉구한다. 당시 이미 왕단(王丹), 우얼카이시(吾爾開希), 슝옌(熊焱) 등 근 100명이 단식 대자보에 서명했다. 학생들은 단식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첫째, 수업을 거부한 채 벌이는 학생들의 항의 시위에 냉담하게 대응하는 정부의 태도에 항의한다. 둘째, 정부가 베이징 대학생 대표단과의 대화를 지연시킨 데 대해 항의한다. 셋째, 학생들의 민주화 애국 운동을 ‘동란’으로 매도한 당국의 일련의 보도 행태에 항의한다. 5월 13일 10시 30분, 베이징대 학생 단식단 100여 명은 머리에 흰 끈을 두르고 단식 선서를 했다. "조국 민주화를 촉진하고 조국 번영을 위해 자의적으로 단식한다." 베이징 학생들은 베이징대학교자치연합회(고자련)를 만들고 스스로 깃발을 만들었다. (류젠 제공) 13일 오후 1시경, 베이징대, 칭화대, 베이징사범대, 정법(政法)대, 베이징과기대, 베이징이공대, 베이징항공항천대, 베이징의대, 베이징농업대, 중앙민족대학, 베이징경제대학, 베이징기계공업관리대학, 중국청년정법학원 등 13개 대학의 단식 청원에 참가한 학생 300여 명이 베이징사범대에 모여 단식 결의를 다지며 맹세를 했다. ...[단독포토] 30년 만에 깨어나는 진실…’톈안먼 사건’ 기록사진 공개③
톈안먼 사태 당시, 베이징 각 대학의 학생들이 시위행진을 벌였고, 일부 베이징 시민도 이 대열에 동참했다. (류젠 제공) 1989년 봄, 수도 베이징에서 시작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애국 학생 '민주화운동'이 중국 전역으로 번졌다. 모든 과정에 참여한 베이징의 한 대학생이 이 역사적인 순간을 카메라에 담아 학생과 시민들의 애국 열정 및 중국 공산당의 잔인한 '6.4 대학살'을 증명했다. 중국 공산당은 지금까지도 진상을 봉쇄하고 학생들의 평화 시위를 ‘반혁명 폭란(暴亂)’으로 몰아붙이고 있으며, 계엄군의 총기 난사 사실도 부인하고 있다. 당시 19세 학생이었던 류젠(劉建)은 “역사는 지울 수 없다! 어떤 정부도 역사를 지울 수 없다. 우리는 중국인으로서, 또한 산증인으로서 사람들에게 진상을 밝히고 후대에 진실을 알릴 의무가 있다”고 했다. 몇 년 전 해외로 이주한 그는 최근에서야 자신이 중국 공산당에 세뇌됐음을 깨닫고 중국 공산당의 거짓말과 박해를 폭로하기로 결심했다. 최근 류젠은 30년 동안 묻어두었던 '톈안먼 사건' 기록사진 2천 장을 공개하며, 그 발표 권한을 에포크타임스와 신탕런(NTD)에 위임했다. 다음은 그중 일부다. 이 ‘톈안먼 사건’ 관련 기사는 류젠의 진술에 근거해 썼으며, 톈안먼 사건을 직접 겪은 우런화(吳仁華)의 저서 <톈안먼사건대사기(天安門事件大事記)>에서 일부 가져왔다. (2편에서 계속) 시민들, 학생들의 4·27 대규모 시위행진 적극 지지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胡耀邦)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세상을 떠나자, 베이징 각 대학의 학생들은 여러 차례 집회와 시위행진을 벌였다. 또한 23일 결성된 학생 조직인 ‘가오쯔롄(高自聯)’은 ‘민주화’ 등 7가지 항목의 요구사항을 제기하며 ‘애국무죄(愛國無罪·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죄가 없다)’ ‘부패척결’ ‘언론자유’ ‘독재반대’를 외쳤다. 4월 20일에는 일부 학생이 신화먼(新華門)에서 경찰과 충돌해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학생들은 분노했으며, 이때부터 시위 행렬이 수만 명 규모로 늘어났다. 4월 26일,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반드시 기치를 선명하게 하고, 동란(動亂)에 반대해야 한다'는 사설을 발표하자, 가오쯔롄은 대규모 시위행진을 준비했다. 그들은 앞선 요구사항을 두 가지로 변경했다. 첫째는 ‘동란’이라는 오명을 벗겨달라는 것이고, 둘째는 ‘평등한 대화’를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각 대학 총장들은 이들을 강력히 저지하고 나섰다. 당시 장핑(江平) 정법(政法)대 총장은 “너희들이 오늘 시위행진을 벌이다 다치기라도 하면, 너희 부모님께 이를 어떻게 설명하느냐?”며 학생들을 막아섰다. 그러나 4월 27일 오전, 베이징 지역 38개(54개라는 보도도 있다) 대학의 학생 수만 명이 반대를 무릅쓰고 베이징 주요 거리를 따라 시위행진을 벌였으며, 이 상황을 시민 수십만 명이 지켜봤다. 베이징 지역 대학생들이 대규모 시위행진을 벌이는 모습. (류젠 제공) 베이징 지역 대학생들이 대규모 시위행진을 벌이는 모습. (류젠 제공) 베이징 지역 대학생들이 대규모 시위행진을 벌이는 모습. (류젠 제공) 베이징 지역 대학생들이 대규모 시위행진을 벌이는 모습. (류젠 제공) 베이징 지역 대학생들이 대규모 시위행진을 벌이는 모습. (류젠 제공) 베이징 지역 대학생들이 대규모 시위행진을 벌이는 모습. (류젠 제공) ...[단독포토] 30년 만에 깨어나는 진실…’톈안먼 사건’ 기록사진 공개②
톈안먼 광장에 모여 있는 베이징 대학교 학생들. (류젠 제공) 1989년 봄, 수도 베이징에서 시작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애국 학생 '민주화운동'이 중국 전역으로 번졌다. 모든 과정에 참여한 베이징의 한 대학생이 이 역사적인 순간을 카메라에 담아 학생과 시민들의 애국 열정 및 중국 공산당의 잔인한 '6.4 대학살'을 증명했다. 중국 공산당은 지금까지도 진상을 봉쇄하고 학생들의 평화 시위를 ‘반혁명 폭란(暴亂)’으로 몰아붙이고 있으며, 계엄군의 총기 난사 사실도 부인하고 있다. 당시 19세 학생이었던 류젠(劉建)은 “역사는 지울 수 없다! 어떤 정부도 역사를 지울 수 없다. 우리는 중국인으로서, 또한 산증인으로서 사람들에게 진상을 밝히고 후대에 진실을 알릴 의무가 있다”고 했다. 몇 년 전 해외로 이주한 그는 최근에서야 자신이 중국 공산당에 세뇌됐음을 깨닫고 중국 공산당의 거짓말과 박해를 폭로하기로 결심했다. 최근 류젠은 30년 동안 묻어두었던 '톈안먼 사건' 기록사진 2천 장을 공개하며, 그 발표 권한을 에포크타임스와 신탕런(NTD)에 위임했다. 다음은 그중 일부다. (1편에서 계속) 베이징 각 대학 학생들의 시위행진과 청원서 제출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胡耀邦)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세상을 떠나자 베이징 각 대학의 일부 학생이 톈안먼 광장에 모여 후야오방을 추모했다. 또한 그들은 ‘자유민주’와 관리들의 재산 공개를 요구하는 등 7가지 항목의 청원서를 제출했다. 4월 22일, 중국 당국은 인민대회당에서 후야오방 추모식을 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사람과 차량의 톈안먼 주변 진입을 막기 위해 교통통제를 실시했다. 추모식 전날인 4월 21일 저녁, 베이징 20여 개 대학의 수많은 학생이 시위행진을 하며 각 학교에서 톈안먼 광장으로 들어갔고, 밤을 지새우며 추모식을 기다렸다. 톈안먼 사태 당시, 베이징 대학 학생들의 시위행진 모습. (류젠 제공) 톈안먼 사태 당시, 베이징 대학 학생들의 시위행진 모습. (류젠 제공) 톈안먼 사태 당시, 베이징 대학 학생들의 시위행진 모습. (류젠 제공) 류젠이 당시 상황을 소개했다. ”학생들이 행진할 때 사람이 너무 많아서 걸을 수가 없을 정도였어요. 또한 점점 더 많은 시민이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을 지지하러 거리로 나왔고 학생들의 애국운동에 동참했어요. 일부 도로 구간은 발 디딜 곳을 찾기도 어려워 나무나 담장, 도로 표지판 위에 올라간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는 또 “경찰도 아예 없었어요. 모두가 학생들이 질서를 유지하고 손을 맞잡고 걷도록 길을 터줬어요. 도둑도, 범죄도 없었고, 모두가 학생들을 지지했지요. 또한 마실 것, 먹을 것, 밤에 입을 따뜻한 옷가지 등 학생들에게 줄 수 있는 건 죄다 제공했어요”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톈안먼 사태 당시,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이 너무 많아 일부는 나무나 담장, 교통 표지판 위에 올라가 있다. (류젠 제공) 톈안먼 사태 당시,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이 너무 많아 일부는 나무나 담장, 교통 표지판 위에 올라가 있다. (류젠 제공) ...[단독포토] 30년 만에 깨어나는 진실…’톈안먼 사건’ 기록사진 공개 ①
1989년 봄, 중국에서 일어난 애국 학생 '민주화운동'의 한 장면. (류젠 제공) 1989년 봄, 수도 베이징에서 시작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애국 학생 '민주화운동'이 중국 전역으로 번졌다. 모든 과정에 참여한 베이징의 한 대학생이 이 역사적인 순간을 카메라에 담아 학생과 시민들의 애국 열정 및 중국 공산당의 잔인한 '6.4 대학살'을 증명했다. 중국 공산당은 지금까지도 진상을 봉쇄하고 학생들의 평화 시위를 ‘반혁명 폭란(暴亂)’으로 몰아붙이고 있으며, 계엄군의 총기 난사 사실도 부인하고 있다. 당시 19세 학생이었던 류젠(劉建)은 “역사는 지울 수 없다! 어떤 정부도 역사를 지울 수 없다. 우리는 중국인으로서, 또한 산증인으로서 사람들에게 진상을 밝히고 후대에 진실을 알릴 의무가 있다”고 했다. 몇 년 전 해외로 이주한 그는 최근에서야 자신이 중국 공산당에 세뇌됐음을 깨닫고 중국 공산당의 거짓말과 박해를 폭로하기로 결심했다. 최근 류젠은 30년 동안 묻어두었던 '톈안먼 사건' 기록사진 2천 장을 공개하며, 그 발표 권한을 에포크타임스와 신탕런(NTD)에 위임했다. 다음은 그중 일부다. 후야오방을 추모하다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심장병으로 급사했다. 베이징의 수많은 대학생과 시민이 톈안먼 광장에서 후야오방의 대형 초상화를 펼쳐 놓고 추모행사를 벌였다. 또한 ‘민주, 자유’ 등의 구호를 외쳤다. 4월 22일, 후야오방의 장례식이 거행됐고, 대학생 3명이 인민대회당 계단에 무릎을 꿇고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리펑(李鵬) 당시 총리 접견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학생들은 크게 실망했다. 1989년 4월 15일,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야오방을 추모하기 위해 학생들이 그린 대형 초상화. (류젠 제공) 톈안문 광장 기념비 위에 놓인, 후야오방을 추모하는 조화와 만장(輓章). (류젠 제공) 애국 학생들의 호소와 시민들의 성원 학생운동 당시 베이징 교사들이 학생들을 성원하는 모습. (류젠 제공) 톈안먼 사태 당시, 베이징 시민들이 학생들을 성원하는 모습. (류젠 제공) 공산당 기관지가 '동란(動亂)'으로 규정한 게 대규모 시위 ‘불씨’ 4월 26일,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학생과 시민들의 호소에 대응해 '반드시 기치를 선명하게 해 동란에 반대해야 한다'는 사설을 발표했다. 전국은 경악했다. 고자련(高自聯‧1989년에 결성된 베이징 대학교 학생자치연합회)은 첫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었고, 전국 곳곳에서 더 큰 규모의 시위가 벌어졌다. 톈안먼 사태 당시, 중국 공산정권은 학생들이 '소수 사람들'에게 선동됐다고 발표했다. 당시 중앙미술학원 학생들이 ‘자기만의 생각이 있는데 선동이 왜 필요한가’라는 반박 플래카드를 내걸고 시위하고 있다. (류젠 제공) 톈안먼 사태 당시, 베이징우체대 학생들이 내건 '특권을 반대하고, 민주를 요구한다'는 플래카드. (류젠 제공) 톈안먼 사태 당시, 학생들을 성원하는 베이징 지식계 인사들. (류젠 제공) ...아시아인이 함께한 평화로운 도심 퍼레이드
전경림 기자 전경림 기자 전경림 기자 전경림 기자 전경림 기자 전경림 기자 전경림 기자 포토그래퍼 김국환 포토그래퍼 김국환 포토그래퍼 김국환 포토그래퍼 김국환 포토그래퍼 김국환 전경림 기자 전경림 기자 전경림 기자 전경림 기자 10월 13일 오후, 아시아법회 경축 퍼레이드가 서울 도심 속에서 성대하게 펼쳐졌다.‘4.25 청원’ 18주년 맞아 뉴욕서 퍼레이드(포토)
18년 전 4월 25일, 수만 명의 파룬궁 수련자들이 중국 당국에 합법적인 수련환경을 요구하며 베이징에서 평화적으로 청원 활동을 했었다. 18년 동안, 중국 공산당의 가혹한 박해 앞에서도 그들은 결코 초심을 잃지 않았다. 18년이 지난 오늘, 파룬궁 수련자들의 ‘4.25’ 기념 활동은 전 세계 민중들이 함께 성원하고 지지하는 행사가 됐다. 4월 23일, 뉴욕 지역 2천여 명 파룬궁 수련자들은 중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플러싱 지역에 모여 성대한 퍼레이드와 집회를 열었다. 이 행사는 전 세계적으로 거행되는 ‘4.25’ 평화청원 18주년 기념행사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당일 행사는 중국계 주민들은 물론 주류 매체와 주류 인사들까지도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4월 23일, 뉴욕 플러싱은 눈부신 햇살 아래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었다. 낮 12시에 시작한 파룬궁 퍼레이드는 ‘파룬따파하오’, ‘파룬궁 박해중지’, ‘2억 7천만 명 중국공산당, 공청단, 소선대 조직 탈퇴 성원’ 등 세 파트로 나뉘어 진행됐다. 수많은 중국인들과 시민들은 플러싱 중심지역의 거리 양쪽에 빼곡히 서서 가족들과 파룬궁 퍼레이드의 웅장한 모습을 지켜보았다. 파룬궁 수련자들의 행렬이 지나갈 때마다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사진을 찍으면서 “정말 아름답다.”, “매우 멋지다”고 감탄했고, 길을 따라서 수련자들이 작은 연꽃 장식품을 나누어 줄 때는 질세라 팔을 내밀어 달라고 했다.동서양의 각 소수민족과 남녀노소 파룬궁 수련자들로 구성된 사자춤 팀, 용춤 팀, 공법시연 팀, 깃발 팀, 현수막 팀, 게시판 팀, 탈당자원봉사자 팀, 꽃차 팀, 꽃배 팀, 요고 팀 등이 메인 스트리트 거리와 샌포드애비뉴(Sanford Ave)를 따라 힘차게 행진했다. 대오는 한 눈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길었다. 그들은 상화하고 선한 미소를 지으며 길옆 시민들에게 ‘파룬따파’의 아름다움을 전해주었고 ‘진선인(眞善忍)’의 정신적인 풍모를 보여주었다. 뉴욕 현지 주류 매체는 올해 처음으로 ‘4.25’ 퍼레이드에 대해 인터뷰했다. NY1 방송국은 파룬따파 정보센터 책임자인 장얼핑(張而平) 대변인과 1999년 ‘4.25’청원에 참가했던 스차이둥(石采東)을 인터뷰했다. 당시 스차이둥은 중국 과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고 파룬궁 수련자 대표로 국무원 신팡(信訪·서신과 방문을 통한 민원)실에 들어가 청원했었다. 뉴욕경찰서 109지국 국장 주디스 해리슨은 여러 명의 경찰들과 함께 퍼레이드와 집회의 안전을 지켜주었다. 흥겨운 용, 사자 팀이 지나갈 때 그녀는 동료들에게 기념사진을 찍어달라고 했고, 109지국 트위터에 퍼레이드를 배경으로 한 해당 지국 경찰들의 단체사진을 올려놓기도 했다. 트위터엔 ‘아름다운 하루였다(It was abeautiful day!)’라고 올려져 있었다. 한 시민단체인 ‘크리스천 민주당’도 파룬궁 퍼레이드 행렬 속에 있었다. 그 단체의 멤버인 린성은 인터뷰에서 “오늘 제가 퍼레이드에 참가한 것은 파룬궁에 대한 공산당의 박해를 반대하기 위해서입니다. 일반 민중으로서 침묵을 지킬 것이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에게 공산당의 죄악을 알려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