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포토] 30년 만에 깨어나는 진실…’톈안먼 사건’ 기록사진 공개 ①

2019년 05월 8일 오후 6:06 업데이트: 2022년 06월 2일 오후 2:48
1989년 봄, 중국에서 일어난 애국 학생 ‘민주화운동’의 한 장면. (류젠 제공)

1989년 봄, 수도 베이징에서 시작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애국 학생 ‘민주화운동’이 중국 전역으로 번졌다. 모든 과정에 참여한 베이징의 한 대학생이 이 역사적인 순간을 카메라에 담아 학생과 시민들의 애국 열정 및 중국 공산당의 잔인한 ‘6.4 대학살’을 증명했다.

중국 공산당은 지금까지도 진상을 봉쇄하고 학생들의 평화 시위를 ‘반혁명 폭란(暴亂)’으로 몰아붙이고 있으며, 계엄군의 총기 난사 사실도 부인하고 있다.

당시 19세 학생이었던 류젠(劉建)은 “역사는 지울 수 없다! 어떤 정부도 역사를 지울 수 없다. 우리는 중국인으로서, 또한 산증인으로서 사람들에게 진상을 밝히고 후대에 진실을 알릴 의무가 있다”고 했다. 몇 년 전 해외로 이주한 그는 최근에서야 자신이 중국 공산당에 세뇌됐음을 깨닫고 중국 공산당의 거짓말과 박해를 폭로하기로 결심했다.

최근 류젠은 30년 동안 묻어두었던 ‘톈안먼 사건’ 기록사진 2천 장을 공개하며, 그 발표 권한을 에포크타임스와 신탕런(NTD)에 위임했다. 다음은 그중 일부다.

후야오방을 추모하다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심장병으로 급사했다. 베이징의 수많은 대학생과 시민이 톈안먼 광장에서 후야오방의 대형 초상화를 펼쳐 놓고 추모행사를 벌였다. 또한 ‘민주, 자유’ 등의 구호를 외쳤다.

4월 22일, 후야오방의 장례식이 거행됐고, 대학생 3명이 인민대회당 계단에 무릎을 꿇고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리펑(李鵬) 당시 총리 접견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학생들은 크게 실망했다.

1989년 4월 15일,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야오방을 추모하기 위해 학생들이 그린 대형 초상화. (류젠 제공)
톈안문 광장 기념비 위에 놓인, 후야오방을 추모하는 조화와 만장(輓章). (류젠 제공)

애국 학생들의 호소와 시민들의 성원

학생운동 당시 베이징 교사들이 학생들을 성원하는 모습. (류젠 제공)
톈안먼 사태 당시, 베이징 시민들이 학생들을 성원하는 모습. (류젠 제공)

공산당 기관지가 ‘동란(動亂)’으로 규정한 게 대규모 시위 ‘불씨’

4월 26일,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학생과 시민들의 호소에 대응해 ‘반드시 기치를 선명하게 해 동란에 반대해야 한다’는 사설을 발표했다. 전국은 경악했다. 고자련(高自聯‧1989년에 결성된 베이징 대학교 학생자치연합회)은 첫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었고, 전국 곳곳에서 더 큰 규모의 시위가 벌어졌다.

톈안먼 사태 당시, 중국 공산정권은 학생들이 ‘소수 사람들’에게 선동됐다고 발표했다. 당시 중앙미술학원 학생들이 ‘자기만의 생각이 있는데 선동이 왜 필요한가’라는 반박 플래카드를 내걸고 시위하고 있다. (류젠 제공)
톈안먼 사태 당시, 베이징우체대 학생들이 내건 ‘특권을 반대하고, 민주를 요구한다’는 플래카드. (류젠 제공)
톈안먼 사태 당시, 학생들을 성원하는 베이징 지식계 인사들. (류젠 제공)
톈안먼 사태 당시, 베이징의 거리 길가에 앉아 있던 무장경찰이 행진하는 학생과 시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박수 치는 모습. (류젠 제공)
톈안먼 사태 당시, 베이징 톈안먼 광장 인민영웅기념비 일대 전경. (류젠 제공)

학생들, 단식으로 인민일보 사설에 항의

5월 13일부터 학생들은 ‘동란’으로 규정한 인민일보 사설에 항의하며 단식을 시작했다. 5월 18일, 리펑은 처음으로 학생 대표들과 대화를 했다. 5월 19일, 자오쯔양은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공산당 중앙판공청 주임과 함께 톈안먼 광장에서 학생들을 만났다. 이것이 자오쯔양이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공식 활동이었다.

톈안먼 사태 당시, 톈안먼 광장에서 정부에 대화를 요구하며 단식 청원을 하는 학생들. (류젠 제공)
애국 학생들이 정부에 민주화를 요구하며 발표한 단식 청원 선언문. (류젠 제공)
단식으로 청원하는 학생들의 단식 진행 상황판. (류젠 제공)
톈안먼 광장에서 단식 청원을 하고 있는 중국정법(政法)대학 학생. (류젠 제공)
톈안먼 광장에서 단식 청원을 하고 있는 칭화대 학생들. (류젠 제공)
톈안먼 광장에서 단식 청원을 하고 있는 학생들. (류젠 제공)

항의 시위, 전국으로 확산  

톈안먼 광장에 모인 청원 학생들. (류젠 제공)
단식하고 있는 학생들을 성원하는 중앙미술학원 학생들. (류젠 제공)
톈안먼 광장에 모인 청원 학생들. 공중에는 베이징 각 대학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류젠 제공)
단식하는 학생들을 성원하는 지방 대학교 학생들. (류젠 제공)

언론 종사자들도 학생 지지

신화사(新華社) 직원들이 베이징 거리에서 학생들을 성원하는 모습. (류젠 제공)
신화사 직원들이 베이징 거리에서 현수막을 들고 학생들 성원하고 있다. (류젠 제공)
학생들을 성원하는 베이징 시민들. (류젠 제공)
신화사 직원들이 베이징 거리에서 학생들 성원하는 모습. (류젠 제공)
1989년 ‘6.4’ 학생운동 기간에 학생들은 야간에도 톈안먼 광장에 모여 연좌 청원을 이어갔다. (류젠 제공)

5월 20일 중국 공산당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5개 대군구에서 최소 30개 사단 병력을 베이징으로 이동시켰다. 폭풍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