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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청계산 맑은숲 공원’으로 메타세쿼이아 보러 오세요~
의왕시 청계산 자락에 위치한 '청계산 맑은숲 공원'의 메타세쿼이아가 장관이다. 메타세쿼이아는 낙엽침엽교목으로 최고 높이는 35m까지 자라며 공원용으로 많이 식재된다. 이 공원의 대표 수종은 메타세쿼이아와 전나무로 산림욕을 즐기기 위해 많은 사람이 이곳을 ...[포토] 거미줄에 딱 걸린 빨간 단풍잎
단풍잎이 거미줄에 걸릴 확율이 얼마나 될까? 지난 9일 오전에 찾은 청계산 맑은 숲 공원. 단풍잎 하나가 가느다란 거미줄에 ...[포토] 단풍으로 물든 도심
완연한 가을 날씨를 보인 지난 8일 오후 분당 신도시. 색색의 가을 단풍이 도심을 수 놓고 있다.[포토] 경기도 지정 기념물 ‘하우현성당 사제관’
하우현성당은 청계산과 광교산맥을 잇는 골짜기에 위치한 곳으로 19세기 초반 천주교인의 피난처로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1884년 알릭스 신부와 하우현 성당 ...의왕 백운호수 둘레길 단풍 절정
의왕 백운호수 전체가 단풍으로 곱게 물들었다. 호수 주위 총 3km로 조성된 생태탐방로를 따라 걷다 보면 환상적인 단풍을 만끽할 ...분당 율동공원 ‘만추’
분당율동공원 만추(晩秋). 11월로 접어들면서 분당율동공원 일대가 오색단풍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다.‘운중지’ 가을 정경
성남시 분당에 위치한 운중지(雲中池)의 가을 정경. 운중지가 색색의 단풍으로 곱게 물들어 있다. 운중지는 인근 농지에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에포크픽] 홍콩, 바이러스 팬데믹 와중에 민주인사 최대 규모 체포
[서울=에포크타임스 이가섭 기자]전 세계가 바이러스 사태로 패닉이 된 사이 18일 홍콩 경찰은 홍콩 민주 인사 15명을 전격 체포했습니다. ...[에포크픽]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가족의 유별난 사모펀드 투자
지난해 8월 한 국내 일간지를 통해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가족이 거액을 사모펀드에 출자하기로 한 사실이 보도되면서, 이른바 ...[에포크픽] 中 갑질에 뿔난 브라질 SNS에 ‘대만 만세’ 유행
[에포크타임스=윤승화, 이가섭 기자] 브라질의 중공 바이러스 확진자가 92만, 사망자 4만 5천 이상(6월 17일 기준)을 넘어서며 전세계 바이러스 중심지가 ...[에포크픽] 유튜브 자동 댓글 삭제.. 왜 쓰고 나면 없어져 있을까?
[에포크타임스=윤승화, 이가섭 기자] 유튜브가 특정 중국어 단어가 들어간 댓글을 자동 삭제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주로 중국 공산당을 비판할 때 쓰이는 ...[에포크픽] 국가보안법 추진 반대 대규모 시위.. 벼랑 끝에 몰린 홍콩
[에포크픽=윤승화, 이가섭 기자] 중국이 홍콩 내 반정부 활동을 처벌하는 '홍콩 국가보안법'(홍콩 보안법) 제정을 추진하자, 홍콩 시민 수천명이 반대시위를 ...중공, UN 침투해 목소리 높이는 전략
[에포크타임스=윤승화, 이가섭 기자] "중국이 UN 내 거의 모든 조직을 통제하려 한다" 피터 나바로 미 백악관 무역제조업 정책국장이 FOX ...[에포크픽] 中 성악가, 시진핑 닮았다는 이유로 소셜미디어 세 차례나 차단
[에포크타임스=윤승화, 이가섭 기자] 중국의 최고 지도자를 닮았다는 이유로 한 성악가가 동영상 플랫폼 틱톡에서 차단 당했습니다. 틱톡에서 3차례 차단된 ...[에포크픽] 중국이 대만을 압박하기 위해 미국 정치인을 흔드는 법
[에포크타임스=윤승화, 이가섭 기자] 바이러스 대응 모범국으로 평가받는 대만. 동시에 중국의 압력으로 세계보건기구에 가입하지 못하는 점도 주목받고 있습니다. 대만의 ...[에포크픽] 탈중국화 가속화되는 와중에 한국은 여전히..?
[에포크타임스=윤승화, 이가섭 기자] 글로벌 기업의 '탈 중국화' 현상이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중공 바이러스가 확산하면서 세계 각국이 중국과의 관계 재정립에 나서고 ...[포토] 코로나 19 때문에 사람들 발길 뚝 끊겨 현실감 없어진 명동 풍경
중국 후베이성 우한에서 시작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전 세계로 확산하고 있는 가운데, 지난 6일 서울 명동은 사람들이 ...[에포크픽] 비닐에 싸인 시신들.. 충격적인 우한 병원 실태 담은 영상
한 중국 네티즌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이 창궐한 병원의 모습을 공개했다가 체포됐습니다. 지난 1일, 트위터에 병원 현장 모습을 ...[에포크픽] 재벌과 결혼한 ‘밀크티녀’가 이혼하면 위자료가 고작 350원
중국인 재벌들이 막대한 재산을 해외로 빼돌리고 있어, 이혼할 때 배우자 위자료가 고작 몇 위안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웃지 못할 ...중국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강대국일까?
중국의 경쟁력은 어느 정도인지, 중국의 경제를 움직이는 것은 누구인지 분석했다. 중국 공산당의 철권통치 아래, 중국의 경제상황은 불투명하고 심지어 ...[단독포토] 30년 만에 깨어나는 진실…’톈안먼 사건’ 기록사진 공개⑤
1989년 톈안먼 사태 당시 베이징 학생들은 중국 공산당의 탄압 항의, 부패 반대, 민주화 요구 단식으로 많은 민중의 지지를 얻었다. (류젠 제공) 1989년 봄,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민주화운동'이 베이징에서 시작돼 중국 전역으로 번졌다. 운동에 참여한 베이징의 한 대학생은 역사적인 순간을 카메라에 포착했다. 그리하여 당시 학생과 시민들의 애국 열정 및 중국 공산당이 자행한 '6.4 대학살'을 역사의 증언대에 세웠다. 중국 공산당은 지금도 당시 학생들의 평화 시위를 ‘반혁명 폭란(暴亂)’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심지어 계엄군의 총기 난사 사실도 부인으로 일관하고 있다. 현장에 있었던 류젠(劉建, 19세, 학생)은 “역사는 지울 수 없다! 어떤 정부도 역사를 지울 수 없다. 우리는 중국인으로서, 또한 산증인으로서 진상을 밝혀 후대에 진실을 알릴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몇 년 전 해외로 이주한 그는 최근 자신이 중국 공산당에 세뇌당해 왔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들의 거짓말과 박해를 폭로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30년간 묻어두었던 '톈안먼 사건' 기록사진 2천 장을 공개하며, 발표 권한을 에포크타임스와 신탕런(NTD)에 위임했다. 다음은 그중 일부다. 이 ‘톈안먼 사건’ 관련 기사는 류젠의 진술에 근거해 작성하고, 톈안먼 사건을 직접 겪은 우런화(吳仁華)의 저서 <톈안먼사건대사기(天安門事件大事記)>에서 일부 가져왔다. 베이징 당국, 단식 대학생과의 대화 ‘결렬’ (4편에서 계속) 5월 13일 베이징대, 칭화대, 베이징사범대, 정법대 등 단식 청원에 참가한 13개 대학생 300여 명은 톈안먼 광장으로 행진햔 뒤 오후 5시 40분부터 단식 돌입했다. 이후 민중들의 지지와 성원이 이어졌다. 학생들은 정부에 대화단 대표와의 신속한 대화를 요구하면서 ‘동란’으로 매도한 학생운동의 명분을 바로잡고 애국 민주화 학생운동을 긍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베이징 당국은 5월 14일 오전 2시 반, 리톄잉, 리시밍, 천시퉁 등이 톈안먼 광장으로 출동해 단식 학생들에게 학교 복귀를 권유했다. 일부 학생들은 "너무 늦었어. 너무 늦었어" "오늘이 올 줄 알면서 애초에 왜 그랬어!"라고 외쳤다. 단식 학생 수는 천여 명으로 단번에 늘어났다. 톈안먼 광장은 낮에는 2만 명, 밤에는 10만 명의 시민과 학생이 함께 참여했다. 사회 각계각층에서도 단식 학생들을 지지하고 나섰고, 특히 베이징 지식층의 반향이 컸다. 사진=류젠 제공 사진=류젠 제공 사진=류젠 제공 사진=류젠 제공 사진=류젠 제공 베이징 소재 대학생들은 수업을 중단하고 단식 청원 학생들을 성원하고 나섰다. 베이징대, 베이징사범대 등 일부 교수는 '모든 교수에게 수업 중단을 제의한다'는 대자보를 붙여 "오늘 밤 11시 이전에 정부가 학생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15일 수업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단독포토] 30년 만에 깨어나는 진실…’톈안먼 사건’ 기록사진 공개④
베이징 학생들의 행진 대열이 톈안먼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1989년 톈안먼 사태 당시 베이징 학생들은 중국 공산당의 탄압에 항의하고 부패를 반대하고 민주를 요구하는 단식을 시작해 많은 민중의 지지를 얻었다. (류젠 제공) 1989년 봄, 수도 베이징에서 시작된 애국 학생 '민주화운동'이 중국 전역으로 번져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모든 과정에 참여한 베이징의 한 대학생이 이 역사적인 순간을 카메라에 담아 학생과 시민들의 애국 열정 및 중국 공산당의 잔인한 '6.4 대학살'을 증명했다. 중국 정권은 지금까지도 진상을 봉쇄하고 학생들의 평화 시위를 ‘반혁명 폭란(暴亂)’으로 몰아붙이고 있으며, 계엄군의 총기 난사 사실도 부인하고 있다. 당시 19세 학생이었던 류젠은 “역사는 지울 수 없다! 어떤 정부도 역사를 지울 수 없다. 우리는 중국인으로서, 또한 산증인으로서 사람들에게 진상을 밝히고 후대에 진실을 알릴 의무가 있다”고 했다. 몇 년 전 해외로 이주한 그는 최근에서야 자신이 중국 공산당에 세뇌됐음을 깨닫고 중국 공산당의 거짓말과 박해를 폭로하기로 결심했다. 최근 류젠은 30년 동안 묻어두었던 '톈안먼 사건' 기록사진 2천 장을 공개하며, 그 발표 권한을 에포크타임스와 신탕런(NTD)에 위임했다. 다음은 그중 일부다. 이 ‘톈안먼 사건’ 관련 기사는 류젠의 진술에 근거해 썼으며, 톈안먼 사건을 직접 겪은 우런화(吳仁華)의 저서 <톈안먼사건대사기(天安門事件大事記)>에서 일부 가져왔다. (3편에서 계속) 1989년 4.27 대행진은 베이징 각계의 폭넓은 지지를 받아 약 100만 명의 학생과 시민이 참여했다. 이들의 항의 시위를 외지의 대학생들이 응원하고 해외 유학생이 지원함으로써 규모가 크게 확대됐다. 중국 공산당의 국무원 대변인 위안무(袁木)는 압력에 못 이겨 학생들과 '대화'를 하면서도 가오쯔롄(高自联‧베이징대학교자치연합회) 학생들을 소외시켰다. 가오쯔롄은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의 겉치레 대화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베이징 대학생 대화단(團)을 별도로 구성해 정부에 탄원서를 보냈다. 이어 5월 4일에는 베이징 대학생 수만 명이 다시 한번 시위행진을 벌였고, 군경이 상징적으로 저지했으며, 민중 수십만 명이 연도에서 응원했다. 당시 전국 30개 도시에서 교사와 학생 9만 명이 시위행진을 벌였다. 당시 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은 학생의 애국정신을 인정하면서 ‘민주와 법제의 궤도상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오쯔양은 또 덩샤오핑에게 학생운동을 ‘동란’으로 규정한 '4.26' 사설을 거둬들이도록 설득하려 했지만, 리펑(李鹏)은 물러서지 않겠다고 했다. 정부도 대학생 대화단과의 대화를 거부했다. 단식 시작, 학생 선서 5월 12일, 가오쯔롄은 단식 결행을 발표하면서 세 가지 요구를 제출했다. 1.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신문 발행 금지 조치를 취소할 것을 요구한다. 2. 정부와 학생의 대화를 촉구한다. 3. 민주화 진전을 촉구한다. 당시 이미 왕단(王丹), 우얼카이시(吾爾開希), 슝옌(熊焱) 등 근 100명이 단식 대자보에 서명했다. 학생들은 단식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첫째, 수업을 거부한 채 벌이는 학생들의 항의 시위에 냉담하게 대응하는 정부의 태도에 항의한다. 둘째, 정부가 베이징 대학생 대표단과의 대화를 지연시킨 데 대해 항의한다. 셋째, 학생들의 민주화 애국 운동을 ‘동란’으로 매도한 당국의 일련의 보도 행태에 항의한다. 5월 13일 10시 30분, 베이징대 학생 단식단 100여 명은 머리에 흰 끈을 두르고 단식 선서를 했다. "조국 민주화를 촉진하고 조국 번영을 위해 자의적으로 단식한다." 베이징 학생들은 베이징대학교자치연합회(고자련)를 만들고 스스로 깃발을 만들었다. (류젠 제공) 13일 오후 1시경, 베이징대, 칭화대, 베이징사범대, 정법(政法)대, 베이징과기대, 베이징이공대, 베이징항공항천대, 베이징의대, 베이징농업대, 중앙민족대학, 베이징경제대학, 베이징기계공업관리대학, 중국청년정법학원 등 13개 대학의 단식 청원에 참가한 학생 300여 명이 베이징사범대에 모여 단식 결의를 다지며 맹세를 했다. ...[단독포토] 30년 만에 깨어나는 진실…’톈안먼 사건’ 기록사진 공개③
톈안먼 사태 당시, 베이징 각 대학의 학생들이 시위행진을 벌였고, 일부 베이징 시민도 이 대열에 동참했다. (류젠 제공) 1989년 봄, 수도 베이징에서 시작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애국 학생 '민주화운동'이 중국 전역으로 번졌다. 모든 과정에 참여한 베이징의 한 대학생이 이 역사적인 순간을 카메라에 담아 학생과 시민들의 애국 열정 및 중국 공산당의 잔인한 '6.4 대학살'을 증명했다. 중국 공산당은 지금까지도 진상을 봉쇄하고 학생들의 평화 시위를 ‘반혁명 폭란(暴亂)’으로 몰아붙이고 있으며, 계엄군의 총기 난사 사실도 부인하고 있다. 당시 19세 학생이었던 류젠(劉建)은 “역사는 지울 수 없다! 어떤 정부도 역사를 지울 수 없다. 우리는 중국인으로서, 또한 산증인으로서 사람들에게 진상을 밝히고 후대에 진실을 알릴 의무가 있다”고 했다. 몇 년 전 해외로 이주한 그는 최근에서야 자신이 중국 공산당에 세뇌됐음을 깨닫고 중국 공산당의 거짓말과 박해를 폭로하기로 결심했다. 최근 류젠은 30년 동안 묻어두었던 '톈안먼 사건' 기록사진 2천 장을 공개하며, 그 발표 권한을 에포크타임스와 신탕런(NTD)에 위임했다. 다음은 그중 일부다. 이 ‘톈안먼 사건’ 관련 기사는 류젠의 진술에 근거해 썼으며, 톈안먼 사건을 직접 겪은 우런화(吳仁華)의 저서 <톈안먼사건대사기(天安門事件大事記)>에서 일부 가져왔다. (2편에서 계속) 시민들, 학생들의 4·27 대규모 시위행진 적극 지지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胡耀邦)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세상을 떠나자, 베이징 각 대학의 학생들은 여러 차례 집회와 시위행진을 벌였다. 또한 23일 결성된 학생 조직인 ‘가오쯔롄(高自聯)’은 ‘민주화’ 등 7가지 항목의 요구사항을 제기하며 ‘애국무죄(愛國無罪·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죄가 없다)’ ‘부패척결’ ‘언론자유’ ‘독재반대’를 외쳤다. 4월 20일에는 일부 학생이 신화먼(新華門)에서 경찰과 충돌해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학생들은 분노했으며, 이때부터 시위 행렬이 수만 명 규모로 늘어났다. 4월 26일,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반드시 기치를 선명하게 하고, 동란(動亂)에 반대해야 한다'는 사설을 발표하자, 가오쯔롄은 대규모 시위행진을 준비했다. 그들은 앞선 요구사항을 두 가지로 변경했다. 첫째는 ‘동란’이라는 오명을 벗겨달라는 것이고, 둘째는 ‘평등한 대화’를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각 대학 총장들은 이들을 강력히 저지하고 나섰다. 당시 장핑(江平) 정법(政法)대 총장은 “너희들이 오늘 시위행진을 벌이다 다치기라도 하면, 너희 부모님께 이를 어떻게 설명하느냐?”며 학생들을 막아섰다. 그러나 4월 27일 오전, 베이징 지역 38개(54개라는 보도도 있다) 대학의 학생 수만 명이 반대를 무릅쓰고 베이징 주요 거리를 따라 시위행진을 벌였으며, 이 상황을 시민 수십만 명이 지켜봤다. 베이징 지역 대학생들이 대규모 시위행진을 벌이는 모습. (류젠 제공) 베이징 지역 대학생들이 대규모 시위행진을 벌이는 모습. (류젠 제공) 베이징 지역 대학생들이 대규모 시위행진을 벌이는 모습. (류젠 제공) 베이징 지역 대학생들이 대규모 시위행진을 벌이는 모습. (류젠 제공) 베이징 지역 대학생들이 대규모 시위행진을 벌이는 모습. (류젠 제공) 베이징 지역 대학생들이 대규모 시위행진을 벌이는 모습. (류젠 제공) ...[단독포토] 30년 만에 깨어나는 진실…’톈안먼 사건’ 기록사진 공개②
톈안먼 광장에 모여 있는 베이징 대학교 학생들. (류젠 제공) 1989년 봄, 수도 베이징에서 시작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애국 학생 '민주화운동'이 중국 전역으로 번졌다. 모든 과정에 참여한 베이징의 한 대학생이 이 역사적인 순간을 카메라에 담아 학생과 시민들의 애국 열정 및 중국 공산당의 잔인한 '6.4 대학살'을 증명했다. 중국 공산당은 지금까지도 진상을 봉쇄하고 학생들의 평화 시위를 ‘반혁명 폭란(暴亂)’으로 몰아붙이고 있으며, 계엄군의 총기 난사 사실도 부인하고 있다. 당시 19세 학생이었던 류젠(劉建)은 “역사는 지울 수 없다! 어떤 정부도 역사를 지울 수 없다. 우리는 중국인으로서, 또한 산증인으로서 사람들에게 진상을 밝히고 후대에 진실을 알릴 의무가 있다”고 했다. 몇 년 전 해외로 이주한 그는 최근에서야 자신이 중국 공산당에 세뇌됐음을 깨닫고 중국 공산당의 거짓말과 박해를 폭로하기로 결심했다. 최근 류젠은 30년 동안 묻어두었던 '톈안먼 사건' 기록사진 2천 장을 공개하며, 그 발표 권한을 에포크타임스와 신탕런(NTD)에 위임했다. 다음은 그중 일부다. (1편에서 계속) 베이징 각 대학 학생들의 시위행진과 청원서 제출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胡耀邦)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세상을 떠나자 베이징 각 대학의 일부 학생이 톈안먼 광장에 모여 후야오방을 추모했다. 또한 그들은 ‘자유민주’와 관리들의 재산 공개를 요구하는 등 7가지 항목의 청원서를 제출했다. 4월 22일, 중국 당국은 인민대회당에서 후야오방 추모식을 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사람과 차량의 톈안먼 주변 진입을 막기 위해 교통통제를 실시했다. 추모식 전날인 4월 21일 저녁, 베이징 20여 개 대학의 수많은 학생이 시위행진을 하며 각 학교에서 톈안먼 광장으로 들어갔고, 밤을 지새우며 추모식을 기다렸다. 톈안먼 사태 당시, 베이징 대학 학생들의 시위행진 모습. (류젠 제공) 톈안먼 사태 당시, 베이징 대학 학생들의 시위행진 모습. (류젠 제공) 톈안먼 사태 당시, 베이징 대학 학생들의 시위행진 모습. (류젠 제공) 류젠이 당시 상황을 소개했다. ”학생들이 행진할 때 사람이 너무 많아서 걸을 수가 없을 정도였어요. 또한 점점 더 많은 시민이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을 지지하러 거리로 나왔고 학생들의 애국운동에 동참했어요. 일부 도로 구간은 발 디딜 곳을 찾기도 어려워 나무나 담장, 도로 표지판 위에 올라간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는 또 “경찰도 아예 없었어요. 모두가 학생들이 질서를 유지하고 손을 맞잡고 걷도록 길을 터줬어요. 도둑도, 범죄도 없었고, 모두가 학생들을 지지했지요. 또한 마실 것, 먹을 것, 밤에 입을 따뜻한 옷가지 등 학생들에게 줄 수 있는 건 죄다 제공했어요”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톈안먼 사태 당시,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이 너무 많아 일부는 나무나 담장, 교통 표지판 위에 올라가 있다. (류젠 제공) 톈안먼 사태 당시,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이 너무 많아 일부는 나무나 담장, 교통 표지판 위에 올라가 있다. (류젠 제공) ...[단독포토] 30년 만에 깨어나는 진실…’톈안먼 사건’ 기록사진 공개 ①
1989년 봄, 중국에서 일어난 애국 학생 '민주화운동'의 한 장면. (류젠 제공) 1989년 봄, 수도 베이징에서 시작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애국 학생 '민주화운동'이 중국 전역으로 번졌다. 모든 과정에 참여한 베이징의 한 대학생이 이 역사적인 순간을 카메라에 담아 학생과 시민들의 애국 열정 및 중국 공산당의 잔인한 '6.4 대학살'을 증명했다. 중국 공산당은 지금까지도 진상을 봉쇄하고 학생들의 평화 시위를 ‘반혁명 폭란(暴亂)’으로 몰아붙이고 있으며, 계엄군의 총기 난사 사실도 부인하고 있다. 당시 19세 학생이었던 류젠(劉建)은 “역사는 지울 수 없다! 어떤 정부도 역사를 지울 수 없다. 우리는 중국인으로서, 또한 산증인으로서 사람들에게 진상을 밝히고 후대에 진실을 알릴 의무가 있다”고 했다. 몇 년 전 해외로 이주한 그는 최근에서야 자신이 중국 공산당에 세뇌됐음을 깨닫고 중국 공산당의 거짓말과 박해를 폭로하기로 결심했다. 최근 류젠은 30년 동안 묻어두었던 '톈안먼 사건' 기록사진 2천 장을 공개하며, 그 발표 권한을 에포크타임스와 신탕런(NTD)에 위임했다. 다음은 그중 일부다. 후야오방을 추모하다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심장병으로 급사했다. 베이징의 수많은 대학생과 시민이 톈안먼 광장에서 후야오방의 대형 초상화를 펼쳐 놓고 추모행사를 벌였다. 또한 ‘민주, 자유’ 등의 구호를 외쳤다. 4월 22일, 후야오방의 장례식이 거행됐고, 대학생 3명이 인민대회당 계단에 무릎을 꿇고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리펑(李鵬) 당시 총리 접견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학생들은 크게 실망했다. 1989년 4월 15일,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야오방을 추모하기 위해 학생들이 그린 대형 초상화. (류젠 제공) 톈안문 광장 기념비 위에 놓인, 후야오방을 추모하는 조화와 만장(輓章). (류젠 제공) 애국 학생들의 호소와 시민들의 성원 학생운동 당시 베이징 교사들이 학생들을 성원하는 모습. (류젠 제공) 톈안먼 사태 당시, 베이징 시민들이 학생들을 성원하는 모습. (류젠 제공) 공산당 기관지가 '동란(動亂)'으로 규정한 게 대규모 시위 ‘불씨’ 4월 26일,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학생과 시민들의 호소에 대응해 '반드시 기치를 선명하게 해 동란에 반대해야 한다'는 사설을 발표했다. 전국은 경악했다. 고자련(高自聯‧1989년에 결성된 베이징 대학교 학생자치연합회)은 첫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었고, 전국 곳곳에서 더 큰 규모의 시위가 벌어졌다. 톈안먼 사태 당시, 중국 공산정권은 학생들이 '소수 사람들'에게 선동됐다고 발표했다. 당시 중앙미술학원 학생들이 ‘자기만의 생각이 있는데 선동이 왜 필요한가’라는 반박 플래카드를 내걸고 시위하고 있다. (류젠 제공) 톈안먼 사태 당시, 베이징우체대 학생들이 내건 '특권을 반대하고, 민주를 요구한다'는 플래카드. (류젠 제공) 톈안먼 사태 당시, 학생들을 성원하는 베이징 지식계 인사들. (류젠 제공) ...‘4‧25’ 20주년… 뉴욕 中영사관 앞에서 다시 피어난 ‘파룬궁 정신’
1999년 4월 25일, 베이징에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4‧25’ 평화 청원이 있었습니다. 당시 청원은 평화롭게 막을 내렸으나, 장쩌민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는 파룬궁 수련자에 대한 잔혹한 박해를 시작했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 뉴욕 지역의 파룬궁 수련자들이 중국영사관 앞에 모여 ‘4‧25’ 20주년을 기념했습니다. 아시아인이 함께한 평화로운 도심 퍼레이드
전경림 기자 전경림 기자 전경림 기자 전경림 기자 전경림 기자 전경림 기자 전경림 기자 포토그래퍼 김국환 포토그래퍼 김국환 포토그래퍼 김국환 포토그래퍼 김국환 포토그래퍼 김국환 전경림 기자 전경림 기자 전경림 기자 전경림 기자 10월 13일 오후, 아시아법회 경축 퍼레이드가 서울 도심 속에서 성대하게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