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독립기념일인 지난 4일, 트럼프는 관례를 깨고 워싱턴 링컨기념관 앞에서 독립기념일 연설을 했다. 올해 미국의 독립기념일 축하행사에는 장갑차 전시와 군용기 저공편대 비행 등의 프로그램이 추가됐으며, 리플렉팅 풀(Reflecting Pool) 양쪽에 모여든 수많은 미국인이 트럼프의 연설을 경청하며 미국에 경의를 표했다. 마오쩌둥 “7월 4일 만세! 민주주의 미국 만세!” 외쳐 미국 전체가 미국 독립 243주년 축하 무드일 때 중국에서 ‘신화일보(新華日報)’ 1943년 7월 4일자 사설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마오쩌둥(毛澤東)이 직접 쓴 ‘미국 독립기념일에 바치는 민주주의 찬가’ 제하의 당시 사설에 따르면, 마오쩌둥은 미국 민주주의를 찬양 “7월 4일 만세! 민주주의 미국 만세!”를 외쳤다. 마오쩌둥의 글에 많은 사람이 주목했고, 수많은 네티즌은 당시 사설을 리트윗하며 댓글을 달았다. 마오쩌둥은 사설에서 “해마다 이날이 되면 세상의 모든 선량하고 성실한 사람들이 함께 기뻐한다. 미국이 새롭게 설립된 후 민주주의와 과학은 비로소 신자유의 세계에 뿌리 내렸다. 167년 매일 밤, 지구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도 자유의 여신이 든 횃불을 볼 수 있다. 그 빛은 고난에 처한 모든 사람을 따뜻하게 감싸고, 세상에 아직 희망이 있음을 느끼게 한다”고 했다. 그는 또한 “미국에 대한 중국인의 호감은 미국 국민성에서 뿜어 나오는 민주적인 태도와 크고 넓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했다. ‘신화일보’는 중국 공산당 기관지로, ‘인민일보(人民日報)’의 전신(前身)이다. 마오쩌둥이 중국 공산당 당시 기관지에 이런 글을 올린 것은 아이러니한 것으로, 심지어 그의 펜 끝에서 나왔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마오쩌둥은 한때 ‘민주주의 중국’을 그렸다 마오쩌둥의 사설을 본 한 네티즌은 “참 말은 잘하네. 이 글을 쓴 사람은 (미국 독립기념일을 맞아) 오늘 학교에 안 가고 쉬어야 같은데”라며 비꼬았다. 또 다른 네티즌은 “당시 마오쩌둥은 민주주의 슬로건을 내걸고 장제스(蔣介石)를 반대하지 않았던가? 또한 마오쩌둥은 미국의 민주주의가 세계의 등불이라며 극찬했다”는 댓글을 남겼고, “그 당시 민주정치를 추구했던 사람들이 왜 독재정권을 택했는지 모르겠다”고 한 네티즌도 있다. 미국 독립기념일에 미국 민주주의를 칭송하는 마오쩌둥의 글이 널리 퍼진 것은 매우 아이러니하다. 이로써 네티즌들은 마오쩌둥의 질 나쁜 속임수를 간파했다. 사실 마오쩌둥은 민주주의에 대해 여러 번 언급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뒤 충칭(重慶)에서 장제스와 협상할 당시, 로이터 통신 기자가 “‘민주주의 중국’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개념과 정의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마오쩌둥은 “민주주의 중국은 각급 정부에서부터 중앙정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보편적이고 평등한 비밀선거에 의해 선출되며, 그들을 선출한 국민들을 위해 책임을 다하는 그런 나라가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마오쩌둥은 또한 “민주주의 중국은 쑨원(孫文)의 삼민주의(三民主義), 링컨의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원칙과 루스벨트의 4가지 자유를 실현할 것”이라고 했다. 마오쩌둥의 이 같은 말들은 모두 마오쩌둥 선집(毛澤東選集) 4권에 나와 있다. 美, 마오쩌둥 말 믿고 장제스에 ‘추격 중지’ 강요 마오쩌둥은 ‘신화일보’ 등 중국 공산당 기관지를 통해 민주주의를 향한 목소리를 냈을 뿐 아니라, 직접 미국인과 민주주의에 관한 토론도 수차례 벌였다. 1944년 헨리 월리스(Henry A. Wallace) 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중국 공산당 당사(黨史) 연구실 통신 기록에 따르면, 당시 장제스 참모장이었던 조지프 스틸웰(Joseph Stilwell) 미 장군은 ‘중국통’으로 불린 주중 미 대사관의 존 셰비츠(John S.Service) 2등 비서관을 ‘미국 군사 관찰팀’의 정치 고문으로 파견했다. 그는 일찍이 옌안(延安)에 있던 3개월 간 마오쩌둥과 수차례 대화를 나눴다. 당시 마오쩌둥은 “미국 관리들은 중국 관리들과 민주주의를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중국인은 미국인의 민주적 이상을 존중한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나는 미국인이 중국 곳곳을 다니는 것은 환영하지만, 국민당은 중국에 끼치는 미국인들의 영향을 우려한다. 소련의 참전 다음으로 미국인의 중국 상륙을 두려워한다”고 했다. 미국 민주주의 장점을 줄줄이 말한 마오쩌둥은 셰비츠를 속여 그의 신임을 얻는 데 성공했다. 셰비츠는 마오쩌둥과의 대화 내용을 즉시 미국 당국에 상세 보고했고, 미국이 중국의 항일전쟁 무기를 지원하면서 중국 공산당이 이끄는 군대에도 공정하게 나눠줘야 한다는 마오쩌둥의 제안에 동의했다. ...
중국에서 안면인식만으로 신용 대출 등급을 파악하고 미세한 표정을 분석해 심리나 정서 상태를 분석할 수 있는 기술이 사용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예로부터 중국 민간에서 전해지는 ’관상술’은 사람의 이목구비를 보면 그 사람의 수명과 길흉 화복 등 인생행로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중국 공산당은 첨단 기술을 활용한 현대판 관상술을 극단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중국 평안보험(平安保險)회사는 고객의 얼굴을 스캔하기만 하면 얼굴인식 기술을 통해 고객의 금융 신용 정도를 파악할 수 있다고 밝혔다. ‘미세한 표정’ 분석해 심리까지 파악 지난해 평안보험 공식 위챗에는 평안보험의 신용대출 부서가 안면인식 기술을 이용해 대출 신청자의 ‘미세한 표정’까지 실시간으로 분석한 뒤 그들의 심리와 정서 상태가 어떤지 엿볼 수 있다는 글이 공개됐다. 평안보험은 안면 스캔을 통해 대출 신청자의 신용도를 식별하는 기술을 연구, 개발해 이미 2016년부터 고객 금융 부문에 적용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그들이 중점적으로 분석한 것은 연구 대상자 얼굴의 미세한 표정”이라고 지적했다. ‘미세한 표정’이란 미세하고 알아차리기 어려우며 무의식중에 드러나는 표정을 말한다. 이런 미세한 표정은 스스로 알아채거나 통제하기도 어렵고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무의식중에 짓게 되는 부주의한 표정이나 동작들은 종종 한 사람의 성격 특성과 내면세계를 반영한다. 그렇다면 이런 미세한 표정을 어떻게 찾고 분석하는 것일까? 평안보험은 고객이 은행을 처음 방문해 계좌를 개설할 때 신분증에 들어 있는 사진을 제출하도록 한다. 그리고 몇 가지 일련의 동작, 예를 들면 입을 벌리고 눈을 깜박이는 등의 규정된 행동을 하게 함으로써 이를 토대로 안면 정보 프로파일을 만든다. 거액의 대출을 신청하는 고객의 경우에는 온라인 동영상을 통해 몇 가지 질문에 답변하는 과정이 하나 더 추가된다. 10~15분 분량의 동영상을 녹화한 뒤 동영상을 보고 고객의 상황을 분석한다. 예를 들어 대답할 때 눈빛이 불안정한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거나 다른 어떤 미묘한 표정이 섞여 있는지 등이 모두 시스템에 저장돼 분석, 활용되는 것이다. 평안보험은 정기적으로 고객 및 보험 대리인에 대한 안면 스캔을 실시한다. 특히 대출 담당 심사위원은 이러한 표정과 관련한 세부 사항에 따라 고객이 성실하고 믿을 만한지, 금융상품을 구매하려는 고객에게 신용위험이 있는지 등을 검사하고 판단한다. 뿐만 아니라 이 기술을 통해 고객의 건강 상태도 판단할 수 있다고 한다. 칭화대의 벤처 수학 연구인 마이클 파워스는 “사람의 얼굴에 건강에 관한 정보가 많이 드러난다”며 “예를 들어 세밀한 관찰을 통해 이 사람이 담배를 피우는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고객이 100가지 중대한 질병 중 하나에 해당되는 것으로 판명되면 배상액은 최고 100만 위안(1억 7000만 원)이다. 안면 인식으로 고객의 키 체중 지수(BMI)를 추정해 중대한 질병 관련 보험에 가입하려는 고객 중 거액 배상 예정자를 가려낼 수 있다. 평안보험의 가장 큰 문제는 고객의 동의 없이 고객의 프라이버시를 얻었다는 점이다. 더구나 그렇게 확보한 프라이버시를 이용해 신용 정도뿐 아니라 고객이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판단할 수도 있다는 것이 많은 우려를 자아낸다. 거대한 감옥이 돼버린 중국 사실 중국에서 얼굴 인식 기술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중국 공산당은 이미 많은 장소에 CCTV를 설치하고 안면인식 기술을 사용해 전 국민을 감시하고 있다. 조사된 바로는 현재 공공 및 민간 분야에 총 1억7600만 대의 CCTV가 설치돼 있고 2020년까지 5억5000만 대를 추가로 설치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시스템은 14억 중국인의 얼굴을 스캔할 수 있는데, 정확도는 무려 99.8%에 이른다고 알려졌다. 난창(南昌)시 경찰은 이 기술을 적용해 6만 관객이 참석한 콘서트에서 수배범을 체포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한 BBC 기자는 구이양(貴陽)에서 안면인식 시스템 테스트에 참여했다. 경찰이 그의 정보를 파악한 후 인파 속으로 들어간 그는 불과 7분 만에 잡혔다. 중국의 여러 도시에서는 도로변에 위치한 안면인식 카메라를 이용해 무단횡단자의 얼굴을 즉시 경찰의 데이터베이스와 비교 대조해 신원을 식별하고 있다. ...
달은 고향 달이 더 밝다지만,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수십 년 동안, 수백만 명의 중국 국민들이 산과 고개를 넘고 바다를 건너 고향과 작별하고 먼 곳으로 떠났다. 사방에 흩어져 있는 망명자들은 그들의 조국이 적색(紅色·공산주의와 혁명을 비유) 통치하의 기이한 흑색(黑色·비관적이고 답답하고 침통함을 비유) 모습이지만, 그들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이야기한다. 바다 건너 있는 자유 1990년 2월 말의 어느 날 밤, 우런화(吳仁華)가 주하이(珠海)에서 헤엄쳐 마카오로 건너갔다. 섭씨 7도의 기온에서 파도와 4시간 동안 싸운 그가 육지에 다다랐을 때 이미 만신창이가 됐다. 그 후 홍콩의 참새작전(黃雀行動·반체제 인사 구출작전) 멤버들과 연락이 닿은 그는 어선 지하 창고에 몸을 숨겨 홍콩으로 넘어갔다. 같은 해 7월, 베이징 정법대 전임강사였던 그는 정치적 난민 신분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했다. 우런화가 망명을 택한 이유는 톈안먼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가 붙잡힌 왕쥔타오(王軍濤)와 천쯔밍(陳子明) 등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1989년 6월 3일 밤, 그는 중공군의 민간인 학살을 직접 목격했다. 다음 날인 4일 새벽, 그는 학생 시신 앞에서 ‘영원히 잊지 않겠다’며 비분에 차서 맹세했다. 29년 동안 ‘톈안먼 사건’ 희생자와 계엄군 관련 자료를 모으는 데 전념해온 그는 ‘톈안먼 사건’ 역사 연구의 권위자가 됐다. 일찍이 우런화가 망명하기 전인 1950~80년대에도 100만 명이 넘는 중국인이 기근과 가난, 정치적 박해 등을 피해 걸어서, 혹은 헤엄치거나 배를 타고 홍콩으로 밀입국했다. 이는 냉전시대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에 걸친 집단 망명 사건으로, 역사는 이를 ‘대도항(大逃港·많은 사람이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 홍콩으로 도망간 사건)’이라 한다. 홍콩으로 밀입국한 자는 대부분 농민이었으나, 일부 도시 주민, 학생, 지식 청년, 노동자, 심지어 군인들도 포함됐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밀입국하는 과정에서 물에 빠져 죽고 상어에 물려 죽고 산에서 떨어져 죽고 병사가 쏜 총에 맞아 죽었다. 1967년 1월 15일 밤, 유명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중앙음악학원 초대 원장인 마쓰충(馬思聰) 씨 일가족 네 명도 농민으로 변장해 5만 홍콩달러(약 742만 원)를 주고 홍콩으로 밀입국한 뒤 미국으로 건너갔다. 마쓰충은 문화혁명 기간의 모욕을 견디지 못해 위험을 무릅쓰고 탈출했다. 그러나 그가 떠난 뒤 중국에 남아있던 친척과 친구 수십 명이 연좌됐다. 그의 둘째 형은 투신자살했으며, 그의 장모와 조카딸 및 조리사는 박해를 받다 죽었다. 중국 당국이 그에게 씌운 죄명은 ‘반역죄’였다. 마쓰충은 ‘나는 왜 중국에서 도망쳤나? ‘문화대혁명’의 끔찍한 진실에 대해’라는 제하의 글에서 “문화대혁명은 중국의 지식인들을 파멸시키고 있다. 지난해 여름과 가을에 일어난 일들은 나를 완전히 절망에 빠뜨렸고, 나와 내 가족을 도망자로 만들어 사방을 떠도는 ‘배고픈 유령’이 되게 했다”고 했다.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망명자들 2012년 4월 6일, 왕단(王丹), 후핑(胡平), 왕쥔타오, 우얼카이시(吾爾開希), 우런화, 샹샤오지(項小吉) 등, 해외로 망명한 ‘톈안먼 학생운동’ 주역들은 ‘우리는 중국으로 돌아가길 희망하며, 이를 중국 당국에 공개적으로 호소한다’는 제하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에서 그들은 자신들을 1989년 민주화운동에 참가했다가 해외로 망명한 중국인이라고 밝혔다. 그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여권 연장이 거부되거나 여권이 아예 정지되거나 입국을 거부당했다면서 “귀국할 권리를 박탈당했다”고 호소했다. 여류작가 모리화(莫莉花)는 원래 후난(湖南) 사오양(邵陽) 사범전문대학 교수였으나, ‘톈안먼 사태’ 때 학생운동을 지지했다가 ‘반(反)혁명선전선동죄’라는 죄명으로 3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녀는 1992년 홍콩으로 망명한 뒤 스웨덴에 체류하고 있다. 2009년, 그녀의 남편 푸쩡민(傅正明)은 인터뷰에서, 그들 부부는 한 번도 중국에 가지 않았다고 밝히며 “물론 우리도 우리 고국으로 돌아가 가족을 만나고 싶다. 하지만 다른 친구나 사람들이 중국으로 돌아간 뒤 국가안전부에 미행당하거나 심문당하는 상황을 많이 봤다. 우리는 매우 실망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존엄성을 가지고 돌아가는 것이다. 물론 중국이 진정으로 진보하고 자유로워져야 우리가 존엄하게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불가능한 일을 해낸 천광청 2012년 4월 22일 깊은 밤, 가택연금을 당한 시각장애 변호사 천광청(陳光誠)이 불가능한 일을 해냈다. 그는 홀로 담장 8개를 넘고 울퉁불퉁한 밭고랑 10여 개를 건너서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을 만났다. 그 후 그는 여러 네티즌의 도움을 받아 여기저기를 전전하면서 경찰 수백 명과 촌락위원회의 감시를 따돌리고 4월 26일 마침내 베이징 주재 미국대사관에 들어갔다. 이어 5월 19일, 천광청(陳光誠) 일가족도 미국으로 떠났다. 산둥(山東)성 린이(臨沂)시 이난(沂南)현 솽허우(雙堠)진 둥스구(東師古)촌 출신의 천광청은 독학으로 습득한 법률 지식으로 현지 농민들의 인권 보호에 앞장섰으며, ‘맨발의 변호사’로 유명했다. 2005년, 천광청은 린이시가 강제로 산아제한을 하고 낙태를 불법으로 시행한 사실을 폭로했다가 구타와 구금을 당했다. 2006년 4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2010년 9월 출소한 뒤에도 가택연금을 당했다. 현지 정부는 천광청 문제가 ‘적대적 모순’에 속한다고 했다. 천광천의 집에는 CCTV, 휴대전화 수신 차단기가 설치됐고, 그와 그의 아내에게는 외출 금지 조치가 떨어졌다. 또한 수십 명이 그의 집 주변을 24시간 교대로 지켰고, 외부인 출입도 금지됐다. 생활용품은 그의 어머니만이 가져다줄 수 있었고, 이웃들이 도와주면 그 즉시 경고나 위협을 받았다. 이 기간에 그를 찾아온 국내외 인사들도 여러 차례 저지, 구타, 모욕, 약탈을 당했고 강제송환되기도 했다. 2015년 6월, 천광청은 홍콩 시민들에게 “국민을 노예로 삼는 정권은 없는 것이 낫다. 우리는 이미 중국 공산당에 여러 해 동안 속아왔고 그들의 속임수를 직접 경험했다. 그들에 대한 믿음의 결과는 언제나 우리를 우롱했다. 홍콩 시민과 각성한 본토 민중들이 손잡고 노력한다면, 우리의 권리와 자유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나는 어째서 이런 나라에서 태어났을까? 2016년 10월, 25살의 후베이(湖北) 여성 장롄쟈오(蒋炼娇)가 중국에서 탈출했다. 유년시절과 청소년기, 그리고 청년기까지 그녀는 줄곧 힘들고 고생스러웠다. ...
홍콩은 지금 ‘범죄인 인도 법안’으로 악화일로에 놓여있다. 자유·민주·법치를 지키려는 100만 홍콩 시민들과 국제사회의 거센 반발에도 ‘법안 통과’ 강행을 시도한 람 장관의 정치적 의도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수차례 언급한 바대로 파룬궁 탄압은 오늘날 중국 정국의 핵심 문제라 할 수 있다. 중국에서 불거지는 모든 문제가 ‘파룬궁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다. 4월 3일 이래 본보는 <'천명(天命)' 실천하는 미국...해체 운명에 처한 중국공산당> <가라앉는 '中공산당호'... 난파선은 버리는 게 상책> <"장쩌민 일파 '해외 자산' 제보 환영합니다"> 등 특별 보도를 잇달아 내보냈다. 이는 파룬궁 탄압으로 하늘에 사무치는 범죄를 저지른 장쩌민, 쩡칭훙을 비롯한 '혈채방(血債邦, 파룬궁 탄압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장쩌민 계열의 세력)'을 청산하라는 신호탄이다.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이 전 세계의 비난에도 송환법을 강행 처리하려는 것은 표면 현상일 뿐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장쩌민, 쩡칭훙을 위시한 혈채방이 작은 문제를 크게 확대해 이를 이용해 혈채방을 숙청했던 시진핑을 끌어내리려는 것이다. 1999년 7월 20일 당시 중공 독재자 장쩌민은 국가기구를 총동원해 파룬궁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광란의 수법이 총망라됐다. 장쩌민은 자신이 장악한 군대, 독재 기구, 선전 도구, 국가 자원, 그리고 중국 공산당이 수십 년간 쌓아온 타격 방법으로 단시간 내에 파룬궁을 철저히 제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파룬궁은 전 세계 100여 개국에 전해질만큼 중공의 사악한 박해는 철저히 실패했다. 중공의 강압과 기만 없이는 중국에서도 파룬궁 박해는 하루도 존속할 수 없을 것이다. 1999년 7월 20일부터 장쩌민과 그의 오른팔로 불린 쩡칭훙은 파룬궁 말살을 목표로 부패한 관리들을 발탁해 중용했다. 장쩌민과 쩡칭훙을 비롯한 '혈채방'은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빚을 갚는 것은 하늘의 이치다. 더구나 피의 빚은 더더욱 그렇다. 장쩌민과 쩡칭훙의 가장 큰 두려움은 그들의 만행이 낱낱이 드러나 죗값을 치르는 상황이다. 이를 막으려면 중공의 권좌를 지켜야 했다. 2002년 당시 은퇴를 앞두고 장쩌민 일당은 간계를 모색했다. 장쩌민과 쩡칭훙은 2002년 11월, 중국 공산당 16차 당대회(16대)에서 5가지 조치를 했다. 첫째, 장쩌민은 은퇴 후에도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 주석을 연임했다. 둘째,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을 7명에서 9명으로 늘렸다. 셋째, 쩡칭훙은 중공 17대에서 후진타오의 직무를 승계하려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중앙당교 교장, 국가부주석을 담임했다. 넷째, 파룬궁 박해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뤄간을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중앙정법위 서기로 중용했다. 다섯째, 파룬궁 박해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저우융캉을 중국공산당 정치국 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공안국장으로 중용하고 이듬해 국무위원으로 중용했다. 그리하여 후진타오 집권 5년간 파룬궁 탄압은 내부적으로 계속 강화했고, 쩡찡훙은 차기 집권 야욕을 달성하려 했다. 2007년 10월 17대 당시 쩡칭훙은 중국 공산당 원로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후진타오의 뒤를 이을 수 없었다. 장쩌민과 쩡칭훙은 최악의 평판에도 권력 유지 방편으로 5개 조치를 취했다. 첫째,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은 여전히 9명으로 유지해 그들의 심복을 등용했다. 둘째, 궈보슝, 쉬차이허우 중앙군사위 부주석을 이용해 중앙군사위 주석을 맡게 된 후진타오를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셋째, 저우융캉을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중앙정법위 서기로 중용했다. 넷째, 장쩌민의 측근이자 파룬궁 박해를 가장 악랄하게 지휘한 보시라이를 정치국 위원, 충칭시 당서기로 발탁했다. 다섯째, 쩡칭훙의 고향 장시(江西)성 서기인 멍젠주를 공안부장으로 등용, 이듬해 국무위원으로 겸직시켰다. 그리하여 또 5년간 ‘파룬궁 박해’를 유지했다. 이어 장쩌민, 쩡칭훙, 저우융캉은 보시라이를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정법위 서기의 뒤를 이어 18대 자리에 앉힐 예정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하늘의 뜻을 알 수 없다. 2012년 2월 6일, 왕리쥔 충칭시 공안국장이 청두(成都) 주재 미국 영사관으로 망명하는 대형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써 두 가지 직접적인 결과가 발생했다. 첫째, 2012년 3월 15일, 보시라이가 체포됐다. 둘째, 보시라이, 저우융캉이 쿠데타를 모의한 음모가 드러났다. 외신들은 왕리쥔이 청두 주재 미국 영사관에 제공한 정보를 조 바이든 당시 미국 부통령이 시진핑에게 알려줬다고 전했다. 2012년 2월 6일 ‘왕리쥔 사건’은 장쩌민, 쩡칭훙을 위시한 ‘혈채방’이 쇠락에 이르는 전환점이 됐다. 2012년 11월 중공 18대 인사 과정에서 두드러졌다. 첫째, 후진타오는 당·정·군 대권을 한꺼번에 시진핑에게 넘겼다. 둘째,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을 9명에서 7명으로 되돌렸다. 셋째, 왕치산을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중기위 서기로 중용했다. 넷째, 중앙정법위 서기를 중국공산당 정치국 위원과 겸직하도록 격하했다. 그러나 당시에도 장쩌민은 중앙에서 지방까지 자신의 인맥을 앉히는 데 주력했다. 장더장, 장가오리, 류윈산 등 3명을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에 앉혔고, 멍젠주를 중용해 중국공산당 정치국 위원, 중앙정법위 서기로 임명했다. 또 궈성쿤을 국무위원 겸 공안부장으로 발탁했고, 쑨정차이를 중국공산당 정치국 위원, 충칭시 당서기 등으로 중용했다. 후진타오는 10년 집권 기간 장쩌민의 허수아비 노릇을 하는 데 불과했다. 중대한 문제는 장쩌민과 쩡칭훙이 결정했다. 시진핑이 후진타오처럼 되지 않으려면 장쩌민과 쩡칭훙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아야 했다. 시진핑이 장쩌민으로 부터 정권을 탈환하려는 대전투는 2013년 1월 18기 중기위 제2차 전회에서 시작됐다. 시진핑은 전례 없는 ‘반부패 호랑이 잡기’ 캠페인을 벌였다. 즉 흔히 말하는 ‘시진핑-장쩌민 투쟁’을 벌인 결과 440여 명의 부성(부)급 및 그 이상의 고위 관리를 처리했는데 그중 절대다수가 '혈채방' 멤버들이었다. 시진핑은 또 '강력한 군 개혁'을 통해 군권을 장악했다. 2017년 10월 19대엔 이미 최고 권력을 손에 넣은 상태였다. 하지만 시진핑이 부패와의 전쟁에서 가장 큰 실수는 ‘도둑을 잡고도 두목’을 잡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마 시진핑이 19대 이전에 장쩌민, 쩡칭훙과 타협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즉 시진핑이 장쩌민·쩡칭훙의 문제를 덮기로 하고, 장쩌민·쩡칭훙은 시진핑에게 맞서지 않기로 동의했을 수 있다. 시진핑은 최고 권력을 잡았으니 다른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19대 이후 시진핑은 반부패 척결 수위를 즉시 낮추었다. 그러나 장쩌민·쩡칭훙이 어떤 인물인가? 그들은 이를 갈았을 것이다. ‘우리가 중용한 저우융캉, 보시라이, 궈보슝, 쉬차이허우, 링지하, 쑨정차이 등을 잡아들였는데 이것으로 끝났을 수 있을 것 같은가? 어림없어!' 이로써 ’시진핑과 장쩌민의 투쟁’ 다시 시작됐으나 그것은 은밀하면서도 교묘하게 진행됐다. 시진핑이 홍콩 문제에서 장쩌민·쩡칭훙과 타협한 것도 엄청난 실책이었다. 제18기 장쩌민의 측근인 장더장 전인대 상무위원장에게 중국공산당의 홍콩·마카오 업무 협조소조 조장을 맡겼다. 장더장은 2017년 홍콩 행정장관 선거 때 직접 관여했다. 그 결과 여론조사와 대중적 지지율이 더 높았던 존 창(曾俊華) 전 재정사장(재정장관 격)이 떨어지고 대중적 지지율이 낮았던 캐리 람이 당선됐다. 중공 19대에서 장쩌민·쩡칭훙의 측근인 한정(韓正)이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돼 홍콩·마카오 업무 협조소조 조장 자리에 올랐다. 이는 장쩌민·쩡칭훙에게 계속 홍콩에 간여할 기회를 준 것이다. 장쩌민·쩡칭훙·한정·캐리 람, 네 사람은 오늘날의 홍콩 난국에 복선을 깐 주요 인물들이다. 2018년 3월 미·중 무역전쟁이 발발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중공을 굴복시킬 무역전쟁 카드를 한 장씩 추가했고 중국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다. 중공은 장쩌민 집권 때부터 쌓인 갈등이 모두 폭발해 시진핑은 순식간에 안팎으로 궁지에 몰렸다. 장쩌민·쩡칭훙은 중국 내부에서는 물론 국외에서도 끊임없이 시진핑을 공격해 왔다. 시진핑이 궁지에서 벗어나는 길은 미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미·중 무역협정을 체결하는 것이다. 장쩌민·쩡칭훙은 사력을 다해 결렬시켜 시진핑에 그 책임을 지우려 한다. 올 5월 미·중 무역협정 체결을 앞둔 시점에서 중국 측이 갑자기 번복하게 된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도적을 잡을 때 두목을 잡지 못하면 반드시 재앙을 당한다. 시진핑은 지금 본인이 '도적의 두목' 장쩌민·쩡칭훙과 타협한 결과를 맞고 있는 것이다! 장쩌민·쩡칭훙의 홍콩 대리인 캐리람이 '범죄인 인도법' 개정을 밀어붙이는 것은 시진핑을 끌어내리려는 음모다. 1949년~2018년까지 중국에서 수백만 명이 홍콩으로 도피했을 때, 중공은 한 명도 중국으로 인도하라고 영국 당국에 요청한 적 없었고, 홍콩에서도 그로 인해 어떤 대란도 발생하지 않았다. 반면 홍콩은 전 세계를 빛내는 '동방의 구슬(東方之珠)'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 하나가 됐다. 중국의 대국(大局)으로 보나 홍콩으로 보나 범죄인 인도법을 개정할 필요 없다. 무역전쟁과 민생 문제와 비교해 봐도 범죄인 인도법과는 어떤 긴급성도 없다. 그러나 장쩌민·쩡칭훙은 계속 홍콩에서 문제를 일으키려 한다. 범죄인 인도법 개정은 순전히 사회 혼란을 노린 장쩌민·쩡칭훙의 획책이다. 따라서 캐리 람은 ‘임무’를 맡은 이상 전 세계를 뒤흔드는 대사건으로 키워야했다. ...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은 “우리가 중·미 관계를 우호적으로 가져야 할 1천 가지 이유는 있어도 중·미 관계를 망칠 이유는 단 한 가지도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시진핑이 국내외적으로 봉착한 위기를 탈출할 수 있는 결정적 요인은 세계 최강국인 미국과 무역협정을 체결하고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다. 중국 관영언론 신화사에 따르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4일 백악관에서 류허(劉鶴) 중국 부총리를 만났다. 류허는 시 주석의 메시지를 트럼프에게 전달한 뒤 “양측이 중요 문제를 한 달 이상 집중 논의해 ‘실질적 진전’을 이뤄냈다”고 밝혔다. 시진핑은 무역 합의가 빠르게 성사되길 원했다. 그는 각종 채널을 통해 트럼프와의 밀접한 관계 유지를 언급했고, 트럼프 또한 가장 곤란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의견일치를 보았다고 응답했다. 지난 4월 25일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시진핑 주석을 빠른 시일 내 초대할 것이고, 그때 미중 무역협상을 최종 타결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5월 3일, 중국의 태도가 돌변해 무역 합의안을 번복했고, 5월 5일 미중 무역 분쟁은 다시 격화했다. 도대체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일까? 이는 시진핑 집권 이후 부패와의 전쟁에서 ‘적의 왕을 잡는 데 소홀했기 때문’이다. ‘적의 왕’은 장쩌민과 쩡칭훙(曾慶紅) 두 사람이다. 그들 중 장쩌민은 올해 93세로 수차례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만큼 현재 임종을 앞두고 있다. 따라서 현재 진정한 ‘적의 왕’은 쩡칭훙이다. 쩡칭훙은 공산당 상하이방(上海帮), 장시방(江西帮), 석유방(石油帮), 홍얼다이(紅二代)의 핵심 인물이다. 쩡칭훙은 1989년부터 1999년까지 중난하이에서 장쩌민이 가장 신임하는 ‘대내총관(對內總管·대내 업무 총관리자)’이었다. 그는 2007년까지 중공중앙조직부장, 중앙서기처 서기, 중공정치국상무위원, 중앙당교 교장, 국가부주석, 홍콩-마카오 중앙공작협조팀 팀장을 차례로 역임했다. 쩡칭훙은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치며 주어진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당‧정‧군‧국가안전‧외교 계통에 많은 심복을 심어 두었다. 현재 이 심복들이 쩡칭훙을 도와 미·중 무역 분쟁을 격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시진핑 ‘공격’ 당해도 함구하는 中 외교부 시진핑이 5년간 부패와의 전쟁에 돌입했어도 장기간 쩡칭훙이 장악했던 외교부와 국가안전부의 부패 연루자들을 청산하지 못했다. 쩡칭훙은 외교부와 국가안전부에 심어 둔 심복들을 이용해 끊임없이 시진핑을 교란했다. 쩡찡홍은 지능적이고 교활한 수법을 일삼았다. 늘 사소한 일에도 국제적으로 영향력이 큰 것처럼 떠들썩하게 반응했다. 2018년 10월 7일, 스웨덴 방송국은 ‘시진핑이 원하는 세계’란 주제의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이는 중국 공산당이 아니라 시진핑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일관됐다. 그런데도 중국 외교부, 해외 영사관, 당 기관지인 우마오 등 시진핑을 옹호해 항의하는 기관이 한 군데도 없었다. 중국이 직면한 난국에 대한 책임, 시진핑에 물어 2018년 3월부터 12월까지 중국 고위층은 미중 무역 분쟁을 둘러싸고 내부 줄다리기를 계속했다. 시진핑은 12월 1일 미중 정상회담에서 미중 무역협상이 재개되도록 많은 것을 양보했다. 12월 3일 쩡칭훙의 지배하에 놓인 해외 매체들은 ‘극좌에 분열된 중국, 시진핑이 책임져야’ 등의 평론으로 시진핑을 맹공격했다. 이와 관련해 재미 학자 허칭롄(何清漣)은 “국가안전부가 장악한 해외 선전 언론이 시진핑을 향해 역습의 나팔을 분 것으로 보인다”며 그들의 평론에 대해 “시진핑의 큰 죄 몇 가지를 열거하는 ‘역습’을 당과 정권의 생사존망이 걸린 큰일로 보는 것 같다. 모든 것을 잃을 때를 대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들에게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평했다. 시진핑이 미중 간 합의하려고 했지만, 쩡칭훙 세력이 시진핑에게 ‘극좌’의 책임을 물어 미중 무역협상이 결렬되도록 방해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시진핑, 협상 번복 책임 모두 진다’는 보도 나돌아 올해 5월 5일,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보류해 두었던 무역 전쟁이 계속된다고 발표했다. 다음날 6일, 외신들은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해 “중국 측 협상단이 대폭 양보한 협의 문안을 올렸지만 고위층에서 그 협의안을 기각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시진핑은 “모든 결과는 내가 책임지겠다”고 했다. 시진핑의 최우선 대외 업무는 미중 무역협상이다. 미중은 지난해 12월 1일부터 지난 5월 1일까지 10차 회담을 열었다. 그 기간 동안 양국은 현안 95%를 합의했고, 류허가 취한 입장은 모두 시진핑의 뜻이었다. ...
7일, 러시아를 방문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내 친구”라며 “미국이 중국과의 경제 관계를 훼손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고 한 의도가 도마 위에 올랐다. 트럼프 대통령은 시 주석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지도자들을 공개석상에서 여러 차례 '친구'라고 불렀다. 이런 표현은 트럼프의 화법에는 흔히 있는 일이다. 하지만 시 주석이 공개석상에서 트럼프를 '내 친구'라고 부른 것은 이례적이다. 일반적으로 중국공산당의 특수하고 기형적인 언어‧선전 시스템에서는 흔히 상투적인 표현이나 당 문화 시스템의 언어 표준에 따른다. 이번처럼 개인화된 표현이 등장하면 중국 공산당 고위층에서 위기나 이상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크다. 1989년 5월 19일 새벽 자오쯔양(趙紫陽) 당시 총서기가 톈안먼 광장을 찾아 학생들에게 “늦게 왔다”고 한 공개 사과한 말이 그 예다. 자오쯔양은 그 발언으로 ‘당을 분열했다’는 누명과 함께 대중(公衆)의 시야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시진핑이 트럼프를 '내 친구'라 부르기 앞서 트럼프는 6일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폭스뉴스 로라 잉그레이엄(Laura Ingraham)과 인터뷰에서 "중국은 이미 모든 카드를 다 써 미국과 확실하게 합의하려 할 것이다"고 예측했다. 트럼프의 발언은 미중 무역전쟁 실상을 대변한다. 현재 중국공산당은 '총알이 거의 바닥난' 상태고, 미국은 아직도 쓰지 않은 큰 카드가 여러 장 있다. 시진핑이 내우외환 속에 러시아에 도움을 청했어도 미중 무역전 흐름을 바꾸기 쉽지 않다. 미국과 유럽의 장기 제재에 놓인 러시아는 다방면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고, 중국과의 교역은 종종 실용주의를 따른다. 러시아가 미국의 용인 선을 넘어 중국과 공조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따라서 러시아에 도움을 청하는 것은 헛된 노력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시진핑이 트럼프를 '내 친구'라 공개 발언한 것은 어떤 의미일까. 첫째, 시진핑의 행보에 앞서 트럼프가 ‘앞으로 중국과 합의할 것이다'고 한 말에 대한 시진핑의 화답일 수 있다. 둘째, 중국 공산당 내부적으로 모종의 혼란과 분열 상황을 반영한 것일 수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중공 관영언론이 "두려울 것 없다" "끝까지 가겠다"는 등, 연일 미국에 강력히 대응하던 시진핑이 트럼프에게 공개적으로 '호의'를 보였다는 점이다. 이는 공산당 내부에서 시진핑 본인을 함정에 빠뜨릴 음모를 감지해 국제적으로 공인된 자리에서 본심을 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미 중국공산당 내부가 분열돼 혼란에 빠졌을 가능성도 높다. 셋째, 무역전쟁과 중국 공산당 내부의 극심한 혼란이 겹친 와중에 시진핑이 취할 노선이 마땅치 않음을 보여준다. 미국에 계속 강력히 대응하다 중국 경제가 충격을 받으면 그 책임은 온전히 시진핑 몫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 요구를 다 받아들이면 그로 인한 부정적 결과 또한 시진핑이 전부 떠안을 뿐 아니라 정적들에게는 이른바 ‘매국노’라 비난받을 수 있다. 중국 공산당이 그동안 미국과 서방세계에 수년간 취해온 '시간 끌기' '기만' 전술이 번번이 먹혔는데 왜 이번에는 통하지 않을까? 중국 공산당의 '천적' 트럼프를 만나서다. 이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중국 공산당의 몰락은 필연이며, 중공 정권은 중국과 세계의 위기를 해결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란 게 들통나서다. 따라서 시진핑의 위기 탈출은 중국 공산당을 과감히 던져버릴 때 시작된다.
중국 공산당 정치국상무위원 서열 5위인 왕후닝(王滬寧)은 문관 출신이다. 푸단대학 정치경제학과 법학석사, 교수와 박사과정 지도교수를 역임했고, 미국 방문학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1980년대에 이미 청년 학자로 명성을 날린 왕후닝은 시사잡지 ‘반웨탄(半月談)’의 표지인물로도 선정됐고, 당시 상하이 시위원회 선전부장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중국공산당 13차 당대회 이후 중요 이론 문헌의 기초 작업에 참여했다. 1993년 왕후닝은 국제전문변론대회에 푸단대학교 대표팀 고문으로 참가해 우승하면서 명성을 떨쳤다. 정보통에 따르면, 왕후닝은 1989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6.4’ 이후 3개월간 프랑스에 피신하기도 했지만, 학생운동을 지지한다는 입장 표명은 하지 않았다. 1989년 4월 베이징 학생항의에 영향받은 상하이 푸단대학에서도 단식, 강연, 시위가 벌어졌다. 청원서에 서명을 받기 위해 젊은 교직원들이 왕후닝에게도 찾아갔으나 왕후닝은 응하지 않았고, 오히려 항의 반대 문서에 서명했다. ‘종람중국(縱覽中國)’의 천쿠이더(陳奎德) 편집장은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학생운동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정치적 입장을 더욱 명확하게 보여준 것”이라고 평했다. 1989년 당시 상하이시 당서기였던 장쩌민은 상하이 학자들을 회의에 소집해서 ‘세계경제도보(世界經濟導報)’에 대한 정풍(整風) 의사를 밝혔다. 대다수 회의 참석자들은 탄압을 반대했지만 왕후닝만은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그의 발언은 장쩌민과 쩡칭훙의 극찬을 받았다. 1995년 4월, 중국공산당 총서기 장쩌민은 우방궈(吳邦國)와 쩡칭훙(曾慶紅)의 강력한 추천으로 왕후닝을 ‘특보’로 발탁해 중공중앙정책연구실 정치조 조장에 임명했다. 그는 1998년 4월, 중앙정책연구실 부주임이 됐다. 이어 2002년 11월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으로 승진해 제16기 중국공산당 중앙위원에 선출됐다. 2017년 10월 25일, 62세의 왕후닝은 제19기 중앙위원회 1차 전체회의(1중전회)에서 중앙정치국상무위원 서열 5위 겸 중앙서기처 제1서기에 올랐다. 이후 중앙정신문명건설지도위원회 주임도 겸임하면서 전국의 이념 공작을 주관했고, ‘중앙전면심화 개혁영도소조’ 판공실 주임직도 계속 맡았다. 그는 지도자들의 중요 사상이자 정치이론인 장쩌민의 ‘3개대표론’을 비롯해서 후진타오의 ‘과학적 발전관’과 시진핑의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의 초안을 잡은 주 기획자로서 중국공산당 3대 총서기를 보좌한 중요 이론가로 통한다. 중국공산당 고위층은 생사를 건 권력투쟁과 정치투쟁이 일상화돼 있다. 따라서 중국공산당의 역사는 고위층 내부 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후진타오와 장쩌민의 투쟁도 극심했고, 시진핑과 장쩌민의 투쟁도 암살 시도가 끊임없을 정도로 격렬했다. 이렇게 격렬히 싸우던 중국공산당 총서기 3대가 모두 정치적 배경이 약한 평민 학자 왕후닝을 브레인으로 신뢰하며 중용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평민 출신 왕후닝은 고위직에 올라도 정치적 배경 세력이 없어서 최고 집권자에게 위협이 될 수 없다는 점이 그의 자리를 안정시켜주었다고 보는 관점이 있다. 이는 사실에 기반을 둔 해석이긴 하지만 그의 자리를 안정시킨 주원인은 아니다. 중국공산당의 이데올로기와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원천은 원래부터 생억지 학설이다. 사실, 중국공산당이 진정으로 시행하는 것도 무슨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그저 깡패 통치, 조직폭력 통치, 사이비종교적 통치에 지나지 않는다. 장쩌민이 6.4 학살을 저지른 공로로 집권한 후, 중국 공산당이 내세웠던 이데올로기와 이론은 완전히 무너져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 공산당은 마르크스주의 전문가를 발탁해 겉모습을 다시 분장해야 했다. 이때 최적의 ‘정치 분장사’로 발탁된 자가 왕후닝이었다. 왕후닝이 3대 지도자를 위해 지어낸 세 가지 이론은 앞뒤가 안 맞는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지만, 영도자 입장에서는 대단한 득의작(得意作)이 됐다. 그 이론들은 공산당 체제의 모순과 지도자들의 불안감을 감추어주었으며, 당내 권력투쟁의 무기가 됐다. 따라서 왕후닝의 쓰레기 이론은 오히려 규범으로 칭송받았고 왕후닝에게 엄청난 권세를 안겼다. 그러나 왕후닝의 이론과 교언영색의 기술은 최고 지도자를 미혹시켜 잘못된 판단과 의사결정을 유도했다. 시진핑은 왕후닝을 참모로 두었지만 미중 무역전쟁은 해결 조짐 없이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에 중국 정치국은 6월부터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전 당원을 대상으로, 소위 ‘초심을 잊지 말고 사명을 기억하자(不忘初心 牢記使命)’는 주제로 교육을 시작했다. 이는 대미(對美) 선전전(宣傳戰)을 겸한 것으로서 왕후닝은 여기서 교육공작 소조 조장에 임명됐다. 이에 앞서 왕후닝 영향하의 중앙선전부는 중앙방송국과 전국 성급 위성방송국에 공문을 내렸다. 5월 16일부터 저녁 골든타임에 항미(抗美) 영상을 매일 방송해 ‘항미 사기를 고취하라’는 내용이었다. 최근 몇 년간 중국 매체들은 왕후닝의 조종하에 시진핑을 ‘고급흑(高級黑)’과 ‘저급홍(低級紅)’식의 홍보로 과도하게 띄움으로써 미중 무역전쟁, 국내 정치, 국제 외교에서 시진핑이 대응 착오를 일으키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로 인해 시진핑은 ‘나아가고 물러섬’에 정확성을 잃고 외교에 곤란을 겪으면서 외부의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급기야 비극에 빠져들 것이다. ...
지난 27일 방일 기간 중,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중국이 합의를 원하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말했다. 1년 가까이 이어진 무역전쟁에서 미·중 양측은 원래 휴전협정을 맺으려 했으나, 중국이 막판에 갑자기 기존의 합의 내용을 뒤집고 재협상을 요구했다. 거래에 있어서 신용을 중시해온 트럼프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중국 공산당의 ‘자다쿵(假大空·거짓말과 큰소리와 헛소리를 합쳐 일컫는 말)’ 행태에 크게 분노했다. 트럼프는 즉각 관세를 인상해 무역전쟁의 화력을 높이는 동시에 글로벌 차원의 과학기술전쟁에 불을 지펴 압박 범위를 확대함으로써 베이징 당국을 당혹스럽게 했다. 이에 맞서 베이징도 ‘미 국채 매각’, ‘희토류 수출 중단’, ‘대두 수입 중단’이라는 세 장의 ‘비장의 카드’를 흔들어 보였지만, 실제로는 희토류 카드 외에는 쓸 수 없는 입장이다. 게다가 희토류를 무기화하는 것조차도 미국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이다. 그러나 현재 이렇다 할 대책이 없는 베이징 당국은 경기 침체와 기술 단절이라는 이중고에 빠져 있고, 국제사회 또한 미국과 힘을 합쳐 중국 공산당을 포위하고 있다. 또한, 베이징 지도자는 절정으로 치닫는 당내 권력투쟁 속에서 시시때때로 생명을 위협받고 있으며, 실업률 증가와 물가 폭등으로 국민의 원망 또한 가득하다. 게다가 사회 안정을 내세워 국민 감시·탄압 강도를 높임으로써 온 국민의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다시 말해, 무역전쟁과 과학기술전쟁이 중국 공산당의 종말을 재촉하고 있으며, 여전히 관영언론이 필사적으로 반미(反美) 구호를 외치고 있지만, 허공에 맴돌 뿐이다.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중국 공산당이 이미 사면초가에 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베이징 지도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속수무책일까? 아직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에게는 아직도 희망이 있고, 그것은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스스로 중국 공산당을 해체하는 것이 중국이 직면한 심각한 위기를 해소하고, 자신의 안전도 지키며, 국민에게도 희망을 안겨주는 유일한 탈출구다. 중국 공산당이 해체되야 하는 이유 7가지 첫 번째, 무역전쟁 등 각종 분쟁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무역전쟁이 발발한 근본 원인은 결국 미·중 간의 오랜 무역 불균형과 지식재산권 절도 및 기술 이전 강요, 그리고 무역장벽과 정부 보조금 등의 불공정 경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다. 이런 부도덕하고 불공정한 문제들은 본질적으로 중국 공산당의 비정상적인 독재 체제 구조와 변이된 가치관에서 비롯됐다. 중국 공산당과 세계 각국의 갈등이 끊이지 않는 본질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 체제를 해체해 구조적 변혁을 이루어야만, 그래서 중국 사회가 정상 사회로 돌아가 보편적인 가치를 회복해야만 각종 무역 문제와 국제 분쟁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두 번째, 공산당 권력투쟁을 근절하고 자신의 안위도 보장할 수 있다. 권력자가 스스로 중국 공산당을 해체하는 것이 당내 권력투쟁을 철저히 해소하고 자신의 안전 또한 보장하는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권력을 독점하는 당국(黨國)의 ‘절대반지’를 철저히 부수고 체제를 바꿔서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줘야만 권력에 눈독 들이는 난신적자(亂臣賊子·나라를 어지럽히는 불충한 무리)의 욕망을 무너뜨릴 수 있다. 또한 권력자는 난신적자들이 신분을 내려놓고 백성과 천리(天理)를 대하게 해 국민의 공감을 얻어야만 권좌에 오를 수 있다. 세 번째, 중국 국민이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 권력자는 중국 공산당을 해체하면 정적(政敵)이 난을 일으켜 자신의 안위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고 우려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중 무역전쟁이 치열한데도 트럼프는 항상 그를 자신의 친구라고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트럼프는 항상 공산주의를 단호히 반대하고 있기에, 결국엔 중국 공산당 정권이 해체되고 중국 국민이 자유로워지는 날을 자연스럽게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따라서 권력자가 공산주의의 ‘절대반지’를 없애고 전통 사회를 재건하는 길을 가기로 결심한다면, 트럼프와 ‘엉클 샘(Uncle Sam·미국 또는 미국인을 은유적으로 일컫는 명칭)’이야말로 그가 기댈 수 있는 강력한 파트너이자 개혁 도우미가 될 것이다. 네 번째, 중국 대륙에 신기원을 열 수 있다. 중국 공산당은 현재 세계에서 평판이 매우 나쁘며, 결국엔 곧 무너질 것으로 보인다. 갤럽(Gallup)의 최신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 시민의 57%가 중국 공산당이 통치하는 중국에 ‘좋은 감정이 없다’고 답했다. 또한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의 다국적 조사에서도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한국 등 주요 나라가 중국 공산당 치하의 중국에 호감도가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중국 공산당은 중국 내에서도 민심을 얻지 못했다. 필자는 몇 년 전 여러 유명 기업인이 함께한 행사에 참석했는데, 사석에서 그들이 중국 공산당을 조롱하고 관료들을 비판하는 소리를 직접 들은 바 있다. 게다가 현재 3억 3천만 명이 넘는 중국 국민이 중국 공산당 3대 조직(공산당, 공청단, 소년선봉대)을 탈퇴했고, 여러 부처의 관리들도 외국으로 빠져나갈 준비를 마치고 중국 공산당이 무너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결과적으로 중국 공산당을 해체하는 것은 ‘하늘과 민심이 준 기회’일 뿐 아니라 신주대지(神州大地·중국 대륙)에 신기원을 열어주는 역사적 쾌거가 될 것이다. 다섯 번째, 양안(兩岸) 관계가 좋아질 수 있다. 대만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은 ‘중국’이 아니라 ‘중국 공산당’이다. 따라서 만약 누군가가 중국 공산당 독재 체제를 해체하고 자유 사회로 나아가는 데 앞장선다면, 그는 대만 정부와 민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것이고, 미래 양안(兩岸) 관계도 도약을 통해 새로운 국면을 열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