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혼란 배후, 캐리 람은 ‘장쩌민·쩡칭훙’ 수석 대변인

시진핑, 부패와의 전쟁 때 타협한 장파...교묘한 보복
Wang Youqun
2019년 6월 17일 업데이트: 2019년 10월 25일

홍콩은 지금 ‘범죄인 인도 법안’으로 악화일로에 놓여있다. 자유·민주·법치를 지키려는 100만 홍콩 시민들과 국제사회의 거센 반발에도 ‘법안 통과’ 강행을 시도한 람 장관의 정치적 의도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수차례 언급한 바대로 파룬궁 탄압은 오늘날 중국 정국의 핵심 문제라 할 수 있다. 중국에서 불거지는 모든 문제가 ‘파룬궁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다. 4월 3일 이래 본보는 <‘천명(天命)’ 실천하는 미국…해체 운명에 처한 중국공산당> <가라앉는 ‘中공산당호’… 난파선은 버리는 게 상책> <“장쩌민 일파 ‘해외 자산’ 제보 환영합니다”> 등 특별 보도를 잇달아 내보냈다. 이는 파룬궁 탄압으로 하늘에 사무치는 범죄를 저지른 장쩌민, 쩡칭훙을 비롯한 ‘혈채방(血債邦, 파룬궁 탄압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장쩌민 계열의 세력)’을 청산하라는 신호탄이다.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이 전 세계의 비난에도 송환법을 강행 처리하려는 것은 표면 현상일 뿐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장쩌민, 쩡칭훙을 위시한 혈채방이 작은 문제를 크게 확대해 이를 이용해 혈채방을 숙청했던 시진핑을 끌어내리려는 것이다.

1999년 7월 20일 당시 중공 독재자 장쩌민은 국가기구를 총동원해 파룬궁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광란의 수법이 총망라됐다.

장쩌민은 자신이 장악한 군대, 독재 기구, 선전 도구, 국가 자원, 그리고 중국 공산당이 수십 년간 쌓아온 타격 방법으로 단시간 내에 파룬궁을 철저히 제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파룬궁은 전 세계 100여 개국에 전해질만큼 중공의 사악한 박해는 철저히 실패했다. 중공의 강압과 기만 없이는 중국에서도 파룬궁 박해는 하루도 존속할 수 없을 것이다.

1999년 7월 20일부터 장쩌민과 그의 오른팔로 불린 쩡칭훙은 파룬궁 말살을 목표로 부패한 관리들을 발탁해 중용했다. 장쩌민과 쩡칭훙을 비롯한 ‘혈채방’은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빚을 갚는 것은 하늘의 이치다. 더구나 피의 빚은 더더욱 그렇다. 장쩌민과 쩡칭훙의 가장 큰 두려움은 그들의 만행이 낱낱이 드러나 죗값을 치르는 상황이다. 이를 막으려면 중공의 권좌를 지켜야 했다.

2002년 당시 은퇴를 앞두고 장쩌민 일당은 간계를 모색했다. 장쩌민과 쩡칭훙은 2002년 11월, 중국 공산당 16차 당대회(16대)에서 5가지 조치를 했다. 첫째, 장쩌민은 은퇴 후에도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 주석을 연임했다. 둘째,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을 7명에서 9명으로 늘렸다. 셋째, 쩡칭훙은 중공 17대에서 후진타오의 직무를 승계하려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중앙당교 교장, 국가부주석을 담임했다. 넷째, 파룬궁 박해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뤄간을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중앙정법위 서기로 중용했다. 다섯째, 파룬궁 박해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저우융캉을 중국공산당 정치국 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공안국장으로 중용하고 이듬해 국무위원으로 중용했다. 그리하여 후진타오 집권 5년간 파룬궁 탄압은 내부적으로 계속 강화했고, 쩡찡훙은 차기 집권 야욕을 달성하려 했다.

2007년 10월 17대 당시 쩡칭훙은 중국 공산당 원로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후진타오의 뒤를 이을 수 없었다.

장쩌민과 쩡칭훙은 최악의 평판에도 권력 유지 방편으로 5개 조치를 취했다. 첫째,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은 여전히 9명으로 유지해 그들의 심복을 등용했다. 둘째, 궈보슝, 쉬차이허우 중앙군사위 부주석을 이용해 중앙군사위 주석을 맡게 된 후진타오를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셋째, 저우융캉을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중앙정법위 서기로 중용했다. 넷째, 장쩌민의 측근이자 파룬궁 박해를 가장 악랄하게 지휘한 보시라이를 정치국 위원, 충칭시 당서기로 발탁했다. 다섯째, 쩡칭훙의 고향 장시(江西)성 서기인 멍젠주를 공안부장으로 등용, 이듬해 국무위원으로 겸직시켰다. 그리하여 또 5년간 ‘파룬궁 박해’를 유지했다.

이어 장쩌민, 쩡칭훙, 저우융캉은 보시라이를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정법위 서기의 뒤를 이어 18대 자리에 앉힐 예정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하늘의 뜻을 알 수 없다. 2012년 2월 6일, 왕리쥔 충칭시 공안국장이 청두(成都) 주재 미국 영사관으로 망명하는 대형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써 두 가지 직접적인 결과가 발생했다. 첫째, 2012년 3월 15일, 보시라이가 체포됐다. 둘째, 보시라이, 저우융캉이 쿠데타를 모의한 음모가 드러났다. 외신들은 왕리쥔이 청두 주재 미국 영사관에 제공한 정보를 조 바이든 당시 미국 부통령이 시진핑에게 알려줬다고 전했다.

2012년 2월 6일 ‘왕리쥔 사건’은 장쩌민, 쩡칭훙을 위시한 ‘혈채방’이 쇠락에 이르는 전환점이 됐다. 2012년 11월 중공 18대 인사 과정에서 두드러졌다. 첫째, 후진타오는 당·정·군 대권을 한꺼번에 시진핑에게 넘겼다. 둘째,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을 9명에서 7명으로 되돌렸다. 셋째, 왕치산을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중기위 서기로 중용했다. 넷째, 중앙정법위 서기를 중국공산당 정치국 위원과 겸직하도록 격하했다. 그러나 당시에도 장쩌민은 중앙에서 지방까지 자신의 인맥을 앉히는 데 주력했다. 장더장, 장가오리, 류윈산 등 3명을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에 앉혔고, 멍젠주를 중용해 중국공산당 정치국 위원, 중앙정법위 서기로 임명했다. 또 궈성쿤을 국무위원 겸 공안부장으로 발탁했고, 쑨정차이를 중국공산당 정치국 위원, 충칭시 당서기 등으로 중용했다.

후진타오는 10년 집권 기간 장쩌민의 허수아비 노릇을 하는 데 불과했다. 중대한 문제는 장쩌민과 쩡칭훙이 결정했다. 시진핑이 후진타오처럼 되지 않으려면 장쩌민과 쩡칭훙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아야 했다. 시진핑이 장쩌민으로 부터 정권을 탈환하려는 대전투는 2013년 1월 18기 중기위 제2차 전회에서 시작됐다. 시진핑은 전례 없는 ‘반부패 호랑이 잡기’ 캠페인을 벌였다. 즉 흔히 말하는 ‘시진핑-장쩌민 투쟁’을 벌인 결과 440여 명의 부성(부)급 및 그 이상의 고위 관리를 처리했는데 그중 절대다수가 ‘혈채방’ 멤버들이었다. 시진핑은 또 ‘강력한 군 개혁’을 통해 군권을 장악했다. 2017년 10월 19대엔 이미 최고 권력을 손에 넣은 상태였다.

하지만 시진핑이 부패와의 전쟁에서 가장 큰 실수는 ‘도둑을 잡고도 두목’을 잡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마 시진핑이 19대 이전에 장쩌민, 쩡칭훙과 타협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즉 시진핑이 장쩌민·쩡칭훙의 문제를 덮기로 하고, 장쩌민·쩡칭훙은 시진핑에게 맞서지 않기로 동의했을 수 있다. 시진핑은 최고 권력을 잡았으니 다른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19대 이후 시진핑은 반부패 척결 수위를 즉시 낮추었다. 그러나 장쩌민·쩡칭훙이 어떤 인물인가? 그들은 이를 갈았을 것이다. ‘우리가 중용한 저우융캉, 보시라이, 궈보슝, 쉬차이허우, 링지하, 쑨정차이 등을 잡아들였는데 이것으로 끝났을 수 있을 것 같은가? 어림없어!’ 이로써 ’시진핑과 장쩌민의 투쟁’ 다시 시작됐으나 그것은 은밀하면서도 교묘하게 진행됐다.

시진핑이 홍콩 문제에서 장쩌민·쩡칭훙과 타협한 것도 엄청난 실책이었다. 제18기 장쩌민의 측근인 장더장 전인대 상무위원장에게 중국공산당의 홍콩·마카오 업무 협조소조 조장을 맡겼다. 장더장은 2017년 홍콩 행정장관 선거 때 직접 관여했다. 그 결과 여론조사와 대중적 지지율이 더 높았던 존 창(曾俊華) 전 재정사장(재정장관 격)이 떨어지고 대중적 지지율이 낮았던 캐리 람이 당선됐다. 중공 19대에서 장쩌민·쩡칭훙의 측근인 한정(韓正)이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돼 홍콩·마카오 업무 협조소조 조장 자리에 올랐다. 이는 장쩌민·쩡칭훙에게 계속 홍콩에 간여할 기회를 준 것이다. 장쩌민·쩡칭훙·한정·캐리 람, 네 사람은 오늘날의 홍콩 난국에 복선을 깐 주요 인물들이다.

2018년 3월 미·중 무역전쟁이 발발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중공을 굴복시킬 무역전쟁 카드를 한 장씩 추가했고 중국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다. 중공은 장쩌민 집권 때부터 쌓인 갈등이 모두 폭발해 시진핑은 순식간에 안팎으로 궁지에 몰렸다.

장쩌민·쩡칭훙은 중국 내부에서는 물론 국외에서도 끊임없이 시진핑을 공격해 왔다. 시진핑이 궁지에서 벗어나는 길은 미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미·중 무역협정을 체결하는 것이다. 장쩌민·쩡칭훙은 사력을 다해 결렬시켜 시진핑에 그 책임을 지우려 한다. 올 5월 미·중 무역협정 체결을 앞둔 시점에서 중국 측이 갑자기 번복하게 된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도적을 잡을 때 두목을 잡지 못하면 반드시 재앙을 당한다. 시진핑은 지금 본인이 ‘도적의 두목’ 장쩌민·쩡칭훙과 타협한 결과를 맞고 있는 것이다!

장쩌민·쩡칭훙의 홍콩 대리인 캐리람이 ‘범죄인 인도법’ 개정을 밀어붙이는 것은 시진핑을 끌어내리려는 음모다. 1949년~2018년까지 중국에서 수백만 명이 홍콩으로 도피했을 때, 중공은 한 명도 중국으로 인도하라고 영국 당국에 요청한 적 없었고, 홍콩에서도 그로 인해 어떤 대란도 발생하지 않았다.

반면 홍콩은 전 세계를 빛내는 ‘동방의 구슬(東方之珠)’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 하나가 됐다. 중국의 대국(大局)으로 보나 홍콩으로 보나 범죄인 인도법을 개정할 필요 없다. 무역전쟁과 민생 문제와 비교해 봐도 범죄인 인도법과는 어떤 긴급성도 없다. 그러나 장쩌민·쩡칭훙은 계속 홍콩에서 문제를 일으키려 한다. 범죄인 인도법 개정은 순전히 사회 혼란을 노린 장쩌민·쩡칭훙의 획책이다. 따라서 캐리 람은 ‘임무’를 맡은 이상 전 세계를 뒤흔드는 대사건으로 키워야했다.

장쩌민·쩡칭훙의 계략은 이번만이 아니다. 시진핑 집권 전반 5년간 반부패 척결 기간에도 그들은 대리인 렁춘잉(전 홍콩 행정장관)을 통해 사회 갈등을 부추겼다.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은 2014년 9월 26일 발생한 ‘센트럴 점령 사건’(우산운동)이다. 당시 장쩌민·쩡칭훙의 목적은 명확했다. 바로 홍콩 국면을 걷잡을 수 없게 만들어 유혈 진압함으로써 홍콩에서 톈안먼 ’64’ 대학살을 재연한 뒤 그 틈에 시진핑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진핑이 속지 않아 그 음모는 미수에 그쳤다.

2019년, 장쩌민·쩡칭훙과 그들의 대리인 캐리 람은 범죄인 이도법을 꺼내 들었다. 그들은 홍콩 각계의 반대를 무시고 ‘범죄인 인도법’ 개정을 강행하다 결국 지난 9일 대규모 시위를 발발하게 했다. 지난 12일 1만여 시위자들이 홍콩 입법회에 모여 송환법 개정 2차 심의를 막았다. 경찰은 맨주먹인 시위대를 향해 포대탄·고무탄 등으로 진압했다. 72명 부상자 중 2명은 중상을 입었다. 캐리 람은 2차 심의를 보류 했지만, 저지시위를 ‘조직적 폭동’으로 규정해 참여자들을 폭도로 규정했다.

장쩌민·쩡칭훙이 이처럼 홍콩을 휘젓는 이유는 따로 있다. 장쩌민이 파룬궁을 박해한 지 20년이 지난 지금 국제사회가 파룬궁 문제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지난 5월 말, 미국 파룬궁 수련자들은 미 국무부로부터 중요한 통지를 받았다. 미국 비자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인권 및 종교 박해 관련자에게 비자 발급을 거부하며, 이미 비자를 발급받은 사람도 입국 거부할 수 있다. 미국 파룬궁 수련자들은 국무부에 박해자 명단을 제출할 수 있다”라는 내용이었다. 이 내용은 지난 3일 주중 미국대사관 공식 웨이보에도 게시됐다. 인권 박해자를 겨냥해 ‘글로벌 마그니츠키 인권 문책법’ 안내 글이었다. 미 국무부의 통지문은 대대적으로 인권 탄압에 앞장선 장쩌민·쩡칭훙 일당과 관련자들 모두에게 해당하는 획기적인 통고였다.

이제 장쩌민·쩡칭훙을 비롯한 ‘혈채방’을 깨끗이 청산할 때가 왔다. 장쩌민·쩡칭훙은 불안에 떨고 있다. 장쩌민·쩡칭훙 세력은 이미 시진핑의 반부패 척결 당시 산산이 와해했으나 당시 살아남은 잔재들이 최후의 일격을 위해 다시 혼란을 조성하고 있다. 홍콩에서 제2의 ‘6.4’ 대학살 사건을 유발시켜  그 책임을 전부 시진핑에게 덮어씌워 시진핑을 몰아내려 한다.

이같이 캐리 람을 이용해 홍콩을 혼란에 빠뜨린 것은 장쩌민·쩡칭훙의 계략인 것이다. 그들은 홍콩의 혼란을 부추겨 시진핑을 축출하는 빌미로 삼고, 그들 계파를 중공 권좌에 앉혀 파룬궁을 탄압한 원죄를 덮어 감추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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