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총서기 책사 ‘왕후닝’, 시진핑 잘못 이끌어

He Jian
2019년 6월 6일 업데이트: 2019년 11월 5일

중국 공산당 정치국상무위원 서열 5위인 왕후닝(王滬寧)은 문관 출신이다. 푸단대학 정치경제학과 법학석사, 교수와 박사과정 지도교수를 역임했고, 미국 방문학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1980년대에 이미 청년 학자로 명성을 날린 왕후닝은 시사잡지 ‘반웨탄(半月談)’의 표지인물로도 선정됐고, 당시 상하이 시위원회 선전부장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중국공산당 13차 당대회 이후 중요 이론 문헌의 기초 작업에 참여했다. 1993년 왕후닝은 국제전문변론대회에 푸단대학교 대표팀 고문으로 참가해 우승하면서 명성을 떨쳤다.

정보통에 따르면, 왕후닝은 1989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6.4’ 이후 3개월간 프랑스에 피신하기도 했지만, 학생운동을 지지한다는 입장 표명은 하지 않았다.

1989년 4월 베이징 학생항의에 영향받은 상하이 푸단대학에서도 단식, 강연, 시위가 벌어졌다. 청원서에 서명을 받기 위해 젊은 교직원들이 왕후닝에게도 찾아갔으나 왕후닝은 응하지 않았고, 오히려 항의 반대 문서에 서명했다.

‘종람중국(縱覽中國)’의 천쿠이더(陳奎德) 편집장은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학생운동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정치적 입장을 더욱 명확하게 보여준 것”이라고 평했다.

1989년 당시 상하이시 당서기였던 장쩌민은 상하이 학자들을 회의에 소집해서 ‘세계경제도보(世界經濟導報)’에 대한 정풍(整風) 의사를 밝혔다. 대다수 회의 참석자들은 탄압을 반대했지만 왕후닝만은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그의 발언은 장쩌민과 쩡칭훙의 극찬을 받았다.

1995년 4월, 중국공산당 총서기 장쩌민은 우방궈(吳邦國)와 쩡칭훙(曾慶紅)의 강력한 추천으로 왕후닝을 ‘특보’로 발탁해 중공중앙정책연구실 정치조 조장에 임명했다. 그는 1998년 4월, 중앙정책연구실 부주임이 됐다. 이어 2002년 11월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으로 승진해 제16기 중국공산당 중앙위원에 선출됐다.

2017년 10월 25일, 62세의 왕후닝은 제19기 중앙위원회 1차 전체회의(1중전회)에서  중앙정치국상무위원 서열 5위 겸 중앙서기처 제1서기에 올랐다. 이후 중앙정신문명건설지도위원회 주임도 겸임하면서 전국의 이념 공작을 주관했고, ‘중앙전면심화 개혁영도소조’ 판공실 주임직도 계속 맡았다.

그는 지도자들의 중요 사상이자 정치이론인 장쩌민의 ‘3개대표론’을 비롯해서 후진타오의 ‘과학적 발전관’과 시진핑의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의 초안을 잡은 주 기획자로서 중국공산당 3대 총서기를 보좌한 중요 이론가로 통한다.

중국공산당 고위층은 생사를 건 권력투쟁과 정치투쟁이 일상화돼 있다. 따라서 중국공산당의 역사는 고위층 내부 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후진타오와 장쩌민의 투쟁도 극심했고, 시진핑과 장쩌민의 투쟁도 암살 시도가 끊임없을 정도로 격렬했다. 이렇게 격렬히 싸우던 중국공산당 총서기 3대가 모두 정치적 배경이 약한 평민 학자 왕후닝을 브레인으로 신뢰하며 중용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평민 출신 왕후닝은 고위직에 올라도 정치적 배경 세력이 없어서 최고 집권자에게 위협이 될 수 없다는 점이 그의 자리를 안정시켜주었다고 보는 관점이 있다. 이는 사실에 기반을 둔 해석이긴 하지만 그의 자리를 안정시킨 주원인은 아니다.

중국공산당의 이데올로기와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원천은 원래부터 생억지 학설이다. 사실, 중국공산당이 진정으로 시행하는 것도 무슨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그저 깡패 통치, 조직폭력 통치, 사이비종교적 통치에 지나지 않는다. 장쩌민이 6.4 학살을 저지른 공로로 집권한 후, 중국 공산당이 내세웠던 이데올로기와 이론은 완전히 무너져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 공산당은 마르크스주의 전문가를 발탁해 겉모습을 다시 분장해야 했다. 이때 최적의 ‘정치 분장사’로 발탁된 자가 왕후닝이었다.

왕후닝이 3대 지도자를 위해 지어낸 세 가지 이론은 앞뒤가 안 맞는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지만, 영도자 입장에서는 대단한 득의작(得意作)이 됐다. 그 이론들은 공산당 체제의 모순과 지도자들의 불안감을 감추어주었으며, 당내 권력투쟁의 무기가 됐다. 따라서 왕후닝의 쓰레기 이론은 오히려 규범으로 칭송받았고 왕후닝에게 엄청난 권세를 안겼다.

그러나 왕후닝의 이론과 교언영색의 기술은 최고 지도자를 미혹시켜 잘못된 판단과 의사결정을 유도했다.

시진핑은 왕후닝을 참모로 두었지만 미중 무역전쟁은 해결 조짐 없이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에 중국 정치국은 6월부터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전 당원을 대상으로, 소위 ‘초심을 잊지 말고 사명을 기억하자(不忘初心 牢記使命)’는 주제로 교육을 시작했다. 이는 대미(對美) 선전전(宣傳戰)을 겸한 것으로서 왕후닝은 여기서 교육공작 소조 조장에 임명됐다.

이에 앞서 왕후닝 영향하의 중앙선전부는 중앙방송국과 전국 성급 위성방송국에 공문을 내렸다. 5월 16일부터 저녁 골든타임에 항미(抗美) 영상을 매일 방송해 ‘항미 사기를 고취하라’는 내용이었다.

최근 몇 년간 중국 매체들은 왕후닝의 조종하에 시진핑을 ‘고급흑(高級黑)’과 ‘저급홍(低級紅)’식의 홍보로 과도하게 띄움으로써 미중 무역전쟁, 국내 정치, 국제 외교에서 시진핑이 대응 착오를 일으키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로 인해 시진핑은 ‘나아가고 물러섬’에 정확성을 잃고 외교에 곤란을 겪으면서 외부의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급기야 비극에 빠져들 것이다.

자고로 간신은 실정망국(失政亡國)의 중요 원인이 된다. 전국시대의 관자(管子)는 “간신은 조금씩 조금씩 군주를 패망으로 몰아가서 군주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한다“고 했다.

현재 시진핑의 주위는 간신이 둘러싸고 있다. 여기에 왕후닝이 가세해 시진핑의 인선(人選)을 교란하고 판단을 오도함으로써 시진핑은 점점 수세에 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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