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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세계 공산주의 진영이 잇따라 몰락하면서 현재 전 세계에서 유일한 공산주의 국가는 중국과 북한 뿐이다. 60여 년간 중국을 통치해온 중국 공산당 정권은 2017년, 특히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부터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다. 당내 이권 투쟁이 본격화되고 중국 경제성장에는 제동이 걸렸다. 공산당 집권 60여 년 동안 누적된 갈등은 일촉즉발에 이르렀다. 국제 상황 역시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이 정권을 고립시키는 양상을 띠고 있다. 공산주의가 세계로부터 전면적 타격을 받고 있는 현 시점, 역사의 기로에 서 있는 중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트럼프, 공산주의 종식 위해 행동 시작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으로 부임한 지 불과 반년 남짓 만에 공산주의를 향해 여러 차례 경고를 보내며 이를 행동으로 옮겨왔다. 6월 16일, 마이애미에서 그는 새 쿠바 정책을 선포하면서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망명자와 반체제 인사들은 이미 공산주의가 한 국가를 괴멸시키는 것을 목격했다. 공산주의가 치하에 두었던 국가를 하나씩 괴멸시킨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공산주의의 압박에 우리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고 말했다. 9월 19일, 유엔 총회에서는 베네수엘라의 사회주의가 전 국민에게 빈곤과 고난을 안겨주었다며 규탄했다. 그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국가는 모두가 고통, 붕괴와 멸망에 이르는 결말을 맞을 것이라고 밝혔다. 10월 6일, 백악관에서 열린 ‘히스패닉 문화유산의 달’을 경축하는 자리에서 그는 미국 정부가 자유와 번영을 위해 분투하고 있으며, 쿠바와 베네수엘라 국민들과 함께 공동으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전제 제도에 반대할 것임을 표명했다. 그는 “쿠바 국민들을 압박하는, 실패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는 세계 곳곳에 비통과 고난을 안겨주었다. 공산주의는 과거에 속하고, 자유는 미래에 속한다”고 말했다. 트럼프의 공산주의를 향한 선전포고는 단순 발언에 그치지 않았다. 취임 이후 이루어진 각종 시정운영 또한 공산주의 이념과 팽팽히 맞서고 있다. 미국 다큐멘터리 <아젠다(Agenda)>가 미국과 전 세계로 침투한 공산주의에 대해 폭로한 바에 따르면 공산주의의 주요 목표는 인류의 전통적 도덕 가치관을 파괴하는 데 있다. 트럼프는 여기에 맞서 일련의 시정정책, 법안, 법령을 통해 전통적 이념을 결연히 수호하려는 의지를 보여왔다. 이는 많은 영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트럼프는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고, 경제를 살리며, 일자리 창출, 세수 감소에 힘썼다. 트럼프는 전통을 복구하고 도덕 유지를 강조했다. 취임 직후 행정명령을 통해 지난 1984년 로널드 레이건 당시 대통령이 낙태수술이나 정보 제공, 카운슬링 등의 활동을 하는 외국 단체에 대한 미연방의 자금 지원 금지하는 방안을 다시 실시했다. 이어 오바마 전 대통령의 정책 ‘성전환자 화장실 권리 보장 지침’ 등을 폐기했다. 신에 대한 겸손함과 신앙은 트럼프의 언사에 일관되게 나타났다. 트럼프는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공산주의, 테러리스트와 극단주의 분자를 규탄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전 세계적 저항에 직면한 중국공산당 침투 최근 몇 년간 공산당의 홍색(红色) 침투는 각종 수단과 방법을 통해 전 세계로 광범위하게 진행됐다. 이에 대해 여러 서구 국가들과 해외 매체들이 자국 국민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반격에 나섰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중국 공산당이 개설한 특무 기관 '공자학원'이 폐쇄됐다. 또 올해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발생한 사건은 국제적인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호주 매체는 중국 공산당 정권 및 부속 기관이 현재 호주에 전면적이며 전략적 배치를 진행하며 호주의 정치 질서를 어지럽히고 이익을 꾀하려 한다고 폭로했다. 공산당의 타깃은 호주의 최고위직 정계 요인, 호주대학, 중국 유학생, 호주 중국인 커뮤니티와 호주 중문 매체였다. 이 매체에 따르면 현재 호주 정보기관은 공산당이 호주의 정치, 경제 등에 침투한 사실에 대해 조사 중이며 공산당을 통해 정치적 뇌물을 받은 일부 정계 인사를 공개한 바 있다. 이러한 공산당의 점진적 침투를 통해 호주 정치에 끼치는 무형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 얼마 전 호주 법무장관 조지 브랜디스(George Brandis)는 외국 정치자금 수수 금지 및 외부 간섭을 금지하는 법률 개정을 시도했다. 뉴질랜드에서는 중국계 의원 양젠(杨健)이 12년 동안 공산당 군부 스파이로 활동해온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건의 파문이 점점 확산되고 있다. 뉴질랜드 총리, 의원, 전문가, 학자와 매체 등이 해당 사건에 주목하면서 양젠에 대한 조사가 강도 높게 진행 중에 있다. 캔터베리 대학교 중국 전문가 브래디 교수는 최근 연구 보고를 통해 공산당의 뉴질랜드에 대한 영향력은 해마다 커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브래디 교수는 뉴질랜드가 호주와 마찬가지로 공산당의 위협과 침투를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고 호소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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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가 10월 18일 개막했다.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를 포함한 3대 지도자들이 대회에 참석한 가운데 이들은 ‘단결’을 강조하면서 배후에서 미묘한 신경전을 펼쳤다. 이미 9월 19일 진행된 조별토론 때부터 시진핑과 장쩌민 간 대결은 가열되는 양상을 보인 바 있다. 그리고 장쩌민 정변 집단은 당대회 개막과 함께 드디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장쩌민에 대한 시진핑의 직격탄 중국 중앙방송 CCTV가 19대 개막식을 생중계하면서 연출 포인트가 화제로 떠올랐다. “하나의 정당, 하나의 정권, 그의 미래와 운명은 인심의 향배에 달렸다. 인민 군중이 무엇을 반대하고 무엇에 증오한다면 우리는 이를 결연히 방지하고 바로잡아야 한다”는 시진핑의 발언이 나오는 가운데 CCTV의 생중계 화면이 장쩌민을 클로즈업 했다. 장쩌민을 클로즈업한 장면은 시진핑이 “인민 군중이 무엇을 반대하고 무엇에 증오한다면 우리는 이를 결연히 방지하고 바로잡아야 한다”라고 말할 때 마침 나타났다. CCTV는 중국 공산당의 주요 행사와 고위 간부에 대한 뉴스를 보도하는 정치적 임무를 띤 관영매체이다. 카메라 렌즈의 각도부터 지도자들이 화면에 나타나는 순서, 시간의 길이, 발화시 TV화면 등 모두 엄격한 규정을 따라 결정된다. 만약 규정에 어긋나면 곧바로 방송 사고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CCTV가 장쩌민을 클로즈업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고위층의 지시를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외부에 장쩌민을 타격하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시진핑이 업무보고를 마친 뒤 후진타오, 장쩌민 간의 움직임에서도 이러한 신호를 찾아볼 수 있다. 시진핑이 19차 당대회 보고서를 발표하고 자리로 돌아오면서 후진타오 전 주석과 몇 초 간 악수를 나눴다. 카메라는 그 장면을 정지된 클로즈업 화면으로 내보냈다. 하지만 장쩌민과 악수했을 때는 장쩌민의 얼굴이 촬영 기자에게 가려 나오지 않았다. 시진핑은 보고서 발표를 끝낸 뒤 먼저 후진타오와 악수를 했으며 관영매체는 이를 클로즈업 화면으로 내보냈다. 시진핑이 나중에 장쩌민과 악수를 나누었으며 관영 매체의 화면에는 악수 장면이 나오지 않았다. 만약 이러한 연출이 단지 19차 당대회 첫날 벌어진 해프닝에 불과했다면 19일부터는 대결이 본격화되는 양상을 띠었다. 보시라이, 저우융캉, 링지화, 쑨정차이 ‘국가권력 찬탈 모의’ 홍콩매체에 따르면 류스위(劉士餘) 중국 증권감독관리위원회(증감회) 주석이 19일 19차 당대회 중앙금융계통 대표단 회의에서 중국 정부의 반부패 활동을 언급하며 저우융캉 전 중앙정법위원회(정법위) 서기 등이 연루된 사건에 대해 처음으로 ‘권력찬탈 음모’라고 표현했다. 류스위 주석은 지난 5년간 당국이 보시라이(薄熙來), 저우융캉(周永康), 링지화(令計劃), 쉬차이허우(徐才厚), 궈보슝(郭伯雄), 쑨정차이(孫政才)를 특별 조사 처리했다면서 “이들은 당내에서 높은 지위와 엄청난 권력을 누렸지만 완전히 부패했으며 국가 권력을 찬탈하려 했다”고 비난했다. 사실 ‘당권찬탈 음모’는 쿠데타의 다른 표현이나 마찬가지다. 1976년 중국 공산당 내 ‘4인방 반당집단(四人幇反黨集團)’을 무너뜨린 이후 40년 간 당 관료가 이 표현을 사용한 적은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중앙과의 일치를 유지하는 관료계에서, 최고위층으로부터의 지시가 없었다면 부급(部級) 관료인 류스위가 이런 말을 절대 할 수 없다는 점이다. 비록 류스위의 발언이 관영매체에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이는 19차 당대회에서 장쩌민 정변 집단을 두고 토론 화제로 삼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장쩌민의 쿠데타 음모 역시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 있게 됐다. 보시라이와 순정차이의 ‘정치적 공통점’ 19대 충칭 대표단이 10월 19일 공개 기자회견 자리에서 천민얼(陳敏兒) 충칭시 서기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쑨정차이의 악영향을 제거하는 것과 ‘보시라이, 왕리쥔(王立軍)’이 남긴 사상적 해악을 제거하는 것은 일맥상통한다. 왜냐하면 양자 사이에 정치적인 공통점이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함께 정리, 제거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보시라이와 쑨정차이의 정치적 공통점은 무엇일까? 당연히 부정부패는 아니다. 그것은 바로 보시라이와 쑨정차이가 모두 장쩌민 정변 집단의 일원이자 장파가 지목한 시진핑을 대체할 후계자라는 점이다. 천민얼은 시진핑의 옛 부하로 시 주석으로부터 깊은 신임을 받아 쑨정차이의 실각 후 후임자로 임명됐다. 따라서 보시라이와 쑨정차이의 정치적 공통점을 공개적으로 지적함으로써 천민얼은 이들이 정변 집단의 구성원임을 암시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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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8일 가을을 재촉하는 빗속에서 중국 공산당(중공) 19차 당대회(19대)가 개막됐다. 19대 회의에서 발표된 내용과 정보를 종합해 향후 중국의 정치 변화를 예측해 본다. 중국 공산당의 변화 중공은 5년마다 이른바 ‘당과 국가의 미래를 결정’하는 대표자 회의를 개최한다. 이번 회의에 참석한 대표의 면모를 살펴보면 종전과 다른 변화를 느낄 수 있다. 반부패 과정에서 낙마한 인물들이 참석 대표자 명단에 일부 들어있긴 하지만 이미 실세는 아니다. 정치국 상무위원과 정치국 위원 후보 상당수가 새로운 인물이라 향후 정치권에 변화가 예상되기도 한다 회의 때마다 통치자가 외치는 구호와 이론은 달랐다. 장쩌민(江澤民)은 ‘3개 대표(三個代表)'를, 후진타오(胡錦濤)는 ‘과학발전관(科學發展觀)’을 내세웠고 이번에 시진핑은 ‘새로운 시대 중국식 사회주의 사상’이라는 이른바 ‘시진핑 사상’을 주창했다. 모두 서로 아무런 관련 없는 이론으로 새로운 변화를 주장한다. 중공은 끊임없이 당헌을 개정하고 각종 조항을 바꾸고 심지어는 헌법도 개정한다. 이런 과정을 변화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단지 권력층 소수의 집단이 통치에 편리하도록 규정을 바꾸는 것일 뿐 진정한 변화는 아니다. 중공이 어떻게 변화해도 절대 바뀌지 않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중국 공산당의 불변 사항 현재 서방의 정상적인 국가에서는 집권당이 회의를 소집해도 국내외에 광범위한 관심을 끌기 어렵다. 당 내부 회의가 국내외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현상은 중국에서만 볼 수 있는 비극적 상황이다. 공산당 내부 회의가 전국을 준 전시 상태로 몰아가 인터넷을 봉쇄하고, 시민이 자유롭게 이동하지 못하게 철저히 차단하는 등 국민 모두를 불안하게 한다. 그 원인은 간단하다. 중공은 국가와 국민을 인질로 삼아 폭력과 거짓말로 통치하기 때문인데, 이는 공산당 치하에서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이다. 10월 18일 오전 시진핑, 후진타오, 장쩌민은 상무위의 주석단 제1열에 자리했다. 비록 장쩌민이 건재를 과시하며 주석단에 앉았지만, 자신의 심복들은 이미 부패 척결 과정에서 대부분 낙마하고 얼마 남아 있지 않음을 두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장쩌민이 주석단에 앉아 과연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공산당 내부의 권력 다툼은 사활이 걸린 문제다. 중공은 정권이 위기에 처했을 때 통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일치단결’이라는 가식적인 국면을 조성해 세계를 기만한다. 중공은 중요한 회의 때마다 이런 구호를 외친다. 중공의 통치가 계속되는 한 중국에서는 결코 바뀌지 않을 정치 행태다. 시진핑은 19대 개막 연설에서 지난 5년간 부패 척결을 위해 ‘정화 운동’을 벌여왔다고 했다. 그러나 중공 자체가 부패와 뇌물의 근원이다. 당이 미사여구를 사용해 자신을 미화해도 당의 썩은 고름을 치료할 명약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공과 정화 운동은 상반되는 개념이다. 중국 사회에서 인권은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 강제 장기적출 등 천인공노할 다량의 인권 범죄가 계속되고 있는데, 이는 중공 정권이 죄악과 재앙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당원의 부패와 뇌물, 그리고 정권이 되풀이하는 죄악은 공산당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변치 않을 요소다. 중공의 역사는 권력층 간에 벌어지는 투쟁의 역사다. 중공 정권이 존재하는 한 내부 권력투쟁은 계속 이어질 것이고 투쟁 과정에서 음모와 암살, 쿠데타 등의 추악한 내막이 드러날 것이다. 시진핑도 19대까지 이런 과정을 거쳤다. 시진핑이 19대 개막 연설에서 ‘반부패에 압도적 승리를 했다’라고 자평한 것은 역설적으로 중국에서 그만큼 부패가 만연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공산당의 투쟁 메커니즘은 지도자를 항상 위기에 처하게 한다. 시진핑은 앞으로도 체제에서 부단히 정적의 도전을 받을 것이다. 이것은 공산당의 역사가 방증하는 것으로,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다. 공산당의 투쟁 속에서 국민은 인성(人性)을 상실한 채 사악한 중공에 동화되면서 점점 물들어 갈 것이다. 중공은 변할 수 없다 끝나지 않는 연회는 없고 영원히 존재하는 강산도 없다. 이것은 인류 역사의 발전 법칙에 따라 지나온 과정이 말해준다. 중공이 중국을 통치한 60여 년 동안 수천만의 국민이 살해됐고 전통문화가 파괴되고 도덕이 무너졌다. 정권이 지속적으로 국민을 속이고 죄악을 저지르는 것은 중화민족의 재난이다. 공산당의 통치는 하늘이 노하고 만백성이 원망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번 19대 고위층의 면모를 살펴보면 모두 지난 권력투쟁 가운데서 남을 죽이고 자신을 키워온 인물들이라 걱정이 앞서고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위정자 한 개인이 어떠어떠하게 중국을 바꾼다고 속여도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거스르지 못하고 하늘의 뜻을 거역할 수 없다. 결국, 공산당원은 모두 정권의 순장품이 될 뿐이며 누구도 종국적인 중공의 파멸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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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19차 당대회에서 차기 상무위 인선에 대한 추측이 분분한 가운데 왕치산의 향후 거취에 여전히 외부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왕치산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의 유임 여부는 19차 당대회에서 가장 예측하기 어려운 화두이다. 지난 몇 개월간 당내 고위층은 이를 둘러싸고 치열한 투쟁을 벌여왔다. 특히 그의 정적들은 해외에서 여러 스캔들을 거듭 폭로하며 왕치산을 정치 게임의 함정으로 밀어 넣기 위해 애썼다. 18차 당대회가 치러졌던 5년 전에는 왕치산 본인을 포함해 그 누구도 지금과 같은 국면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째서 왕치산인가? 왜 18차 당대회 상무위에서 서열 6위인 왕치산이 정치 게임의 중심에 서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은 지난 5년간 왕치산이 반부패 운동을 주도하며 보여줬던 ‘성과’에 있다. 왕치산, 5년간의 생사를 건 전쟁에서 전과 올려 최근 중앙기율위가 발표한 통계 자료에 따르면, 지난 5년간 ‘호랑이 사냥’ 반부패 운동으로 낙마한 성부(省部)급(부성부급 포함) 고위 공무원은 235명에 달했다. 중국의 31개 성(省)과 시(市)에 속한 만여 개의 청(廳), 처(處)급 관료가 조사를 받은 바 있으며 기층 관료는 134만 3천만 명에 이르렀다. 부국급 이상 관료인 저우융캉(周永康), 쑤룽(蘇榮), 링지화(令計劃), 쑨정차이(孫政才), 쉬차이허우(徐才厚), 궈보슝(郭伯雄) 등 유명 인사들 역시 반부패의 칼날을 피해가지 못했다. 시진핑(習近平) 주석과 왕치산이 주도한 5년간의 반부패 운동은 생사가 걸린 투쟁의 연속이었다. 시진핑은 ‘반부패 투쟁에 있어서 개인의 생사 및 명예 훼손은 중요하지 않다’고 밝힌 바 있다. 두 사람의 적극적인 반부패 활동은 당 내부의 여러 이익 집단을 긴장하게 만들며 고위 부패관료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장쩌민(江澤民) 집단과 함께 제거될 위기에 놓인 이들은 왕치산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따라서 이 세력은 보복하고 타도해야 할 첫 번째 인물로 왕치산을 선택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왕치산은 중앙기율위 서기직에 부임한 뒤 27차례나 암살 위협에 처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왕치산이 주요 인물로 떠오른 데에는 이 보다 심도 깊은 원인이 자리하고 있다. 중국공산당 체제에서 모두가 느끼는 공포 정상적인 국가체제라면 왕치산과 같이 부패 척결을 부르짖는 관리는 지지와 보호를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앞에 놓인 것은 중국 공산당이라는 뿌리까지 썩어버린 구제불능의 체제였다. 이 같은 체제하에서 왕치산은 지난 5년간 부패관리 134만 명 이상을 적발해냈다. 특히 이는 장쩌민 집단이라는 ‘선택적 반부패’라는 목표 아래 이루어진 성과였다. 사실상 당 내부에서 부패한 관리보다 부패하지 않은 관리를 찾기가 더 어렵기 때문이다. 장쩌민파로 대표되는 당내 부패 집단은 중국 사회 전반을 장악해왔다. 그동안 관료계에서 부패는 생존 및 승진 조건처럼 자리 잡았다. 또한 이 체제의 존재 자체가 이미 부패를 양산해내는 구조로서 암세포처럼 이를 재생 및 확산시킨 점도 문제 중 하나였다. 중국 공산당 체제하에서 부패, 폭력, 거짓말이 없다면 공산당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전면적인 반부패 활동은 이들에게 당의 체제에 대한 도전이며, 최대 위협이며 박멸해야 할 대상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즉, 시진핑과 왕치산은 체제 전체가 전력을 다해 자신들을 제거하기 위해 달려드는 상황 속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체제는 모두에게 공포를 전염시키며 그 누구도 안전을 보장받기 어렵다. 총서기를 포함한 지도자급 역시 언제든지 실각되어 수감되거나 비명횡사할 수 있다. 이 같은 상황은 이미 여러 차례 중국 역사에서 반복돼 왔다. 향후 정국 변화는 어디로? 19차 당대회 이후 시 주석은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다지는 데 주력할 것이다. 하지만 왕치산은 시진핑의 반부패 운동 오른팔로서 19대에서의 유임 여부와 관계없이 자신의 안전을 완전히 보장받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시진핑과 왕치산 모두에게 현 상황은 녹록치 않다. 당 내부에 도사린 정적들이 눈을 부릅뜬 채 언제든지 분란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다. 이에 맞서 당국도 ‘반부패는 영원히 진행 중이다’라고 밝히며 반부패 운동에 대한 의지를 지속적으로 피력 중이다. 외부에서 보기에, 지금의 중국 공산당 체제 자체와 공산주의 제도는 경제발전과 국제 활동을 저해하는 요소이다. ‘공산주의’라는 의식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중국은 점점 더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종국에는 막다른 골목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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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당국은 중국 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의 개막을 앞두고 정권의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국민과 사회에 대한 통제를 전면 강화하고 있다. 특히 이데올로기와 정치적인 측면에서 좌편향이 심화되면서 중국은 대내외적으로 더욱 심각한 위기에 휩싸이게 됐다. 좌편향된 중국 정치 올해 베이징 당국은 ‘좌클릭’ 행보를 계속하며 정치적 성향의 변화를 보였다. 중국 공산당 정부는 8천 9백만 명의 당원을 상대로 인터넷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지난 8월 1일에는 새 규정을 발표해 당 간부들은 뉴욕 타임즈, 페이스북, 트위터 등 ‘금지된’ 사이트에 접속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이에 따르면 당원이 SNS에 가입하려면 당 조직의 승인을 얻어야 하며, 웹사이트에 ‘당과 국가에 해를 입히는 부정적 정보’를 공유할 시에는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된다. 얼마 전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人民日報)는 당원이 하지 말아야 할 100조 금지령을 열거했는데, 그중 맨 앞의 4조 금지령은 다음과 같다. 1. 반당 언론을 공표하는 것을 엄금한다. 2. 공산당 중앙의 중요 방침을 함부로 논하는 이른바 ‘망의’(妄議)를 엄금한다. 3. 당과 국가의 이미지를 공개적으로 훼손하는 것을 엄금한다. 4. 반당 도서, 시청각 자료의 제작, 판매 및 유포를 엄금한다. 이와 함께, 2016년부터 올해 7월말까지 홍콩에 상장된 최소 32곳의 대기업이 기업 구조 변경을 제시하고, 당위원회 설립 조항을 회사 정관에 추가했다고 미국 워싱턴 포스트가 홍콩거래소와 로이터를 종합하여 보도했다. 변경된 정관에는 당 조직의 핵심 역할은 ‘조직화, 제도화, 구체화’이며, 당 조직이 ‘방향을 잡고(把方向), 대국을 장악하며(管大局), 시행을 확보한다(保落實)’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는 공산당이 모든 기업 조직 내에서 핵심적 지위를 점유하고 있음을 명문화한 것이다. 회사 정관을 변경한 대기업으로는 홍콩 증시 상장사이자 중국의 최대 증권사인 중신증권(中信证券), 중국최대의 정유/석유화학 국영기업인 시노펙 그룹(Sinopec Group)이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철강이나 에너지 관련 그룹 등이 다수를 이뤘다. 30곳이 넘는 기업들의 시가총액은 1조 달러 이상으로, 홍콩 증시 시가총액의 3분의 1에 달한다. 만약 사기업까지 포함한다면 홍콩 증시에 상장된 중국 내륙 기업은 999곳에 이르며, 이는 시가총액의 63%를 차지한다. 최근 펑파이신문망(澎湃新聞網)은 <환경과 지속 가능한 발전(环境与可持续发展)>이라는 정기 간행물에 실렸던 ‘베이징시 오존 측정 및 분석에 응용된 마르크스주의’라는 논문을 실었다. 이 논문은 누리꾼들로 하여금 문화대혁명 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질의를 불러 일으켰다. 비록 해당 논문은 게재된 지 몇 시간 만에 삭제됐지만 이 사건은 현재 중국의 이데올로기가 좌편향 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중국의 좌편향 행보, 국내 위기 가중시켜 중국의 좌편향으로 인해 국내의 위기는 주로 경제와 사회, 두 가지 방면에서 진행됐다. 먼저 경제적 측면에서 중공은 수많은 대기업의 정관에까지 ‘당’을 반영시켜, 중국이 시장에 대한 통제를 완화할 것으로 예상했던 국내외 투자자들의 기대 심리를 꺾었다. 또한, 중국 내 모든 기업을 엄격히 통제하여, 기업 자체의 이익보다 중공 정당의 이익을 우선시했다. 이 같은 행보는 현대 사회의 경제 발전과 국제사회와 융합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장기화되면 중국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힐 것이다. 2012년 중공 양회(兩會·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정치협상회의) 기자회견 당시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는 왕리쥔(王立軍) 사건과 관련한 질문에 대해 “문화대혁명의 착오와 봉건 의식의 영향이 아직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역사적 비극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대답한 바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좌파 성향인 보시라이가 집권한 충칭이다. 그는 집권과 함께 민영기업 죽이기에 착수했으며 홍색가요 제창과 부패 척결을 의미하는 ‘창훙다헤이(唱紅打黑)’ 운동을 주도하는 등 문화대혁명을 재현해냈다. 이는 충칭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중국 정치의 전면적인 좌로의 전환은 대량의 외자 철수를 가속화할 것이다. 사회적 각도에서 중공이 통치했던 지난 60년을 평가한다면 그 기간은 중국의 역사에 엄청난 재앙이었다. 1억 명에 가까운 중국인들이 비정상적으로 사망했고 중국 사회와 중화민족이 5천여 년 간 지켜왔던 문화가 파괴됐다. 환경오염은 물론이고 전통적 질서와 도덕관조차 무너진 중국 사회는 혼란에 빠졌다. 사기, 부정부패, 위조, 매관매직, 매춘과 범죄 조직이 기승을 부리는 등 충격적인 일이 잇따랐다. 사람들은 이제 미래에 대한 확신을 잃고 있다. 중국 사회가 계속해서 좌편향 되어가고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지속적으로 기승을 부린다면 중국 사회의 위기는 더욱 가중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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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차 당대회 전 중앙기율검사위 서기 왕치산의 유임 여부가 매스컴의 화제로 떠올랐다. 중국 공산당 고위급도 왕치산을 둘러쌓고 치열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 최근 해외 매체에서 왕치산의 은퇴 또는 유임과 관련된 기사를 연일 쏟아내고 있다. 홍콩의 일간지 명보(明報)는 9월 18일 베이징 소식통의 발언을 인용해 5년간 왕치산은 이미 점차적으로 ‘제도적 반부패’를 구축했고 왕치산 본인도 퇴임할 뜻이 있다고 보도했다. 그래서 19차 당대회 후 은퇴를 선택할 것이라고 한다. 보도 중에서는 또 왕치산이 웃으면서 “일만 계속할 수는 없다. 나도 쉬어야 할 때가 왔다”고 언급했다. 왕치산이 이런 말을 할 가능성이 있을까? 충분히 가능하다. 일찍이 2년 전 인터넷에서는 왕치산이 원로간부 단배회(團拜會)에서 자신이 물러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왕치산은 중국 공산당(이하 중공)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서열 6위이지만, 실제 그의 권력과 영향력은 사실상 시진핑 다음이라고 볼 수 있다. 왕치산은 시진핑을 도와 강도 높은 반부패를 추진하며 공공 내부의 장쩌민 집단을 대표로하는 기득권자들과 철천지 원수가 되었다. 현재 중국 정치계 소용돌이의 중심에 서있는 왕치산이 사방에서 좁혀오는 압박으로 인해 스스로 은퇴를 언급하는 것도 충분히 납득 가능하다. 정치계, 관료계에서 하는 말은, 그 진실한 목적과 의미가 흔히 말의 배후에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 왕치산과 같은 이런 표현은 중공 지도자 가운데 덩샤오핑과 장쩌민 역시 같은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중국에서 출판 금지된 서적인 <후야오방전(胡耀邦傳)>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1986년 5월 덩샤오핑은 후야오방을 자택에 초대해 13차 당대회 인사 배치를 논의했다. 후야오방은 “이미 70이 넘은 나이니 13차 당대회 때는 반드시 퇴임하겠다”라고 했다. 이에 덩샤오핑은 “나, 천윈(陳雲), 리셴녠(李先念)이 모두 전퇴(全퇴)하고 자네는 물러나고 싶으면 반퇴로 하게, 총서기는 연임 하지 말고 군사위원회 주석이나 국가 주석을 한 번 더 맡고 난 뒤에 다시 퇴임을 생각하라” 라고 얘기했다. 같은 해 8월 22일 덩샤오핑은 81세 생일을 맞았다. 베이다이허에서 술자리를 벌였다. 그 자리에서 2년 후인 13차 당대회에서 완전히 퇴임할 것이라 밝혔다. 후야오방은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홍콩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덩샤오핑이 퇴임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후야오방의 이 발언이 그의 퇴진에 도화선이 되었다. 그의 정치상의 순진함은 그가 향후에 실각하게 된 주된 원인이다. 또 다른 예시는 바로 장쩌민이다. 2004년 8월 중순, 훙쉐즈(洪學智), 류화칭(劉華清), 양바이빙(楊白冰) 등 노장군들이 중앙 민주생활회에서 장쩌민이 4중전회(四中全會)에서 반드시 군사 위원회 주석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건의를 제출했다. 그리고 전 임기 정치국 위원이자 군사위원회 부주석인 츠하오톈(遲浩田), 중앙 군사위원회 위원인 왕커(王克), 왕루이린(王瑞林) 등도 이에 동의했다. 노장군들의 의견은 중앙 판공실에서 중앙위원과 후보위원에게 전달됐다. 이에 40여 명의 중앙위원과 후보 중앙위원이 서신을 통해 정치국에 장쩌민의 완전 퇴임을 요구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장쩌민은 의연한 척 하며 자신은 언제든 퇴임해도 좋으니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밝혔다. 상무위원회에는 이미 장쩌민이 심어놓은 인물이 여럿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퇴임 발언이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9월 1일 장쩌민은 중앙 정치국에 서신을 보냈다. 서신에는 ‘심사숙고’ 한 끝에 군사위원회 주석에서 물러나겠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장쩌민의 속내는 이를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지키고 자신의 권력남용에 대한 비난의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었다. 장쩌민은 자신이 발탁한 사람들이 결국은 자신을 ‘만류’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되면 그는 또다시 자리에 올라 명분을 갖고 수렴첨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발표는 반대파 사람에 의해 해외로 누설됐다. 9월 6일 뉴욕타임스는 장쩌민이 직접 사의를 표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장쩌민의 처지는 매우 난처해졌다. 결국 상무위원회는 장쩌민의 퇴임을 요구하는 원로와 이전 상무위원회 위원들의 의견을 중앙위원과 중앙 군사위원에게 전달해 장쩌민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9월 13일 중앙 정치국은 확대회의를 열어 중앙군사위원회 위원까지 모두 이에 참여했다. 회의에서 장쩌민이 선발한 인물인 중앙 군사위원회위원인 쉬차이허우(徐才厚), 량광례(梁光烈), 랴오시룽(廖錫龍), 리지나이(李繼耐) 등이 장쩌민의 퇴임에 지지 선언했다. 9월 14일 4중전회 개최까지 하루가 남은 시점에서 열린 장쩌민의 퇴임을 토론하는 회의가 저녁 11시가 다 되어 끝이 났다. 결과는 장쩌민의 퇴임 확정이었다. 장쩌민의 최측근인 쩡칭홍(曾慶紅) 역시 대세의 흐름을 읽고 장쩌민의 퇴임에 찬성표를 던졌다. 덩샤오핑과 장쩌민 두 사람의 ‘자발적 퇴임’ 과정을 비추어 보아, 고위급 정치인의 퇴임 또는 유임을 결정하는 것은 본인의 발언이 아니다. 본인의 발언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공산당 고위층 파벌 간의 투쟁 형세와 정치적 수요 등으로 정해진다. 이렇게 봤을 때 왕치산은 19차 당대회 후에 퇴임을 할 것인지 유임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시진핑 진영과 장쩌민 진영의 정치적 투쟁의 발전 태세와 필요에 의해 결정된다. 왕치산 본인으로 놓고 볼 때, 그가 중공의 정치투쟁이 생사가 걸리는 위험한 투쟁임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부패와의 전투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기 전에는, 최소한 적의 총사령관 장쩌민과 쩡칭훙을 아직 처단하지 못한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퇴임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홍콩매체가 보도한 이른바 ‘공성신퇴(功成身退, 공을 이뤘으면 물러난다)’라는 표현은 우스워 보인다. 공도 이루지 못했는데 어떻게 퇴임을 논하는가? 중공 체제 내에서 일단 권력을 잃으면 그야말로 도마 위의 생선이 되는 격이다. 그러므로 숨이 붙어있는 한 왕치산이 자진 퇴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왕치산이 19차 당대회 이후 권력 핵심에서 물러나지 않는다면 단지 직위만 바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왕치산이 퇴임한다면 19차 당대회에는 아마 더 많은 시진핑 진영의 인사가 상무위원회와 정치국에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이는 당연히 왕치산의 퇴임과 맞바꾼 결과일 것이다. 19차 당대회 개막까지 1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왕치산의 퇴임, 유임과 관련된 더 명확한 소식이 앞으로 전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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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하반기 들어 중국 사회는 안팎으로 불안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먼저 대외적으로 한반도 정세의 악화와 함께 주변국과의 영토 분쟁으로 인한 군사 대치가 계속되는 중이다. 대내적으로는 잇따른 천재지변으로 사회 혼란이 지속되는 가운데 경제 발전 둔화, 고위층의 권력 투쟁 본격화 등 여러 문제가 떠오르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혼란의 이면에는 근본적인 원인이 자리하고 있다. 장쩌민 관련 세 가지 소문 최근 장쩌민과 관련한 세 가지 소문이 파다하다. 올해 베이다이허(北戴河) 회의가 개최되기 전인 7월, 중국 정계에서는 이상 현상이 연이어 발생했다. 쑨정차이(孫政才)가 갑작스럽게 실각했고,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중국 공산당 부성급(副省級) 이상의 관료만 참석하는 ‘청취만 가능하고 기록은 불허(只許聽, 不許記)’하는 비밀회의를 가졌다. 또 이후 시 주석은 정치국 상무위원 중 단독으로 네이멍구(內蒙古) 주르허(朱日和) 훈련 기지에서 진행된 대규모 열병식에 참석했다. 외부에서는 이 같은 행보를 두고 시 주석이 정변 미수를 철저히 파괴하거나 예정된 정변 음모를 타파하기 위한 의도라고 분석했다. 8월 18일 중국 공영방송 CCTV는 총 6회에 걸쳐 정치평론 특집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특히 1회에는 시 주석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 등장했다. “그 어떠한 조직과 개인도 ‘헌법과 법률의 특권(憲法法律的特權)’을 넘어설 수 없으며, 이를 위반할 경우 책임 추궁을 피할 수 없다.” 이어서 저우융캉(周永康), 보시라이(薄熙來), 궈보슝(郭伯雄), 쉬차이허우(徐才厚), 링지화(令計劃), 쑤룽(蘇榮) 등이 심사, 조사 받는 장면을 보여줬다. 저우융캉, 보시라이, 궈보슝, 쉬차이허우, 링지화 등은 모두 시 주석에 대항해 장쩌민의 정변 계획에 참여했던 인물들이다. 이로 인해 특집 프로그램이 장쩌민을 겨냥했음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베이다이허 회의가 끝난 직후 친베이징(北京) 성향의 해외 중국어 언론들은 연일 장쩌민의 ‘원로 정치 간섭’을 직접적으로 비난했다. 8월 14일자 한 기사에서는 ‘원로 지도자’에 대한 시진핑의 ‘15자 방침’(十五字方針, 영향력 경계, 대우 제한 등 포함)이 거론되며 장쩌민을 지명하기까지 했다. 중국 정계와 관련된 위 세 가지 소식은 약속이나 한 듯 장쩌민을 가리키고 있다. 특히 시진핑의 말, “그 어떠한 조직과 개인도 ‘헌법과 법률의 특권’을 넘어설 수 없으며, 이를 위반할 경우 책임 추궁을 피할 수 없다”에 비추었을 때 이 사실은 더욱 명확해진다. 즉 이 기준에 따라 책임 추궁을 할 경우, 가장 먼저 추궁당해야 할 타겟은 당연히 장쩌민인 것이다. 장쩌민, 많은 악행 법망에서 벗어나 장쩌민은 중국의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고 파룬궁(法輪功) 단체에 대해 대규모 박해를 가했으며, 무려 18년 동안 지속해왔다. 박해는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장쩌민은 법률 체계를 초월한 파룬궁 박해 전담 기관인 ‘610 판공실(610辦公室)’을 조직해, 국가 인력 자원을 통해 중국의 수많은 민중을 박해하고 살해했다. 이는 중국의 법제, 경제, 사회 윤리 등에도 심각한 손상을 입혔을 뿐만 아니라 공산당원과 중국 국민까지 박해에 참여시켜 무고한 사람들이 죄를 짓도록 만들었다. 장쩌민은 여러 방면에서 악행을 저질렀으나 법망을 피해나가 현재까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장쩌민의 박해로 인해 파룬궁 수련자들은 수감되거나 교화 노동에 동원됐으며 징역, 고문 등으로 고통 받았다. 심지어 살아있는 상태에서 장기를 적출당하기도 했다. 수련자들은 반인륜 범죄와 집단학살 및 고문 등의 혐의로 장쩌민을 고소했다. 현재까지 20여 만 명의 파룬궁 수련자 및 그 가족들이 중국 공산당 최고검찰원과 최고법원에 장쩌민의 위법 사실을 고발하는 데 참여했다. 장쩌민의 '두 가지 간사함과 두 가지 거짓(二奸二假)’은 모두에게 알려진 사실이다. 장쩌민 본인과 그의 친부는 친일 부역 세력으로 민족을 배신했다. 또 장쩌민은 주석 재임 중 러시아 첩보 기관과 협력하여 중국의 영토를 매각한 전력이 있다. 그는 집권 시절 부패를 방치하고 부패로 국가를 다스렸으며, 금전으로 관원들을 매수하여 범죄에 동참시켰다. 장쩌민은 중국 공산당 부패의 우두머리로, 그의 가족 또한 당내에서 가장 부패한 권력자 일족 중 하나다. 장쩌민은 중국 최대 불안정 요소 과거 장쩌민은 헌법과 법률을 초월하는 권력을 행사해왔다. 현재는 중국의 최대 불안 요소로 떠오르고 있다. 첫째, 장쩌민의 파룬궁 박해로 파생된 일련의 결과들이 중국에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법치는 사회·경제 발전과 안정을 유지하는 기본 조건이다. 파룬궁 박해를 중단하지 않고는 법치를 실현할 수 없으며, 사회와 경제 등 모든 질서를 정상적으로 운용할 수 없다. 즉, 시진핑이 주장해온 ‘의법치국(依法治國·법에 따른 통치)’은 공허한 이상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장쩌민의 파룬궁 박해와 관련된 악행이 추궁되지 않는다면, 중국 공산당의 박해 기구는 계속 운영될 뿐만 아니라 중국 사회에 도덕적 타락이 지속되면서 종국에는 안정을 찾지 못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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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19대)를 앞두고 왕치산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의 거취 문제와 관련해 중국공산당(이하 중공) 고위층 내에서 벌어졌던 권력투쟁이 막을 내리고 있다. 최근 중국 관영언론의 잇따른 보도에 따르면 왕치산의 19대 유임은 유력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수개월간 ‘왕치산 끌어내리기(倒王)’에 전력을 다해온 장쩌민파가 패배했음을 뜻한다. 중국공산당 내부 소식 전달 19대를 앞두고 장쩌민파(이하 장파)는 시진핑의 ‘반부패 칼잡이’로 불리는 왕치산을 제거하는 데 집중해왔다. 반부패 개혁의 주요 청산 대상인 자신들의 집단을 보호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몇 개월간 장파는 해외언론과 스파이를 동원해 ‘왕치산 끌어내리기’ 작업을 지속적으로 벌여왔다. 중공의 정치 운영체제상 해외언론이 폭로하는 중공 고위층의 내막과 스캔들은 당사자의 정치적 지위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문제는 폭로 대상의 정치적 라이벌이 이러한 뉴스를 빌미로 당내 권력투쟁에 사용한다는 것이다. 현재 중공은 내우외환(內憂外患)에서 비롯된 정치적 불안정과 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내부 정치체제는 운영에 있어 그 자체로 연속성과 안정성을 유지하며 외부의 위험요인을 차단한다. 즉 이미 설계된 바에 따라 내부 체제는 관성적으로 작동한다. 이는 ‘왕치산 끌어내리기’에도 해당된다. 해외 매체나 SNS를 통해 전파되는 폭로, 스캔들에 대해 일부 사람들은 격분할지 모르지만 결국 인터넷 상에서 잠깐 반짝하는 해프닝에 지나지 않는다. 정보를 접하는 대다수는 중공 내부의 정보전달과 보고체계가 폐쇄적이고 기형적이며 매우 엄격한 절차에 따라 이뤄진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시진핑, ‘왕치산 끌어내리기’에 대응 9월 5일, 중국 관영언론은 왕치산의 후난(湖南)성 시찰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특히 정치국 위원이자 중앙조직부장인 자오러지(趙樂際)가 동행했다는 점이 주목을 끌었다. 홍콩 빈과일보(蘋果日報)는 사설을 통해 이번 순시의 규모가 엄청났으며 중앙정치국위원 겸 중앙조직부장 자오러지가 동행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같은 시기 각각 산시성과 허베이성을 시찰한 리커창 총리와 류윈산 정치국 상무위원은 다른 정치국위원을 동반하지 않았다. 이 사설에 따르면 왕치산과 자오러지는 이번 공식적인 순시를 제외하면 그동안 동행한 사실이 전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자오러지가 개인적인 이유로 이번 시찰에 동행했다기보다 고위층 간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왕치산 편에 가담하기 위한 행동이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9월 6일, 왕치산의 장인인 야오이린(姚依林) 탄생 100주년 좌담회가 베이징에서 열렸다. 좌담회는 왕치산을 지지하는 세력들로 대성황을 이루었다. 시진핑 주석의 ‘대내총관(大內總管)’ 리잔슈(栗戰書)가 주최하고 리커창, 왕치산, 류윈산, 장가오리 등 4명의 정치국 상무위원과 자오러지 중앙조직부장 및 정치국위원, 양징 국무위원 겸 국무원 비서장이 참석했다. 중국 관영언론은 “야오이린의 기념행사가 상당한 규모를 자랑했으며, 이 같은 활동에 상임위원이 네 명이나 자리하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고 보도했다. 후야오방(胡耀邦)의 기념행사에 7명의 상임위원이 모두 출석한 것을 제외하면 18차 당대회 이후 사망한 지도자 10명에 대한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는 조촐하게 치뤄졌다. 완리(萬裏)의 행사에는 상임위원 3명, 류화칭(劉華清)이 2명으로, 나머지는 모두 한 명만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왕치산은 가족 18명과 함께 등장해 고위층과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이는 자신을 둘러싼 부정적인 소문에 대한 간접적인 반격으로 풀이된다. 9월 7일, 5부작 정치다큐멘터리 '순시이검'(巡視利劍·순시는 날카로운 검)이 관영 중앙텔레비전방송(CCTV)에서 방영됐다. 이 다큐에는 이미 낙마한 왕민(王瑉), 우창순(武長順), 황싱궈(黃興國) 등 20여 명의 관료들이 등장했다. 특히 이날 방영한 1회에서는 시진핑 주석이 중기위의 순시를 “국지이기(國之利器), 당지이기(黨之利器)”라고 말하는 장면이 화제를 모았다. 한편 시 당국은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시 주석이 지난 5년간 펼친 반부패 운동과 그 정치업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19대에서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또 왕치산이 반부패 운동에서 이뤄낸 성과를 알리고 이후 진행할 심도 높은 반부패 활동에 대한 동력을 마련했다. 이는 왕치산의 19대 유임을 알리는 신호로 보인다. 시진핑, 왕치산 손잡고 쿠데타 진압? 중공 19차 당대회 전 고위층에서 벌어졌던 사건 중 외부를 가장 놀라게 했던 것은, 쑨정차이 충칭시 서기 겸 정치국위원, 팡펑후이(房峰輝) 군사위원회 위원 겸 연함참모부 참모장과 장양(張陽) 중앙군사위 정치공작부 주임의 실각이었다. 이들의 갑작스러운 실각 과정은 시 주석이 그동안 단계적, 안정적으로 반부패 운동을 추진해온 모습과는 큰 차이를 보였다. 즉 형세가 무척 급박하며 돌발적인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갑작스럽게 내린 결정으로 보이는 것이다. 왕치산의 이번 공개순시 역시 군의 실세였던 팡펑후이와 장양이 낙마한 뒤에 이뤄졌다. 이는 중국-인도 국경분쟁이 해소된 직후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들을 종합하면 시진핑과 왕치산이 연합해 장쩌민 세력이 일으킨 쿠데타를 좌절시킨 것으로 추측된다. 왕치산의 19대 유임을 알리는 중국 관영언론의 신호는 분명해졌다. 이로써 유임이 유력한 왕치산이 언제, 어떻게 쩡칭훙(曾慶紅)과 장쩌민을 체포할지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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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6일, 팡펑후이(房峰輝·66) 전 연합참모부 참모장이 해임되고 리쭤청(李作成·64) 육군 사령관(상장)이 그 자리에 옮겨왔다. 당시 중화권 해외 매체에서는 팡펑후이가 조사를 받는다는 소식을 연일 쏟아내고 있었다. 이어 장양(張陽·66) 중앙군사위 정치공작부 주임과 이미 퇴직한 두헝옌(杜恆岩) 중앙군사위 정치공작부 부주임도 조사를 받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팡펑후이는 줄곧 유력한 차기 군사위 부주석으로 물망에 올랐다. 팡펑후이의 갑작스런 면직은 비정상적인 이직으로 앞전의 충칭(重慶)시 서기를 지낸 쑨정차이(孫政才) 정치국위원의 경우와 매우 흡사하다. 7월 15일, 쑨정차이가 돌연 면직되고 10일 후인 24일 중국 정부는 정식으로 쑨정차이의 실각을 공표했다. 쑨정차이의 실각은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또 하나의 관례를 타파한 행보로 장쩌민(江澤民) 집단에 대한 사정 강도가 한층 심화된 상징이다. 장쩌민파의 후계자를 해임시킴으로서 덩샤오핑(鄧小平) 시대로부터 이어온 격대로 후계자를 지적하는 관습이 깨진 것이다. 그렇다면, 팡펑후이는 쑨정차이의 군대 버전이 될 수 있을까? 내달 18일에 열릴 제19차 당대회를 앞두고 팡펑후이의 직위해제를 통해 보여주는 군대의 지각변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19차 당대회 전 시진핑이 중공 내부에서 직면한 가장 큰 위협은 장쩌민파가 끊임없이 추진하는 정변 움직임이다. 앞서 쑨정차이가 낙마한 이유 중 하나는 보시라이(薄熙來)와 왕리쥔(王立軍)의 잔존세력을 철저히 청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정치 투쟁의 화약 냄새가 농후하다. 팡펑후이가 면직된 후의 소식도 이와 흡사하다. 매체 보도에 따르면, 이 3명의 핵심 요직에 있는 상장에 대한 조사는 시진핑 주석이 직접 명령한 것으로 이미 군에서 실각한 ‘궈보슝(郭伯雄), 쉬차허우(徐才厚)의 잔존세력에 대한 전면적이고 철저한 ’청산’을 최고조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보도에서는 팡펑후이가 궈보슝 전 중앙군사위 부주석과 동향이자 옛 부하이고, 장양은 전 군사위 부주석 쉬차이허우의 직계라는 것을 밝혔다. 항간에 도는 소문은 더욱 심각하다. 2014년 궈보슝이 조사를 받을 때 팡펑후이는 베이징의 한 식당에서 궈보슝의 가족들과 식사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호언장담했다고 한다. “누구든지 감히 노수장(老首長)을 건드리면 내가 한방에 총살해 버리겠다.” 장쩌민은 20년간 군을 장악했고, 쉬차이허우와 궈보슝 그리고 그들이 선발한 인사들이 군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어 후진타오(胡錦濤)는 집권 시기 실권을 빼앗겼다. 시진핑이 주석으로 취임한 5년 동안 장쩌민 세력이 여전히 권한을 행사해 통제가 어려웠으며 여전히 장쩌민 세력이 권력 주변을 도사리는 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처럼 시진핑은 장쩌민의 잔존세력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팡펑후이의 면직과 잇따른 낙마를 시작으로 군에 지각변동이 일어나면서 군대의 육군·해군·공군의 총사령관이 모두 교체됐다. 이는 사실상 시진핑 주석이 19차 당대회 전에 군대 내의 장쩌민 세력을 완전히 청산하려는 행보이며 또한, 시진핑이 진정으로 군권을 장악하겠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둘째, 중공 역사상 정치 투쟁에서 군권 장악은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이다. 장쩌민 세력이 시진핑 주석과 정면 대항 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들이 군대 내에 서리서리 얽혀있고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시진핑 주석이 인도와 외교 접촉 시 발생한 군대의 비정상적인 움직임과 최근 일단락 된 중국-인도 국경 분쟁 역시 장쩌민의 군대 내 세력의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다. 19차 당대회 전 시진핑 주석의 이러한 행보는 19차 당대회 이후 군의 힘을 기반으로 당내에서 장쩌민 세력에 대한 반부패 사정 작업을 계속할 것임을 보여준다. 이는 최근 장쩌민 세력이 해외에서 시진핑의 오른팔인 왕치산(王岐山)의 부정적인 소식을 대거 폭로한 데 대한 강력한 응답이다. 셋째, 관례대로 한다면 19차 당대회 개막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시진핑 주석이 군대에 이렇게 강력한 액션을 취할 필요는 없다. 팡펑후이가 걸려도 19대 폐막 후 정상적으로 퇴직시키거나 연착륙 시키거나 혹은 낙마시키면 된다.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팡펑후이를 면직시키고 외신을 통해 낙마 소식을 내보내는 데는 필히 고위층과 군대에 큰 사건이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시진핑 주석이 19대 전에 군대에 칼을 들이대는 행보는 정적에게 강경한 자세를 보이는 것이다. 또한 19대 이후 시진핑 주석이 중대한 정치적 행보를 취할 것임을 예시한다. 따라서 팡펑후이가 ‘군에서의 쑨정차이’가 될 가능성은 거의 기정사실화 된 것이다. 남은 것은 19대 전 혹은 19대 후에 팡펑후이의 낙마 소식을 공식 발표하는 것이다. 만약 19대 전 팡펑후이의 낙마 소식이 공식 발표된다면, 쑨정차이와 팡펑후이가 나란히 낙마함으로써 19대 이후 중공 고위급에 거센 폭풍이 몰아칠 신호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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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주석은 취임 후 5년 동안 대대적인 반부패 운동을 통해 장쩌민파를 중심으로 한 중국 공산당(이하 중공)의 부부급(副部級, 차관급) 이상의 고위급 부패 관료 200여명과 저우융캉(周永康), 쉬차이호우(徐才厚), 궈보슝(郭伯雄), 링지화(令計劃), 쑤롱(蘇榮) 등 정부국급(正副囯級) 고위관료를 숙청했다. 또한 시진핑 주석이 군 개혁을 통해 군권을 점차 장악하고 시진핑 진영의 인사들이 지방 성시의 요직에 올랐으며 장쩌민 세력은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올해 들어 시진핑의 반부패 운동은 장쩌민파의 끊임없는 저항에 부딪쳤다. 제 19차 당대회가 다가오면서 고위층의 권력 투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동시에 시진핑 당국은 국제적으로도 여러 위기에 봉착한 상황이다. 북한 문제, 인도 문제 역시 더욱 심화되고 있고 미중 관계는 교착 상태에 빠져 있다. 왜 시진핑 당국은 이와 같은 문제에 봉착하게 된 것일까? 시진핑의 반부패 운동을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일까? 우선 북한의 김정은부터 논해보도록 하자. 김정은은 정신이상자일까? 지난 몇 개월간 한반도 정세는 국제적 이슈로 뒤덮었다. 김정은이 연속적으로 미사일을 발포하고 핵실험을 감행하는 등 외부에서는 그가 이성을 잃어 거의 미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국제사회의 비난과 미국의 강력한 무력 제재 경고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비이성적인 행동에는 개선된 것이 전혀 없다. 이는 스스로 제 무덤을 파는 것이라고 국제사회는 비난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사실상 북한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김정은이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미친 듯한 행동의 이면에는 치밀한 정치적 계산이 깔려있다. 현실적으로 보면 김정은의 이런 정치적 책략은 이미 효과를 얻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한반도 위기와 북한 문제의 본질은 사실상 중국과 미국 간의 정치적 힘겨루기이다. 북한과 중국은 공통적인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미국을 진정한 숙적으로 여기고 있다. 북한은 중공 정권이 미국과 지유세계에 대항하기 위한 도구이며 북한의 생사는 중공의 손에 장악되어 있다. 북한이 아무리 중공의 말을 듣지 않고, 심지어 서로 강한 적대심을 품고 있어도 중공 정권은 이 도구를 버리기 어려울 것이다. 김정은은 미국이 북한에 무력 제재를 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베이징을 통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이 중국 최고위층과 북한 문제에 대해 합의를 이루지 않는 이상 북한이 미국의 마지노선을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미사일 발사, 핵실험 같은 행위로는 미국이 군사적 조치를 취할 수 없으며 단지 중국 당국에 압력을 넣는 수밖에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북한은 계속해서 미사일을 발사하고 핵실험을 하는 도전적인 태도로 미국을 분노케 하고 있다. 미국은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베이징 당국에 압력을 가하고 있다. 현재 트럼프가 중국에 무역 제재를 가하면서 중국과 미국 간의 무역 전쟁이 곧 시작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미중관계가 악화되는 조짐이다. 결국 현재 국제 정세는 김정은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북한 김정은 정권의 존재는 최소 두 가지 전제조건을 필요로 한다. 첫째, 국내 여론에서 반미 정서를 이용해 정권의 합법성을 얻어야 한다. 둘째, 중국에서 공산당 정권의 존재와 자원 공급이 필요하다. 북한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개선되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이 서로에게 반감을 가져야만 북한은 중공의 묵인 하에 계속해서 독재정권을 이어나갈 수 있다. 이 때문에 북한은 계속해서 미사일을 발사해 미중관계를 악화시켜 자신의 정권을 지키려고 한다. 이전에도 북한은 이러한 방식을 이용해 한국이 어쩔 수 없이 사드를 배치하게 만들어 한중관계를 악화시켰다. 김정은이 이런 모험을 거침없이 이어가는 주요 원인은 다음 한 가지를 굳게 믿기 때문이다. 김정은과 장쩌민파는 현재 시진핑 주석이 북한과 다소 거리를 두는 외교 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시진핑도 여전히 중국에서 공산당 정권을 포기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중공 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한 북한을 완전히 포기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김정은이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지금의 계획들을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김정은의 이런 책략이 효과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만약 미중관계가 한층 더 악화된다면 중공 내부의 좌파 세력과 장쩌민 세력은 힘을 얻어 결국 중국을 정치적으로 좌익 세력으로 돌려놓을 것이며 중국의 경제, 정치와 사회 역시 한층 악화되어 곤경에 빠지게 될 것이다. 시진핑의 중국내 위기 중국 관료 중에서 부패하지 않은 자가 없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장쩌민파와 내부의 기득이익 집단은 현재 공산당 체제 자체를 이용해 시진핑에 대항하고 있다. 시진핑의 반부패 운동에 저촉되는 것은 단순히 기득이익 집단과 장쩌민파 뿐만 아니라 중공의 근본적인 이익 역시 포함되어 있다. 중공의 부패는 체제적인 부패로서 중공은 거짓과 폭력에 의존해 통치해왔다. 폭력과 거짓이 사라진다면 중공 정권 역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중공 내부의 치열한 투쟁부터 국제 상의 북핵 위기까지 이어진 상황에서 시진핑은 현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곤경에 처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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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이 매년 여름에 개최하는 베이다이허(北戴河) 회의가 끝난 후, 곧바로 19차 당대회 정치국 상무위 명단과 관련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19차 당대회 정치국 상무위원과 관련해 여러 버전의 명단이 공산당 내부의 각 파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해외 언론들로부터 전해졌다. 이들 명단들 중 가장 이목을 집중시킨 것 중 하나는 왕치산 중앙기율위 서기의 유임 여부이다. 사실, 이런 소문을 퍼뜨리는 주요 목적 또한 왕치산을 겨냥한 것이다. 왕치산이 19차 당대회에 유임될지에 관한 여부는 그의 개인적인 정치적 퇴진 문제뿐만 아니라 시진핑(習近平)의 정치적 성패의 상징 역시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다음 두 가지 방면의 해석이 제기된다. 첫째, 이것은 시진핑 주석 취임 5년 이래 반부패의 성공 여부의 상징이다. 시진핑 취임 이후 집권 기간 중 가장 중요한 내용 중 하나는 공산당 내부의 반부패 ‘호랑이 사냥’이다. 중국 공산당의 부패는 체제적인 부패로 인해 이미 심층까지 스며들어 근절할 방법이 없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이때, 시진핑의 부패 척결과 탐관오리 처벌은 사회 대다수의 지지와 공감을 얻었다. 부패는 국가와 민중들의 이익에 큰 피해를 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시진핑 주석의 반부패 운동이 효과를 얻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시진핑을 위해 부패 척결 및 ‘호랑이 사냥’을 주도했던 인물이 바로 시진핑의 정치적 동맹인 왕치산이다. 왕치산은 5년간의 부패와의 전쟁에서 장쩌민(江澤民) 집단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당 내부 부부급(副部級·차관급) 이상 고위 관료 200여 명을 제거했다. 이에 해당하는 부국급(副國級·부총리 이상의 국가직) 이상 관료로는 저우융캉(周永康), 링지화(令計劃), 쑤룽(蘇榮), 쉬차이허우(徐才厚), 궈보슝(郭伯雄), 쑨정차이(孫政才) 등이 있다. 시진핑과 왕치산의 대대적 반부패 운동은 공산당 내부의 여러 기득권 집단의 이익을 가로막았다. 이로 인해 왕치산은 크고 작은 부패 관료들의 미움을 샀다. 장쩌민 집단과 청산 위기에 놓인 부패 관료들은 왕치산에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으며, 왕치산은 이로 인해 이들 세력의 보복과 공격 대상 1호로 떠올랐다. 19차 당대회를 앞두고 해외에서 보도되는 왕치산과 관련된 부정적 뉴스들은 시진핑과 왕치산의 정적이 왕치산을 공격하기 위해 취한 작전이라 볼 수 있다. 만약 이들 세력의 왕치산을 향한 공격이 성공된다면, 시진핑의 반부패 ‘호랑이 사냥’도 저지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왕치산이 19차 당대회에서 정치 무대를 완전히 떠난다면 이는 시진핑이 지난 5년간의 반부패 전쟁, 즉 시진핑의 정치적 성과를 부정하는 꼴이 된다. 때문에 이것이 현재 장쩌민파의 제1목표이다. 둘째, 왕치산 유임 여부가 19차 당대회 후 시진핑의 ‘부패와의 전쟁’의 지속 여부를 결정한다. 시진핑의 반부패 ‘호랑이 사냥’이 실행된 5년 동안 장쩌민 집단의 손에 있던 여러 권력이 회수됐다. 또한, 시진핑은 끊임없이 언론을 통해 ‘쏜 화살은 돌아오지 않는다(開弓沒有回頭箭)’ ‘반부패에 성역은 없다’ ‘반부패는 영원히 계속된다(永遠在路上)’ 는 신호를 보내왔다. 이런 행보들은 반부패 ‘호랑이 사냥’의 최종 목표가 장쩌민파의 쩡칭훙(曾慶紅)과 장쩌민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 때문에 장쩌민파도 쉴 새 없이 반격하며 어떠한 대가도 치를 ‘초한전(超限戰)’의 방식으로 저항과 정변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시진핑의 부패와의 전쟁을 주도한 왕치산이 실각하거나 퇴진할 경우, 시진핑이 지난 5년간 실행해온 반부패 전쟁은 중단될 것이고, 19차 당대회 이후 휴전 시기를 맞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면 중국 정국은 방향을 바꿔 정적과의 일시적 타협 및 정전 시기를 맞게 될 것이나, 종국에는 시진핑과 왕치산은 정적에게 제거될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곧 개최될 19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 인선 자체는 이제 더 이상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왕치산의 미래와 그의 정치 생명이 중국 정치의 향후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19차 당대회 이후 왕치산의 정치 행보는 다음 세 가지로 예상해 볼 수 있다. 첫째, 정치국 상무위에 유임하며 시진핑을 도와 반부패 활동을 계속한다. 이 경우 시진핑 주석의 반부패 활동이 심화될 것이며, 장쩌민 집단은 전멸하게 될 것이다. 쩡칭훙과 장쩌민 본인도 정리될 수 있으며, 청산의 첫 번째 증거로 장쩌민의 ‘삼개대표(三個代表)론’이 당장(黨章·당헌)에서 제거될 것이다. 둘째, 정치국 상무위에 유임하지는 않으나 반부패를 전담하는 국가감찰위(國家監察委)를 장악해 계속해서 반부패 활동을 주도한다면, 이는 그가 정치권력 핵심에 유임하는 셈이다. 이 경우, 정치국 상무위의 권력이 점차 약화되거나 정치국 상무위 배치가 달라질 수 있다. 그 결과로 장쩌민 세력에 대한 타격 효과는 첫 번째 경우와 동일하다. 셋째, 왕치산의 전면 퇴진이다. 이는 시진핑의 5년간 반부패 운동이 무위로 돌아감을 뜻하며, 시진핑과 왕치산 및 이들 진영의 인물들이 심각한 위기에 처했음을 암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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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중국은 다사다난한 시기에 직면해 있다. 공산당의 ‘후설’(喉舌·목구멍과 혀)이라 불리는 매체가 여전히 중국 공산당 정권을 두고 ‘형세가 매우 좋다’(形勢一片大好)며 선전하고 있지만 오늘날의 중공은 내부부터 외부까지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 국경지대의 긴장 고조와 국제적 압박 국제적으로 중국 공산당은 각종 압박을 받고 있다.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 한미연합 군사 훈련 강화, 댜오위다오(釣魚島) 영토 문제에 대한 일본의 강경한 태도, 베트남이 분쟁해역에서 석유 채굴을 선언함에 따라 중국-베트남 양국 관계의 악화 조짐, 새로 당선된 몽골 대통령 칼트마 바툴가(Khaltmaa Battulga, 54)가 전임과 달리 중국-몽골 관계에 어두워 양국 외교 관계의 전망이 우려되는 등 다수의 문제가 연일 발생하고 있다. 최근에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에 대한 무역제재를 결정하기도 했다. 주된 원인은 중국 공산당이 북한의 핵 개발 계획을 제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중·미 무역 전쟁이 일어난다면 중국 경제는 물론 중국 공산당 정권도 큰 충격과 압박을 받을 것이다. 중국과 인도의 국경지역에서는 인도 군대가 중국 국경까지 진입해 양국 군대가 수일 동안 대치를 이뤄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지정학적 관계로 중국과 인도가 무력충돌, 더 나아가 전쟁까지 발발한다면 미국과 러시아는 인도에 유리한 입장을 취할 가능성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한반도 문제에서 중국은 오랫동안 김 씨 정권을 서방 자유세계에 대항하는 도구로 이용해왔다. 하지만 북한의 김정은도 이러한 중국의 태도를 이용하고, 변덕이 심한 언행을 보이는 등 언제든지 반목할 가능성이 있어 중·북 관계에도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지난 6월 호주 당국의 주요 언론에서는 중국 특무(스파이)가 호주에서 대규모로 활동하고 있다고 밝혀 외부사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중국이 호주의 주권, 국토 안전 및 정치체계에 큰 피해를 주었기 때문이다. 고위층의 권력 투쟁 몇 달 간 시진핑(習近平) 당국은 반부패 사정 과정에서도 심각한 어려움에 부딪쳤다. 장쩌민(江澤民) 계파가 자원을 총동원해 다양한 방식으로 정변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해외 언론 시스템을 이용하여 왕치산(王岐山)을 끌어 내리고 시진핑의 반부패척결을 막으려는 시도를 일삼았다. 중국 공산당의 역사는 내부 투쟁과 권력 다툼을 동반했다. 이러한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형국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2012년 시(習) 정권의 출범 이후, 시진핑은 장쩌민 계파와 치열한 정치적 투쟁을 벌였다. 이 국면은 올 가을 열리는 ‘19차 당대회’를 기점으로 한층 안정된 모습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 고위층의 치열한 정치투쟁 과정에서 장쩌민 계파는 결국 권력을 잃었다. 이들은 세력이 약해진 이후 청산될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는 국가 자원을 총동원해 경제 정변을 포함한 다양한 방식의 저항을 시도했다. 주가 폭락 등 중국 경제를 파멸시키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자신들은 살아남겠다는 심산이다. 그러나 이러한 중국 고위층의 정치투쟁은 사실상 중국과 중국 민중들에게 가장 큰 피해를 안기고 있다. 중국 고위층은 권력 투쟁 중에서도 정권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와 민중에 대한 통제를 한층 더 강화했다. 또한 끊임없는 거짓말과 폭력으로 중국 사회 통치를 이어가고 있다. 이로 인해 중국 사회의 최하층 민중들의 원성은 나날이 커져만 가고 있다. 중국 사회는 오늘날 화산구에 놓여있고, 중국 공산당의 통치 또한 종결의 임계점에 도달한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정권 창립 때부터 줄곧 합법성에 대한 의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념적으로 철저하게 파산했다. 개혁 개방 이후 축적한 정치적 신용은 거의 소실된 상태이다. 특히 30여 년 동안 인권 유린, 환경 파괴와 자원의 과한 소모를 감행한 대가로 경제발전은 이미 그 한계점에 도달하고 말았다. 오늘날 중국은 극심한 신뢰 위기와 합법성에 대해 위기를 맞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왜 사면초가에 놓여있나 국내에서 해외까지, 중국 공산당 정권은 이미 사면초가의 궁지에 내몰렸다. 호시절을 모두 보내고 내우외환(內憂外患)에 직면했다. 중국 공산당의 대변인 역할을 하는 선전 매체는 여전히 미국을 포함한 주변 국가와 국제사회에서 오는 압력에 대해 ‘반중세력’(反華勢力)으로 선동하고 있다. 공산당 정권은 언론을 도구로 이용해 중국과 중국인들에게 거짓 선전을 하고 있다. 결코 모든 국가들이 중국을 적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국제사회는 중국 공산당 정권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적으로 삼고 있다. ‘반중(反華)’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반공(反共)’만 존재할 뿐이다. 지난 100여 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공산주의 열풍이 일어난 곳에는 전쟁, 기근, 학살과 공포가 동반했다. 공산주의 운동은 수천 년 동안 쌓아온 인류문명을 파괴했고, 1억 명의 인구는 비정상적인 죽임을 당했다. 중국 공산당은 현재 세계에서 몇 개 남지 않은 공산주의 정권 중 하나이다. 중국 공산당은 세계를 파멸할 수 있는 핵무기를 비롯한 막강한 기술력과 국력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서방 자유세계에 전면적으로 침투 가능한 ‘대외선전’ 등 소프트 파워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국제사회가 중국 공산당을 근본적으로 경계하는 것이다. 전통을 회복해 중국을 새롭게 탄생시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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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인도 군대가 국경지역에서 두 달 가까이 대치를 이어나가면서 물리적 충돌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양국이 팽팽한 군사 대치를 유지하는 가운데 장외 싸움도 점점 격화되는 양상이다. 중국의 경우 외교부·국방부·인도 주재 중국 대사관·신화통신·인민일보·해방군보 등 국가 부위(部委)와 국가 기관 총 6개를 통해 이번 국경분쟁 사건과 관련 인도 측을 강하게 비판했다. 또 관영방송 CCTV를 통해 ‘중국은 이미 할 만큼 했으니 인도군은 조속히 철수하기 바란다’며 경고 메시지를 내보냈다. 이에 인도 역시 ‘전쟁 준비는 이미 끝났다’고 맞받아쳤다. 이러한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중국은 과연 인도와 전쟁을 치를 수 있을까? 시진핑은 인도와 개전할 수 있을까? 아래 네 가지 시각을 통해 이번 사태를 분석해 보도록 하자. 국제적 시각 냉전이 막을 내린 1989년부터 21세기가 시작하기까지 세계는 116번의 군사적 충돌을 겪었다. 그중 89번은 국가 내부적인 이유로 벌어졌고 20번은 외국의 간섭으로 인한 것이었다. 지금 세계 정치 구도와 세력 균형 상 세계대전이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더군다나 양국 간에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크게 세 가지 원인에서 기인한다. 첫째,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세계는 새로운 국제적 정치 구도를 형성, 세력 균형을 유지해 왔다. 특히 미국을 비롯한 영국·프랑스·독일 등 유럽 국가와 한국·일본 등 아시아, 태평양 국가가 속한 자유 민주 진영은 세계의 흐름을 주도하는 힘으로서 성장했다. 이 같은 막강한 정치, 경제, 군사동맹의 존재로 인해 개전 시 감당해야 할 대가와 위험 부담이 매우 커졌다. 둘째, 국제화 시대에 접어들며 국가의 역할과 개념이 점차 바뀌고 있다. 세계 정치에서 경제문제는 갈수록 중요해지고, 정보통신과 교통기술의 발달로 시장경제체제의 역할은 커졌다. 일부 다국적 기업은 이미 국가에서 독립해 운영하고 있다. 무엇보다 과거에는 전쟁으로 해결했던 국가 간의 갈등이 지금은 경제적 수단을 통해 봉합할 수 있게 됐다. 따라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점점 감소해 왔다. 셋째, 첨단기술·전자통신 시대와 인터넷 시대의 개막으로 인해 세계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국가와 단체 간 긴밀한 연락이 가능해지면서 소규모 교전만으로도 국제 정치적 세력 균형이 무너질 수 있게 됐다. 이는 전 세계적 재난을 불러올 수 있으므로 미국과 유럽연합은 전쟁의 조짐만 보이면 적극적으로 제지해 왔다. 인도의 시각 외교는 내정의 연속이다. 강경과 ‘냉혈’한 지도자로 불리는 인도 모디 총리는 연임 후 인도경제를 급성장시켜 왔다. 이 덕분에 민중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는 모디 총리가 충돌사태나 전쟁으로 국내의 세력을 결집시킬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안정적 경제발전은 각 나라 정책의 주요 현안이다. 인도의 경우 종교갈등, 인종갈등 등 국내 문제가 지속되고 있다. 빈곤 인구까지 상당하여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안정적인 국제 환경 조성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현 상황에서 인도가 중국과의 전쟁을 감당하기에는 어려울 것이다. 국경과 영토분쟁은 역사, 정치, 경제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정치와 경제가 우선 순위일 때 영토문제는 자연히 뒤로 미뤄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여러 문제가 산발적으로, 보여주기 식으로 제기되고 있다. 중국과 인도 국경에서 중국군과 인도군이 일렬로 의자에 앉아 마주 보는 모습은 사람들로 하여금 안도감을 불러일으키며 전쟁에 대한 불안감을 불식시켰다. 중국과 인도, 두 나라는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첫째, 양국 모두 문명의 탄생지에서 세워진 고대국가였다. 둘째, 인구 대국이다. 셋째, 개발도상국이다. 마지막으로 인도군이 열병식에서 보여줬던 퍼포먼스와 중국군의 반듯하고 각진 이불 정리를 꼽을 수 있다. 기회가 된다면 양군이 열병식 퍼포먼스와 이불 정리로 겨뤄도 괜찮을 것 같다. 중공의 전체적인 시각 중국 공산당(이하 중공)은 전쟁을 원하는가? 중공과 이웃 나라와의 분쟁은 사실상 영토 확장과 무관한 문제이다. 그들은 지금까지 영토에 관심을 기울인 바 없었다. 대신 마오쩌둥 때부터 장쩌민까지 대량으로 국토를 외국에 팔아왔다. 따라서 그다음 수순으로 중공이 전쟁을 일으킨다면 고립무원의 경지에 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 유럽, 그리고 러시아까지 포함해 모두 중공의 편에 서지 않을 것이다. 또한 오늘날 중국의 국정과 군사력은 전쟁을 감당하기에 매우 미달된 상태이다. 국내와 국제에서 펼치는 중공의 움직임 일체는 정권유지와 정권안정을 도모하기 위함이다. 그 결과 오늘날의 중공 정권은 외우내환(外憂內患)의 국면에 처했다. 중공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그 정권은 이미 인류의 공해가 됐다. 세계는 중공을 인류의 재난과 최대 위협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중공 정권은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중공 내부의 통치 위기는 한층 심화되고 외부 상황 역시 사면초가에 직면했다. 오히려 전쟁이 중공의 해체를 앞당기는 도화선이 될 수도 있다. 중공은 겉으로는 강해 보이나 속은 약하며, 허세만 부릴 뿐 내심은 전쟁에 대한 공포로 가득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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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국은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위기와 혼란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초래한 가장 큰 이유는 두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수십 년 동안 이어온 중국 공산당의 잔혹한 통치를 꼽을 수 있다. 공산당은 중국을 말세로 이끌며 중국인에 대한 전방위적인 파괴를 감행해왔다. 또 다른 하나는 지난 20여 년 동안 중국 사회를 지배해온 장쩌민(江澤民)파이다. 특히 그들이 시진핑(習近平)에게 남긴 정치적 유산은 사회 전면에 불거지며 큰 문제가 되어 왔다. 그렇다면 장쩌민이 시진핑에게 남긴 주요한 정치적 유산은 무엇일까? 이 유산은 지금까지 두 가지 현상으로 나타났다. 관료사회의 전면적인 부패와 타락 오늘날 중국 관료사회의 부패 정도는 거의 부패하지 않은 관료가 없을 만큼 악화됐다. 이러한 대규모, 제도적 부정부패는 장쩌민이 집권한 뒤부터 만연해왔다. 정치권력과 자본의 결합은 장쩌민이 추진한 경제발전 모델의 핵심 중 하나였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방임하고 그 대가로 그들의 정치적 지지를 얻어왔다. 그 아들 장몐헝(江綿恆)은 '중국제일탐관(中國第一貪)’으로 불릴 뿐만 아니라 장파의 주요 구성원 저우융캉(周永康), 쩡칭훙(曾慶紅), 류윈산(劉雲山) 등의 가족은 중국 국가의 재산과 비길 만큼 부유하다(富可敵國). 이러한 장파의 정책 하에 공산당의 수천만 관료들은 극도로 부패해 제도적, 체계적, 공개적 부패를 형성해왔다. 또한 당·정·군(黨政軍) 각 계통에서 양성된 부패 관료들이 장파를 구성했으며 정치계를 전면부패의 암흑 시기로 몰고 갔다. 장쩌민의 악랄함은 파룬궁 박해 사건에서 잘 드러난다. 그들은 파룬궁 박해를 지속하기 위해서 줄곧 관리를 뽑을 때 ‘죄가 있어야 자리가 있다(有罪才有位)’라는 채용 표준을 사용해왔다. 관리들 중 파룬궁 박해를 주도해 중죄를 범한 자, 즉 박해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자만을 장쩌민은 안심하고 채용했다. 이들은 장쩌민파와 ‘운명공동체’가 되어 한배를 탈 수 있었고 그 결과 모든 장파의 구성원들이 파룬궁 박해에 직접 가담했다. 파룬궁 박해는 세계 최대의 인권 탄압 장쩌민이 시진핑에 남긴 가장 큰 정치적 유산은 바로 파룬궁 박해다. 18년 동안 지속된 쩐(眞), 싼(善), 런(忍) 신념에 대한 박해는 21세기 들어 발생한 전 세계 최대 규모의 인권 탄압이었다. 이로 인해 중국은 국제사회의 비난을 지속적으로 받아왔다. 더욱 심각한 것은 파룬궁 박해로 중국사회의 경제, 도덕 등 사회 전반의 위기가 가속화됐다. 사회 도덕적 측면에서 장쩌민은 중화민족의 도덕을 파괴해왔다. 장파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파룬궁 수련자들에게 신앙 포기를 강요했고 ‘분신자살’을 조작해 거짓으로 사람들의 원한을 선동했다. 또 국가 정책을 통해 전국 국민들을 파룬궁 박해에 참여하게 했다. 이는 중국 사회의 도덕적 추락을 가속화시켰고 사람들의 도덕 감정은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지고 말았다. ‘경제를 파탄시키고 명예를 실추시키며 육체를 소멸시킨다’ ‘때려죽인 것은 자살로 위장한다’와 같은 파룬궁 박해기구의 행동강령은 중국 법제 체제를 완전히 파괴했다. 반부패와 정변은 계속되고 있다 2012년에 집권한 시진핑은 장쩌민이 남긴 두 가지의 정치적 유산을 짊어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어왔다. 두 가지 유산 혹은 화근은 현재까지 중국 사회의 위기를 가속화시켰다. 시진핑은 최근 5년 동안 정상적인 집권을 위해 호랑이(부패관료) 사냥을 통해 장파를 척결하기 시작했다. 장쩌민파 역시 이에 불복, 반격을 감행해왔다. 애초 시진핑의 대체자로 여겨졌던 보시라이(薄熙來)가 의외로 낙마하자 장파는 수년간 암살·폭동·난국·금융정변 등 다양한 방식으로 시진핑과 초한전(超限戰)을 벌여왔다. 지난 5년간 장파 소속 고위급 간부 100여 명이 숙청당했지만 장파는 정변을 주도하며 끊임없이 대항했다. 시진핑과 왕치산(王岐山)은 “반부패는 계속된다”고 말했지만 이에 저항하는 정변도 “계속되고 있다.” 시진핑은 장쩌민 유산을 제거해야 시진핑은 왜 장쩌민의 정치적 유산을 떨쳐내야 하는 것일까? 최근 중국 공산당 19차 당대회를 앞두고 충칭(重慶)시 당서기 쑨정차이(孫政才)가 갑자기 낙마했다. 이로써 그는 18차 당대회 이후 낙마한 현역 정치국 위원 중 첫 번째 인사가 됐다. 이는 반부패 운동의 대상이 지위고하를 막론, 승격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자 신호탄이었다. 하지만 시진핑의 권력이 한층 확고해지는 상황에서조차 장파는 끊임없이 대항하고 있다. 근본 원인은 시진핑과 왕치산의 반부패 운동이 장파의 이익뿐만 아니라 당 내부의 집단 이익을 건드렸다는 데에 있다. 부패 관료들 역시 시진핑에 대항하거나 태업으로 반부패 운동을 방해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는 장파와 당의 부패 집단이 왕치산을 제거하려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지난 몇 달 동안 장파의 특무(스파이)가 해외 매체를 이용해 왕치산을 비난한 것에서도, 시진핑의 반부패 운동 선봉장 왕치산을 실각시키려는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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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둥베이(東北) 지역은 헤이룽장(黑龍江)·지린(吉林)·랴오닝(遙寧) 등 3성(省)으로 이루어진 지역으로, 이 같은 개념은 근대에 형성되었다. 중국의 지정학적 분류에 따르면 이 지역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다. 따라서 장쩌민(江澤民)은 집권 후 자신의 세력을 통해 장기간 둥베이 지방을 장악하는 데 주력해왔다. 따라서 장파의 주요 인물들이 이 지방의 요직을 거쳐 간 바 있었다. 지린성은 장더장(張德江)을 필두로 ‘지린방(吉林幫)’을, 랴오닝 성은 리장춘(李長春), 보시라이(薄熙來)를 우두머리로 하는 랴오닝방(遼寧幫)을 형성했다. 이들 집단은 장쩌민을 한결같이 따랐고,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반부패 호랑이 사냥 과정에서 줄곧 저항, 난국을 조성해왔다. ‘랴오닝방’ 제거 장파가 장악한 전국 여러 성(省)·시(市) 중 랴오닝성은 세력의 결집지로서 대표성을 띠고 있다. 제18차 당대회 이후 랴오닝성은 시진핑 당국의 반부패 운동 과정에서 주요 청산 대상으로 떠올랐다. 2017년까지 랴오닝방에 속한 여러 인사들이 실각했다. 왕민 전 랴오닝성 서기, 왕양(王陽) 전 랴오닝성 인민대표대회 상무위 부주임, 정위쭤(鄭玉焯) 랴오닝성 인민대표대회 부주임, 쑤훙장(蘇宏章) 전 랴오닝(遼寧)성 정법위원회 서기, 천톄신(陳鐵新) 전 정법위원회 부주석, 구춘리(穀春立) 전 안산(鞍山)시 서기, 리원시(李文喜) 전 랴오닝 정협 부주석, 장둥양(張東陽) 전 선양(瀋陽) 검찰원장, 양야저우(楊亞洲) 전 선양시 부시장 등이 이에 해당됐다. 특히 제18차 당대회 이후 랴오닝 관료계에서 시진핑의 반부패에 대항한 장파의 대표적 인물이 바로 랴오닝 당서기 왕민이었다. 왕민은 ‘랴오닝방’, ‘장쑤(江蘇)방’의 주요 일원 중 한 명으로, 안후이(安徽)성에서 태어나 장쑤에서 정치권에 본격적으로 들어섰다. 장쑤성 부성장, 쑤저우(蘇州)시 서기를 역임했고, 2004년 10월 지린 성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2년 뒤에는 성위원회 서기로 승진했으며 2009년 11월에는 랴오닝성 서기로 발령을 받았다. 2015년 5월에는 중국 공산당 인민대표대회로 자리를 옮겼고 2016년 3월 4일 실각했다. 이미 낙마한 왕민과 보시라이는 긴밀한 관계였는데, 이와 관련해 자유아시아방송(RFA)은 <왕민은 ‘정치적 범죄’가 주 죄목이고, 부정부패는 부차적 죄목이다!>라는 제목으로 폭로한 바 있다. 이 보도에 따르면 보시라이가 낙마하기 전 왕민은 랴오닝성의 서기직으로 취임한 즉시 다롄(大連)으로 달려가 보시라이의 ‘정치적 업적’을 칭송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시라이의 부인 보구카이라이(薄穀開來)가 선양에 왔을 때, 그가 직접 연회에 초청한 바도 있었다. 또 왕리쥔(王立軍)이 충칭(重慶)시 공안국장직을 역임할 당시 고향인 랴오닝에 자주 방문했는데, 이때마다 왕민이 왕리쥔을 직접 찾아간 것으로 나타났다. 자신이 직접 발탁한 성 정법위 서기 쑤훙장을 동행한 정황도 드러났다. 2013년 1월, 시 당국이 노동교양(勞動敎養)제도를 폐지하려 했을 때 장파의 방해에 부딪힌 적이 있었다. 그해 4월 7일 친시진핑 언론 매체 ‘렌즈시각’(Lens視覺)은 <’마싼자’를 벗어나다(走出“馬三家”)>라는 제목의 장문의 기사를 게재해, 랴오닝 마싼자 여성 노동교양소의 고문 실상을 폭로, 사회에 강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보도에 의하면 압형, 매달기, 호랑이 의자에 앉기, ‘사인상(死人床)’에 묶기, 작은 감방에 가두기, 자궁 확장기를 사용한 강제 급식, 질 내에 고춧가루 넣기, 전기로 유방 및 생식기 자극, 여성을 남성 감방에 수감하는 등 여성 수감자가 이 기간 동안 겪은 각종 혹형(酷刑)을 폭로했다. 또한 파룬궁(法輪功) 수련자들이 계속해서 증언해온 노동교양소에서 벌어지는 혹형과 박해 실태를 증명하기도 했다. 보름만에 왕민이 장악하고 있는 랴오닝성 당국은 공식 조사팀을 꾸려 마싼자 노동교양 인원이 혹형고문을 받았다는 보도가 ‘사실이 아니다’라고 발표했다. 이 같은 행동은 랴오닝성이 공개적으로 시 당국의 노동교양제도 폐지에 대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시 당국은 장파와의 격렬한 힘겨루기 끝에 같은 해 11월 노동교양제도를 공식적으로 폐지했다. 2017년 4월 5일, 왕즈융(王志勇) 랴오닝성 톄링(鐵嶺)시 상무위원이자 선전부장과 궈즈신(郭治鑫) 부시장이 ‘심각한 기율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18차 당대회부터 현재까지 톄링시에서 여러 시(市)급 관료가 낙마해왔다. 앞서 언급한 두 관료 외에, 장저우(薑周)와 린창(林強) 전임 시장, 우예쑹(吳野松) 전(前) 서기, 자오훙웨이(趙宏偉) 전(前) 톄링시 부검찰장 등이 있다. 또 이에 앞서 2017년 2월 28일 리원커(李文科) 랴오닝성 인민대표대회 상무위 부주임이 조사를 받았다. 리원커는 2004년에서 2012년까지 8년간 톄링시 서기를 역임했다. 이들은 모두 천정거오(陳政高) 전(前) 랴오닝 성장과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천정가오는 7년간 랴오닝 성장을 역임했으며, 2014년 4월 중국 국무원 주택도시농촌건설부(주건부) 부장(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천정가오는 ‘랴오닝방’의 주요 인물로 꼽히며 랴오닝 관료계에서 43년을 재직해왔다. 또 그는 보시라이의 옛 부하이며 22년간 함께 일했다. 보시라이가 다롄 시장, 시 당서기에 재임하던 시기, 천정가오가 다롄시 시강(西崗)구 부서기, 구장, 부시장을 지낸 바 있었다. 보시라이가 랴오닝 성장으로 재임하는 동안에는 그가 부성장을 맡아서, 랴오닝 정계의 많은 이들은 천정가오가 보시라이의 확고부동한 측근임을 잘 알고 있었다. 천정가오의 재임 기간 랴오닝성에서는 부정선거와 데이터 조작 사건이 발생했고, 이는 최소한 지도력 부재라는 면에서 지도자에게 책임이 있었다. 시 당국이 강조한 ‘1인자책임제(一把手責任制)’ 원칙에 따르면 천정가오는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리시(李希) 현 랴오닝성 서기는 시진핑 주석의 신임을 받아왔다. 2008년 당시 옌안(延安)시 당서기에 재임 중이던 리시는 옌안시 옌촨(延川)현 원안이(文安驛)진(鎮) 량자허(梁家河)촌으로 시진핑의 회신을 전달하기도 했다. 2014년 4월 28일, 당시 상하이(上海)시 부서기였던 리시는 랴오닝으로 돌연 발령을 받으면서 랴오닝성 부서기직을 맡았다. 5월 5일, 리시는 랴오닝 부성장, 랴오닝 대리성장에 임명됐다. 10월 17일, 리시가 랴오닝 성장에 당선되면서 정부급 관직에 올랐고 랴오닝을 인수받기 위한 준비에 나섰다. 2015년 5월 왕민을 대체해 랴오닝성 서기직에 올랐으며, 그 후 리시는 시 당국의 반부패 운동에 호흡을 맞추어 4명의 ‘호랑이’를 낙마시켰다. 시 주석이 랴오닝성 관료계를 재편성하고 장파의 ‘랴오닝방’을 전면 청산하면서, 장파는 둥베이 3성의 요충지인 랴오닝성에 대해 사실상 통제권을 잃어버렸다. ‘지린방’ 제거 지린성은 일명 장더장의 텃밭으로 여겨져 왔다. 그의 정치 인생은 지린에서 시작돼, 지린성 부서기 겸 옌볜(延邊) 조선족자치주 서기, 지린성 당서기 등을 거쳤다. 장파의 일원인 장더장, 왕윈쿤(王雲坤), 왕민, 왕루린(王儒林) 등이 차례로 지린 지역의 고위 관리를 지내면서 장더장을 필두로 한 ‘지린방’이 형성됐다. 장쩌민 역시 과거 창춘제일자동차회사(長春一汽)에서 재임하는 동안 ‘지린방’ 관료를 대거 발탁한 바 있었다. 지린성 위원회에서 ‘당과 국가 지도자’로 거론된 인물들을 정리해 보면, 쑤룽 전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부주석, 자오난치(趙南起) 전 정협 부주석, 후이량위(回良玉) 전 부총리, 왕강(王剛) 전 정협 부주석, 두칭린(杜青林) 현(現) 정협 부주석, 지빙쉬안(吉炳軒) 현(現) 전인대 상무위 부위원장, 천샤오광(陳曉光) 현(現) 정협 부주석, 왕중위(王忠禹) 전(前) 국무위원 겸 비서장 등이 있어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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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정차이(孫政才) 충칭시 서기 겸 정치국 위원의 예상 밖 낙마로 중국 공산당(이하 중공) 기존의 정치적 평형이 무너지고 19차 당대회를 둘러싼 중공 계파 간 권력 쟁탈전도 치열해지고 있다. 아울러 19차 당대회에 있을 정치국 상무위원 인선은 더 불투명해졌다. 정치국 상무위원 역사 중공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은 정국급(正國級)에 속하는 최고위 지도자층이다. 서열은 통상 경력과 직위, 당정(黨政) 내 지위에 근거한다. 공식 석상 출석 명단 순서는 대개 바뀌지 않으므로 ‘당내 몇 인자’라는 말이 나온다. 그래서 중공 총서기와 국무원 총리는 상무위원에서 선출되는 것이 관례이자 묵계다. 그 외에 국가주석,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중앙군사위 주석, 전국정치협상위원회 주석, 중공 중앙서기처 서열 1위인 서기, 국무원 서열 1위 부총리 등 다수 주요직무도 상무위원이 맡는다. 일반적으로 상무위원회에서 중대한 문제를 결정할 때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기에 표결권 행사와 상무위원의 직무는 상관이 없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1978년 11기 중앙위원회부터 현재 18기 중앙위원회까지 상무위원 인원은 5~9명으로 다양했다. 그중 주목할 만한 변화는 2002년 11월에 열렸던 16차 당대회 때였다. 15기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은 장쩌민(江澤民), 리펑(李鵬), 주룽지(朱鎔基), 리루이환(李瑞環), 후진타오(胡錦濤), 웨이젠싱(尉健行), 리란칭(李嵐清) 등 총 7인이었다. 이들 중 후진타오를 제외한 전원이 16대에서 물러나야 했다. 당시 장쩌민은 파룬궁 탄압정책을 유지하려 16기 상무위원 인원을 7명에서 9명으로 늘렸다.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를 뺀 나머지 7명-우방궈(吳邦國), 자칭린(賈慶林), 쩡칭훙(曾慶紅), 황쥐(黃菊), 우관정(吳官正), 리창춘(李長春), 뤄간(羅干)은 모두 장쩌민파였다. 장쩌민은 선전계와 정법(政法)계를 장악했던 리창춘과 뤄간을 상무위원회에 넣고 후진타오의 실권을 빼앗아 후진타오-원자바오 집권 10년간 이른바 ‘정령불충중난하이(政令不出中南海·정책이 지도부가 있는 중난하이 밖으로 전달되지 않는 현상)’를 조성했다. 이를 '구룡치수(九龍治水)'라고도 한다. 9명이 각자 자기 권력을 행사했다는 뜻이다. 2012년 11월 18차 당대회에서 후진타오는 모든 직무를 내려놓는 전퇴(全退) 방식으로 시진핑을 지지했고, 정법위 서기는 강등돼 상무위원회에서 퇴출당했다. 상무위원은 9명에서 다시 7명으로 줄어 시진핑과 리커창(李克強), 왕치산(王岐山), 덩샤오핑 가족 세력을 대표하는 위정성(俞正聲)이 손을 잡고 이하 장쩌민파인 장더장(張德江), 류윈산(劉雲山), 장가오리(張高麗)가 대적하는 새로운 국면이 형성됐다. 관례대로라면 ‘7상8하(七上八下·67세는 유임하고 68세는 은퇴)’에 따라 19대에서 시진핑과 리커창을 제외한 상무위원 5명 모두 퇴진 대상이다. 이에 빈자리에 누가 앉게 될지 관심이 쏠리는 상황이다. 현재 상무위원 인선에 대해 3가지 시나리오가 높게 점쳐지고 있다. 1안 : 왕치산과 장쩌민파 1인 선출 1안은 시진핑이 7상8하 관례를 깨고 왕치산을 유임하며 상무위원 서열 3위에 둔다는 구상이다. 상무위원은 시진핑과 리커창, 왕치산, 리잔수(栗戰書), 왕양(汪洋), 후춘화(胡春華), 한정(韓正)으로 구성된다. 장쩌민파는 왕치산의 유임을 막으려 19차 당대회 개최 전, 시진핑과 왕치산을 이간했으나 실패했다. 나머지 리잔수, 왕양, 후춘화 등 친시진핑 사람들도 선전계와 중앙기율위원회 등 주요부문을 장악한다. 친장쩌민 성향이 짙은 한정이 상무위원 명단에 포함된 것을 두고, 이미 대세가 기운 장쩌민파 사람의 상무위원 선출을 막아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을 것이다. 현재 장쩌민파 중 상무위원회 자격 조건이 되는 사람은 한정뿐이다. 그의 상무위원 선출 여부는 시진핑이 19대 당대회 이후 장쩌민파를 제거하는 속도와 방식에 달렸다. 정치는 일상적으로 거래와 타협, 담판과 정치적 이익 교환 등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는 일이 다반사다. 큰 변수가 없다면 현재 안정을 추구하는 시진핑식 책략 하에 ‘쑨정차이 낙마-왕치산 유임’이란 정치적 교환으로 한정이 상무위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한정이 정치 국면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상무위원 7인 중 시진핑을 제외한 5명이 시진핑의 사람이기 때문에 한정이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또한 19차 당대회 이후 더욱 대세가 기울 장쩌민파를 위해 목숨을 내걸고 시진핑에 대항하기도 어렵다. 오히려 장쩌민파를 거슬러 친시진핑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크다. 2안 : 왕치산과 장쩌민파 모두 배제 2안은 시진핑이 7상8하 관례에 따라 왕치산을 유임하지 않되 한정도 배제한다는 구상이다. 비록 왕치산은 상무위원에서 빠지나 왕치산식 맞춤 디자인한 국가감찰위원회를 주관하면서 계속 시진핑을 도와 반부패를 추진한다. 시진핑은 권력 기반이 안정됨에 따라 지속해서 중공 고유의 틀과 관례를 타파해 점차 상무위원의 권력을 약화하고 최종에 가서는 상징적 의미만 남게 할 것이다. 3안 : 상무위원 7인→5인 축소, 강력한 반부패 척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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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 지저우(冀州)로 불렸던 허베이(河北)성은 지리적으로 베이징(北京)과 톈진(天津) 등 두 개의 직할시를 둘러싸고 있는 수도권의 관문으로 금(金)왕조 때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여겨졌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의 정치판도에서도 허베이 성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장쩌민파의 허베이성 장악은 저우융캉을 필두로 진행됐다. 그는 자신의 인맥들을 허베이성 고위직에 배치했고 정법위 세력의 핵심 거점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제18차 당대회부터 지금까지 저우번순 허베이성 서기, 장웨(張越) 성 정법위 서기, 징춘화(景春華) 성 위원회 비서장, 량빈(梁濱) 조직부장 등 허베이성 상무위원만 4명이 낙마하면서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저우번순, 장쩌민파 정변에 참여 2013년 3월 20일 저우번순은 중앙정법위 비서장, 중앙 사회치안종합치리위원회(社會治安綜合治理委員會) 부주임으로 재직 중 바로 허베이성으로 발령 받아 단번에 수도권 핵심 지역의 성 위원회 서기로 올라섰다. 이는 저우융캉이 자신의 낙마에 대비해 정법계통 진영을 사수하기 위한 중요한 조치였다. 저우번순은 저우융캉과 긴밀한 사이였고 오랫동안 시·성의 중앙급 공안·검찰·법원 분야에 재직하면서 대량의 측근들을 양성해 왔다. 이 때문에 저우융캉, 보시라이(薄熙來), 쉬차이허우(徐才厚) 등 정변 집단에서 핵심적인 일원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결코 가볍게 여길만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이다. 2012년 저우융캉은 허베이성에 ‘국가안보 안정유지(國安維穩)’를 시범 실시토록 했다. 그 뒤 1년여 동안 파룬궁(法輪功) 수련자들을 끊임없이 불법으로 체포했다. 이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친 사람이 바로 저우융캉의 심복, 저우번순이었다. 저우번순은 과거 보시라이-저우융캉의 정변에 참여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정변 명단에 따르면 그는 중국 공산당 최고법원장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또 링지화(令計劃) 사건에도 연루돼 있었다. 링지화의 아들 링구(令穀)가 2012년 3월 ‘페라리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을 당시, 한 보도에 따르면 저우융캉과 링지화는 이 사건 관련 특별팀을 조직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당시 정법위 비서장이었던 저우번순과 링지화의 처남 구위안쉬(穀源旭)가 이 사건을 공동으로 처리했다.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저우융캉을 체포한 뒤 바로 저우번순을 수사하지 않았다. 2015년 공산당 베이다이허(北戴河) 회의 개최 전에야 체포했는데, 중국의 베터랑 언론인 장웨이핑(薑維平)이 그 내막을 폭로했다. 당시 저우번순이 장쩌민, 쩡칭훙(曾慶紅)이 계획한 두 번째 정변에 참여해 시진핑 당국에 반란을 일으킬 극비 보고서, 소위 ‘정치 핵폭탄’을 작성했던 것이다. 2015년 7월 24일 저우번순 허베이성 서기가 낙마했다. 이는 18차 당대회 이후 재임 중 낙마한 첫 성 위원회 당서기이다. 이는 당시 재직 중이던 장쩌민파 계열 성(省)급 1인자들에게 보내는 강력한 경고이기도 했다. 장웨 낙마 2016년 4월 16일 장웨 허베이성 상무위 및 정법위 서기가 낙마했다. 올해 55세인 장웨는 오랫동안 베이징 공안국에서 재직했다. 중국 공산당 전(前) 수장인 장쩌민이 파룬궁 박해를 본격화한 이후 장웨는 베이징시 공안국 1처(處) 부처장(副處長), 1처 처장, 베이징시 공안국 부국장 등으로 재직하며 장쩌민과 저우융캉의 파룬궁 박해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정치적 ‘자본’을 쌓으려 했다. 2003년 11월, 장웨는 뤄간(羅幹), 저우융캉 등의 발탁으로 공안부 26국(局) 국장직에 임명됐다. 26국은 공안부 내의 파룬궁 박해 전담 조직이다. 2007년 말에는 허베이 공안청장으로 발탁돼 더욱 거침없이 악행을 저질렀다. 그가 허베이성 내 파룬궁 박해를 직접 지휘한 것이다. 장웨는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둔 '파룬궁박해추적조사 국제조직(WOIPFG)'의 블랙리스트에 올라와 있다. 저우번순은 당국의 조사를 6개월 앞둔 시점에서 <허베이 정치상황 통보(河北政情通報)> 초안을 비밀리 작성했다. 그리고 장웨를 통해 직접 쩡칭훙에게 전했고, 장쩌민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이 기밀 보고서에는 주로 시진핑·왕치산(王岐山)의 반부패 운동이 ‘이미 잘못된 길로 들어서 2차 문화혁명으로 변질됐으며, 허베이성 경제를 심각하게 악화시켰다’ 는 내용이 포함됐다. 그들은 모든 책임과 문제를 중앙정부 및 시진핑·왕치산의 반부패 운동에 전가시켰다. <허베이 정치상황 통보>는 저우번순이 지시하고 장웨가 인원을 조직해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허베이 관료계 대격변 저우번순이 낙마하고 일주일 뒤 구이저우(貴州)성 서기직에서 막 퇴임한 자오커즈(趙克志)가 그 자리를 넘겨받았다. 자오커즈는 후진타오(胡錦濤)계 인물로 꼽히며 시진핑-장쩌민의 격전 속에서 시진핑발(發) 반부패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왔다. 자오커즈는 현(現) 리잔수(栗戰書·67) 중앙판공청 주임과도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리잔수 역시 2010년 8월부터 2012년 7월까지 구이저우성 서기를 역임했기 때문이다. 이 기간 동안 자오커즈와 리잔수는 파트너로 활동했다. 리잔수가 중앙판공청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자오커즈가 구이저우성 서기직을 인계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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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과 인도군이 접경 지역에서 대치하는 가운데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인도 모디(Narendra Modi) 총리가 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브릭스(BRIC,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공) 비공식 회의를 가졌다고 인도 최대 민영방송사 뉴델리 TV(NDTV)가 7월 7일 보도했다. 이날 시 주석은 모디 총리와의 만남에서 ‘테러리즘 척결에 대한 인도의 굳건한 결심’에 감사를 표했다. 또한 인도가 경제·사회 분야에서 거둔 성과를 높이 평가했으며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불과 하루 전인 7월 6일 중국 루캉(陸慷) 외교부 대변인은 기자회견에서 시 주석이 모디 총리와 만나지 않을 것임을 암시했다. 특히 이 대변인은 최근 홍콩 관련 브리핑에서 ‘중(中)-영(英) 공동성명(홍콩반환협정)’은 역사적 문서라고 말하며 “그것은 중앙정부의 홍콩 관리에 어떠한 구속력도 발휘하지 않는다”고 밝혀 여론에 파란을 일으킨 바 있었다. 이 또한 시 주석이 민주파 홍콩 인사와의 회동에서 했던 말과 불일치한다. 중국 외교부는 인도군의 국경 침범에 대해 ‘매우 심각한 사건’이라고 언급하며, 안보주권을 위협하며 국제법 규범을 짓밟았으므로 단호히 대응해야 한다고 밝혔다. 관영언론 인민일보(人民日報)는 ‘인도군의 불법 국경 침범, 국제법 준칙을 짓밟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외교부의 입장을 지지했다. 시진핑과 인도의 외교 정세 최근 국경지대를 둘러싸고 중국군과 인도군이 드물게 근거리 대치를 이어가고 있다. 이는 1962년 중국-인도 전쟁 이후 발생한 최장기간 군사 대치로, 현재까지도 갈등은 완화되지 않았다. 중국 공식매체는 비교적 엄중한 성명을 발표하여 인도를 질책했다. 시진핑 주석은 집권 이후 인도를 포함한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 완화를 목적으로 유연한 외교 정책을 펼쳐왔다. 따라서 이번 중국과 인도 간의 긴장된 대치 국면은 시진핑 당국의 외교적 목표와 명백히 모순되는 것이다. 특히 이 같은 비정상적인 정황과 유사한 일이 과거 시진핑에게 두 차례나 있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4년 9월 17~19일 시 주석의 인도 방문은 양국 관계의 돌파구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모디 총리가 시 주석을 초대해 환영만찬을 베풀기 1시간 전, 중국군 800 명이 돌연 인도와의 접경선을 3km 넘어선 지점에 주둔했다. 인도 언론은 이를 ‘침입’으로 받아들였다. 중국 외교부 역시 이 사실을 확인했다. 이와 관련 포브스(Forbes)지는 사설을 통해 제3자의 입장에서 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밝혔다. 예기치 않은 실수인가, 고의적 행동인가, 목적이 대체 무엇인가? 중국 공산당 최고 사령부 또는 정권 내 일부 고위급 간부들이 시 주석을 깎아내리려는 시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시진핑이 인도를 방문하기 전인 9월 16일, 인도 주재 중국 대사 웨이웨이(魏葦)가 돌연 면직됐다. 이는 중국 외교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시 주석은 인도 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9월 21일, 바로 중국 공산당 전군 참모장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서 시진핑은 ‘호령의식(號令意識) 강화’, ‘정치 명령과 군령의 원활한 소통 확보’ 등을 강조했고, 군대를 엄격히 통제하기 시작했다. 또, 같은 해 10월 30일 그는 푸젠(福建)성 구톈(古田)에서 15년 동안 중단되었던 전군정치공작회의(全軍政治工作會議)를 개최했다. 시진핑 주석은 조사 중인 쉬차이허우(徐才厚) 전(前) 군사위 부주석을 공개 비판하며 쉬차이허우 사건의 해악을 철저히 제거하라고 전군에 요구했다. 그 후, ‘군 호랑이’들이 대거 낙마하기 시작했다. 시진핑 주석이 중앙아시아 방문 및 모디 총리와의 회견을 앞둔 2017년 6월, 중국군 헬리콥터 한 대가 중국과 인도 ‘국경선’ 우타란찰(Uttaranchal)의 중국과 인도 분쟁 지역 중 인도가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측으로 날아 넘어갔다. 스와라지(Sushma Swaraj) 인도 외교부 장관은 대표적인 영공 침해 사건이며 이 문제를 제소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도 정부는 또한, 모디 총리가 향후 중국-인도 정상 회담에서 시 주석에게 이 사건에 대한 해명을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같이 난감한 국면과 시 주석-모디 총리 간 밀접한 관계는 선명하게 대비된다. 예를 들어 모디 총리는 몇 년 간 시진핑의 생일을 축하해 왔다. 2016년 6월 15일 오전 모디 총리는 웨이보에 시진핑 생일 축하 메시지를 시 주석과 악수하는 사진과 함께 올렸다. 장쩌민파 외교부 중국 외교부는 오랫동안 장쩌민파의 수중에 있었다. 1993년부터 2013년까지의 첸치천(錢其琛), 탕자쉬안(唐家璿), 리자오싱(李肇星), 양제츠(楊潔篪) 등 4명의 외교부 장관 모두가 장쩌민파였다. 특히 1998년에서 2001년 주미 대사직에 있었던 리자오싱은 장쩌민(江澤民)이 해외로 폭력을 확대하는 데 있어서 유능한 수하 노릇을 해왔다. 외교적으로는 장쩌민의 파룬궁(法輪功) 박해를 대변하고 후진타오(胡錦濤)를 감독, 통제했다. 따라서 시진핑이 취임하자마자 맞이한 가장 큰 압박과 위기는 외교적, 외부적 상황에서 기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내부로부터 시작됐으며 주로 장쩌민파가 주도했다. 그들은 시 주석을 겨냥한 지속적인 정변 모의와 권력 찬탈 시도를 되풀이했다. 시 주석은 취임 5년 이래로 계속해서 반부패 호랑이 사냥을 해왔는데, 이는 장쩌민 일파의 정변 시도에 대한 대응이었다. 외교는 내정의 연속이다. 시진핑 주석은 집권 후 잦은 외교적 방문을 통해 미국 등 강대국 및 주변국가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일본과의 관계 완화도 이러한 일환이었다. 장쩌민파는 외교 시스템 장악을 통해 국제 이슈를 조성하여 정부에 압박을 가하거나 중국 내 정치 게임에 활용했다. 시 주석 취임 이후에도 장쩌민 일파는 줄곧 이러한 조작을 계속해왔다. 후진타오의 교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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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가을 개최 예정인 중국 공산당 제19차 전국인민대표대회(全國人民代表大會 이하, 19차 당대회)가 정치상황과 사회변동의 큰 분수령으로 점쳐지는 가운데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공식적인 결의를 거쳐 ‘핵심’ 지도자로 인정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그리고 이는 20여 년 동안 중국을 직·간접적으로 통치해 온 장쩌민(江澤民) 세력을 정치무대 밖으로, 전면 퇴출시키는 것을 상징하기도 한다. 장쩌민 집단의 우두머리인 장쩌민, 늘 함께 거론되는 대표적 인물 쩡칭훙(曾慶紅), 그 가족들까지 청산되는 필연적 결과가 잇따를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현재부터 19차 당대회 전까지, 이 한정된 시간이 장쩌민파에게는 마지막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시진핑에 대한 ‘초한전(超限戰)’이 계속 진행되는 가운데 그들은 암살·금융정변·홍콩사태 등 다방면에서 여러 수단을 등장시키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쩡칭훙의 해외 특무 궈원구이(郭文貴)가 왕치산(王岐山)의 비리를 폭로한 사건이다. 암살·경제정변 등과 같은 쿠데타 시도가 이미 실패한 상황에서 그들이 활용할 수단과 방법은 한계에 이르렀다. 다만 왕치산을 겨냥해 19차 당대회 이후 은퇴하게 만드는 전략은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최근 중국 공산당 중앙급 공식매체의 반응으로 미루어 몇 개월간에 걸친 궈워구이의 폭로는 목표 달성에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장쩌민파가 왕치산을 겨냥한 이유 시진핑 정부 출범 이후, 그와 왕치산이 장악한 중앙기율검사위원회(이하 중기위)는 장쩌민파를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하게 의지할 수 힘이라는 점에서 필수불가결한 수단이다. 따라서 왕치산이 낙마한다면 시진핑은 팔 한쪽을 잃는 셈이다. 중국 정치체제는 정상적인 국가의 정부와 달리 기형적인 권력구조 체계를 가지고 있다. 부정부패는 일상적으로 벌어지며 당의 골수까지 뿌리내렸다. 이를 고려할 때 시 주석이 정상적인 법 절차를 통해 부정부패를 척결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당내 기구인 중기위를 활용해 자신의 목적에 이룰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왕치산은 금융업계와 지방 고위관료, 중앙 부처직, 국무원 총리를 거치면서 ‘소방대장(救火隊長)’ 또는 ‘청소부’로 불려왔다. 18차 당대회 후, 시진핑과 왕치산은 강력한 반부패 드라이브를 이끌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 군대, 지방 성·시에 암약하는 장쩌민파 세력을 숙청하고 새로운 인사 배치를 마쳤다. 4년 동안, 왕치산은 시 주석을 도와 당과 군대 내 고위 관료 100여 명을 척결했다. 예를 들어 정국급(正國級·국가지도자급) 인사인 저우융캉(周永康), 부국급(副國級·부총리 이상의 국가직) 인사인 쑤룽(蘇榮)·쉬차이허우(徐才厚)·궈보슝(郭伯雄) 등이다. 지금까지 조사받은 공산당 부부급(副部級·차관급) 이상 관리만 150여 명으로, 인민군과 무장경찰 부군급(副軍級.영관급) 이상의 인원들까지 합하면 총 200여 명에 달한다. 왕치산은 강도 높은 반부패 척결로 중국의 각 이익집단을 건드렸다. 특히 장쩌민파의 가족이 취해 온 기득권과 이익에 집중해 왔다. 이 때문에 장쩌민파는 왕치산 관련 여론을 조작하거나 심지어 수차례의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특히 그들은 시진핑과의 불화설을 퍼뜨려 그 관계를 이간질하려 했으며 왕치산의 가족과 관련된 부정적 사실을 폭로한 바 있다. 이는 시진핑과 왕치산 간의 정치적 동맹 관계를 파괴하려는 시도이며, 최종적으로는 반부패 운동을 중단시켜 ‘청산’이라는 예정된 결말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왕치산 유임 가능성은 왜 높은가 장쩌민 집권 당시, 공산당의 관료 질서는 내부에서부터 완전히 파괴됐다. 부패의 정도가 이미 뼛속 깊이 파고들어 ‘근치(根治)’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관리들 다수는 부작위(不作為)의 태도로 이 사태를 관망했다. 한 소식통에 따르면 왕치산은 이러한 부패 상황을 ‘절망적’이라고 표현했다. 한편, 정치국상무위·중앙정치국·군대·정법·선전계통·지방의 성·시에서는 상부부터 말단까지 장쩌민파 세력들로 채워졌다. 그리고 지난 4년 동안 그들은 계속적으로 반격, 장쩌민파의 계획에 따른 정변 행동을 이어왔다. 공산당의 이러한 체제는 하나의 악순환으로 새로운 부패를 일으키며 19차 뒤에도 이 국면은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시진핑이 중국 공산당의 ‘핵심’으로 인정받은 후, 왕치산은 계속 보좌하며 반부패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현재 왕치산은 장쩌민파를 제외한 고위층으로부터 공감과 지지를 얻고 있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숭핑(宋平)·주룽지(朱鎔基)·츠하우텐(遲浩田)·우이(吳儀) 등 당 원로들이 왕치산을 정치국 상무위, 중기위 서기로 유임할 것을 정치국에 요구했다. 이보다 앞서 100여 명의 고위층 인사들이 왕치산의 연임을 요구하는 ‘연명상서(連名上書)’를 제출한 바 있다. 또 반부패 활동에는 민의가 반영돼 있어, 민중들 사이에서 왕치산에 대한 지지와 인정 역시 확산되는 추세이다. 왕치산, 두 가지 방식으로 유임될 가능성 19차 당대회 이후, 왕치산은 아래 두 가지 방식 중 하나로 공산당 권력 중심에 남아 반부패 운동을 이어나갈 것으로 분석된다. 첫째, 칠상팔하(七上八下·67세는 유임하고 68세는 은퇴한다)의 불문율을 깨고 정치국 상무위원에 유임된다. 중국 관료 규정에 따르면, 사국급(司局級)과 부부급(副部級) 관료의 퇴직 연령은 60세, 정부급 관료는 65세로 정해져 있다. 정치국 위원의 퇴직 연령은 70세였는데, 2002년 장쩌민·쩡칭훙이 리루이환(李瑞環)을 퇴임시키기 위해 '칠상팔하‘라는 규정을 만들면서 바뀌었다. 이 경우 67세에는 다음 기수까지 정치국 상무위로 연임 가능하나, 68세에는 반드시 퇴직해야 하는 것이다. 1948년생인 왕치산은 올해 68세를 넘기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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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을 태운 전용기가 홍콩에 도착한 지난 6월 29일 오전 12시,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킨 장면이 연출됐다. 이날 공항에는 홍콩 행정장관 렁춘잉(梁振英) 부부와 그 후임 캐리 람(林鄭月娥)이 마중 나와 있었다. 특히 렁춘잉 부부는 시진핑을 영접하기 위해 먼저 기내에 탑승했으나 40초 만에 하차해, 그 이유를 두고 여러 언론들이 각종 추측을 쏟아냈다. 국가 원수의 홍콩 방문 시 행정장관이 공항에서 영접한 예는 있었지만 이날과 같은 장면을 보였던 경우는 없었다. 홍콩 행정장관을 두 차례나 지냈던 둥젠화(董建華)나 도널드 창(曾蔭權) 모두 원수의 뒤를 따라 함께 하차했다. 또 지금은 전 주석인 후진타오(胡錦濤)가 2007년과 2012년 홍콩을 방문했을 당시에도 전임 행정장관이 먼저 탑승, 영접했으며 주석이 뒤따라 전용기에서 내렸다. 관례가 원래 이렇다면 렁춘잉이 예의에 벗어난 행동을 먼저 보였다는 가정이 가능하다. 이 점에 주목한 홍콩 언론들은 허안다(何安達) 전임 홍콩 행정장관의 미디어 총괄자를 인터뷰했다. 그는 “시진핑 주석이 항공기에 탑승하라고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렁춘잉)가 그랬다면, 예의에 어긋난 행동임은 분명하다”고 밝혔다. 이 가정이 사실이라면 언론의 추측성 기사, ‘렁춘잉, 전용기에서 쫓겨났다?’와 같은 헤드라인은 지나치게 과장된 측면이 없지 않다. 사실, 렁춘잉이 이날 보인 행동은 관례를 따랐을 뿐 예의와는 크게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가 40초 만에 ‘쫓겨났다’는 사실이다. 이는 명백히 심상치 않은 징조이며,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할 일도 아닌 것이다. 당내 최고위층 지도자가 중요한 공개 석상에서 이 같은 장면을 즉흥적으로 연출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우연히 발생한 것처럼 보이는 정치적 사건일수록 더욱 중대한 법이며 반드시 필연성이 내재돼 있다. 예를 들어 왕리쥔(王立軍)이 2012년 2월 6일 미국 영사관으로 탈출한 사건은 그저 우연처럼 보였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이 일은 장쩌민(江澤民)과 후진타오 간 벌어진 권력투쟁이 가시화된 시발점이었다. 만약 왕리쥔 사건이 없었다면 당내 고위층의 분열과 도박은 아마 다른 방식으로 드러났을 것이다. 렁춘잉이 전용기에서 쫓겨난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이 장면은 외부에 두 가지 신호를 전달하려는 시 주석의 의도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높다. 하나는 자신이, 20년간 홍콩을 장악해 왔던 장쩌민·쩡칭훙(曾慶紅)과 다른 길을 걷고 있으며 그들의 계보로 분류되는 렁춘잉을 포용할 뜻이 없음을 알린 점이다. 다른 하나는 행정장관이 전용기에서 원수를 영접하는 관례를 깨는 파격적인 모습을 연출함으로써, 장쩌민파의 홍콩 장악 시대에 종말을 고하고 홍콩 정치가 변화에 직면했음을 시사한 것이다. 시 주석은 어째서 이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의지를 전달했던 것인가? 왜 자신의 입장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인가? 잇따른 공개 활동과 일련의 연설에서 시 주석은 렁춘잉 행정장관에 대해 “지난 5년간의 업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홍콩 시민들은 행정장관 이·취임식장에서 시진핑의 이 말을 또 한 번 듣게 됐다. 그의 불일치한 언행은 외부, 특히 홍콩 시민들에게 큰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중국 공산당의 당(黨)문화는 인류 역사상 유래를 찾기 힘들만큼 기형적이다. 현재 전 세계에서 북한 같은 소수의 국가를 제외하면 모든 국가는 정상적인 언어 시스템을 갖춰 소통·교류·사회활동에 힘쓰고 있다. 해당 언어를 모르더라도 통역만 거치면 의미 전달 및 이해에 있어서 아무런 장애가 없다. 그러나 공산당 내 당문화는 고유의, 특이한 언어체계를 형성시켜왔다. 당에서 채택한 결의보고서와 관료들의 발언마다 상투적인 문구가 허다하며 쓸모없는 말들이 넘쳐난다. 또 각각의 어휘에 서로 다른 뜻이 숨어 있어, 말이 말을 낳는 형국이 조성됐다. 당문화에 익숙하지 않거나 정상적인 사회에 소속된 사람들에게는 중공의 이 ‘언어체계’는 이해하기 힘들다. 문제는, 중국 언론과 서적에서만 나타나던 이 체계가 중공이 수십 년간 노력한 끝에 사회 전반에까지 침투됐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 상황과 당문화를 고려했을 때 “렁춘잉 행정장관의 지난 5년간 업적을 충분히 인정하고” 같은 시 주석의 공개 발언은 전혀 문제될 이유가 없다. 중국 공산당 체제가 지속적으로 운영 및 제한하는 한, 특유의 언어체계와 선전방식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많은 홍콩인들을 포함해 외부에서는 이 부분에 큰 의문을 표시해왔다. 반면 홍콩 사회에 주목하고 있는 한 중국인은 이를 역으로 꼬집었다. “공산당 내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홍콩인들은 지도자의 표면적 행동과 발언을 통해서만 정국을 파악한다. 그래서 현재 집단 권력의 대표자인 ‘핵심’으로 자리 잡은 시 주석이 홍콩의 모든 난국을 책임져야 한다고 여긴다.” 이러한 갈등을 초래한 가장 큰 원인은, 중공이 수십 년 간 진행해 온 고압 통치와 폐쇄적인 사상 주입에 있다. 이는 국민들의 사고방식과 행동 습관을 변화시켰고 언어체계까지 바꿔버린 것이다. 또한 공산당 내부와 홍보 시스템에도 당문화의 언어체계, 즉 ‘당의 말(黨話)’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사실, 당내 정치 생태가 이렇게 바뀐 데에는 장쩌민의 책임이 크다. 그는 집권기 뿐 아니라 배후에서 수십 년 동안 정치에 간섭하면서 부패 정치를 일삼았다. 부패 관료를 대거 발탁했으며, 파룬궁(法輪功)에 대한 탄압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후진타오-원자바오(溫家寶)를 10년 임기 내내 허수아비로 세워놓았다. 시진핑 주석에 대해서도 실권을 빼앗거나 심지어 대체하려고 시도해왔다. 과거 홍콩, 특히 렁춘잉 집권 하에 최근 5년을 보낸 홍콩은 장쩌민 집단의 수중에 있었다. 중앙 홍콩마카오공작협조소조(港澳工作協調小組) 조장 자리에서 홍콩의 사무를 주관해 온 장쩌민 일파 장더장(張德江)은 겉으로 드러난 일부에 불과하다. 그 이면에는 쩡칭훙이 있었다. 그는 홍콩을 다년간 장악하면서 국가안전부 계통을 이용해 홍콩의 정치, 경제 등 각계에 자신한테 충성하는 인물과 특무들로 채워 넣었다. 이번 시진핑의 방문에서 드러났다시피 현재 시진핑은 홍콩을 통제하는 것은 고사하고 신변의 안전조차 위협받고 있다. 이는 정부에서 공개한, 시 주석의 홍콩 활동 영상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그가 나타나는 모든 장소마다 경호원들이 겹겹이 배치됐다. 경호원들 역시 눈앞에 적을 둔 것처럼 긴장한 모습이었다. 장쩌민 일파의 암살 시도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조처였다는 소문이 결코 거짓은 아니었다. 현재 장쩌민파 장더장이 상무위원으로 권좌에 앉아 있기 때문에 홍콩의 쩡칭훙 세력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 따라서 시진핑은 홍콩 문제와 관련해 외교부, 홍콩-마카오 책임 부처뿐만 아니라 당·정·군·지방 등 각계의 인재들을 조직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관료 대부분이 장쩌민 집권기에 선발됐으며 손에 피를 묻히며 자리를 차지한 일부 관료들은 여전히 장쩌민 편에 서서 시진핑에게 대항할 태세이다. 반면 시진핑을 진정으로 따르며 그의 정책을 집행하는 관료들은 많지 않다. 시진핑이 집권한 뒤에도 장쩌민파 휘하의 인물, 푸정화(傅政華), 리훙중(李鴻忠) 등을 계속 기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반적인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시 주석은 홍콩 문제를 두고도 비슷한 곤경에 빠졌다. 장쩌민 집단의 일원인 장더장, 류윈산(劉雲山) 및 렁춘잉이 2014년 홍콩에서 ‘우산혁명’을 유발시켰을 때에도 시진핑은 군대를 동원하지 않겠다는 마지노선을 간신히 지켜낸 바 있었다. 올해 홍콩 행정장관 선거 과정에서 시 주석의 마지노선은 그저 ‘렁춘잉의 연임에 대한 결사반대’였을 뿐 다른 조치는 취하지 못했다. 외부에서 보았을 때조차 시진핑이 장더장과 같이 홍콩의 구체적 사무에 관여하거나 개입한 정황은 없었다. 물론 이는 중국 공산당의 체계적 요소로 인해 제약을 받은 측면이 없지 않다. 위와 같은 상황을 이해한다면 얼마 전에 벌어진 사건의 의미도 유추할 수 있다. 홍콩 행정장관 선거 몇 개월 전, 홍콩 ‘성보(成報)’지가 돌연 한장셰(漢江泄)의 서명 사설과 글을 연속 게재하며 장더장, 장샤오밍(張曉明), 렁춘잉 등의 스캔들을 보도했다. 이는 렁춘잉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는 일부 홍콩인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홍콩 행정장관 선거가 끝난 뒤 ‘성보’지는 후속 보도를 하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시진핑 진영에서 비공식 홍콩 언론을 통해 홍콩과 외부에 중공 고위층의 진실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동시에 민심을 테스트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장더장 등의 스캔들을 폭로하면서 각계의 반응과 동태를 살피고 향후 홍콩에서 장쩌민 일파를 몰아낼 준비를 하기 위함이다. 렁춘잉이 시진핑에 의해 전용기에서 쫓겨난 사건은 렁춘잉의 비극적 미래를 뚜렷이 보여주는 장면이다. 렁춘잉은 청산될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제19차 당대회에서 렁춘잉의 배후인 장더장이 하야하면, 시진핑 진영의 인물이 홍콩을 접수할 것이며 렁춘잉에 대한 스캔들은 속속 폭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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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집권 이전, 후진타오(胡錦濤)-원자바오(溫家寶) 정부는 10년 간 어떤 정책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정령불출 중난하이(政令不出中南海:정책이 지도부가 있는 중난하이 밖으로 전달되지 않는 현상)'의 주 원인은 장쩌민파가 각 성(省)‧시(市)의 요직을 독점함으로써 상당수의 도시가 장쩌민파의 ‘독립왕국’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 주석은 오는 가을 19차 당대회를 앞두고 전국 31개 성(省)‧시(市) 주요 보직에 모두 측근들을 배치하는 등 인사 개혁을 단행했다. 전국에 퍼진 장쩌민파 지방 세력은 이미 19차 당대회 전부터 몰락할 위기에 놓였다. 충칭시는 과거 보시라이(薄熙來)가 당서기로 취임하면서 장쩌민파는 본격적으로 충칭시 관료계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충칭에서의 보시라이 충칭으로 발령받기 전 보시라이는 상무부 부장이었다. 2007년 1월 15일 보시라이의 아버지이자 공산당 원로 보이보(薄一波)가 병사하면서 주석이던 장쩌민이 보이보에 대한 보답으로 ‘17차 당대회’에서 보시라이를 정치국 부총리에 입성시키려 했다. 그러나 당시 우이(吳儀) 부총리는 보시라이에게 부총리 직무를 인계하기 거부했다. 이 사실은 정치국 내부에서 매우 중대한 문제로 등장했다. 결국 우이는 전퇴(全退, 모든 직무를 내려놓는 것, 반대로 반퇴는 일부 직무를 유임)까지 감행하며 보시라이의 부총리 임명을 저지했다. 위키리크스에 따르면 당시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는 보시라이가 파룬궁(法輪功) 박해를 주도한 혐의로 호주, 스페인, 캐나다, 영국, 미국 등 여러 국가에서 기소된 상태임을 지적했다. 그에 대한 국제적 이미지가 부정적이므로 높은 직위에 오를 인물로는 부적절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2007년 12월 보시라이는 충칭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고, 왕양(汪洋)으로부터 충칭 시 당서기직을 물려받았다. 보시라이는 충칭시에서 18차 당대회에서의 상무위원회 진입을 위해 '창홍타흑(唱紅打黑: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예찬하고 범죄와 부패를 척결)’ 운동을 벌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기업과 시민을 상대로 수많은 사건을 날조해 억울한 피해자들이 생겨났다. 억대 자산의 민영 기업가들이 파산의 길을 걷게 됐으며, 2009년에서 2011년까지 상인·경찰·법관·정부관리를 포함해 5700여 명이 불법으로 연행됐다. 보시라이는 점점 충칭을 장악해 나갔다. 충칭의 당, 정, 군, 공안, 검찰, 사법 등 중요 부처에 자신의 사람을 대량으로 심어 놓았다. 그 결과 보시라이가 낙마하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도 그 세력은 여전히 충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충칭 관료계 1차 청산 2012년 3월 중국 공산당 양회(兩會, 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이후 보시라이가 낙마했다. 그 뒤를 이어 충칭 시 난안(南岸)구 샤쩌량(夏澤良) 서기가 2012년 3월 21일 조사를 받았으며, 천춘건(陳存根)은 2012년 3월 충칭시 상무위와 조직부장 직위를 박탈당했다. 이 기간에 충칭시 법원 관원들이 대거 교체됐다. 2012년 7월 충칭 정법위가 교체됐다. 같은 기간 충칭 ‘타흑(打黑, 범죄와의 전쟁)’ 소조 부소장이자 충칭시 공안국 부국장이었던 탕젠화(唐建華)가 조사를 받았다. 탕젠화가 체포되고 1주일 뒤, 그의 동료인 궈웨이궈(郭維國), 리양(李陽), 왕펑페이(王鵬飛), 왕즈찬(王智參) 등이 연루된 '순사왕법(徇私枉法, 사리를 추구해 법을 왜곡하는)’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2012년 9월 충칭의 법원, 검찰원, 감찰원 관료들이 또 한 번 대거 교체됐다. 그와 거의 동시에 충칭 시위원회 전(前) 부비서장이자 시위원회 판공청 주임인 우원캉(吳文康)이 형사 구금됐다. 2012년 말, 지린(吉林)성 쑨정차이(孫政才) 당서기가 충칭시 당서기직을 이어받으면서 충칭 관료계는 재차 인적 청산에 나섰다. 2013년 3월부터 충칭 정계에 불어닥친 인사 바람은 8개 구와 현의 주요 직위에까지 미쳤다. 같은 해 4월 26일 충칭 재정, 수리, 계획출산, 세무, 안전, 식품, 물가, 교육, 문화, 위생, 체육 등 여러 부서의 지도층이 교체됐다. 2013년 6월 7일 충칭시 국유자산감독관리위원회는 13 건에 달하는 인사 정보를 집중 발표했다. 그러나 충칭시 정부와 정법부문은 여전히 장쩌민파의 수중에 있었다. 황치판, 보시라이와 한 패로 지목 황치판은 보시라이의 재임 기간에 시장으로 발탁된 장쩌민파 인물이다. 보시라이가 장쩌민이 직접 발탁한 심복이듯, 황치판 역시 장쩌민의 본거지인 상하이에서 장쩌민파인 우방궈(吳邦國)의 발탁으로 출세가도에 올랐다. 황치판은 보시라이와 한 패로 지목되면서 보시라이-저우융캉(周永康) 정변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아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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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은 홍콩의 중국 반환 20주년을 맞는 날이다. 이 기간 동안 시진핑 주석은 홍콩을 방문해 홍콩특별행정구의 새 정부 취임식과 여러 공식 행사에 참가할 계획이다. 이번 홍콩 방문은 시 주석이 홍콩의 주도권을 접수했다는 공식적인 선언처럼 보인다. 즉 장쩌민(江澤民) 세력이 홍콩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했음을 알리기 위한 상징적 행보인 것이다. 7.1 기념일 이후, 장쩌민 세력을 대표하던 홍콩 행정장관 렁춘잉(梁振英)이 사임할 예정이며 그동안 홍콩 업무를 주관하던 장쩌민파 상무위원 장더장(張德江)은 홍콩에서 발을 빼게 된다. 1980년대 초, 중국 정부와 영국 정부가 홍콩 반환 협상을 시작했을 당시, 홍콩 시민들이 가장 우려했던 점은 홍콩이 자유와 법치를 추구하는 ‘기존의 생활방식’을 유지할 수 있는지 여부였다. 20년 뒤, 홍콩은 ‘한판의 게임이자 하나의 꿈(一場遊戲一場夢, 홍콩 가수 왕걸 (王傑)의 노래 제목)’을 경험했다. 자유와 법치는 멀어졌고 사실상 꿈이 된 것이다. 홍콩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중국의 여타 도시와는 다른 특수성 탓에 홍콩은 중국 고위층의 권력 전쟁터가 됐다. 특히 2012년 제18차 당대회 뒤, 홍콩은 시진핑 정권을 상대로 한 장쩌민파의 ‘정변기지’로 변질됐다. 이 ‘정변기지’에서 발생한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우산혁명’ 사태로, 장쩌민파의 장더장, 류윈산(劉雲山), 렁춘잉 등이 ‘일국양제(一國兩制, 한 국가 두 체제)’의 원칙을 임의로 바꿔 홍콩을 혼란에 빠뜨렸던 것이다. 장쩌민파가 야기한 혼란을 대처하기 위해 시진핑 주석은 군대를 출동해 민중을 탄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를 국제적 이슈로 만들어 시진핑에게 하야를 압박하려 했으나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 2017년부터 시 주석은 중국의 핵심 지도자로 부상했으며, 이를 통해 가을에 있을 제19차 당대회에서 장쩌민파 상무위원 3인(장더장, 류윈산, 장가오리)은 모두 교체될 예정이며, 장쩌민과 쩡칭훙(曾慶紅) 전 부주석에 대한 숙청 역시 멀지 않았다. 장쩌민파는 시진핑을 상대로 경제 정변을 포함한 여러 분야에서 정변을 시도했다. 지금도 그 활동을 지속하고 있으나 성공할 가능성은 갈수록 희박하다. 장쩌민파는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한 것 같지만 여전히 암살이라는 카드가 남아있다. 이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시진핑 집권 뒤 시진핑과 왕치산(王岐山)은 여러 차례 암살 위협을 겪었다. 여러 언론들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저우융캉(周永康)은 2013년 여름 베이이허(北戴河) 회의를 전후로 최소 두 차례 이상 시진핑 암살을 계획했다. 회의실에 시한폭탄을 설치하거나 시진핑이 해방군 301 병원에서 건강 검진을 할 때 독극물을 주사하는 등의 방법이었다. 이 기사에서 인용한 어느 소식통에 따르면 이 암살 기도는 저우융캉의 최측근과 탄훙(談紅) 전 공안부 경위국 고위 참모가 실행에 옮겼다. 2014년 8월 홍콩 <동향(動向)>지는 중국 고위층의 말을 인용해 18차 당대회를 두 달 남긴 2012년 9월 중순 시진핑 주석이 중앙서기처 서기 신분으로 허베이(河北) 스자좡(石家莊)을 시찰하는 도중 불의의 총격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시진핑이 총서기와 군사위 주석직에 취임했을 때부터 올 7월 초까지 중국 보위 부처는 16차례 이상 안전 경보 통지를 발부했다. 이 중 베이징(北京)이 4회로, 시 위원회, 시 정부 부처 시찰 업무 기간을 포함한 것이다. 소식통은 이 외에도 정저우(鄭州), 우한(武漢), 푸저우(福州), 지난(濟南), 칭다오(青島) 등의 지역에서 시진핑이 다섯 차례의 암살 시도를 당한 바 있다고 밝혔다. 이 같은 사실과 해당 사건의 문서를 종합해보면 일련의 암살 시도는 모두 내부 인사와 관련된 것으로 관측된다. 이 때문에 홍콩 경찰은 시진핑 암살 방지에 최우선 사항을 두고 언론에 보도되듯 각종 보안 조치를 취하고 있다. 중국 매체 <난화(南華)조간>은 광둥(廣東)성-홍콩-마카오 세 지역 경찰이 ‘벼락 작전’에 돌입했고, 6개월간 마라톤식 불온 세력 소탕 작전을 진행해 중국 고위 지도자의 홍콩 반환 20주년 활동 참석을 사전에 준비했다고 보도한 바 있었다. ‘벼락 작전’에는 폭력배와 조직범죄 단속 외에, 세 지역 경찰은 현지 호텔을 불시에 검문해 위험 세력이 숙박업소를 은신처로 활용하는 것을 차단했다. 경찰은 시진핑이 방문할 수 있는 모든 장소를 수색했으며, 호텔과 완차이(Wan Chai) 컨벤시아도 이에 포함됐다. 또한 시진핑의 ‘7.1’ 방문을 맞아 홍콩에서는 유사 이래 최고 수위의 반(反)테러 예방책을 실시하고 있다. 홍콩 경찰부대는 경찰력의 1/3, 약 1만 명을 투입할 예정으로, 이는 1997년 이래 경찰 동원 병력 중 가장 많은 수이다. 소위 ‘비호대(飛虎隊)’로 불리는 홍콩 경찰 특수 임무단, G4 요원 보호팀, 반테러 활동 및 내부 보안팀, 폭탄 처리과, 공항 특경팀 등이 경찰 1만 명과 함께 전일 보안 업무에 동원된다. 이 밖에도, 홍콩 경찰 기동대, 반폭력팀, 정보팀원도 보안 활동에 참여할 뿐 아니라 아직 학교에서 훈련 중인 경찰까지 여러 장소에 배치되어 보안 검사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천여 명의 전투경찰까지 질서 유지를 위해 거리 순찰에 나선다. 특수 임무단 소속 일부 ‘비호대’ 대원은 정부 비행 서비스 헬기에 탑승해 공중에서 감시 작전을 펼친다. 시진핑 주석이 머물 예정인 호텔 인근 빌딩 옥상에는 저격수가 배치되며 호텔 주변 도로에는 물을 채운 거대한 비닐 ‘수마(水馬)’ 장벽을 설치해 자동차 폭탄 테러에 대비할 방침이다. 시진핑의 7.1 홍콩 방문에서 최우선 사항은 장쩌민파의 암살 시도 방지이다. 이는 제19차 당대회를 앞둔 시진핑과 장쩌민파 간의 생사 결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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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차 당대회 전 장쩌민파의 최대 우두머리 격인 장쩌민 전 주석과 쩡칭훙 전 부주석이 시진핑에 대한 쿠데타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이제 선택지는 파멸밖에 없다. 이렇기 때문에 장쩌민파는 필사적으로 마지막까지 저항할 태세이다. 쩡칭훙은 장쩌민파의 2인자이자 책사로, 그의 가족은 경제적으로 거액의 이익을 챙겼고 정치적으로도 ‘대간(大奸·매우 간사)’으로 알려져 있다. 그동안 장쩌민파의 각종 모략에는 항상 그가 배후에 있었다. 시진핑에 대한 암살 시도, 테러 사건 조작과 ‘구자이(股災·주가 폭락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손실)’ 조작 등 수많은 음모들을 기획·지휘했다. 19차 당대회를 앞두고 쩡칭훙은 해외 특무(스파이) 시스템과 매체를 포함한 국내외 모든 자원을 동원해 시진핑을 상대로 전 방위적인 마지막 승부를 벌이고 있다. 현재의 주 타겟은 시진핑의 측근인 왕치산이다. 시진핑과 왕치산 사이 이간질하다 18차 당대회 뒤, 시진핑은 고강도의 반부패 정책을 실시하며 장쩌민파가 장악한 공산당 내부, 군대와 지방 세력들을 와해 및 숙청시켜왔다. 현재는 새로운 인사 배치까지 마친 상태이다. 4년 남짓, 왕치산은 시진핑을 도와 백여 명의 당·정·군 고위 관리를 처벌해왔다. 대부분은 장쩌민파 인물들로, 정국급(正國級·국가지도자급) 저우융캉, 부국급(副國級·부총리급) 수룽(蘇榮), 쉬차이허우(徐才厚), 궈보슝(郭伯雄) 등이다. 지금까지 부부급(副部級·차관급) 이상 관료는 153명, 군대와 무장경찰 내의 부군급(副軍級.영관급) 이상 관원은 59명, 총합 212명을 척결했다. 시진핑 지도부 출범 이래 왕치산은 반부패 정책의 선봉장이었다. 반부패 호랑이 사냥 과정에서 고위층 내부, 특히 장쩌민 집단의 구성원들, 그 가족과 이익집단을 건드렸다. 올해에는 금융계통에 숨어 있는 장쩌민파에 대해 강도 높은 숙청을 벌였다. 이 때문에 장쩌민파는 여론을 조작해 왕치산과 관련한 비방, 루머를 퍼뜨렸으며 심지어 암살까지 여러 차례 시도했다. 최근 쩡칭훙은 해외 특무와 그들의 통제 하에 있는 매체를 동원해 여론 조작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여기에는 시진핑-왕치산 불화설이 포함되어 있다. 그들 사이를 이간질함으로써 정치적 동맹을 파괴하고 왕치산의 연임을 막기 위해서이다. 최종적으로 시진핑과 왕치산의 반부패 호랑이 사냥을 중단시킬 목적이며, 청산 대상에서 피하기 위한 속셈인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장쩌민파가 시진핑 집권 내내 지속해왔던 정변 시도와 권력 탈취 시도의 연장선상에 있다. 쩡칭훙이 시진핑을 상대로 벌이고 있는 대결은 무모한 광기나 마찬가지이다. 2015년 장쩌민 집단이 감행한 ‘경제 정변’은 주가폭락을 조작하고, 중국 금융시스템과 중국경제를 파멸시키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현재 국내외 자원을 움직여 왕치산을 공격 중인 쩡칭훙은 새로운 도박을 감행하고 있다. 바로 중국 공산당의 만연한 부패를 자신의 방패막이로 삼은 것이다. 쩡칭훙은 ‘공멸’의 위협 신호를 내보내고 있는데, 모두가 부패했으니 죽어야 한다면 다 같이 죽자는 것이다. 쩡칭훙에 대한 조사 처리, 빠를수록 좋다 19차 당대회 전, 쩡칭훙은 가만히 앉아 죽음만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시진핑과 왕치산 사이를 이간질하여 시진핑의 반부패 오른팔인 왕치산을 제거하는 것이 현재 그의 주요 목표이다. 쩡칭훙의 이간질 계책은 악랄하지만 그만큼 눈에 보이는 정치적 수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를 무력화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다. 동한광무제(東漢光武帝) 유수(劉秀) 시절 유수를 위해 수많은 공을 세운 풍이(馮異) 대장군을 모함하는 상소가 올라온 적 있었다. 그러나 유수는 풍이에게 그 상소문을 보여주며 신임을 과시했다. 쩡칭훙은 장쩌민파의 대표적 인물로서 국내외 잔당들을 규합시킬 수 있는 인물이다. 그가 부패와의 전쟁에서 빠져나갈 수 있느냐에 따라 장쩌민파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다. 이는 또한 장쩌민파 일원들에게는 재기의 희망이기도 하다. 하지만 쩡칭훙에 대한 조사 처리가 지체되면서 시진핑과 왕치산에 대한 저격은 계속되고 있다. 정변과 정권 탈취 시도 역시 끊이지 않는다. 정국에 비상이 걸린 시점에서 이 대결은 대단히 위태로우며 매순간이 사생결단의 연속이다. 쩡칭훙과의 어떠한 타협이나 환상도 결코 정치적 안정을 가져오지 않을 것이며 시진핑 자신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재앙을 불러올 것이다. 결단해야 할 때에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오히려 난을 당한다. 중국정치와 사회의 안정을 위해 시진핑과 왕치산은 하루 빨리 쩡칭훙을 조사해야 한다, 이른바 ‘도둑을 잡으려면 우두머리부터 잡아야 하는(擒賊先擒王)’ 것처럼 쩡칭훙을 잡으면 장쩌민파의 시진핑 반대세력들도 즉시 무너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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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집권 이전, 후진타오(胡錦濤)-원자바오(溫家寶) 정부는 10년 간 어떤 정책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정령불출 중난하이(政令不出中南海, 정책이 지도부가 있는 중난하이 밖으로 전달되지 않는 현상)'의 주 원인은 장쩌민파가 각 성(省)‧시(市)의 요직을 독점함으로써 상당수의 도시가 장쩌민파의 ‘독립왕국’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 주석은 19차 당대회를 앞두고 전국 31개 성(省)‧시(市) 주요 보직에 모두 측근들을 배치하는 등 인사 개혁을 단행했다. 전국에 퍼진 장쩌민파 지방 세력은 이미 19차 당대회 전부터 패산할 위기에 놓였다. 중국 북부에 위치한 톈진시(市)는 동쪽으로 보하이(渤海), 북으로 옌산(燕山)을 끼고 있는 수도권 출입 통로이자 경제도시다. 근대 이후 정치적 중요성이 크게 부각돼 중국 공산당의 정치 세력 판도에서 베이징(北京)과 상하이(上海)에 이은 정치적 요충지로 자리 잡았다. 6.4 톈안먼학살 이후 장쩌민(江澤民)이 정권을 잡으면서 톈진 관료계의 주요 보직은 장쩌민파로 채워졌다. 1998년에서 2016년까지 장리창(張立昌), 장가오리(張高麗), 쑨춘란(孫春蘭), 황싱궈 등이 톈진 시위원회 총서기직을 거쳤다. 톈진 정계의 1차 붕괴 2006년, 상하이 사회보험 사건과 함께 톈진 정계를 뿌리째 흔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2006년 6월 12일, 당시 톈진 시위원 정법위 부서기이자 시 검찰원 검찰장이었던 리바오진(李寶金)이 ‘쌍규(雙規·지정된 시간과 장소에서 기율위의 조사를 받는 처벌) 처분을 받은 것이다. 2007년 그는 뇌물 수수 및 공금 횡령죄로 사형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2007년 6월 4일, 쑹핑순(宋平順) 전(前) 톈진 정법위 서기 겸 톈진 정치협상회 주석이 사무실에서 자살했다. 쑹핑순은 장기간 톈진 정법계통을 장악해 왔다. 자살과 관련해 ‘칼로 목을 그었다, 목을 맸다, 추락사했다, 음독했다, 총기로 자살했다’는 등 여러 소문이 돌았다. 어떤 언론은 비닐봉지를 뒤집어쓰고 단단히 묶어 질식사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심지어 입막음 당했다는 소식도 돌았다. 소식에 따르면, 6월 4일 저녁 무렵, 당시 중기위 서기인 우관정이 쑹핑순을 찾아 2시간 동안 담화하며 쑹핑순이 자신의 비리에 대해 ‘확실하게 해명’ 하기를 요구했다고 한다. 우관정이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쑹핑순이 자살한 상태로 발견됐다. 2008년 1월 10일, 장리창 톈진시 前 당서기가 병사했다. 중국 공식 자료에 따르면 장리창은 1985년 10월에 톈진시 부시장에 임명됐다. 1989년 9월 톈진시 부서기 및 부시장으로 승진했으며, 시 항구관리처 주임을 겸임했다. 1993년 6월 톈진시장에 정식으로 당선되었고, 5년 후 톈진시 당서기, 시 인민대표대회 상무위 주임에 임명됐다. 1999년 국제 사회를 뒤흔든 ‘4.25 파룬궁수련자 평화대청원’은 장쩌민이 7월 20일부터 파룬궁에 대한 탄압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만든 도화선이었다. '4.25 평화대청원' 사건은 톈진 공안국이 현지 파룬궁 수련자를 체포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정법위 서기였던 뤄간(羅幹)을 도와 ‘4.25’ 사건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인물은 톈진시 장리창 서기, 시 공안국 쑹핑순 국장, 시 공안국 우창순(武長順) 부국장 등이었다. 장리창이 병사한 뒤, 장쩌민파의 주요 인물인 장가이리가 톈진시 서기직에 임명됐다. 2012년 제18차 당대회 이후에는 쑨춘란이 뒤를 이었으며 2014년 12월 황싱궈 톈진시장이 대행했다. 이렇듯 톈진은 줄곧 장쩌민파의 손아귀 안에 있었다. 시진핑, 톈진의 여러 ‘호랑이’ 숙청 제18차 당대회 이후, 톈진 관료계의 정화 작업은 계속됐다. 여러 ‘대형 호랑이’들이 연이어 낙마했는데, 전(前) 톈진 공안국 국장 우창순, 톈진시 부시장 겸 안전감독총국장 양둥량(楊棟梁), 톈진시 부시장 인하이린(尹海林), 톈진 대리 서기 겸 시장 황싱궈 등 청국(廳局·국장)급 및 그 이상의 고위 관료들이었다. 2017년 5월 27일 전(前) 톈진 정치협상회 부주석이자 공안국 국장인 우창순이 ‘부패, 뇌물수수, 공금횡령, 기관 비리, 직권남용, 사익 도모’ 등의 죄목으로 사형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2014년 7월 20일 당국은 우창순에 대해 조사 중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우창순은 44년간 톈진시 공안계통에서 일했고, 이 중 11년을 공안국 부국장 겸 공안교통관리국장으로 있었다. 11년간 톈진시 공안국장으로 있으면서 톈진시 관료계와 상업계에 넓은 인맥을 만들어 톈진에서 ‘우예(武爺, 우 나리)’로 불리기도 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시 주석은 중앙기율위의 한 회의에서 우창순 사건에 대해 “(톈진에) 우 나리가 있는데, 톈진의 주차장이 모두 그의 것이더라. 무법천지다. 18차 당대회 후에도 기세가 여전해 전대미문이다”라고 말했다. 우창순이 수차례 위기에도 불구하고 출세가도에 오를 수 있었던 데에는 저우융캉(周永康)의 비호 덕분이라고 차이신넷(財新網)은 보도했다. 쑹핑순 사건 발생 후 우창순은 관련 부처의 조사를 받고 있었다. 당시 중앙 정법위 부서기였던 저우융캉은 베이징 올림픽 안전을 이유로 그를 비호했고 이 같은 사실은 여러 소식통을 통해 알려졌다. 우창순은 1999년 ‘4.25 사건’ 발생의 실질적 주도자이며 핵심 인물이다. 당시 그의 상사였던 톈진부시장 겸 시 정법위 서기, 시 공안국 국장이었던 쑹핑순, 전(前) 정법위 서기 뤄간 등은 ‘4.25 파룬궁수련자 평화대청원’을 ‘파룬궁의 중난하이(中南海) 포위 사건’으로 조작하는 계획에 직접 참여했다. 우창순은 장쩌민의 명령에 따라 톈진의 파룬궁 수련자를 잔혹하게 박해했다. 톈진 공안국장 재임 시절 전력을 다해 파룬궁 수련자를 박해하고 불법으로 체포 구금하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2016년 8월 22일, 인하이린 톈진 부시장이 낙마했다. 그가 낙마한 뒤, 당시 장가오리 톈진시 서기와의 관계가 세상에 밝혀졌다. 현재 상무위에 재임 중인 장가오리는 2007년 3월부터 2012년 11월에는 톈진시 서기를 역임하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시 규획국(規劃局) 부국장이었던 인하이린이 부시장까지 고속 승진했던 것이다. 2016년 9월 10일, 톈진시 대리 서기 겸 시장인 황싱궈가 중대한 기율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황싱궈는 관료 생활 중 시 주석과 함께 근무한 경력이 있지만, 정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장쩌민, 쩡칭훙의 사람으로 분류한다. 황싱궈는 저장(浙江) 닝보(寧波) 시위원회 서기직으로 재임할 당시, 닝보 고속도로의 각 출구마다 거대한 장쩌민의 초상화을 세워 놓았었다. 장쩌민이 전면적으로 정권을 장악하던 1997년, 갓 40세를 넘긴 황싱궈는 이미 저장성 정부 비서장이었으며, 부성장으로 빠르게 승진했다. 한 보도에 따르면, 황싱궈는 장쩌민에게 아첨하는 것을 통해 고속 승진할 수 있었다. 황싱궈와 장가오리는 무척 가까운 사이로, 톈진 정계 안팎으로 서로 밀고 끌어주는 관계로 알려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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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는 장쩌민의 본거지 오랫동안 상하이는 장쩌민의 정치적 둥지였다. 현 상하이시 당서기 한정(韓正)과 지난 1월까지 상하이 시장을 역임했던 양슈웅(楊雄)이 주요 일원이었다. 그들은 상하이를 중심으로 장쩌민의 두 아들 장몐헝(江綿恒), 장몐캉(江綿康)과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공유해왔다. 중국 공산당이 집권한 뒤, 상하이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해왔다. 지난 세기 문화대혁명 기간 마오쩌둥(毛澤東)은 베이징에서의 입지가 불안해지자 상하이의 정치세력과 결탁했다. 상하이 세력으로 구성된 ‘4인방’을 조직했던 것이다. ‘6.4 천안문 사건’ 이후, 상하이 출신 장쩌민은 주석 자리에 올랐고 ‘상하이방’으로 불리는 자신의 정치세력을 적극적으로 조직했다. 그 뒤부터 상하이는 장쩌민파의 본거지이면서 측근들을 최고 지도부로 보내는 예비대대와 같은 기능을 하게 되었다. 비록 2006년 천량위(陳良宇)의 실각과 황쥐(黃菊)의 사망으로 그 세력은 약화됐지만, 상하이가 장쩌민파의 최후의 방어선이자 대본영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동안 상하이 출신으로 출세한 장쩌민파 관료들의 수는 엄청나다. 장쩌민은 상하이시 당서기로 재임하는 동안에만 우방궈(吳邦國), 쩡칭훙(曾慶紅), 황쥐(黃菊), 천량위(陳良宇), 멍지앤주(孟建柱), 한정(韓正), 화지앤민(華建敏), 천즈리(陳至立), 양슈웅(楊雄), 우즈밍(吳志明), 쟈팅안(賈廷安) 등을 발탁했다. 한정은 전형적인 상하이 본토 관리로, 한 번도 상하이를 벗어나지 않았다. 한정은 상하이 시장으로서 천량위(陳良宇), 위쩡성(俞正聲), 시진핑(習近平) 3명의 당서기를 거쳤으며 특히 장쩌민 가족과 밀접하게 지냈다. 로이터 통신사의 보도에 따르면 장쩌민은 한정이 상하이에 머물면서 가족의 이익을 관리해주기 바랐다고 한다. 전 상하이 시장 양슈웅은 정치를 하기 전부터 장몐헝과 밀접한 관계였다. 90년대 초반, 유학을 마친 장몐헝은 상하이에서 상하이 연합투자 회사를 설립하고 자신은 회장, 양슈웅은 사장으로 임명했다. 또한 양슈웅은 장몐헝이 연관된 상하이 항공회사에서 회장, 감사회 주석을 맡은 바 있었다. 홍콩 언론에 따르면 양슈웅은 장몐헝을 도와 상하이에 거대한 자본제국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시진핑, 상하이 장쩌민파 세력을 숙청 최근 몇 년 동안, 시진핑 당국은 장쩌민파를 향한 반부패 드라이브를 진행하며 상하이 정·재계를 숙청해왔다. 낙마한 정·재계 사람들 중 대부분은 장쩌민 및 그 아들과 친분 관계에 있었다. 2015년 11월 1일, 중국 공안은 내역거래, 주식 거래 가격 조종 등의 혐의로 ‘사모(私募)두목’ 상하이 저시(澤熙)투자회사 사장 쉬샹(徐翔)에게 강제 형사 조치를 취했다. 11월 9일, 재신망(財新網)은 <재신주간지>의 표지에 ‘청산일(清算日)’이란 헤드라인으로, 오랫동안 기다려온 청산일이 다가오고 있다고 암시했다. <재신주간지>는 쉬샹의 회사운영 내막을 파헤치고 화런(華潤)과 동방 항공의 부정한 관계를 폭로하여 쩡칭훙, 장몐헝에게 타격을 주었다. 11월 10일, 상하이 부시장 아이보쥔(艾寶俊)이 낙마했다. 2017년 3월 1일, 상하이시 검찰원 전 검찰장 천쉬(陳旭)가 당국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3월 30일, 상하이 공안 고등전문 학교 전 당서기, 상무부 교장 정완신(鄭萬新)이 기소됐다. 그는 한때 장쩌민 조카이자 상하이 전 정치 법률위원회 서기 우즈밍의 조수였다. 6월 2일, 장몐헝의 측근, 상하이시 전 부비서장 다이하이보(戴海波)가 뇌물수수와 해외예금 죄로 징역 9년을 선고받았다. 지속적으로 퍼지는 우즈밍 관련 소문 현 상하이 정협 주석 우즈밍이 연일 범죄와 관련된 소문에 오르내리고 있다. 우즈밍은 장쩌민 동생 장쩌콴(江澤寬)의 아들로 장쩌민에 의해 발탁됐다. 1998년부터 상하이시 공안국 부국장, 국장, 당서기, 상하이시 상무, 정치법률위원 서기 등을 역임했다. 2012년 5월부터 우즈밍은 상하이시 정치 협회 부주석, 2013년 1월부터 상하이시 정치 협회 주석을 맡아왔다. 우즈밍은 상하이 공안국 국장과 정치 협회 서기로 재임한 10여 년 동안, 장쩌민의 파룬궁 박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상하이는 파룬궁 박해가 가장 심각한 도시 중 하나였다. 파룬궁 박해와 관련된 진상 조사를 진행 중인 해외국제조직은 악인(惡人) 리스트에 그의 이름을 올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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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집권 이전, 후진타오(胡錦濤)-원자바오(溫家寶) 10년 간 어떤 정책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정령불출 중난하이(政令不出中南海, 정책이 지도부가 있는 중난하이 밖으로는 전해지지 않는다)'의 주원인은 장쩌민파가 각 지방의 성, 시 요직을 독점했기 때문이다. 상당수의 도시가 장쩌민 일파의 ‘독립 왕국’으로 전락한 상황 하에서 시 주석은 19차 당대회를 앞두고 인사 개혁을 단행했다. 전국 31개 성, 시 주요 보직에 모두 측근들을 배치했다. 따라서 19차 당대회 전부터 장쩌민 일파의 전국 지방 세력은 전면 패산할 위기에 처했다. 베이징은 예로부터 ‘천자의 발아래’ 놓인 수도로 불려왔다. 이곳의 안정과 안전은 정치 판세를 좌우했다. 정치 투쟁에서 수도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다는 것은 정적에게 급소를 보이는 일과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권력 투쟁 요지인 베이징 시에서 베이징 위수구(衛戍區·경비부대), 베이징 시정부 및 중앙경위단(中央警衛團)의 권력을 장악하지 못한다면 중국 최고 지도자도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는 것이다. 특히 베이징 시위원회 서기직은 중국 지방 제후의 우두머리 격으로, 중앙 정치국 일원이 확실시 되는 자리이다. 19차 당대회 개최를 앞둔 지금, 이곳의 인사권을 둘러싼 주도권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장쩌민파, 장기간 베이징 장악 베이징 시 당정 권력은 장쩌민파가 장기간 장악해왔다. 장쩌민 집권 후, 천시퉁(陳希同) 전 베이징시 당서기는 수차례 장쩌민의 영도 권위에 도전했다. 1995년 4월, 왕바오썬(王寶森) 전 베이징시 부시장 자살 사건을 시발점으로 장쩌민은 베이징 시위원회와 천시퉁을 숙청해나갔다. 1998년 7월, 천시퉁이 16년 형을 선고받고 나서야 장쩌민은 실질적으로 당정군(黨政軍) 대권을 모두 차지할 수 있었다.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웨이젠싱(尉健行)이 과도기의 베이징시 당서기직을 역임했던 것을 제외하면, 최근까지 이 자리는 장쩌민의 측근들로 채워졌다. 푸젠(福建)성 당서기였던 자칭린(賈慶林)이 베이징 시장을 거쳐 베이징 당서기로 전임한 것을 시작으로 2002년에는 류치(劉淇)가 넘겨받았다. 2012년에는 궈진룽(郭金龍)이 그 뒤를 이어 베이징시 당서기직을 맡아 2017년 5월까지 재임했다. 장쩌민파 요원 왕안순(王安順) 18차 당대회 이후, ‘석유방(石油幫)’ 출신 왕안순이 베이징 시장을 맡았다. 그는 ‘석유방’의 대부 저우융캉(周永康), 쩡칭훙(曾慶紅)의 측근 중 한 사람이다. 저우융캉과 왕안순은 동북 석유 계열과 관련 있을 뿐 아니라 국토자원부에서 함께 일하며 밀접한 상하 관계를 유지해 왔다. 당시 저우융캉은 국토자원부 부장, 왕안순은 국토자원부 인사교육사(人事教育司) 사장(司長)직을 맡고 있었다. 1999년 저우융캉이 쓰촨(四川) 성 당서기로 전임한 뒤, 왕안순도 간쑤(甘肅)성 위원회 조직부장으로 승진했다. 대략 2년 만에 왕안순은 다시 상하이 시위원회 조직부장으로 승진, 천량위(陳良宇)를 보필했다. 이 때 중앙 조직부장은 쩡칭훙이었다. 천량위가 낙마하자 쩡칭훙은 왕안순을 베이징시 부서기, 정법위원회 서기로 전임시켰다. 2012년 왕안순은 시장 대행을 맡았으며 2013년 1월 시장으로 선출됐다. 한편, 궈진룽, 왕안순, 뤼시원(呂錫文) 등은 모두 장쩌민의 뒤를 따라 파룬궁(法輪功) 박해에 가담했으며, ‘파룬궁박해 추적조사 국제조직'(WOIPFG)’의 범죄 혐의 책임자 명단에 올랐다. 시진핑, 베이징의 장쩌민파 관료 청산 일전에 홍콩 언론은 시진핑의 베이징 인사 배치 및 구상이 저항을 받아 실천하기에 어려웠으며 일부 베이징 관료들이 겉으로만 따르면서 뒤로는 반발한다고 보도한 바 있다. 시진핑이 베이징 부시장 겸 공안국장 왕샤오훙(王小洪)을 베이징 시위원회 부서기로 임명하려 했을 당시 베이징 관료들이 규정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발했다는 후문이 전해진 바 있었다. 지난 몇 년간 시진핑은 끊임없이 베이징의 장쩌민파 관료를 제거해왔다. 류치(刘淇)의 측근이자 전 베이징시 당서기인 뤼시원(呂錫文)이 실각했으며 ‘석유방’ 출신의 전 베이징 시장 왕안순은 국무원발전연구센터(國務院發展研究中心)로 전출됐다. 전 베이징 시위원 상무위원이자 부시장인 천강(陳剛)은 남수북조(南水北調) 판공실 주임으로 좌천되었고 전 베이징 시 상무 부시장 리스샹(李士祥)은 2선으로 물러났다. 2017년 2월 9일, 베이징시는 기율위 제6차 회의를 개최하며 뤼시원 사건의 정치적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베이징 관료 15명을 조사 처리했다고 발표했다. 2월 12일, 중앙기율위 제11 순시조는 베이징 시위원회를 순시한 결과를 보고했다. 베이징 시의 ‘정치적 스탠드가 높지 않은’ 등 여러 문제와 뤼시원 사건에 대한 후속 처리 업무가 제때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시진핑, 베이징에 자기 편 인원 ‘투입’ 5월 27일 차이피(蔡奇) 베이징 시장이 베이징 시위원회 서기로, 천지닝(陳吉寧)은 대리시장으로 임명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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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중국 경제지 차이징(財經)은 우샤오후이(吳小暉) 안방(安邦) 보험 그룹 회장이 9일 중앙 당국에 연행됐다고 단독 보도했다. 이 기사는 게재되고 몇 시간 뒤 삭제됐다. 차이징에 따르면 우 회장의 측근들은 이미 며칠 전부터 그와 연락이 끊긴 상태다. 올 들어 이미 여러 차례 우 회장 연행설이 돌았지만, 그때마다 공개 석상에 우 회장이 나타나 소문을 뒤집었었다. 지난달 3일, 후슈리(胡舒立) 차이징 편집장과 궈팅빙(郭婷冰) 캐나다 특파원을 상대로 소송을 걸겠다는 공개서한이 공개됐고 같은 달 26일 캐나다 법원에 궈팅빙 기자에 대한 안방그룹의 고소장이 접수됐다. '우 회장 연행' 사실인 이유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근거로 우 회장의 연행 보도는 사실에 가깝다고 본다. 첫 번째는 우 회장의 연행 기사가 나던 날 상하이당 관영매체 펑파이 신원(澎湃新聞)은 ‘2015년 증시가 요동쳤던 원인, 성질 및 대응방안’이란 기사를 보도해 2015년 증시 폭락에 대한 의문점을 제기했다. 기사는 여러 포털 사이트에 게재됐다. 당시 증시 폭락을 일으켰던 공매도(空賣渡, 주가 하락을 예상해 주식을 빌려 팔고 주가가 하락하면 같은 종목을 싼값에 다시 매수해 차익을 챙기는 것)에 우 회장도 가담했다는 보도를 떠올린다면 펑파이신원 기사가 연행 보도와 같은 날 나온 것은 중국 정치의 특성상 당연한 일이다. 중국 당국은 정치적 탄압 대상을 언론에서 먼저 두들긴 다음 탄압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안방보험 측이 예전처럼 차이징 보도에 반박하거나 부인하기는커녕 “우 회장이 개인적인 문제로 회장직을 수행할 수 없어 임원진에게 권한을 위임했으며 그룹 경영에 차질 없도록 했다”고 밝힌 것이다. 다시 말해 우 회장 신변에 문제가 있음을 안방보험이 확인해준 셈이다. 우 회장이 당국에 연행된 데에는 여러 필연적 이유가 꼽힌다. 먼저 덩샤오핑의 손녀사위라는 지위가 그를 위기에서 구출해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는 차이징이 일찍이 “덩샤오핑 일가는 우 회장과의 관계를 단절한 상태”라고 보도한 대목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연행의 결정적 원인이라 보기엔 무리가 있다. 오히려 그의 위기는 정치적 배경과 관련 있다. 반부패 도마 위에 오른 장쩌민파 재계 이번 가을에 제19차 전국대표대회(이하 19차 당대회)가 예정된 만큼 시진핑 국가주석은 장쩌민파를 상대로 반부패 강도를 높이고 있다. 자신의 측근들을 당, 정부, 군사, 지방정부 등 요직에 배치하고 19차 당대회가 끝난 뒤 장쩌민파를 완전히 숙청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장쩌민파로서는 19차 당대회까지 남은 시간이 곧 쿠데타를 일으켜 시진핑 정권에 제동을 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하다. 시진핑 정부 출범 5년간 암살, 대도시 폭탄 테러, 홍콩 난동 사건 등 장쩌민파의 쿠데타 시도는 끊임없었다. 앞으로 남은 최후의 수단은 그들이 오랜 시간 축적해온 경제‧금융 자원을 이용한 ‘경제적 쿠데타’와 ‘금융 쿠데타’일 가능성이 높다. 2년 전 중국의 증시 폭락 사태는 바로 장쩌민파가 중국 경제를 무너뜨리고자 시도한 ‘경제적 쿠데타’였다. 시 주석은 지난해 중국공산당 전체회의에서 “현재 금융시장에 ‘꼭두각시, 첩자, 악어’가 횡행하고 있다”며 거세게 비판했다. 그리고 올 상반기, 장쩌민파가 오랫동안 장악해온 재계에 물갈이가 시작됐다. 지난 1월, ‘자본시장의 큰 악어’로 불렸던 샤오젠화(肖建華) 밍톈(明天) 그룹 회장이 홍콩에서 소환돼 당국의 조사를 받았다. 샤오 회장은 장쩌민파의 돈을 관리하는 ‘집사’이자 쩡칭훙(曾慶紅)의 아들 쩡웨이(曾偉)의 바지사장(白手套)’이었다. 2015년에 벌어진 ‘금융 쿠데타’는 샤오젠화가 계획을 수립, 집행했으며 쩡칭훙 일가와 장쩌민, 장더장(張德江), 장가오리(張高麗), 류윈산(劉雲山) 등이 연관됐다고 법학자 위안훙빙(袁紅冰)이 폭로한 바 있다. 지난 2월, 중국 금융감독 당국은 ‘자본시장의 악어’를 체포하겠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포고했다. 보도에 따르면 샤오 회장은 베이징에 소환돼 장쩌민파의 부정부패를 실토했다. 샹쥔보(項俊波) 중국 보험감독관리 위원회 주석은 그가 실토한 첫 ‘부패 호랑이(부패 관리)'다. 그는 샤오 회장이 2조 위안을 밑도는 막대한 보험금을 가로채도록 도왔다. 막 내린 금융계 악어 시대 지난 4월 9일, 샹 주석은 기율 위반 혐의로 체포돼 중앙 기율위원회의 조사를 받았다. 샹 주석이 낙마한 그날 밤, 3월 21일자 리커창 총리(李克強)의 발언이 공개돼 더욱 눈길을 끌었다. 리 총리는 “사익을 취하는 관리들과 ‘금융악어'의 내외 결탁 등 불법행위에는 반드시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