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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가을, 제19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이하, 19차 당대회)가 개최될 예정이다. 이번 19차 당대회는 중국 공산당과 시진핑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향후 정세와 시진핑의 미래가 이 결과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이다. 19차 당대회가 점점 가까워 오면서 중국 공산당 고위층의 권력 투쟁은 격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최근 인터넷 상에서 한동안 잠잠했던 장쩌민 부자 관련 소식이 확산되고 있다. 이는 장쩌민파가 공중 분해됐던 자신의 진영을 추스르기 위한 책략으로 풀이된다. 이와 동시에 미국 체류 중인 부호 궈원구이(郭文贵)는 왕치산(王岐山) 당 중앙 기율위 서기와 관련하여 부패 사실을 폭로하면서 언론의 초점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시진핑 당국의 반부패 드라이브는 해외발 부패 폭로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 보인다. 5월 31일과 6월 1일, 중국 정부는 낙마한 부부급(副部级, 차관급) 관료 아홉 명에 대해 실형을 선고했다. 그 중 네 명은 무기징역을 받음으로써 시진핑 당국의 반부패 개혁이 고강도, 가속화했음을 보여준다. 시진핑 반부패 호랑이 사냥의 유래 장쩌민 부자 관련한 여론 조작 및 궈원구이의 폭로는 중국 고위층과 19차 당대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시진핑 당국이 반부패 드라이브를 펴게 된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8차 당대회 개최 전인 2012년 2월, 왕리쥔(王立軍)이 미국 총영사관에 망명을 시도하면서 보시라이(薄熙來)가 낙마했다. 이 의외의 사건은 중국 정세를 바꿨다. 이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집권 이후 5년 동안 시진핑은 지금과 같은 대대적인 반부패 정책을 시행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정치국 상무위원이 된 보시라이가 주도한 쿠데타에 의해 권력을 찬탈당한 뒤 친청(秦城)교도소로 보내졌을 수도 있다. 이 같은 시나리오가 장쩌민과 쩡칭훙이 계획하던 바였기 때문이다. 보시라이의 갑작스러운 낙마로 인해 시진핑은 후진타오, 원자바오의 힘을 등에 업고 왕치산과 손을 잡아, 18차 당대회 이후 당 내부에서 순리롭게 반부패 운동을 진행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반부패 드라이브를 통해 저우융캉(周永康), 쉬차이허우(徐才厚), 궈보슝(郭伯雄) 등 장쩌민파의 실세를 숙청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 시진핑은 2017년 가을에 열리는 19차 당대회까지 반부패 드라이브를 펼쳐 장쩌민파 보스인 장쩌민과 쩡칭훙(曾庆红)을 숙청하려는 계획이다. 장쩌민에게 다가올 재앙 폐쇄적인 체제와 규율을 지닌 중국 공산당의 성격 상, 지도자의 권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회의 개최 등의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당의 인정을 받아야만 한다. 이 때문에 19차 당대회에서 확정될 고위급 인사를 둘러싸고, 당 내부의 쟁탈전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현재 당 내부에서는 주로 네 개 부분을 두고 세력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군대, 정법, 선전 및 지방성급 관리이다. 쉬차이허우와 궈보슝이 낙마한 현재, 시진핑은 전면적인 군사개혁을 단행해 군권 안정을 꾀했다. 저우융캉이 낙마한 뒤로 3년째에 접어든 정법계통의 경우도 인사는 완전히 교체되었으며 개혁은 현재 진행 중이다. 선전부문에서는 장쩌민파 류윈산(劉雲山)이 여전히 상무위원으로 재직 중으로, 대부분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하지만 19차 당대회에서 낙마가 유력한 인사 중 하나로 꼽힌다. 지방 성급 도시의 경우 31개 성급 도시의 당정(黨政) 최고 책임자들이 이미 인사이동을 마쳤으며 시진핑 진영의 인물들이 계속해서 등용되고 있다. 특히 매우 중요한 지역인 베이징은 이미 시진핑의 직계 인사가 장악했다. 상하이는 서기직만 남았는데 아마 19차 당대회 전에 시진핑 진영의 인물이 등용될 것으로 보인다. 또, 장쩌민파 최후의 인물인 상무위원 장더장(張德江), 류윈산, 장가오리(張高麗)는 19차 당대회 이후 자리에서 물러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같이 19차 당대회가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장쩌민과 쩡칭훙은 재앙과 다름없는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따라서 장쩌민 진영은 19차 당대회 전, 시진핑 정부의 반부패 드라이브에 제동을 걸어 숙청을 피할 마지막 기회를 엿보고 있다. 이 상황에서 해외 체류 중인 궈원구이가 돌연 왕치산을 겨냥한 부정적 소문을 폭로했다. 이러한 행동의 근본적인 배경에는 장쩌민과 시진핑의 세력다툼이 존재한다. 즉 궈원구이 배후에 있는 원로 간부(老領導)가 궈원구이를 조종하여 시진핑 진영을 공격한 것이다. 해외서 왕치산 부패 문제가 폭로된 원인 시진핑과 왕치산의 반부패 드라이브의 측면에서 궈원구이의 비리 폭로 행동을 살펴보면, 이 사건은 시진핑이 정법계통에 속하는 쩡칭훙의 해외 국가안전부 특무계통을 숙청한 여파라고 할 수 있다. 쩡칭훙의 심복이었던 마졘(馬建) 국가안전부 부장이 낙마한 사건이 그 시작이었다. 이후 쩡칭훙의 해외 국가안보계통이 숙청되기 시작했다. 현재 시진핑은 해외에 소속된 국가안보계통에 대해 대대적인 인사교체와 조직 재편성을 단행하고 있다. 이 같은 일련의 사건들이 궈원구이가 왕치산의 비리를 폭로하게 만든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왕치산은 시진핑의 반부패 드라이브의 일등 공신으로, 그는 반부패 호랑이 사냥 과정에서 중국 공산당 내부, 특히 장쩌민 집단의 가족과 이익집단을 타격했다. 특히 올해 시진핑과 왕치산은 금융계통의 장쩌민과 쩡칭훙 관련 인물들을 집중적으로 숙청했다. 이와 같은 상황을 고려했을 때 왕치산이 상대편의 타겟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치적 세력 다툼은 협상, 거래, 타협을 통해 최종적으로 양측이 모두 수용 가능한 이익 균형점을 찾는 것이다. 궈원구이가 해외에서 비리를 폭로한 일은 단지 상대를 향한 기세 싸움이며 폭로한 내용 자체는 표면적인 카드와 수단에 불과하다. 고위 관리의 부패 이력, 사생활이 난잡한 것은 이미 중국 공산당의 일반적인 관례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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밍후이왕(明慧網)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중국 산둥(山東)성 빈저우(濱州)시 저우핑(鄒平)현 검찰원은 저우핑 국내보위국(國保)이 파룬궁 수련자 자오홍웨이(趙紅偉)를 체포한 사건에 대해 증거 부족으로 체포를 불허한다고 밝혔다. 2017년 4월 22일, 자오홍웨이는 석방돼 귀가했는데 이는 최근 1년 사이 중국 대륙에서 파룬궁 수련자들이 무죄로 석방된 최근 사례이다. 2016년부터 지금까지 밍후이왕(明慧網)은 중국대륙 각지에서 법원, 검찰원(檢察院), 공안(公安)이 파룬궁 수련자들을 무죄로 석방한 사례에 대해 보도했다. 이 사례들은 산시(山西), 허베이, 랴오닝, 장쑤, 베이징, 헤이룽장 등 전국의 각 성과 시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특히 지난 3월 중국 양회(兩會-전국인민대표대회,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이후 석방 사례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18년간 지속된 장쩌민 집단의 파룬궁에 대한 박해가 이미 궁지에 몰렸으며 전국에서 점점 많은 공안·검찰·법원·사법 기관의 직원들이 양심과 정의에 따라, 법에 의거해 판결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전체적으로 파룬궁에 대한 박해는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밍후이왕의 통계에 따르면 3월 한 달 동안만 중국에서 약 715명의 파룬궁 수련자가 붙잡혔으며 110명이 불법으로 형을 선고받았고, 232명이 재산을 몰수당했으며 25명이 세뇌반(洗腦班)에 끌려갔고, 4명이 극심한 박해를 받다 세상을 떠났다. 대기원 사이트는 최근 특집으로 <중국서 파룬궁 박해로 ‘응보’ 받은 사례>를 게재했다. 글에는 파룬궁을 박해한 18년간 박해로 인해 인과응보의 결과를 얻은 사례가 기록돼 있다. 보기만 해도 끔찍한 사례들은 충격을 주고 있으며 ‘인과응보’의 도리를 생각나게 한다. 또한 아직도 파룬궁 박해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경고와 두려움을 주며 자신의 생명과 미래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라도 파룬궁 박해에서 손을 털도록 한다. 파룬궁 수련은 중국 헌법에서 규정한 신앙의 자유는 물론 국가의 법률 및 법규에도 부합한다. 반대로 장쩌민 집단이 국가의 공권력을 이용해 경찰, 검찰, 법원으로 하여금 파룬궁을 박해하게 한 행위는 명백한 위헌이다. 따라서 파룬궁 박해를 중지할 수 있는가는 당국이 정말로 ‘의법치국(依法治國·법에 의거해 나라를 통치)’을 실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시금석이라 할 수 있다. 시진핑 당국이 계속해서 ‘의법치국’ 실현을 내세우고 있으나 공산당 체제라는 제약으로 인해, 저우융캉이 낙마하고 그의 추종세력 다수가 축출된 상황에서도 정법 계통은 아직도 저우융캉 시기의 체제 안정 유지의 모델에 따라 운영되고 있다. 중국은 전국의 국가기구를 동원해 18년간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지속해왔다. 이로 인해 법제시스템은 철저히 무너졌다. 경제 및 사회적 위기도 폭발하고 있으며 사회는 무질서한 상태로 치닫고 있다. 현재 중국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난맥상도 이 점을 증명하고 있다. 2016년 4월 25일, 시진핑은 전국종교공작회의(全國宗教工作會議)를 소집해 장쩌민의 종교탄압정책을 바꾸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시간의 선택에 있어 공교롭게도 1999년 파룬궁의 ‘4.25’ 중난하이 평화 대청원의 기념일을 앞두고 이러한 신호를 보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2017년 4월 25일, 시진핑은 정치국회의(政治局會議)를 주재하며 <중앙 정법기관 순시 정황에 관한 특별주제 보고>를 심의했다. 정치국회의가 정법계통에 대해 단독으로 특별주제 보고를 심의한 것은 매우 드문 일로, 이는 정법계통에 커다란 변화가 있을 것임을 시사한다. 세상사와 정국의 발전, 국내와 국제의 정세는 이미 새로운 궤도에 진입했으며 중국과 세계는 모두 커다란 변화를 맞고 있다. 올해는 파룬따파(法輪大法)가 세상에 전해진 지 25주년이자 파룬궁의 평화적인 반박해와 진상을 알린 18주년이다. 파룬궁은 이미 중국에서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으며 세계 120여개 국가 및 지역에 보급됐다. 파룬따파의 아름다움은 전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중국 공산당의 파룬궁 박해 18주년, 이 과정 중에 폭로된 사악함과 죄악은 세상이 다 알고 있다. 파룬궁 수련자를 대상으로 한 대규모의 생체장기적출 사건은 국제사회에 낱낱이 드러났고 국제적 비난을 받았다.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미국은 전통적 스탠스로 회귀하기 시작했으며 세계정세도 이에 따라 거대한 변화가 발생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의 파트너 북한은 붕괴의 길로 나가고 있으며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정권의 멸망은 세계적 흐름이다. 중국의 전통 및 세계 보편적 가치로의 회귀는 누구나 바라는 바이며 하늘의 뜻이다. 2017년 4월 6일 트럼프와 시진핑의 회견 당일, 트럼프는 시리아를 향해 토마호크 59발을 발사할 것을 미군에 명령했다. 트럼프는 시리아의 민간인 학살이 치를 떨 만큼 잔혹한 행위로서 가장 악랄한 죄악 중 하나이며 결코 용서받아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시진핑은 트럼프의 행동에 대해 이렇게 반응했다. “누구든지 독가스를 사용하면, 특히 이렇게 잔혹하게 아동과 영아에 대해 독가스를 사용한다면, 이들에게 이렇게 행동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고. 그렇다면 18년간 장쩌민파의 파룬궁에 대한 잔혹한 고문, 학살 및 강제장기적출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이러한 ‘지구상에서 있어 본 적 없는 전대미문의 악행’은 세계인의 선악에 대한 판단 앞에서 선택의 시금석이 되었다. 분명 세계는 이러한 죄악이 계속되는 것을 절대 용서치 못할 것이다. 파룬궁 수련자들이 계속해서 석방되고 있고, 파룬궁 박해가 더 이상 지속되기 힘들어졌으며 사람들은 변화를 갈망하고 있다. 중국의 사회와 정세는 급변을 마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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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시진핑이 왕치산을 조사하기 시작했다는 해외발(發) 소식이 장쩌민(江澤民)파가 지원하는 언론을 통해 확산된 적이 있었다. 일부 평론가들까지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모양새가 나타났다. 사실 이러한 불화설 조작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비슷한 풍문이 다시금 횡횡하는 것뿐이므로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원인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19차 전국인민대표대회(이하 19대)’가 다가오면서 시진핑 진영이 장쩌민 세력을 숙청하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패 척결 호랑이 사냥은 이미 장쩌민, 쩡칭훙(曾慶紅) 등의 주변과 본인들을 향하고 있다. 또 ‘19대’에서 시진핑의 최측근 인사들이 중요직에 배치될 것으로 예상된다. 붕괴 직전에 처한 장쩌민 일파는 필연적으로 국내외 모든 자원을 투입해 필사의 저항을 펼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장쩌민파의 계획은 시진핑과 왕치산의 불화 소식을 확산시켜 두 사람 관계를 이간질시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정치적 동맹을 흔들고 부패 척결 호랑이 사냥을 중단시키려는 책략이다. 또한 자신들이 저지른 파룬궁 박해와 강제장기적출이라는 죄악에 대한 대가를 치르지 않으려는 속셈도 있다. 이 같은 행동은 지난 몇 년간 시진핑에 저항하기 위해 진행한 정변과 연장선상에 있다. 왕치산이 등장한 뒤 ‘당내 부패 현상이 효과적으로 통제’ 됐다는 시진핑의 말을 해외 평론가 가오신(高新)은 논평에서 인용한 적이 있다. 또한 왕치산이 ‘주군을 위협할 만큼 공이 큰(功高震主)’ 상황에 이르렀다고 평가한 해외 언론보도도 소개했다. 그러나 이는 시진핑과 왕치산 간의 긴밀한 관계를 알지 못해서 나온 인식이다. 시진핑은 왕치산의 충성심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시진핑이 왕치산을 두고 유일하게 고민하는 것은 ‘19대’에서의 연임 유무일 뿐이다. 그를 연임시키지 않는다면 부패 척결의 지휘를 누가 수행해나갈지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시진핑 정부 출범 이후, 왕치산과 시진핑이 장악한 당 중앙기율위원회(이하 중기위)는 장 쩌민파와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하고 힘 있는 기구로서 큰 역할을 해왔다. 시진핑이 왕치산을 조사한다면 자신의 집권과 반부패의 동력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이러한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왕치산, ‘19대’서 유임될까? 중국 관료계 규정에 따르면, 사국급(司局級)과 부부급(副部級) 관료의 퇴직 연령은 60세, 정부급 관료는 65세이다. 하지만 정치국 위원의 퇴직 연령은 70세로 높은 편이다. 2002년 장쩌민, 쩡칭훙은 리루이환(李瑞環)에게 퇴임 압력을 넣기 위해 '7상8하(七上八下)‘라는 규정을 만들었다. 즉, 67세일 경우에는 다음 기수에도 정치국 상무위로 연임 가능하나, 68세에는 반드시 퇴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1948년생인 왕치산은 올해 68세를 넘기게 된다. 왕치산은 현재 엄격한 조치를 통해 당내 부패 악화를 방지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이를 완수한 뒤에는 ‘근본을 해결하는’ 정치적 개혁에 착수할 것이라고도 말했다. 그의 계획에 따르면, 지난 ‘18차’의 5년은 ‘표면적 문제를 처리하는(治標)’ 기간이었다면 ‘19대’부터는 권력 감독 개혁 및 당내 민주를 확대하는 등 ‘근본적 해결(治本)’ 조치가 따를 예정이다. 시진핑은 왕치산의 전략에 전폭적으로 동의했다. 이 때문에 ‘19대’에서의 왕치산 유임은 시진핑 정치 전략의 전제 조건일 수밖에 없다. 2013년 6월 전국조직공작회의(全國組織工作會議)에서 시진핑은 단순히 나이를 기준 삼아 간부를 등용할 수는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지난해 11월 7일 중기위 감찰부 홈페이지에는 중앙판공청(中央辦公廳)이 발표한 <베이징(北京)시, 산시(山西)성, 저장(浙江)성의 국가 감찰체제 개혁시범 지역 지정 방안>이 게시됐다. 이 방안에 따르면, 베이징, 산시, 저장 3개 지역이 시범 지역으로 선정되어, 인민대표대회가 계획한 감찰위원회를 설립할 예정이다. 이 새로운 기구는 ‘국가 감찰 기능을 수행하는 전문 기관’으로 자리잡을 전망이다. 감찰위원회 시범지역 설치는 사실상 기율위의 권력을 확대하고 왕치산을 위한 기반을 다져준 조치로 풀이된다. 시진핑이 권력 핵심으로 자리한 뒤 왕치산은 계속해서 그를 보좌해 부패 척결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장쩌민 일파를 제외한 공산당 고위층의 공조와 지원을 받은 바 있다. 보도에 따르면 쑹핑(宋平), 주룽지(朱鎔基), 츠하오톈(遲浩田), 우이(吳儀) 등 공산당 원로들이 서한을 통해 정치국 상무위와 중앙기율위 서기직에 왕치산을 유임시키라고 정치국에 요청했다. 또한 백여 명의 고위 관료들은 연판장을 작성해 왕치산의 연임을 주장했다. 향후 왕치산이 ‘19대’ 상무위에 연임될 가능성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또한 전보다 더욱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 고위층 권력 구조가 변화하고 있는 시점에서 미래 정치국 상무위의 실질적 권력은 약화될 것이 분명하다. 이에 따라 왕치산의 당내 직무도 국가 정부 직위(당내 직위가 아닌), 즉 감찰위원회 주임으로 변경될 가능성이 높다. 장쩌민 일파의 끊임없는 기습 공격 속에서 왕치산의 ‘19대’ 연임 여부가 향후 정치국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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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중국 공산당 제18차 전국인민대표대회 후,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집권했고 리커창(李克強)은 총리직을 맡아 경제를 장악했으며, 왕치산(王岐山)은 기율검사위원회를 휘어잡고 부패 관료를 처벌했다. 리커창과 왕치산은 시진핑 주석의 부패 척결 호랑이 사냥의 주요 인물로, ‘3대 마차(三駕馬車)’, ‘시-리 체제(習李體制)’, ‘시-왕 체제(習王體制)’ 등의 용어가 언론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해외에서 장쩌민(江澤民)파를 배경을 둔 언론은 시진핑 주석과 리커창 총리 간의 불화 소식을 흘렸으나 원하는 바를 얻지 못했고, 최근에는 해외에서 시진핑과 왕치산 사이에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는 보도를 내보냈다. 이 보도는 많은 주목을 받았는데 그렇다면 시진핑과 왕치산 사이의 관계는 도대체 어떠한가? 두 사람 간의 진실한 관계는 미래 중국의 정세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 중국 언론에 나타난 시-왕 관계 중국 18차 당대회 이후 시진핑 주석과 왕치산이 과거 청년시기의 친밀한 관계에 대한 보도가 중국 언론에 다수 나타났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진핑이 부(副)성급 간부를 지내던 시절, 옌안(延安)시 옌촨(延川)현의 장쓰밍(張思明) 작가협회 주석은 옌촨현 량자허(梁家河)에서 시진핑의 옌안 지식청년 시절의 경력에 대해 인터뷰한 바 있다. 장쓰밍이 2002년 푸젠(福建) 성 성장이었던 시진핑을 방문할 당시, 시진핑은 그에게 1969년 농촌 하방(下放) 초기 베이징(北京)에서 옌촨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여정이 너무 길어 펑좡(馮莊)에 들러 왕치산에게 하룻밤을 신세진 적이 있는데 당시 두 사람은 한 이불을 덮고 잤다고 말했다. 당시 시진핑은 경제 관련 책을 한 권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왕치산에게 주고 왔다고 한다. 중국 매체가 시진핑과 왕치산의 밀접한 관계를 대대적으로 보도한 것은 시진핑과 왕치산이 정치적 동맹이라는 정보를 대외적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또한 뉴스보도의 세부 사항으로 볼 때 시진핑과 왕치산의 친밀한 관계가 진실함을 보여준다. 왕치산, 시진핑을 도와 장쩌민파 고위 관료 백 명 처단 중국의 기형적인 정치 체제는 일반적인 국가와 정부의 권력 조직 체계와 다르다. 중국 공산당의 체제하에 부패는 ‘창타이(常態·normal)’가 되어 버렸고, 중국의 뿌리 깊이 스며들었다. 시진핑 주석은 정상적인 법률 절차와 방법으로는 부패를 척결할 수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당내 기구인 중앙기율위원회(中紀委·중기위)의 힘을 빌려 부패와 맞설 수밖에 없었다. 왕치산은 금융업, 지방 고위관원, 중앙 부처와 국무원 총리를 거치면서 ‘소방대장’ 또는 ‘청도부(清道夫)’로 불렸다. 중국 공산당 18차 당대회 후, 시진핑, 왕치산은 강력한 부패 척결 호랑이 사냥에 나섰고, 당내, 군대 및 지방 성(省)과 시 등에 장기간 자리 잡고 있던 장쩌민 세력을 와해시키는 데 주력하면서 새로운 인사 배치를 완성했다. 4년여 시간 동안 왕치산은 시진핑을 도와 당·정·군(黨政軍) 고위 관료 100여 명을 낙마시켰으며, 이 중 대다수가 장쩌민 일파의 인물이었다. 정국급(正國級·국가지도자급) 저우융캉, 부국급(副國級·부총리 이상의 국가직) 쑤룽(蘇榮), 쉬차이허우(徐才厚), 궈보슝(郭伯雄) 등등이 이에 속한다. 지금까지 부부급(副部級·차관급) 이상의 관료 153명, 군대와 무장경찰 내의 부군급(副軍級.영관급) 이상의 관원 59명, 총 212명을 척결했다. 왕치산의 반부패 척결은 중국의 각 이익 집단을 건드렸는데, 특히 장쩌민 집단 가족의 기득이익을 건드렸다. 때문에 장쩌민 일파는 왕치산에 대한 여론 공격을 끊임없이 진행했고, 심지어 여러 차례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왕치산, 수차례 암살 위기에 놓여 홍콩 <동향(動向)>지 2016년 12월 호 보도에 따르면, 2016년 11월 말 왕치산은 차를 타고 산시(山西) 성 양취안(陽泉) 시를 순방 중이었다. 그가 타고 있던 차량 행렬이 타이위안(太原) 시 교외를 지난 후 앞서가던 SUV 차량이 진중(晉中) 시 고속도로 교차로에서 약 200m 떨어진 지점에서 컨테이너 트럭 한 대와 충돌했고, 해당 SUV 차량은 전소됐다. 보도는 이 충돌 사건이 왕치산이 중앙기율위 서기로 재임한 이래 공식적으로 파악된 27번째 암살 시도라고 했다. 당시 컨테이너 차량은 고의로 교차로 입구에 정차하고 기다리던 중이었다고 한다. 이 보도에 따르면, 왕치산이 중앙기율위 서기직을 맡은 이래 최소 17차례의 무장, 기계, 차량 등을 이용한 암살 시도가 있었으며, 우편, 소포를 이용한 화학약품 음해가 8차례 있었다고 한다. 이 밖에 허베이(河北), 쓰촨(四川) 등에서 초대소의 음용수나 죽 등에 독을 탄 사례가 각각 한 차례 있었다. 2015년 3월 27일에서 28일, 왕치산은 허난(河南) 성에 조사를 나갔다. 3월 28일 새벽 4시, 왕치산 일행을 맞은 허난성 위원회 초대소가 정전됐고, 4시 20분에 보조 장비로 다시 가동됐다가 5시 10분경 재차 정전됐다. 같은 시각, 성 위원회 보위부 전용 차량 3대가 차고에서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왕치산 일행은 당일 저녁 정저우(鄭州)시 경비구역 초대소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변경했으며, 중앙 보위부처가 이 사건을 3.28 폭력 암살 사건으로 규정하고 조사를 진행했다. 홍콩 언론은 2013년 8월 말 왕치산이 장시(江西) 난창(南昌)에서 겪은 암살 위험을 보도하기도 했다. 왕치산 일행이 난창 지역을 시찰할 당시, 그들이 묵었던 성(省) 초대소 제5원의 전화, TV, 전기가 돌연 50분가량 꺼졌다. 그 사이 두 명이 제5원으로 잠입했다가 왕치산의 수행 경호원에게 잡혔다. 이들 두 명은 잡혔을 당시 자살을 기도하면서 자신들은 ‘민원을 하러 온 사람’들이며, 왕치산에게 ‘억울한 사건’을 해결해 달라 부탁하려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사 결과 이들 두 사람은 공안 계통에서 제명된 경관으로, 고용된 암살자임이 드러났다. 과거 여러 언론이 폭로한 바와 같이 후진타오(胡錦濤) 전(前) 국가 주석도 장쩌민 일파의 암살 시도를 세 차례 겪은 바 있다. 시진핑 주석의 경우 18차 당대회 이후 최소한 6차례 암살 시도를 받았고, 이후 조사된 사실에 따르면, 모두 내부 인사가 암살자를 고용한 사건이었다. <하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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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총리의 권한은 어느 정도일까? 역대 총리 7명을 살펴보면, 이 중 저우언라이를 뺀 6명 모두 3대 권력(군대, 선전 계통, 정법 계통)을 손에 넣지 못했다. 그나마 저우언라이는 군과 정부기관의 부분적 지배권을 확보했지만 늘 마오쩌둥의 눈치를 봐야 했다. 장쩌민이 국가주석을 하던 1998~2013년에 총리의 입지는 더욱 좁았다. 당시 중공 최고 권력을 장악한 장쩌민은 파룬궁 탄압을 확산하려 많은 당원과 공무원에게 탄압 가담의 대가로 부패와 비리를 묵인했다. 사실 장쩌민 자신부터 부패에 앞장서서 친족 중심으로 세력을 넓혀 ‘장쩌민파’를 형성했다. 이미 강대한 세력이 된, 부패한 공무원·당원 집단(장쩌민파)은 당시 주룽지 전 총리가 경제개혁과 반부패 정책을 추진하는 데 상당한 제약으로 작용했다. 장쩌민이 내려간 후 후진타오 전 주석과 원자바오 전 총리 역시 여전히 강한 장쩌민파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후진타오 재임 시기에 3대 권력을 가진 사람은 쉬차이허우와 궈보슝(군대), 저우융캉(정법 계통), 리창춘(선전 계통) 등 모두 장쩌민의 심복들이었다. 당시 후진타오가 어떤 정책을 결정했어도 중난하이(중공 권력 중심지)를 넘어 지방 정부까지 정책을 집행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원자바오 전 총리는 그보다 더했다. 3대 권력이 없거나 3대 권력을 장악한 지지세력이 없다면 설령 총리일지라도 어떤 영향력도 행사 할 수 없는, 단지 중공의 집사에 불과한 것이다. 시진핑과 리커창의 관계 리커창은 시진핑과 달리 ‘태자당’이나 ‘관얼다이(官二代)’ 출신도 아니고 화려한 집안 배경도 없으며 친족 중심으로 정치적 이익을 나눠 갖는 파벌이 있지도 않다. 두 사람 사이에 근본적인 이익 충돌이 없으므로 리커창이 시진핑의 정치적 위협이 될 가능성은 적다. 두 사람의 불화설 주장은 중공 정치체제의 기본적 상식에 어긋날뿐더러 오히려 두 사람이 갈등을 겪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려는 의도마저 엿보인다. 장쩌민파가 통제하는 중공 기관지 ‘인민일보’는 지난해 5월, 리커창이 “상반기 경제는 양호하며 앞날도 (그럴 것이라) 낙관한다”고 말했지만 시진핑의 한 측근인사는 그와 다르게 “현 중국 경제는 L자형(장기 저성장형)”이라 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친시진핑 홍콩언론 ‘명보’지는 “중국 경제에 대한 시진핑과 리커창의 다른 견해가 두 사람의 불화설을 뒷받침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곧 시진핑이 리커창의 국무 권한을 빼앗았다고 볼 수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언론이 두 사람의 갈등설을 연달아 보도하자 신경이 곤두선 중공 최고지도부가 최근 리커창 총리에 대한 보도를 늘렸다. 목적은 명백하다”면서 “국무원은 정부의 각 정책을 집행하는 기관으로, 누구든 마음대로 국무원 총리의 권한을 빼앗을 수 없다. 그러지 않으면 여러 정부 기관·부서와 협조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홍콩 언론 ‘경제일보’도 “시진핑과 리커창은 당에서 각자 맡은 역할이 있다. 시진핑은 회장 위치에서 회사의 발전 방향과 전략을 정하면서 최고운영책임자(COO)로서 일상적 업무 집행도 총괄한다. 위치가 다르면 사안에 대한 인식도 다르다는 건 이상할 게 없다”고 지적했다. 왕치산이 장쩌민파를 겨냥한 시진핑의 ‘호랑이 사냥’을 진두지휘하고 있다면 리커창은 경제 분야에서 호랑이 사냥을 지원하고 있다. 두 사람은 시진핑 진영의 핵심 주력이다. 장쩌민파의 목적 장쩌민은 국가주석 당시 해외 언론사를 인수하거나 만들었다. 이런 언론들은 중공 내 장쩌민파 고위층의 제보를 바탕으로 여러 번 특종을 터뜨려 독자의 신뢰를 얻었다. 그리고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장쩌민과 장쩌민파에 유리한 ‘가짜뉴스’를 퍼뜨려 왔다. 이를테면 한 언론이 지난 2015년에 “장쩌민에 대한 경호등급이 1급에서 2급으로 내려갔지만, 생활면에서 예우는 달라지지 않았다. 최근 2년간 장쩌민의 건강이 악화하자, 중국 정부는 해외에서 전문의를 초빙하도록 허용했다”고 보도한 것이 그렇다. 해당 기사는 겉보기에 장쩌민의 경호등급이 내려갔고 대우도 전만 못하단 내용이었지만, 사실 그 속에는 장쩌민이 여전히 건재하고 시진핑 진영에 의해 연금된 게 아니란 숨은 뜻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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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5일, 중국 양회(中國 兩會, 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가 막을 내렸다. 일부 언론은 시진핑 국가주석과 리커창 국무원 총리의 내부 균열 조짐을 전하면서 두 사람이 마치 적대시하는 것처럼 보도했다. 2013년 3월 시진핑이 국가주석에, 리커창이 국무원 총리로 취임한 이후 일부 언론은 줄곧 시 주석과 리 총리의 불화설을 보도했다. 예를 들면 지난해 8월 비공개로 열린 베이다이허(北戴河) 회의와 관련해 해외 중화권 매체가 ‘시 주석이 리 총리의 실권을 빼앗으려 해, 두 사람이 권력 투쟁을 벌이고 있다’고 보도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매체가 불화설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홍콩매체 ‘경제일보’는 올 양회에서 시 주석과 리 총리가 친밀감을 드러내는 손짓을 자주 하면서 대화했다고 보도했다. 불화설을 보도한 언론은 대개 중국 공산당(이하 중공) 내 장쩌민 파벌(이하 장쩌민파)이 장악한 매체들이다. 시 주석과 리 총리의 불화설은 사실일까? 불화설 보도가 노리는 건 뭘까? 당서기가 기관장에게 지시하는 정치체제 현재 대부분 국가는 대통령제 아니면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다. 대통령제는 국민이 국가원수이자 최고 행정권자인 대통령을 선거로 직접 선출하는 제도로, 미국은 세계 최초로 대통령제를 도입한 국가다. 의원내각제는 선거로 구성된 의회가 내각을 구성하고 의회 다수당에서 수상을 임명해 내각 각료를 임명하는 체제다. 통상 의원내각제에서 수상이나 총리는 의례적 역할에 그치며 행정권을 갖지 않는다. 대표적인 국가로 영국과 독일, 일본 등이 있다. 중국은 겉보기에 내각제에 해당하지만, 실질적 행정권을 국무원 총리가 아닌 국가주석이 갖는 등 실제로는 내각제가 아니다. 입헌민주주의 국가에서 주(州)의 우두머리는 당연히 주지사다. 중국에서 명목상 성(省)과 시(市)의 수장은 성장(省長)과 시장(市長)이지만 성 당서기 또는 시 당서기의 지시를 받는다는 독특한 차이가 있다. 성 당서기를 포함한 중공 각급 서기는 사실 정부 조직이 아닌 중공 조직이다. 중공의 ‘지부 서기제도’는 1920년대 후반 ‘당 지부를 연대 위에 놓는다’ ‘당이 총을 지휘한다’ 등 군이 공산당의 절대적 지배 아래 있어야 한다는 마오쩌둥의 주장에서 비롯됐다. 이후 1949년 중공이 정권을 탈취하면서 중국 전국에 퍼져 더욱 공고해졌다. 그 결과, 성의 최고 행정권자가 ‘성장’이 아닌 ‘성 당서기’라는, 정상적인 국가에서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 나타났다. 현재 중국의 각 성, 시, 구, 현과 마을 등 각 행정 단위에 ‘당서기’가 있다. 중국의 정치체제는 정상적인 내각제 국가와는 다른 변이된 체제라 할 수 있다. 실제 권력 서열은 정치자원 장악순 중국 공산당(이하 중공) 정권의 변이된 정치 체제는 권력의 의의와 구조, 효능 면에서 정상적인 민주 국가와 매우 다르다. 서양의 민주 국가에서 정부의 권력은 국가와 국민에게 봉사하기 위한 수단이며, 법률의 제약과 국민의 감시를 받는다. 정부의 권력 행사는 정상적인 국무 수행일 뿐이다. 반면 중국에서 중공의 권력은 기득권 집단이나 특정 당원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자 국가와 국민을 강압적으로 지배하는 도구다. 그러므로 중공의 계파 간 권력 투쟁은 중공 본질상 필연적이다. 중공 내 서열은 그가 장악한 정치 자원이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정권은 총 끝에서 나온다(정권을 무력으로 빼앗는다)’는 중공 사상에 따라 고위관리는 최고 권력을 손에 넣기 전, 우선 군(軍)의 지배권을 장악한다. 그 외에 ‘붓대(筆杆子)’와 ‘칼자루(刀把子)’, 즉 사상 선전계통과 법원·검찰·공안·정보기관 등 정법계통이 있다. 이 3대 권력-군대, 선전 계통, 정법 계통-을 장악했다면 중공의 주요권력을 이미 손에 넣은 것이다. 제17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 저우융캉은 형식상 서열 9위였지만, 사법계통과 무장경찰권을 쥐고 장쩌민의 후광을 받아 실제로는 당시 중앙위원회 총서기였던 후진타오와 맞먹는 권력을 행사했다. 왕치산은 현재 제18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 서열 6위로 거의 꼴찌에 불과하지만, 시 주석의 ‘호랑이 사냥(반부패 척결)’ 선봉장을 맡아 실제 그의 서열은 시 주석 바로 다음이라고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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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환구시보(環球時報)는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人民日報) 산하의 신문이다. 인민일보가 세계 각지에 많은 특파원과 객원기자들을 파견해 많은 자원적 우세를 차지하고 있어, 환구시보도 자연스레 이러한 힘을 등에 업고 중국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후시진(胡錫進)은 2005년부터 환구시보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 그는 “우리는 중국 서민들의 진정한 목소리를 대변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환구시보는 대중들에 있어 ‘분청(憤靑·분노한 청년들)의 총본부’라고 불리운다. 환구시보와 인터넷판 환구망(環球網)의 보도와 사설들은 극좌 성향을 보이며, 매우 공격적인데다 욕설이 난무하고 날조된 유언비어들이 많다. 그들의 이념은 반(反)미, 반(反)일 및 세계의 보편적 가치관에 반하는 성향을 보여 중국에서 공산당 체제가 원활하게 운영될 수 있는 윤활제와 민중을 세뇌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환구시보는 조작을 밥먹듯이 하면서 나쁜 소문을 전파하고 있으며 중국 내외에서 발생하는 민중사건에 개입, 공산당의 목소리를 대신하며 앞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반한, 반미, 반일 정서를 선동할 뿐만 아니라 대만, 홍콩과 중국 대륙 간의 적대적인 정서를 자극하면서 혼란스러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환구시보는 보편적 가치에 반하는, 심지어 반(反)인류적인 관점까지도 발표한다. 그 중 한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2014년 9월 17일 환구시보는 평론가 톈원린(田文林)의 ‘미국이 ISIS를 타격하는 데는 목적이 순수하지 않다(美國號召打ISIS夾帶不少私貨)’라는 사설을 실었는데, 글의 마지막 문단에 다음과 같은 말이 등장한다. “서양의 언론들은 ISIS가 포로를 학살하고 인질을 참수하는 극단적인 모습만을 과장되게 보도하면서 이 조직의 다른 면은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ISIS는 그들의 점령지에 수도와 전기를 공급하고 임금을 지급하며 교통을 통제하고 빵집, 은행, 학교, 법원, 이슬람 사원까지 관리한다. 그렇기 때문에 ISIS가 악질의 테러 조직인지, 아니면 오늘날 중동의 정치 발전의 필연적인 산물인지는 여전히 쉽게 단언하기가 힘들다.” 이렇듯 환구시보는 ISIS의 잔혹한 만행을 적나라하게 변호하며 그들을 찬양했다. 환구시보의 두 가지 역할 환구시보의 주요 작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각기 다른 시기에 행해졌다. 첫 번째 시기는 1993년 창간부터 2012년 말까지이다. 환구시보는 중국공산당의 전반적인 목소리를 대변하고 민중들의 사상을 통제하기 위한 도구였다. 두 번째 시기는 2012년 중국공산당 18차 당대회에서 시진핑이 집권하면서 부터 지금까지의 시기다. 환구시보는 중국공산당을 위해서 일하는 동시에 또 하나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됐다. 바로 장쩌민 집단의 주요 발언대가 된 것이다. 상무위원 류윈산(劉雲山)이 이를 직접 책임지면서 시진핑에 맞서기 시작했다. 지극히 폐쇄적이고 경직되고 변이된 중국공산당 체제에서 시진핑 정부가 출범한지 4년이 된 지금, 시진핑이 추진해온 반부패 드라이브와 변혁의 움직임은 체제 내의 이익집단과 장쩌민 세력의 저항에 부딪쳐왔다. 류윈산이 장악하고 있는 선전계통과 시진핑 당국의 정책들은 대립각을 보이고 있다. 류윈산은 끊임없이 시진핑을 겨냥해 ‘구덩이를 파고’ 있으며 문화대혁명 시기의 맹목적인 숭배방식을 사용해 ‘고급흑(高級黑·칭찬하는 척하면서 깎아내리기)’, ‘띄워서 죽이기(捧殺)’ 등 방식을 사용해 시진핑에게 불리한 여론을 조성해 대중들에게 중국의 위기를 초래한 주범이 시진핑이라고 유도함으로써, 장쩌민 세력에게 돌파구를 제공하고 있다. 후시진과 환구시보는 류윈산의 든든한 무기로,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류윈산이 환구시보에 파룬궁을 모함하는 내용을 싣도록 지시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성격이 다분히 드러난다. 환구시보, 파룬궁 박해에도 가담 장쩌민이 1999년부터 참혹하게 파룬궁을 박해하고 수련자들의 장기를 강제적출한 만행은 이제 백일하에 드러난 사실이다. 그러나 시진핑 당국은 장쩌민 집단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시진핑 정부 출범 이후 몇 년간은 파룬궁 관련 보도들이 관영 언론에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환구시보만 계속해서 파룬궁을 비난하며,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진행하던 초기와 같이 대대적으로 파룬궁을 조작, 공격해 시진핑이 파룬궁을 박해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그 예로, 환구시보는 2016년 8월 20일 파룬궁이 강제장기적출 만행을 폭로한데 대해, 이는 파룬궁이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것이다’라고 논평했다. 하지만 그 논평은 맥락도 없고 근거도 없는 그야말로 억지스런 내용이었다. 2016년 10월 12일, 환구시보는 장쩌민파를 비판한 홍콩 ‘성보(成報)’지가 대중의 관심을 끌자 분명히 부정이 개입했을 것이라는 논평을 실어 ‘배후에는 서양 국가들의 정치자금을 받은 흑막이 있다’라는 내용을 보도했으나 아무런 증거도 제시 못했다. 환구시보, 당국의 경고 받아 장쩌민파의 앞잡이 노력을 한 환구시보와 편집장 후시진은 이미 시진핑 당국의 경고를 받았다. 2016년 1월 28일 중앙기율검사위원회(중기위) 홈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올랐다. ‘승인을 거치지 않고 멋대로 공금을 횡령, 폴란드 관광에 사용한 환구시보를 엄격히 조사해 처리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관련 규정에 따라 환구시보 편집장에게 행정 경고 처분을 내렸으며, 부편집장에게는 중기위 신문사 주재 기율검사소조(紀檢組)에 서면검사를 올리라는 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신문사 계재부(計財部)에 두 사람이 부담해야 할 6417위안 (약 107만원)비용을 반환할 것을 명령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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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37년 만에 외교적 관례를 타파하고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과 직접 통화했다. 이는 트럼프가 또 다시 미국 정치인들의 ‘정치적 금기’를 깬 것이기도 하다. 미국 주류 언론들은 트럼프가 미국의 외교정책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고, 한 민주당 상원의원은 심지어 트럼프는 책략이라는 것을 몰라 전쟁을 촉발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황급히 트럼프와 선을 그으면서 “‘하나의 중국’ 정책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변화가 없다”고 밝히고 나섰다. 이에 비해 중국의 반응은 오히려 비교적 차분했고, 전화통화 사건을 ‘대만의 장난질’이라고 규정하며 비난의 화살을 대만에 돌렸다. 하지만 트럼프 측의 반응은 당당했다. 트럼프 차기 행정부 국무장관 후보 중 한 명인 존 볼턴 전 유엔 주재 미국 대사는 폭스뉴스와 인터뷰에서 “미국 대통령은 미국의 이익에 부합된다면 그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미국이 누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지 중국이 정해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 당선인은 “예의상의 전화통화였다”고 설명하면서 “오바마 대통령은 작년에 먼저 다가가 살인마 쿠바 독재자와 접촉하고도 영웅 대접을 받았는데 트럼프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만 지도자가 걸어온 축하 전화를 받았을 뿐인데 논란이 되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트럼프를 두둔했다. 트럼프는 직접 트위터를 통해 “미국이 대만에 수십억 달러의 무기를 팔았는데 축하 전화도 받지 말라는 것인가, 참 흥미롭다”라고 응수했다. 두 번째로 올린 게시물에서는 “중국은 위안화를 평가 절하할 때 미국의 동의를 구했는가? 중국은 미국 수입품에 무거운 관세를 매기거나 남중국해에 군사 시설을 늘리면서 미국의 의사를 물어봤는가? 나는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라고 재차 자신을 향한 비판에 맞받아쳤다. 관례를 타파한 전화통화와 이에 대한 트럼프 측의 대응은 미국의 ‘정치적 금기’에 다시금 도전한 것이며, 미·중 정치적 거래의 암묵적인 룰과 금기를 깨부순 것이다. 이른바 ‘하나의 중국’과 ‘대만 독립’은 국가 주권과 영토 문제와 연관된 민감한 사안이다. 현재 국제사회에서 대만이 처한 고립과 미·중과의 관계는 역사와 현실의 여러 가지 요소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은 많은 경우, 대만의 활동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건드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문제 삼으면서 미국을 상대로 한 정치 게임 카드로 이용했다. 다시 말해 이른바 대만 문제는 중국공산당이 만들어 낸 것이고, 이와 관련된 정치 게임 규칙도 중국공산당이 만들어 낸 것인데 미국을 포함한 서방 국가들은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미국은 그동안 대만에 대한 군사적 지원과 왕래를 유지했는데 이는 최소한 대만을 중국공산당 치하의 한 지역으로 여기지는 않은 것이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중국공산당이 정한 게임 규칙을 엄격히 따르면서 대만과 자유로운 대화는 자제해왔다. 트럼프가 이런 게임규칙과 정치적 금기를 타파하자 오바마 정부 인사들은 당황한 나머지 격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중국은 오히려 차분한 모습이었다. 이런 기현상이 조성된 원인은 무엇일까? 미국은 당초 중국공산당과 접촉 및 협력을 통해 점차 국제사회로 끌어들이고, 이를 통해 중국의 체제와 가치관이 국제사회와 궤를 같이 하게 만들고, 국제사회에서 책임을 질줄 아는 국가가 되게 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오히려 정반대가 됐다. 중국공산당이 국제 경제 무대에 진입하면서 공정한 무역질서가 파괴됐고 국제 시장경제 환경은 심각하게 파괴됐다. 중국은 세계무역기구(WTO) 가맹 후에도 금융, 에너지, 통신 등 핵심 업종에서 자국 기업을 보호했을 뿐만 아니라 환율 조작, 수출 관세 환급 등 우회적인 방식으로 자국 시장을 키웠다. 그 결과 서방과 협상할 수 있는 힘이 생기면서 인권유린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서방 정치가, 학자와 언론을 매수해 독재통치에 유리하게 이용했다. 이에 따라 이른바 ‘차이나 컨센서스(중국모델)’은 국제사회에서 추앙을 받기 시작했는데, 중국공산당과 서방 대기업 및 일부 서방 정부가 손잡은 결과였다. 중국은 ‘선물보따리’ 외교를 벌이면서 미국 제품을 구입하고 미국 기업이 중국에서 저렴하게 투자하도록 혜택을 주는 동시에, 미국의 정치 구조를 이용해 미국 내 이익집단이 자신들을 위해 말하게 하고 정부에 압력을 가하게도 했다. 중국공산당이 ‘오래된 친구’라고 부르는 대변인들 중에는 월스트리트의 금융, 법률과 회계 등 분야의 엘리트들이 포함돼 있는데, 이들은 중국공산당 이익집단이 소유하고 있는 국유기업들이 해외에서 상장하여 발을 붙일 수 있게 도와줬다. 그들은 큰 이익을 얻어가는 동시에 중국공산당의 연명에 필요한 피를 수혈해줬다. 이 같은 거래에서 이익을 본 것은 미국 사업가들과 중국공산당 기득권층이며, 미국 국민과 중국 국민은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했다. 중국공산당과 접촉에서 인권문제는 원래 미국의 유력한 카드였지만 미국은 주도권을 잃고 말았다. 미국이 티베트, 위구르와 대만 문제를 지적하면 중국공산당은 역사적 민족적 원인 및 ‘국가통일’을 내세워 중국인들을 선동, 인권문제를 ‘반중국세력’의 문제로 왜곡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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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 18차 당대회에서 시진핑은 후진타오, 원자바오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았다. 당시 시진핑이 직면한 집권 위기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사회적 위기였다. 심각한 빈부 격차, 부패 만연, 끊임없는 민중 항쟁 등이었다. 다른 하나는 정치적 위기였다. 시진핑이 후진타오에게서 넘겨받은 권력은 장쩌민파에 실권을 빼앗긴 껍질만 남은 권력이었다. 시진핑은 이러한 어려움에 직면해 출범 3년 남짓한 기간, 여러 가지 조치를 통해 난국을 타개했다. 이 같은 조치는 장쩌민 집단의 부패를 조준해 전개됐다. 보시라이, 리둥성, 쉬차이허우, 쑤룽, 저우융캉, 링지화, 저우번순, 궈보슝 등 큰 죄를 지은 장쩌민 파 관료들이 줄줄이 낙마했다. 그리고 노동교양소 폐지, 의법치국(依法治國·법에 의한 국가 통치) 주창, 한자녀정책 완화, 호적제도 개혁 추진, 전통문화 제창 등을 추진했다. 지난 4월 장쩌민의 종교탄압정책을 끝낸 전국 종교공작회의도 그러한 조치의 하나였다. 중국사회에 나타난 난상 그러나 시진핑 당국의 조치에도 중국사회는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음을 외부에서는 보았다. 경제적으로는 경제발전이 위기를 맞았다. 우두머리 장쩌민이 공개 체포되기 전에는 장쩌민 파가 이용하는 경제 자원과 경제 쿠데타는 여전히 지속되고 자금유출은 격화될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류윈산, 장더장과 장가오리를 주축으로 한 장쩌민 파 현직 중앙정치국 상무위원들이 권력을 이용해 시진핑의 반(反)부패 개혁에 저항할 것이다. 류윈산은 선전 계통을 이용해 고급흑(高級黑·추켜세우는 척하면서 깎아내리는 수법)으로 시진핑을 함정에 빠뜨리려 하고 있다. 사회적으로는 어지러운 사건이 빈발하고 있다. 지난 두 달 사이에만 레이양 ‘성매매’ 사건, 변호사 폭행사건, 선전 경찰 욕설 사건 등 사회적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 다수 발생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공권력이 국민에게 심각한 상처를 남기는 사건이 끊임없이 발생하면서 시진핑 당국의 개혁 노력을 상쇄시키고, 미래에 대한 민중의 희망과 믿음을 소진시키고 있다. 2014년 중앙 정법공작회의에서 시진핑은 “매 하나의 사법 사건에서 인민대중이 공평·정의를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현실은 크게 엇갈리고 있다. 홍색가요(혁명가요)를 부르던 보시라이가 낙마한 지 3년이 지났지만 어째서 여전히 인민대회당에서 홍색가요를 부를 수 있었는가? 정법 계통의 ‘큰 호랑이(지도자급 부패관료)’ 저우융캉이 낙마한 지도 2년 반이 됐는데 어째서 경찰이 민중을 해치는 사건이 오히려 갈수록 더 심해지는가? 파룬궁 수련자 박해와 생체장기적출에 참여한 보시라이, 저우융캉, 쉬차이허우 등이 모두 낙마했는데, 유럽 의원은 진상을 알리고 있는 파룬궁 수련자에게 의문을 제기했다. “시진핑의 권력은 갈수록 커지는데 왜 생체 장기적출은 여전히 계속되는가?” 중국 공산당과 민중의 대립 어쩌면 이 몇 년 동안 중국 공산당 기층 관료의 몇 가지 명언에서 일부 해답을 얻을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구이저우의 관료는 기자 질문에 “당신은 당을 위해 봉사하는가 아니면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가?”라고 답했고, 정저우시 계획국 부국장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당을 대신해 말할 준비를 한 것인가, 아니면 백성을 대신해 말할 준비를 한 것인가?”라고 물었다. 허난성 네이샹현 법원 원장은 “당성과 인성이 충돌할 때, 우리는 단호히 당성만 논하고 인성은 논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중국 공산당 기층 관료의 이런 발언은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으로서 중국 공산당 정권의 현재 실정을 말한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민중과 완전히 대립된 양극이다. 중국 공산당의 이익과 민중의 이익은 물과 불처럼 절대 하나로 어울릴 수 없다. 그렇다면, 시진핑 집권 과정의 최대 장애는 중국 공산당 체제 자체의 요소로서 갈수록 많이 표면에 드러나고 있다. 물론, 장쩌민 집단은 시진핑이 집권하는 과정에 청산을 피하려고 끊임없이 소란을 피우고 있다. 이 역시 시진핑이 마주친 주된 장애물이다. 하지만 모든 중국 공산당 기층 관료를 모두 장쩌민 파가 조종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중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공권력으로 나쁜 짓을 하는 난잡한 현상의 상당 부분은 모두 중국 공산당 체제 자체의 사악함으로 조성된 것이며, 이런 중국 공산당 관료는 확실히 당의 정책을 집행하고 있다. 이 같은 문제는 반부패로 해결할 수 없다. 장쩌민 집단이 한 모든 행위는 또 중국 공산당 체제 중 가장 사악한 부분을 보여주고 있으므로 장쩌민 집단은 중국 공산당 사악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시진핑 집권의 2대 장애물 따라서 시진핑 집권의 최대 장애는 두 개 방면에서 온다. 첫 번째, 장쩌민 파의 전력을 다한 방해이다. 중국 공산당 체제 자체를 이용한 방해다. 두 번째, 중국 공산당 체제 그 자체이다. 근본적으로 말하면, 중국 공산당의 체제에서는 중국사회와 민중이 직면한 경제적 윤리적 위기 해결이 불가능하다. 특히 중국 공산당이 중국 전통문화를 파괴한 후 형성시킨 당(黨)문화는 중국과 민중을 국제사회와 격리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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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중국 문제 전문가 고든 장(章家敦 장자둔)은 지난달 21일 포브스 홈페이지에 올린 기고문에서 “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는 중국이 위안화를 구해낼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라면서 “만일 이 기회를 놓치면 중국의 화폐, 경제 및 금융 시스템은 총체적으로 붕괴할 것이며, 붕괴 시점은 앞으로 반년 후”라고 말했다. 장이 중국 경제의 붕괴를 예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중국 증시 급락 사태 이후에도 그는 “중국 경제가 2년 후 붕괴할 것”이라고 말했고, 2001년 8월 펴낸 책 ‘중국은 곧 붕괴할 것’에서는 “중국의 현행 정치 및 경제 시스템은 길어봤자 5년 정도 유지될 것이다. … 중국 경제는 현재 쇠퇴하고 있고 붕괴의 서막이 올랐으며 붕괴 시점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이후가 아닌 이전이 될 것이다”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사실 장 외에도 중국과 해외 일부 경제학자들 역시 매년 유사한 예측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해가 바뀌어도 이러한 예측이 실현되는 일은 없었다. 경제학자들이 너무 허술하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이런 예측을 하는 학자들은 대부분 제대로 된 경제학자 혹은 중국 문제 전문가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오판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의 현 정치체제에서 중국 경제는 붕괴할 것인가? 중국 경제는 정말로 고든 장의 이번 예언처럼 반년 후 붕괴할까? 경제 붕괴란 무엇인가 경제 붕괴는 한 나라의 국가 경제가 완전히 무너져 심각한 경제 위기가 닥치고, 사회 혼란과 마비 상태에 빠지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 붕괴의 표시는 다음과 같다. 공업과 농업 생산량이 감소하고, 기업이 줄줄이 도산하며 대량 실업 사태가 발생한다. 악성 인플레이션이 나타나고 국가재정이 무너지며 거액의 경상수지 적자가 발생한다. 금융 시스템이 붕괴하고, 은행의 불량채무가 국제기준을 넘어서 은행이 디폴트(채무불이행) 위기에 놓이고 다수 은행이 파산한다. 국가 전체의 생산·판매·분배·소비 사슬이 어긋남에 따라 각종 경제 활동이 마비된다. 분명한 사실은 경제가 붕괴하면 중국사회는 가공할 만한 혼란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고든 장이 기고문에서 언급한 위기는 주로 위안화 환율 위기, 즉 위안화 절하로 인해 자금이 대량으로 빠져나가 중국 경제가 붕괴한다는 시나리오다. 주요 20개국(G20) 회담은 재무장관 회의로 시작했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정상회담을 시작했다. 올해 정상회담은 9월 중국 항저우에서 열릴 예정이며, 지난달 26일 열린 회의는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회의였다. 이 회의에 대해 외부에서는 중국판 ‘플라자 합의’로 평가하고 있다. 달러의 평가절상을 억제하고 위안화 환율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며 다른 주요국은 환율 문제 개입을 자제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기 때문이다. 금융 시스템 리스크에 대한 감시 강화도 천명됐다. 플라자 합의는 1985년 9월 G5(미국, 일본, 독일연방, 프랑스, 영국)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가 뉴욕의 플라자 호텔에서 모여 체결한 합의로서 5개국 정부가 합동으로 외환시장에 개입, 주요 통화에 대한 미 달러의 평가절하를 유도함으로써 갈수록 심화하고 있던 미국의 무역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 골자였다. 플라자 합의의 가장 두드러지는 결과는 달러가 절하되고 엔화가 절상됐다는 것이었다. 고든 장은 이러한 새로운 플라자 합의가 성립될 가능성이 없다고 보며, 그러므로 중국 경제가 붕괴하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중국 금융평론가 류샤오보(劉曉博)에 따르면 새로운 플라자 합의가 성립돼 세계 주요 경제체들이 하나로 묶이게 되면 어느 한 국가의 환율에 이상 변동이 나타나면 다른 국가의 견제를 받게 된다. 이렇듯 장단점이 모두 있는 체제에서 중국이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통해 안정적인 중속 성장을 유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혁을 강화함으로써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위안화 절하를 통해 수출을 증대시키는 것은 적어도 2016년 상반기에는 실현되기 어렵다. 중앙은행은 환율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금리 인하를 최대한 피하고 지급준비율 인하 횟수를 줄이는 등 화폐정책의 범위와 강도를 제어해야 한다. 사실 중국 경제의 붕괴는 중국 경제가 곤경에서 빠르게 빠져나오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이다. 세계화라는 요소 역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화와 중국 경제 20세기 들어 세계 경제를 이끌어온 것은 금융 시스템이다. 한 국가의 경제 붕괴를 초래할 수 있는 원인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을 꼽으라면 금융위기를 들 수 있다. 1930년대와 1950년대 일어난 두 차례의 글로벌 경제위기는 모두 금융시스템의 문제로 인해 발생한 위기였다. 세계가 하나로 묶인 오늘날 글로벌 경제는 이미 각국 상호의존적이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하나의 단위가 됐다. 어느 한 국가의 경제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할 경우 필연적으로 글로벌 경제에 일정한 파급효과를 주게 된다. 특히 중국은 세계 제2의 경제체로 올라선 만큼 중국 경제의 안정적인 성장세 유지 여부가 글로벌 경제에 미치는 작용과 영향력은 갈수록 증대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작년 중국 증시 급락 당시 충분히 증명되었는데, 중국 증시가 몇 차례 폭락하자 놀랍게도 월스트리트와 몇몇 금융 선진국의 증시 역시 조정을 받았다. 이런 점에서 중국 경제가 붕괴하면 글로벌 경제도 붕괴한다고까지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세계 경제에 위기와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글로벌 경제와 금융 시스템이 상호 의존적이고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연동적인 시스템이 된 현재 중국 경제는 이러한 대가족의 중요한 일원이 되었다. 위기가 발생했거나 글로벌 경제 질서의 안정에 위협이 닥치게 되면 미국이나 유럽 각국 등이 나서서 함께 위기에 대처할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중국 경제가 붕괴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중국의 경제적 곤경 배후의 역사적 요인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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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북한은 수소폭탄 발사실험에 성공했다고 밝혀 국제사회를 놀라게 했으며 세계 각국에서는 즉각 비난이 이어졌다. 북한은 과거 세 차례에 걸친 핵실험 당시 모두 최소 30분 전에 중국과 미국에 통보해 왔으나 이번 실험은 사전에 통보하지 않았다. 중국은 이에 대해 신속히 대응, 실험 여부를 사전에 알지 못했음을 알리는 한편 실험에 단호히 반대한다고 밝혔다. 2006년 10월 9일부터 현재까지 북한은 총 네 차례 핵실험을 진행했다. 이 글에서는 네 차례에 걸친 핵실험의 내막을 밝히고자 한다. 식상해진 ‘말 안 듣는 北, 타이르는 中’ 북한 김씨 정권은 세계 2차대전 이후 공산주의 진영과 서방 자유세계 진영이 서로 대치하는 가운데 수립됐다. 김씨 정권의 배후에는 구소련과 중공이 뒷받침하고 있었는데, 김씨 정권이 폭정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경제와 군사 방면에 걸친 구소련과 중공의 폭넓은 지지 덕분이었다. 중국은 북한의 최대 교역국이자 식품·무기·연료 공급처로서, 90년대 이후 북한의 식품과 에너지의 90%는 모두 중국에서 공급받은 것이었다. 전반적으로 살펴볼 때, 북한과 중국 간의 관계는 김씨 정권과 중공과의 관계로 볼 수 있다. 북한은 경제적으로 거의 중공의 원조에 의지하고 있으며, 중공은 그 대가로 북한을 서방국가에 대항하는 도구로 삼고 있다.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 수십 년간 북한은 공산주의 독재국가로서 3대에 걸친 김씨 정권의 독재 치하에 공산 독재정권의 병폐를 남김없이 재현해왔다. 김씨 일가는 대내적으로 독재통치를 시행, 국민을 탄압하고 국력을 자신의 이익에 사용했다. 북한에서는 전역에 기아가 만연하고 굶어 죽는 일이 속출해 사람들이 남한으로 탈출하고 있다. 김씨 일가 3대는 당내 정적을 지나칠 정도로 잔혹하게 숙청하는데, 심지어 김정은은 취임 이후 자신의 고모부인 장성택을 사형시켰다. 김씨 정권은 대외적으로 세계를 협박하는 방식으로 자신에 대한 중공의 지지를 얻어냈고, 중공은 북한이라는 불량배 아우를 미국과 서방세계에 대항하는 도구로 이용했다. 북한은 핵 위협이라는 위험한 게임을 반복해 왔는데, 그 목적은 독재자 김정은의 개인적 권력을 극대화함으로써 독재정치의 기반인 경제적 지원을 보장받으려는 데 있다. 이러한 북한의 막후 조종자는 바로 중공이다. 중공은 6자회담을 이용해 여러 차례 이러한 게임을 벌여 왔는데, 늘 이런 식이었다. 우선 북한이 핵 위협을 통해 UN 제재를 받고 미국의 경고를 받는다. 이어 미국과 국제사회는 중국의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북핵 문제 해결에 더 많은 영향력을 발휘할 것 등을 주문한다. 중공은 이를 기회 삼아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거나 내부문제를 해결한다. 사실 6자회담은 중공과 북한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나 다름없다. 북한, 중공 장쩌민파와 밀월관계 시진핑 정권 출범 이전까지 북한 관련 정책을 결정한 것은 중공 장쩌민파였다. 북한 김정일 정권은 장쩌민 일파와 각별한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선데이타임스 셰리든 극동지역 기자의 보도에 따르면 장쩌민파 저우융캉 전 상무위원은 중공과 김씨 부자 사이를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김정일이 2010년 김정은을 후계자로 정식 지정해 열병식을 거행했을 당시, 저우융캉은 김씨 부자와 함께 단상에 섰던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장쩌민파로 분류되는 장더장 현 상무위원은 과거 북한으로 유학해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과에서 2년 과정을 수료한 바 있다. 장쩌민의 책사 쩡칭훙 역시 김정일과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쩡칭훙은 2001년 3월 장쩌민의 방북 당시 선발대로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으며 북한은 이후 쩡칭훙과 김정일이 함께 그려진 기념우표를 발행하기도 했다. 또한, 보시라이, 저우융캉은 정변 기도가 실패로 돌아갈 경우 도피처로 북한을 고려했던 것으로 언론에 알려졌다. 이처럼 장쩌민파 주요 인물들과 북한 고위층은 긴밀히 서로 협조해왔는데, 과거 쩡칭훙·저우융캉·장더장 등이 그랬다면 지금은 류윈산 상무위원이 그러한 인물이다. 북한은 지난해 10월 10일 노동당 창당 열병식 당시 리위안차오(李源潮) 중공 국가부주석이 이끄는 사절단의 방북을 거절한 반면, 장쩌민파 류윈산만은 특별초청했다. 보도에 따르면 류윈산은 북한 열병식의 TV 중계방송을 뒤에서 총지휘했으며 베이징 열병식을 중계한 중공 CCTV 주요 기술자들을 사전에 파견해 북한을 돕기도 했다. 최근 취소됐던 북한 모란봉 악단의 베이징 공연 역시 류윈산이 북한 방문 당시 협의해 내린 결정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北 핵실험, 中 정치적 사건과 겹쳐 북한의 1차 핵실험(2006년 10월) 전에는 후진타오에 대한 함포사격 사건이 있었다. 그해 5월, 당시 군사위원회 주석이었던 후진타오는 북해함대 시찰을 위해 서해를 방문했다가 군함 2척의 공격받는 사건을 겪는다. 이 사건은 장쩌민파 해군 사령관의 명령으로 인한 것으로 밝혀졌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후진타오는 6월 중앙기율검사위위원회 조사팀을 상하이로 파견해 천량위(陳良宇) 상하이시 서기를 낙마시켰다. 장쩌민파의 후계자였던 천량위는 2년 뒤 18년형을 선고받았다. 북한의 2차 핵실험(2009년 5월) 역시 후진타오에 대한 암살모의와 시기적으로 겹쳤다. 그해 4월 중공은 사상 최대 규모의 해상 열병식을 칭다오 해역에서 개최했는데, 홍콩 언론에 따르면 후진타오는 열병식 직전, 개막과 동시에 장쩌민파 요원들의 암살시도가 있을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했고 갑작스럽게 계획을 변경해 암살을 피한 것으로 알려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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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성 없는 전쟁 ‘공자학원’ 중공 관방 통계에 따르면, 2009년 10월까지 이미 87개 국가에 282개의 공자학원과 272개의 공자학당이 설립됐다. 중공 관방매체 런민왕은 “해외 공자학원에서 모두 베이징 공자학원 본부에서 제공하는 수업방식, 교과과정 등을 주교재로 사용해 통일적인 교육과정을 따르고 있다”고 밝혔다. 중공의 감시와 통제를 받는 공자학원의 교재가 해외 각지 중국어 학교에서 광범위하게 채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중국어 교사로 있는 야오저(堯哲)씨에 따르면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도 공자학원의 교재를 직접 사용하고 있다. 중공이 중국어 학교라는 명분으로 사용하는 교재의 내용에 ‘공산당을 사랑하는 것이 애국’이라는 전제주의 문화와 민족주의를 고취시키고 있다. 미국 전역에서 간체자 교재를 가르치는 거의 모든 중국어 학교에서 이런 교재를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 교재가 배우는 사람들을 세뇌시키기 때문에 ‘소프트 냉전’이자 ‘포성 없는 전쟁’이라고 표현했다. 이외에도 해외 공자학원은 중공의 해외정보기관 역할을 하고 있다. 2년 전 미국 국토안전국 전임 국장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스파이로 활동하는 중국어 교사를 대량 검거해야한다”고 할 정도였다. ‘공자’는 슬프다 지난 2500여 년 동안 중국은 유교문화가 근본이었다. 노나라 애공(哀公)이 공자의 묘를 세우고 제사를 지낸 이래 한 고조 유방은 유가의 예절을 채용해 조정의 예의범절을 만들었다. 한 무제는 제자백가 중에서 오직 유가만을 존중했고, 당태종은 공자를 문선왕(文宣王)으로 추증했다. 청나라 강희제에 이르러서는 황제가 직접 ‘만세사표(萬世師表)’라는 현판을 써서 공자묘에 걸게 했다. 이처럼 중국 역대 왕조를 거치며 공자는 늘 추서되거나 제사를 지내는 대상이었으며 심지어 몽골족이 지배했던 원나라 때도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으로 추대됐다. 공자의 영향은 일찍이 국경을 넘어 일본, 한국, 월남 등 아시아 국가에 유가 사상의 깊은 영향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서양의 유명한 계몽철학가 볼테르조차 공자를 스승으로 삼았다. 하지만 중공 정권은 공자를 반대하며 일어섰다. 일찍이 중국 공산당이 건립되기 전인 1919년, 천두슈(陳獨秀: 나중에 중공 최초의 총서기가 됨)는 잡지 신청년에 ‘민주를 옹호한다면 공자교에 반대하지 않을 수 없다’는 문장을 발표했다. 문화혁명이 발발한 후 중공은 ‘공자점 타도’ 운동을 일으켰다. 나중에는 마오쩌둥이 직접 나서 ‘공자비판운동’을 일으켰다. 일찍이 ‘문(文), 행(行), 충(忠), 신(信)’을 강조했던 공자는 중공에 의해 “일체 낡은 이론의 사표이자 악 세력의 영혼”으로 매도됐다. 또, “사람이 생긴 이래 실로 공자만큼 죄악이 크고 위선적이며 대다수 사람들의 공적(公敵)이 된 인물을 없었다. 앞으로는 인류가 모두 일어나 공격하게 될 것이다. 동서고금의 모든 사상가들의 언행 중에서 공구(孔狗: 공자에 ‘개 구’자를 썼다)가 가장 황당무계하다”고 비판당했다. 리밍(黎鳴)이란 학자는 “중국인들은 왜 반드시 철저히 공자를 비판해야 하는가?”, “공자는 중국문화를 사악으로 이끈 제일의 마귀이다”는 일련의 문장을 발표해 공자를 비판했다. 하지만 중공은 ‘조화사회’가 필요할 때가 되자 다시 공자에 대한 제사활동을 거행해 사회 조화를 실현하려 한다. 대외적으로는 공자학원을 설립해 공자의 이름을 이용하는 동시에 중국어를 교육하는 방식으로 중공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고 있다. 한 누리꾼은 “중공이 진심으로 공자를 신앙하는 것이 아니며 중공 정치과목에서 말한 것처럼 공자와 맹자는 모두 통치계급이 노동인민을 우롱하기 위해 이용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현재 유행하는 중국의 ‘공자열풍’은 단지 중공이 공자를 이용해 노동인민들을 우롱하는 도구로 삼은 것에 불과하다. 만약 공자가 인간세상의 이런 모습을 본다면 할 말을 잃고 비탄에 잠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중공의 손에 들린 도구에 불과할 뿐이며, 소위 ‘공자열풍’이란 이 시끄러운 연극은 진실로 자신과 무관하며, 유학(儒學)과도 무관하고 전통문화와도 무관함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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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가는 것이 저 물과 같아 밤낮을 쉬지 않는 구나!” 2천여 년 전 공자는 냇가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시간이 흘러 2010년, 중국은 ‘공자 열풍’ 속에 있다. 세계 각지에 ‘공자학원’이 설치되고 있고, 막대한 자금이 투입된 영화 ‘공자’도 개봉했다. ‘공자’ 일색에 중국이 떠들썩하다. 하지만 정작 유구한 유교문화는 없고, 단지 정치적인 ‘조화’를 꿈꾸는 중국공산당(이하 중공)의 야욕만 엿보일 뿐이다. 만약 공자의 영혼이 하늘에 있다면, 인간 세상의 ‘공자 열풍’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40년 전 ‘공자 타도 열풍’ 40년 전 중국에서 발생한 ‘공자열풍’은 한차례 재난이었다. 중국인들에게 2천여 년 동안 가장 존경받는 성현이었던 공자는 “복고광(復古狂), 정치 사기꾼, 백성을 가장 기만하고 억압한 자”로 불렸다. 1966년 11월 베이징 사범대학의 조반파 두목 탄허우란(譚厚蘭)은 중앙문화혁명 소조의 명의로 200여 명을 이끌고 산둥성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점(孔家店)’을 찾아가 파괴했다. 그는 현지 조반파와 연합해 철저하게 공자점을 파괴하는 ‘혁명조반연락소’를 만들고 공자점을 철저히 파괴하는 만인대회를 소집해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라는 비석을 부쉈다. 이들은 취푸에서 29일 동안 2700여 권의 고서와 900여 점의 각종 서화(書畵)를 불태웠는데, 이중에는 국가 1급 보호문물 70여 건 및 1700여 권의 서적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이 파괴한 문물 중에는 공자의 묘비를 포함한 1천여 개의 역대 비석 외에도 공자묘(孔廟)와 공자(孔子)의 직계 장자와 장손이 사는 저택 공부(孔府), 공림(孔林), 서국(書國) 옛터를 파괴했다. 또, 천보다(陳伯達)의 비준을 거쳐 공자묘를 갈아엎고, 공자묘를 지키던 76대 후손 쿵링이(孔令貽)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꺼내 비판했다. 당시 유가 경전만을 연구하던 저우위퉁(周予同) 교수는 끌려나와 자신의 손으로 공자의 무덤을 파헤쳐야 했다. 현지 각급 지도자, 간부 및 1962년 ‘공자토론회’에 참가했던 가오짠페이(高贊非) 등의 학자들이 공자상을 들고 조리돌림을 당했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은 공산당 최고 권력기구인 중앙문화혁명소조의 직접적인 지시 하에 이루어졌다. 이는 당시 공산당의 정치투쟁과 정치운동의 필요에 의해 취해진 조치였다. 정치 선전 구호된 ‘공자’ 최근 중공 관영 CCTV가 강력하게 지원하는 ‘백가강단(百家講壇)’이란 프로그램에서 위단(于丹)이 ‘논어’ 열조를 일으켜 돈과 명예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자신이 공자를 연구하는 국학대사(國學大師)임을 자처하는 학자들이 대학 강단과 TV방송에서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이는 정치적인 형세와 경제적인 필요에 영합한 일련의 일들이다. 물론 현재 파괴됐던 공자묘와 공자의 위패는 회복됐다. 공자에게 올리는 향도 왕성하게 타오르고 있고, 중공의 각급 고위관리들도 사람들을 따라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물론 이같은 행동도 장쩌민의 ‘삼개대표론’이나 후진타오가 주장하는 ‘과학적 발전관의 지도방침’을 따라 착실히 추진된 일종의 정치 임무에 불과하다. 공자는 각종 영화와 TV 드라마까지 등장하게 됐다. 역설적인 것은 공자를 비판하고 타도했던 중공이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공자를 영화로 제작, ‘대하 서사시’로 떠받들고 있다는 것이다. 1월 22일 영화 ‘공자’가 각지에서 상영되기 전 관방에서는 대대적인 홍보에 나서는 한편, 행정명령을 동원해 블록버스터 ‘아바타’ 2D상영을 중단시켰다. 그러나 각종 반응을 종합해보면 공자의 흥행은 썩 낙관적이지 않다. 보다 중요한 것은 많은 관중들이 이미 이 영화가 중공이 이용하는 도구임을 직접 지적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산둥성 정부에서는 공자를 널리 알리는 것을 정치임무로 삼아 미리 각 지역 기관과 초중고교 및 기업 공회(公會)에 연락해 ‘조직적인 관람’을 명령했다. 이 때문에 산둥성의 ‘공자’ 좌석점유율은 67%에 도달했지만 다른 지역에서 ‘공자’의 흥행은 극히 미미하다. 소식통에 따르면 개봉 첫날 상하이는 관람객이 겨우 수백 명에 그쳤고, 쓰촨성의 한 극장에서는 관람객이 겨우 3명에 불과했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