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정의와 사악의 총성 없는 대결이다. 한 민족의 도덕, 신앙, 문화, 그리고 국가와 국민의 미래, 운명에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2010년 미국 아이다호 주의 의원을 역임한 커티스 바우어스(Curtis Bowers)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Agenda: Grinding America Down>는 공산주의 운동이 미국에서 어떻게 발전하고 성장했는지 그 과정을 다루고 있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와 현 미국 좌파 간의 연관성을 연구하는 동시에 공산주의가 장기간의 계획에 따라 체계적으로 내부로부터 미국 사회에 침투해 미국의 도덕, 신앙, 교육, 경제를 파괴하고 이 자유 국가를 전복하려 했다는 사실에 대해 분석했다. “미국은 하나의 건강한 몸처럼 세 가지 방면에서 저항력을 갖고 있다: 애국주의, 도덕관념과 정신적 생활이 그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세 가지를 파괴할 수 있으면 미국을 내부로부터 무너뜨릴 수 있다.” _ 이오시프 스탈린 공산주의자들의 음모 1992년 여름, 커티스 바우어스(Curtis Bowers)는 대학원에 재학 중이었다. 어느 날 한 작가가 그에게 미국 공산주의자들이 미국을 어떻게 자신들 손아귀에 넣을지를 놓고 서로 의견이 다르다고 알려줬다. 어떤 이는 폭력혁명을 주장하고 또 어떤 이는 대중 책략으로 내부 침투에 주력해야 한다고 여겼다. 작가는 생각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해체되면서 세계는 “공산주의는 이미 죽었다”고 말하는데 이 공산주의자들은 무슨 음모를 꾸미는 것일까? 그는 커티스 바우어스에게 미국 공산당이 버클리의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곧 회의를 개최하는데 그들이 무슨 음모를 꾸미는지 자신을 대신해 회의에 참석해주기를 부탁했다. 바우어스는 작가의 부탁을 수락했다. 회의실에 들어섰을 때 그는 놀랐다. 참석자들 대부분이 그의 상상과 달리 급진적인 대학생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거의 5, 60대, 심지어 70대에 이르는 노인도 있었다. 정장을 입고 서류 가방을 든 이들의 모습을 보고 바우어스는 이번 일이 애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회의에서 바우어스는 공산주의자들의 계획과 실행 절차에 대한 내용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미국 각종 기관에 곧 침투해 미국을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꿀 작정이었다. 예를 들어, 가정을 파괴하기 위해 결혼이 아닌 동거를 주장한다. 아이들을 하루 빨리 독립시켜 정부의 각종 계획에 참여케 한다. 또한 여권운동에 개입, 여성들로 하여금 결혼 제도와 어머니 역할에 불만을 느끼게 만든다. 산업 발전을 방해하기 위해 환경보호 운동을 이용한다. 그 당시 환경보호 운동은 영향력이 미미했으나 그들은 규칙을 만들어 산업 발전을 저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종교 신앙과 도덕을 어떻게 파괴할지에 대해 논의했다. 미국인들로 하여금 동성애를 받아들이게 한다면 이전까지 고수해 오던 전통적인 가치관을 소멸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그 당시 바우어스는 공산주의자들의 토론을 들으면서 “이 계획은 현실적이지 않아. 내 평생에 이와 관련한 일들로 걱정할 필요는 없어”라고 생각했다. 논란을 일으킨 한편의 기사 15년 후, 바우어스는 아이다호 주지사로부터 입법 대표로 임명되면서 매달 현지 신문에 각종 화제와 관련된 평론을 투고하고 있었다. 2008년 1월, 새로운 주제를 검토하던 중 1992년 그가 참여한 회의를 떠올렸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계획과 현재 미국의 상황을 대조한 결과 그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들의 계획이 성공적으로 실현된 것이었다. 예를 들어 환경보호 운동은 자유 시장을 파괴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또 워싱턴 D.C에서는 ‘증오 범죄’에 대한 입법이 검토 중이었다. 즉 동성애를 반대하면 범죄로 간주하겠다는 법안이었다. 바우어스는 “사람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바우어스가 이와 관련한 평론을 발표하자 곧 큰 파문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며칠 동안 국회 앞에서 항의했다. 그의 평론은 저녁 뉴스의 핫이슈였다. 신문에는 40여 개에 달하는 독자 투고를 게재했다. 바우어스는 자신이 하나의 큰 사건을 건드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때 바우어스를 지지하는 한 편의 편지가 도착했다. 이 독자는 1958년에 출간된 <벌거벗은 공산주의자(The Naked Communist)>라는 책에서도 이와 같은 공산당의 목표가 제기된 적 있다고 지적했다. <벌거벗은 공산주의자>의 저자 클리온 스카우슨(W. Cleon Skousen)은 일찍이 연방수사국(FBI) 요원으로 활동하며 1958년부터 공산당의 45가지 목표를 이 책에 기록했다. 바우어스는 이 책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의 미국 내부 침투 계획이 오래전부터 세세하게 계획된 것임을 발견했다. 일부 목표는 아래와 같다: 17번째 목표: 학교를 통제한다.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컨베이어 벨트로 이용한다. 교본을 바꾸고 교사협회를 통제한다. 21 번째와 22번째 목표: 매체에 침투한다. 라디오, TV, 영화 관련 기관에 중요한 자리를 장악한다. 25 번째 목표: 책, 잡지, TV, 영화를 통해 음란물을 배포하여 도덕 문화 규범을 타파한다. 26 번째 목표: 동성애, 성적 타락, 음란 관계를 ‘정상화, 자연화, 건강화’ 시킨다. 27 번째 목표: 교회에 침투한다. ‘하늘의 계시 종교’를 ‘사회의’ 종교로 대체하고 <성경>을 비방한다. 다큐멘터리 <Agenda: Grinding America Down> 제작 자신의 글이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자 바우어스는 즉시 이 방면에 대한 연구를 심도 깊게 진행했다. 그는 관련 서적을 탐독하며 보수파 학자, 작가, 정부 관료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했다. 그들에게 여러 질문을 던지며 공산주의가 미국에 끼친 해악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했다. 이 질문들은 아래와 같다: 공산주의는 이미 사망했나? 그들은 어떻게 미국 사회에 침투했나? 우리는 어떻게 대항해야 하나? 2년의 연구와 탐방을 거쳐 바우어스는 다큐멘터리 <Agenda: Grinding America Down>를 제작했다. 다큐멘터리는 현실과 이론을 섬세하게 비교, 분석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미국 사회에 깊숙이 침투한 공산 사상을 폭로했다. 정신적 퇴폐, 이혼율 상승, 편파적 교육, 도덕의 타락, 경제 쇠퇴 등을 그 예로 제시했다. 그는 ‘붉은 적’이 거의 성공에 도달했으며 미국은 반드시 마지막 기회를 잡고 위대한 나라와 자유의 원칙을 수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큐멘터리에서 바우어스는 미국에서의 공산주의 발전 맥락, 마르크스와 민주당 간의 이념 관련, 환경보호주의, 교육 개혁, 자유 선택권, 여권주의 운동 등 배후에 있는 공산주의 요소들에 대해 분석했다. 또한,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사악한 언론도 언급했는데 예를 들면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인생 목표는 하나님을 폐위하고 자본주의를 파멸시키는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좌파 작가 솔 앨린스키(Saul Alinsky)도 자신의 책<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Rules for Radicals)>을 루시퍼-사탄에게 바친다고 말한 바 있다. 미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이 ‘공산주의’나 ‘자유주의’라는 용어 대신에 ‘진보주의’를 사용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저명한 할리우드 보수파 영화 스타 존 보이트(Jon Voight)는 ‘진보주의’는 ‘공산주의’의 대체품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들이 선전하는 것은 진보의 주장과는 반대되며 실제로 공산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유해한 학설에 가깝다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에서 바우어스는 국가에 대한 정부의 통제정도 축을 제시했다. 좌측 맨 끝은 정부가 완전히 국가를 장악한 상태이다. 즉 나치즘 혹은 파시즘이 여기에 속한다. 오른쪽으로 조금씩 가면서 공산주의, 사회주의, 미국의 민주당이 자리하고 있다. 중간에서 좌측으로 치우친 쪽에는 현재의 미국 공화당이 속해 있다. 중간에서 오른쪽으로 치우친 쪽은 미국을 건국한 선구자들의 이념과 가까우며 우측 맨 끝은 무정부주의를 가리킨다. 이 차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공산주의가 내부 침투한 뒤부터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 대폭 왼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도덕적 원칙을 고수하다 <Agenda: Grinding America Down>는 2010년에 제작되었다. 이는 사람들에게 미국 사회의 변화를 분석하고 반성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했다. 7년 뒤,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새로운 정치를 펼치는 와중, 트럼프 내각은 현재 전례 없는 도전에 직면했다. 이 시점에서 다큐멘터리가 보여준 많은 사실과 관점들을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바우어스와 여러 학자가 말했듯이 60년대부터 미국은 점차 변화해왔다. 그러나 이는 사상 문화 운동의 자연스러운 발전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양대 당파의 정견 분쟁도 표면에 보이는 것처럼 단순하지만은 않다. 배후에 숨겨진 요소들을 주목해야 한다. 다큐멘터리에서는 한 아이가 성조기를 들고 들판을 걷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표현된다. 이 이미지에는 작품의 주제가 담겨 있다. 햇빛 아래의 자유를 소중히 하고, 조국에 대한 사랑을 가슴에 품으며, 신에 대한 신념을 견고히 하며, 전통적인 도덕을 고수하고, 선구자들이 다져 놓은 기반을 저버리지 않으며, 공산주의 독해를 거부하는 것이다. 한 세기 동안, 공산주의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에서 학살을 적나라하게 감행해왔다. 하지만 다른 자유 사회에서는 더욱 은폐된 형태로 나타났다. 다큐멘터리 <Agenda: Grinding America Down>가 다룬 과제는 미국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지구상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곳곳에 침해해 있는 공산주의 사조를 경계하고 숨어있는 공산주의 유령을 경계해야 한다. 자신과 자손 후대를 위해, 원칙을 지키고 전통적 도덕을 회복하고 정의와 자유를 지킬 수 있는 기회를 시대의 기로에서 놓치지 말아야 한다.
밍후이왕(明慧網)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중국 산둥(山東)성 빈저우(濱州)시 저우핑(鄒平)현 검찰원은 저우핑 국내보위국(國保)이 파룬궁 수련자 자오홍웨이(趙紅偉)를 체포한 사건에 대해 증거 부족으로 체포를 불허한다고 밝혔다. 2017년 4월 22일, 자오홍웨이는 석방돼 귀가했는데 이는 최근 1년 사이 중국 대륙에서 파룬궁 수련자들이 무죄로 석방된 최근 사례이다. 2016년부터 지금까지 밍후이왕(明慧網)은 중국대륙 각지에서 법원, 검찰원(檢察院), 공안(公安)이 파룬궁 수련자들을 무죄로 석방한 사례에 대해 보도했다. 이 사례들은 산시(山西), 허베이, 랴오닝, 장쑤, 베이징, 헤이룽장 등 전국의 각 성과 시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특히 지난 3월 중국 양회(兩會-전국인민대표대회,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이후 석방 사례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18년간 지속된 장쩌민 집단의 파룬궁에 대한 박해가 이미 궁지에 몰렸으며 전국에서 점점 많은 공안·검찰·법원·사법 기관의 직원들이 양심과 정의에 따라, 법에 의거해 판결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전체적으로 파룬궁에 대한 박해는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밍후이왕의 통계에 따르면 3월 한 달 동안만 중국에서 약 715명의 파룬궁 수련자가 붙잡혔으며 110명이 불법으로 형을 선고받았고, 232명이 재산을 몰수당했으며 25명이 세뇌반(洗腦班)에 끌려갔고, 4명이 극심한 박해를 받다 세상을 떠났다. 대기원 사이트는 최근 특집으로 <중국서 파룬궁 박해로 ‘응보’ 받은 사례>를 게재했다. 글에는 파룬궁을 박해한 18년간 박해로 인해 인과응보의 결과를 얻은 사례가 기록돼 있다. 보기만 해도 끔찍한 사례들은 충격을 주고 있으며 ‘인과응보’의 도리를 생각나게 한다. 또한 아직도 파룬궁 박해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경고와 두려움을 주며 자신의 생명과 미래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라도 파룬궁 박해에서 손을 털도록 한다. 파룬궁 수련은 중국 헌법에서 규정한 신앙의 자유는 물론 국가의 법률 및 법규에도 부합한다. 반대로 장쩌민 집단이 국가의 공권력을 이용해 경찰, 검찰, 법원으로 하여금 파룬궁을 박해하게 한 행위는 명백한 위헌이다. 따라서 파룬궁 박해를 중지할 수 있는가는 당국이 정말로 ‘의법치국(依法治國·법에 의거해 나라를 통치)’을 실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시금석이라 할 수 있다. 시진핑 당국이 계속해서 ‘의법치국’ 실현을 내세우고 있으나 공산당 체제라는 제약으로 인해, 저우융캉이 낙마하고 그의 추종세력 다수가 축출된 상황에서도 정법 계통은 아직도 저우융캉 시기의 체제 안정 유지의 모델에 따라 운영되고 있다. 중국은 전국의 국가기구를 동원해 18년간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지속해왔다. 이로 인해 법제시스템은 철저히 무너졌다. 경제 및 사회적 위기도 폭발하고 있으며 사회는 무질서한 상태로 치닫고 있다. 현재 중국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난맥상도 이 점을 증명하고 있다. 2016년 4월 25일, 시진핑은 전국종교공작회의(全國宗教工作會議)를 소집해 장쩌민의 종교탄압정책을 바꾸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시간의 선택에 있어 공교롭게도 1999년 파룬궁의 ‘4.25’ 중난하이 평화 대청원의 기념일을 앞두고 이러한 신호를 보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2017년 4월 25일, 시진핑은 정치국회의(政治局會議)를 주재하며 <중앙 정법기관 순시 정황에 관한 특별주제 보고>를 심의했다. 정치국회의가 정법계통에 대해 단독으로 특별주제 보고를 심의한 것은 매우 드문 일로, 이는 정법계통에 커다란 변화가 있을 것임을 시사한다. 세상사와 정국의 발전, 국내와 국제의 정세는 이미 새로운 궤도에 진입했으며 중국과 세계는 모두 커다란 변화를 맞고 있다. 올해는 파룬따파(法輪大法)가 세상에 전해진 지 25주년이자 파룬궁의 평화적인 반박해와 진상을 알린 18주년이다. 파룬궁은 이미 중국에서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으며 세계 120여개 국가 및 지역에 보급됐다. 파룬따파의 아름다움은 전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중국 공산당의 파룬궁 박해 18주년, 이 과정 중에 폭로된 사악함과 죄악은 세상이 다 알고 있다. 파룬궁 수련자를 대상으로 한 대규모의 생체장기적출 사건은 국제사회에 낱낱이 드러났고 국제적 비난을 받았다.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미국은 전통적 스탠스로 회귀하기 시작했으며 세계정세도 이에 따라 거대한 변화가 발생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의 파트너 북한은 붕괴의 길로 나가고 있으며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정권의 멸망은 세계적 흐름이다. 중국의 전통 및 세계 보편적 가치로의 회귀는 누구나 바라는 바이며 하늘의 뜻이다. 2017년 4월 6일 트럼프와 시진핑의 회견 당일, 트럼프는 시리아를 향해 토마호크 59발을 발사할 것을 미군에 명령했다. 트럼프는 시리아의 민간인 학살이 치를 떨 만큼 잔혹한 행위로서 가장 악랄한 죄악 중 하나이며 결코 용서받아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시진핑은 트럼프의 행동에 대해 이렇게 반응했다. “누구든지 독가스를 사용하면, 특히 이렇게 잔혹하게 아동과 영아에 대해 독가스를 사용한다면, 이들에게 이렇게 행동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고. 그렇다면 18년간 장쩌민파의 파룬궁에 대한 잔혹한 고문, 학살 및 강제장기적출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이러한 ‘지구상에서 있어 본 적 없는 전대미문의 악행’은 세계인의 선악에 대한 판단 앞에서 선택의 시금석이 되었다. 분명 세계는 이러한 죄악이 계속되는 것을 절대 용서치 못할 것이다. 파룬궁 수련자들이 계속해서 석방되고 있고, 파룬궁 박해가 더 이상 지속되기 힘들어졌으며 사람들은 변화를 갈망하고 있다. 중국의 사회와 정세는 급변을 마주하고 있다.
얼마 전 시진핑이 왕치산을 조사하기 시작했다는 해외발(發) 소식이 장쩌민(江澤民)파가 지원하는 언론을 통해 확산된 적이 있었다. 일부 평론가들까지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모양새가 나타났다. 사실 이러한 불화설 조작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비슷한 풍문이 다시금 횡횡하는 것뿐이므로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원인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19차 전국인민대표대회(이하 19대)’가 다가오면서 시진핑 진영이 장쩌민 세력을 숙청하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패 척결 호랑이 사냥은 이미 장쩌민, 쩡칭훙(曾慶紅) 등의 주변과 본인들을 향하고 있다. 또 ‘19대’에서 시진핑의 최측근 인사들이 중요직에 배치될 것으로 예상된다. 붕괴 직전에 처한 장쩌민 일파는 필연적으로 국내외 모든 자원을 투입해 필사의 저항을 펼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장쩌민파의 계획은 시진핑과 왕치산의 불화 소식을 확산시켜 두 사람 관계를 이간질시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정치적 동맹을 흔들고 부패 척결 호랑이 사냥을 중단시키려는 책략이다. 또한 자신들이 저지른 파룬궁 박해와 강제장기적출이라는 죄악에 대한 대가를 치르지 않으려는 속셈도 있다. 이 같은 행동은 지난 몇 년간 시진핑에 저항하기 위해 진행한 정변과 연장선상에 있다. 왕치산이 등장한 뒤 ‘당내 부패 현상이 효과적으로 통제’ 됐다는 시진핑의 말을 해외 평론가 가오신(高新)은 논평에서 인용한 적이 있다. 또한 왕치산이 ‘주군을 위협할 만큼 공이 큰(功高震主)’ 상황에 이르렀다고 평가한 해외 언론보도도 소개했다. 그러나 이는 시진핑과 왕치산 간의 긴밀한 관계를 알지 못해서 나온 인식이다. 시진핑은 왕치산의 충성심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시진핑이 왕치산을 두고 유일하게 고민하는 것은 ‘19대’에서의 연임 유무일 뿐이다. 그를 연임시키지 않는다면 부패 척결의 지휘를 누가 수행해나갈지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시진핑 정부 출범 이후, 왕치산과 시진핑이 장악한 당 중앙기율위원회(이하 중기위)는 장 쩌민파와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하고 힘 있는 기구로서 큰 역할을 해왔다. 시진핑이 왕치산을 조사한다면 자신의 집권과 반부패의 동력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이러한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왕치산, ‘19대’서 유임될까? 중국 관료계 규정에 따르면, 사국급(司局級)과 부부급(副部級) 관료의 퇴직 연령은 60세, 정부급 관료는 65세이다. 하지만 정치국 위원의 퇴직 연령은 70세로 높은 편이다. 2002년 장쩌민, 쩡칭훙은 리루이환(李瑞環)에게 퇴임 압력을 넣기 위해 '7상8하(七上八下)‘라는 규정을 만들었다. 즉, 67세일 경우에는 다음 기수에도 정치국 상무위로 연임 가능하나, 68세에는 반드시 퇴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1948년생인 왕치산은 올해 68세를 넘기게 된다. 왕치산은 현재 엄격한 조치를 통해 당내 부패 악화를 방지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이를 완수한 뒤에는 ‘근본을 해결하는’ 정치적 개혁에 착수할 것이라고도 말했다. 그의 계획에 따르면, 지난 ‘18차’의 5년은 ‘표면적 문제를 처리하는(治標)’ 기간이었다면 ‘19대’부터는 권력 감독 개혁 및 당내 민주를 확대하는 등 ‘근본적 해결(治本)’ 조치가 따를 예정이다. 시진핑은 왕치산의 전략에 전폭적으로 동의했다. 이 때문에 ‘19대’에서의 왕치산 유임은 시진핑 정치 전략의 전제 조건일 수밖에 없다. 2013년 6월 전국조직공작회의(全國組織工作會議)에서 시진핑은 단순히 나이를 기준 삼아 간부를 등용할 수는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지난해 11월 7일 중기위 감찰부 홈페이지에는 중앙판공청(中央辦公廳)이 발표한 <베이징(北京)시, 산시(山西)성, 저장(浙江)성의 국가 감찰체제 개혁시범 지역 지정 방안>이 게시됐다. 이 방안에 따르면, 베이징, 산시, 저장 3개 지역이 시범 지역으로 선정되어, 인민대표대회가 계획한 감찰위원회를 설립할 예정이다. 이 새로운 기구는 ‘국가 감찰 기능을 수행하는 전문 기관’으로 자리잡을 전망이다. 감찰위원회 시범지역 설치는 사실상 기율위의 권력을 확대하고 왕치산을 위한 기반을 다져준 조치로 풀이된다. 시진핑이 권력 핵심으로 자리한 뒤 왕치산은 계속해서 그를 보좌해 부패 척결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장쩌민 일파를 제외한 공산당 고위층의 공조와 지원을 받은 바 있다. 보도에 따르면 쑹핑(宋平), 주룽지(朱鎔基), 츠하오톈(遲浩田), 우이(吳儀) 등 공산당 원로들이 서한을 통해 정치국 상무위와 중앙기율위 서기직에 왕치산을 유임시키라고 정치국에 요청했다. 또한 백여 명의 고위 관료들은 연판장을 작성해 왕치산의 연임을 주장했다. 향후 왕치산이 ‘19대’ 상무위에 연임될 가능성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또한 전보다 더욱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 고위층 권력 구조가 변화하고 있는 시점에서 미래 정치국 상무위의 실질적 권력은 약화될 것이 분명하다. 이에 따라 왕치산의 당내 직무도 국가 정부 직위(당내 직위가 아닌), 즉 감찰위원회 주임으로 변경될 가능성이 높다. 장쩌민 일파의 끊임없는 기습 공격 속에서 왕치산의 ‘19대’ 연임 여부가 향후 정치국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2012년 11월 중국 공산당 제18차 전국인민대표대회 후,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집권했고 리커창(李克強)은 총리직을 맡아 경제를 장악했으며, 왕치산(王岐山)은 기율검사위원회를 휘어잡고 부패 관료를 처벌했다. 리커창과 왕치산은 시진핑 주석의 부패 척결 호랑이 사냥의 주요 인물로, ‘3대 마차(三駕馬車)’, ‘시-리 체제(習李體制)’, ‘시-왕 체제(習王體制)’ 등의 용어가 언론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해외에서 장쩌민(江澤民)파를 배경을 둔 언론은 시진핑 주석과 리커창 총리 간의 불화 소식을 흘렸으나 원하는 바를 얻지 못했고, 최근에는 해외에서 시진핑과 왕치산 사이에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는 보도를 내보냈다. 이 보도는 많은 주목을 받았는데 그렇다면 시진핑과 왕치산 사이의 관계는 도대체 어떠한가? 두 사람 간의 진실한 관계는 미래 중국의 정세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 중국 언론에 나타난 시-왕 관계 중국 18차 당대회 이후 시진핑 주석과 왕치산이 과거 청년시기의 친밀한 관계에 대한 보도가 중국 언론에 다수 나타났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진핑이 부(副)성급 간부를 지내던 시절, 옌안(延安)시 옌촨(延川)현의 장쓰밍(張思明) 작가협회 주석은 옌촨현 량자허(梁家河)에서 시진핑의 옌안 지식청년 시절의 경력에 대해 인터뷰한 바 있다. 장쓰밍이 2002년 푸젠(福建) 성 성장이었던 시진핑을 방문할 당시, 시진핑은 그에게 1969년 농촌 하방(下放) 초기 베이징(北京)에서 옌촨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여정이 너무 길어 펑좡(馮莊)에 들러 왕치산에게 하룻밤을 신세진 적이 있는데 당시 두 사람은 한 이불을 덮고 잤다고 말했다. 당시 시진핑은 경제 관련 책을 한 권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왕치산에게 주고 왔다고 한다. 중국 매체가 시진핑과 왕치산의 밀접한 관계를 대대적으로 보도한 것은 시진핑과 왕치산이 정치적 동맹이라는 정보를 대외적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또한 뉴스보도의 세부 사항으로 볼 때 시진핑과 왕치산의 친밀한 관계가 진실함을 보여준다. 왕치산, 시진핑을 도와 장쩌민파 고위 관료 백 명 처단 중국의 기형적인 정치 체제는 일반적인 국가와 정부의 권력 조직 체계와 다르다. 중국 공산당의 체제하에 부패는 ‘창타이(常態·normal)’가 되어 버렸고, 중국의 뿌리 깊이 스며들었다. 시진핑 주석은 정상적인 법률 절차와 방법으로는 부패를 척결할 수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당내 기구인 중앙기율위원회(中紀委·중기위)의 힘을 빌려 부패와 맞설 수밖에 없었다. 왕치산은 금융업, 지방 고위관원, 중앙 부처와 국무원 총리를 거치면서 ‘소방대장’ 또는 ‘청도부(清道夫)’로 불렸다. 중국 공산당 18차 당대회 후, 시진핑, 왕치산은 강력한 부패 척결 호랑이 사냥에 나섰고, 당내, 군대 및 지방 성(省)과 시 등에 장기간 자리 잡고 있던 장쩌민 세력을 와해시키는 데 주력하면서 새로운 인사 배치를 완성했다. 4년여 시간 동안 왕치산은 시진핑을 도와 당·정·군(黨政軍) 고위 관료 100여 명을 낙마시켰으며, 이 중 대다수가 장쩌민 일파의 인물이었다. 정국급(正國級·국가지도자급) 저우융캉, 부국급(副國級·부총리 이상의 국가직) 쑤룽(蘇榮), 쉬차이허우(徐才厚), 궈보슝(郭伯雄) 등등이 이에 속한다. 지금까지 부부급(副部級·차관급) 이상의 관료 153명, 군대와 무장경찰 내의 부군급(副軍級.영관급) 이상의 관원 59명, 총 212명을 척결했다. 왕치산의 반부패 척결은 중국의 각 이익 집단을 건드렸는데, 특히 장쩌민 집단 가족의 기득이익을 건드렸다. 때문에 장쩌민 일파는 왕치산에 대한 여론 공격을 끊임없이 진행했고, 심지어 여러 차례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왕치산, 수차례 암살 위기에 놓여 홍콩 <동향(動向)>지 2016년 12월 호 보도에 따르면, 2016년 11월 말 왕치산은 차를 타고 산시(山西) 성 양취안(陽泉) 시를 순방 중이었다. 그가 타고 있던 차량 행렬이 타이위안(太原) 시 교외를 지난 후 앞서가던 SUV 차량이 진중(晉中) 시 고속도로 교차로에서 약 200m 떨어진 지점에서 컨테이너 트럭 한 대와 충돌했고, 해당 SUV 차량은 전소됐다. 보도는 이 충돌 사건이 왕치산이 중앙기율위 서기로 재임한 이래 공식적으로 파악된 27번째 암살 시도라고 했다. 당시 컨테이너 차량은 고의로 교차로 입구에 정차하고 기다리던 중이었다고 한다. 이 보도에 따르면, 왕치산이 중앙기율위 서기직을 맡은 이래 최소 17차례의 무장, 기계, 차량 등을 이용한 암살 시도가 있었으며, 우편, 소포를 이용한 화학약품 음해가 8차례 있었다고 한다. 이 밖에 허베이(河北), 쓰촨(四川) 등에서 초대소의 음용수나 죽 등에 독을 탄 사례가 각각 한 차례 있었다. 2015년 3월 27일에서 28일, 왕치산은 허난(河南) 성에 조사를 나갔다. 3월 28일 새벽 4시, 왕치산 일행을 맞은 허난성 위원회 초대소가 정전됐고, 4시 20분에 보조 장비로 다시 가동됐다가 5시 10분경 재차 정전됐다. 같은 시각, 성 위원회 보위부 전용 차량 3대가 차고에서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왕치산 일행은 당일 저녁 정저우(鄭州)시 경비구역 초대소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변경했으며, 중앙 보위부처가 이 사건을 3.28 폭력 암살 사건으로 규정하고 조사를 진행했다. 홍콩 언론은 2013년 8월 말 왕치산이 장시(江西) 난창(南昌)에서 겪은 암살 위험을 보도하기도 했다. 왕치산 일행이 난창 지역을 시찰할 당시, 그들이 묵었던 성(省) 초대소 제5원의 전화, TV, 전기가 돌연 50분가량 꺼졌다. 그 사이 두 명이 제5원으로 잠입했다가 왕치산의 수행 경호원에게 잡혔다. 이들 두 명은 잡혔을 당시 자살을 기도하면서 자신들은 ‘민원을 하러 온 사람’들이며, 왕치산에게 ‘억울한 사건’을 해결해 달라 부탁하려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사 결과 이들 두 사람은 공안 계통에서 제명된 경관으로, 고용된 암살자임이 드러났다. 과거 여러 언론이 폭로한 바와 같이 후진타오(胡錦濤) 전(前) 국가 주석도 장쩌민 일파의 암살 시도를 세 차례 겪은 바 있다. 시진핑 주석의 경우 18차 당대회 이후 최소한 6차례 암살 시도를 받았고, 이후 조사된 사실에 따르면, 모두 내부 인사가 암살자를 고용한 사건이었다. <하편에 계속>
중국에서 총리의 권한은 어느 정도일까? 역대 총리 7명을 살펴보면, 이 중 저우언라이를 뺀 6명 모두 3대 권력(군대, 선전 계통, 정법 계통)을 손에 넣지 못했다. 그나마 저우언라이는 군과 정부기관의 부분적 지배권을 확보했지만 늘 마오쩌둥의 눈치를 봐야 했다. 장쩌민이 국가주석을 하던 1998~2013년에 총리의 입지는 더욱 좁았다. 당시 중공 최고 권력을 장악한 장쩌민은 파룬궁 탄압을 확산하려 많은 당원과 공무원에게 탄압 가담의 대가로 부패와 비리를 묵인했다. 사실 장쩌민 자신부터 부패에 앞장서서 친족 중심으로 세력을 넓혀 ‘장쩌민파’를 형성했다. 이미 강대한 세력이 된, 부패한 공무원·당원 집단(장쩌민파)은 당시 주룽지 전 총리가 경제개혁과 반부패 정책을 추진하는 데 상당한 제약으로 작용했다. 장쩌민이 내려간 후 후진타오 전 주석과 원자바오 전 총리 역시 여전히 강한 장쩌민파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후진타오 재임 시기에 3대 권력을 가진 사람은 쉬차이허우와 궈보슝(군대), 저우융캉(정법 계통), 리창춘(선전 계통) 등 모두 장쩌민의 심복들이었다. 당시 후진타오가 어떤 정책을 결정했어도 중난하이(중공 권력 중심지)를 넘어 지방 정부까지 정책을 집행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원자바오 전 총리는 그보다 더했다. 3대 권력이 없거나 3대 권력을 장악한 지지세력이 없다면 설령 총리일지라도 어떤 영향력도 행사 할 수 없는, 단지 중공의 집사에 불과한 것이다. 시진핑과 리커창의 관계 리커창은 시진핑과 달리 ‘태자당’이나 ‘관얼다이(官二代)’ 출신도 아니고 화려한 집안 배경도 없으며 친족 중심으로 정치적 이익을 나눠 갖는 파벌이 있지도 않다. 두 사람 사이에 근본적인 이익 충돌이 없으므로 리커창이 시진핑의 정치적 위협이 될 가능성은 적다. 두 사람의 불화설 주장은 중공 정치체제의 기본적 상식에 어긋날뿐더러 오히려 두 사람이 갈등을 겪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려는 의도마저 엿보인다. 장쩌민파가 통제하는 중공 기관지 ‘인민일보’는 지난해 5월, 리커창이 “상반기 경제는 양호하며 앞날도 (그럴 것이라) 낙관한다”고 말했지만 시진핑의 한 측근인사는 그와 다르게 “현 중국 경제는 L자형(장기 저성장형)”이라 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친시진핑 홍콩언론 ‘명보’지는 “중국 경제에 대한 시진핑과 리커창의 다른 견해가 두 사람의 불화설을 뒷받침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곧 시진핑이 리커창의 국무 권한을 빼앗았다고 볼 수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언론이 두 사람의 갈등설을 연달아 보도하자 신경이 곤두선 중공 최고지도부가 최근 리커창 총리에 대한 보도를 늘렸다. 목적은 명백하다”면서 “국무원은 정부의 각 정책을 집행하는 기관으로, 누구든 마음대로 국무원 총리의 권한을 빼앗을 수 없다. 그러지 않으면 여러 정부 기관·부서와 협조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홍콩 언론 ‘경제일보’도 “시진핑과 리커창은 당에서 각자 맡은 역할이 있다. 시진핑은 회장 위치에서 회사의 발전 방향과 전략을 정하면서 최고운영책임자(COO)로서 일상적 업무 집행도 총괄한다. 위치가 다르면 사안에 대한 인식도 다르다는 건 이상할 게 없다”고 지적했다. 왕치산이 장쩌민파를 겨냥한 시진핑의 ‘호랑이 사냥’을 진두지휘하고 있다면 리커창은 경제 분야에서 호랑이 사냥을 지원하고 있다. 두 사람은 시진핑 진영의 핵심 주력이다. 장쩌민파의 목적 장쩌민은 국가주석 당시 해외 언론사를 인수하거나 만들었다. 이런 언론들은 중공 내 장쩌민파 고위층의 제보를 바탕으로 여러 번 특종을 터뜨려 독자의 신뢰를 얻었다. 그리고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장쩌민과 장쩌민파에 유리한 ‘가짜뉴스’를 퍼뜨려 왔다. 이를테면 한 언론이 지난 2015년에 “장쩌민에 대한 경호등급이 1급에서 2급으로 내려갔지만, 생활면에서 예우는 달라지지 않았다. 최근 2년간 장쩌민의 건강이 악화하자, 중국 정부는 해외에서 전문의를 초빙하도록 허용했다”고 보도한 것이 그렇다. 해당 기사는 겉보기에 장쩌민의 경호등급이 내려갔고 대우도 전만 못하단 내용이었지만, 사실 그 속에는 장쩌민이 여전히 건재하고 시진핑 진영에 의해 연금된 게 아니란 숨은 뜻이 있었다. ...
지난 3월 15일, 중국 양회(中國 兩會, 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가 막을 내렸다. 일부 언론은 시진핑 국가주석과 리커창 국무원 총리의 내부 균열 조짐을 전하면서 두 사람이 마치 적대시하는 것처럼 보도했다. 2013년 3월 시진핑이 국가주석에, 리커창이 국무원 총리로 취임한 이후 일부 언론은 줄곧 시 주석과 리 총리의 불화설을 보도했다. 예를 들면 지난해 8월 비공개로 열린 베이다이허(北戴河) 회의와 관련해 해외 중화권 매체가 ‘시 주석이 리 총리의 실권을 빼앗으려 해, 두 사람이 권력 투쟁을 벌이고 있다’고 보도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매체가 불화설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홍콩매체 ‘경제일보’는 올 양회에서 시 주석과 리 총리가 친밀감을 드러내는 손짓을 자주 하면서 대화했다고 보도했다. 불화설을 보도한 언론은 대개 중국 공산당(이하 중공) 내 장쩌민 파벌(이하 장쩌민파)이 장악한 매체들이다. 시 주석과 리 총리의 불화설은 사실일까? 불화설 보도가 노리는 건 뭘까? 당서기가 기관장에게 지시하는 정치체제 현재 대부분 국가는 대통령제 아니면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다. 대통령제는 국민이 국가원수이자 최고 행정권자인 대통령을 선거로 직접 선출하는 제도로, 미국은 세계 최초로 대통령제를 도입한 국가다. 의원내각제는 선거로 구성된 의회가 내각을 구성하고 의회 다수당에서 수상을 임명해 내각 각료를 임명하는 체제다. 통상 의원내각제에서 수상이나 총리는 의례적 역할에 그치며 행정권을 갖지 않는다. 대표적인 국가로 영국과 독일, 일본 등이 있다. 중국은 겉보기에 내각제에 해당하지만, 실질적 행정권을 국무원 총리가 아닌 국가주석이 갖는 등 실제로는 내각제가 아니다. 입헌민주주의 국가에서 주(州)의 우두머리는 당연히 주지사다. 중국에서 명목상 성(省)과 시(市)의 수장은 성장(省長)과 시장(市長)이지만 성 당서기 또는 시 당서기의 지시를 받는다는 독특한 차이가 있다. 성 당서기를 포함한 중공 각급 서기는 사실 정부 조직이 아닌 중공 조직이다. 중공의 ‘지부 서기제도’는 1920년대 후반 ‘당 지부를 연대 위에 놓는다’ ‘당이 총을 지휘한다’ 등 군이 공산당의 절대적 지배 아래 있어야 한다는 마오쩌둥의 주장에서 비롯됐다. 이후 1949년 중공이 정권을 탈취하면서 중국 전국에 퍼져 더욱 공고해졌다. 그 결과, 성의 최고 행정권자가 ‘성장’이 아닌 ‘성 당서기’라는, 정상적인 국가에서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 나타났다. 현재 중국의 각 성, 시, 구, 현과 마을 등 각 행정 단위에 ‘당서기’가 있다. 중국의 정치체제는 정상적인 내각제 국가와는 다른 변이된 체제라 할 수 있다. 실제 권력 서열은 정치자원 장악순 중국 공산당(이하 중공) 정권의 변이된 정치 체제는 권력의 의의와 구조, 효능 면에서 정상적인 민주 국가와 매우 다르다. 서양의 민주 국가에서 정부의 권력은 국가와 국민에게 봉사하기 위한 수단이며, 법률의 제약과 국민의 감시를 받는다. 정부의 권력 행사는 정상적인 국무 수행일 뿐이다. 반면 중국에서 중공의 권력은 기득권 집단이나 특정 당원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자 국가와 국민을 강압적으로 지배하는 도구다. 그러므로 중공의 계파 간 권력 투쟁은 중공 본질상 필연적이다. 중공 내 서열은 그가 장악한 정치 자원이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정권은 총 끝에서 나온다(정권을 무력으로 빼앗는다)’는 중공 사상에 따라 고위관리는 최고 권력을 손에 넣기 전, 우선 군(軍)의 지배권을 장악한다. 그 외에 ‘붓대(筆杆子)’와 ‘칼자루(刀把子)’, 즉 사상 선전계통과 법원·검찰·공안·정보기관 등 정법계통이 있다. 이 3대 권력-군대, 선전 계통, 정법 계통-을 장악했다면 중공의 주요권력을 이미 손에 넣은 것이다. 제17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 저우융캉은 형식상 서열 9위였지만, 사법계통과 무장경찰권을 쥐고 장쩌민의 후광을 받아 실제로는 당시 중앙위원회 총서기였던 후진타오와 맞먹는 권력을 행사했다. 왕치산은 현재 제18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 서열 6위로 거의 꼴찌에 불과하지만, 시 주석의 ‘호랑이 사냥(반부패 척결)’ 선봉장을 맡아 실제 그의 서열은 시 주석 바로 다음이라고 평가받는다.
본지는 미국에서 중국 부호 궈원구이(郭文貴)를 인터뷰했다. 궈원구이는 중국에서 파룬궁 수련자들을 상대로 강제 장기적출이 진행되고 있다고 폭로하고 미국으로 도피 중인 인물이다. 궈원구이는 베이다팡정(北大方正)의 그룹의 리유(李友·51) 전(前) 사장이 베이징대학 국제병원을 세운 목적이 고위층을 상대로 장기이식 사업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밝혔다. 그는 리유 자신이 간이 좋지 않아 이식을 원하고 있는데 그동안 수십 건의 대상을 물색했고 거기에는 파룬궁(法輪功) 수련자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밝혔다. 궈원구이는 가족이 중국에 연금되어 있고 노모가 놀랄 것을 우려해 인터뷰를 거부했지만 리유의 간 이식이 인명 및 파룬궁 수련자의 장기 강제적출 등과 관련이 있어 결국 기자의 인터뷰에 응하게 됐다고 말했다. 다음은 인터뷰 내용 중 일부이다. 기자: 리유의 간 이식에 대해 상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현재 병보석으로 풀려나 치료 중인지 아니면 어떤 상황인지요? 궈원구이: 리유는 1999년인가 2000년, 기억이 분명치 않네요. 당시 리유는 허난(河南) 성 정저우(鄭州)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150여 곳에 이르는 분쇄성 골절 상해를 입었습니다. 상태가 심각해서 병원에 몇 개월간 입원했습니다. 상처가 너무나 커서 비장을 잃을 정도였지요. 이후 몸이 회복되고 그의 인생 최고점을 베이징대 병원에서 맞이하게 됐습니다. 베이징대학을 앞세워 금융사업에 나섰지요. 그는 베이징대 금융사업을 주관했는데,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가 ‘베이다(北大)의약’이었습니다. 베이다의약은 중국에서 매우 중요하며, 중국 의약계 학생들 중 베이징대 출신이 매우 많습니다. 리유는 베이징대의 이 의약 학과의 간판에 주목했습니다. 베이징대 의과대학원은 아주 대단합니다. 중국에서 의과대학의 뒷받침 없이 병원을 운영하면 사회적 신뢰도나 정부의 지원도 얻을 수 없습니다. 리유는 영악하게 ‘베이다의약’을 만들었습니다. 이 약과 베이징대 의학원은 협력 업체로 그 배후의 주체는 베이징대학입니다. 하지만 리유는 이에 그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 베이징대 국제병원을 만들었습니다. 베이징대 국제병원은 2014년에 건립됐는데, 중국 최대 3급병원입니다. 임신, 출산에서 영유아 보건, 노환으로 인한 사망, 화장까지 모두 포함되며, 수십억 이상의 거대 자금을 투자했습니다. 리유가 (이 병원에 대한) 계획을 이야기해 준 적이 있습니다. 제가 그의 주주 중 하나였기 때문에 투자를 기대한 것이지요. 이 병원에서 그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은 혁명 원로, 정치가 등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이 최대의 공공관계 수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그는 장기이식사업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리유는 중국의 장기이식 사업이 세계적으로 가장 가치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하지 못하는 사업이기 때문이지요. 중국은 인구가 많고 법 제도도 완전하지 않은 데다 중국의 부패 편법이 있어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장 교체에 돈 없는 사람은 수십만, 돈 있는 사람은 수백만, 수천만을 쓸 수 있지요. 그래서 리유가 장기이식사업을 계획한 겁니다. 그래도 하늘이 공평합니다. 7년 전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에 리유에게서 간암이 발견됐습니다. 한 언론에서 보도하길, 그는 성 기능에 문제가 있어 캐나다산 해구삼(海狗参)을 즐겨 먹었고, 환으로도 만들어 복용했다고 합니다. 해구삼은 성 기능 향상에는 도움이 되지만 간에 큰 무리를 주었고, 리유는 줄곧 간 이식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에게는 간 이식에 필요한 자원이 많았을 텐데, 왜 이식을 하지 않았을까요? 리유는 자신이 계획한 베이징대병원을 개원하는 2014년이나 2015년에 이식받을 계획이었습니다. 본인이 직접 말한 겁니다. 게다가 아직 (간암) 말기도 아니었고요. 그 후에 그 사건이 드러나 체포되었지만, 하루도 (감옥에) 머물지 않았지요. 간암이라는 이유에서였지요. 간암을 진단한 베이징대의학원 사람들도 다 리유의 직원이었으니 그가 무슨 암이라고 하면 무슨 암이겠죠. 그가 간암으로 죽음의 위기에 놓여 있으니 병보석으로 처리해 치료받게 해주어야 한다는 거죠. 병원에는 그를 위한 스위트룸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2년이던가요? 2015년 1월 12일에 들어가서 2016년 12월 판결까지 리유는 줄곧 병원에 머물렀습니다. 그 기간 동안 저도 각종 경로로 그의 건강 상태를 알아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가 간 이식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본래는 2014년이나 2015년에 이식할 계획이었는데, 사건이 발생하면서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이지요. 그는 간암 덕분에 감옥에 투옥되지 않고 대우를 받으며 가석방까지 얻어냈습니다. 리유 주변사람이 말하길, 이식할 간을 물색할 때 사형수의 간을 찾아야 하는데, 리유의 요구 조건이 몹시 까다로웠다고 합니다. 첫째 거부 반응이 없을 것, 둘째 이식할 간이 그의 몸에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여러 가지 조건의 이식 대상 간 수십 건이 제시됐지만 그는 모두 거부했다고 합니다. 그의 요구 조건은 간단했어요. 전문가의 추천으로 21~25세 사이의 대상자여야 하며, 그의 부모와 조부모, 가족을 모두 조사해 건강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몇몇 신강(新疆) 지역의 대상자와 기타 지역 대상자가 선정됐지만, 그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티베트 출신인 한족과 혼혈한 19세 젊은이와 윈난(雲南) 출신이 마음에 들었는데, 결국 이식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가 일전에 프로그램에서 이에 대해 말한 적이 있는데 전부 다 이야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중국에서 발생한 파룬궁 장기강제적출이 사실이 아니거나 과장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겪은 바가 없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리유 사건이 터지고 제 스스로도 경험하고 보니 정말 경악스러웠습니다. 그들이 제게 말했던 것처럼, 리유는 수십 개의 간을, 수십 개의 우수한 간을 선택했습니다. 게다가 이 중 많은 사람들이 정말 파룬궁 수련자와 관련 있었어요. 저는 파룬궁 사람을 물색하라는 그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전 크게 놀랐습니다. 파룬궁에서 말하던 강제 장기적출이 실제로 발생한 사실이었어요. 제게 정보를 제공하고 상황을 알려주었던 사람의 가족이 공안이었는데, 장기 공급원 역할을 하는 사람은 대부분은 공안이라고 합니다. 공안은 강제력을 동원할 수 있으니 원하는 대로 고를 수 있지요. 그래서 저는 아, 그래서 파룬궁 수련자를 노렸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공안은 파룬궁 수련자를 잡아들이고 강제로 장기를 적출할 수 있으니까요. 이런 상황들을 종합해 보면서 저는 파룬궁이 주장했던 강제 장기적출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기자: 왜 간 제공자가 파룬궁 수련자일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거죠? 어떠한 근거로 그렇게 말씀하시나요? 궈원구이: 저에게 이 상황을 알려준 사람은 리유 주변의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입니다. 리여유에게 간 공급원을 제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자: 리유에게 제공된 간 공급원이 왜 파룬궁 수련자일 것이라 판단하시는 거죠? ...
트럼프 대통령은 2011년 중국 관영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거 10년간 중국에 관한 책을 몇 백 권이나 읽었다. 나는 중국인과 그들의 생각에 대해 잘 이해한다." 그는 자신이 읽었던 책에서 20권의 제목을 나열했으며, 그중 몇 권은 중국에서 금서로 지정된 도서였다. 그의 독서 이력을 보면 그가 정치, 경제, 역사, 사회, 문화, 교육 등 다방면의 지식을 두루 섭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중국 및 중국공산당에 대한 안목만큼은 그가 대외적으로 가지고 있는 '비즈니스맨' 이미지로 간단하게 치부할 수 없어 보인다. 그가 읽은 책의 주요 내용이다. 정치 분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기자 맥그리거의 저서 <중국 공산당의 비밀(The Party: the secret world of China's communist rulers)>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중국공산당 내부의 여러 관계를 폭로한 책이다. 중국사회와 체제의 각종 모순을 낱낱이 드러내며 '공산당은 하느님과 같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어디든 존재 한다'는 실상을 파헤쳤다. 미국 전 국무장관 키신저의 저서 <중국 이야기(On China)>는 중국공산당에 대해 '매우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는 평을 얻는다. 본 저서는 중국공산당 리더들의 성격이나 회담의 세부 내용들을 분석하며 동시에 민주적 가치와 외교 실무 간의 관계에 대한 저자의 의견을 제시한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어바인의 피터 나바로 교수의 저서 <슈퍼파워 중국(The Coming China Wars)>에서는 중국이 현재 '일련의 대담한 행동을 보여주며 세계경제 패권을 노리고 있다'고 판단한다. 그는 경제 분야에서 중국에 직접적으로 대항하며 필요시에는 군사행위도 활용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연구원 할퍼 교수의 <베이징 컨센서스(Beijing Consensus)>에서는 미국에 대한 중국의 가장 중대한 도전은 바로 관념 방면에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미중간 경제적 상호의존관계는 미국적 가치의 전파력을 약화시킨다. 미국을 선두로 하는 자유주의적 가치는 인권보호, 법치 및 언론 자유 등을 포괄한다. 중국은 더욱 간단하며 더욱 서양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관념을 수출하고 있으며, 이는 바로 "전제주의적 시장경제"라는 기본개념이다.'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교수 브라우티감의 <용의 선물(The Dragon's Gift)>은 중국의 대 아프리카 원조의 진상을 파헤치며 이는 '절대 단순한 한 가지 목표만을 가지고 진행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또한 동시에 '서양 국가들이 중국의 확장에 대해 느끼는 공포와 우려'에 대해 전한다. 인물전기 중국계 영국인 장융(張戎)의 저서 <마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Mao: The Untold Story)>은 '역사를 바꿀' 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본 저서는 아마존 도서 논픽션 분야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마오쩌둥의 진상을 파헤치며 그를 폭군의 모습으로 환원한다. 책은 '마오쩌둥의 굳은 시신이 천안문 광장을 떠나지 않는 한 중화 민족은 독재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한다. 민주운동가 자젠잉(查建英)의 <중국인의 초상: 떠오르는 중국을 움직이는 사람들(弄潮兒, Tide Players)>은 독자들이 '현재 중국 및 중국인들에게 발생하는, 복잡하며 예측불가능하나 계속 꿈틀거리고 있는 역사적 변화'에 대해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전기 작가 윈체스터의 <중국을 사랑한 남자(The man who loved china)>는 영국 생화학자 조지프 니덤과 그의 중국인 아내 루구이전(魯桂珍)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조지프 니덤은 <중국 과학과 문명사(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를 저술한 바 있으며 그의 영향으로 서양에서 중국의 과거 눈부신 문명을 재평가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경제 분야 ...
중국의 환구시보(環球時報)는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人民日報) 산하의 신문이다. 인민일보가 세계 각지에 많은 특파원과 객원기자들을 파견해 많은 자원적 우세를 차지하고 있어, 환구시보도 자연스레 이러한 힘을 등에 업고 중국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후시진(胡錫進)은 2005년부터 환구시보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 그는 “우리는 중국 서민들의 진정한 목소리를 대변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환구시보는 대중들에 있어 ‘분청(憤靑·분노한 청년들)의 총본부’라고 불리운다. 환구시보와 인터넷판 환구망(環球網)의 보도와 사설들은 극좌 성향을 보이며, 매우 공격적인데다 욕설이 난무하고 날조된 유언비어들이 많다. 그들의 이념은 반(反)미, 반(反)일 및 세계의 보편적 가치관에 반하는 성향을 보여 중국에서 공산당 체제가 원활하게 운영될 수 있는 윤활제와 민중을 세뇌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환구시보는 조작을 밥먹듯이 하면서 나쁜 소문을 전파하고 있으며 중국 내외에서 발생하는 민중사건에 개입, 공산당의 목소리를 대신하며 앞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반한, 반미, 반일 정서를 선동할 뿐만 아니라 대만, 홍콩과 중국 대륙 간의 적대적인 정서를 자극하면서 혼란스러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환구시보는 보편적 가치에 반하는, 심지어 반(反)인류적인 관점까지도 발표한다. 그 중 한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2014년 9월 17일 환구시보는 평론가 톈원린(田文林)의 ‘미국이 ISIS를 타격하는 데는 목적이 순수하지 않다(美國號召打ISIS夾帶不少私貨)’라는 사설을 실었는데, 글의 마지막 문단에 다음과 같은 말이 등장한다. “서양의 언론들은 ISIS가 포로를 학살하고 인질을 참수하는 극단적인 모습만을 과장되게 보도하면서 이 조직의 다른 면은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ISIS는 그들의 점령지에 수도와 전기를 공급하고 임금을 지급하며 교통을 통제하고 빵집, 은행, 학교, 법원, 이슬람 사원까지 관리한다. 그렇기 때문에 ISIS가 악질의 테러 조직인지, 아니면 오늘날 중동의 정치 발전의 필연적인 산물인지는 여전히 쉽게 단언하기가 힘들다.” 이렇듯 환구시보는 ISIS의 잔혹한 만행을 적나라하게 변호하며 그들을 찬양했다. 환구시보의 두 가지 역할 환구시보의 주요 작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각기 다른 시기에 행해졌다. 첫 번째 시기는 1993년 창간부터 2012년 말까지이다. 환구시보는 중국공산당의 전반적인 목소리를 대변하고 민중들의 사상을 통제하기 위한 도구였다. 두 번째 시기는 2012년 중국공산당 18차 당대회에서 시진핑이 집권하면서 부터 지금까지의 시기다. 환구시보는 중국공산당을 위해서 일하는 동시에 또 하나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됐다. 바로 장쩌민 집단의 주요 발언대가 된 것이다. 상무위원 류윈산(劉雲山)이 이를 직접 책임지면서 시진핑에 맞서기 시작했다. 지극히 폐쇄적이고 경직되고 변이된 중국공산당 체제에서 시진핑 정부가 출범한지 4년이 된 지금, 시진핑이 추진해온 반부패 드라이브와 변혁의 움직임은 체제 내의 이익집단과 장쩌민 세력의 저항에 부딪쳐왔다. 류윈산이 장악하고 있는 선전계통과 시진핑 당국의 정책들은 대립각을 보이고 있다. 류윈산은 끊임없이 시진핑을 겨냥해 ‘구덩이를 파고’ 있으며 문화대혁명 시기의 맹목적인 숭배방식을 사용해 ‘고급흑(高級黑·칭찬하는 척하면서 깎아내리기)’, ‘띄워서 죽이기(捧殺)’ 등 방식을 사용해 시진핑에게 불리한 여론을 조성해 대중들에게 중국의 위기를 초래한 주범이 시진핑이라고 유도함으로써, 장쩌민 세력에게 돌파구를 제공하고 있다. 후시진과 환구시보는 류윈산의 든든한 무기로,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류윈산이 환구시보에 파룬궁을 모함하는 내용을 싣도록 지시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성격이 다분히 드러난다. 환구시보, 파룬궁 박해에도 가담 장쩌민이 1999년부터 참혹하게 파룬궁을 박해하고 수련자들의 장기를 강제적출한 만행은 이제 백일하에 드러난 사실이다. 그러나 시진핑 당국은 장쩌민 집단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시진핑 정부 출범 이후 몇 년간은 파룬궁 관련 보도들이 관영 언론에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환구시보만 계속해서 파룬궁을 비난하며,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진행하던 초기와 같이 대대적으로 파룬궁을 조작, 공격해 시진핑이 파룬궁을 박해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그 예로, 환구시보는 2016년 8월 20일 파룬궁이 강제장기적출 만행을 폭로한데 대해, 이는 파룬궁이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것이다’라고 논평했다. 하지만 그 논평은 맥락도 없고 근거도 없는 그야말로 억지스런 내용이었다. 2016년 10월 12일, 환구시보는 장쩌민파를 비판한 홍콩 ‘성보(成報)’지가 대중의 관심을 끌자 분명히 부정이 개입했을 것이라는 논평을 실어 ‘배후에는 서양 국가들의 정치자금을 받은 흑막이 있다’라는 내용을 보도했으나 아무런 증거도 제시 못했다. 환구시보, 당국의 경고 받아 장쩌민파의 앞잡이 노력을 한 환구시보와 편집장 후시진은 이미 시진핑 당국의 경고를 받았다. 2016년 1월 28일 중앙기율검사위원회(중기위) 홈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올랐다. ‘승인을 거치지 않고 멋대로 공금을 횡령, 폴란드 관광에 사용한 환구시보를 엄격히 조사해 처리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관련 규정에 따라 환구시보 편집장에게 행정 경고 처분을 내렸으며, 부편집장에게는 중기위 신문사 주재 기율검사소조(紀檢組)에 서면검사를 올리라는 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신문사 계재부(計財部)에 두 사람이 부담해야 할 6417위안 (약 107만원)비용을 반환할 것을 명령했다. ...
작년에 미국에 있는 나에게 주 정부에서 배심원으로 출석하라는 편지가 한 통 왔다. 판례법 체계를 취하고 있는 미국에서는 법률 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기본적인 상식과 정상적인 감정을 가진 사람들을 불러 배심원으로 출석하도록 한다. 피고가 유죄인지 무죄인지 여부를 상식선에서 판단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문제를 깨닫게 된다. 비록 법률 조항들은 복잡하지만, 법제도의 기초와 법제도의 정신은 간단하다. 기본적인 감정과 상식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복잡한 이론은 잠시 내려두고, 중국에서 의법치국(依法治國.법에 의거해 나라를 다스림)을 실현하는 방안에 대해 상식으로부터 출발해 논의해 보도록 하자. 1. ‘부패와의 전쟁’과 의법치국 올해로 취임 4년째에 들어서는 시진핑은 그간 헌법에 위배되는 노동교양제도를 폐지하는 등 ‘의법치국’을 목표로 눈에 띄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부패와의 전쟁’에 있어서도 ‘법에 따르려는’ 노력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패와의 전쟁’은 전반적으로 수많은 질타를 받았다. 정적들의 고의성 폄하발언을 차치하더라도, ‘중앙기율위를 통해 부패인사를 체포, 심리한 시진핑의 방식은 위법이고 위헌’이라고 지적하는 목소리가 존재한다. 법률적인 관점에 따르면 법집행기관이 아닌 중기위에는 국민의 인신자유를 제한할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개별 안건 심리에 있어서 역시 ‘오직 사실만을 근거로 한다’는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음이 역력하다. 이 점은 주지하듯 보시라이, 저우융캉, 궈보슝 등이 수수한 뇌물이 법정상에서 공표된 수치를 훨씬 뛰어넘는다는 것과, 그들의 반인류적 죄행 역시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진핑이 이들에 대해 취한 조치를 우리는 여전히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는 기본적인 상식에 근거한 판단이다. 예컨대 제2차대전 당시 전쟁범죄와 반인류적 범죄를 자행한 히틀러를 생각해 보자. 당시 우리가 미국을 위시한 연합군에게 “연합군은 법집행기관이 아니니 군사행동을 중단하고 독일의 법률에 따라 히틀러를 체포해야 한다”고 말했다면 고지식하다고 비웃음을 샀을 것이다. 법률이 실제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면 유태인에 대한 학살은 처음부터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치 정부는 법률 위에 군림하는 독재정부였고, 법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나치 정부부터 궤멸시켜야만 했다. 뉘른베르크 재판과 도쿄 재판[의 판결]은 파시스트들이 사라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실현가능성을 가지게 되었다. 마찬가지 원리로, 중국의 최고법원과 최고검찰원, 공안부가 모두 정법위원회 서기인 저우융캉의 아래에 있는 상황에서는 정법위를 개혁하지 않는 한 저우융캉을 체포할 수 없다. 시진핑과 장쩌민 간 힘겨루기의 본질은 전쟁이다. 나는 이 ‘전쟁’ 과정에서 어떤 ‘법적인’ 분쟁해결 통로가 이용되리라고는 애초에 기대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상황이 달라졌다. 시진핑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전쟁’이 끝나려는 시점에서 나는, 앞으로 시진핑과 중국 국민들 사이에 ‘전쟁’ 상황이 빚어져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싶다. 이제는 ‘의법치국’이 ‘뉴 노멀’이 되어야 한다. 중국의 현 제도 하에서 ‘의법치국’의 실현은 가능할까? 이 글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주제는 바로 이것이다. 2. ‘의법치국’, 어떤 ‘법’에 ‘의거’할 것인가 ‘의법치국’을 이야기하려면 우선 어떤 ‘법’에 ‘의거’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 다시금 기본적인 문제, 즉 법률을 제정하는 원칙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우선 중국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기원전 141년 불과 16세의 나이로 제위에 오른 한무제는 곧바로 조령을 내려 현량하고 품행이 바르며 간언에 능한 선비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천인삼책(天人三策)>으로 널리 알려진, 한무제와 동중서(董仲舒) 간의 세 차례 문답은 이렇게 해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동중서는 문답에서 ‘제자백가를 모두 내쫓고, 오직 유학만을 숭상해야 한다(罷黜百家,獨尊儒術)’는 요지의, 유명한 주장을 펼쳤다. 이 이야기는 흔히 유교가 최고 지위에 등극하게 된 계기로만 인식되는 경우가 많고, 동중서가 ‘법제가 자주 바뀌면 일반 백성들은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모르게 된다(法制數變,下不知所守)’고 말한 이유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은 드물다. 국가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법제도가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을 동중서는 이미 2천여 년 전에 예민하게 포착해냈던 것이다. 그리고 안정적인 법제도를 위해서는 법률을 제정하는 기반 역할을 해 줄 안정된 국가 이데올로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한나라 이전 중국의 국가 이데올로기는 크게 3가지 단계—전국시대의 백가쟁명, 진나라 때의 법가, 그리고 한나라 초기의 도가—를 거쳤다고 본다. 백가쟁명 당시는 탐색 단계로서 대규모 실험은 이뤄지지 않았으므로 논하지 않겠다. 법가를 숭상했던 진나라의 법령은 혹형을 원칙으로 했는데, 그 결과 진나라는 2대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한나라 초에는 정반대의 추세가 나타났다. 도가의 관대함과 ‘무위’를 원칙으로 한 한나라에서는 비록 경제는 번성했으나 지나친 관용으로 인해 내부적 정치 위기가 발생했다. 한나라 경제(景帝) 때 일어난 ‘칠왕의 난(七國之亂)’이 그것이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흉노의 침입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도가에서는 ‘소국과민(小國寡民)’을 이상적인 국가로 본다. 그러나 중국처럼 광대한 영토와 거대한 인구를 가진 국가의 경우 아무런 법제도 없이 완전히 ‘무위’에 맡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동중서는 법가와 도가 사이의 중도, 즉 지나치게 관대하지도 지나치게 엄격하지도 않은 제도를 선택했는데, 유가의 방식이 바로 그랬다. 이후 2천여 년 간 중국에서는 법률을 제정하는 원칙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이는 각 시대 각 왕조마다 모두 유가 사상을 국가 이데올로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법률 측면에서는 도가나 법가 쪽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안정이 유지됐다. 이제 서양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서양의 법률은 그들의 신앙에 따라 좌우된다. 하버드대 버만(Harold J. Berman) 교수는 <법률과 종교>라는 얇은 책에서 ‘법률은 형식이라는 측면에서 종교와 유사할 뿐만 아니라 원칙이라는 측면에서도 종교의 교리에 부합하는데, 이는 법률이 종교로부터 유래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고 언급했다. 그는 “법률은 반드시 신앙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유명무실해지고 만다”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법학자들은 서양에서 법률을 제정하는 근원은 ‘모세의 십계명’이라고 보다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모세의 십계명’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처음 세 가지 계명은 사람과 신 사이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데, 예수가 말씀하신 대로 ‘사람은 온 마음을 다해 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나머지 일곱 계명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다룬 것으로, 예수가 정리하신 대로 ‘타인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내용이다. 뒷부분의 일곱 계명은 앞선 세 계명을 바탕으로 ‘사람들이 모두 같은 신을 사랑하므로, 신도 사람을 사랑하시며, 그러므로 사람들은 서로 돌봐 주어야 한다’는 세상에 대한 단순한 인식을 따른다. ...
지난 2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37년 만에 외교적 관례를 타파하고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과 직접 통화했다. 이는 트럼프가 또 다시 미국 정치인들의 ‘정치적 금기’를 깬 것이기도 하다. 미국 주류 언론들은 트럼프가 미국의 외교정책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고, 한 민주당 상원의원은 심지어 트럼프는 책략이라는 것을 몰라 전쟁을 촉발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황급히 트럼프와 선을 그으면서 “‘하나의 중국’ 정책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변화가 없다”고 밝히고 나섰다. 이에 비해 중국의 반응은 오히려 비교적 차분했고, 전화통화 사건을 ‘대만의 장난질’이라고 규정하며 비난의 화살을 대만에 돌렸다. 하지만 트럼프 측의 반응은 당당했다. 트럼프 차기 행정부 국무장관 후보 중 한 명인 존 볼턴 전 유엔 주재 미국 대사는 폭스뉴스와 인터뷰에서 “미국 대통령은 미국의 이익에 부합된다면 그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미국이 누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지 중국이 정해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 당선인은 “예의상의 전화통화였다”고 설명하면서 “오바마 대통령은 작년에 먼저 다가가 살인마 쿠바 독재자와 접촉하고도 영웅 대접을 받았는데 트럼프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만 지도자가 걸어온 축하 전화를 받았을 뿐인데 논란이 되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트럼프를 두둔했다. 트럼프는 직접 트위터를 통해 “미국이 대만에 수십억 달러의 무기를 팔았는데 축하 전화도 받지 말라는 것인가, 참 흥미롭다”라고 응수했다. 두 번째로 올린 게시물에서는 “중국은 위안화를 평가 절하할 때 미국의 동의를 구했는가? 중국은 미국 수입품에 무거운 관세를 매기거나 남중국해에 군사 시설을 늘리면서 미국의 의사를 물어봤는가? 나는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라고 재차 자신을 향한 비판에 맞받아쳤다. 관례를 타파한 전화통화와 이에 대한 트럼프 측의 대응은 미국의 ‘정치적 금기’에 다시금 도전한 것이며, 미·중 정치적 거래의 암묵적인 룰과 금기를 깨부순 것이다. 이른바 ‘하나의 중국’과 ‘대만 독립’은 국가 주권과 영토 문제와 연관된 민감한 사안이다. 현재 국제사회에서 대만이 처한 고립과 미·중과의 관계는 역사와 현실의 여러 가지 요소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은 많은 경우, 대만의 활동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건드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문제 삼으면서 미국을 상대로 한 정치 게임 카드로 이용했다. 다시 말해 이른바 대만 문제는 중국공산당이 만들어 낸 것이고, 이와 관련된 정치 게임 규칙도 중국공산당이 만들어 낸 것인데 미국을 포함한 서방 국가들은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미국은 그동안 대만에 대한 군사적 지원과 왕래를 유지했는데 이는 최소한 대만을 중국공산당 치하의 한 지역으로 여기지는 않은 것이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중국공산당이 정한 게임 규칙을 엄격히 따르면서 대만과 자유로운 대화는 자제해왔다. 트럼프가 이런 게임규칙과 정치적 금기를 타파하자 오바마 정부 인사들은 당황한 나머지 격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중국은 오히려 차분한 모습이었다. 이런 기현상이 조성된 원인은 무엇일까? 미국은 당초 중국공산당과 접촉 및 협력을 통해 점차 국제사회로 끌어들이고, 이를 통해 중국의 체제와 가치관이 국제사회와 궤를 같이 하게 만들고, 국제사회에서 책임을 질줄 아는 국가가 되게 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오히려 정반대가 됐다. 중국공산당이 국제 경제 무대에 진입하면서 공정한 무역질서가 파괴됐고 국제 시장경제 환경은 심각하게 파괴됐다. 중국은 세계무역기구(WTO) 가맹 후에도 금융, 에너지, 통신 등 핵심 업종에서 자국 기업을 보호했을 뿐만 아니라 환율 조작, 수출 관세 환급 등 우회적인 방식으로 자국 시장을 키웠다. 그 결과 서방과 협상할 수 있는 힘이 생기면서 인권유린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서방 정치가, 학자와 언론을 매수해 독재통치에 유리하게 이용했다. 이에 따라 이른바 ‘차이나 컨센서스(중국모델)’은 국제사회에서 추앙을 받기 시작했는데, 중국공산당과 서방 대기업 및 일부 서방 정부가 손잡은 결과였다. 중국은 ‘선물보따리’ 외교를 벌이면서 미국 제품을 구입하고 미국 기업이 중국에서 저렴하게 투자하도록 혜택을 주는 동시에, 미국의 정치 구조를 이용해 미국 내 이익집단이 자신들을 위해 말하게 하고 정부에 압력을 가하게도 했다. 중국공산당이 ‘오래된 친구’라고 부르는 대변인들 중에는 월스트리트의 금융, 법률과 회계 등 분야의 엘리트들이 포함돼 있는데, 이들은 중국공산당 이익집단이 소유하고 있는 국유기업들이 해외에서 상장하여 발을 붙일 수 있게 도와줬다. 그들은 큰 이익을 얻어가는 동시에 중국공산당의 연명에 필요한 피를 수혈해줬다. 이 같은 거래에서 이익을 본 것은 미국 사업가들과 중국공산당 기득권층이며, 미국 국민과 중국 국민은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했다. 중국공산당과 접촉에서 인권문제는 원래 미국의 유력한 카드였지만 미국은 주도권을 잃고 말았다. 미국이 티베트, 위구르와 대만 문제를 지적하면 중국공산당은 역사적 민족적 원인 및 ‘국가통일’을 내세워 중국인들을 선동, 인권문제를 ‘반중국세력’의 문제로 왜곡시켰다. ...
북한의 핵 실험을 도운 혐의를 받고 있는 단둥(丹東)의 홍샹(鴻祥)그룹 총재 마샤오훙(馬曉紅)이 조사를 받았으며 이 문제는 최근 국제사회에서 큰 관심과 이슈가 됐다. 한 소식통에 따르면 “(마샤오훙에 대한)모든 조사는 중국의 최고위층과 긴밀한 관계가 있으며 국가안전위원회,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최고검찰, 공안부, 국가안전부와 공동으로 TF 팀을 만들어 강도 높게 조사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런 사실로 미뤄볼 때 마샤오훙의 안건은 매우 중대하며, 철저히 조사가 이뤄져 사건의 진상이 파헤쳐 진다면 많은 사람들이 연루될 것으로 관측된다. 현재 여러 방면에서 폭로한 소식에 따르면 마샤오훙은 북한 고위층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실 이외에도 중국의 4대 정재계 인맥과 연관이 있으며 4대 정재계 인맥은 중국의 중앙과 지방을 아우르고 있어 이를 통해 마샤오홍의 파워가 상당하다는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단둥 지역에 폭넓은 공무원 인맥 4대 정재계 인맥 중 첫 번째 인맥은 단둥의 공무원들이다. 마샤오훙이 체포된 후 한국 언론 데일리NK는 소식통을 인용해 마샤오훙이 단둥시의 수십 명의 공무원들을 매수했다고 보도했다. 기자는 해당 공무원이 누군지 알 수는 없지만 단둥의 세관 공무원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세관 공무원의 도움 없이 마샤오훙이 북한에 비밀 물품을 통관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단둥의 세관장 장다오후(張道虎), 부 세관장 양쉬(楊旭)와 황신항(黃心航)이 분명히 포함됐을 것으로 예상된다. 단둥의 세관 외에 마샤오훙은 단둥 공안변경방위대, 단둥국가안전국, 단둥세관밀수단속 분국, 단둥출입국검험검역국, 정법위 종합처리판공실, 단둥 군분구, 단둥 국경수비검문소 등도 손을 써 놓았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기관 책임자들도 현재 의혹을 받고 있다. 또한, 단둥의 지방 관료들 중 단둥 부시장을 역임했으며 현 단둥 전인대 부주임 후이위보(回育波), 단둥 상무 부시장 순쯔하오(孫誌浩)가 특별히 주목받고 있다. 이 두 사람은 단둥시 기업연합회, 기업가 협회 지도자이며 고문위원회의 주임, 부주임의 직위를 맡고 있다. 순쯔하오는 단둥발전개혁, 세금, 인력자원사회보장, 민원, 금융, 통계 등의 업무에 있어 감사, 편제, 회계감사 업무를 담당하고 있으며 더불어 국경 경제협력지대, 단둥항 그룹 주식회사 연락업무를 책임지고 있다. 권력은 큰 편이 아닌 것으로 알려졌으나 공교롭게도 마샤오훙은 해당 협회의 부회장인 사실이 드러났다. 특히 재미있는 사실은 중국 정계와 연계된 특징을 과시하기 위해 단둥시 기업연합회 고문위원회 회원기업 리스트에는 단둥의 중량급 부처들이 포함되어 있다. 해당 부처로는 시 경제정보위원회, 시 발전개혁위, 시 주택건설위원회, 시 위원회 선전부, 시 공안국, 시 국토자원국, 시 규획국, 시 환경보호국, 시 안전검사국, 시 교통국, 시 금융판공실, 시 공상국, 시 품질검사국, 시 국세국, 시 지방세국, 시 전력공급회사, 시 민정국을 포함하고 있다. 기관의 고문직이라고는 하지만 고문과 기관은 상호 협력관계에 있다. 필자는 마샤오훙의 안건을 둘러싸고 단둥의 수많은 공무원들이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랴오닝성의 성급 관료들 두 번째 인맥은 랴오닝성의 성급 관료들이다. 마샤오훙이 경영하는 사업은 단둥시 시 공무원들이 흔들 수 있는 기업이 아니며 랴오닝성의 성급 공무원과 중앙 고위급 관료가 배후에서 지원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들의 도움이 없이 마샤오훙이 대담하게 김씨 정권의 핵 개발을 돕고 랴오닝성 전인대 대표로 선출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마샤오훙 배후의 성급 관료로는 먼저 랴오닝 전인대 부주임 리펑(李峰)을 꼽을 수 있다. 마샤오훙이 조사를 받는 시기에 리펑 또한 파면됐다. 그는 랴오닝성 공안청 청장, 성정법위원회 서기 등을 역임했으며 항간의 소문에 따르면 북한 김씨 정권이 중국에서 위조지폐, 마약을 유통하는 일을 돕는 저우융캉(周永康)의 중국 내 조력자로 알려졌다. 이 모든 일들로 미뤄볼 때 그와 마샤오훙이 연계되어 있음을 추측하지 않을 수 없으며 홍샹그룹이 북한 정부, 군대와 연계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공안, 사법 계통의 지원이 있던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또 다른 가능성이 있는 인물로는 바로 현 랴오닝성 민정청장 스광(石光)이다. 그는 2011년 5월부터 올해 1월까지 단둥시 위원회 부서기, 대리시장을 맡아왔으며 2012년 1월부터 2014년 12월까지 단둥시의 시장을 역임했고 단둥시 기업연합회의 명예회장직을 수행했다. 언론에서도 마샤오훙과 친분이 있음을 공개했다. 이외에도 홍샹그룹과 북한이 합자 형태로 투자한 칠보산 호텔이 선양(沈陽)에 소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마샤오훙과 랴오닝성의 기타 부처 공무원 및 선양시 공무원들과 연줄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중앙 고위 관료 집단 세 번째 인맥은 중앙 고위 관료이다. 북한의 핵 개발은 상당히 민감한 문제이다. 위키리크스는 중국 고위 관료집단이 북한 핵 개발에 오랫동안 자금조달을 해왔다고 폭로하며 특히 장쩌민(江澤民)의 집권 기간 동안 저우융캉, 쩡칭훙(曾慶紅), 장더장(張德江) 등이 북한 고위층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지목했다. 이로 인해 북한에 민감한 물품을 판매할 경우 중국 고위 관료의 특별한 허용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이러한 사실은 마샤오훙의 훙샹그룹이 독자적으로 북한을 지원했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
9월 10일, 황싱궈(黃興國) 톈진시 당 대리서기 겸 시장이 ‘기율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 이로써 그는 18차 전국대표대회 이후 처음으로 낙마한 직할시 시장으로 기록됐다. 공개 자료에 따르면 시진핑, 왕치산(王岐山), 리커창(李克強), 위정성(俞正聲) 등 최소 4명의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그의 낙마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작년 톈진 대폭발 사건 외에도 갖가지 문제를 일으켰던 황싱궈는 낙마 전 두 번이나 ‘시허신(習核心·시진핑이 당의 핵심)을 외쳐 스스로를 보호하려 했지만 9월 위정성이 톈진을 시찰한 후 결국 낙마했다. 위정성의 톈진 시찰 4일 만에 낙마 황싱궈가 낙마하기 4일 전인 이달 5, 6일, 위정성 상무위원은 톈진시의 로펌, 종교활동 장소 등을 찾아 시찰을 진행했다. 시찰 과정에서 위정성은 충화(崇化) 중학교에서 신장 출신 고등학생들을 만났고, 톈진의 사찰을 방문해 종교 활동 전개 상황에 대해 알아보기도 했다. 위정성은 ‘전국종교공작회의 정신을 착실히 관철해 시행할 것’을 강조했다. 이번에 위정성 상무위원이 시찰한 로펌, 종교 활동 장소는 모두 민감한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 2015년 7월 9일부터 중국공산당은 인권변호사들을 대규모 체포했고 이에 베이징, 광둥성, 광시(廣西) 등 25개 지역의 300명에 육박하는 변호사, 로펌 직원, 인권운동가 및 그의 가족들이 소환, 연금, 거주지 감시, 형사구속 혹은 실종됐다. 이 사건은 ‘7.09 사건’이라고 불린다. 2016년 초, ‘7.09 사건 인권변호사’ 중 15명에게 체포령이 내려졌으며 14명은 톈진시에 수감됐다. 이렇게 체포된 변호사 중 일부는 파룬궁 수련자를 위해 무죄 변호를 진행한 적이 있다. 올해 4월 22일과 23일, 시진핑 주석은 5명의 상무위원과 함께 전국종교공작회의에 참여했고 ‘법에 따라 종교 관련 사무를 처리할 것’, ‘종교 공작의 수준을 전면적으로 제고할 것’, ‘종교를 믿는 신도들의 역량을 더욱 한데 모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 와중에 종교의 자유도 강조했다. 이 같은 조치는 장쩌민 집권 시기 종교 탄압 정책에 대해 부정한 것으로 해석된다. 4월에 열린 전국종교회의는 시기적으로 많은 주목을 끌었다. 왜냐하면 파룬궁 수련자의 반(反)박해 ‘4.25 청원’(파룬궁 수련자 1만 명이 베이징에서 당국에 평화적으로 청원한 시위) 기간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황싱궈 서기는 위정성 상무위원이 톈진 시찰을 마친 후인 6일 밤 시위원회 상무위원회 확대회의를 열어 위정성의 강화와 시진핑의 통일전선 공작에 대한 연설 정신을 학습하겠다는 뜻을 표명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위정성이 톈진을 떠난 4일 후 파룬궁 탄압이 심한 톈진시 당국의 최고지도자가 낙마했다는 점이다. 최근 중국중앙판공청에서 최신 기밀문서를 하달해 파룬궁 수련자와 그 친족이 17년간 받아왔던 불공정한 대우에 대해 언급했다. 톈진 당국, 우창순 체포 후에도 파룬궁 심하게 탄압 톈진시는 파룬궁 탄압이 심한 도시 중 하나로 꼽히며, ‘4.25’사건의 도화선이 된 곳이다. 최근 수년 간에도 톈진시 고위층은 파룬궁 탄압을 멈추지 않았다. 2014년 7월 20일, 파룬궁 박해에 적극 가담한 우창순(武長順) 전 공안국장이 조사 받은 지 4일이 지난 후, 당시 후베이성 우한시 공안국장을 역임하던 자오페이(趙飛)가 ‘북상(北上)’해 톈진시 공안국장에 취임했다. 해외 파룬궁 사이트 밍후이왕(明慧網)에서는 2015년 중국공산당 양회가 열리기 전 자오페이 등의 지시 하에 3월 2일에서 4일까지 중국 전역 8개 지역의 파룬궁 수련자 37명 및 그 친족이 납치, 가택 수색 및 자택 침입을 당했다고 보도했다. 공안부 내부 소식통에 따르면 최소 60~70명이 체포됐다. 2015년 5월 1일, 베이징 최고법원이 ‘유안필립’(有案必立·법률 조건을 갖춘 사건은 반드시 접수), ‘유소필응’(有訴案應·고소장이 접수되면 반드시 응대) 방침을 발표한 후 국내외에서 장쩌민 전 총서기를 고발하는 열풍이 불기 시작했고, 현재까지 파룬궁 수련자 20만 명 및 각계 민중이 이에 적극 참여했다. 수천 명에 달하는 톈진시 파룬궁 수련자들이 작년 5월 말부터 중국공산당 최고검찰원, 최고인민법원에 장쩌민에 대한 고소장을 제출해 그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장가오리(張高麗) 상무위원과 톈진시 정법위원회 및 자오페이의 주도로, ‘610’, 공안부 산하 국내 보위국 및 100여 개 파출소 경찰들이 장쩌민을 고소한 파룬궁 수련자와 친족들을 대규모 체포하고 심지어 실형을 내리기도 했다. ...
중국 공산당 고위간부와 친인척 1,570명에 대한 출국제한 조치가 내려졌다고 홍콩 언론들이 보도했다. 이번 출국제한 대상자 중에는 장쩌민(江澤民), 쩡칭훙(曾慶紅), 리창춘(李長春), 자칭린(賈慶林), 허궈창(賀國強), 우관정(吳官正), 천즈리(陳至立), 후이량위(回良玉), 왕러취안(王樂泉) 등 퇴직 원로와 류윈산(劉雲山), 장가오리(張高麗) 등 현직 최고위층의 가족이 포함됐다. 홍콩 언론들은 이번에 출국제한 통지를 받은 고위간부와 친인척들은 60일 이내에 여권·재산내역·국적사항 등 관련 서류를 반드시 제출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인사발령도 단행됐다. 지난달 28일 공안부 출입국 관리국장 쩡바이강(鄭百崗)이 물러나고 취윈하이(曲雲海) 부국장이 대신 국장으로 승진 발탁됐다. 쩡바이강 전 국장은 군 출신 인물로 지난 2010년 국장직에 취임했으며, 저우융캉(周永康·현재 무기징역 복역 중)과 인연을 맺은 인물로 알려졌다. 쩡바이강은 고령이라는 이유로 퇴진했으나, 이번 퇴진이 장쩌민과 계파 인물들에 대한 출국제한 조치 3일 만에 이뤄졌다는 점에서 고령만이 이유의 전부는 아닐 것이라는 게 관측통들의 중론이다. 출국제한과 함께 60일이라는 기한 내에 재산내역과 국적사항 관련 서류 제출을 요구한 배경도 주목된다. 그동안 시진핑 진영이 강조해온 “반부패에는 성역이 없다”는 원칙과 관련됐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이번에 출국제한조치가 내려진 인물은 대부분 전 현직 고위간부로서 권력을 이용해 부당한 재산을 축적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최근 유출된 파나마 페이퍼스를 통해 류윈산의 아들과 며느리, 장가오리의 사위 등이 페이퍼 컴퍼니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장쩌민과 쩡칭훙 일가의 부패에 대한 조사가 시행될 경우, 장쩌민 계파 인물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장쩌민 장남 장몐헝(江綿恆)은 지난 1994년 거액을 대출받아 1억 위안으로 평가되는 상하이 연합투자공사를 인수, 중국의 이동통신 산업을 장악했고, 군수·자동차 등 분야에서도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또한 장몐헝은 ‘저우정이(周正毅) 사건’, ‘류진바오(劉金寶) 사건’, ‘왕웨이궁(王維工) 사건’, ‘주가조작 사건’ 등 중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천문학적 규모의 부패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장쩌민의 차남 장몐캉(江綿康) 역시 상하이 부동산 업계의 큰손으로 군림하고 있다. 장쩌민 일가가 부정축재한 재산의 규모에 대해서는 중화권 해외 언론에서 지속적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국에서 발행하는 중국어 잡지 ‘차이나 어페어스’에 따르면, 장쩌민이 스위스 은행에 3억5천만 달러의 비밀계좌를 갖고 있으며 인도네시아 발리 섬에 전 외교부장(장관) 탕자쉬안(唐家璇)을 통해 1990년 기준 1천만 달러 상당의 호화주택을 사들였다. 한 홍콩 언론은 국제결제은행(BIS)이 2002년 중국에서 출처가 불분명한 20억 달러가 외부로 유출됐음을 적발했는데 이후 중국은행 류진바오(劉金寶) 상하이 지점장이 “장쩌민이 16대 당대회에 앞서 자신의 뒷날을 위해 해외로 빼돌린 돈이었다”고 자백했다고 보도했다. 쩡칭훙 일가의 부정축재도 만만치 않다. 동생 쩡칭화이(曾慶淮)와 자녀 쩡바오바오(曾寶寶)도 상당한 재산을 부당한 방법으로 긁어모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쩡칭훙의 아들 쩡웨이(曾偉)는 호주에 쌓아둔 재산만 10억 호주 달러(한화 8627억 원)에 이른다는 게 중국 정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시진핑 당국은 고위층에 재산내역을 서면으로 제출하라는 요구를 통해 장쩌민 계파의 생명줄을 잡아 죄고 있다. 장쩌민 계파 역시 앉아서만 당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 정국에 파란이 예상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역사는 천리에 따르고 민심을 떠받드는 이의 편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미국이 처음으로 자금세탁방지 정책을 시행한 것은 마약거래에 대해서이다. 후에 미국 내 사법 시행과 국제사회의 정치적 요구에 따라 끊임없이 그 목표를 조정했다. 몇 십 년 동안 입법, 사법, 집행 세 방면에서 많은 변화를 거쳤다. 마약 거래에 초점을 맞춘 미국 자금세탁방지 정책은 입법부가 은행에 자금세탁방지 정찰을 맡긴 것으로 처음 시작됐다. 재미있는 것은, 자금세탁방지법의 기초를 다진 1970년 ‘은행비밀법(Bank Secrecy Act, BSA)’이 뜻밖에도 유명무실해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은행이 특정 미국 법률집행기관에 ‘비밀법’이란 명칭을 붙인 거래처의 정보를 누설하는 법률을 요구한 것이다. 이 법안의 입법 목적은 범죄혐의자가 금융기관의 취약 부분을 남용하는 것을 제재해 불법적인 수익 발생을 막는 것이다. 법률집행기관의 금융거래 자료 수집을 위해, 1만 달러 이상 현금거래 시 신고해야 하며, 해당 부문에 관련 저금·예금인출·현금환전 혹은 기타 지급이나 현금이동을 신고해야 한다. 이 밖에 신고한 현금거래 보고에 거래처 신분 및 자금 출처를 밝혀야 한다. 만약 금융기관이 신고하지 않거나 거짓 신고하면 범죄이다. 이 법안의 주목적은 ‘은행비밀법’ 제도의 개혁이다. 은행의 거래처 정보 보안이 그 전보다 강화됐다. ‘은행비밀법’으로 미국이 세계 제일의 자금세탁방지제도를 수립한 국가가 됐지만, 이 법안 역시 완벽한 자금세탁방지법은 아니었다. 바로 1986년 ‘자금세탁규제법(Money Laundering Control Act)’이 명실상부한 자금세탁방지법이다. 이 법안 정식 시행의 배경은 법에 근거하고, 4개 죄명으로 세분화할 수 있는데 ▲금융거래 자금세탁 죄 ▲수송화폐수단 자금세탁 죄, ▲스파이 이용 자금세탁 죄 ▲화폐교역 자금세탁 죄(크로스보더 자금세탁죄) 등이다. ‘자금세탁 규제법’과 ‘은행비밀법’ 두 법률은 미국 자금세탁방지법 체계의 핵심이다. 이후 자금세탁방지법은 계속해서 수립됐다. 1988년 ‘자금세탁 규제 개선 법안(MLPIA)’이 국회를 통과했으며, ‘은행비밀법’에서는 ‘금융기관’ 정의가 확대됐다. 자동차·비행기·선박의 중개판매인 및 처리 부동산, 우편서비스의 인원도 금융기관의 범주에 포함됐다. ‘은행비밀법’의 시행으로 인한 은행에 신고된 화폐 보고 수량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며, 검거된 자금세탁 범죄자와 자료 수량은 서로 맞지 않았다. 1994년 수립한 미국 ‘자금세탁방지법(Money Laundering Suppression Act)’에서는 은행의 과중한 부담을 줄이는 내용을 덧붙였다. 재무부가 금융기관 간의 거래를 면제해 현금거래 신고 부담이 줄어들었다. 미국은 마약퇴치에서 반테러로 전략 전환 1999년, 미국은 첫 번째 ‘국가자금세탁전략(The National Money Laundering Strategy)’을 발표해 자금세탁방지를 국가 전략 차원으로 올렸다. 그 후 미국 정부는 매년 그해 ‘국가자금세탁전략’을 발표해왔다. 이러한 전략이 기록물은 아니지만 미국의 자금세탁방지 입법과 법의 집행에 중요한 지침 역할을 한다. 2001년, 9.11 테러사태 이후 미국 상원과 하원은 반테러 강화를 위해 10월 24일 ‘테러 차단과 방지를 위해 적절한 수단을 동원해 미합중국을 단합하고 다지기 위한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으며 이 법안명칭의 영문 첫 글자를 따면 ‘USA PATRIOT ACT’이기에 ‘애국자법’으로 불린다. ‘애국자법’은 총 10편 156절로 구성되며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는데 제3편은 ‘국제자금세탁 척결 및 2001년 테러자금조달 금지를 위한 법안’으로 테러자금조달을 집중 겨냥하며 국제자금세탁 및 테러자금조달 행위의 방지, 규명 및 기소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는 글로벌 테러자금조달 및 테러 공격을 위한 자금조달에서 매우 중요하다. 요약하면 ‘애국자법’은 ‘은행비밀법’ 및 ‘자금세탁규제법’의 관련 규정을 수정하고 금융기관에 대한 새로운 의무를 많이 추가했다. 이는 자금세탁방지프로그램을 관철하기 위한 기존의 집행정책과 방식에 대한 실질적인 개정, 더 엄격한 고객 식별 기준, 신중 의무의 이행 강화를 포함하며 특히 미국 은행과 외국의 셸 은행(껍데기만 남은 은행) 사이에 비즈니스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금지해 서로 자금세탁을 돕는 것을 막는다. 미국, 스위스 은행 금고를 강제로 열다 그러나 단지 미국의 은행이 자금세탁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으로 글로벌 자금세탁 범죄활동을 타격할 수는 없다. 국내 자금세탁방지법체계의 제정과 함께 미국 또한 스위스 은행업 시스템에 압력을 가해 스위스 은행이 소위 비밀문제에서 양보하도록 촉구한다. 1987년, 스위스는 ‘정치적 공인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세계 각국의 은행들이 구독하거나 교환할 수 있다. 1998년 스위스의 ‘자금세탁방지법’이 발효되어 은행과 중개기관들이 수상한 상황을 포착하면 정부에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상황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는 행위는 범죄로 간주하게 된다. 2001년 9.11테러 이후, 스위스 은행은 어쩔 수 없이 테러와 관련된 조직과 사람들의 계좌정보를 제공했다. 2003년 6월, 스위스 정부는 마지못해 OECD 산하 FATF(자금세탁방지기구)에서 제정한 자금세탁방지규정을 수락했지만 1년의 유예기간을 두고 2004년 7월 1일부터 정식으로 발효시켰다. 이 규정에 의하면 스위스 은행의 익명계좌를 통해 해외로 일정 금액 이상 송금하는 고객에 대해 반드시 그 신원을 공개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스위스가 최초로 익명계좌 개인정보 보호정책을 깨는 것으로 스위스 은행업의 개인정보를 보호하는 전통이란 단단한 얼음도 빠른 융해기에 들어섰음을 상징한다. 2008년 국제금융위기로 재정이 곤란한 일부 서방 강대국들이 잇달아 스위스에 강한 압박을 넣기 시작했다. 미국은 UBS가 미국 고객의 탈세를 도왔다고 기소하고 그들에게 자국의 익명 예금자 정보를 제공하도록 촉구했으며 또한 과거 다년간 미납세금 그리고 차후 납부해야 할 세금을 대신해 원천 징수할 것을 요구했다. 힘든 협상을 거쳐 UBS가 7억8천만 달러를 지급하는 것으로 소송을 마무리하고 탈세 협의를 받는 4000여 개 계좌정보를 미국에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2011년, 스위스와 영국은 스위스가 대신해 영국 고개의 예금 세금을 원천 징수하는 데 합의했다. 이어서 러시아도 스위스와 러시아인 계좌정보 공개 관련 협약에 합의했다. ...
미국의 중국 문제 전문가 고든 장(章家敦 장자둔)은 지난달 21일 포브스 홈페이지에 올린 기고문에서 “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는 중국이 위안화를 구해낼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라면서 “만일 이 기회를 놓치면 중국의 화폐, 경제 및 금융 시스템은 총체적으로 붕괴할 것이며, 붕괴 시점은 앞으로 반년 후”라고 말했다. 장이 중국 경제의 붕괴를 예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중국 증시 급락 사태 이후에도 그는 “중국 경제가 2년 후 붕괴할 것”이라고 말했고, 2001년 8월 펴낸 책 ‘중국은 곧 붕괴할 것’에서는 “중국의 현행 정치 및 경제 시스템은 길어봤자 5년 정도 유지될 것이다. … 중국 경제는 현재 쇠퇴하고 있고 붕괴의 서막이 올랐으며 붕괴 시점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이후가 아닌 이전이 될 것이다”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사실 장 외에도 중국과 해외 일부 경제학자들 역시 매년 유사한 예측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해가 바뀌어도 이러한 예측이 실현되는 일은 없었다. 경제학자들이 너무 허술하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이런 예측을 하는 학자들은 대부분 제대로 된 경제학자 혹은 중국 문제 전문가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오판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의 현 정치체제에서 중국 경제는 붕괴할 것인가? 중국 경제는 정말로 고든 장의 이번 예언처럼 반년 후 붕괴할까? 경제 붕괴란 무엇인가 경제 붕괴는 한 나라의 국가 경제가 완전히 무너져 심각한 경제 위기가 닥치고, 사회 혼란과 마비 상태에 빠지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 붕괴의 표시는 다음과 같다. 공업과 농업 생산량이 감소하고, 기업이 줄줄이 도산하며 대량 실업 사태가 발생한다. 악성 인플레이션이 나타나고 국가재정이 무너지며 거액의 경상수지 적자가 발생한다. 금융 시스템이 붕괴하고, 은행의 불량채무가 국제기준을 넘어서 은행이 디폴트(채무불이행) 위기에 놓이고 다수 은행이 파산한다. 국가 전체의 생산·판매·분배·소비 사슬이 어긋남에 따라 각종 경제 활동이 마비된다. 분명한 사실은 경제가 붕괴하면 중국사회는 가공할 만한 혼란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고든 장이 기고문에서 언급한 위기는 주로 위안화 환율 위기, 즉 위안화 절하로 인해 자금이 대량으로 빠져나가 중국 경제가 붕괴한다는 시나리오다. 주요 20개국(G20) 회담은 재무장관 회의로 시작했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정상회담을 시작했다. 올해 정상회담은 9월 중국 항저우에서 열릴 예정이며, 지난달 26일 열린 회의는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회의였다. 이 회의에 대해 외부에서는 중국판 ‘플라자 합의’로 평가하고 있다. 달러의 평가절상을 억제하고 위안화 환율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며 다른 주요국은 환율 문제 개입을 자제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기 때문이다. 금융 시스템 리스크에 대한 감시 강화도 천명됐다. 플라자 합의는 1985년 9월 G5(미국, 일본, 독일연방, 프랑스, 영국)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가 뉴욕의 플라자 호텔에서 모여 체결한 합의로서 5개국 정부가 합동으로 외환시장에 개입, 주요 통화에 대한 미 달러의 평가절하를 유도함으로써 갈수록 심화하고 있던 미국의 무역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 골자였다. 플라자 합의의 가장 두드러지는 결과는 달러가 절하되고 엔화가 절상됐다는 것이었다. 고든 장은 이러한 새로운 플라자 합의가 성립될 가능성이 없다고 보며, 그러므로 중국 경제가 붕괴하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중국 금융평론가 류샤오보(劉曉博)에 따르면 새로운 플라자 합의가 성립돼 세계 주요 경제체들이 하나로 묶이게 되면 어느 한 국가의 환율에 이상 변동이 나타나면 다른 국가의 견제를 받게 된다. 이렇듯 장단점이 모두 있는 체제에서 중국이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통해 안정적인 중속 성장을 유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혁을 강화함으로써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위안화 절하를 통해 수출을 증대시키는 것은 적어도 2016년 상반기에는 실현되기 어렵다. 중앙은행은 환율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금리 인하를 최대한 피하고 지급준비율 인하 횟수를 줄이는 등 화폐정책의 범위와 강도를 제어해야 한다. 사실 중국 경제의 붕괴는 중국 경제가 곤경에서 빠르게 빠져나오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이다. 세계화라는 요소 역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화와 중국 경제 20세기 들어 세계 경제를 이끌어온 것은 금융 시스템이다. 한 국가의 경제 붕괴를 초래할 수 있는 원인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을 꼽으라면 금융위기를 들 수 있다. 1930년대와 1950년대 일어난 두 차례의 글로벌 경제위기는 모두 금융시스템의 문제로 인해 발생한 위기였다. 세계가 하나로 묶인 오늘날 글로벌 경제는 이미 각국 상호의존적이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하나의 단위가 됐다. 어느 한 국가의 경제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할 경우 필연적으로 글로벌 경제에 일정한 파급효과를 주게 된다. 특히 중국은 세계 제2의 경제체로 올라선 만큼 중국 경제의 안정적인 성장세 유지 여부가 글로벌 경제에 미치는 작용과 영향력은 갈수록 증대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작년 중국 증시 급락 당시 충분히 증명되었는데, 중국 증시가 몇 차례 폭락하자 놀랍게도 월스트리트와 몇몇 금융 선진국의 증시 역시 조정을 받았다. 이런 점에서 중국 경제가 붕괴하면 글로벌 경제도 붕괴한다고까지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세계 경제에 위기와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글로벌 경제와 금융 시스템이 상호 의존적이고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연동적인 시스템이 된 현재 중국 경제는 이러한 대가족의 중요한 일원이 되었다. 위기가 발생했거나 글로벌 경제 질서의 안정에 위협이 닥치게 되면 미국이나 유럽 각국 등이 나서서 함께 위기에 대처할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중국 경제가 붕괴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중국의 경제적 곤경 배후의 역사적 요인들 ...
지난 6일 북한은 수소폭탄 발사실험에 성공했다고 밝혀 국제사회를 놀라게 했으며 세계 각국에서는 즉각 비난이 이어졌다. 북한은 과거 세 차례에 걸친 핵실험 당시 모두 최소 30분 전에 중국과 미국에 통보해 왔으나 이번 실험은 사전에 통보하지 않았다. 중국은 이에 대해 신속히 대응, 실험 여부를 사전에 알지 못했음을 알리는 한편 실험에 단호히 반대한다고 밝혔다. 2006년 10월 9일부터 현재까지 북한은 총 네 차례 핵실험을 진행했다. 이 글에서는 네 차례에 걸친 핵실험의 내막을 밝히고자 한다. 식상해진 ‘말 안 듣는 北, 타이르는 中’ 북한 김씨 정권은 세계 2차대전 이후 공산주의 진영과 서방 자유세계 진영이 서로 대치하는 가운데 수립됐다. 김씨 정권의 배후에는 구소련과 중공이 뒷받침하고 있었는데, 김씨 정권이 폭정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경제와 군사 방면에 걸친 구소련과 중공의 폭넓은 지지 덕분이었다. 중국은 북한의 최대 교역국이자 식품·무기·연료 공급처로서, 90년대 이후 북한의 식품과 에너지의 90%는 모두 중국에서 공급받은 것이었다. 전반적으로 살펴볼 때, 북한과 중국 간의 관계는 김씨 정권과 중공과의 관계로 볼 수 있다. 북한은 경제적으로 거의 중공의 원조에 의지하고 있으며, 중공은 그 대가로 북한을 서방국가에 대항하는 도구로 삼고 있다.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 수십 년간 북한은 공산주의 독재국가로서 3대에 걸친 김씨 정권의 독재 치하에 공산 독재정권의 병폐를 남김없이 재현해왔다. 김씨 일가는 대내적으로 독재통치를 시행, 국민을 탄압하고 국력을 자신의 이익에 사용했다. 북한에서는 전역에 기아가 만연하고 굶어 죽는 일이 속출해 사람들이 남한으로 탈출하고 있다. 김씨 일가 3대는 당내 정적을 지나칠 정도로 잔혹하게 숙청하는데, 심지어 김정은은 취임 이후 자신의 고모부인 장성택을 사형시켰다. 김씨 정권은 대외적으로 세계를 협박하는 방식으로 자신에 대한 중공의 지지를 얻어냈고, 중공은 북한이라는 불량배 아우를 미국과 서방세계에 대항하는 도구로 이용했다. 북한은 핵 위협이라는 위험한 게임을 반복해 왔는데, 그 목적은 독재자 김정은의 개인적 권력을 극대화함으로써 독재정치의 기반인 경제적 지원을 보장받으려는 데 있다. 이러한 북한의 막후 조종자는 바로 중공이다. 중공은 6자회담을 이용해 여러 차례 이러한 게임을 벌여 왔는데, 늘 이런 식이었다. 우선 북한이 핵 위협을 통해 UN 제재를 받고 미국의 경고를 받는다. 이어 미국과 국제사회는 중국의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북핵 문제 해결에 더 많은 영향력을 발휘할 것 등을 주문한다. 중공은 이를 기회 삼아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거나 내부문제를 해결한다. 사실 6자회담은 중공과 북한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나 다름없다. 북한, 중공 장쩌민파와 밀월관계 시진핑 정권 출범 이전까지 북한 관련 정책을 결정한 것은 중공 장쩌민파였다. 북한 김정일 정권은 장쩌민 일파와 각별한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선데이타임스 셰리든 극동지역 기자의 보도에 따르면 장쩌민파 저우융캉 전 상무위원은 중공과 김씨 부자 사이를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김정일이 2010년 김정은을 후계자로 정식 지정해 열병식을 거행했을 당시, 저우융캉은 김씨 부자와 함께 단상에 섰던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장쩌민파로 분류되는 장더장 현 상무위원은 과거 북한으로 유학해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과에서 2년 과정을 수료한 바 있다. 장쩌민의 책사 쩡칭훙 역시 김정일과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쩡칭훙은 2001년 3월 장쩌민의 방북 당시 선발대로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으며 북한은 이후 쩡칭훙과 김정일이 함께 그려진 기념우표를 발행하기도 했다. 또한, 보시라이, 저우융캉은 정변 기도가 실패로 돌아갈 경우 도피처로 북한을 고려했던 것으로 언론에 알려졌다. 이처럼 장쩌민파 주요 인물들과 북한 고위층은 긴밀히 서로 협조해왔는데, 과거 쩡칭훙·저우융캉·장더장 등이 그랬다면 지금은 류윈산 상무위원이 그러한 인물이다. 북한은 지난해 10월 10일 노동당 창당 열병식 당시 리위안차오(李源潮) 중공 국가부주석이 이끄는 사절단의 방북을 거절한 반면, 장쩌민파 류윈산만은 특별초청했다. 보도에 따르면 류윈산은 북한 열병식의 TV 중계방송을 뒤에서 총지휘했으며 베이징 열병식을 중계한 중공 CCTV 주요 기술자들을 사전에 파견해 북한을 돕기도 했다. 최근 취소됐던 북한 모란봉 악단의 베이징 공연 역시 류윈산이 북한 방문 당시 협의해 내린 결정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北 핵실험, 中 정치적 사건과 겹쳐 북한의 1차 핵실험(2006년 10월) 전에는 후진타오에 대한 함포사격 사건이 있었다. 그해 5월, 당시 군사위원회 주석이었던 후진타오는 북해함대 시찰을 위해 서해를 방문했다가 군함 2척의 공격받는 사건을 겪는다. 이 사건은 장쩌민파 해군 사령관의 명령으로 인한 것으로 밝혀졌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후진타오는 6월 중앙기율검사위위원회 조사팀을 상하이로 파견해 천량위(陳良宇) 상하이시 서기를 낙마시켰다. 장쩌민파의 후계자였던 천량위는 2년 뒤 18년형을 선고받았다. 북한의 2차 핵실험(2009년 5월) 역시 후진타오에 대한 암살모의와 시기적으로 겹쳤다. 그해 4월 중공은 사상 최대 규모의 해상 열병식을 칭다오 해역에서 개최했는데, 홍콩 언론에 따르면 후진타오는 열병식 직전, 개막과 동시에 장쩌민파 요원들의 암살시도가 있을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했고 갑작스럽게 계획을 변경해 암살을 피한 것으로 알려졌다. ...
장교 출신으로 장쩌민에 의해 군적과 당적 발탈 후 민주화 길 軍부패, 생체장기적출 기밀 폭로 올해 71세인 뤄위는 마오쩌둥의 심복이자 중공 초대 원로 뤄뤼칭 장군의 아들로 전형적인 '훙얼다이(红二代:혁명 원로 2세)'다. 중공 총참무부에 근무한 바 있으며 1988년 대교(大校, 한국군의 대령에 해당)로 임명됐다. 군대 내 부패상 및 1989년 천안문 사건 당시 학생들에 대한 중공의 진압에 불만을 느껴 1990년 중국을 떠나면서 중공 체제와 단절했다. 1992년 장쩌민의 명령으로 군적과 당적을 박탈당했다. 현재 미국에 거주하는 뤄위는 최근 시진핑을 향해 '일당전제를 폐지하라'고 촉구하는 등 민주화의 길을 걸어왔다. 일생토록 마오쩌둥을 따라 '천하 평정'에 나섰던 부친의 아들인 그는 왜 같은 '훙얼다이'인 시진핑이 중공 일당전제를 폐지하기를 바랄까? 뤄위는 본지와 인터뷰에서 시진핑의 집권에 얽힌 기밀, 군대 내 부패상, 생체장기적출, 보시라이 부자(父子)의 진실 등 민감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기자: 안녕하십니까? 선생께서 최근 <빈과일보>에 기고하신 글을 봤더니 제목이 '시진핑 아우에게 보내는 상의문'이고 또 형제의 정에 대해서 언급하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뤄위: 그야 시진핑이 옛날 아우니까 그랬습니다. 게다가 분명 형제의 정이 있다고 할 수 있고요. 사실 시진핑 본인과는 그다지 친하지 않았지만 그 부모님을 압니다. 기자: 시진핑이 부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보십니까? 뤄위: 내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내가 그 글을 쓴 것은 바로 그래서이기도 합니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 부모님은 매우 친절하고 진실한 분들이셨거든요. 시중쉰(習仲勳, 시진핑의 부친) 선생님은 민주파이자 진보파였는데, 역시 여러 차례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마오쩌둥에게도 몇 차례 핍박을 당했고 덩샤오핑에게도 한 차례 당했어요. 시진핑이 취임한 이후에서야 사람들은 기대를 걸기 시작했습니다. 이 기대는 시중쉰 선생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온 것이죠. 선생이 민주파이자 진보파였으니 사람들은 자연히 '아들인 시진핑은 아버지보다 한층 더 진보적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시진핑에게 희망을 걸게 된 것입니다. 장쩌민은 시진핑을 조정하려 했으나 실패 기자: 선생께서는 ‘시진핑이 집권하게 된 것은 우연에 의한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시진핑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뤄위: 중국의 일당전제 시스템 하에서는 사실상 권력 승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마오쩌둥 때부터 이어져왔는데, 중국에는 선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장쩌민은 왜 시진핑을 선택했을까요. 우선 장쩌민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후진타오를 승계자로 삼게 되어 내심 불쾌해 하고 있었습니다. 후진타오를 고른 사람은 덩샤오핑이었습니다. 후진타오는 나중에 분명 리커창에게 권력을 넘겨줄 텐데, 이를 용납할 수 없었던 장쩌민은 선택권이 자신에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자기 체면을 세우기 위해 후진타오가 누구를 고르든 간에 무조건 그 사람 외의 다른 사람을 지목한 것이죠. 이것이 바로 첫 번째 이유입니다. 장쩌민이 시진핑을 고른 것은 매우 우연한 일이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장쩌민이 후진타오 집권 시절 쉬차이허우(徐才厚)와 궈보슝(郭伯雄)을 통해 후진타오를 견제해 왔던 버릇대로 마음껏 조종할 수 있는 인물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시진핑의 어수룩해 보이는 겉모습에 속은 것이겠죠. 1인자가 되기 전 시진핑은 어떤 일도 묵묵히 받아들였습니다. 장쩌민은 시진핑을 높은 자리에 올려 두고 조종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기자: 보시라이는 린뱌오(林彪)와 유사하다고 보십니까? 뤄위: 하나도 그렇지 않습니다. 린뱌오가 수재라면 보시라이는 건달에 불과합니다. 지모도 책략도 없고, 어리석으며 머리도 나쁜 깡패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자: 말씀하신 것처럼 지모도 책략도 없다면 어떻게 관직을 수행했을까요? 전부 아버지 보이보의 권세에 편승한 덕분인가요? 뤄위: 보이보와 장쩌민의 결탁에 편승한 것이죠. 중국에서 관직에 앉는 것은 꼭 책략이 있어야만 하는 문제는 아닙니다. 아무 것도 없어도 관직에 오를 수 있습니다. 중국 관리들 가운데 많은 수가 그렇습니다. ...
중국 위안화가 SDR(Special Drawing Rights‧가상의 국제준비통화)에 편입된 것은 위안화가 국제통화기금(IMF)의 규칙에 부합하기 때문이 아니다. IMF에 의해서든 미국에 의해서든 그것은 정치적인 고려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지난 4월, 로이터 통신은 데이비드 립톤 IMF 수석부총재가 한 언론에 “중국이 위안화를 SDR에 편입시켜달라고 IMF에 요구했고, IMF는 위안화가 편입될 수 있도록 앞으로 기준을 조정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위안화의 SDR 편입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동의한 후에 확정됐으나, 중국 관영언론은 마치 미국에 대승을 거둔 것처럼 전과를 부풀리고 있다. 이 ‘전과’가 얼마나 건실한지 아래에서 분석해보겠다 중국몽 1: 위안화 SDR 편입으로 각국 중앙은행과 투자자가 위안화 보유 비중을 확대할 것이다 홍콩매체 봉황망(鳳凰網)은 ‘위안화 자산, 어떤 변화 생기나’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SDR 편입으로 예상되는 세 가지 변화를 제시했다. 하나는, 적어도 1조 달러의 외화보유액이 중국의 자산으로 전환될 것이란 전망이다. 또 하나는, 향후 5년 이내에 외국회사가 중국에서 발행한 위안화 표시채권, 즉 판다채권이 500억 달러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중앙은행 외화보유액 관리기관과 기관투자자는 위안화 표시자산을 사재기할 것이란 전망이다. 봉황망만 이렇게 예상한 것이 아니다. 여러 언론에서 같은 소식을 전했는데 이를 종합하면, SDR에 편입됨으로써 안전한 화폐라는 지위를 얻게 되고, 그러면 국제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의 위안화 사용이 늘어날 것이 분명해지고, 그러면 전 세계 기금배분의 구조가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즉 위안화가 자산배분(asset allocation)으로 작용할 때의 비율이 대폭 상승하게 된다는 것이다. 스탠다드차타드 은행 베키 류 아시아 금리 프리미엄 전략가는 한 인터뷰에서 “SDR 편입 후 5년 동안 중국은 4조~7조 위안의 국제자산을 위안화 채권시장으로 배분하게끔 유도할 것이며, 내년에 유입될 해외자금은 5천억 위안에 달할 것이다”라고 예상했다. IMF의 SDR은 일종의 ‘종이황금’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 각국에 분배해 사용하도록 만든 일종의 국제통화기금 할당액으로서 실제로 유통이 가능한 화폐가 아니다. SDR의 용도는 ▲기존 보유자산이 부족할 경우, 지정된 화폐 인수국에서 해당 국가의 화폐로 바꿔 지불하는 수단 ▲IMF 회원국의 경상수지가 적자일 때 IMF 지정국에 SDR를 주고 사용 가능한 화폐를 받아 적자를 메우고 IMF에서 정한 대출금과 이자 지급 ▲IMF 내부 거래 등 세 가지다. IMF가 위안화를 SDR에 편입시킨 것은 개혁의 일부분으로 보인다. 국제무역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위안화를 편입시켜 SDR의 구조를 더 합리적이게 하고 SDR의 대표성과 일반성을 강화함으로써 더 흡인력 있는 보유자산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판단이다. 그러나 SDR은 세계화폐시스템에서 비주류에 속한다. 따라서 위안화 편입으로 세계 자산배분의 구조가 바뀔 수 있을지는 각국 중앙은행과 기관투자자가 위안화 자산의 비중을 실제로 확대할 것인지, 그 여부에 달렸다. 중국몽 2: 위안화가 달러의 지위에 도전할 것이다 중국인의 영혼 속에는 ‘뛰어넘고자 하는 의식’이 있다. 영국을 뛰어넘고 미국을 따라잡자는 식이다. 이런 의식은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온다. 위안화의 SDR 편입은 국제화로 나아가는 작은 한 걸음일 뿐이지만 중국의 많은 평론에서는 ‘위안화가 달러의 지위에 도전할 것’이라고 한다. 과거 중국에서는 달러가 위안화의 도전으로 국제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빼앗길까 우려하는 미국이 위안화의 SDR 편입을 저지해왔다는 여론이 계속 조성됐다. 그러나 위안화의 SDR 편입은 국제 결제통화로서의 명분을 얻었을 뿐이며 달러에 도전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너무 멀다. 달러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국제 결제통화, 가치저장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주요 국가의 외화보유액이 달러라는 점 외에 국제무역거래 중 3분의 2는 달러로 결제된다. 국제금융시장에서 대부분의 도매거래는 달러로 거래하고, 각국 중앙은행의 금융정책도 달러를 이용한다. 국제차관 및 채권시장에서의 거래 역시 대부분 달러 혹은 달러화 채권이다. 현재 외국인이 보유한 중국주식과 채권은 2천억 달러 정도지만 달러화 자산은 16조 위안 규모로 위안화의 80배다. 위안화가 정말로 달러와 경쟁할 수 있을까. 중국은 시간문제로 보고 있다. 일부 중국경제 분석가들은 위안화가 달러에 도전하기에는 시기상조라는 다소 겸손한 입장이지만, 속뜻은 언젠가는 위안화가 달러를 도전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의미다. 그때가 15년 이후가 될 수도 있고 더 늦을 수도 있다. 올해 이코노미스트는 “현재 위안화는 세계무대에서 아직 작은 역할이지만, 달러도 20세기 초에는 그랬다”고 다소 비아냥대는 조로 평했다. 경제 예측의 범위가 100년을 넘어간다면 예측이 아니라 예언이다. 그러나 20년 내의 경제 예측은 가능할 수도 있다. 강한 화폐가 되려면 두 가지가 뒷받침돼야 한다. 하나는 강한 국가경제력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신용이다. 이 점에서 중국은 20세기 미국과 같은 발전을 이뤄내기 힘들다. 우선 중국경제의 체질(기술력, 자원력)이 미국만 못하다. 미국과 같은 국가신용 보장제도 역시 부족하다. 게다가 중국경제는 현재 장기침체기에 진입했다. 국내제조업이 전반적으로 쇠퇴하고, 거액의 악성 부채가 다시 나타나고 유령은행이 잇따라 부도나는 등 금융이 위태롭고 실업률 또한 높아지고 있다. 앞으로 5~10년 안에 밑바닥을 탈출할지도 의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각국 중앙은행과 기관투자자가 달러를 버리고 위안화를 선택한다는 것은 기대하기 매우 어렵다. 앞으로 100년 이내에 세계에는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날 것인가. 지난 100년간의 중국만 봐도 신해혁명부터 지금까지 세월의 격차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이 기간에 정권이 몇 차례나 바뀌었고, 화폐는 중화민국 때 위안다토우(袁大頭))를 발행하고 국민정부의 지폐를 거쳐 위안화로 바뀌었다. ...
TPP는 중국과 어울려주지 않는다. 이는 중국을 너무나도 자극하는 일이다. 몇 년 전부터 중국 정부는 TTP가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음모라고 주장해왔고, 그 영향은 이미 중국 사회 곳곳에 스며들었다. 그로 인해, 이번 TPP 타결 소식이 전해졌을 때 굳이 중국 정부가 나서지 않아도 중국 각계각층에서 강렬한 반응이 나타났다. 다양한 반응에서 드러난 한 가지 공통점은 중국이 고립됐음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립의 원인과 결과, 그 대처방안에 대해서는 견해가 제각각이다. 이번 현상은 외부의 관측자에게 중국과 외부의 관계를 통찰할 좋은 기회다. 견해를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해봤다. 견해 1: 고립의 원인은 중국이 국제규범을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일한 해결책은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중국은 10여 년 전 WTO에 가입했지만 아직 국제사회의 규칙을 잘 지키지 않아 다른 국가로부터 미움을 사고 있다. 그래서 미국 등으로부터 소외당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해서는 다시 세 가지로 의견이 엇갈린다. 하나는 중국경제가 이로 인해 쇠약해지고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본다. 이러한 의견은 해외 웹사이트에서 많이 제기되고 있다. 다른 하나는 TPP로 촉발된 위기감이 ‘부도개혁’의 원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주로 국내에서 보는 시각이다. 이러한 ‘부도개혁론’은 이달 8일 재경망(財經網)에서 게재한 ‘TPP는 경제적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아니다. 효력발효는 빨라야 2017년부터다’라는 기사가 대표적이다. 기사에서는 미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수석연구원이자 백악관 경제보좌관을 지낸 매튜 굿맨(Matthew Goodman)과 인터뷰를 통해 ‘부도개혁론’을 제기했다. 골자는 TPP는 내부정치와 투명성에 있다는 것. 따라서 중국이 가입하려면 계속해서 국내 개혁을 실행해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굿맨은 TPP 참가국 중 시장을 완전히 개방하지 않은 나라도 있다면서 베트남을 예로 들었다. 예외 조항이 많아 타결까지 별도의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 따라서 중국이 TPP 가입을 희망한다면, 중국에도 준비시간이 주어지리라는 분석이다. 다만, “중국은 몇 가지 선택권이 있다”며 “첫째, TPP에 가입하는 것을 장기적으로 바라본다. 둘째, 전면적으로 경제협정을 추진한다(RCEP). 셋째, 중국과 미국 쌍방 투자 협정(BIT)에 대해 빠른 결정을 내린다. 넷째, 아시아와 태평양의 자유무역(FTAAP)에 대한 판단을 빠르게 한다”고 덧붙였다. 기사의 목적은 ‘TPP에 가입해 중국 부도를 개혁하자’임이 분명했다. 마지막으로 중국이 결국 TPP에 가입하게 되리라는 전망이다. 7일 펑파이(澎湃)뉴스는 기사에서 ‘TPP가 일단락되고 나서, 중국은 뒤따르는 것 외에 선택권이 없다’고 주장했다, 사실 ‘뒤따른다’ 역시 부도개혁을 의미한다. 이 기사에서는 TPP가 상품의 무역자유화라는 목표 외에도 서비스무역•지식재산권•환경보호•노동기본권•경쟁중립성 등을 목표로 포함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중국은 WTO 가입 후 몇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런 목표를 실현할 방법이 없다. 따라서 단기간 안에 이러한 조건들을 받아들이기란 확실히 어렵다. 이 기사에서는 ‘음모론’에 대해 반박하며, “WTO 가입 전에도 음모론과 우려감이 중국을 괴롭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차이점은 좇겠다는 생각이 작아지고 맞서겠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분명한 점은 좇아가는 것 외엔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위의 내용은 모두 정론이다. 양펑덩(楊鵬等)의 기고문 ‘TPP 총론: 역사 변동 정세가 시작될 것이다’에서는 위기를 지나치게 부각한 면이 있지만, 이 또한 중국이 부도 위험 상황에서 개혁하길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TPP 조항의 궁극적 목표는 중국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견해 2: TPP는 미국이 세운 자본제국의 음모다. 중국은 계속 ‘똥 막대기’를 저어야 한다. 이러한 견해는 TPP가 중국에 고의성을 갖고 있다고 여긴다. 이것은 ‘경제적 NATO’이며 중국을 봉쇄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를 가진 거의 모든 사람은 ‘투자자-국가 간 분쟁해결’(ISDS)에 대해 의견이 많다. ISDS가 국가보다 다국적 기업에 더 큰 권한을 준다고 생각한다. ISDS로 다국적 기업은 국가의 법률과 정책변화로 인한 손실에 배상을 요구할 수 있으며, 다국적 기업의 이익을 과도하게 극대화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는 TPP에서 가장 무서운 장치이며, 이로 인해 미국이 가장 큰 이익을 볼 것으로 여긴다. 최근 중국 온라인에서 퍼진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TPP의 놀라운 비밀'이라는 게시물이 바로 이러한 견해의 대표적 사례다. 이 게시물에서는 미국이 TTP로 자기만의 집단을 형성한 이유를 거대한 대중 무역 적자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위키리크스 창시자 줄리언 어산지가 올해 밝힌 내용을 인용해 “TPP와 WTO의 가장 큰 차이는 포함하고 있는 범위나 협정의 강도가 아니며 관세의 높낮이는 더더욱 아니다. 핵심은 다국적 기업에 대한 법적 규제의 차이”라고 말했다. TPP에 따르면 회원국의 주권이 제약을 받는다. 무역분쟁이 생길 경우 뉴욕 국제사법재판소에 중재를 요청하고 판결에 따라야 한다. 어산지는 한 인터뷰에서 “TPP가 토론하는 것은 자유무역이 아니라, 다국적 기업의 지배”라고 말했다. 게시물에서는 TPP 법안이 미 하원에서 통과되고 회원국의 승인을 받게 되면 미국을 포함한 회원국은 자국 법률에 반드시 TPP 협정 정신을 포함시켜야 하며 뉴욕 국제사법재판소는 전 세계 최고의 법정이 된다면서 “미국의 이러한 조치는 각 회원국이 주권을 팔도록 하여 빗발치는 저항을 불러일으켰다”고 해석했다. 또한, 게시물에서는 “이러한 TPP는 중국을 고립시키려는 것이 명백한데 중국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국적 기업이 결정한 조항은 주권을 초월해 존재하는 것으로 이것은 매국이다!”라며 TPP가 중국을 끼워주지 않는 문제에 대해 “나라의 주권을 팔아야 한다면, 중국은 절대 참가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전재한 후 “어떻게 하나하나 와해시킬 것인가”를 논했다. 싱가포르대 동아시아연구소장 정융녠(鄭永年)은 ‘TPP가 세계에 가져온 것은 하나의 새로운 자본제국 경제이다’라는 책에서, 아직 형성중인 TPP는 일종의 주권국가의 자본경영 방식을 초월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이 자본제국과 현재 자본 세계화는 다르다. 이것은 더 깊은 단계의 자본제국이다. 즉, 민족과 국가를 초월하고 민족과 국가의 영향을 받지 않거나 민족과 국가의 영향에서 벗어난 자본제국이다. 싱가포르대 아시아법률연구센터 왕장위(王江雨)는 엄청나게 긴 강연인 ‘대중국 자유무역 구역에서 태평양 전체의 협의’에서 TPP는 두 명의 피해자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중국, 다른 하나는 WTO다. 이에 따르면 중국은 적절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국가와 무역협정을 체결하고 한•중•일 자유무역을 구축하며, TPP에 가입하는 방안이었다. 그 목적에 대해서는 “우리는 가서 똥 막대기 젓듯 훼방할 수 있다. 더 높은 가격을 요구하고, 당신이 측정한 가격에 대해 하나도 동의하지 않으며, 최선을 다해 시간을 끌며 방해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
홍콩의 억만장자이자 아시아 제일의 부자 리카싱이 최근 중국에서 자금을 철수한 이후, 중국 경기가 좋을 때크게 이익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둔해지자 떠나는 그를 향해 정부 언론은 비도덕적이고 배은망덕하다는 비난을 했다. 저명한 경제학자 허칭롄은 오늘날 중국에서 벌어지는 권력과 자본 사이의 마찰을 살펴봤다. 리카싱의 ‘도피’는 중국 내에서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다. 이 논쟁은 권력과 자본 사이의 싸움으로 이해해야 한다. 오늘날 중국에서 투자의 3가지 딜레마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첫 번째 딜레마는 홍콩 투자가 대외적인 이름에도 불구하고 항상 국내 자본으로 간주돼 왔다는 것이다. 덩샤오핑이 개혁개방 정책을 시작할 때부터 1990년대까지 해외투자 전체에서 홍콩이 가장 중요했고, 대만이 뒤를 이었다. 홍콩의 지리적 위치와 특수한 경제적 역할은 중국공산당이 홍콩을 ‘해외’ 투자로 취급하게끔 한 정치적 고려사항의 일부였다. 그 전에 중국공산당이 서방으로부터 포괄적인 봉쇄를 당하고 있던 때에는 홍콩이 ‘대외창구’ 역할을 수행해, 해외 자본 및 기술의 유통체계 뿐만 아니라 수입·수출의 무역기지였다. 중국은 1979년 개혁개방을 시작했다. 홍콩 기업들은 주요 투자자뿐만 아니라 중국이 개방될 수 있도록 선도자 및 다리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홍콩은 해외투자의 70%를 차지했으며, 대만과 일본이 뒤를 따랐다.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후, 홍콩은 중국의 수출입항의 지위를 점점 상실했고, 역외 금융업은 서서히 약화됐다. 홍콩은 공산당 임원들이 자본을 해외로 옮겨서 배치하는 근거지로 일명 ‘돈세탁 창구’가 됐다. 1978년부터 2001년까지 공산당은 정치적 이유로 홍콩 투자를 해외자본으로 분류했다.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기 전이나 그 직후였기 때문이다. 2001년 이후에도 홍콩 투자를 해외자본으로 간주하는 것이 공산당에게 이익이었다. 이익 단체들에 홍콩은 돈세탁에 중요한 경로였다. 오늘날에도 홍콩 최고 경영인들과 홍콩에서의 중국 투자는 공산당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돈의 유입은 자유지만 유출은 안 된다 두 번째 딜레마는 자본 흐름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투자 자본의 유입은 자유이지만 유출은 그렇지 않다. 올해 중국공산당은 중국 주식시장 침체에 강제적으로 개입했다. 결국, 중국에서 돈을 빼냈다는 혐의로 사람들을 체포했다. 일반적으로 정부의 부적절한 금융시장 개입 및 자유로운 자본 흐름을 악의적으로 제한하는 행동으로 판단된다. 해외자본 흐름이란 국가 및 지역 간의 자본 유출입을 가리킨다. 투자·채무(債)·원조·구매자 신용·판매자 신용·외환차액(FX)거래, 증권발행 및 순환 등을 포함한다. 국경을 넘는 해외자본 흐름은 유입과 유출로 나누어진다. 중국이 WTO에 가입했을 때, 미국과 유럽 같은 주요 회원국들은 중국이 금융시장을 개방하고 해외자본의 유입을 허락하도록 요구했다. WTO 회원국 중에 해외자본 유입을 환영하면서 자본 유출을 제한하는 것을 환영하는 국가는 없다. 자본 흐름을 제한하는 중국공산당의 정책은 새로운 판례를 만들었다. WTO에는 이 정책에 대한 대항조치가 없다. 이는 해외자본에 관해 또 하나의 우려를 낳았다. 중국이 어느 날 자본 유출을 제한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다른 국가들은 중국이 완전한 자본 이동성 원칙을 시행해, 자유로운 자본 유입을 환영할 뿐만 아니라 유출될 수 있도록 하길 바라고 있다. 부자라는 ‘원죄’(原罪) 세 번째 딜레마는 민간 투자 자본을 보유한 중국인의 신변이 위협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민간 자본은 늘 ‘원죄’ 취급을 받았다. 중국에는 민영 기업들이 권력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이해가 깔렸다. 고위직 임원들과의 관계로 만든 ‘중간영역’에서 비즈니스를 함으로써 성장해나간다. 그들의 부는 깨끗하지 못하다. 정부는 민간 부문의 ‘왕’들이 탈세 및 사기성 부기 등 정부가 허락해준 빈틈을 활용한다고 간주한다. 빈틈은 대단히 많다. 정부가 돈이 부족한 경우는 별로 없다. 민영 기업이 정부 고위직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정부가 돈이 부족하거나, 민영 기업들이 의존했던 정치인이 부패혐의로 체포되거나 은퇴할 경우, 자본가들은 더는 안전하지 못한 것이다. 중국은 사모 활성을 위해 2014년 국영기업 개혁안을 발표했다. 많은 민간 기업인들은 공산당의 표적이 될 것을 우려하게 됐다. 중국을 떠나기 시작하고 다수의 해외투자를 하게 됐다. 이로 인해 최근 몇 달간 외화 보유액이 급격히 감소해 외환 통제가 강화됐다(이코노미스트지 9월 28일 기사에 의하면 6천억 달러 상당의 유출이 발생했다고 한다). 담보 브로커 수십 명이 돈을 국외로 빼돌린다는 혐의로 체포됐다. 자본과 권력 간의 관계는 극도의 긴장 상태에 달했다. ...
중국 국영기업이 민영화된다면 소유권은 혼합소유제로 혹은 여전히 국영으로? 이런 문제는 몇 년 동안이나 설왕설래했던 문제들이다. ‘국영기업 개혁 심화에 대한 지침’이라는 제목의 양면성을 가진 다큐가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와 국무원에서 마침내 나왔다. 어떤 분석가들은 이 다큐에 대해 국영기업개혁제안의 목적이 국영기업을 확장하고 강화하려는 데 있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정부가 자유시장경제에 기초하여 국영기업 민영화를 촉진시키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서로 다른 해석이 나오는 이유는 개혁안이 포함하고 있는 상충하는 언급 때문이다. 혼합소유제 국영기업 개혁안의 하이라이트는 주요목표로 '혼합소유제'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산의 다각화를 위해 다른 국가소유자본이나 비국가소유자본을 적극적으로 소개한다. 국가소유자본은 절대적 통제, 상대적 통제 또는 자산참여를 유지할 수 있고, 시장에서 기업경쟁력제고를 도울 수 있다.” 그러나 제안 2조에서 계속하기를 “공적인 소유가 여전히 우세한 지위이다. 그것이 기본적인 경제 시스템을 대표하며, 그것의 강화와 발전이 초점이다. 공공적이지 않은 경제는 종속적인 지위이다.” 2조에서 '혼합소유제'는 사기업들이 국영기업의 주를 살 수 있고, 주주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이어진다. 그러나 국영기업자산의 대부분은 국가소유자본으로 구성된다. 사기업은 다만 종속적 지위이며, 그들은 의사결정 권력을 가질 수 없다. 개혁안이 나온 뒤, 오해를 피하기 위해, 국영 신화사는 “우리는 명백하게 민영화를 반대해야 한다”는 제목의 기사를 내기도 했다. 시장지향 개혁안의 두 번째 중요한 포인트는 국영기업을 “시장 지향 운용 메커니즘”으로 훈련시키고 “당의 지도를 강화하는 것”이다. 다큐는 시장지향을 14번 언급하면서 그것이 주요 주제임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14조는 이렇다. “당이 국영기업의 정치적 핵심 역할을 수행한다. … 국영기업의 기업지배구조에서 당의 법률적 지위를 명확히 하라.” “당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것이 마오 아래에서의 정치 경제적 지향이었다. 자오쯔양 총서기는 정치와 비즈니스를 분리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다. 그래서 기업에 대한 당의 통제를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이 1989년 톈안먼 사태 이후 물거품이 되었다. 민간기업 개혁 개혁안의 세 번째 포인트는 “큰 발전 가능성과 성장잠재력”을 가진 사기업이 개혁의 중요 타깃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18조의 제안은 국가 소유자본이 다양한 방식으로 민간기업에 투자될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 시장 지향적 접근을 통해 핵심영역, 즉 공공서비스, 하이테크, 환경보호와 전략산업 등에서 큰 발전가능성과 성장잠재력을 가진 사기업에 자산투자를 함으로써.” ...
아시아 최대 부호 리카싱(李嘉誠) 청쿵프라퍼티홀딩스(長江實業地産) 회장의 중국시장 철수를 둘러싸고 중국에서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또한 이번 사건으로 중국의 권력(정계)과 자본(재계) 사이에 긴장이 고조됐다. 지난달 12일 관영 신화사 계열 국책연구기관 ‘료왕싱크탱크’(瞭望智庫)에서 중국 국유자산감독관리위원회(국자위) 상업기술품질센터 뤄톈하오(罗天昊) 연구원이 ‘리카싱을 도망가도록 놔둬선 안 된다’는 제목의 논평을 발표했다. 이 논평으로 리카싱 철수에 대한 비난여론이 들끓자 같은 달 21일 인민일보는 “리카싱이 어려움을 함께 할 수 없다면 만류할 필요 없다”며 진화에 나섰다. 리카싱에 대한 험악한 분위기가 외국인 투자 유치에 도움이 안 된다는 속내였다. 이번 사건은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된다. 하나는 자본유입은 환영하되 자본유출을 적대하는 중국의 이중적 태도를 드러냈다는 점, 다른 하나는 권력과 자본의 대리전 양상을 띈다는 점이다. 중국자본과 홍콩자본의 밀월관계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실시한 1979년 당시 개방은 곧 외국자본 유치를 의미했다. 이후 1990년대까지 외국자본 유치의 핵심은 홍콩자본이었고 그 다음이 대만자본이었다. 중국의 개혁개방이 세계 각국의 화교자본으로 가능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당시 중국입장에서 홍콩자본은 당연히 외국자본이었다. 홍콩은 1997년 7월 중국에 반환됐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선언한 1978년부터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전까지 홍콩은 중국에 반환되기 전이었거나 반환 초기였다. 홍콩의 지정학적 위치와 경제적 특수성도 홍콩자본이 중국자본과 구분되는 요인이었다. 필자는 ‘중국 통치위기의 기원: 경제편’에서 홍콩의 지정학적 우위를 분석한 바가 있다. 중공 집권 후 홍콩은 중국의 국제 브로커가 됐다. 서방세계와 단절된 중국의 유일한 대외창구이자 외국자본과 기술을 들여오는 수출입 기지였다. 홍콩 상인들은 대중국 투자를 주도하며 중국의 대외개방을 이끄는 안내자 역할을 했다. 당시 중국이 유치한 외국자본의 70%가 홍콩자본이었고 이어 대만, 일본자본 순이었다. 상황은 2001년 중국의 WTO가입 후 달라졌다. 중국의 수출입 기지로서 홍콩의 위상은 점차 약화됐다. 역외금융업도 서서히 쇠퇴했다. 따라서 중국자본과 홍콩자본을 구분할 근거도 약해졌다. 그러나 중국은 홍콩자본을 여전히 외국자본으로 취급했다. 중공 이익집단에게 돈세탁과 자본도피의 창구가 필요했던 까닭이었다. 홍콩으로 유입된 중국 지하자금은 돈세탁을 거쳐 홍콩자본으로 둔갑했다. 필자는 ‘인민일보 10대 외자 출처의 비밀’라는 기고문에서 2013년8월12일자 인민일보 기사 ‘외국자본은 중국에서 이탈한 적이 없다’(外资并未大规模撤离中国)에 실린 그래프를 분석한 적이 있었는데, 이에 따르면 중국으로 유입된 외국자본 중 홍콩에서 유입된 자금이 397억1500만 달러로 전체의 65%를 차지했다. 그러니까 중국 권력층인 중공으로서는 홍콩자본과 홍콩의 재벌기업이 피붙이 같은 존재였다. 자수성가한 홍콩 중견기업도 중공의 지원을 받고 성장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였다. 중국경제가 어려워지자 미련없이 철수한 리카싱에 대해 중국 권력층이 격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본이동을 보는 중국의 이중적 태도 최근 중국정부는 폭락하는 증시를 지탱하기 위해 시장에 개입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이를 지나친 개입이라고 지적하면서 중국증시를 ‘사나운 개가 물고 있는 고기만두’에 비유했다. 중국정부를 사나운 개로 묘사하며 경계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리카싱을 도망가게 놔둬선 안 된다”는 논설은 불에 기름부은 격이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중국정부가 국제 자본이동을 통제하려 한다고 질타했다. 국제 자본이동은 투자•대출•원조•수출입•여신거래•외환거래•증권발행 및 유통 등의 방법으로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자본이 이동하는 것을 가리킨다. 자본이동은 방향에 따라 자본유입과 자본유출로 나뉜다. 국제사회의 통념상 자본유입과 자본유출은 모두 자유롭다. 미국과 유럽각국 등 WTO회원국은 2001년 중국의 WTO가입을 승인하면서 추후 금융시장 개방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아무도 중국이 자본유입만 환영하고 자본유출은 적대하리라고 예상하지는 못했다. 이전까지 그런 국가는 없었기에 뾰족한 대응책도 없었다. 현재 국제 자본시장은 중국에 자유로운 자본이동을 허가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중국에서 자본이동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사회적 통념으로도 존재한다. 중국여론은 민간자본에 대해 원죄의식이 있다. 정경유착이 만연했기 때문이다. 민중은 대다수의 민영기업이 권력과 결탁해 무풍지대에서 성장하며 자산을 축적했다고 본다. 정부는 정부대로 특혜가 없었으면 민영기업이 성장하지 못했다고 여긴다. 이런 특혜 하에 중국 민영기업에서는 탈세•조세회피•회계장부조작이 관행으로 굳어졌다. ...
전 세계는 중국 정부가 ‘증시 보위전’을 벌이는 걸 알고 있지만, 또 다른 사실에 대해서는 소수 경제계 인사만이 알고 있다. 8월부터 시작해 보위전의 주요 전장은 이미 외환시장으로 옮겨졌다. 이에 신흥 경제범죄는 ‘악의적 공매도’뿐 아니라 ‘악의적 환투기’도 추가됐다. 작전 상대는 외부 세력이 아니라 중공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은 권력자, 관료, 재계 부호이다. 줄줄 새는 정부 자금 중국 정부가 세계에서 환영을 받는 이유는 정부가 보유한 두둑한 자금, 즉 보유외환 때문이다. 사실 이 자금은 중국 정부의 자산이 아니며, 중앙은행이 외환관리제도를 이용해 국내 외국 자본, 외무기업 및 외환을 보유한 각종 기관, 개인 예금주에게서 ‘빌려’ 온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낮은 비용으로 빌릴 수 있기 때문에, 대다수 중국인을 포함해 중국 정부나 외국 투자자는 이를 중국 정부의 자산, 즉 ‘중국 인민의 자산’으로 여겼다. 당시 일부 사람이 외환보유액을 모든 중국 인민에게 고르게 나눠주자고 주장하자, 저우샤우촨 중앙은행장이 어쩔 수 없이 전면에 나서 진실을 설명했다. “외환보유액은 모두 중앙은행의 부채와 대응한다. 다만 사람들이 믿지 않을 뿐이다.” 현재 이 ‘대차관계’에 말썽거리가 생겼다. ‘채무’ 측이 형세를 비관적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6월부터 중국 정부가 강력한 ‘증시 구제’ 조치를 취한 이래로, 그들은 집정자가 중요한 순간에 본색을 드러내는 걸 발견했다. 즉, 그는 시장 규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지 않고, 약속이나 한 듯 ‘집단행동’에 나서, 외환시장에 몰려들어 달러를 환전해 ‘대출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중앙은행의 달러 보유액은 계속 유출돼,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중국 외환보유액, 3000~4000억 달러 감소 시 심각한 자금 부족 직면할 것 정상적인 상황에서, 중국의 외환 거래량은 일일 100억 달러 정도이다. 2014년 6월, 중국의 외환보유액은 3조 9,900억 달러에 달했지만, 1년이 채 안 된 올해 7월 말, 외환자산은 3조 6900억 달러로 3000억이 줄어들었다. 올해 8월 11일 이후, 외환시장 거래량은 일일 300억 달러 이상을 유지했다. 8월 하순, 3일간의 기록은 매우 놀라운 정도이다. 8월 26일 489억 달러, 8월 27일 385억 달러, 8월 28일 512억 달러가 거래됐다. 만약 이렇게 빠른 유출이 평소 상태가 된다면, 중앙은행은 외환 고갈에 직면해 더는 통화 유동성을 내보내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자금량 지원이 필요한 증시는 자금 단절에 직면하고 부동산 거품도 터질 것이다. 이 결과를 막기 위해, 중국 중앙은행은 할 수 없이 각종 방법을 동원해 자금 유출을 완화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시장에 위안화를 주입해 시장 유동성을 보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이 대규모 달러로 위안화를 사들여 위안화 환율을 보증한다. 또한 각종 방법을 동원해 외화 환전의 난이도를 높이고 있다. 9월 1일, 중국 중앙은행은 외환 선물계약 설정에 관한 부가 조건을 선포해, 투자자가 위안화 공매도 시 드는 비용을 증가시켰다. 신규정은 고객에게 위탁받아 외환 선물을 구매하는 금융기관이 중앙은행에 거래 대금의 20%를 외환준비금으로 1년 동안 납부하도록 요구했다. 이 규정은 10월 15일에 효력이 발생한다. 이 규정을 실질적으로 공매도자에게 8:1의 비율로 달러를 구매하게 한 것이다. 중국자본 은행업계의 고위층에 따르면, 중국은행, 중신은행을 포함한 일부 대형 중국자본 금융기관이 기업고객의 대규모 외환거래에 대한 내부 심사를 강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동시에, 중국 금융감독 기관 및 법 집행 기관은 불법수단을 통해 타인의 해외 자금 유출을 대리하는 기관을 대대적으로 단속하고 있다. 위의 모든 조치는 금융 위험을 방비하기 위해서이다. 채무 측 반부패 공포에 떨어 중국 정부가 외화 유출을 통제할 때 나름대로 논리가 있다. ...
최근 국제 사회는 대체로 중국 경제가 ‘쇠퇴’한다고 보고 있다. 기존의 ‘번영’과 비교할 때, ‘쇠퇴’는 정말 천양지차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소로스는 “중국 경제의 쇠퇴는 제3차 세계대전을 야기할 것”이라는 밝혔고, 뉴질랜드 재무장관은 중국-뉴질랜드 경제는 샴쌍둥이와 같아서 “중국 경제가 경착륙하면 뉴질랜드의 쇠퇴 위기는 더욱 커질 것”이라고 우려를 표시했다. 다만 쇠퇴의 원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어떤 이는 반(反)부패로 인한 정국 불안이 경제 쇠퇴를 야기했다고 생각하고, 다른 이는 중국 정부의 증시 간섭이 직접 경제 위기를 불러왔다고 여긴다. 사실 이런 논의들은 중국 경제를 진지하게 생각한 게 아니다. 중국 경제는 체질상 번영을 지속하기 어렵고, 중국은 세계 경제를 구하는 노아의 방주가 아니다. 유럽·미국·남미·아프리카의 같은 꿈: 중국 정부가 지갑을 여는 것 많은 중국인이 중국의 실업률 증가와 나날이 힘들어지는 서민 생활로 인해 중국 지도자가 주창한 ‘중국의 꿈(中國 夢)’이라는 허상을 비웃고 있을 때 국제 사회는 또 다른 ‘중국의 꿈’을 꾸고 있었다. 즉 ‘중국 정부가 자금을 풀고 투자해 자국의 경제 성장과 취업률 상승을 이끈다는 것’이다. 이 꿈은 공허한 것 같지만 오히려 현실적이다. 세계에서 중국 같은 경제 이야기를 가진 곳은 여태껏 없었다. 30년 동안 국민 소득이 연평균 10% 성장했고, 중국 인민 수억 명이 빈곤에서 벗어났으며, 빈털터리에서 세계 제2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면서 전 세계 GDP의 15%, 전 세계 GDP 성장의 25%를 담당했다. 이 때문에 수많은 나라의 위정자가 4조가 넘는 중국의 세계 최대 외환보유액 중 일부만이라도 자신에게 나눠주기를 오매불망 바라고 있다. 실제로 중국 정부는 지갑 끈을 열어 대규모 해외 투자를 진행 중이다. ‘2013년 중국의 대외직접투자 통계 공보’에 따르면 2013년 말까지 1만 5300명의 경내 투자자가 184개 국가와 지구에 2만 5400개의 대외직접투자 기업을 설립했다고 한다. 유엔무역개발회의 데이터에 따르면 2013년 중국은 미국의 3383억과 일본의 1357억에 이어 이미 세계 제3대 대외 투자국이 되었다. 2005년부터 2014년 상반기까지 중국의 해외직접투자 누계액은 5153억 달러, 프로젝트 투자 누계액은 3551억 달러였다. 투자업계에서는 2014년 중국의 해외투자가 일본을 초과해 1조 달러를 돌파할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중국의 해외투자는 부국과 빈국을 모두 동일시하는데 이는 투자은행계의 분포를 보면 알 수 있다. 직접투자와 프로젝트 투자 중 에너지 산업이 약 50%의 비중을 차지하며, 금속광산업도 직접투자의 주요 대상이다. 또한 해외 프로젝트 투자의 또 다른 중점은 산과 물에 길과 다리를 놓는 교통산업이다. 이는 모두 개발도상국에 투자가 돌아갔는데 중국의 기간시설 건설능력은 ‘비교적 우위’에 있어 중국 투자가 현지 기간시설의 개선과 취업률 증가를 이끌기 때문이다. 미·영·독은 최근 중국의 투자가 가장 빠르게 늘어나는 나라이다. 2007년부터 2013년까지 중국의 대미 직접투자는 714배 증가했다. 현재 미국 50개 주 가운데 35개 주가 중국의 직접투자를 받았고, 이중 투자를 가장 많이 받은 3개 주가 바로 뉴욕 주·캘리포니아 주·텍사스 주이다. 중국의 투자 범위도 상당히 넓은데 에너지·부동산·제조업·금융·서비스업·정보·전자·생명공학·녹지 프로젝트 등 다양하며 미국에 8만 개 이상의 일자리를 창출했다. 독일도 중국 투자의 핫 플레이스가 되었다. 2012년 독일은 중국의 대유럽 FDI 항목 중 38%를 독점해 영국과 프랑스의 합계를 뛰어넘었다. 중국의 양국 투자율은 각각 22%, 5%였다. 독일 투자청(GTAI) 데이터에 따르면 2013년 중국이 독일에서 직접 투자한 프로젝트 수는 139개였다. 이는 미국과 스위스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수치다. 독일 Das Statistik-Portalke Next 사이트에서 인용한 데이터를 보면 2014년 말까지 중국은 독일에 2500개의 기업을 세워 독일에 1만 2000개의 일자리를 제공했다. 투자업계가 중국 시장에서 거둔 수익도 적지 않은데 2014년 투자은행은 중국 시장에서 60억 달러라는 기록적인 수익을 거뒀다. 물론 미국과 EU 국가에는 크게 못 미치지만, 중국 이외에 어디에서 이렇게 성장하는 ‘파이’를 찾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희망의 빛이 눈앞에서 빛나고 있다. 독일 메르카토르 중국연구 센터가 미국 컨설팅 업체인 로디움 그룹과 협력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중국은 세계 최대 해외 투자자가 될 것이며, 중국의 전 세계 역외 자산은 현재 수준의 3배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즉 현재의 6조 4000억 달러에서 약 20조 달러로 증가한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중국은 이미 중요한 글로벌 투자자가 됐으며, 10년 후 대외직접투자의 증가를 이끄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것으로 희망한다”고 말했다. 기대가 높을수록 실망도 커지는 법이다. 중국의 경제 쇠퇴에 전 세계가 크게 실망한 이유는 중국이 세계 경제를 구할 것이라고 너무 크게 기대했기 때문이다. 베이징, 세계 경제 구할 능력 없어 중국 정부의 본심은 세계 제2대 경제 강국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세는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았고, 특히 시진핑-리커창의 상황은 후진타오-원자바오보다 훨씬 못했다. ...
선전이 눈물 흘리며 톈진에 묻다. 22년 전에 일어난 칭수이허 대폭발은 선전시 안마오 위험물 보관운송회사에서 공공연히 위험물 보관 규정을 어겼기 때문에 일어났다. 당시 소방안전을 책임졌던 왕주밍 공안국 부국장은 권력 지대추구를 이용해 직접 그 기업의 이사장을 맡았다. 이 비극적 사고는 ‘중국 대형사고 계시록’에 대표적인 사례로 기록돼, 유독 화학물질 운영업계의 필독서가 되었다. 하지만 당신들은 왜 아직도 나의 오래된 길을 걷고 있는가? - 이 글을 선전과 톈진의 대폭발에 희생된 영혼에 바친다. 각종 정보를 살펴보면, 8.12 톈진 빈하이 대폭발은 1993년 선전 칭수이허 대폭발과 매우 유사하며, 비극을 일으킨 주요 원인도 동일하다. 즉 권력 지대추구의 비호 아래, 기업이 유독 화학물질 취급 규정을 위반한 것이다. 톈진의 아픔은 선전의 잊을 수 없는 상처 톈진 대폭발의 참혹한 현장 사진을 본 후, 난 22년 전인 1993년 8월 5일, 선전 칭수이허에서 일어났던 대폭발을 곧바로 생각해냈다. 내가 기억하는 당시 사고는 하늘로 솟아오른 2개의 버섯구름과 핏빛으로 물든 하늘, 심하게 휘어진 철로, 근처의 건축물 잔해와 어슴푸레 보이는 잘린 팔다리 등이었다. 첫 번째 폭발 진동은 홍콩까지 전해졌다. 당시 우리 집은 원진두 세관 근처였는데, 문과 창문이 모두 흔들렸고, 윙윙대는 소리가 몇 분간 계속되면서 땅이 흔들렸다. 난 큰 사고가 난 걸 직감하고 불빛을 따라 현장으로 달렸다. 하지만 현장은 이미 봉쇄됐고, 멀리서 폭발음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폭발의 충격이 방향을 바꾸자 불덩어리가 하늘로 치솟았고, 칭수이허 창고지역 뒤편의 칭산은 검은 연기와 불빛으로 휩싸였다. 현장 안전요원은 구경꾼들에게 즉시 떠나라고 권고했다. 만약 당시 바람이 가스 저장탱크 외부의 철근을 통과해 2층까지 들어왔다면, 선전 특구는 지도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당시 선전 칭수이허 폭발은 주거지와 비교적 먼 창고지역에서 일어났고, 구조에 나선 3천 명의 무장경찰이 맹렬한 화염 속에서 시멘트 방화벽을 세워, 폭발이 기타 위험물 보관 창고로 파급되는 걸 곧바로 막았다. 비록 사망자 수는 정보에서 발표한 수보다 훨씬 많았지만, 톈진에 비해서는 적었다. 톈진 폭발사건의 심각성에 SNS 시대의 파급 효과까지 더해져 조성된 사회 공포와 그로 인한 분노는 선전 칭수이허 대폭발을 훨씬 뛰어넘었다. 이미 드러난 각종 소식을 살펴보면, 이 사고의 원인과 사후 대응, 반영돼 나온 문제는 22년 일어난 선전 칭수이허 대폭발과 기본적으로 비슷하다. 1993년~2015년의 22년 동안, 중국은 WTO 가입, ‘평화굴기’로 상징된 경제번영 및 ‘세계 공장’의 발전과 쇠락을 경험했다. 세계는 1989년 잠깐의 대중국 경제제재 이후 다시 한 번 중국을 열정적으로 껴안았고, 현재 또다시 냉대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 22년 동안, 중국은 수백 명의 억만장자를 배출해 전 세계에 널리 발자취를 남겼다. 유일하게 변하지는 않은 것은 체제와 점점 더 격렬해지는 권력 지대추구이다. 석유 중화학 공업은 중국 경제의 고속 성장을 이끈 원동력 중 하나이다. 중화학 공업에는 적지 않은 인화성, 폭발성 위험물이 사용되기 때문에, 생산 시설은 환경 평가를 거쳐야 하고, 생산 경영은 공안부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중국의 환경 평가는 일찍부터 부패의 온상이 되었고, 위험물 경영 심사도 지대추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 중국에는 2,489개의 유사한 중화학 공업 프로젝트가 거주지에 분포돼 있다. 이는 2,489개의 시한폭탄이 숨겨진 것과 같아, 중국인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의 위협 아래 도망갈 곳이 없는 상황이다. 톈진 8.12 대폭발 배후의 권력 그림자 톈진 빈하이 대폭발 사고 후, 가장 의심스러운 부분은 다음과 같다. 1. 루이하이 국제 창고 부지는 규정을 명백히 위반 2001년 국가 안감국은 ‘위험 화학물질 경영기업의 개업 조건과 기술 요구’를 정식 발표했는데, 그중 중대형 위험 화학물질 창고는 주변 공공건물, 간선도로, 광공업 기업 등에 최소한 1000m의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명확히 규정했다. 언론 폭로에 따르면, 루이하이 국제는 4만 6226㎡ 면적의 야적장을 사용했는데, 500m 부근에 주요 간선도로인 하이빈 고속도로와 진하이 경전철이 있었고, 600m 근처에 완커하이강청 3기 주민 주택이 위치했다. 시간상으로 볼 때, 루이하이 국제 위에진루 야적장이 위험물 야적장으로 개조된 것은 2014년이며, 그전에 이미 주변의 하이빈 고속도로, 완커하이강청, 진하이 경전철 등 프로젝트는 모두 준공된 상태였다. 위의 내용은, 루이하이 국제 야적장 개조 프로젝트에서 부지 선정에 필요한 환경 평가 과정이 규정을 위반해 조작됐다는 걸 설명한다. ‘톈진 루이하이 물류 환경 문서’에 따르면, 루이하이에 환경평가를 한 곳은 톈진시 환경보호 과학연구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