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반적인 서양화 주장, 계몽 운동과 어려운 문체 대신 일상 생활 쓰이는 말을 그대로 작품에 쓰자는 '백화 운동' 추진 역사상 인류사회에서 역사적 인물 한 사람을 놓쳐서 끝없는 아쉬움을 남긴 많은 사례가 있다. 일의 공로가 주가 되어 놓친 역사적 인물 장쥐정(張居正)을 예로 들자면 사람들은 만력(萬曆) 중기 이후 명나라 통치 사정이 점점 나빠졌기 때문에 ‘세상에 다신 없을 장쥐정’이라는 감탄을 내뱉었다. 그러나 생각에서부터 역사의 갈림길을 바꾸고 싶어하는 일반 사람들은 그의 가치를 알기 어렵다. 다음은 <중국인 후스즈>를 읽은 감상이다. 후스와 천두슈, 중국 현대화의 양대 표지 후스의 사상에 대해 연구한 학술 논문은 꽤 많다. 하지만 이 시대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열심히 책을 읽는 사람들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류나이슌(劉乃順)과 티엔총슈에(田崇雪)라는 두 명의 작가는 후스의 일생을 장편의 문학 다큐멘터리 극본으로 쓸 예정이다. 다시 말해 TV드라마라는 형식을 통해서 더 많은 중국 사람이 후스를 알게 하고 이해하도록 하고 싶은 것이다. 작가는 역사 재현이라는 취지로 이 책은 결코 해학적으로 서술한 책 따위가 아니라 대략 모든 이야기가 모두 본질을 가지고 있다. 역사에 흥미는 있지만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싶어하지 않는 현대 중국인에게 이 책은 한 권의 좋은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책 속 후스와 진독수(陳獨秀) 두 사람의 길은 다르지만 우정의 끈은 끊어지지 않은 ‘은원지교’에 매우 흥미가 있다. 진독수는 만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5·4운동은 중국 현대사회 발전에 있어 필연적인 산물이다. 맞든 틀리든 간에 그 몇 사람에게 잘못을 돌리면 안됐다. 그러나 채원배(蔡元培)선생, 스즈(適之)그리고 나는 바로 그때 사상언론에서 주요 책임을 지는 사람이었다.” 이 말도 물론 괜찮다. 하지만 사상에 영향을 준 결과로 말하자면 진씨(陳氏)의 영향이 매우 크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1910~1920년대에 자유주의, 무정부주의, 니힐리즘 그리고 사회주의 등 각종 사조가 한꺼번에 중국에 들어왔고, 당시와 그후 20여년간 중국 청년 지식인 대부분은 전 세계에 성행하는 좌경 사조와 사회주의 사상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후스가 살던 시대는 때마침 중국 현대화가 사거리 프로세스를 배회하던 시기였다. 여기서 ‘사거리’라는 것은 중국 지식 엘리트들이 서양의 양대 정치 사조에 취사선택하던 시기를 말한다. 그때, 영미 제도를 숭상하는 자유주의 정치사조, 프랑스대혁명과 러시아10월 혁명을 숭배하는 사회주의 정치 사조가 동시에 중국에 들어왔고, 당시 중국 지식계의 사상에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그 후 중국 정치노선의 선택, 즉 영국과 미국이 대표하는 건전한 발전과 프랑스와 러시아가 대표하는 격동적인 발전 방식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 후스는 미국에서 10년 동안 유학하는 동안 실험주의 철학의 대가인 두웨이(杜威)를 스승으로 모시며 자유주의에 점차 깊이 스며들었고 평생 미국 민주정치에 정례를 표했다. 줄곧 미국을 근대화의 성공 전형으로 여겼으나 낭만주의에 심정을 관철시킨 한결 같은 프랑스대혁명에는 비판적인 태도를 지니며 ‘낭만병’을 ‘게으름병’이라고 꾸짖었고, “정확한 방법은 정확한 건축 재료 위에 짓는 것이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만년 까지 후스는 처음의 소망을 바꾸지 않았다. ‘미국 개국은 단지 3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을 뿐인데, 300여 년 동안 그렇게 큰 지역을 개척하였고, 문화 수준이 가장 높고 사람들의 생활이 가장 안락하며, 국력이 가장 큰 국가가 된 것은 인류 역사의 기적이다!’ 일생을 후스와 친하게 지냈던 진독수는 오히려 프랑스대혁명의 열정적인 숭배자였습니다. <프랑스인과 근세문명>이라는 책에서 그는 ‘근대문명의 특징은 가장 고대의 도리(道理)로 변할 수 있어서 민심과 사회가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중요한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인권설이고, 두 번째는 생물진화설이며 세 번째는 사회주의다. 이 세 가지 근대문명은 모두 프랑스 사람이 하사한 것이다. 세계에 프랑스가 없다면 어쩌면 오늘날 어둠에 대해서 여전히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고 썼다. 진독수는 프랑스인의 혁명 정신을 추앙했고, 프랑스 문학 또한 매우 찬양한다. <유럽문예담>에서 프랑스 문학 예술의 각 유파 예를 들어 고전주의, 현실주의, 낭만주의, 자연주의를 중국에 소개하였고, 프랑스문학에 대한 중국인들의 흥미를 일으켰다. 러시아 10월 혁명이 발생한 후, 진독수는 열정이 충만하게 <러시아혁명과 우리 국민들의 착오>라는 책을 발표했다. ‘이번 혁명은 민주주의의 승리다’고 찬양했고, ‘18세기 프랑스의 정치혁명, 20세기 러시아의 사회혁명 당시 사람들은 모두 온갖 욕설에 대치하였으나, 그 후의 역사가들은 모두 그들을 인류 사회 변동과 진화의 관건으로 여겼다’고 단언했다. 후스와 진독수 두 사람은 1910~1920년대의 중국 청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후스는 자유주의를 깊게 믿었고, 미국의 민주를 추앙하며, 5·4시기에 실험주의를 힘껏 홍보했다. 표면적으로는 그의 지도 교수인 두웨이의 실험주의 철학 이론을 널리 퍼뜨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미국 민주제도 이론의 정수를 발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중국인들에게 미국의 민주제도를 소개할 때, 후스는 특히 미국 민주의 정수는 여전히 국민에 의한 정치이며, 이것은 마침 그 당시와 그 후에 미국 민주제도를 연구한 사람들이 비교적 쉽게 지나칠 수 있는 한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진독수는 프랑스대혁명에서부터 러시아의 10월 혁명까지, 루소의 급진적 민주주의부터 레닌의 사회주의까지 걸어왔으며, 중국 공산당의 창시자 및 초대 서기가 되었다. 그는 단지 러시아의 방법을 모방하는 방법과, 혁명이라는 수단을 이용해 낡은 세계를 파괴하고 새로운 제도를 강력하게 추진해야만 중국이 출구를 찾을 수 있다고 깊게 믿었다. 진독수는 만년에 세상만사 모든 변화를 경험할 정도에 이르러서 소련의 경험을 다시 한 번 돌이켜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단지 그가 은퇴한 후의 개인 사상 수련을 완성하는 것이었고, 중국 사회의 사조에 대해서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중국인 후스즈>는 다큐멘터리 문학이기 때문에 후스와 진독수 두 사람의 사상 논쟁 장면을 매우 융통성 있게 처리했다. 두 사람이 만나서 잡담을 할 때 친구 모임, 잡지 사무에 대한 토론 등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5·4 이후 진독수는 세 차례 수감되었고, 후스는 그를 구원하기 위해 팔방으로 뛰어다녔다. 진독수가 출옥한 후 두 사람은 만나자 마자 바로 정치 관점에 대해 논쟁했다. 두 사람의 이러한 은혜와 원한, 서로 얽매인 우정에 대해 후스는 진독수에게 보내는 편지에 ‘우리 오랜 친구는 정치적 주장도 다르고 사업도 비록 다르지만, 여전히 친구인 이유는 너와 나의 머리 뒤에 자기와 다른 것을 용납하는 태도가 공통적으로 있기 때문이다’ 고 개괄했다. 이러한 ‘군자지교’는 오늘날 우리 지식인 후배들이 보기에 감동적이며 부럽기도 한 부분이다. 현재 급진파는 나날이 정치의 정확한 표지로 변해가고 있다. 한 마디의 말이 맞지 않으면, 급진자는 정치상 개량을 주장한 사람들은 ‘중국 공산당에 매수됐다’고 주장하며 다른 사람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 둘 사이의 교분을 완전히 끊기를 바란다. 후스의 자유주의 정치 이상 후스의 정치이상을 말하자면 주로 ‘개인의 자유’와 국가와의 관계인 ‘호인정부(好人政府)’, ‘국민에 의한 정치’의 세 분야다. 개인과 국가의 관계에서 후스는 유럽과 미국의 개인주의를 숭상하며 유럽 18~19세기의 개인주의가 빵을 사랑하는 사람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능가하는 자유를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을 육성했고, 그렇기 때문에 유럽과 미국의 문명세계가 탄생했다고 생각했다. 이로 인해 북양 정부가 청년들에게 ‘한 사람의 자유를 희생하여 국가의 자유로 바꾸어라!’고 호소할 때 후스는 팽팽하게 맞서며 청년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여러분의 자유를 쟁취하는 것이 바로 국가의 자유를 쟁취하는 것이다! 여러분 자신의 인격을 쟁취하는 것이 국가를 위해 인격을 쟁취하는 것이다! 자유롭고 평등한 나라는 노비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돌이켜보면 수십년 동안 중국 공산당 의식 형태교육을 통해 대부분의 중국 청년 일대에서 국가와 개인, 국가와 사회의 관계는 이미 뒤죽박죽 되었다. 개인주의는 지나치게 이기적이라고 여겨지는 데다 비판까지 받고 개인을 집단에 따르게 하였으며, 집단의지가 개인의지보다 높은 것은 논박의 여지가 없는 ‘진리’로 간주됐다. 후스의 ‘호인정부’ 주장은 후스를 지금까지 공로를 세운 학자들의 비웃음거리가 되도록 만들었다. 2012년 <인민일보> 역사 칼럼의 ‘자유주의 지식분자의 정치참여의 위험’ 시리즈 중 <우담화처럼 잠깐 피었다가 사라지는 ‘호인정부’> 한 편을 썼다. ...
중국 부호가 미국으로 도망치는 사례는 부지기수지만 중난하이의 이번 주인을 걱정하게 만든 건 링완청(令完成)과 궈원구이(郭文貴) 두 사람이 단연 으뜸이다. 앞서 링완청은 형인 링지화가 훔친 2700건의 기밀문서를 건네받아 외국으로 도망쳤지만 아직 행적이 드러나지 않았다. 궈원구이는 중국 정부의 일급기밀을 손에 넣었다고 자처하면서 보쉰 기자와의 인터뷰에 여러 차례 응한 후 종적을 감췄다. 현재 궈원구이의 종적은 확실치 않지만 링완청의 행적은 ‘뉴욕타임스’ 포시드 기자에 의해 만천하에 드러났다. 중국 차이신망은 ‘뉴욕타임스’가 제공한 단서를 토대로 Google 맵에서 여러 장의 사진을 검색해 중국 사람들에게 공개했다. 이미 확인된 세부 내용 아래 세부 내용은 출처를 명기했으니 참고하길 바란다. 1. 링완청의 호화주택 상세 내용 포시드 기자는 ‘링지화 동생 미국으로 잠적, 정치적 보호 찾나’라는 기사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부동산 기록을 살펴보면 링완청은 시에라네바다 산맥 아래 7800제곱피트(약 725㎡)의 주택을 보유했다.” 단 주소는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링완청의 호화주택 주소는 다른 기사에서 이미 언급되었다. 올해 3월 7일 중국 ‘시나 해외 블로거’ 야오훙언은 ‘미국 호화주택은 공짜로 줘도 살 수 없다’(blog.sina.com.cn/yaohongen)라는 글에서 이 호화주택의 주소를 폭로했다. “Wang Cheng으로 검색하면 그가 보유한 캘리포니아 루미스의 부동산을 찾을 수 있다. 소유권(Ownership)을 보면, Li Ping이라는 사람과 함께 각각 50%씩 소유하고 있다. Wang Cheng과 Li Ping은 누구인가? 물론 유명인으로, 누구와 관련됐는지 쓴다면 아마 이 글은 게재하지 못할 것이다. 주택 주소는 6105 Terracina Ct, Loomis, CA 95650으로 루미스는 캘리포니아의 주도 새크라멘토의 동북부에 위치한다.” 야오는 블로그에서 링완청이 미국에서 링완청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Wang Cheng이라는 이름의 비자를 사용한다고 폭로했다. 차이신망의 보도에 따르면 외부 사람들은 링완청이 ‘왕청’이라는 가명으로 사업한 것을 알고 있다고 한다. 그의 아내 리핑은 산시 사람으로 CCTV 앵커 출신이다. 따라서 위의 두 사람은 의심할 여지 없이 링완청 부부이다. 2. 도주 시기는 2014년 9월 이전에 이미 결정했다 올해 8월 4일 차이신망은 이렇게 폭로했다. “56세의 베이징 상인 링완청은 지난해(2014년) 가을 실종됐다. 당시 일부 소식은 그가 링지화의 아들 링후젠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고 전했다.” 이때 나는 이를 거의 믿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다음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차이신망은 2014년 11월 26일 ‘링완청의 부 이야기’ 기사에서 이렇게 밝혔다. “둘째 형 링정처가 2014년 6월(정확한 날짜는 6월 19일) 중앙기위 감찰부 사이트에 심각한 기율위반으로 조직의 조사를 받은 지 4개월 후 55세의 베이징 상인 링완청도 인신의 자유를 잃었다.” 외부 사회에서는 이 내용을 인용해 그의 ‘해외 도피’를 부정했다. 차이신망이 ‘인신의 자유를 잃었다’고 한 것은 그가 해외에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는 걸 뜻하는지도 모르겠다. 시끌벅적한 생활을 좋아하는 중국인들은 이민생활을 ‘이민 감옥’에 갇혔다고 말하곤 한다. 올해 8월 4일 차이신망은 장위안안 워싱턴 특파원의 ‘링완청 미국 은둔 확인, 캘리포니아에 725㎡ 저택 소유’ 기사를 보도했다. 그중 일부 내용을 보면 링완청 부부가 미국으로 달아난 시간을 추측할 수 있다. “부동산 판매망에서 발췌한 내용을 보면 링완청 부부는 2013년 9월 250만 달러에 이 부동산을 매입한 후 약 반년 후인 2014년 1월 22일 389만 달러에 매물로 내놓았다. 이후 가격이 떨어지자 팔지 않았고 2014년 5월 23일 매물을 취소했다. 2014년 9월 16일 다시 매물로 내놓았지만 275만 달러에 팔지 않았고 2014년 11월 3일 매물을 취소한 후 더는 팔지 않았다.” 링정처가 6월 19일 조직의 조사를 받은 후 2개월 후인 9월 16일 링완청은 미국에 나타나 부동산 매도를 계획했다. 아직 해결해야 할 몇 가지 퍼즐 ...
중국 정부의 강력한 증시 구제를 살펴보면 그 방법은 정말 다른 나라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이다. 마침내 7월 9일 증시 방향이 급변해 주가지수가 빠르게 상승했고, 7월 13일까지 상승세를 유지했다. 중국의 주식 사태가 그리스 채무 위기보다 심각하다고 우려하던 언론은 순식간에 국제 언론에서 사라졌다. 여론이 이런 증시 구제가 중국 정부의 이미지를 손상시키는 것이 아닌지, 중국의 미래 경제 발전에 정말 이로운 것인지 토론하기 시작할 때 나는 오히려 다른 문제를 생각했다. 응급조치의 시작에서 볼 때 베이징은 사실상 금융위기에 대응하는 예행연습을 한 차례 겪은 것과 같다. 증시 구제 조치로 드러난 정부의 독재 본색 이번 증시 구제는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단계는 증감위, 중앙은행에서 할당했기에 조치도 비교적 적었다. 6월 28일 중앙은행이 공포한 기준금리 및 지준율 인하는 상당한 조치로 여겨졌지만, 증시는 오르지 않고 오히려 하락했다. 7월 6일 이후 3일간 증시가 폭락하자 두 번째 단계에 접어들었다. 증시 상황이 국가 안보 분야로까지 격상된 것이다. 증감위, 은감위, 중앙은행, 재정부, 국자위 등이 증시 구제에 나섰을 뿐 아니라 공안부도 ‘악의적인 공매도 세력을 철저히 조사’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렇게 강력하게 증시를 구제하는 데는 물론 시진핑 주석의 명령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국가적 시스템’을 발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7월 8일 정오, 증감위는 긴급히 ‘증감발 (2015) 51호’를 공포해 두 가지 조치를 내놓았다. 첫째, 6개월 이내에, 상장기업의 지배주주와 주식을 5% 이상 보유한 주주 및 이사, 감사, 고위층은 2차 시장을 통해 해당 기업의 주식 수를 줄일 수 없다고 규정했다. 위의 관련 인원이 규정을 위반하고 해당 기업의 주식 수를 줄이면, 엄격한 처벌을 받는다. 둘째, 각 증감국은 최근 6개월 내 해당 기업의 주식 수를 줄인 대주주 및 이사, 감사, 고위층을 면담하고, 그중 5억 이하로 줄인 주주는 누적 감소 금액의 10% 이상으로 주식 보유를 높이고, 5억 이상으로 줄인 주주는 누적 감소 금액의 20% 이상으로 주식 보유를 높일 것을 명확히 요구했다. ‘국가적 시스템’의 위력은 역시 대단했다. 곧바로 상장기업 655곳이 주식 수를 높이거나 재구매할 계획을 발표했고, 기타 금융기관도 소문을 듣고 즉시 움직였다. 중커증권과 자오상증권은 1억 6300만 위안을 들여 상장기업 3곳의 주식을 사들였다. 중국증권금융주식유한공사가 증자, 채권발행, 동종업 대출 등 다양한 방식으로 획득한 유동성 지원은 7월 9일까지 수천억 위안에 달했다. 국영기업의 반부패를 두려워한 국영기업 관리층은 지난해부터 증시를 통해 주식을 매매했고, 당해 경영자매수라는 국영기업 개혁을 통해 가로챈 주식을 ‘판매해’ 올 상반기 총 5천억을 현금화했다. 이 주식은 원래 고위층이 국영기업 개혁을 이용해 아무런 투자 없이 이익을 챙긴 것이다. 지금 당 중앙이 이런 주식 일부를 토해내 국난을 넘기고, 대부분 주식을 남긴 것은 그들의 사정을 봐준 것으로 보인다. 베이징 고위층의 지도 아래, ‘국가팀’은 일치단결해 주식을 사들였고, ‘공매도’하는 시장세력(즉 외부세력)과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대결을 벌였다. 마침내 2015년 7월 A주 증시 사태에서 승리해 주가지수를 떠받쳤고,(매도를 제한했기 때문에 ‘증시를 떠받쳤다’라고 할 수 없다) 중소 투자자를 포함한 국내 투자자의 믿음을 안정시켰다. 2008년 금융위기가 미국에 도래했을 때 ‘월스트리트저널’은 ‘당 지부가 월스트리트에 공수한다’는 사설을 통해 오직 중공만이 미국 증시를 구할 수 있다고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7년이 지난 후 당 중앙이 중국 증시에 내려와 주가지수를 성공적으로 떠받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붕괴되던 증시 회복, 시 주석 전능 이미지 공고 7월 5일, 베이징의 다양한 증시 조치가 실패하자, ‘만일 2015년 증시가 붕괴되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까?’라는 문장이 인터넷에 떠돌았다. 문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예측했다. “만약 주식시장, 부동산시장, 실물경제 및 은행 시스템에 위기가 나타나면, 다음에 충격을 받을 곳은 분명히 환율이다. 중앙은행은 예외 없이 주식시장과 환율시장 양측에 조치를 취할 것이고, 그 결과 위안화의 국제화는 여기서 끝날 것이다. 홍콩은 다시 한 번 막대한 충격을 받을 수 있다.” 중국은 열 차례 넘게 불마켓이 전복됐지만, 시의 결단력과 그가 이끄는 증시 조치의 용맹함은 결코 양 전임 총서기가 따라올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번의 최대 특징은 경찰과 국안이 증시 구제에 개입한 것이다. 7월 9일, 신화사는 “당일 오전 멍칭펑 공안부 부부장이 부대를 이끌고 증감위에 도착해, 증감위와 함께 최근 악의적으로 주식과 주가지수를 공매한 단서를 조사하고, 위법 행위는 강력히 제재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공안과 국안이 증시 구제에 개입해 어떠한 구체적인 행동을 했는지, 외부에서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7월 12일 보쉰이 전한 소식에 따르면, 7월 9일 오후 6시까지 국안국은 대형 지하 금융기관 286곳을 조사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약 3조 위안의 현금을 압류해, ‘국내 금융 질서를 어지럽혔다’는 죄명으로 국고에 환수했다는 것이다. 다만, 다른 소식통이 없는 탓에 한동안 근거 없는 소문으로 여겨졌는데, 어쨌든 참고해 볼 만 사항이다. 최근 주가 하락은 매우 위급해 뉴욕 증시까지 하락했다. 일부 국제 옵서버들은 중국 증시로 인해 세계 금융위기가 다시 폭발할 것으로 여겼고, 그 결과 ‘전능’하다고 여겨진 시진핑의 통제 능력에 강한 의심을 품었다. 하지만 7월 A주 증시 구제로 사람들은 시의 강세와 결단력을 다시는 의심하지 않았고, 시의 강세가 중국의 운명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증시 구제에 긍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대부분 중국인)은 증시 구제로 한 차례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한다. 일부 평론가들은 완곡하게 이번 경험을 거울삼아 다시는 이런 위기를 맞아서는 안 된다고 제안했다. 증시 구제를 찬양하는 목소리가 높지 않은 이유는 이번 증시 사태는 ‘정책성 불마켓’이 자초한 화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기에, 관영 언론은 무안하게 이 사실을 회피하면서, 오직 “중요한 순간에 당이 당과 전 국민을 인도해 재난을 성공적으로 종식시켰다”라고만 말할 뿐이다. 7월 A주 증시 구제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위기가 정권 교체를 일으키는 촉매제가 되는 동시에, 중국이 시장화 개혁을 통해 시장경제 체제 국가의 해외 투자자가 되길 희망한다. 그들은 중국이 시장화 수준을 높여 국제 사회에 융합되고, 세계 각국과의 무역 거래를 막는 장애물을 감소시키길 바란다. 이런 견해는 7월 13일 ‘파이낸셜 타임스’의 ‘중국의 증시 구제 조치가 위안화 개혁을 위협한다’는 기사에 잘 나타나 있다. 기사에는 일부 사람들의 실망을 언급했다. “정권을 잡은 중공은 결국 중국 경제와 금융 시스템 주요 부분의 통제권을 포기할 수 없었다… 중국에 있는 외국 투자자도 종종 원망을 한다. 그들은 자신이 좋지 않은 감독 분위기에 처했다고 느끼며, 관료주의의 높은 시장 진입 장벽은 여전히 그들을 슬프게 만든다.” ...
최근 중국인 수백만 명이 당국의 주식 거래 장려로 주식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는 비극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사실 중국 주식시장은 시작부터 중국공산당의 통제 아래 있었다. 중국 공산당은 증시로 국영기업의 금고를 채우고, 국영기업 CEO들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한 일종 ATM(현금자동인출기)으로 여긴다. 그 와중에 소액투자자들의 저축이 고갈되어 버리는 것이다. “국영기업들을 가난에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증시가 필요하다.” 주룽지 전 총리가 재임 중 한 말이다. 중국 공산당은 증시를 이용해 3년 안에 국영기업을 가난에서 탈피시키려는 목표를 세웠다. 경영이 부실하고 유지가 힘든 국영기업들을 증시에 상장시키면서 일이 시작됐다. 이러한 방침으로 주식제도 개혁과 주식상장은 오랫동안 국영기업에 제한되어 있었다. 개인 소유 기업은 대중의 투자를 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정부의 정책적 지원으로 국영기업은 증시를 투자 기회로 활용했다. 모(母)기업의 계열사들이 현금 흐름을 끌어오는 ATM기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증시는 “10년 만에 100년에 이룰 진보”를 이뤄냈다. 타이캉 생명보험 천동셩 회장에 따르면 주룽지는 모든 기업들이 증시에 상장되는 것을 허락하는 큰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더 나아가 당시 주요 아젠다가 자본시장 개혁이어서 모든 지방정부에 목표치가 할당되고, 모두가 그것을 시행하고 싶어 했다고 한다. 이것이 중국의 자본시장이 성립하게 된 방식이라고 천 회장은 말했다. 중국 증권시장은 탄생부터 국영기업들의 재정적 어려움을 풀어주기 위한 펀드를 조성하기 위해 탄생했다. 그는 오늘날도 마찬가지라며 “왜 우리가 우리 자본시장을 잘 운용할 수 없는가? 총리가 하라고 하면 국영기업들이 상장되기 때문이다”고 지적했다. 증권시장은 자금세탁 기구 중국 국영기업의 중요한 개혁은 소위 자사주 매점 방식이다. 외부 세계에서는 이것을 이사들이 권력을 이용해 국가 자산을 분할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국영기업의 최고 중역인 공산당 고위 지도층과 그 가족들이 이 개혁의 최고 수혜자들이다. 시진핑이 최근 국영기업 이사들의 호시절을 끝내버렸다. 지난 2년간 중국 당국은 국영기업은 궁극적으로 당이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그리고 2014년 11월에 ‘주요국영기업개혁 국가위원회’가 발족했다. 18대 전국인민대표회의 후 반부패 캠페인이 진행되는 동안, 많은 국영기업 임원이 해고되면서, 국영기업 임원들은 자신의 보유 주식이 부패로 분류될까봐 노심초사했다. 그들은 서둘러 주식을 현금화했다. 2014년 10월 17일까지 중국의 상장기업 임원들의 주식 보유는 상당히 감소했으며, 470억 4300만 위안(70억 6800만 달러)이 현금화 됐다. 2015년 전반 6개월 동안 국영기업은 또다시 5000억 위안(810억 달러 )을 추가로 현금화했다. 역사적 기록이다. 이들 임원들이 국영기업과 증시를 자금세탁기구로 이용했음을 보여 준다. 주주들의 투자금 고갈 1992년 이래 중국 증시는 10번 이상의 큰 부침을 경험했다. 대체로 득보다 실이 컸던 투자자들이 더 많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시장에서 도박을 계속하고 있다. 2008년에 A주(외국투자자들에게 개방된)시장이 70% 이상 하락했다. 상하이 증권뉴스가 중국 전역의 2만 5000명 이상의 투자자들에게 실시한 설문에 따르면, 90% 이상이 돈을 잃었다. 돈을 잃은 사람의 60% 이상이 주가의 70% 이상 손실을 보았다. 6%의 투자자만 이익을 냈다. 2013년 중국증시는 아시아에서 최악의 실적을 내고 있었다. 시나닷컴이 2014년 1월 실시한 설문에 따르면 2013년에 약 65%의 주주들이 손실을 보았다. 주식투자로 인해 32.2%의 투자자들의 생활수준이 심각하게 저하됐으며, 9%는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2015년 전반 6개월 동안 중국 투자자들의 손실은 상상을 초월한다. 5월 마지막 2주 동안에 시장에서 13조 2600억 위안(2조 1480억 달러)이 증발했다. 투자자당 평균 손실액이 14만 7000위안(23814 달러)에 이르러, 연간 국민소득의 거의 3배에 이른다. ‘2015 전반기 증시 투자자들의 손실’이라는 보고서가 제시한 통계다. ...
중국 공산당은 혁명을 끝없이 반복하기 위해 결성된 정치 조직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혁명을 두려워하고 있다. 하지만 혁명은 중국에서 이미 진행 중이며, 그 결과가 곧 나타날 것이다. 현 정권의 큰 모순 중 하나가 창당 이념과 실제 행동이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국 학생들은 마르크시즘(최소한 중국 공산당판 마르크시즘),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이론, 당수에 관한 정치 수업을 전부 들어야 한다. 사실 중국의 권력 있는 부호들은 마르크스와 마오쩌둥에 대한 지지에 기득권을 가지고 있다. 이는 중국 공산당에 대한 일종의 정치적 보험으로, 현 정권의 합법성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하지만 중국 인구 14억 중 60%로 추정되는 빈곤층에게 중국 공산당의 사상은 빈약할 뿐이다. 게다가 20년 가까이 일말의 변화도 없었던 사회 구조 속에서 극빈곤층은 신분 상승의 길이 막힌 반면, 부호들은 끊임없이 국가와 공공 자산을 제멋대로 약탈하는 상황 속에서, 빈부격차는 격화되기만 할 것이다. 정통 마르크시즘에서는 엘리트 부르주아 약탈자를 공산혁명의 대상으로 본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이 이러한 엘리트 부르주아 약탈자로 전락한 지도 벌써 오래이다. 이제 사회 최하위층에게 중국 공산당이라는 역사상 최악의 독재 정권을 타도할 정치적 타당성이 생긴 것이다. 중국의 현 정권의 이념 원칙이 오늘날 양날의 칼이 되었음에도, 중국 공산당은 이를 절대 포기할 기색이 없다. 덩샤오핑 전 최고 지도자는 재임 중 경제 및 타 개혁에 대해 개방적이었으나 마르크시즘과 마오쩌둥 사상을 부정한 적은 없다. 혁명 지도자를 찾아 중국 국민들은 마르크스 혁명과는 다른 종류의 혁명이 일어나길 바라고 있다. 이들은 마르크시즘이라는 무기를 버리고 대신 보편적인 민주주의 가치를 수용했다. 일부는 언론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가 즉시 제도화되는 완전한 민주혁명을 바란다. 또 한편에서는 중국 공산당을 타도하여 부에 대해 균등한 기회를 가지더라도, ‘사회 안정’을 위해 당의 구성은 유지하기를 바라고 있다. 후자는 ‘민주 혁명’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현 정권과 가장 연루되어 있는 이들이다. 트위터나 웨이보 상에 개혁에 대한 의견 표현이 많은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현재 이렇게 혁명에 대한 의견이 확산되고 잠재적 혁명 대중이 늘어나고 있지만 정작 이 개혁을 이끌어나갈 조직이나 지도자는 아직 없다. 이는 창당 과정에서도 등장했던 ‘조직’에 중국 공산당이 병적으로 민감하기 때문이다. ‘검열’, ‘폐쇄’, 체포’는 중국 공산당이 중국 내 모든 조직을 진압하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북클럽, 비영리단체, 대학 곳곳에 정보원들이 배치되어 있다. 또한 공맹(OCI: Open Consititiution Initiative)이나 중국지방도서관(China Rural Library)와 같은 시민단체와 해외지원 비정부기구가 폐쇄되었고, 쉬즈융, 우간과 같은 다소 유명한 활동가들마저 연행되고, 석방권도 제한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 중국 공산당의 검열이 철저했지만 한 정치 운동가가 중국 혁명 대중을 이용하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시 당서기는 2007년부터 2012년까지 충칭에서 당 서기로 재임할 당시 사회적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보시라이는 마오쩌둥의 영향을 받은 좌익 사상을 공표하고 문화대혁명 방식으로 ‘혁명 가요 부르기’ 및 ‘조직 폭력배 소탕’ 캠페인을 추진하여, 약해진 충칭 시민의 공산주의 정신을 일시적으로 부활시켰다. 다수 중국 공산당원들과 일반 시민들은 보시라이의 말을 신뢰했고 그가 자신들의 이익을 지켜줄 지도자라고 믿었다. 중국 공산당이 경쟁자를 용납하지 못하는 탓에, 시진핑 주석은 보시라이가 인기 있던 초기에 ‘비조직적 행동’과 부정부패를 이유로 그를 숙청했다. 하지만 이는 임시방편이었을 뿐이다. 혁명 대중들은 이미 카리스마 있는 유명 지도자를 맛보았고, 모든 상황은 언제든지 다시 수면으로 떠오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청의 최후 중국 반체제 인사인 류샤오보씨가 2010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기 때문에, 중국 공산당은 혁명의 씨를 말려버렸고 정부는 특히 ‘혁명’ 조성에 매우 민감해졌다. 지난 6월 14일자 인민일보의 특집 기사 5개가 독재 정부를 타도하는 운동인 ‘색깔 혁명’이 사회에 악영향을 끼친다며, 민주주의 체제는 중국에 억지로 융합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기사에 따르면 중국은 ‘색깔 혁명’의 침투와 확산에 주의해야 하며, ‘해로운’ 서양 세력들이 그 동안 끈질기게 중국 공산당을 잠식하고 축출하고자 했으므로 서양 제도와 서구화에 대한 미신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 정부는 ‘사회 안정’ 촉진을 위한 지출 전략을 고수하고 있지만, 이는 중국 경제 침체와 실업률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면서 소용이 없어질 것이다. 사실, ‘혁명’이란 단어가 중국 인터넷 상에 더 잦은 빈도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혁명의 움직임은 이미 시작되었다. ...
1947년, 첫 번째 레비타운이 뉴욕 롱아일랜드에 건설됐다. 이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커뮤니티였다.… 지방 도시가 건립한 새로운 학교 시스템, 오락시설 및 배후의 관리부서 등 일련의 문제는 수많은 미덕이 만들어지는 조건을 또다시 만들었다.… 19세기 새로운 주, 지역 및 신흥 도시가 정치 민주화를 위한 새로운 각축장이 되었던 것처럼, 수많은 신규 도시와 다양한 지역 문제는 20세기 중반, 미국의 정치적 흥미와 활력을 모두 일깨웠다. - 다니엘 부어스틴 ‘미국인의 민주역정’ 공립학교 관리의 지역사회 참여 제도 미국인이 지역사회 공립학교의 관리에 참여하는 것은 자치의 주요 내용이다. 미국 공립학교 운영비는 주로 현지 주민의 부동산세 및 일부 주 정부의 재정 보조로 이뤄진다. 매 도시에는 현지 주민이 뽑은 교육위원회가 학교 관리에 참여한다. 교육위원은 모두 현 학군의 납세자이며 과거 학부형일 수도 있다. 내가 사는 소도시의 교육위원 중 마흔이 안 된 한국계 의사가 있는데 아시아 대표라 할 수 있다. 학교와 관련된 큰일은 모두 교육위원회의 동의를 거쳐야 한다. 학교와 교육위원회의 의견이 불일치하면, 학군 내 주민 표결을 공고하고 통지한다. 해당 지역에 사는 주민은 학부형이 아닐 수 있지만, 그들이 내는 세금은 학교 운영비를 지원한다. 중국인에게 입학은 매우 큰 일이며, 특히 외부에서 온 임시 거주자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미국에는 그런 문제가 없다. 월세든 자가든 상관없이, 취학 연령 청소년은 모두 현지 학교에 입학할 권리가 있다. 내 아들이 미국에 막 왔을 때, 입학 등록을 위해 학교에서 공고한 날(개학 3일 전)에 학교를 찾아갔다. 등록에 필요한 서류는 집문서, 월세 계약서, 수도·전기료나 가스요금 명세서 중 하나면 충분했다. 이 문서에 거주자의 이름이 있으면, 현지 주민임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외국 학생은 등록하면 곧바로 반 시간 정도 수학 테스트를 받는데, 학생 수준에 따라 일반반 또는 우열반에 편입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왜 수학을 선택했을까? 공식과 계산 방정식에는 언어 장벽이 없기 때문이다. 전체 과정은 더욱 놀라운데, 테스트 완료 후 30분도 안 돼 입학 통지서와 과정표를 받을 수 있다. 외국 이민자인 내 상황은 중국 시골에서 대도시로 올라온 임시 거주자들과 비슷하다. 임시 거주자의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내내 매우 큰 문제이다. 그래서 수속을 마친 후에도 내가 입학 수속을 제대로 마쳤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지역사회 주민의 ‘폭넓은 관여’ 내가 기억하기엔, 최근 몇 년간 학군 주민이 표결한 상황은 3건이었다. 첫 번째는 주 정부가 학교에 주는 보조금이 줄어들자, 학교에서 아침에 스쿨버스가 지나는 정류장을 줄이고자 한 것이다. 예컨대, 내가 사는 지역에는 원래 4개 정류장에 5분씩 정차했지만, 이제 정류장이 1개로 주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똑같은 버스로 똑같은 시간에 2번 왕복할 수 있어, 1년에 약 280만 달러를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이 결정은 6~8학년 학부형들의 많은 반대에 부딪혔다. 정류장이 줄면 아이들이 버스를 타러 10분 이상 걸어야 하는데, 눈 내리는 겨울에는 너무 힘들다는 이유였다. 이후 학부형 3백여 명이 연합 반대서명을 내자, 교육위원회는 현지 주민 공청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스쿨버스 정류장을 유지하려면, 부족한 280만 달러의 예산을 부동산세 증세를 통해 메워야 하기 때문이다. 공청회는 토요일 6시 중학교 도서관에서 열렸고, 주민 2백여 명이 참석했다. 학부형 대표가 왜 스쿨버스 정류장을 줄이면 안 되는지 발표하자, 내용을 준비해 온 일부 지역 주민대표가 이렇게 의견을 표했다. 1. 큰 눈이나 눈보라가 내릴 경우 학교는 보통 휴교를 하기 때문에, 학생들이 눈보라를 무릅쓰고 등교할 상황은 일어나지 않는다. 2. 아이들이 빗속에서 몇 분 걷는 건 그리 나쁜 일이 아니다. 아이들이 겪을 수많은 일 중, 비바람은 그저 작은 일에 불과하다. 3. 세금을 올릴 경우, 학군 내 모든 가정은 일부 학생의 등교 거리를 줄이기 위해 매년 100달러 이상을 부담해야 한다. 이는 등교할 아이가 없는 가정에 매우 불공평하다. 4. 세금을 올리게 되면, 이후 내릴 가능성이 별로 없다. 지역 내 다른 공공사업도 많기 때문에, 끊임없는 증세가 가져올 부작용도 고려해야 한다. ...
“미국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느끼려면, 광활한 농촌으로 가야 한다. 중국의 빈곤과 절망을 알려면, 중국의 농촌을 봐야 한다.” 중국에 관한 각종 소식 중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수십 년 동안 ‘농촌의 고향이 몰락했다’는 소식이 이어졌다는 점이다. 어느 곳에 있는 농촌이든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지역 불량배나 조직 폭력배가 횡횡하고, 쓰레기와 오염이 심각하다. 실업자들이 점차 증가하고, 사람들이 모여 도박하는 것이 농촌의 주요 생활상이 되었다. 도덕은 땅에 떨어졌고 교육 등 공공사업은 무너졌다.’ 농촌의 붕괴 현상에 통감한 사회 각층은 ‘향신제도를 재건하자’고 부르짖었다. 즉 중공이 없애버린 농촌 자치모델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것이다. 토크빌이 칭찬한 ‘미국 공동체 정신’은 미국의 ‘국민에 의한 정치’를 가리킨 것이다. 내가 사는 곳은 풍경이 아름답고 조용하며 정돈된 미국의 지방 도시이다. 국내에 미국의 민주제도를 소개할 때 토크빌이 중시한 ‘국민에 의한 정치’를 소홀히 한 것 같아, 이야기 방식을 통해 미국의 자치를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미국식 민주의 영혼 국민에 의한 정치 1863년 11월, 링컨 미국 대통령은 ‘게티스버그 연설’에서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영어 원문은 ‘(The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will never die)’이며, 이를 해석하면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이다. 물론 해석만으로 영문의 깊고 정제된 뜻을 모두 표현할 순 없지만, 어느 정도 생동감 있게 그렸다고 할 수 있다. 선거제도, 삼권분립, 사법제도, 뉴스와 언론자유 등 정부제도 방면에서 미국 정치제도를 소개한 책은 중문으로 많이 번역됐다. 하지만, 자치라는 관점에서 미국 민주정치의 토대를 설명한 책은 2백 년 전 토크빌이 저술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를 뛰어넘는 책이 아직 없다. 다른 저자와는 달리, 토크빌은 정치제도 측면에서 민주를 고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관계, 인간의 사상 감정 및 민심 등으로 구성된 사회 현상에 깊숙이 들어가 미국의 민주를 고찰했다. 토크빌은 미국에서 민주가 순조롭게 발전한 것은 일련의 자연, 정치 및 사회 조건에 기초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중에는 미국의 자연환경과 법치, 민심이 포함되며, 이 세 가지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민심이다. 최상의 지리적 위치와 법률 제도가 있다 해도, 민심의 지지가 없으면 정치 체제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민심은 나쁜 지리적 환경과 최악의 법치 제도가 조성한 불리한 영향을 완화할 수 있다. 토크빌의 명저가 세상에 출간된 후, 세상에는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고 미국 정치에도 거대한 변화가 수없이 나타났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토크빌이 찬양한 ‘미국 공동체 정신’이 여전히 세계 초강국인 미국을 떠받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에서 사는 중국인이라면, 자신을 차이나타운에 가두지 않는 한, 미국 곳곳에 있는 지역 사회를 느낄 수 있다. 아름다운 지방 도시와 지역 사회가 미국의 광활한 국토에 널리 분포해 있다. 지역 사회의 생활에 깊이 들어가면, 미국의 지방 도시야말로 강력한 자유의 집합체라는 걸 느낄 수 있다. 모든 도시, 마을은 똑같은 원칙 위에 세워졌다. ‘각 개인은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일에 최고의 결정권자이며, 자신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데 가장 적임자이다. 지방 도시(지역 사회)의 구성원으로,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그들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으며, 의무의 이행과 권리의 행사는 똑같이 중요하다.’ 이는 심오한 민주 이론이 아니라, 민주를 실천하는 방법이다. 나는 지역 사회의 공공업무 토론회에 몇 번 참석한 적이 있는데, 이는 미국인들이 ‘로버트 토의절차 규칙’을 실천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토론에 참가한 미국인(이민자 포함) 중 대부분은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그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즉, 그들이 그 책의 규칙을 실천한다기보다는 그 책의 저자가 미국 지역 도시의 자치 경험과 그 경험에서 시작된 각종 토의절차 규칙을 책으로 집대성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지역 주민들은 왜 철도역을 거부했나 차를 몰고 이 도시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노인 거주지를 지날 때마다 생각나는 일이 있다. 만약 현지 주민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집단행동과 재판에 나서지 않았다면, 이곳은 시끌벅적한 화물 운송역이 됐을 것이다. 내가 사는 도시에는 공용 황무지가 있다. 이를 본 한 운송기업이 그곳에 화물 운송역을 만들려고 했다. 지방 정부는 역이 들어설 경우 도시 경제가 활성화되고, 취업률이 높아지며, 도시 재정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 이를 대대적으로 알리며 주민들이 찬성하길 바랐다. 하지만 철도역을 만들려면 철도를 보수해야 하고, 철도가 경유하는 몇몇 지역과 기차역이 있는 지역 주민은 소음에 영향을 받을 게 분명했다. 이런 상황을 파악한 주민들은 서로 연락해 의견을 나누고, 마침내 철도역에 반대하는 걸로 의견을 모았다. 중국인이 보기에는 이상할 것이다. 일부 주민이 정말 지방 정부의 사업을 막을 수 있는 건가? 이는 미국 법률이 부여한 대중 참여와 환경 결정의 권리이다. 20세기 중반, 미국인도 오염 문제에 상당히 시달렸지만, 그들은 가만히 앉아서 정부의 책임만을 기다리지 않았다. 자치 전통이 강한 미국 시민은 환경보호의 대중 참여를 추진하기 시작했고, 대중의 압력 아래, 미국은 1946년 ‘연방행정절차법’을 제정했다. 이 법률의 핵심은 당사자가 공청 제도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후 대중이 환경 정책에 참여하는 데 기반이 되었다. 몇 년 후, 지방 정부는 또다시 철도역 방안을 제기했다. 과거 이를 반대하던 주요 인사 중 몇 명이 도시를 떠났기 때문에, 주민들은 새롭게 힘을 모아야 했다. 그래서 당시 참가자는 지역 신문에 ‘먹구름이 또다시 머리 위에 몰려들었다’라는 제목으로 이를 알렸다. ...
26년 전 베이징 6·4 사건은 소련-동유럽 격변(서양사회에서 1989년에 일어난 일련의 혁명을 이렇게 부른다.)의 신호탄이 되었고, 이를 통해 중국 지식분자와 대학생 집단은 세계 민주화 운동에 큰 공헌을 했다.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에서 예언한 듯이 “인류의 이데올로기 논쟁은 이미 종점에 달했고, 자유·민주가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후 20여 년의 정치 변화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강권, 독재에서 민주로 향하는 것은 일방통행이 아니며, 민주화나 계몽 전제주의로 향하던 일부 국가들이 독재로 회귀하는 재난에 직면했다는 걸 발견했다. 러시아 독재 회귀와 민심 현 단계에서 서로 손잡고 모방하는 비민주국가 중, 이란은 정교 합일 국가이며, 중국은 민주화를 겪어보지 못했다. 중국은 그저 개방적 자세 속에서 1980년대 반(半)계몽 전제주의를 겪다가, 현재 어두운 독재로 회귀하는 길을 미친 듯이 달리고 있다. 반면, 러시아는 역사상 서구화를 겪은 경험이 있고, 90년대 이후 민주화 길에서 일정 시간을 겪었다. 러시아를 분석해 보면, 사회 전환 과정 중 민주화가 일방통행이 아니라는 현실을 확실히 알 수 있다. 푸틴이 독재로 회귀한 것은 물론 그의 KGB 경력과 큰 관계가 있다. 이런 인간은 독재와 강권을 선호하고, 게다가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부터 스탈린까지 수백 년간 양성된 독재문화의 뿌리가 매우 깊어, 중국에 버금갈 정도이다. 나는 ‘푸틴주의는 어떻게 만들어졌나(2014년)’라는 글에서, 푸틴주의는 대국의 쇼비니즘과 독재정치가 만든 검이지만, 오히려 민심을 거쳐 단련됐다고 지적했다. 러시아는 중국과 달리 민주제도라는 외형이 있기 때문이다. 서양에서 말하는 ‘국민의 선택’이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정치적 정확성의 상징이다. 하지만 독재국가에서 민심은 강권에 의해 쉽게 휘말리곤 한다. 내가 앞의 글에서 중점적으로 서술한 내용은 이렇다. “러시아 정치의 뚜렷한 방향 전환은 푸틴이 집권한 후에 시작됐다. 푸틴이 집권하기 전, 러시아는 한동안 독재와 작별하고 민주로 향했다. 1999년부터 푸틴은 능숙한 정치 통제력을 이용해, 러시아를 점차 독재와 패권 정치로 회귀시켰고, 자신을 선거에서 뽑힌 대통령에서 독재자로 변신시켰다. 주목할 만한 것은, 푸틴이 정치에서 중대한 변화가 있을 때마다 러시아 주류 민심의 지지를 얻었다는 점이다. 이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푸틴은 러시아 민족의 대국 쇼비니즘 전통을 교묘히 영합하고, 러시아인이 수백 년간 권위에 의존한 것을 이용했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정치 이상을 실현해, 오늘날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되었다.” 다시 말해, 푸틴의 지지자는 농민계층과 청년 세대였고, 반대자는 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의 중산계층에 집중됐다. 이중 전자의 수가 후자를 훨씬 초과했다. 중국에는 이런 견해가 유행한다. “중공의 독재 기반은 주로 1950, 1960년대 생이며, 주력은 광장에서 춤추는 아주머니들이다. 이 세대가 사망하면, 젊은이는 자연히 민주의식을 지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말에는 사실적 기반이 결여됐다. 중국 마오 좌파 중 적지 않은 수가 80, 90년대 생이기 때문이다. 푸틴의 사회 기반 중, 골수 지지자는 ‘청년 근위대’라고 부른다. 이는 과거 소련 대조국전쟁 시기 청년조직의 명칭으로, 전투에서 용감히 싸운 청년의 상징이었다. 2005년 러시아 집권당인 ‘통일 러시아’는 청년 조직을 이 이름으로 개명해, 오늘날 러시아 최대 청년 정치조직이 되었다. ‘청년 근위대’의 ‘업적’은 적지 않은데, ‘반(反)색깔혁명’에서 비상 선봉의 역할을 맡았고, 반(反)푸틴 시위를 거행한 청년들과 격렬한 충동을 일으켰다. 또한 에스토니아가 소련 홍군 해방 기념비를 이전하는 데 항의하고, 미국 정보부의 은닉처라며 모르몬교 교회를 공격했으며, 푸틴의 우크라이나 출병을 지지했다. 청년 근위대는 항상 푸틴이 가리키는 데로 움직였다. 청년 근위대 구성원은 소련 해체 후 태어난 사람들이 많은데, 이 청년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교육받았는지는 아직 체계적으로 연구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는 중국 민주인사에게 ‘이데올로기 세뇌 교육이 얼마나 무서운지’ 명확히 경고하고 있다. 포퓰리즘과 반미 양대 기둥에 의존한 ‘차베스 사회주의’ 베네수엘라는 민주제의 외형 아래 포퓰리즘이 사회를 휩쓰는 전형을 보여준다. ‘중국 인민의 좋은 친구’ 차베스는 포퓰리즘과 반미에 의존해, 베네수엘라에 ‘사회주의’를 건설했다. 남미를 연구하는 정치학자들은 이를 ‘차베스 혁명’이라고 부른다. 이 ‘혁명’은 사회주의 협동조합을 만들고, 의료와 교육 시스템을 개선하며, 권력을 인민에게 돌리기로 약속했다. 차베스가 중국 정부처럼 통계 데이터를 조작하지 않았다면, 그는 약속을 실현했다고 할 수 있다. 각종 사회 계획을 통해 10년 내 3백만 명에 가까운 베네수엘라 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나, 빈곤층이 총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75%에서 26%로 떨어졌다. 또한 기본적으로 문맹을 퇴치해, 식자율이 96%에 달했다. 외교 정책을 보면, 차베스는 ‘미 제국주의’ 세력과 양립할 수 없는 자세를 취하면서 스스로 ‘반미영웅’의 이미지를 만들어, 적지 않은 지지를 받았다. 현재 베네수엘라는 남미 최대 부패국가 중 하나이자 전 세계 순위 138위이며, 이 나라에 ‘볼리바르 자산계급’이 나타났다고 하지만, 그 구성원에는 ‘특별비용’을 징수하는 정부 관료와 석유를 매매하는 중개인, 암시장과 회색 시장에서 활약하는 사람, 돈세탁 및 마약을 밀수하는 조직이 포함돼 있다. 하지만 차베스는 앞서 말한 두 가지 성과를 앞세워 자신이 ‘사회주의’를 건설했으며, 그의 사회주의만이 세계를 구할 수 있다고 공언했다. 난 과연 그가 마오쩌둥의 수제자인지 여러 번 생각해 봤지만, 결국 그의 이데올로기 출처가 매우 다원화됐다는 걸 발견했다. 볼리바르, 예수, 마르크스, 인디언 등이 모두 그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베네수엘라 빈곤층에게는 빵과 복지가 가장 중요할 뿐, ‘차베스식’ 사회주의가 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차베스에게는 무슨 주의를 택하든 중요하지 않고, 각종 속임수를 통해 권력을 보유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사실 이는 베이징 정권과 다를 게 없다. 그들에게는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의 본의가 뭔지 중요하지 않고, 이를 이데올로기 도구로 삼아 반대파를 제거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차베스는 이미 고인이 됐지만, 그가 남긴 문제는 현재 베네수엘라를 괴롭히고 있다. 차베스는 석유자원의 풍부한 이윤에 의지해 빈곤층의 분배액과 복지를 높이고, 그들의 경제생활 수준을 올렸다. 하지만 빈곤층에게 젖병만 제공할 뿐 그들이 발전할 기회를 주지 않은 정책은 석유 가격이 하락하면서 계속 유지할 수 없었다. 베네수엘라의 중상류층은 차베스가 사회의 혁신과 발전 동력을 말살했다고 그에게 굉장히 반감을 가졌다. 이후 차베스가 임기 중 광범위하게 정치를 억압하고 인권을 침해한 행적이 대량으로 폭로됐다. 미국 애머스트대학의 베네수엘라 문제 전문가 하비에 코랄레스는 “차베스는 법률을 사용, 남용, 무시하는 세 가지 방법으로 대통령의 권력을 확대하고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을 억압했다. 그는 반대파뿐 아니라 정부 내부의 반대 목소리까지 탄압했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원유 가격을 올린 다음 주변국에 소규모 보조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주변국의 민주화 발전을 효과적으로 통제했다. 이는 ‘뉴욕타임스’ 기사 제목 ‘차베스는 해탈했지만, 베네수엘라는 여전히 발버둥 치고 있다’와 다름없다. ...
5월 20일, 중국 국가신문출판광전총국 뉴스간행 부문은 최근 특별 관리 업무에서 중앙 뉴스 부서의 지방 기구 1141곳을 통폐합하고, 법규를 위반한 1435명을 해고했다고 발표했다. 중국의 뉴스 시스템을 안다면 이는 중국 언론의 ‘뉴스 임대’를 뒤늦게 처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처리 대상이 중앙 언론의 지방 기자센터로 선정된 것은 그들이 ‘사업 편성, 기업 경영’으로 불리는 언론 시스템의 부패를 집대성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뉴스 임대’ 중국의 뉴스 임대 현상은 이미 중국 언론계의 암적인 존재가 되었다. 이 현상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언론 방송권을 이용해 보도 대상에 긍정적인 보도를 내보내고(업계에서는 이를 ‘대가성 뉴스’라고 부른다) 찬조금이나 광고료를 끌어들이는 방법이다. 이렇게 모은 돈은 언론과 개인이 나누는데 언론은 큰 몫을 챙기고 기자 개인은 수수료 명목으로 작은 몫을 챙긴다. 이러한 금액의 분배 비율은 언론사마다 다르고, 수수료 처리 방법도 모두 제각각이다. 일부에서는 이를 ‘원고 구성료’라고 부르고, 일부에서는 ‘광고료 공제’라고 부른다. 이러한 뉴스 임대는 언론의 직업윤리를 위반한 것이지만, 그들은 범죄로 여기지 않는다. 필자는 ‘중국의 뉴스 임대 현상에 대한 우려’라는 글에서, 중국 언론이 돈과 권력의 이중 압박에 몸부림친 건 최근의 일이 아니라, 1980년대 후반 ‘언론 시장화’부터 시작됐다고 말한 바 있다. ‘언론 시장화’란 정부가 재정 부담을 없애기 위해, 언론을 경제적으로 독립시켜, 재정 지원을 일부 또는 전부 줄이는 것이다. 이러한 방향은 서양 선진국의 관례에도 부합하지만, 양자 간 차이점은 서양 언론은 뉴스 자유와 출판 자유를 통해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중국 언론은 이처럼 매우 중요한 생존 조건이 결여돼 있다. 그래서 국내 언론계는 정부의 지속적인 통제 아래 놓인 언론 시장화를 ‘언론을 걷어차 바다에 빠뜨리면서, 언론의 손발까지 묶으려 한다’고 묘사한다. 손발이 묶인 수영선수가 좋은 성적을 낼 수 없듯이 중국 언론은 정치와 경제의 이중 압박에 직면해 있다. 1990년대 중반 지방 각지에 언론을 설립하는 게 유행하면서 대가성 뉴스 경쟁도 치열해졌다. 기업은 영향력 높은 언론에 광고비를 지출하려 했고 영향력이 크지 않은 언론(중앙급 비인기 언론도 포함)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이 때문에 이러한 언론의 기자는 어쩔 수 없이 ‘뉴스 임대’를 시작했다. 즉, 지방 기업과 기관의 불미스러운 사건, 예컨대 사고, 부패행위, 위조품 생산 등을 잡아냈다. 한 마디로, 언론이 당사자의 오점을 잡아 협박하면, 당사자는 돈을 지불해 관련 보도를 막을 기회를 사는 것이다. 이는 중국 언론계의 ‘뉴스 임대’가 나쁘게 변한 것으로, 언론의 직업윤리를 저버린 데다 명백한 범죄행위이다. 중앙 언론의 지방 기자센터는 어떻게 자금 수탈의 경로가 됐을까? 중앙 언론의 지방 기자센터는 왜 뉴스 임대의 집대성이 됐을까? 이는 중국의 언론 제도가 조성한 것이다. 마오쩌둥 시대와 덩샤오핑 개혁 초기 신화사, 인민일보 등 소수의 중앙급 당 언론은 각지에 기자센터를 설치해 여론을 살피는 창구로 삼았고, 관련 책임자는 지방 정부를 감찰하는 책임을 맡았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중앙 각 부서는 잇달아 신문을 창간해, 적지 않은 ‘중앙급 언론’이 나타났다. 언론이 ‘사업 편성, 기업화 경영’의 길을 가자, 각 중앙급 언론은 전국 각지에 기자센터를 우후죽순으로 설립했다. 이 기자센터의 주요 사명은 ‘재원’을 개척해, 본사에 각지의 이익을 제공하는 주요 통로가 되었다. 이 때문에 수많은 지방기자가 뉴스 보도와 여론 감시라는 기치를 내걸고, 금품을 교묘히 취하거나 강탈했다. 언뜻 보기에는 기자 개인이 언론의 직업윤리를 위반한 것 같지만, 그 배후에는 본사의 ‘수익지표’ ‘상벌시스템’의 압력이 있었다. 기업에는 긍정적인 보도가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았기에, 기자센터는 지방 정부 특히 산업계의 ‘뉴스 임대’를 생존 도구로 삼았다. 산시성에 광산사고가 빈번하자, 2005년 이전, 이곳은 한때 언론계의 뉴스 임대 중심지가 되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광산사고가 발생하면 ‘가짜 기자’가 현장에 도착했다고 한다. ‘가짜 기자’ 중 적지 않은 수는 각 중앙급 언론의 산시 기자센터에서 고용한 계약직이었다. 이들의 업무는 주로 광고와 찬조금을 끌어오는 것으로, 광산 사고 등을 이용해 ‘뉴스 임대’를 진행했다. 이는 각급 중앙 언론의 산시 기자센터가 생존하는 방식이었다. 만약 계약직원의 꼬리가 잡히면 기자센터와 신문사는 그를 ‘가짜 기자’라고 몰아붙여 관계를 부인했다. ‘산시 가짜기자 사건 조사: 누가 가짜기자에게 자생할 온상을 주었나’ 등 보도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집중 보도했고, 이후 중앙 언론 지방 기자센터의 부패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2006년, 중국신문출판총국은 ‘중화공상시보’ ‘중국공업보사’ ‘중국식품질량보’ 등 4개 신문사의 기자센터가 “뉴스 보도를 이유로 기층부서와 군중에게 사기를 치거나, 재물을 갈취하는 위법활동을 벌였다”고 통보했다. 당시 중앙 언론의 지방 기자센터가 기장 집중적으로 처리됐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만으로 각 기자센터의 뉴스 임대 현상을 근절할 수 없었다. 앞서 말한 ‘중앙급 언론’의 신분이 그다지 견고하지 않은 데다, 정부 부서에서 설립한 신문이었기 때문이다. 2014년 ‘정청급 기자 뤄반의 강호은원록’ 기사는 외부사회에 이런 상황을 제대로 알려주었다. 인민일보 허난성 기자센터장인 뤄반은 ‘인민일보’라는 황금 간판을 위협도구로, 인민망의 기사 송고권을 멋대로 조종하는 축재 도구로 삼았다. 그는 각 칼럼 당 100만 위안의 외주비를 받고, 칼럼 기사를 외부에서 불러온 인원에게 하청 주었다. 허난 지방기업이 그들의 손에 걸렸다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보내 그들에게 ‘협조’해야 했다. 기업 경영부서가 나서서 사정할수록, 인민망 허난 사이트에서 요구하는 금액은 더 높아졌다. 허난 신문출판국은 해당 사이트에 전혀 관여할 수 없었는데, 뤄반은 정청급 관료였고 ‘인민일보’는 언론계의 권력자였기 때문이다. 뤄반의 재물 착취가 하늘을 찌르자, 허난성의 뉴스 사기는 완연한 백색공포가 되었다. ...
우연히 쯔중쥔 여사(중국 전통 사회학자)의 글을 보았다. “100년이 지났지만 발전이 없다. 위에는 여전히 서태후가 있고, 아래에는 여전히 의화단이 있다.” 이 소박한 말에는 중국 사회의 전환(핵심은 사회 계층구조의 전환)이 실패했다는 걸 보여준다. 소위 ‘실패’란 중국의 사회 계층에서 하층민 수가 과도하게 많고, 중간 계층 수는 총인구에서 매우 적다는 걸 뜻한다. 중국 사회 계층구조의 전환 실패 사회 전환에는 정치 전환, 경제 전환, 사회 계층구조 전환 등 몇 가지 부분을 포함한다. 사회의 계층구조가 변화하면, 소비구조(생산구조를 태동함), 문화형태, 가치관 등도 상당히 변화한다. 현재 중국이 직면한 최대 실패는 사회 계층구조의 변화에 실패한 것이다. 즉, 하층민에서 중산층으로 전환할 수 없는 계층구조이다. 소위 ‘위에는 서태후가 있다’는 건, 정치 변혁의 핵심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정치 체제가 지금까지 질적으로 변화하지 않아, 집권자는 여전히 정치 폭력을 맹신하고, 서태후 시기에는 없었던 사상통제 시스템까지 추가됐다. ‘아래에는 의화단이 있다’는 건, 겉으로 보기에는 마오 좌파와 사회 하층민이 나날이 폭력화되는 경향을 말한 것 같다. 하지만, 이런 폭력 성향은 사회 구성원의 패배감에서 온 것으로, 적어도 인구의 60%에 해당하는 중국인이 번영의 열차에 타지 못한 채, 사회 등급 피라미드에 가장 밑 부분을 이룬 데 기인한 것이다. 개혁개방 초기, 덩샤오핑은 전 국민의 샤오캉(의식주 걱정 없는 중산층 사회)을 약속했다. 그때부터 10년 전까지, 중국 정부가 사회 계층구조 전환을 위해 설정한 목표는 중산층 위주의 계란형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국가급 프로젝트가 적지 않게 투자됐는데, 그중 중국적 특색을 가장 잘 보여준 것은 2001년 중국 사회과학원이 ‘당대 중국 사회 계층 연구’ 프로젝트에서 구분한 ‘10대 계층설’이었다. 이 보고서에서 계층을 구분한 기준은 직업이다. 예를 들면, 국가나 사회 관리 계층, 경영 계층, 민간기업 주요 계층, 전문 기술자 계층, 산업 노동자 계층, 농업 노동자 계층 등이다. 이는 서양 사회학처럼 사회적 지위, 경제 수입, 직업 명성 등을 기준으로 나눈 것도 아니며, 정부 이데올로기인 마르크스주의처럼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을 기준으로 나눈 것도 아니다. 그저 이도 저도 아닌 내용으로 독보적이라는 정부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채 10년이 되지 않아 사라졌다. 2010년 2년, 중국 사회과학원은 ‘당대 중국의 사회구조 변화 연구’ 프로젝트에서 한 가지 결론을 발표했다. 당시 중국 중산 계층의 규모는 총인구 중 약 23%로, 매년 1%의 속도로 규모가 확대된다는 것이었다.당시 상황으로 볼 때, 중국 사회과학원의 2010년 보고서는 믿을 만하다. 하지만 일부 외국 연구기관의 연구는 매우 터무니없어, 중국 현실과는 상당히 동떨어졌다. 가장 황당한 것은 아시아개발은행이 발표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2010년 주요 지표’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에서는 매일 2~20달러를 소비하는 사람을 중산 계층이라고 정의했다. 이 기준에 따르면, 중국의 중산 계층 수는 8억 1700만 명이며, 그중 3억 300만 명은 하층 중산 계급(일일 평균 2달러 소비)이다. 이 보고서가 언론에 보도되자, 수많은 중국인이 자신이 ‘중산층화’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중산층의 기준으로 삼는 매일 최저 2달러를 당시 환율로 환산하면, 매일 14위안이 채 안 되며, 매달 약 420~430위안에 해당한다. 이는 중국 발달지역의 최저 생활기준과 비슷하고, 중국 대부분 도시의 최저 임금 표준보다 훨씬 적다. 세계은행은 1인당 매일 1.25달러를 소비하면 빈곤하다고 정의했지만, 아시아개발은행은 매일 2달러를 소비하면 중국의 중산층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아시아개발은행의 발표를 믿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현재 상황을 살펴보자. 세계은행이 몇 년 전에 발표한 데이터에 따르면, 중국인 중 매일 1달러 이하로 소비하는 인구는 총 3억 명이며, 아시아개발은행이 계산한 최저 중산층은 3억3백만 명이다. 이는 중국 빈곤인구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중 원자바오 전 총리가 2010년 3월 중국 발전 고위층 포럼에서 언급한 실업자 2억 명도 포함된다.) 최근 몇 년 동안 이 상황은 계속 악화됐고, 외자 철수와 실물경제의 불황으로 1억 240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다시 말해, 중국의 사회 하층민(즉, 빈곤인구와 반(半) 빈곤인구)은 60%를 넘는다. 중국은 소수의 억만장자를 배출한 동시에, 방대한 수량의 빈곤 계층을 생산했다. 이는 사회의 계층구조 전환에 실패했다는 걸 뜻한다. 사회 계층구조의 전환 실패는 불공정한 분배 제도 탓 사회 계층구조를 개선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인은 사회분배 제도이다. 한 사회의 소득분배 제도는 소득분배 거래규칙의 총합을 가리키는데, 이는 법률과 규칙으로 설립된 각 분배 주체 간의 권리와 이익 관계를 뜻한다. 현대 시장경제 조건 아래, 소득분배의 주체는 일반적으로 3대 이익집단으로 구성된다. 즉, 인적자본 소유자(노동력 소유권), 고용주(생산재 소유권) 및 정부(공공 정치권력)가 공동으로 국민소득을 분할한다. 중국의 주요 문제는 다음과 같다. 1. 부의 분배에서 인적자본이 공헌하는 요인이 약화됨에 따라, 사회분배 중 노동자 보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작고 점차 줄어드는 추세이다 이와 관련된 정부 데이터에는 논란이 존재한다. 장젠궈 중화전국총공회 관계자는 몇 년 전 중공망과의 인터뷰에서, 중국 노동 보수가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83년 56.5%의 최고치를 기록한 후 계속 떨어져, 2005년에는 36.7%까지 하락했다고 밝혔다. 다시 말해, 22년 동안 약 20%가 떨어진 것이다. 이에 재정부는 수치가 심각하게 저평가됐다며, 관련 내용을 부인했다. 이후 사회과학원이 ‘사회청서: 2013년 중국 사회 형세 분석 및 예측’에서 발표한 데이터를 근거로, 중국 노동자 보수가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4년 50.7%에서 2011년 44.9%로 떨어졌다고 밝혔다.(미국은 약 10년 동안 58~60%이다.) 2. 자본 보수가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증가하고 있다 장젠궈는 같은 인터뷰에서, 1978년부터 2005년까지 노동 보수의 비중이 계속 하락한 것과는 반대로, 자본 보수가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 상승했다고 지적했다. 단, 자본 보수가 GDP에서 얼마나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베이징대 CCER 중국 경제 관찰 프로젝트팀은 ‘경제 전환 성장과 자본 수익률의 변화 - 중국 개혁개방 시기 자본 수익률 예측(1978~2005)’ 보고서에서, 자기자본을 자본금으로 삼아 계산할 경우, 1998년부터 2005년까지 총 자본수익률은 6.8%에서 17.8%로 상승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 연구자들은 보통 다음 몇 가지를 지적한다. 1. 정부의 자본수지가 자본소득을 명확히 강화해주는 작용을 했다. ...
네 번째 난관: 채무 수렁에 빠진 지방 정부 중앙 정부는 지방 채무 위기가 지방 재정 위기로 이어질 수 있어 속을 태우고 있다.외국 투자은행에 따르면 중국의 총 채무 규모는 재작년 중국 GDP 총량의 168%(내가 이 연설문을 쓸 당시 맥킨지 글로벌 연구소 5월 8일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의 총 부채는 이미 국내 총생산(GDP)의 282%에 달했다)에 달한다. 이 중 소량만 개인 채무이고 대부분은 정부 부채와 기업 부채이며 그 중 지방 정부 부채는 20조 위안으로 가장 높았다. 여기에 이야기가 하나 있다. 이전에 보고한 18조 위안은 관리들이 자신의정치적 실적을 고려해 축소 보고한 것이다. 10여개 도시를 돌며 조사를 진행한 국가발전개혁위원회 관계자 리타이(李鐵)는 “상부에 보고한 지방 채무 액수(18조 위안)는 실제 채무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며, “어떤 지방은 10%, 20%, 30% 보고했다. 상부에 보고한 액수가 실제 채무의 50%를 초과하는 곳은 거의 없었다”고 밝혔다. 따라서 18조 위안은 실제 채무의 30~50%에 불과하다. 이에 대해 중앙 정부는 2014년 9월 ‘제43호문’을 발표, 2015년 1월 5일 전까지 지방 정부 채무를 사실대로 보고하라고 요구하며, 중앙에서 지방 채무 일부를 상환할 것을 암시했다. 이후 거짓 보고를 하거나 축소 보고한 지방 정부는 희망을 감지하고 성실히 보고했고, 하이난 성에서는 채무를 공시하기에 이른다. 결과 지방 채무가 순식간에 폭증했다. 갑자기 불어난 지방 채무에 놀란 중앙 정부는 전체 지방 채무를 20조 위안으로 한정하며 다시 보고하라는 공문을 발송했다. 지방 정부가 신고한 20조 위안의 채무를 중앙 정부가 일부 부담하고 시장에서 일부 책임을 지고, 나머지는 지방 정부와 성 정부가 부담한다. 쉽게 말해 지방 정부에 빚을 떼인 사람들의 집단 시위가 일어나면 성에서 상징적으로 일부를 부담해 사건을 무마하는 식이다.지방 정부가 토지 이외에 새로운 수익 모델을 찾지 못하자 이 거대한 재정 위기는 중앙 정부의 골치거리로 남았다. 다섯 번째 난관: 금융위기 금융 위기의 주요 원인은 재정 위기에 더해 증가하고 있는 대손비율, 과다 발행한 화폐로 인한 유동성 증가다.은행 대손부터 말해보자. 현 상황은 개혁 이후, 부동산 나쁜 부채로 인한 세 번째 대손(貸損) 피크다. 첫 번째는, 주룽지 시대에 있었다. 중국 정부는 1998년부터 1700억 달러를 처리하는 데 6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대손을 일부 처리하면 더 많은 새로운 대손이 형성돼 중국 은행의 해외 상장을 가로막았다. 이후 중국 정부는 네 개의 국유 자산 관리 회사를 설립했고 이 부실 자산 즉 대손을 분리한 후, 이들 회사로 넘겨 영향을 주지 않게 처리했다. 이중 일부 부실 자산은 외국계 투자 회사에 매각했다. 이들 외국계 투자사들은 미스터리 한 중국의 금융 시스템을 파악하기 위해 부실 자산을 매입했다. 두 번째 위기는 원자바오 시대에 발생했다. 은행 대손이 8000억 달러 이상 쌓이자 미국 증권 시장의 ‘사베인-옥슬리 법안(Sarbanes-Oxley Act, SOX, 연방 증권법)을 통과하기 위해 중국은 명성이 좋은 안에이나 프라이스 워터하우스 쿠퍼스 등 여러 미국 평가기관의 도움을 받았다. 당시 미국 증권감독관리위원회 수장은 정치인 콕스였다. 그는 중국에 대한 호감이 없어 엄하게 점검했다. 이 미국 평가 기관들은 감사 과정에서 형편없는 중국의 은행 시스템을 접하고, 월스트리트 대신 홍콩 상장을 권유했다. 중국은 스위스은행, 시티뱅크, 뱅크 오브 아메리카가, 싱가포르 테마섹 홀딩스 등 10여 개의 외국 은행과 전략적 투자 관계를 맺었다. 중국 4대 은행은 이 협력 동반자 포장을 거쳐 홍콩과 중국 A주식 시장에 상장했고 인기를 끌었다. 이러한 주도적인 상장은 한동안 A주식 시가 총액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많은 자금을 흡수한 외국 은행은 주머니를 가득 채우고 2007년 이후 점차 탈퇴했다. 중국 정부의 은행 대손 처리 능력에, 외국 동업자들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2008년 미국 금융 위기 이후 유럽과 미국은 어렵게 대처했다. 미국 조차도 마지막에는 몇 백 년 된 은행 리먼 브라더스를 파산 하게했다. ‘월 스트리트 저널’의 한 칼럼리스트는 중국 정부가 은행 대손을 처리한 방법에 관한 조롱 섞인 글을 기고했다. 그는 기사에서 ‘중국 공산당을 초대해 월가의 금융 위기를 해결해야 한다’고 썼다. 자산 회사를 설립하고 은행 대손을 분리해 대손을 회사와 은행 장부에서 몇 차례 돌린 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한다. 그리고 중국의 화폐 초과 발행에 대해 말해보자. 중국은 30년 가까운 경제 성장의 중요한 수단 중 하나는 통화의 과다 발행이다. 최근 중국은 ‘세계 최대 화폐 발행기’가 됐다. 2003~2013년 동안 본원통화는 인민폐 88조 위안 증가하고 외화 자산은 3조 4000억 달러 증가했다. 투자 전성기에, 슈퍼 통화의 부정적인 영향은 명확하지 않았다. 최근 몇 년 동안 투자가 둔화되자 국내 저축이 증가하고 유휴 자금이 증가해 유동성의 어려움을 가중했다. 탕감 수단이 매우 적기 때문에 중국의 금융 정세에 정통한 저우샤오촨(周小川) 중국중앙은행 총재는 마침내 상쇄 방법을 생각해냈다. 이것이 바로 그가 2010년 11월 새로운 금융 정상 회담에서 제출한 ‘웅덩이 이론’이다. 대의는 단기 투기성 자본 즉 핫 머니 유입을 대응하기 위해 홍수 제방을 보강해야 하고, 이미 국내로 들어온 핫 머니에 대해서는 좋은 저수지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우샤오촨이 정의한 ‘웅덩이’는 도대체 무엇인가? 통속적으로 말하면, 하나는 부동산인데 부동산으로 웅덩이를 만들어 유동성을 가두어 두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치솟던 중국의 주택 가격이 세계 가장 높은 랭킹에 오른 원인이다. 한 전문가는 베이징 한 지역의 부동산을 환금하면 미국 전체를 살 수 있다고 농담했다.중국은 이제 부동산이 안 되니 주식으로 웅덩이를 만들어 유동성을 가둔다. 일단 증시가 하락하고 시가가 증발하면 유동성이 크게 줄어든다. 중국이 많은 지폐를 발행했지만 기본적인 생활 용품은 인플레이션 율이 높지 않은 것 같다. 주요 원인은 소비자물가지수(CPI)에 부동산이 계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부동산 가격이 소비자물가지수에 포함된다. 부동산 가격을 소비자물가지수에 포함할 경우 중국의 인플레이션율은 매우 높아질 것이다. 이제 부동산 시장의 침체되니 주식 시장을 웅덩이로 사용해 증시의 폭등과 폭락이 당분간 금융 위기를 해소할 것이다. ...
오늘 운 좋게도 아름다운 밴쿠버에 왔다. 나 같은 ‘반혁명’ 분자가 이곳에서 공개 연설할 수 있게 허락한 주최 측과 밴쿠버 중국 영사관에 감사드린다. 뉴욕에서 공개 연설을 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내 강연 소식이 들리면 뉴욕 중국 영사관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 방해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펜실베이니아대학 강연은 2차례 취소됐고, 학생 회장까지 쫓겨났다. 내가 오늘 강연할 제목은 ‘중국 경제발전이 직면한 6대 난관’으로 여러분에게 중국의 경제 기반에 대해 알려줄 예정이다. 중국의 미래는 ‘이 6대 난관을 돌파할 수 있느냐’와 연관된다. 먼저 좋은 소식을 말해 보자. 2014년 중국은 GDP 총량 1조 달러 클럽에 들어섰다. 이 클럽의 멤버는 미국과 중국 둘뿐이다. 이에 중국 정부는 크게 내색하지 않으면서도, GDP 총량은 일본을 추월한 이후부터 줄곧 2위라며, 중국 GDP가 과장됐다는 일부 국제세력의 주장은 음모라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의 통계는 중국 국가통계국이 제공한 데이터를 기초로, 구매력 평가법에 따라 산출한 것이다. 즉, 자신이 제공한 데이터로 이런 결과가 나왔으니, 다른 사람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 첫 번째 난관: 세계 공장 지위의 몰락과 산업구조 조정의 어려움 중국은 2001~2010년의 10년 동안 ‘세계 공장’으로서 번영을 누렸지만, 결국 헤어날 수 없는 침체에 빠져들었다. 최근 보도를 보면, 세계 공장의 대표 지역인 둥관에서 두 번째 기업 파산 열풍이 불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지난 1년 동안 기업 4천여 곳이 문을 닫았다. 사실 세계 공장의 몰락은 2008년부터 시작됐다. 2008~2013년의 공개 데이터를 보면, 둥관에서 문을 닫은 기업은 7만 2000곳에 달했다. 노동집약형 산업이 대부분인 둥관에서 기업이 대량으로 도산한 것은 생태환경과 노동자의 생명 비용을 과도하게 소비하는 중국의 경제성장 모델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 중국 경제성장을 이끈 삼두마차는 투자, 무역, 내수였지만, 현재 이 삼두마차는 일찍부터 모두 멈춰버렸다. 올 일사분기 무역 성장속도는 지난해 동기 대비 15% 하락했는데, 이는 무역이라는 마차가 더 이상 중국 경제성장을 이끌지 못하며, 다른 출구를 찾아야 한다는 걸 뜻한다. 과거 20여 년 동안, 부동산은 줄곧 중국 경제성장을 선도한 대표 산업이었다. 하지만 거품화된 부동산 산업은 지지난해부터 정체 상태에 이르렀고, 부동산 시장의 하락을 막으려는 정부와 기업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산업을 이끌던 제조 및 관련 서비스 산업은 전면적인 생산 과잉 단계에 빠졌다. 부동산 산업과 가장 밀접한 철강업, 시멘트업의 경우 과잉 생산량이 30%에 달하고, 거리가 비교적 먼 마루, 가구, 방직업 등 산업도 심각한 과잉 상태에 놓였다. 이러한 과잉 생산 위기는 핵폭탄처럼 언제든지 경제를 폭발시킬 수 있다는 의미에서 ‘중국 경제의 핵위협’으로 비유된다. 이 때문에 중국은 ‘일대일로’ 계획 추진,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설립 등을 통해 생산 과잉분을 대외에 내보내려고 한다. 하지만 이 계획에 포함된 수십 개 나라가 대부분 국가 신용이 좋지 않은 나라이며, 중국이 다른 나라에 진행한 투자도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높아, 계획의 성공률은 매우 낮아 보인다. 앞서 말한 문제는 중국의 경제구조 조정이 희망이 없음을 보여준다. 소위 경제구조 조정은 정부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난 2005년 광둥성은 ‘등롱환조’ 정책을 실시해, 노동집약형 산업을 도태시키고, 기술집약형 하이테크 산업을 끌어오려 했다. 그 결과 낡은 새는 새장을 떠났지만, 새로운 새는 들어오지 않아 새장만 텅 비게 됐다. 그 결과 주장 삼각주 산업이 공동화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두 번째 난관: 방대한 실업 대군 세계 최대 인구 대국인 중국에서 실업문제는 줄곧 중국인의 머리에 놓인 검과 같았다. 내가 10대였던 문화대혁명 시기, 중국에는 심각한 실업문제가 있었다. 당시 도시 청년들은 강제로 하방 당했고, 이를 피하려면 일자리를 찾거나 입대해야 했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이 세계 공장의 번영기에 들어섰어도 실업인구는 여전히 대량으로 존재했다. 예를 들어 당시 농촌의 잉여 노동력은 1억 명을 초과했다. 오늘날 세계 공장이 쇠락하면서, 실업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중국 정부가 발표한 도시 등록 실업률은 오랫동안 4.5%를 넘지 않았지만, 이 데이터로는 중국의 실제 실업 상황을 설명할 수 없다. 첫째, 이 데이터는 정부 부서에 등록된 도시 인구만 계산했을 뿐 미등록 인원은 포함하지 않았다. 둘째, 도시 등록 실업률에는 농촌 실업인구가 배제됐지만, 농촌의 과잉 노동력 수도 매우 방대하다. 따라서 이 두 가지 통계 데이터가 배제된 것은 그 자체로 심각한 누락이라 하겠다. 현재 중국의 실업 대군은 총 네 가지 분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농촌의 과잉 노동력이다. 세계 공장의 도산으로 대규모 농민공이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실업 현상은 더욱 심각해졌다. 둘째는 외자기업 종사자이다. 외국 자본이 대규모로 중국을 빠져나가면서, 소득이 높던 외자기업 종사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셋째는 실업 대학생이다. 대학생은 학교에 취업증명서를 제출해야 졸업장을 받을 수 있다. 이에 학생들은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부모나 친척 회사에서 가짜 취업증명서를 발급받는다. 결국 학교에서 제공하는 취업률은 완전히 의미를 잃었다. 넷째는 도시에서 초중고를 졸업한 후 오랫동안 집에서 일자리를 기다리는 청년들이다. 중국 언론은 이들을 컨러오주(캥거루족)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중국에는 얼마나 많은 실업자가 있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데이터를 참고할 수 있다. 원자바오 전 총리는 2010년 3월 중국발전 고위층 포럼에서 “중국의 실업인구는 2억 명”이라고 공개 선언했다. 또한 린이푸 전 세계은행 부총재는 올 1월에 열린 2015 동계 다보스 포럼에서 “임금 상승으로 인해 제조업 일자리 1억 2400만 개가 다른 개도국으로 이전했다”라고 밝혔다. 현재 중국의 노동인구가 9억 4000만 명이니, 실업인구를 3억 명으로 추산하면 실제 실업률은 32%에 달한다. 이렇게 높은 실업률은 통치 집단과 민중 사이의 ‘빵 계약’이 이미 효력을 잃었다는 걸 뜻한다. ‘빵 계약’이란 독재 통치자가 국민을 압박해 선거권, 신문 및 언론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등 정치적 권리를 ‘양도’받는 대신, 국민이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보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오늘날 높은 실업률은 중국 국민이 권리도 찾지 못하고 빵도 얻지 못했음을 뜻한다. 어떤 나라라도 이렇게 높은 실업률에 직면하면 매우 골치 아픈 문제가 될 것이다. 세 번째 난관: 심각한 자원 위기, 심화되는 대외 의존 중국의 환경오염은 매우 입체적이다. 육(토지), 해(강, 하천, 호수, 바다), 공(공기)이 모두 심각하게 오염됐고, 이와 관련된 자료도 많다. 그중 자원 위기를 예로 들면, 중국의 경제발전은 심각한 자원 속박에 직면했다. 원재료를 생산하는 각종 광물이나 생필품을 구성하는 식량 모두 대외 의존도가 심각하다. 중국은 ‘경제의 혈액’이라고 불리는 석유를 현재 60% 이상 수입하고 있다. 철, 동, 아연 등 각종 금속 광물의 대외 의존도도 비교적 높다. 즉, 중국 경제의 안전은 외부 요소에 심각하게 의존한다는 것이다. 백성은 음식을 하늘로 여긴다고 하니, 식량을 예로 들어 보자. 중국의 농업인구는 전체 인구 중 60%이지만, 식량 자급률은 2014년에 이미 87%로 떨어졌다. 콩, 옥수수, 보리 등 주요 곡식은 모두 수입에 의존한다. ...
2016년은 대만에 대선이 열리는 해이다. 선거 전 대만 정계의 동향이나 민심을 살펴보면, 통제 불가능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한, 차이잉원 여사가 거의 당선될 것으로 보인다. 진짜 문제는 대만에 대한 중-미 양국의 정치적 입장이 선거 전이나 당선 후에도 대만 좌우 정치의 향방을 결정하는 주요 요인이라는 점이다. 민진당의 대만 정계 복귀 전망 현재 대만에서 가장 큰 정치 세력은 국민당과 민진당의 양당 세력이다. 2014년 11월 ‘구합일’ 선거에서, 국민당은 정치적 기반을 크게 상실했고, 주리룬만이 5대 도시 시장 선거에서 유일하게 승리했다. 이 때문에 주는 국민당 주석으로 선출됐다. 하지만 정세를 잘 아는 주리룬은 여러 차례 2016년 대만 총통 선거에 나서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는 물론 어려운 선거를 피하려는 의도이다. 2016년 대만 총통 선거는 차이잉원 민진당 주석이 독주할 것으로 보여, 국민당 총통 후보는 그저 아무 승산 없이 ‘들러리’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민진당이 대만 정계에 복귀하고, 차이잉원이 미래 대만 총통이 되는 상황에 대해, 베이징과 워싱턴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의견을 나눴을 것이다. 이는 미국재대협회(AIT)의 전 고위임원 두 명이 연이어 한 말에서 알 수 있다. 시진핑은 베이징에서 주리룬과 정상 오찬 회담을 가졌다. 우선 그에게 위로의 뜻을 전하면서, 민진당에 베이징이 누구를 ‘자신의 사람’으로 여기는지 보여주면서, 내년 대선 형세를 바꾸는 데 많은 도움을 주지 않을 것을 드러냈다. 대만해협 관계 중 미국 요인 대만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보통 미국재대협회(AIT) 관료를 통해 비공식적으로 드러난다. 올 3월 하순, 전 AIT 관료 두 명이 연이어 동일한 입장을 표시했다. 한 명은 미-대만 사무를 오랫동안 주관해 ‘대만통’이라고 불린 바바라 슈레그 여사이다. 3월 21일, 그녀는 보수적 싱크탱크인 ‘헤리티지 재단’에서 주최한 미-대만 관계 토론회에서 2016년 민진당이 대선에서 승리할 상황에 관해 이야기했다. 과거 몇 개월 동안, 베이징 지도층은 ‘9·2 공동의식’과 ‘하나의 중국 원칙’에 대해 점점 강경한 입장을 표하고 있다. 이는 민진당과 차이잉원 당 주석뿐 아니라 대만 전체 국민에게 내보내는 경고이다. 그녀는 “미국도 민진당 총통 후보의 양안 정책을 매우 주시하고 있다. 이는 대만 해협의 안정 국면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미국은 매우 근본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슈레그는 차이잉원에게 중국 정책을 명확히 밝히라고 요구했다. “내년 대전이 있기 전, 대만 민중은 민진당이 선거에 승리할 경우 양안 관계를 어떻게 처리할지 알 권리가 있다. 미국은 대만의 민주 절차에 개입하지 않지만, 양안이 지속적으로 협력하는 게 미국 이익에 부합한다. 따라서 미국 행정부는 양안의 대립을 축소할 중국 정책을 만들도록, 차이잉원을 포함한 민진당 지도층에 압력을 넣으려고 한다.” 이와 동시에 슈레그 여사는 베이징에도 경고했다. “베이징 당국은 어느 정도 언행을 자제해야 한다…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는 불필요한 행동은 부작용을 낳을 것이다. 베이징도 민진당이 승리할 경우 어떻게 대처할지를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 쌍방의 긴장 관계가 대만 해협의 안정을 해친다면, 모두에게 해가 될 것이다.” 더글러스 폴 카네기 국제 평화 기금 부원장 겸 미국재대협회(AIT) 대북사무처 전 처장은 3월 24일 워싱턴에서 열린 ‘아태지역에서 대만의 경제적 역할’ 토론회에 참석한 후 기자 인터뷰에서 동일한 견해를 밝혔다. 이에 대해 차이잉원 민진당 주석은 “민진당은 미국 정부에 이를 확인했으며, 퇴직한 관료의 말은 미국 정부의 입장을 대표하지 않는다”고 응답하면서도, “폴이 언급한 양안 관련 상황을 모두 들었다”라고 답했다. 차이잉원의 이 말은 부드러움 속에 강인함을 담고 있다. 베이징과 워싱턴에 어떻게 응대할지는 실제로 민진당과 차이잉원에게 매우 어려운 일이다. 중국에 융통성 있게 접근해야 중국과의 관계와 이해 면에서, 대만의 양대 정치 세력은 각각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국민당은 베이징과 너무 가깝고 민진당은 거리가 너무 멀다. 국민당은 너무 가까웠기 때문에 눈앞의 이익(특히 개인 이익)에 쉽게 이끌렸다. 그 결과, 베이징은 대만 언론을 적색으로 물들이고, 곧이어 서비스 무역 협정을 준비하면서, 하마터면 눈앞의 ‘평화통일’이 사라지고 대만의 민주제를 잃어버릴 뻔했다. ...
중국 증시가 강세를 지속하는 가운데, 개인 투자자들이 끊임없이 증시에 뛰어들고 있다. 그들에게 증시의 교훈을 다시 일깨우고 싶지만, 그저 인심만 잃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투자자들에게는 ‘증시의 성패를 좌우하는 건 원래 정보’라는 사실과 정부에게는 ‘정부의 손이 만능이 아니며, 주사위를 던져 타인의 빈부를 결정할 때, 국가 경제의 방향이 왜곡되고 있다’라는 사실을 말이다. 정책 증시의 특징: 내부 정부가 주식의 신을 만든다 중국 증시는 정부가 이끌고 있지만, 정부 기관과 증시 거물들이 내보낸 소식이 종종 증시를 출렁이게 하는 근원이 되곤 한다. 정보의 유포와 전달에는 차등성과 시기성이 존재한다. 따라서 적시에 정보를 파악해 반응하느냐에 따라, 증시에서 수많은 투자자의 성패가 좌우된다. 정보 유포의 정점에는 정부 및 기관 투기꾼들이 있다. 이 기관들은 중국 증시를 움직일만한 자금을 보유하고 있다. 그들이 증시에서 매매를 진행할 때면, 종종 미리 획득한 내부 소식에 따라 생사가 결정되곤 한다. ‘중국 증시를 흔들려면 얼마나 많은 자금이 필요한가’라는 글을 보면 여러 가지 예시가 나와 있다. 이 기관들은 정책 동향을 분석하는 전문 인원 외에 정보 수집을 전담하는 전문 홍보 인원도 육성한다. 그들은 중국 증시의 ‘번영’이 정부의 손에 의존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정부의 손의 조그마한 움직임(즉, 새로운 정책 추진)도 놓치지 않고 분석한다. 예를 들어, 올 양회 기간 중 저우샤오촨이 증권과 관련된 연설을 하자, 그들은 곧바로 의도를 파악했다. 4월 중순 증시가 과열돼, 상하이, 선전 양 증시의 거래량이 1.3조~1.5조 사이가 되자, 전문 분석가들은 ‘정부가 증시의 온도를 낮출 것’이라고 예상했고, 4월 19일 지급준비율이 인하됐다. 그 결과 20일 상하이, 선전 주가지수가 크게 요동쳐, 종가가 1% 이상 하락했다. 하지만 정부 및 기관 투기꾼은 이런 분석보다 증권관리감독위원회나 상장기업의 내부 소식을 더 중시한다. 증시 감독을 맡은 관료는 종종 공과 사에서 모두 이익을 챙긴다. 그들은 증시를 감독하는 임무를 담당하는 동시에, 일반 투자자보다 먼저 얻는 중요한 내부 소식을 통해 자신 또는 친지가 부당한 이익을 챙긴다. 감독 부문의 공무원이 법을 위반한 사례는 대단히 많다. 2014년 11월 중국 증권관리감독위원회, 공안부, 국유자산감독관리위원회는 공동으로 ‘내부거래 경고, 교육전’을 개최해 상하이, 광둥, 선전, 샤먼 등에서 연속 전시회를 열었다. 그들은 내부거래를 한 일부 관료들을 조사했지만, 추문이 퍼지는 걸 막기 위해 오히려 혐의를 지닌 수많은 관료를 이직시켰다. 이들은 증권관리감독위원회를 떠난 후 종종 펀드회사나 증권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기업들도 이들을 흔쾌히 받아들였는데, 예전에 진 신세를 갚는 동시에 그들이 증권관리 기관에서 맺은 인맥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상장기업의 내부 소식도 매우 중요하다. 2014년 리젠거 선인완궈 이사장(국무원 계통에서 장기간 근무)은 상장기업이 회의할 때마다, 일부 감독기관에서 인원을 파견해 이사회 회의에 참석한다고 공개적으로 폭로했다. “그들은 회의에 참석하는 도중 화장실에 간다. 화장실에 가기만 하면 증시가 요동친다.” ‘화장실에 간다’는 말은 회의장을 빠져나와 전화로 내부 소식을 흘린다는 것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런 회의에는 감독기관뿐 아니라 현지 금융기관에서도 사람을 보내고, 갖가지 이유로 참석하는 사람이 많아, 뒤에 앉은 사람이 이사회 인원보다 더 많다고 한다. 그들이 상장기업의 이사회에 이렇게 관심을 갖는 이유는 뭘까? 그 이유는 이사회가 상장기업의 주요 정책결정 기구여서, 회사 경영과 발전에 관한 주요 문제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사회는 사업 비밀과 증권 거래와 관련된 내부 소식을 다루기 때문에, 이사회에서 결정된 내용은 해당 기업의 주가 추세 및 투자자의 이익과 직접 연관돼 있다. ‘기업법’과 ‘증권법’에는 정부 관료가 이사회에 참석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이는 명백히 권력을 남용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정책 증시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인맥 자원은 내부 정보의 품질과 수량을 결정하며, 증시에서 승리자를 만드는 주요 자원이다. ...
최근 중국 증기가 반년 가까운 상승세를 보이며 계속 급증하고 있다. 각 언론은 이번 증시 급등에 연이어 찬사를 보내지만, 이것이 ‘정책적’인 상승이라는 걸 인정했다. 이는 경제적인 요인과는 무관하며, 경제적 지식으로 해석할 수 없다. 중국 증시는 경제와 무관하고 오직 정책과 연관되기 때문에, 국제 금융업계의 평론가는 그저 방관만 할 뿐 여기에 참견할 수 없다. 이 현상은 업계의 전문적인 분석을 완전히 뛰어넘기 때문이다. 중국 로직: 증시에서 세계 기업 순위를 바꾸다 사실 증시를 자극하는 정책은 일찍부터 몰래 실행돼 왔다. 상하이 지수는 지난해 10월 28일부터 반년 동안 72.8% 상승해, 전 세계 주요 자본시장에서 가장 큰 상승폭을 보였다. 중국 증시에서 ‘경제 펀더멘털이 탄탄하다’ 등의 말은 이미 퇴출당했고, 시가총액, 거래량만이 증시 번영을 나타내는 표지가 됐다. 아래는 최근 보도된 소식이다. ‘부동산기업 시장가치 증시와 함께 급등, 10대 기업의 총 규모 1조 위안 돌파’, 이 기사의 요점은 증시 강세에 힘입어 부동산 시장도 기세를 올린다는 것이다. “새로운 증시 정책이 연이어 계속되면서, 브랜드 부동산 기업의 증시 반응도 순조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기자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렇다. “전 세계가 중국 부동산 거품을 쓸데없이 걱정하고 있지만, 중국 정부가 통제하고 있어 문제없다. 현금화하기 힘든 부동산시장에 들어갈 수 있으며, 현금화하기 쉬운 주식시장은 더욱 들어갈 수 있다.” 예전에는 증시 수준을 보존하기 위해, 매매가 제한된 상장기업도 적합한 때에 해금됐다. 상하이, 선전 증권거래소의 안배로 올해 양 시장은 상장기업 115곳의 주식 매매 제한을 풀었고, 해금된 시가총액 규모는 2,500억 위안에 달했다. 이후 주가조작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증시 큰손들은 주가를 조작할 공간이 더욱 커지자, 일부 주가를 불시에 끌어올린 뒤 매매에 큰 수익을 올렸고, 개인 투자자들도 그 뒤를 미친 듯이 쫓아 매우 떠들썩했다. 2014년 홍콩 증시와 상하이 증시의 교차매매를 허용하는 ‘후강통’이 시행되자, 홍콩 증시는 중국 증시와 보조를 같이 했다. ‘홍콩 증시 급등으로 전 세계 기업 순위 변동, 건설은행 시가총액 모건스탠리를 앞서’라는 기사에서 중국 증시가 전 세계 기업 순위를 바꾸고 있다고 보도했다. 과거 1개월 동안, 홍콩 증시는 17.6% 상승해(누계), A주식을 제외한 전 세계 증시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거뒀다. 홍콩증시의 총 시가총액은 4월 10일 처음으로 3조 홍콩달러를 돌파해, 최고 기록을 세웠다. 홍콩 증시가 급등하자, 중국 건설은행의 시가총액도 모건스탠리, 페이스북, 셰브런을 초과했다. 기사는 “여기서 보듯이, 홍콩 증시의 급등으로 현재 전 세계 기업상승쉴위가 재편되고 있다”라고 밝혔다. 이 말을 살펴보면, 세계 경제는 이제 사이버 시대로 접어들어, 상장기업상승실제 실적은 중요하지 않고, 기업 주식의 시장가치가 얼마나 올라가느냐가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믿지 못하겠다면, 건설은행을 살펴보라. 내부 경영방식은 변하지 않고 부실채권도 여전히 많지만, 정부의 보조와 수많은 주식 투기꾼들의 지원 아래, 건설은행은 모건스탠리 등 저명한 국제 기업을 이미 뛰어넘었다. 증시 급등: 경제와 상관없이, 정부 지원 때문 이번 증시 급등은 중국의 각 경제 지표가 악화될 즈음에 일어났다. 4월 10일 발표된 데이터를 보면, 중국의 3월분 수출은 동기간 대비 1.5% 하락했고, 1사분기 GDP 증가속도는 지난해 4사분기의 7.3%에서 7%로 떨어져, 6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중국 언론도 이 점을 인정했다. “증시의 펀더멘털을 보면, 증시 강세의 근거와 로직을 찾기 어렵다. 거시적으로 볼 때 경제 성장의 둔화 압력이 더욱 거세지고 있다. 산업 방면에서는, 부동산, 철강, 자동차, 석탄 등 많은 산업이 불경기로 산업 이윤이 계속 하락하고, 산업 전체의 손실도 적지 않다. 기업 방면에서는, 기업 경영이나 영업이 크게 어려워졌다. 과거 호황이었던 금융업도 수익이 끊임없이 하락하고 있다. 경영상태가 모두 좋지 않은데, 증시는 무엇을 기반으로 호황을 맞는 걸까?” 해답은 간단하다. 정부가 개입해 움직이는, ‘정책적 강세’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7월, 중국 정부는 은밀히 ‘적극적인’ 증시 정책을 취했고, 10월 이후 강세가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정부의 증시 자극에 대해 그저 수군거릴 뿐이었다. 올해 3월 12일 ‘양회’ 기간 중, 한 기자가 저우샤오촨 중앙은행장에게 물었다. “통화완화 정책으로 늘어난 자금이 증시에 들어가면 어떡할 것인가?” 저우샤오촨의 대답은 이랬다. “자금이 증시에 유입된다고 해서, 실물경제를 지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또한 실물경제에 투입될 돈이 다른 쪽으로 세는 것도 아니다. 자금이 증시에 들어가는 것도 실물경제를 지원하는 것이다. 상장기업은 대부분 실업에 종사하기 때문이다.” 증시 문제에서 이렇게 명확한 태도를 보인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이는 중앙 정책부서가 증시 자극에 이미 합의한 것을 의미한다. 정책의 인도 아래, 중국 경제 관리부서 및 금융기구는 증시의 수문을 열어젖혔고, ‘국가대표’로 불리는 각계 사람들과 기관 자금이 연이어 증시로 들어왔다. 그중 금융기관이 적지 않았는데, 그들의 진입으로 수많은 사회 자금이 연이어 증시로 들어와, 현재의 ‘증시 강세’를 이끌었다. 약 보름 후, 중국 증시는 매일 1조 2천억~1조 5천억 사이로 거래도 세계 최고의 거래량을 기록했다. 사람들은 이것이 정책성 증시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저 돈만 벌 수 있으면 좋다고 생각해, 경제가 이끄는 증시이건, 정책적으로 조성된 증시이건 상관하지 않았다. 정책적 증시도 어쨌든 ‘강세’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중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증시 정책을 취한 것은 중국 증시 25년 동안 전례 없던 일”이라고 평가하지만, 이는 너무 보수적인 말이다. 더욱 사실적으로 말한다면, 인류 사회에 증시가 나타난 이후, 정책에 의지해 증시를 번영한 것은, 오직 중국 정부뿐이다. ...
최근 며칠 동안 중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비푸젠의 마오쩌둥 모욕 사건은 정부와 마오 좌파와 연합해 만든 강대한 압력 아래, ‘장본인’이 웨이보에 잘못을 인정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이에 마오 좌파는 날 듯이 기뻐했지만, 이 사건이 중국의 2중 언어 시스템이라는 함정을 열어젖혔다는 걸 알지 못했다. 일단 시범효과가 형성되면, 전체 중국인(마오 좌파 자신도 포함해서)은 언제 어디서든 이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중국의 ‘돤쯔문화(段子文化)’와 구소련의 ‘주방문화’ 난 비푸젠이 ‘지취위호산’을 부르는 동영상을 보았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는 중국의 식탁 돤쯔문화(段子文化)를 좀 더 발전시켰을 뿐이다. 혼자 1인 2역을 하면서 뛰어난 말과 노래 솜씨로 좌중의 손님들을 웃긴 것이다. 이러한 식탁 돤쯔문화는 1990년 중반에 형성됐다. 처음에 베이징에서 시작됐다가 크게 유행하자, 전국 각지에서도 이를 모방하기 시작했다. 선전의 일부 사장들은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돤쯔를 잘하는 사람을 회식에 부르곤 한다. 나도 여러 지역의 식탁 돤쯔문화를 경험했는데, 외지의 돤쯔문화는 베이징의 돤쯔처럼 생동감 있고 재미있으며 창의적이지 못하다. 돤쯔는 정치류, 외설류 및 유머류로 나뉜다. 정치, 경제 엘리트가 모이는 베이징에는 외설이나 유머보다는 정치류가 주를 이룬다. 관계가 좋은 사람끼리 모임을 가지면, 정치적 뒷이야기를 안주 삼아 하는 것이다. 사실 비푸젠이 노래한 것은 그리 특출한 것도 아니다. 1990년대 중후반, 내가 베이징에서 들은 마오쩌둥과 동료 혁명가들을 조롱하는 돤쯔는 더 심했다. 예를 들어 마오와 장칭이 연안 토굴에서 밀회한 일이나 주, 류, 저우 등이 몰래 엿들은 일, 덩샤오핑이 키가 작아 벽돌을 나르고 축사 흙을 날랐다는 것 등이다. 돤쯔를 하는 사람은 쓰촨, 후난, 장쑤 등의 사투리로 혁명 지도자들을 흉내 내 사람들의 폭소를 자아냈다. 장쩌민과 동료를 비꼬는 것은 더 많다. 예를 들어 5명의 상무위원을 ‘5자 치국(딴따라, 미치광이, 바보, 귀머거리)’이라고 놀리거나, 장쩌민이 클린턴에게 ‘위로는 천국과 통하고 아래로는 지옥과 통하는’ 휴대전화를 선물했다는 유명한 돤쯔도 있다. 사실 이는 ‘6·4 학살자’인 덩샤오핑이 지옥에 살고 있음을 풍자하고, 전화요금 명세서를 통해 중국이 바로 지옥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 돤쯔는 실로 예술이라 부를 수 있다. 많은 사람은 식탁 돤쯔문화가 소련의 ‘주방문화’에 중국 특색(외설)과 시대적 특징이 가미된 것으로 생각한다. 스탈린 통치 후반기, 소련에는 ‘주방문화’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공개 장소에서는 빈말과 거짓말만 늘어놓던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 가족이나 친구들과 주방에 모이면, 진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들은 각종 정치 뒷이야기를 전하며 현실의 각종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소련 시기 유명한 정치 유머는 대부분 ‘주방문화’의 산물이었다. 사회주의 정치의 위선과 몰염치가 만든 2중 언어 시스템의 함정 중국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두 가지 언어 시스템을 운용하는 데 익숙할 것이다. 즉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원칙적인 말, 상투적인 말, 거짓말을 하고, 가족과 친구 사이에는 진심 어린 말을 말하고, 일부 현실이나 주변 사물에 대해 자신의 진짜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는 중국 정부의 이데올로기가 현실과 심각하게 어긋나면서 일어난 부작용이다. 중국의 이데올로기 언어는 마르크스주의, 마오쩌둥 사상 및 사회주의제도를 굳건히 지지하고 드높이며, 이러한 사상이론의 인도와 사회주의제도의 보장 아래, 중국이 부유한 강대국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후 수십 년간의 중공 통치를 통해,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자신과 타인을 속이는 거짓임이 드러났다. 하지만 정부는 이를 인민 사상을 규범화하는 주요 도구로 삼고 사람들을 압박해, 초등학교 때부터 2중 언어 시스템 속에서 왔다 갔다 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시스템에 잘 적응한 사람은 공청단, 공산당에 입당해 앞날을 보장받고, 부정부패의 길로 들어섰다. 운이 더욱 좋으면, 멋대로 부정부패를 일삼아도 감옥에 가지 않고, 평생 부와 명예를 누렸다. 중공은 줄곧 거짓말로 마오쩌둥을 포장했다. 예를 들면, 마오쩌둥이 인민을 이끌고 제국주의를 무너뜨렸다느니, 가난한 자를 주인으로 만드는 구세주니 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1949년 이후 중공이 중국을 통치하면서, 잘된 일은 하나도 없었을뿐더러 오히려 중공 자신도 마주하기 어려운 어두운 일면으로 가득했다. 예를 들어 반혁명 진압, 반우파, 대약진, 3년 대기근, 문화대혁명, 6·4 등은 마오쩌둥이 이끈 중공이 만든 국가적 범죄이자 과오였다. ...
지난 30년 동안 중국 상인들이 정경 무대에서 만들어낸 이야기는 어떠한 소설보다도 더 기이하다. 또한 ‘장강의 뒷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는 것’처럼 그 물결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하지만 이 상인의 길이 얼마나 멀리 뻗어 있고 얼마나 큰 장면을 지탱하는지는, 그들이 중국 특색의 상업계에서 발휘하는 능력 외에도 그 배후에 얼마나 단단한 배경이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쓰촨 기업가 류한과 산둥 기업가 궈원구이는 각각 ‘정경유착’의 길을 걸었지만, 궈원구이는 자신의 배후 덕분에 해외로 도망쳐 공개적으로 도발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국내외 간첩업무를 주관했던 국안부 부부장 마젠은 이 신비한 권력 때문에 ‘정법 차르’ 저우융캉보다 더 거만했다. 정경유착 도구로 전락한 보안 권력 중기위가 마젠을 체포한 것은 사전에 결정을 내리고 취한 조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와 관련된 소식은 저우융캉 때와는 달리 반년이 지나서야 중국 언론에서 점차 보도됐다. 먼저 아들, 딸의 사돈 집안, 형제 가족들을 언급한 후 마지막에 그에 관한 소식을 폭로하는 식이었다. 마젠이 1월 9일에 체포된 후, ‘환구인물’ 잡지는 1월 16일에 ‘반간첩 활동을 총괄하던 마젠 부부장 낙마’라는 기사에서 그가 낙마한 배경에 대해 네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 첫째는 그가 리여우 베이다팡정그룹 전 회장의 체포와 연관됐을 가능성이다. 나머지 세 가지 가능성은 각각 링지화 연관설, 저우융캉 연관설, 지도층 담화 도청 등 불법 활동 참여설 등이다. 궈원구이의 이름은 재신망이 1월 16일에 발표한 ‘팡정 분쟁은 완화 국면? 숨겨진 투쟁은 더욱 격화돼’라는 기사에서만 언급되었다. 당시 기사에서는 팡정그룹과 정취안홀딩스 간의 복잡한 다툼을 소개한 바 있다. 당시 나는 이 기사를 읽고 ‘숨겨진 투쟁’의 진실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이후 3월 24일부터 국내 3대 언론은 이를 앞다투어 다루기 시작했다. 당일 QQ 재경은 ‘궈원구이와 그의 신비한 ’반고회‘’를 보도했고, 3월 25일 재신망은 ‘궈원구이의 고위관료 사냥기. 결탁에서 반목까지’를 발표했다. 3월 26일 재신망은 ‘궈원구이 폭로’를 보도했고, 3월 30일 재신주간은 ‘권력 사냥꾼 궈원구이’를 발표했다. 이 기사들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어지러운 상업계 갈등이 아니라, 궈원구이와 안전부서와의 관계였다. “관련 부서의 조사에 따르면, 마젠이 직접 관할하는 한 부서가 중국의 대형 경제 사건을 처리하고 기술적 수단을 동원할 권리를 가졌다고 한다. 마젠은 궈원구이와 안팎으로 협력해 보안 권력을 정경유착의 도구로 전락시켰다. 해당 부서의 많은 간부가 관련 조사를 받았다.” “궈원구이가 공격한 관료 중에는 ‘보안부문과 관련된’ 특수 인물들이 포함되었다. 이 때문에 그의 신비감을 더욱 커졌고 비즈니스 활동에 막대한 편이를 제공했다.” 자오궈싱 RFI 상하이 특약기자는 이 사건의 특이성을 날카롭게 간파해 ‘궈원구이 이야기 협정보기구 장악 논쟁’(3월 27일)을 보도했다. 그는 위에서 언급한 기사들을 축약해 이 사건의 핵심을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궈원구이 사건의 핵심은 반부패가 아니라 정보 권력의 재편성이다. 이번에 궈원구이 사건이 전면적으로 폭로되면서, 궈원구이의 정보부문 맹우인 마젠이 낙마했다. 새로운 집권자는 이를 기회로 정보부문을 깨끗이 정리하고 철저히 장악할 의도를 가지고 있다.” 이 내용을 보면 그가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 것을 알 수 있다. 마-궈 동맹의 ‘공격’ 마젠이 돈세탁 및 자금 유용에 궈원구이 한 사람만 이용하지 않듯이, 궈원구이의 배후도 마젠 한 사람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재신망은 ‘마젠은 궈의 가장 중요한 동맹 중 하나’라고 보도했고, 궈 자신도 “더 높은 지도자를 알고 있다”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기사에서는 마젠 이야기만 다뤘다. 재신이 보도한 ‘궈원구이의 고위관료 사냥기. 결탁에서 반목까지’를 보면, 마-궈 동맹의 시기와 맥락을 분석할 수 있다. 2006년 마, 궈가 동맹해 공격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궈원구이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기 시작했고, 매우 중요한 동맹을 기반으로 승승장구했다. 18대 이후 형세는 완전히 역전됐다. 궈원구이는 특수 신분의 비호를 등에 업고 상업계 적수를 강제로 복종시켰고, 자본 운용에 실패하자 자금을 맘대로 끌어왔다. 이때부터 그에 대해 빙산의 일각만큼 폭로됐다. 궈원구이는 3월 30일 남화조보와의 인터뷰에서 마젠과의 관계를 인정했다. 그는 마젠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며, “그가 없었다면, 오늘날 내가 없었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여기서 말한 ‘빙산의 일각’은 무엇일까? 아래의 재신 기사를 살펴보자.궈원구이가 류즈화를 고발한 사건에서 ‘궈원구이가 동원한 특별한 수단’은 바로 30분의 비디오테이프였다. 이 비디오테이프는 관련 부문의 특수 채널로 중난하이에 직접 전달돼 고위 지도층의 분노를 샀다. 이 특수 채널은 바로 마젠이 제공한 것이다. 그 결과 궈원구이는 2006년에 잃었던 모건 센터를 다시 찾아 사업에 전환점을 맞았다. 마젠의 힘을 빌린 무시무시함은 류즈화 같은 문관을 처리하는 데 있지 않다. 2008년 베이징 진촨광장 프로젝트에서 베이징 바오리와 분쟁을 겪을 당시, 결국 서로 화해하고 마무리한 것이 진정한 실력이라 할 수 있다. 베이징 바오리의 모기업인 중국 바오리그룹은 군수기업으로 이사장은 허핑 총장비부 소장이다. 그는 개국 공신인 허뱌오의 아들이자 덩샤핑 딸인 덩룽의 남편이다. 허는 2010년 이사장 자리에서 은퇴했다. 최고 명문집안의 기업을 상대로 ‘화해’를 이끌어낸 전략은 가히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전략은 ‘강호 전설’이 되어 궈원구이가 다시 한 번 비즈니스 적수를 물리치는 개선가가 되었다. ...
저우융캉이 공안부와 정법위 장악한 후 중국은 세계 최대 장기 이식 대국으로 성장 황제푸 전 위생부 부부장은 봉황 위성TV의 ‘공익중국’ 프로그램에서 사형수 장기 이식은 추악한 이익 사슬을 형성했으며, 저우융캉이 낙마한 후 이런 이익 사슬이 깨졌다고 밝혔다. 이 말이 전혀 근거 없는 건 아니지만, 정부가 저우융캉을 공개 재판하는 시점에 이렇게 ‘당을 반대하고 배신하는 집단’의 배후를 계속 언급하는 이유는 뭘까? 아마 이 사건의 저항이 매우 커서 이 정도로 계속 폭로하지 않으면 당내 고위층이 민중을 설득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저우-보와 사형수 장기와 시신 밀매의 관계 중공이 언급하기 꺼리는 추악한 실상 중 하나는 사형수의 장기를 이식하거나 사형수의 시신을 판매해 인체 표본으로 제작한 일이다. 사형수와 관련된 일은 모두 정법위를 거치지만 저우융캉이 직접 연관된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베이징이 저우융캉을 공개 재판한 것은 사형수에 대한 반(反)인류 행위를 처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또 다른 정치적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다음 내용은 ‘저우-보 반당 집단’의 주요 인물과 그들이 연관된 반인류 범죄를 분류한 것이다. 저우융캉, 2002~2003년 중앙 정치국 위원, 중앙 정법위원회 부서기, 공안부 부장 겸 서기. 2007~2013년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 중앙 정법위원회 서기(2012년 11월까지), 중앙 사회치안 종합처리위원회 주임. 확실한 사실은 저우가 공안부와 정법위를 장악한 전후, 중국이 세계 최대의 장기 이식 대국이 되었다는 점이다. ‘장기 기증의 미궁(남방주말 2010년 3월 26일)’이라는 기사에서 허샤오쉰 광둥성 중산병원 부원장은 2000년을 기점으로 중국의 장기 기증이 매우 증가했다고 밝혔다. “2000년 전국의 간 이식은 1999년보다 10배 증가했고, 2005년에는 다시 3배 상승했다.” 중국이 강대국 되기 위해선 생명 존엄성 되찾아야 장기가 부족해지자 사형수의 장기는 끊임없이 솟아나는 노다지가 되었다. 2002년 이전의 상황은 다른 사람이 책임져야겠지만, 2002년 이후의 상황은 저우융캉이 결코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보시라이, 1994~2000년 랴오닝성 부서기 및 성장 대리, 그는 행적이 랴오닝성과 다롄시를 벗어나지 않는다. 보가 다롄시 정계에서 결정권을 얻은 것은 대략 1989년 랴오닝성 다롄시 상무위원 겸 부성장에 취임한 이후부터이다. 1992년 보가 다롄시 시장 대리로 임명된 후 곧바로 시 서기 및 시장이 되자 다롄은 그의 영지가 되었다. ‘죽음의 의사’로 불리는 독일인 군터 폰 하겐스는 1999년 다롄에 하겐스 시신표본제작회사를 설립했다. 하겐스는 표본에 사용되는 시신을 누가 제공했는지 밝히기를 거부했지만, 중국 청년망은 ‘다롄 하겐스 공장, 사형수 시신으로 인체 표본 만든다는 논란 일어(2012년 8월 22일)’라는 보도에서 하겐스뿐 아니라 그의 경쟁 상대인 미국 최대 전시 기업도 인체 표본용 시신을 중국 파트너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고 보도했다. 이 기업은 공개적으로 “신체 및 인체 부위, 기관, 태아 및 배아가 중국 감옥에 수감되거나 처형된 사람에게서 나오는지는 독립적으로 조사할 수 없다”라고 밝혔다. 하겐스의 다롄공장은 2012년 2월 29일에 폐쇄됐으며, 폐쇄되기 20여 일 전인 2월 6일 심야, 왕리쥔이 미국 영사관으로 도주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이 일어난 후 보사라이의 정치 운명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이 사건은 누가 책임져야 하나 최근 중공이 선포한 ‘당을 반대하고 배신하는 집단’의 배후로 지목된 쩡칭홍은 위의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1999년 하겐스는 다롄에 하겐스 시신표본제작회사를 설립했다. 저우융캉은 그가 공안부 및 정법위에 취임하기 전에 일어난 시신 제공 사건과는 별다른 관련이 없다. 조사에 따르면, 중앙 정법위 서기는 1992~1998년 2월까지 런젠신이, 1998년 3월~2007년 10월까지 뤄간이 맡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중기위의 조사 명단에 있지 않다. 그렇다면 배후는 중앙 정법위의 상급 부서인 중앙서기처 책임자일 수밖에 없다. 당시 쩡칭홍은 1997~2007년 12월까지 중앙서기처의 실질적인 책임자를 맡았다. ...
스모그 문제를 다룬 CCTV 전 여성 앵커 차이징(柴靜)의 '돔 지붕 아래서(穹頂之下, 충딩즈샤)'는 매우 잘 만든 과학 다큐멘터리다. 숫자로는 관중들에게 직관적인 인상을 주지 못한다는 생각에, 차이징은 베이징대 실험실에 가서 직접 실험할 인원을 찾았다. 하지만 연구원은 실험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실험을 하려면 윤리 안전치를 설정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실험실의 공기가 외부보다 더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중국인의 생존 환경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는 중국의 공기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안다. 사회적 합의가 심각하게 파괴된 오늘날 중국에서 이 문제는 매우 쉽게 사회적 합의에 도달해야 한다. 하지만 차이징 다큐에 대한 논의를 보면, 중국 사회는 이미 어떠한 사회적 합의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쏟아지는 음모론 각종 비난이 쏟아지는 가운데, 그림 형식으로 널리 퍼진 짧은 문장은 음모론의 대표격이 되었다. “차이징의 다큐멘터리는 정부가 인터넷 여론을 이용해 민관 소통을 잘한다고 하는데 이는 좋은 일이다. 영상이 전하는 가치관도 매우 좋다. 다큐멘터리도 잘 만들었다. 일부 사람들은 차이징이 미래를 걱정한다는데 이는 전체 줄거리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1. 신임 환경보호부장이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2. 프로그램이 방영되자 인민일보 등 관영 언론이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3. 많은 현직 관료들이 인터뷰에 응했다. 4. 반부패 칼날이 중석화, 중석유를 향하고 있다. 5. 인터넷에 두 기업이 합병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6. 곧바로 양회가 개최된다.” 음모론이 성행할 때 가장 강렬했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차이징의 배후에는 지지 세력이 있으며, 그녀는 당국이 저우융캉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하는 체스 말이다. 중석유, 중석화 제품이 오염을 일으킨다는 것은 예전부터 있었던 문제이다. 오랫동안 현지 민중이 반대했던 PX 프로젝트도 사실 중석화, 중석유가 건설에 참여했었다. 당시 판웨는 대형 국유기업의 석유화학 건설 프로젝트는 적지 않은 오염을 일으키며, 강 근처에 건설할 경우 수질 오염을 일으키는 원흉이 된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스모그는 자동차 배기가스, 산업의 오염 배출, 겨울철 석탄 사용, 농촌의 연료 등 다양한 원인으로 발생한다. 따라서 <돔 지붕 아래>가 중석화, 중석유를 겨냥한 것은 사실상 막강한 힘이 발휘된 것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오염 사건을 보도하지 않던 관영 언론이 대거 참여한 것은 이 프로그램이 음모라는 것을 증명한다”라고 주장했다. 이는 명백한 오해이다. 지난 30여 년 동안 중국 관영 언론과 각종 민간 언론은 신분상의 제약이나 정치, 사회 문제에 대한 선호도 차이는 있었지만, 환경보호 문제에 관해서는 일정 수준의 보도 공간을 확보하고 열심히 소식을 전했다. 중앙급 언론은 지방 정부의 관할을 받지 않는 이점을 이용해, 지방의 환경보호 문제를 여러 차례 폭로했다. 당시 ‘타이후 수호자’ 우리훙이 일정 기간 활동할 수 있었던 것도 전국의 수많은 언론이 지지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차이징이 토지 오염과 수질 오염은 놔두고 공기 오염만 다룬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토지 및 수질 오염은 이미 여러 차례 보도된 바 있다. 예를 들어, 2006년 중국 정부는 10억 위안을 들여 토지 조사를 실시했지만, 국가기밀이라는 이유로 줄곧 공표하지 않았다. 하지만 언론의 압박에 밀려 2014년 4월 데이터를 공개했는데, 토지 중 5분의 1이 심각하게 오염됐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재신망은 <대국의 오염된 토지> 제목하에 <상편: 늦어진 보고>, <하편: 심각한 카드뮴 오염>을 보도했다. 차이징 다큐로 본 사회적 합의의 부재 알 권리는 사실 민중의 기본권 중 하나이다. 몇 년 전, 판스이가 베이징 주재 미국 대사관의 공기 데이터를 웨이보에 공개하자, 분개한 사람들은 환경보호국에 공기 데이터의 진실을 공개하라고 잇달아 요구했다. 그 결과 중국 외교부는 미국이 중국 내정을 간섭하고 있다며, 공기 데이터를 공개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당시 사람들은 토지 오염과 수질 오염은 지역적이어서 사람들의 관심이 같지 않은 반면, 공기는 모든 사람이 호흡하는 것이어서 집단행동에 나서기 매우 용이하다고 생각했다. 스모그 다큐멘터리를 촬영한 차이징은 지난 몇 년간 ‘정부에 협조적’이라는 비난을 받아왔다. 사회적 관점으로 보면, 이는 중국의 사회적 이익이 극단적으로 나뉘어, 이미 어떠한 사회적 합의도 이를 수 없음을 뜻한다. 특히 심각하게 주변화된 사회 집단은 ‘나와 상관없는 국가는 일찍 썩을수록 좋다’는 강렬한 ‘반발 의식’을 가지고 있다. 통치 계층과 이 집단 사이에는 ‘네 기회는 내 불행이고, 네 재난은 내 기쁨’이라는 극단적인 대립 국면이 형성돼 있다. 그 결과 차이징이 다룬 스모그 문제는 오히려 뒷전으로 밀려났다. 오염 관리는 오랜 기간이 소요되는 거대 공정이지만, 중국의 현대화 열차에서 떨어진 집단은 정부를 신뢰하지 않고 다시 기다려 줄 인내심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라 말기, 군주 하걸은 폭정을 일삼으며 자신을 태양에 비견했다. 그러자 살기 고달팠던 백성들은 태양을 가리키며 “태양은 언제 질 것이냐. 나는 너와 함께 망하리라”라며 욕을 퍼부었다. 하지만 이는 분노를 토한 것일 뿐, 사실 왕조가 망해도 백성들은 계속 살아가야 했다. 현 정권이 가진 특수한 문제는 신구가 교체된 후 중국은 이미 사회를 재건할 자본을 잃었으며, 생존 환경이 대규모로 파괴됐다는 것이다. 중국 오염의 정치적 책임에 관해서는 중국 생태계를 다룬 문장에서 모두 언급했다. 최근 발표한 문장은 <중국 오염의 공범 결탁-중국 2013 ‘경제개혁’의 초점(2)>이다. 환경 문제는 민주화로 자동 해결되지 않는다 ...
최근 중국 정부가 제품 구매 루트를 해외에서 국내로 돌리면서, 정부 구매 명단에 일부 해외 첨단제품이 빠지는 대신 중국 본토 제품이 많이 추가됐다. 이 때문에 중국 정부와 줄곧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시스코 등 외국 기업들은 초대형 고객을 놓치게 됐다. 이에 중국 여론은 국가 안전을 보장하는 중요한 조치라며 환호했지만, 사실 중국 정부의 진짜 목적은 안전 보장이 아니라 내수 진작에 있다. MS 등 외국자본이 잇달아 철수하고 수십 개 산업의 생산능력이 과잉되면서, 중국 내수는 줄곧 허약한 모습을 보였다. 만약 정부가 자국 기업에 주문을 내지 않는다면, 이는 스스로 동맥을 끊는 것이나 다름없다. 정부 구매와 주문 외교 중국 정부의 소비는 크게 국내와 국외로 나뉜다. 국외 소비의 경우, 2012년 이전 국제 정치의 수요에 따라 ‘주문 외교’가 자주 사용됐다. 이 정책은 특히 EU에 효과적이었는데, EU는 중국의 대규모 주문으로 생산이 증가하고, 실업률이 감소했으며, 기업 세수가 보장됐다. 그래서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은 베이징을 매우 선호했다. 정부의 구매 목록에 포함된 물품 중, 일부는 에어버스, 보잉기처럼 국내에서 생산할 수 없는 종류였고, 일부는 국내에서 생산할 수 있지만 외국 제품과 비교할 수 없는 조악한 품질이었다. 더욱 중요한 점은, 당시 중국 경제의 3두마차 중 투자와 수출이 호황이어서 중국 정부가 내수의 약점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국내 상황을 살펴보면 정부 소비도 매우 중요하다. 정부 자료에 따르면, 2000~2011년 동안 소비 수요가 GDP에 기여한 비율은 65.1%에서 55.5%로 낮아진 반면, 투자 기여도는 22.4%에서 48.8%로 높아졌다. 소비 수요 중 민간 소비는 2000년 74.5%에서 2011년 72.2%로 낮아졌지만, 정부 소비는 25.5%에서 27.8%로 높아졌다. 산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정부 소비가 민간 소비를 구축했다”고 평가했다. 2012년, 중국 경제학계는 정부 소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재신망의 <내수 원동력 왜곡, 정부 소비가 민간 소비를 잠식하다>라는 기사이다. 이 기사가 발표된 후 관련 자료는 더는 공개되지 않았고, 이후“최근 몇 년 동안, 정부 소비는 줄곧 13% 수준을 유지했다”는 내용만 광범위하게 인용됐다. 하지만 27.8%였던 정부 소비가 어떻게 13%로 감소했는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기관도 나서서 해명하지 않았다. 중국은 민간 소비를 끌어올려야 한다. 국가통계국이 2014년에 발표한 조사결과를 보면, 농촌 소비자 중 여유자금이 없는 소비자의 비율은 23.6%이고 도시의 경우에는 15.9%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가 구매 루트를 외국에서 국내로 바꾸는 것은 반드시 취해야 하는 조치이다. 또한 국내 기업이 제품 품질을 보증해 정부가 제공한 수요를 만족하게 할지 여부는 앞으로 기업의 생존과 직원의 취업이 걸린 큰 문제이다. 세계 제1의 관광 소비국 된 중국 중국은 내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중국인은 오히려 한·미·일 및 유럽 각국의 최대 소비자가 되었다. 통계 자료에 따르면, 중국인의 해외여행 소비 금액이 2011년 730억 달러에서 2012년 1020억 달러로 증가해, 미국, 독일 등을 제치고 세계 최대 해외여행 소비국이 되었다. 2013년 중국 관광객의 해외 출국 회수는 9819만 번이었고, 관광에 소비한 총금액은 1,287억 달러에 달했다. 2014년 해외여행 출국 회수는 1억 번을 넘었고, 소비 총액도 1648억 달러로 증가했다. 그중 한국, 일본, 홍콩이 중국 쇼핑관광의 주요 3대 지점이 되었다. 2014년 삼사분기, 중국 관광객이 일본에서 소비한 금액은 15.7억 달러로 외국 관광객이 소비한 총금액 중 3분의 1을 차지했다. 그들이 한국에서 소비한 금액은 일본보다 더 많았다. 2011년 27.58억 달러, 2012년 33.93억 달러, 2013년 40.62억 달러에 달했다. 중국인이 외국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카드는 인롄카드이다. 데이터에 따르면, 2014년 인롄카드의 전 세계 사용금액은 41.1조 위안에 달한다. 같은 해 중국의 추정 GDP가 61.15조 위안인 걸 생각하면, GDP의 3분의 2에 달하는 금액이 사용된 것이다. ...
지난해 중국은 화폐가 대량으로 풀리면서 화폐 공급량이 122조 8400억 위안에 달했다. 2013년 말의 110조 7000억 위안과 비교하면 11% 증가한 것으로 경제 성장률보다 높은 셈이다. 2014년에 신규 증가한 12조 1400억 위안 중에서 80% 이상이 대출에 사용됐고, 전년 신규 증가 대출액은 9조 7800억 위안에 달한다. 2013년보다 8900억 위안 증가했고 2009년의 9조 5900억 위안의 최고기록보다도 1900억 위안이나 높은 수준이다. 이렇게 증발된 많은 지폐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모두가 인정하는 한 가지는 대부분 대출금액은 실물경제가 아닌 비생산 영역 금융시장으로 유입됐다는 사실이다. 2014년 중국 주식시장 지탱한 ‘통화’ 지난 1월 24일, 중국 주식상장 회사 시장가치 관리 연구센터가 ‘2014년 A주식 연도 보고’를 통해 중국 국민들에게 두 가지 호재를 전했다. 한 가지는 작년 A 주식 시장 시장가치 총 규모가 37조 1100억 위안을 기록하며 일본을 뛰어넘어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큰 주식시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중국 증권화율이 58.3%(A주식 시장가치 37조 1100억 위안/GDP 총량 63조 6500억 위안)에 달하며 2013년 40.1% 증권화율보다 훨씬 높아 미국 증권화율에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필자는 찬물을 끼얹어야겠다. 중국 증권업계 인사들은 증권화율을 이용해 중국 주식시장 발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목표는 미국의 증권화율을 뛰어넘는 것이다. 이러한 수단은 두 가지 요소를 간과하고 있다. 첫 번째, 미국 주식시장은 전 세계 주식시장으로 시장가치는 전 세계 자본으로 위탁된다. 중국의 A주식 시장 자본의 근원은 주로 국내이며 위조 외자까지 더하면 국내에서는 각종 루트를 통해 내보낸 자금이 되돌아온 것이다. 두 번째, 미국 주식시장은 건전한 신용제도에 의지한다. 중국의 신용제도 결함은 비교적 많으며 각종 기만 수단이 따른다. ‘2014년 A주식 시장가치 관리 행위 연도 보고서’는 2014년 주식시장 조작 행위에는 세 가지 새로운 변화, 새로운 특징이 있고, 또 하나가 ‘시장가치 관리’를 핑계로 내외를 결탁, 주식상장 회사를 통해 주가 조작을 펼친다고 밝혔다. 국내 주식시장 운영 봉쇄와 기만행위가 만연한 상황에서 증권화율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주식시장의 거품이 크고 투기성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 찬물을 끼얹어야겠다. 금융권 개인 고객들은 속기 쉬운 사람들이다. ‘시장가치 연도 보고’ 자료에 따르면 2014년 상하이 선전 두 도시의 1284개 회사 핵심 주주와 고위관료가 소유한 주식은 모두 2218억 위안 감소했고, 그중 고위관료 보유분은 641억 위안 감소하면서 역사상 최저를 기록했다. 이러한 현금 바꾸기는 중앙기율검사위에서 머지않아 시작하려는 국유기업 반부패 정책에 대응하려는 움직임이다. 10여 년 전 국유기업 개혁 당시 적지 않은 국유기업 고위관료(그중 대부분이 리샤오린 등 혁명 후대)가 경영자 매수 방식을 통해 국유기업 주식을 획득했다. 또한, 자신의 자금이 반부패 정책 과정에서 수포로 돌아가지 않게 하기 위해 주식시장에서 현금 바꿔치기를 했다. 부채 악순환에 말려든 대량 화폐 2009년 4조 위안을 들인 경제부양책 실시 이후 수십 조 위안의 신규 증가 화폐가 인쇄됐다. 지방정부는 화통하게 자금을 소비했고 관료 집단은 대수롭지 않게 자금을 착복했다. 옥에 티는 지방정부 부채였다. 하지만 지방정부도 중앙정부가 절대 지방정부를 파산시키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지난 5일, 중앙기율검사위원회(중기위)는 여러 지역 여러 직위에 대한 순시 목록을 공개했다. 그 중 특히 국영기업 내 이권 및 인사 문제가 비교적 많았다. 국제방송국(國際廣播電台), 중국선박, 차이나 유니콤, 화전그룹, 둥펑자동차, 신화그룹 등 6개 기업 중에서 국내외 언론의 관심은 특히 차이나 유니콤의 부패 스캔들에 집중되었다. 그 원인은 차이나 유니콤의 배후에 귀공자 장몐헝(江綿恒)이 있기 때문이다. 이권의 중심, 상하이 연합투자 주식회사 2014년 12월 두 명의 차이나 유니콤 고위직 장즈장과 쭝신화가 조사받았지만 정작 외신의 관심은 장몐헝에 집중되어 있다. 그 이유는 차이나 유니콤이 2008년 장몐헝이 운영하던 중국망통을 합병하면서 탄생되었으며, 장몐헝이 차이나 유니콤의 실세이기 때문이다. 차이나 유니콤 합병 과정은 복잡하다. 그 중 주력인 중국망통은 2001년 남북전신의 스핀 오프 과정에서 여러 사업체를 재편성해 탄생했다. 장몐헝과 관련된 것은 상하이 연합투자 주식회사가 투자 창설한 라오왕통(老網通)이었다. 2001년 남북전신 스핀 오프 이후, 퇴출된 것은 장몐헝과 합작했던 IT 거물 티앤수닝(田溯寧)이었다. 장몐헝은 계열사를 순순히 양보하지 않았다. 장몐헝이 기업가가 되고 싶었던 열망을 미루어보자면 남 좋은 일을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장즈장과 중신화 두 사람이 장몐헝에게 인정받는 심복이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재신망에 따르면 최근 차이나 유니콤 사건은 이제 막 무르익었고, 중앙 순시조 순찰은 이미 종결되었지만 각종 고발은 여전히 차이나 유니콤 고위층과 언론을 향하고 있다. 장몐헝에 대해 소극적인 언론으로 인해 바이두 백과사전에 등재된 장몐헝의 이력은 매우 간략하다. 경제계의 거물에 대한 설명이 50 글자에 불과하다. 차이나넷센터, 상하이자동차공업, 상하이공항그룹회사 이사라는 이력이 전부이며 언제부터 이사직을 맡았는지도 나와 있지 않다. 문제는 위풍당당한 전 중공 총 서기의 아들이 과연 한낱 평범한 이사회 성원에 그쳤을까 하는 것이다. 장몐헝과 상하이 연합의 관계 2015년 1월 19일 북청망(北青網)은 ‘장몐헝의 인생 역할’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해당 문장에는 1994년 9월 상하이 연합투자 주식회사가 창립되고 장몐헝은 법인대표(법인대표 겸 이사장, 초임 사장은 양송 현 상하이 시장)가 되었다. 자료에 의하면 상하이 연합투자는 상하이 시 정부가 비준 성립한 국유 독자 주식회사로서 상하이시 국자위 소속이다. 투자 영역은 과학기술, 전신, 항공 등 여러 방면을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면 마이크로소프트 MSN, 상하이자동차, 상하이항공, 상하이공항, 상하이 은행, 봉황TV 및 중미 합자사인 동방몽 등이 있다. 이러한 산업의 배후에는 모두 상하이 연합투자의 그림자가 있다. 이 글에는 상하이 항공 주식 회사 2002년도 보고서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며 장몐헝의 신분은 해당 회사의 법인대표(통례적으로 법인대표는 이사장)였다. 新태자당, 자본시장으로 훙얼다이(紅二代)라는 말이 유행하기 이전에 중국 고위층의 자녀들은 외신에 의해 태자당이라 불렸다. 그 중 중공 정권 설립에 참여한 고위 간부의 자제들은 ‘노태자당’으로 분류되었다. 제 3, 4대 영도자의 자녀들은 신태자당이라 불렸다. 이 두 태자당의 재산 증식 방식은 달랐다. 후자의 경우 더욱 금융 영역에 집중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2010년 3월 29일 ‘금수저 물고 태어난 중국 태자당’이라는 기사에서 “장몐헝이 20세기 90년대에 상하이로 돌아가 외국 투자자들의 지지를 받았고 그들은 장몐헝을 가장 가치 있는 합자 파트너로 여겼다. 현재 그가 장악하고 있는 상하이 연합투자 주식회사는 운영상에 있어서 사모펀드인 정부 투자회사와 매우 유사하다”라고 표현했다. 이는 원자바오(溫家寶) 전 총리의 아들 원윈쑹(溫雲松)의 뉴호라이즌캐피털, 류윈산(劉雲山) 정치국 상무위원의 아들 류러페이(劉樂飛)의 시틱캐피탈 등 사모펀드와 비슷하다. 하지만 장몐헝의 상하이 연합은 이들보다 10여년 가량 빠르다. 즉, 자본시장에서 장몐헝은 신태자당의 개척자의 칭호를 받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장몐헝의 개척자 역할도 잊지 않고 서술했다. 장몐헝과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도 아들 주윈라이(朱雲來)는 현재 태자당의 전성기를 위한 전초 작업을 했다. 이들은 공산당 고위층 일가의 국가 통치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들의 행동은 젊은 1세대 태자당을 제지하지 않았고 그들의 돈주머니를 채워주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그들은 이런 현상이 공산당과 지도층에게 어떠한 부작용을 가져올지는 고려치 않았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사모펀드는 어디에 투자할까? 일반적으로는 영업 비밀이다. 그러나 최근 한 정보는 투자가 비슷한 지위를 가진 친인척에게 쓰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재신망의 2월 2일 기사 ‘안방대모험’에서는 상하이자동차그룹과 시노펙 그룹은 우샤오휘의 안방회사 최초 주주로서 초기에는 지분 20%로 1위 대주주로 자리 잡았다. 그 후 시노펙은 천퉁하이 사건이 일어나자 점차 약세를 보였고, 안방의 계속되는 주식 증자에 못 이겨 상하이자동차, 시노펙 그룹 주식은 희석되었다. 2011년까지 증자한 이후 상하이자동차의 점유 비율은 6.317%까지 떨어졌고, 시노펙은 2.817%까지 떨어졌다. ‘진둔’공정 핵심, IT 장악 ...
최근 종합보험사인 안방(安邦)그룹 CEO 우샤오후이(吳小暉)가 언론 보도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주간지 남방주말에 이어 지난 1월 29일에는 여러 매체에 보도됐다. 베이징의 재경, 재신, 북청주말도 모두 우샤오후이와 중국 최초 민영은행인 민생은행 마오샤오펑(毛曉峰) 은행장 등 경제계 거물에 대해 보도했다. 그중에서도 재신망의 ‘안방 대모험’이 제일 볼 만 했다. 덩샤오핑의 외손자는 옛말 2월 1일 남방주말은 “해당 언론사는 1월 29일 안방보험 보도와 관련해 실제와 다른 부분이 있으며, 안방보험 그룹과 주요 책임자들에게 사과를 표한다”는 성명을 게재했다. 1월 29일 보도 내용은 장장 4면에 걸친 관련 소식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실제와 다른 소식이 어떤 부분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남방주말이 압력을 받아 비로소 사과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재신망 ‘안방 대모험’ 기사와 비교해보면 남방주말 사과 성명의 이른바 실제와 다른 정보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아마도 우샤오후이와 덩샤오핑 외손녀 덩줘란(덩난의 딸)의 혼인 상태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재신망 기사는 생동감 있는 필치로 “우샤오후이는 3번의 결혼 경험이 있으며 두 번째 결혼은 저장성의 부성장 딸과 결혼했고, 세 번째 부인은 공산당 원로 천이(陳毅)의 아들 천샤오루(陳小魯)의 회사 투자 그룹에서 일할 때 우연히 만난 덩샤오핑의 외손녀이자 전 중국 과학기술협회 당조 서기 덩난의 딸 줘란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이 있었지만 최근 부부 관계는 틀어졌다. 2014년, 해외 언론은 안방과 덩 씨 일가의 관계에 대해 떠들자 덩 씨 일가는 안방 관련 사항에 대해 토론했고 덩 씨 일가와 무관하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서술했다. 해당 문장은 혼인 관계가 종결되었다는 또 다른 증거를 제공했는데 '안방그룹 31명 주주 중에 원래 2곳의 회사에 덩줘란의 간접적 주식이 있었지만, 2014년 12월, 덩줘란은 이미 이 두 곳의 주주 명단에서 빠졌다'는 것이다. 어쩌면 덩줘란이 주주에서 퇴출당한 시기가 그녀와 우샤오후이 혼인 관계가 끝난 시기일지도 모른다. 기사를 총괄해보면 우샤오후이가 경영에 불성실했다는 내용과 우샤오후이가 파벌 관계에서 발휘한 힘에 대해 ‘안방 대모험’ 보도가 서술한 사실은 두 가지다. 첫째, 우샤오후이는 이미 덩샤오핑 가문의 손자사위가 아니다. 따라서 우샤오후이의 사업은 덩 씨 일가의 사업이 아니다. 둘째, 정부가 어떻게 덩 씨 일가의 전 손자사위를 처리했는지도 덩 씨 일가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 세계의 입에 오르내리는 우샤오후이는 덩샤오핑의 손자사위 자리에 몇 년 있었고, 사건 발생 이후에 파국 사실이 재신망 보도로 밝혀졌다. 10년 전 기세등등한 철모자였던 우샤오후이가 원래는 원저우 상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 붉은색 망토가 벗겨지면서 안방보험의 실소유주로 지목된 천샤오루의 SNS 웨이보에 올라온 글보다 타격이 컸다. 라이창싱 사건은 자칭린 부인 린요우팡과 연루됐고, 소문에 의하면 장쩌민이 자칭린과 린요우팡 이혼을 유도했으며 이번에 덩줘란과 우샤오후이 혼인 종결 또한 전례와 같다. 덩줘란과 우샤오후이는 언제 헤어졌을까? 문장은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설령 혼인 체결에 이해가 깊은 천샤오루라도 1월 29일 남방주말 문장이 퍼진 이후 홍콩 빈과일보 인터뷰를 통해 우샤오후이는 덩샤오핑 외손녀의 사위라는 것을 증명했고 부자들의 대저택은 경비가 삼엄하여 일반인들은 출입하기가 어렵다는 점이 드러났다. 중국식 출세 모델 오샤오후이 수완이 좋은 우샤오후이는 결혼을 이용할 줄 알았다. 우샤오후이의 두 번째 결혼은 번데기가 나비가 되는 관건적인 단계였다. 저장성 부성장 집안의 사위가 되면서 우샤오후이는 비로소 저장성에서 자동차 판매에 성공할 수 있었고, 천샤오루와 친분을 맺는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그 후 비로소 덩샤오핑의 외손녀와 인연을 맺고 부부가 돼 당시 회사와 중요한 관계를 맺었다. 최근 들어 자본의 세대를 뛰어넘은 변화는 경제학 연구의 한 분야가 되었고 이러한 세대를 뛰어넘는 변화는 주로 부모와 자식 간에 발생하지만 장인, 장모와 사위 사이에 일어나기도 한다. 이 연구는 가족관계가 개인의 성공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 특히 아시아 문화에 적용된다. 아시아 국가에서 이는 특히 두드러지고 연고 관계는 매우 중요한 사회 자본이기 때문이다. 우샤오후이와 관련된 모든 보도 내용은 우샤오후이가 기세등등한 것은 그의 연고 관계 때문이고 그와 안방의 성장이 중국이 신분형 사회임을 증명해주는 것이며 권세가에게 아첨하고 장인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중국, 대만, 홍콩, 일본 사람은 모두 부자에게 장가가면 적어도 2~3년은 편안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샤오후이의 특출한 점은 결혼을 밑천으로 잘 사용했다는 것이다. ‘안방 대모험’은 “배경 지렛대의 극치”라는 표현을 썼고, 그중에는 몇 가지 사실이 거론되었는데 그 중 한 가지는 “우샤오후이가 제어한 인프라 회사나 저장성에서의 명성은 그다지 좋지 않고, 저장성에 있는 몇 가지 고속도로 프로젝트 상황 또한 투자자가 없어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배경은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 일을 통해 우샤오후이의 야망을 엿볼 수 있다. 철모자왕의 신분으로 지방정부를 눈에 들지 않았다. 또한 “안방은 수정 법규를 포함해 감독 관리를 피할 수 있다”는 점이 바로 필자가 말한 ‘이익집단이 국가를 장악하는’ 현상에 속한다. 금융업계 먹이 사슬을 예로 들자면 한 곳의 금융기관이 부분 임대료를 상급자에게 상납하는 것은 일부 금융 감독관리 기관과 정부 부처에서 얻은 비즈니스 기회와 위법 행위에 구애받지 않기 위한 것으로 결국 감독자와 비감독자의 부패 공모를 형성했다. 우샤오후이는 자금 세탁으로 이익을 얻었을 뿐 아니라 덩샤오핑의 손녀사위라는 신분을 얻었다. 중국 금융업계는 지금까지 여전히 반시장 반행정 개입의 특징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러한 정치 신분은 광활한 부를 창조할 공간을 가지고 있다. ...
유럽 및 신흥 경제국은 경제 침체 국면에서 발버둥치고 있지만, 미국 경제는 승승장구하면서 세계의 관심 속에 ‘이즈두슈(一枝獨秀, 홀로 출중하다)’라 불리고 있다. 최근 사람들은 미국 경제를 부흥시킨 각종 요소 외에도 미국 경제의 호황이 계속해서 지속될지에 대한 토론을 벌이고 있다. 본 문장은 미국 경제의 부흥을 촉진시킨 원인에 대해 전 세계가 익히 알고 있는 셰일가스 개발 성공 외에 더 많은 여러 요소에 대해서도 서술하고자 한다. 부활 부른 몇 가지 요소 작년 미국 경제 성장률은 3.5%를 기록하며 2003년 이후 11년 만에 성장률이 가장 높은 한해였을 뿐 아니라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경제 발전이 가장 양호한 해였다. 2003~2007년 미국 경제 발전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일본, 중국이 모두 경제 구조 조정을 위해 몇 해 동안 고뇌중일 때 미국은 5년 만에 경제 구조 조정을 완료했으며 현재 빅 데이터, 지능형 제조, 무선 인터넷 혁명을 필두로 한 세 번째 기술 변혁이 미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미국 경제 부흥의 원인은 주로 미국 경제 기반이 두터운 데 있다. 또한, 환경 자원과 기술 자원이 뛰어날 뿐 아니라 유럽과 비교했을 때 자본주의 경제의 자유 경쟁 특징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위기시에도 일련의 적합한 경제 산업 정책을 도입했다. 1. 2008년 금융위기는 단지 금융계통과 같은 미국의 가상 경제에만 타격을 가했을 뿐이다. 실물 경제도 비록 비교적 큰 충격을 받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큰 손실을 입지 않았다. 미국 경제의 기둥인 첨단 과학기술, 교육 및 기타 산업은 대부분 완전무결했다. 이 점에 대해 중국 총리 원자바오는 당시 정확한 판단을 했었다. 2008년 9월 24일, 원자바오는 뉴욕에서 열린 미국 경제 금융계 좌담회에서 “현재 상황과 20세기 30년대 상황이 다 같지는 않다. 미국 실물 경제는 첨단 과학기술을 포함해 기본적으로 양호한 편이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또한, 미국 재계에서 널리 퍼진 “믿음은 황금과 돈보다 더 중요하다”라는 명언을 덧붙이기도 했다. 2. 2008년 이후 많은 미국 자본이 돌아왔다. 중국의 토지, 인력 원가는 나날이 높아지고 제도 자본금도 낮아질 줄 모르는 상황 속에서 미국은 실물 경제와 수출 발전을 끌어올릴 수 있는 일련의 경제정책을 출범시켰다. 이를테면 2010년 8월 ‘제조업 촉진 법안’을 통과시키고, 제조업이 사용하는 수입 원료에 대한 관세를 중단하거나 낮췄다. 법안이 통과되자마자 미국 전국 제조업 협회는 보고서를 통해 해당 법안은 미국 제조업 생산액을 46억 달러 증가시킬 것이며 9만개에 가까운 일자리를 제공할 것이라 예측했다. 사실이 증명하듯 ‘상대적으로 낮은 원가’ 정책 속에 운송, 전자설비와 기계, 가구, 플라스틱, 고무, 금속, 컴퓨터 업계 등 미국 제조업 자본은 대량으로 복귀했다. 이러한 종류별 상품은 미국이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상품의 70% 가까이를 차지했고, 위 상품들에 대한 미국 소비자들의 연간 소비액은 2조 달러에 달했다. 외자 끌어들이는 ‘황금의 땅’이 되다 일찍이 외자 투자 황금의 땅이었던 중국과 비교해보면 미국의 원가 우세(토지가격 염가, 양호한 제도환경)는 계속해서 부각되었다. 게다가 미국 세일 오일이 개발된 후 에너지원 가격 우세까지 더해져 많은 외자가 미국으로 유입되었다. 따라서 미국은 연속 다년간 끌어들인 외자 투자금액이 가장 많은 나라가 되었다. 미국 재무부 자료에 따르면 유럽, 일본, 호주, 캐나다 등의 자본이 계속해서 미국으로 유입되었고 주로 금융보험(저축기관 제외), 제조업, 도매무역, 소매무역, 전문업, 과학 및 기술 서비스, 부동산 분야에 대한 투자가 진행되었다. 유럽 경제 상황이 나빠 유로가 남아돌자 유럽연합 경제의 기둥이었던 독일은 미국에 대량 투자를 진행했다. 시장 조사기관인 딜로직(Dealogic)에 따르면 2014년 상반기 8개월 동안 독일 지멘스 등 대기업들이 매입한 미국 기업 거래 총액은 700억 달러에 달한다. 캐나다 회사가 미국 회사에 투자한 규모는 무려 770억 달러에 달한다. 연이어 일본의 도요타, 혼다 등 일본산 3대 자동차 회사들이 미국에서 업무를 확장했다. ...
인민일보는 15일부터 16일까지 연속으로 평론 문장을 발표해 부정부패에는 ‘철모자왕’이 없다면서 “부패 문제와 정치 문제는 서로 삼투 작용을 일으켜 당의 영도와 단결 통일을 해친다”라고 밝혔다. 봉황망은 “올해 잡아들이려는 큰 호랑이는 작년과 비할 바가 아니다”라고 보도했다. 이로써 인민일보가 가리키는 이른바 철모자왕이 누구인지 궁금해진다. 철모자왕과 전설속의 면죄부 필자는 최근 2년 동안 이루어진 반부패 정책을 ‘소문이 주도하는 패턴’이라고 개괄하려 한다. 인민일보의 특수한 정치적 지위를 고려하면 해당 언론사가 내보낸 소식은 절대적으로 소홀하게 봐서는 안 된다. 이른바 면죄부란 세간에 떠도는 ‘입국불사 입상불죄(入局不死 入常不罪)’를 가리킨다. 저우융캉 사건이 터지면서 면죄부 관련 법규가 깨졌고, 인민일보는 철모자왕 이라는 네 글자를 대신 사용했다. 철모자왕이라는 명칭은 청나라 봉작 제도에서 쓰던 말이다. 청나라 황족이 작위를 물려받던 방식은 두 가지로 나뉜다. 혈연관계로 작위를 봉한 것이 가장 흔한 관례이며, 자손이 지위를 계승받아 각 세대마다 한 등급씩 내려간다. 또 다른 방식은 유공자가 물려받는 방식으로 청조에는 총 12명의 왕의 후손이 작위를 세습해 강등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는 황제가 공로를 치하하는 것이며, 철모자왕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 중 8명은 청나라 개국 초에 공을 세운 황제의 종실이었으며, 또 다른 네거티브명은 중말기 황실 권력투쟁에서 공을 세워 책봉을 받은 이들이다. 인민일보가 말하는 철모자왕은 장쩌민, 후진타오 총 서기 및 그 외 리펑, 주룽지, 원자바오 세 명의 전 총리들과 전 정치국 상무위원이자 태자당 원로 쩡칭홍 등을 가리킨다. 그러나 “부패 문제와 정치 문제는 서로 삼투 작용을 일으켜 당의 영도와 단결 통일을 해친다”에서 지적한 죄와 관련이 있는 인물은 장쩌민, 쩡칭홍이다. 소문이 주도하는 정책 패턴 최근 2년간 이루어진 반부패 정책은 소문이 주도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과거 마오쩌둥이 애용하던 바람몰이와 유사하다. 마오쩌둥은 누군가를 정리하고 싶을 때 반드시 작은 범위에서 여론몰이 회의를 열어 문건을 하달했다. 그 후 정리하고자 하는 대상의 태도에 근거해 다음 목표가 되는 인물의 전략과 방향을 잡았다. 인민일보 평론가 문장(사설에 버금가는 평론)은 여론몰이 이후 나팔 불기 단계에 해당한다. 왕치산이 만들어낸 소문이 주도하는 반부패 정책 패턴에서 주로 사용한 조작 과정은 네티즌들에 의해 여섯 단계로 총괄되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소문 확산→측근 및 일가 사건 발생→공개적 노출 혹은 공문을 통해 소문 반박→중국매체 여론몰이, 홍콩 및 해외매체 공개 토론→정부측 공표→언론에 의한 명예 실추로 나뉜다. 뒤에 다섯 단계와 비교하면 첫 번째 단계의 소문 확산은 이른바 ‘전쟁에는 고정된 방식이 없고, 물은 고정된 모양이 없다’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앞서 말한 소문은 두 분류로 나뉜다. 첫 번째는 중국 및 해외 매체를 이용해 소문을 퍼뜨리고, 소문을 퍼뜨린 책임은 매체가 감당한다. 두 번째는 각기 다른 계급의 고위직 관료들의 언급을 통해 각종 신호를 내보내고, 외부의 추측을 유도한다. 결과로만 보면 일부 소문들은 바람처럼 불었다가 형체도 없이 사라진다. 중앙기율검사위원회 부서기 양샤오두가 2014년 5.26 연설을 통해 “제18차 당 대회 이후에 수렴되지 않은 사항들만 중점 조사한다. 현재 중요한 요직은 당원 간부”라고 언급한 사례가 그 예다. 그는 제18차 당대회를 기준으로 선을 긋고 이미 퇴직한 정치국 상무위원과 부패(가족 부패 포함)에 대해 더 이상 조사를 실시하지 않았다. 지금 보면 헛수고에 불과하다. 만약 시진핑, 왕치산이 발표한 각종 연설이었더라면 반부패 정책 표적으로 정해진 이들은 모두 화제 인물이 되어 매체에 일거수일투족이 공개됐을 것이다. 간접적 정치 문제로 위협 보시라이 사건 초기, 원자바오는 해당 사건을 노선투쟁으로 키우려 했지만 당내에서 반대에 부딪혔다. 따라서 보시라이의 죄는 부패와 친인척 문제로 포괄되었고 정치 문제와 연관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저우융캉 사건은 달랐다. 국가 기밀 누설죄로 세계의 이목을 끌었을 뿐 아니라 최근 저우융캉에 내려진 형에 대해 살펴보면 저우융캉, 보시라이, 쩡칭홍과 함께 큰 판을 벌이려고 공모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월 12일, 인민일보는 중국경제주간 문장에 관해 저우융캉이 사형이나 사형집행유예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한 바 있다. 1월 13일, 봉황망은 저우융캉이 보시라이와 밀담을 통해 ‘큰 판 벌이기(봉황주간 2015년 제2기(총 제531기)표지 보도’, ‘도당에 대한 중공의 선전포고-저우융캉 6대 죄행 분석’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해당 문장은 처음으로 저우융캉이 충칭에서 보시라이와 밀담을 가졌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기사에 따르면 두 사람이 나눈 주요 대화 내용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론과 실천을 철저히 부정하고, 마오쩌둥이 말년에 제시한 중국 사회과 관련된 무산계급과 자산계급,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주요 모순의 논술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저우융캉, 보시라이 두 사람의 정치적 입장과 가치관은 일맥상통했고, ‘큰 판 벌이기’ 공모에 어려운 점이 없었다. 69세인 저우융캉은 정치국 상무위원은 연속으로 두 임기를 재직할 수 없다는 법규와 ‘칠상팔하(68세가 되면 퇴직해야하며 67세 이하의 정치국 위원은 상무위원으로 진급 가능)’의 퇴직 제도를 위반했다. 또 조직을 구성해 전국 인민대표대회 위원장으로서의 진급을 노려 일부 세력의 막후 인물이 되고자 했다. 이와 동시에 저우융캉은 곳곳에 심복을 심어 당내 반등을 일으키기도 했다. 노선투쟁이라는 네 글자는 평범한 말이 아니다. 이 죄명은 사건을 처리하는 규모와 연루된 인원수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만약 저우융캉이 지속적 연임을 시도했다는 죄명이 성립되면 반역을 꾀한 대죄에 해당한다. 2015년 반부패 정책의 3가지 핵심 인민일보와 봉황망이 앞 다퉈 내보낸 소문과 최근 중국 및 외신이 보도한 각종 소식을 종합해보면 시진핑이 최근 세 가지 큰 일을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는 반부패 정책을 통해 군대와 국가안보 계통에 대한 막중한 임무를 처리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실세가의 자녀들에게 간접적 경고를 주는 방법으로 솔선수범하여 훙얼다이(紅二代, 공산당 고위직 2세)가 경제계에서 물러나는 모범을 보이도록 했다. 세 번째로 국가급 큰 호랑이 저우융캉 사건에 반역을 꾀했다는 낙인을 찍은 점이다. ...
최근 도이체방크는 보고서를 통해 중국이 1981년 이후 가장 심각한 재정 위기를 맞게 될 것이며 중국 경제와 시장의 안정을 위협할 것으로 전망했다. 줄곧 중국 경제를 낙관적으로 내다봤던 투자계에서 사고를 전환하는 계기가 되는 분석일지 모르지만, 중국 정부나 중국 경제인들에게는 그다지 새롭지 않다. 전 세계가 모두 중국 고위층의 권력투쟁에 주목할 때 중국인의 돈주머니와 관련된 각종 세제개혁 방안과 지방정부 부채 청산을 위한 ‘43호문’이 연이어 발표되면서, 예측 가능한 재정 위기를 해결하는 방안을 찾고 있다. 지방정부 부채 폭탄을 제거하라 2014년, 중국 부동산 시장 불황의 여파는 지방 정부와 은행으로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토지 양도금 규모가 축소되어 지방 정부 부채 상환에 영향을 미쳤다. 중국 지방 정부 재정이 부동산 시장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는 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 2014년 토지 양도금 수입 축소는 직접 재정 수입 증가율 하락으로 이어졌다. 통계에 따르면 10개 도시 토지 양도금 수입은 8841억 위안으로 2013년과 비교해 15.4%나 떨어졌다. 부동산 시장 불황이 은행에 끼친 영향은 은행 악성 부채를 증가시켰다는 점이다. 4대 국유 악성 부채 은행 중의 하나인 동방자산관리회사는 최근 ‘2014 : 중국 금융 불량자산 시장 조사보고’를 통해 2014년 4분기 불량 대출 금액이 8277억 위안일 것으로 예측했으며, 불량 자산율이 9월 말의 1.16%에서 1.23%까지 올랐고 올해 은행 악성부채는 최고점에 달해 부동산 업계는 은행 악성 부채의 화근이 될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이상 내용은 단지 위기의 부분적인 상황이다. 최근 발개위 소속 리티에가 지방 부채(18조 위안) 상환율은 실제 부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공개했다. 지방에 10개가 넘는 도시에 조사연구를 진행한 결과 상환율은 10%에 불과했고, 일부 지역은 20~30%인 곳도 있었다. 상환율이 실제 부채의 50%를 초과하는 곳은 거의 없었다. 2014년 9월 21일, 지방 부채의 지뢰를 제거하기 위해 ‘지방정부성 부채 관리 강화에 대한 국무원 의견’ 문건이 하달되었다(이하 43호문). 해당 문건의 내용은 2014년 말까지의 부채 금액은 2015년 1월 5일 전에 상부에 보고해야 한다는 규정을 포함하고 있다. 또 각 부채는 분류에 따라 예산 관리에 적용된다. 2016년부터는 재정자금 상환 기간이 만료된 부채를 포함한 모든 부채는 성급 정부를 통해 지방정부 채권을 발행하는 방식으로 바뀐다. 이 문건은 시장의 권력을 박탈하고 지방정부의 권력 구조에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다. 해당 문장은 단지 이 문건이 부채 폭탄을 제거했다는 내용만 담고 있다. 지방정부가 상부에 보고한 18조 위안 부채에서 공익성 부채는 중앙 정부가 지급하고 시장성 부채는 시장이 부담하며 나머지 부분은 지방정부와 성 정부가 부담한다. 중앙은행이 지폐 발행을 통해 부채를 부담하게 되면 인플레이션 희석을 통해 결국은 전 사회가 부채를 부담하게 되는 셈이다. 시장성 부채 일부는 각종 그림자은행 상품을 구매한 투자자들을 가리키는데 이 부분의 위험성은 스스로 감수하도록 하고 정부는 관여하지 않는다. 나머지 부분은 지방정부가 부담하게 된다. 하지만 지방정부가 시치미를 뗄 가능성이 높다. 만약 집단행동이 일어나면 부채 일부를 무마하려 할 수도 있다. 중앙정부가 지방정부 부채 충당을 담당한 ‘폭탄제거 부대’는 아래의 두 가지 원칙에 따라 움직인다. ▲앞으로 지방정부는 43호 문건의 내용에 따라 직능 역할에 충실하고 ‘小정부’가 되어 지출을 줄인다. ▲지방정부를 위해 세수의 근원을 구분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부동산세, 지방정부 세금 버팀목 12월 22일, 중국정부망은 국무원이 정식 서명한 ‘부동산 등기 임시 조례’를 공개함과 동시에 2015년 3월 1일부터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부동산 등기는 부동산세, 유산세 등 각종 세금 출시를 가속화 시킬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규정에 따르면 2014년 12월 31일 이전에 전국 모든 도시는 반드시 부동산 서류 문건을 컴퓨터 시스템에 입력해야 하며 현지 부동산 정보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중국 정부는 전국에 분포된 부동산의 대략적인 숫자를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남은 문제는 어떻게 세금을 징수하느냐다. 최근 가장 실행 가능성이 높았던 방법은 상하이와 유사한 항저우판 부동산세 시행 방안이었다. 부동산세 징수를 늘리기 위해 1인 평균 60m²의 징수 면제 면적을 구획하고, 가정 단위에 근거해 세금을 징수하는 방식이다. 이때 세율은 두 가지로 분류되는데 일반주택은 거래가격의 4% 세율을 징수하고, 그 외 주택은 거래가격의 8% 세율을 징수한다. 부동산세 세율에 관한 여론도 들끓고 있다. 예를 들어 주택 3개 이상 보유 시 누진부동산세를 실시하면 전체 부동산업계는 매년 임대금 수입의 12%를 부동산세(재정부, 국가세무총국의 또 다른 규정 제외)로 내야 한다. 부동산 세율이 2.8%인 미국도 높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중국에서 이 세율 수준은 매년 6000억 위안의 토지 양도금 구멍을 메울 수 있는 수준과 상응한다. 다시 말해 중국 지방재정이 과거 20년 동안 토지 양도금에 의존했던 추세가 점점 부동산세에 의지하는 경향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징수되는 부동산세는 해당 세율로 계산되며, 이는 중국의 많은 중산층 가정에는 적지 않은 부담이며 그들의 가정 지출 패턴을 바꿀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