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보통선거권 항쟁은 장기전

허칭롄
2014년 11월 18일 업데이트: 2019년 11월 3일

홍콩 센트럴 점령 시위가 한 달 남짓 지속되고 있다. 시진핑이 홍콩에 “타협도 없고 출혈도 없다 ”라는 지침을 통보하면서, 홍콩 행정장관 렁춘잉(梁振英) 어쩔 수 없이 열기가 식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센트럴 점령 시위가 시작되자마자 베이징 당국은 이미 “시간은 점령자에게 있지 않다”는 기준을 산정해 놓고 있었다. 하지만 센트럴 점령 운동이 조직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다음 행동이 필요한 시점에 약점을 드러내고 있다.

홍콩 학생 북상 항의 실행 가능성

홍콩 학생들이 베이징 방문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한 결정에 대해 월스트리트는 “이 조치는 시위 활동의 한층 더 발전하고 있음을 나타낸다”고 평가했지만 필자는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홍콩 학생 및 상술의 월스트리트 기자의 중공의 본질에 대한 인식은 당연히 우리처럼 공산당 통치하에 장기간동안 생활하고 항쟁했던 사람만 못하다. 필자가 예상하기에 베이징 당국은 홍콩 학생들의 북상 시위에 아래와 같은 몇 가지 대응 방법을 취할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방법은 중공이 가장 사리가 밝은 부분이다. 학생들이 관문에서 전부 저지되는 등 근본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기술적으로 보면 실행 가능성이 가장 많고 중공이 원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두 번째 방법은 먼저 학생들이 북상에 성공하게 만든다. 전술상에서는 유적심입(誘敵沈入)이라 말할 수 있는데, 목적지에서 기다리다가 홍콩 학생들이 모여 표어를 들고 항의하게 만든 후 ‘행패를 부렸다는’ 죄명으로 체포하는 방법이다. 법률상으로 보면 홍콩 시민들이 중국에서 중국 법률을 적용하고, 중공은 홍콩에 가서 법을 집행해 체포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과거 많은 홍콩 시민들이 뤄후교 해관만 건너면 실종되곤 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면 그들은 체포된 것이었다. 이 같은 사례는 매우 많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세 번째 방법은 가장 번거롭지만 학생들을 괴롭힐 수 있는 방법이다. 홍콩 학생들이 현장에 도착해 기습 시위를 성공하게 둔 뒤 중국 정부 조직은 현장에서 ‘반 센트럴 점령’ 시위를 조장해 중국인들이 홍콩 센트럴 점령 시위에 대한 반감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 제3자 입장에서 베이징 정부가 민심을 날조한 것이라 차마 말하기 힘들 것이다. 때문에 중국에서는 센트럴 점령에 대해 이해하지는 못해도 확실히 반대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홈 그라운드 우세 포기하면 안 돼

홈 그라운드 우세를 포기하게 되면 맞이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해서는 말할 내용이 많다. 축구경기에서도 홈 어드밴티지가 있다. 일반적으로 경기에 참가하는 운동선수 소속 국가 혹은 도시에서 경기가 열릴게 되면 더 쉽게 승리할 수 있는 효과를 홈 어드밴티지라고 부른다.

홍콩 센트럴 점령이 이렇게 오래 지속되어 온 것은 홈 그라운드가 홍콩이기 때문에 홍콩인들간에 이견이 있더라도 홍콩 센트럴 점령 시위 참가자들은 어쨌든 모두가 같은 시민 사람들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 홍콩은 법치사회이므로 홍콩 정부가 관례를 벗어나면 법률과 제도로 처리한다. 폭력 행사, 후추가루 사용, 장내 정리, 체포 등과 같은 현상은 중국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홈 어드밴티지와 상반되는 것은 원정 경기이다. 원정 경기는 타지에서 온 참가 선수단은 홈 그라운드 선수단만 못하다. 홈 그라운드 선수에게는 승리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 주어지며 적어도 응원단 목소리 또한 상대편 팀 응원단보다 우렁차다.

홍콩 학생들은 젊다. 하지만 홈그라운드에서 홍콩 학생이 승리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에 있고 홍콩 법률이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중공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원정 경기에 들어가면 고군분투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난 한달 여 동안 홍콩 홈 그라운드에서 베이징 당국은 홍콩에 반(反) 센트럴 점령 시위자들을 대거 파견해 센트럴 점령 시위자들과 대립시켰다. 홍콩 학생들의 고군분투가 중공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중국에서 이루어진다면 베이징 당국이 홈 그라운드 우세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위세가 드높은 반 센트럴 점령 시위대를 조직해 홍콩 학생들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할지도 모르겠다. 사람 수로 봤을 때 홍콩 학생들이 북상하면 많아봤자 2천여 명일 것으로 예측된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규모가 큰 반 센트럴 점령 시위대를 조직한다면 그건 마른 땅에 말뚝 박기와 같이 수월한 일이다. 중국 정부는 몇 만 명을 동원할 것으로 예상된다. 과거 반미, 반일 전국 도시 연합 시위를 겪은 중국인들은 당연히 중공 정부의 강한 동원 능력을 익히 알고 있다.

지속적인 항쟁은 자유로 가는 통행증

홍콩이 시위를 통해 민주화를 쟁취하기까지의 과정은 매우 고통스럽다는 것은 운명으로 정해져 있다. 국제적 사례를 살펴봐도 알 수 있다.

강권에 대한 항쟁은 줄곧 막중하고 어려운 것이었고 많은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중국의 80~90년대생 청년들은 이 역사를 이해하지 못한다. 간혹 현실에 부합되지 않은 희망을 가져 강권통치는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역사의 한 부분만 보자 소련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는 90년대 초 빠르게 와해되었다.

역사 전경을 보지 못했기에 공산당 정권이 무너지기 전에 이러한 국가의 인민들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체코, 폴란드, 헝가리는 거의 소련으로부터 대포와 탱크를 이용해 사회주의 제도가 해당 국가에 적용되자 인민들은 반항을 멈추지 않았다. 예를 들어 헝가리 사건, 1956년 10월 폴란드 사건, 체코 프라하의 봄 등등 큰 사건들에 대해 사람들은 대략 알고 있겠지만 사실 그 외에도 더 많은 셀 수 없는 사건들이 있었다.

폴란드를 예로 들자면 1948년부터 사회주의 제도를 실행하고 소련 스탈린의 형식을 도입해 해당국 자원 및 인력 관리 문제가 나타나 지속적인 정치 항쟁이 일어났다.

1956년 6월 28일, 폴란드 포츠난의 한 공장에 약 16000명 노동자들이 정부에 더 좋은 대우와 낮은 세금을 요구하는 시위를 펼쳤다. 그들은 바르샤바에 가서 정부를 대변할 한명을 대표로 파견했는데 이 대표는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다. 시위는 폭동으로 번졌고 현지 비밀경찰 본부 소재의 건축물은 무너졌다. 정부는 400대의 탱크와 만명의 병력을 출동시켜 반항을 진압했다. 당국은 서방의 선동에 동요해 시위대가 움직인 것이라고 말했다. 그 후로도 폴란드 노동자들의 반항은 지금까지 멈춰진 적이 없다.

폴란드 공산 정권이 와해된 이후 ‘1956년 사건 기념비’를 세우고 ‘쌍 십자가 기념비’라 불렀다. 기념비에는 숫자만 있었다. 왼쪽의 십자가 하단에는 1956이라는 네 개의 숫자가 있고 안에 있는 두 번째 십자가에는 아래부터 위로 1968, 1970, 1976, 1980, 1981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각 숫자마다 한 번의 큰 시위 사건을 상징하고 있는데, 그 중 1970년 조선소 공장 파업 사건은 영화 ‘블랙 서스데이’로 제작되었다. 이 역사의 개요는 아래와 같다. 1970년 성탄절 2주전, 폴란드 공산당이 식품 가격을 올려 그단스크 조선소 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고, 소련 공산당 중앙의 압력속에 폴란드 공산당 정부는 파업한 노동자들에게 잔혹한 진압을 실행했다. 12월 17일 목요일, 45명 시위자들이 총살되었다. 그 이후 폴란드 노동자들의 반항이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자 노동자 운동 단체 공회가 생겨났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자유로 가는 길에는 가시나무가 많다. 반드시 곤란을 극복하는 정신이 있어야만 한 국가, 지역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진심으로 홍콩 학생들이 홍콩에 남아 홈그라운드 우세를 이용해 시위를 견지하고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리지 않기를 바란다.

베이징 당국이 그들을 체포해 더 많은 국가들의 원조를 끌어들일 수도 있다. 먼저 발생 가능한 상황을 예측하고 그에 대한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길 바란다. 그 후에 몇 개월간 국제사회가 센트럴 점령 운동을 바라보는 시각을 참고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지지를 얻을 수 있는지, 어떠한 지지가 베이징 당국에 강력한 압력이 되는지 예측해보길 건의한다. 무릇 어떤 일이든지 사전에 준비가 되어있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 아무리 큰 운동이라도 오로지 용기 하나만 가지고는 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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