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일 발사, 스캔들, 총격 그리고 ‘쯔위’…역대 대만 선거를 뒤흔든 사건들

최창근
2024년 01월 13일 오후 1:43 업데이트: 2024년 01월 13일 오후 10:08

오늘 1월 13일은 대만 총통·입법원 동시 선거일이다. 향후 4년간 대만 리더십을 결정할 선거에 지구촌의 관심이 쏠린다.

1월 12일 자정을 기해 민진당, 국민당, 민중당 등 여야 3당은 공식 선거 운동을 종료했다. 정통의 라이벌 민진당과 국민당은 신베이(新北)시 반차오(板橋)구에서 ‘마지막 세(勢)’ 대결을 벌이며 유세를 마무리했다.

집권 민진당은 반차오 제2운동장을, 제1야당 국민당은1.4㎞ 떨어진 인근 반차오 제1운동장을 마지막 유세 장소로 각각 택했다.

대만 양대 정당 국민당과 민진당은 전통적으로 수도 타이베이(臺北)를 마지막 선거 유세장소로 택해왔다. 국민당은 한국 서울 세종로 일대에 해당하는 총통부 청사 앞 카이다거란대로 구(舊) 국민당중앙당사 앞을 택해왔다. 민진당도 중앙당사가 자리 잡은 MRT 샨다오사(善導寺)역 일대를 선호했다.

전통의 라이벌 민진당과 국민당 같은 국민당 본진서 격돌

한국 성남시 ‘판교(板橋)’와 같은 한자 이름의 ‘반차오(板橋)’는 ‘상징성’이 높은 도시다. 대만 전역 행정원직할시·시 산하 행정구 중 최대인 55만 인구가 거주한다. 종전의 타이베이현이 2010년 행정원직할시로 승격하여 탄생한 신베이시(新北市·New Taipei City) 시정부청사(시청)도 자리했다.

수도 타이베이시를 에워싸고 있는 신베이시는 인구 기준 대만 최대 광역지방자치단체이다. 정치 성향면에서 전통적인 국민당 강세 지역이다. 2010년 첫 신베이 시장 선거에서 차이잉원(蔡英文) 현 총통이 민진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주리룬(朱立倫) 현 국민당 주석(대표)에게 패배했다. 당시 주리룬의 러닝메이트로 부시장이 됐던 인물이 현 국민당 총통 후보 허우유이(侯友宜)다. 주리룬은 2014년 재선에 성공했다. 주리룬·허우유이는 8년간 시장·부시장으로 호흡을 맞춰 시정(市政) 운영을 했다. 2018년 시장 선거에서는 허우유이가 당선됐고 2022년 재선에 성공하여 현재까지 시장직을 유지하고 있다. 신베이시는 국민당의 아성(牙城)인 셈이다.

1월 11일 지지 유세를 하는 라이칭더 민진당 총통 후보(좌) 차이잉원 현 총통(중) 샤오메이친 민진당 부총통 후보(우). | 연합뉴스.

이 속에서 민진당과 국민당이 인접한 신베이 운동장을 마지막 선거유세 장소로 택한 것은 고도의 정치적 상징성을 지닌다. 전통적으로 대만 북부 지역에서 지지세가 약한 민진당은 상대 후보 허우유이가 현직 시장으로 있는 신베이시를 택해 ‘적의 본진을 공략한다’는 의미를 부여했다. 국민당은 본진에서 지지세를 규합하여 선거의 원동력으로 삼겠다는 의미를 담았다. 허우유이 후보 측이 본거지인 신베이시 반차오 제1운동장을 마지막 선거 유세를 결정하자 민진당이 바로 옆 반차오 제2운동장 집회를 결정하며 맞불을 놓았다.

‘추첨’을 통해 타이베이시 카이다거란대로를 최종 유세지로 낙점받은 커원저 민중당 후보는 자신의 핵심 지지 기반인 중도 성향 대도시 거주 젊은 유권자들을 향해 ‘마지막 호소’를 하며 유세를 마무리했다.

중국의 노골적인 선거 개입 시도가 있었지만 이번 총통·입법원 선거는 차분한 분위기에서 진행되고 있다. 지난날 대만에서는 선거 때마다 ‘돌발 사고’가 발생했고 선거 결과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대만 정치 분석가들의 공통 분석이다.

1996년 3월, 대만 첫 총통 직선 선거가 예정됐다. 헌법 개정으로 최고헌법기구 국민대회(國民大會)에서 간접선거로 선출하던 총통·부총통을 주민 직접 선거로 선출하기로 한 것이었다.

1988년 1월, 장징궈(蔣經國) 총통 사망 후 ‘중화민국 헌법’에 의하여 부총통이던 리덩후이(李登輝)가 장징궈의 남은 총통 임기(1988~1990년)을 승계하여 계임(繼任) 총통이 됐다. 1990년 국민대회 간접선거에서 당선되어 6년 임기의 총통이 됐고 1996년 첫 직선 선거에서 3연임을 도전했다.

제3차 대만해협 위기, 중국의 미사일 발사 시험 속에 치러진 대선

리덩후이는 외성인(外省人·국민당 정부 천도 시 대만으로 건너온 본토 출신)이 아닌 본성인(本省人) 출신 농업경제학자이다. 초기 중국공산당은 ‘호의적’인 시선으로 평가했다. 장징궈가 추진한 국민당 본토화(대만화) 정책 최대 수혜자로 행정원 정무위원(정무장관), 타이베이 시장, 대만성 주석을 거쳐 총통 유고(有故) 시 직(職)을 승계할 수 있는 부총통까지 오른 리덩후이가 집권할 경우 장제스-장징궈 부자(父子)로 대표되는 반공(反共) 성향의 국민당 인사들과는 다른 대중국 정책을 펼 것이라는 기대감이 반영됐다. 리덩후이의 중국공산당 가입 경력도 종합됐다.

서생(書生) 출신 테크노크라트 리덩후이는 총통이 된 후 반전드라마를 연출했다. 현란한 정치술을 구사하며 권력을 장악했다. 처음 쑹추위(宋楚瑜) 현 친민당(親民黨) 주석, 마잉주(馬英九) 전 총통으로 대표되는 국민당 내 소장파 엘리트와 손을 잡고 보수 성향 국민당 원로들을 하나둘 실각시켰다.

1995년 모교 미국 코넬대를 방문한 리덩후이 전 대만 총통. | udn.

대 중국 노선에 있어서는 ‘중국과 다른 대만’ 가치를 강조하며 국민당 본토화(대만화)를 적극 추진했고 국민당 내 노선 투쟁의 빌미를 제공했다. 그 결과 선명 친중국 노선을 표방하며 국민당 전통 가치를 중시하던 당내 모임 ‘신국민당연선(新國民黨連線)’ 구성원들은 탈당하여 신당(新黨)을 결성했다.

리덩후이는 ‘무실외교(務實外交)·실용외교’ 기치하에 대만판 수표책외교인 ‘은탄외교(銀彈외교)’를 전개하며 국제사회에서 대만의 외교 공간을 확장했다. ‘하나의 중국’ 원칙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1995년 6월에는 대만 총통 최초로 미국을 방문했다. ‘졸업생’ 자격으로 모교 코넬대 졸업식에 참석하여 연설했다. 중국은 격앙됐다.

대만 독립 행보를 가속화하는 리덩후이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태도도 180도 바뀌었다. 그를 ‘대만독립분자’ ‘민족반역자’ 등으로 비난했다. 실력 행사도 나섰다. 1995년 7월 중국인민해방군 해군은 대만해협에서 실탄 사격 훈련을 실시했다. 미사일 시험 훈련도 병행했다.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리덩후이의 총통 연임을 막겠다는 의도였다. 대만해협에서 중국의 무력시위는 1996년 총통 선거까지 지속됐다. 제3차 대만해협 위기이다. 중국의 무력 시위는 역효과를 냈다. 리덩후이는 압승하여 사상 첫 직선 총통이 됐고 2000년까지 총통부를 지켰다.

2000년 총통 선거는 국민당의 분열 속에서 치러졌다. 국민당 주석 리덩후이는 한때 자신의 오른팔이자 대중적 인기가 높던 쑹추위 전 대만성 성장 대신 롄잔(連戰) 부총통을 국민당 총통 후보로 지명했다. 당내 경선도 생략했다.

1994년 대만 첫 대만성 성장 선거에 출마한 쑹추위(좌)와 지원 유세하는 리덩후이 총통(우). 대만성 성장 당선 후 지지율 고공 행진을 하며 ‘소총통’ 별칭을 얻었던 쑹추위에게 성장 당선은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했다. | udn.

1994년 첫 대만성 성장 선거에서 쑹추위는 ‘외성인’ 출신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압승했다. 타이베이·가오슝 양대 행정원직할시를 제외한 ‘대만섬’ 전체를 관할하는 민선 지방자치단체장이 된 쑹추위는 친서민, 현장 밀착 행보를 하며 나날이 인기가 높아갔다. 성정(省政) 만족도는 80%를 상회했고 쑹추위에게는 ‘소총통’ 별칭이 붙었다. 차기 국민당 총통으로도 유력시됐다. 리덩후이는 1996년 ‘중첩된 행정 기구 간소화’를 명분으로 대만성 자치제·성장 직선제 폐지를 추진했다. 쑹추위는 반발했지만 1998년 대만성 자치제는 폐지됐다. 총통 후보도 롄잔이 지명됐다.

‘소총통’ 쑹추위…비자금 스캔들로 총통 꿈 좌절

쑹추위는 반발하여 국민당 탈당을 선언했다. 제3후보로 총통 선거에 도전한 쑹추위의 인기는 고공행진했다. 차기 총통으로 유력시됐다. 국민당 후보 롄잔은 2위도 힘들다는 전망이 유력했다.

국민당은 쑹추위의 스캔들을 폭로했다. 요지는 “미국 유학 중인 20대의 쑹추위의 장남이 거액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불법 정치자금이다.”라는 것이었다. 쑹추위 측은 “해당 차명 자금은 장징궈 전 총통 가족 생활 자금으로 국민당 차원에서 관리하던 것이다.”라고 해명했다. “국민당 주석(1988~2000년) 리덩후이 총통도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다.”라고도 했다. 리덩후이는 “나는 국민당 비주류 출신이다. ‘장징궈의 양자’로 불리며 당 비서장·부비서장 등 요직을 역임한 쑹추위와 연관된 일일뿐 본인과는 무관하다.”며 항변했다.

결과적으로 쑹추위는 스캔들로 이미지에 타격을 입었고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졌다. 국민당 분열 속에서 치러진 2003년 총통 선거에서 민진당 후보 천수이볜이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얻었다. 쑹추위는 2위, 롄잔은 3위로 낙선했다. 대만 검찰은 쑹추위 비자금 의혹 사건을 수사했고 ‘무혐의’ 결정을 내렸다. 검찰 결정 후 쑹추위는 “더러운 정치 공작은 종식돼야 한다”고 말했다.

2004년 총통 선거를 앞두고 국민당과 친민당(쑹추위 지지 정당)은 단일화를 이뤘다. 롄잔 국민당 주석이 총통, 쑹추위 친민당 주석이 부총통 후보로 선거에 나섰다. 재선에 도전한 천수이볜은 실정(失政), 부패 스캔들로 지지율 하락을 지속했다. 여론 조사 결과는 국민·친민당의 승리를 점쳤다.

2004년 3월 19일, 총통 선거 하루 전날 천수이볜 총통과 뤼슈롄 부총통은 남부 타이난(臺南)에서 마지막 유세를 펼쳤다. 타이난은 민진당의 전통적인 지지 기반이자 천수이볜의 고향이다.

2004년 천수이볜 총통 총격 사건 당시 사진. 자동차 앞 유리에 총탄 관통 흔적이 남아 있다. | 대통령기록관/대통령경호처.

천수이볜과 뤼슈롄이 타이난 시내를 카퍼레이드 하던 중 총격 사건이 발생했다. 탄환은 천수이볜의 복부를 스쳤고 동승했던 뤼슈롄도 부상을 입었다. 천수이볜은 인근 종합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았다. 경미한 부상으로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총통 선거는 예정대로 진행됐고, 천수이볜은 0.22%포인트 에 불과한 2만 9518표 차이로 신승(辛勝)했다.

영구 미제 사건된 2004년 천수이볜 총격 

총통 선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3·19 총격사건’을 두고 대만 사회는 분열됐다. 야당 측에서는 ‘자작극’ 의혹을 제기하며 ‘선거 무효’를 주장했다. 당선 무효 소송도 제기했다. 대규모 천수이볜 하야 시위도 이어졌다. 재검표를 실시했지만 선거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2005년 저격범도 자살하여 사건은 ‘영구 미제’가 됐다.

2016년 총통 선거는 한국발(發) 파장이 대만 선거 판도에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른바 ‘쯔위 사건’이다.

총통 선거를 앞둔 2015년 11월, 한국 MBC 예능 프로그램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다국적 걸그룹 트와이스(TWICE)의 외국인 멤버 4인(사나, 쯔위, 모모, 미나)이 출연했다. 인터넷 생중계로 진행된 당시 이들은 방송 시작 전 제작진이 나누어준 각자 출신국의 국기와 함께 태극기를 한 점씩 양손에 든 채 인사했다. 일본인 모모·사나·미나는 일본 국기(일장기)와 태극기를 함께 들었다. 대만 국적 쯔위는 중화민국(대만) 국기(청천백일만지홍기)와 태극기를 함께 들었다. 해당 장면은 인터넷으로만 생중계됐을 뿐 본 방송에서는 편집되어 전파를 타지 않았다.

이른바 ‘쯔위 대만 국기 사건’을 보도한 대만 방송사 화면. | CTI.

2016년 1월 8일, 문제의 대만 출신 친중 연예인 황안(黄安)이 이 화면을 거론하며 “쯔위는 대만 독립주의자이다.”라고 비난했다.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인정하라.”고 공개 요구도 했다. 중화권 매체들이 해당 사실을 보도하자 파장이 이어졌다. 극단적인 중국 네티즌들은 쯔위 소속사 JYP에 입장 표명, 사과를 요구했다.

대만 선거를 흔든 한국 발 쯔위 사건

결과적으로 쯔위는 “중국은 하나뿐입니다. 해협 양안(중국 대륙과 대만)은 하나입니다. 저는 늘 제 자신이 중국인이라 생각하고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라는 사과문을 발표해야만 했다. 이는 대만 여론을 들끓게 했다. 대만(중화민국) 국적의 쯔위가 중국인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하나의 중국’ 원칙에 의해 국제사회에서 공식 국가로 인정받지도 못하고 공식 국기 사용도 허락되지 않는 설움을 겪고 있는 대만 국민을 자극했다.

쯔위 사건 여파는 대만 선거로도 파급됐다. 2016년 1월 16일 치러진 총통 선거에서 차이잉원이 승리했다. 중국이 아닌 대만 정체성을 강조해 온 차이잉원의 득표 689만 표 중 약 135만 표가 쯔위 사건의 영향을 받았다는 온라인 조사 결과가 제시됐다. 전체 득표의 20%에 상당하는 비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