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현대 정치사 이해를 돕는 영화 ‘누가 총통을 쏘았나’

2004년 천수이볜 총통 저격 사건 다뤄

최창근
2024년 01월 3일 오후 3:46 업데이트: 2024년 01월 5일 오후 11:23

1월 13일 대만 대선・총선이 10일 앞으로 다가왔다. 향후 4년간 대만과 동아시아, 나아가 국제 지역 정세에 영향을 끼칠 중대 선거이다. 민주진보당, 중국국민당, 대만민중당 등 대만 각 정당의 유권자를 향한 마지막 구애 열기가 뜨겁다. 지구촌 42억 인구가 투표를 하는 ‘수퍼 선거의 해’ 첫 선거인 만큼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 시킨다.

한국과 대만은 비교정치학자들이 꼽는 ‘지구상의 가장 유사한 두 나라’이다. 식민지-내전-경제성장-민주화-선진화로 이어지는 역사 발전 궤적, 정치 발전 정도, 민주주의 수준, 경제력 등 모든 면에서 유사하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대만 선거에 대한 한국인의 관심도 뜨겁다. 올해 4월 한국 총선에 미칠 대만 선거의 ‘나비 효과’ 때문이다. 이 속에서 영화와 드라마라는 ‘허구’의 영역에서 대만 선거를 다룬 작품을 본다면 지난날 ‘형제의 나라(兄弟之邦)’ ‘혈맹’으로 불렸던 가까운 이웃 대만의 사정을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 총통을 쏘았나(원제: 환술(幻術))’는 실제 사건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한 작품이다. 대만 정치사에 획을 그은 실존 정치인을 주제로 격동의 대만 현대 정치사를 조망한다.

영화는 리덩후이(李登輝) 전 총통의 관점에서 대만 정치사의 주요 사건을 다룬다. 2020년 작고한 리덩후이는 ‘미스터 민주주의(民主先生)’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반면 ‘능수능란한 정치인’이라는 평가도 교차하는 인물이다. 대만 정치사의 문제적 인물로도 꼽힌다. 그는 1923년 일제강점기 대만에서 태어나 타이베이고등학교(현 국립대만사범대학)를 거쳐 일본 교토제국대학에서 수학했다. 이후 국립대만대학 농업경제학과 졸업 후 미국 코넬대학에서 농업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장징궈 총통(좌)와 리덩후이 당시 부총통(우). | 자료사진.

귀국 후 농업 분야 테크노크라트로서 리덩후이는 승승장구했다. 국립대만대학 교수로 활동하던 ‘학자’ 리덩후이를 정계로 픽업한 인물은 장징궈(張經國) 전 총통이다. 1978~88년 총통으로 재임했던 그는 국민당의 본토화(대만화)를 추진했다. 장징궈는 대만 출신 엘리트 리덩후이를 발탁하여 요직에 임명했다. 장징궈의 신임하에 리덩후이는 행정원 정무위원(무임소 장관)을 시작으로 타이베이(臺北) 시장, 대만성 주석을 거쳐 1984년 부총통이 됐다. 1988년 장징궈 총통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중화민국 헌법’에 의하여 총통직을 승계했다. 이후 1990년 국민대회 간접선거, 1996년 주민 직접선거를 거쳐 연임하여 2000년까지 12년을 총통에 재임했다.

리덩후이는 복잡다단한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식민교육을 받아 혈통은 대만인이지만 일본인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게 됐다. ‘이와사토 마사오(岩里政男)’로 창씨개명을 했고 교토제국대학 유학 시절 학도병으로서 일본제국군에 복무한 전력도 있다. 대만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1948년 탈당했고 1971년 국민당에 입당했다. 그러다 2000년 해당(害黨) 행위로 주석(대표)으로 있던 국민당에서 제명됐고 2001년 급진 대만독립을 추구하는 정당 대만단결연맹(臺灣團結聯盟) 창당을 주도했다. 일본 검도・무사도 신봉자이며 동시에 개신교(장로회) 신자이기도 하다. 정치 성향은 친일・반중으로, 총통 퇴임 후 일본 야스쿠니신사에 수 차례 참배했다. 친일 성향이 농후한 그는 일본 저명 잡지와의 회견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대만 출신 황국 2등 신민의 비애’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누가 총통을 쏘았나’는 1988년 1월 장징궈 총통 사망 시점에서 시작한다. 장징궈 사후 그의 후계자를 두고서 국민당 내에서 갈등이 벌어졌다. 중화민국(대만) 헌법 상 부총통이 총통직을 승계하는 것은 용납해도 국민당 주석직도 잇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대륙파(중국 출신) 국민당 원로들이 반발했다. 당이 국가를 영도하는 당국(黨國) 체제하에서 리덩후이의 국민당 내 입지는 약했다.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을 비롯한 장징궈의 가족도 리덩후이를 신뢰하지 않았다.

이 속에서 리덩후이의 국민당 당권 장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쑹추위(宋楚瑜) 현 친민당 주석이다. 당시 국민당 수석부비서장으로서 당내 소장파 리더 역할을 하던 그는 리덩후이가 국민당 대리 주석에 취임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이어 1988년 7월 치러진 국민당 전당대회에서 리덩후이는 국민당 주석에 공식 취임하여 대권에 이어 당권까지 장악했다.

본토파 학자 출신 리덩후이의 대권・당권 장악 후 국민당 내 노선 싸움이 본격화했다. 당내 비주류로 밀려난 대륙파(중국 출신) 원로들이 국민당의 본토화(대만화)를 추진하는 그에게 반발했다. 쑹추위 를 위시한 당내 소장파의 힘을 입은 리덩후이는 하나둘 이들을 실각시켰다. 위궈화(俞國華) 행정원장, 리환(李煥) 국민당 비서장에 이어 참모총장(합참의장)으로서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하오보춘(郝柏村) 장군 등이 사실상 당에서 축출됐다.

참모총장(합참의장) 시절 하오보춘 장군. | 자료사진.

‘정적’을 하나둘 제거한 리덩후이는 자신의 오른팔 역할을 한 쑹추위 마저 실각시켰다. 쑹추위는 국민당의 대표적인 2세대 정치 엘리트였다. 미국 조지타운대학 정치철학 박사 출신으로서 장징궈 총통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국민당의 메이크업 아티스트’라는 별칭에 걸맞게 정부와 당 홍보 부문에서 활약하며 명성을 얻었다. 1979년 37세 나이에 행정원 신문국장(국정홍보처장)으로 입각했다. 최연소 각료였다. 이후 국민당 수석부비서장, 중앙상무위원, 비서장 등으로 승승장구하며 ‘차기 총통’으로 입지를 굳혔다. 1994년 사상 첫 민선 대만성 성장(省長)에 당선되어 지지율 80~90%를 기록하며 ‘소총통’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쑹추위의 인기가 고공행진하자 리덩후이는 ‘행정 기구 효율화’를 명목으로 ‘대만성 자치제 폐지’를 추진했다. 쑹추위의 정치적 기반을 제거할 심산이었다. 2000년 총통 선거를 앞두고도 대중적 인기가 높은 쑹추위 대신 롄잔(連戰)을 국민당 총통 후보로 지명했다. 이에 반발하여 쑹추위는 탈당하여 무소속 출마를 감행했고 천수이볜(陳水扁) 민진당 후보가 가세하여 3파전으로 치러진 2000년 3월 총통 선거에서 천수이볜이 당선되고 쑹추위는 2위, 집권 국민당 후보 롄잔은 3위를 기록했다. 결과적으로 리덩후이는 사상 첫 대만 수평 정권 교체에 기여한 셈이다. 이에 국민당 지지자들의 항의가 이어졌고 리덩후이는 국민당 주석직을 사임해야만 했다. 이후 당에서 제명됐다.

1994년 첫 직선 대만성 성장 선거 유세에서 쑹추위(좌)와 리덩후이 총통(우). | 자료사진.

결과적으로 국민당 분열을 낳고 야당에 어부지리를 안긴 리덩후이는 총통 퇴임 후 대만단결연맹 창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대만 독립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2000년 5월 취임한 천수이볜 총통은 첫 임기 4년 동안 본인과 주변 인물의 부정부패, 경기 침체라는 이중고 속에서 지지율 하락이 이어졌다. 2004년 총통 재선에 도전했지만 ‘단일화’에 성공한 롄잔・쑹추위 지지율에 뒤처졌다. 정권 교체는 기정사실화로 비쳤다.

타이난에서 2004년 대만 총통 선거 마지막 유세 중인 천수이볜 총통과 뤼슈롄 부총통. | 자료사진.

영화 ‘누가 총통을 쏘았나’에서는 2004년 총통 선거를 앞두고 불리한 형세의 천수이볜이 리덩후이를 찾아와 도움을 청한 것으로 묘사한다. 결과적으로 2004년 3월 19일, 투표 하루 전날 고향 타이난(臺南)에서의 마지막 선거 유세 중 천수이볜은 저격을 당하여 부상을 입었다. 다음 날 선거에서 지지율 여론조사에서 뒤지던 천수이볜은 0.22%포인트 차이에 불과한 2만 9518표 차이로 신승(辛勝)했다. 저격범은 2005년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사건은 ‘영구 미제’가 됐다. 국민당・친민당 등 야권은 ‘자작극’ 의혹을 제기했지만 선거 결과를 바꾸지는 못했다.

‘누가 총통을 쏘았다’는 2004년 3월 발생한 ‘천수이볜 저격 사건’을 소재 삼았다. 여기에 리덩후이의 측근이 사건을 사주했다는 대담한 상상력에 기반한 가설을 더했다. 영화 속에서는 리덩후이가 음모의 배후로 등장하지만 역사적 진실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 다만 대만 현대 정치사의 거목 리덩후이의 시선에서 바라본 ‘누가 총통을 쏘았나’를 통해서 대만 정치사의 주요 인물과 행적, 사건을 이해할 수 있다.

제임스 릴리 전 주대만 미국 대표(좌)와 리덩후이 전 총통(우). 제임스 릴리는 미국 중앙정보국(CIA) 출신으로 주대만 대표, 주한 대사, 주중 대사 등을 역임했다. | 자료사진.

허구의 세계를 다룬 영화지만 개연성을 더하는 것은 실존 인물의 행적과 실존하는 책이다. 영화에는 도노모 로(伴野郞)가 쓴 ‘다윗의 밀사(ダヴィデの 密使)’가 등장한다. 대만 총통 암살 미수 사건을 다뤘다. 작품에서 리덩후이의 정치 인생 행로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인물도 실제다. 제임스 릴리(James Lilley). 중국 산둥(山東)성 태생 미국인으로 젊은 시절 중앙정보국(CIA) 요원으로 동아시아에서 활동했다. 훗날 국무부로 적을 옮겨 1981~84년 미국재대만협회(美國在臺灣協會・AIT) 주타이베이 사무처장(대표), 1986~89년 주한국 미국대사, 1989~91년 주중국 미국대사를 역임한 동아시아 전문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