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FA 중국어판 특집 ‘파룬궁의 20년’ 1편 – 파룬궁은 스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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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12일 업데이트: 2019년 8월 12일

1999년 7월 20일(이하 7.20) 중국 정부가 파룬궁을 탄압하기 시작한 지 20년이 지난 지금. 중국에서 파룬궁을 접하기 어려워졌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자유아시아방송 기자 스산(石山)과 자아 아오(家傲)는 중국의 파룬궁 탄압 저항사와 해외 발전사를 담은, ‘파룬궁 20년’ 3회 특집을 마련했다.

파룬궁 수련자들 이야기

20여 년 전 칭화대 정밀기계 학과에서 공부하던 위차오(虞超). 그는 가족을 통해 파룬궁을 알게 됐고 수년간 인근 공원에서 수련자들과 함께 연공(동작)만 하다가 7.20을 계기로 확고한 파룬궁 수련자가 됐다.

“7.20 당일 저녁, 동북에서 이미 사람을 때려죽였다는 전화를 받았다. 이 일(파룬궁 탄압)이 전면적으로 시작됐고, 적당히 끝나지 않을 것이란 걸 직감했다. 그래서 우리는 곧바로 움직였다”

궈징슝(郭競雄)이 홍콩에서 ‘천룡팔부(天龍八部)’의 저자 김용과 만난 모습 | RFA제공

궈징슝(郭競雄) 역시 7.20 당시 젊은 파룬궁 수련자였다. 지린미술대학을 졸업한 그는 장춘시만보(長春城市晚報)에서 미술과 문화편집을 맡고 있었다.

“신문사 바로 옆에 성(省) 정부가 있었다. 7.20 당일 수많은 파룬궁 수련자들이 성정부에 가서 청원했다. 나도 당시 그것을 보도하고 싶었다. 하지만 7월 20일 그날 경찰차로 끌려갔고 체포됐다.”

1999년 베이징 한 부위원회에서 근무하던 가오위둥(高郁東)은 영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고,  7.20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런던에 있었다.

“내 경우는 사실 당시 중국에서는 아주 일반적이었다. 영국 유학 수속 중이었고, 7.20 탄압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런던으로 간 것은 행운이었다.”

영국 파룬궁 수련생 가오위둥(高郁東), 중국대사관 앞에서 항의하고 있다. | RFA 제공

중국 정부 공식 자료와 민간의 불확실한 통계에 따르면 1999년 중국에서는 약 6천만~7천만 명이 파룬궁을 수련했다. 북방의 많은 대도시에는 파룬궁 연공 장소가 곳곳에 있었고 일부 공원에서는 수 천명이 한꺼번에 모여서 연공 했다.

탄압 이전, 6000만~7000만명 수련

미국 워싱턴에 설립된 중국 관련 인권단체 ‘공민역량(公民力量)’ 책임자 양젠리(楊建利) 박사는 파룬궁이 중국에서 가파르게 성장한 요인으로 신앙의 공백과 부실한 사회보장제도를 들었다.

“신앙의 공백은 반드시 종교나 신앙으로 메워야 한다”는 것이 양 박사의 생각이다. 그는 중국에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붕괴된 후 그들에게 새로운 가치관과 인지 체계가 필요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의료보험과 사회복지제도의 부재로 몇몇 기공이 크게  환영받았고, 그중 하나였던 파룬궁의 발전 속도가 가장 빨랐다”며 “파룬궁의 성장 속도에 놀란 중국 정부가 전력을 기울여 탄압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중국정부는 1999년 7월 20일 파룬따파 연구회를 불법 조직으로 선포했다. 아울러 전국적으로 파룬궁 핵심 인사 수백 명을 체포했다. 

이후 중공 총서기이자 국가 주석 장쩌민이 파룬궁을 ‘사교’로 공개 비난함과 동시에 파룬궁 탄압을 전면적으로 실시했다.

미국 국제 인권감시단체 프리덤하우스 사라 쿡 선임연구원 | 희망의 소리 방송

미국 국제 인권 감시단체 프리덤하우스 사라 쿡 선임연구원은 다년간 각국의 종교 문제를 연구했다. 그녀는 파룬궁은 일종 신종 신앙단체이며 전통적인 종교와는 다르다고 봤다.

“(파룬궁은) 확실히 수준이 더 높고 다른 종교의 도덕적 요구와 비슷하며 내용은 불교와 도교에 가깝다. 그래서 중국의 신흥 종교운동으로 간주한다.”

캐나다의 저명한 변호사이자 전 아태 국무지원 장관을 역임한 데이비드 킬고어 역시 중공 정권의 파룬궁 탄압에 대해 공산주의의 무신론 이데올로기와 파룬궁과의 가치관 충돌로 이해했다.

그는 “비록 중국이 파룬궁을 매우 가혹하게 박해해도 파룬궁이 폭력적으로 저항한 것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예를 들어 ‘진(眞)’이라는 말을 쓰면 공산당이 좋아하지 않아 큰 갈등이 생긴 것이다.”

저항 멈춘 적 없어

파룬따파 밍후이왕(明慧網)과 해외 인권단체 추정 통계에 따르면 지난 19년간 적어도 4천 명의 파룬궁 수련자들이 중국 당국의 박해로 사망했고, 수 십만 명 이상 체포돼 노동 교양이나 유기징역형에 처해졌다.

1999년 베이징대 법학과 박사 과정에 있었던 미국의 법률학자 텅뱌오(滕彪). 그는 자유아시아방송(RFA)에 중국에서 파룬궁을 처음 탄압할 때부터 중국 법률 전문가 사이에 적지 않은 이견이 있었다고 밝혔다. 

“2007년에 우리는 파룬궁의 무죄를 변론할 기회가 있었다. 총 6명의 변호사가 참여했다. 우리는 국제 인권법, 중국 헌법, 형법, 형사소송법 등을 인용해 파룬궁을 탄압할 그 어떤 법적인 근거가 전혀 없음을 발견했다.”

중국 당국은 2015년 7월 9일 시작된 ‘709 검거’ 당시 수백 명의 중국 변호사와 인권 운동가들을 체포하거나 소환했다. 이들 모두 중국에서 파룬궁 수련자에 대해 무죄라고 변호한 이력이 있었다.

중국의다른 파룬궁 수련자들처럼 위차오, 궈징슝 및 가오위둥의 생활은 1999년 7월 20일부터 크게 변했다.

 

2016년 12월 2일 도쿄, ‘전대미문의 사악한 박해’ 일본어판 출간기념회에 참가한 데이비드 킬고어. | 루융(盧勇)/에포크타임스

위차오는 직장에서 쫓겨나 유랑하면서도 파룬궁의 지하와 거리 저항에 참여했다. 2002년에는 그의 아내 주퉁(諸彤)과 함께 체포돼 각각 9년과 11년형을 선고받았다. 형기 만료 후 석방된 위차오 부부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궈징슝은 신문사를 그만두고 만화 작업실을 만들었다. 중국에서 인기를 끈 그의 작품은 2004년 만화계의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프랑스 앙굴렘 국제 만화전에서 최고상을 수상했다. 

중국 정부의 압박을 피해 2008년 미국으로 이민을 선택한 그는 미국의 유명 만화 회사인 DC 컴퍼니에 입사했다. 

가오위둥은 영국 런던 중국 대사관 앞에서 19년간의 파룬궁 탄압 중지를 기원하는 24시간 릴레이 가부좌 활동에 참여했다.

킬고어는 “중국 공산당의 대대적인 파룬궁 탄압은 톈안먼 사건 이후 중공이 일으킨 최대 규모의 인권 박해이며, 중국 공산당 당국은 파룬궁을 탄압한 모든 경험을 총괄해 다른 단체에 대한 탄압으로 확대시켰다”라고 말했다.

그는 파시즘에다 공산주의를 더한 중국 공산당이 파룬궁뿐만 아니라 티베트인, 위구르인, 기독교 신자 등 기타 거의 모든 중국 민중을 겨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킬고어는 중국 정부가 파룬궁을 탄압함으로써 중국의 사법 체계를 흔들었고 이후 수년간 전면적으로 인권을 후퇴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RFA 중국어판 <【法輪功的20年】之一:並未消失的法輪功>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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