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패소 평결 난 ’27년 전 사건’, 어떻게 재점화됐나?

한동훈
2023년 05월 10일 오후 3:19 업데이트: 2023년 05월 10일 오후 3:19

미국의 한 여성 칼럼니스트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76)을 상대로 한 민사소송에서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았다.

뉴욕 시민으로 구성된 9명의 배심원단은 9일(현지시간)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폭행 및 명예훼손 혐의가 있다며 원고인 E. 진 캐럴(79) 측에 500만 달러(약 66억원)를 배상하라고 평결했다.

캐럴은 1993년부터 2020년까지 패션잡지 엘르(Elle)에 ‘E. 진에게 물어봐(Ask E. Jean)’라는 제목의 칼럼을 연재했다.

이 칼럼은 독자들의 편지에 답하는 형식을 통해 사연의 주인공에게 위안을 전하는 한편 주로 ‘여성의 삶에서 남성이 중심이 되어선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명 칼럼니스트였던 캐럴은 언론사 헤드라인에 오르며 더욱 큰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19년 ‘우리에게 남자가 필요한 이유가 뭘까(What Do We Need Men For?)’라는 책을 출간하면서부터다.

이 책은 2017년 한 여배우의 고백으로 다시 촉발된 ‘미투(MeToo) 운동’의 여파가 이어지던 미국 사회 분위기에서 나왔다.

캐럴은 이 책에서 ‘여성들에게 끔찍한 남성들’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남성과의 끔찍했던 성관계의 역사’를 나열한 이 책에서 두 명의 남성에게 성폭행당했다고 주장했다.

E. 진 캐럴이 1990년대 중반 맨해튼의 한 백화점에서 그녀를 성적으로 학대한 혐의에 대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책임이 있다는 배심원단 평결 후 맨해튼 법원을 떠나고 있다. 2023.5.9. | Spencer Platt/Getty Images

그녀가 지목한 두 명 중 하나가 트럼프였는데, 캐럴은 뉴욕 맨해튼의 고급 백화점 버그도프 굿맨에서 우연히 만난 트럼프에 의해 탈의실에서 성폭행을 당할 뻔했으나 몸싸움 끝에 벗어났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트럼프와 알던 사이라고도 했다.

사건 발생 시기에 대해선 1995년 혹은 1996년으로 기억했다. 당시 그녀 나이는 50대 초반이었다.

특히 캐럴은 이 사건을 ‘강간(rape)’이 아니라 ‘싸움(fight)’이라고 묘사했다. 전체 싸움 시간은 채 3분이 되지 않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녀는 2019년 6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모든 여성은 자신이 설명하는 방식을 택할 수 있다”며 “나는 강간당하지 않았다. 나에게 어떤 일이 이뤄지진 않았다. 나는 싸웠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즉각 이를 부인했다. “그런 여성을 만난 적도 없다. 완전히 거짓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고 말했다. “그녀는 내 타입이 아니다”라고도 했다.

캐럴은 곧 트럼프가 자신을 강간했다고 말을 바꿨다.

같은 해 11월 “현 미국 대통령이 수십 년 전 나를 강간했다”면서 뉴욕주 대법원에 트럼프에 대한 소송을 제기했다. 성폭행 혐의 형사소송이 아니라 명예훼손 혐의 민사소송이었다.

그녀는 트럼프의 비난으로 명성이 저해되고 잡지사(엘르)로부터도 해고당했으며, 트럼프의 외모 비하로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면서 “괴롭힘, 폭행, 침묵, 수치, 해고, 조롱, 비하당한 모든 여성을 대표해 이번 소송에 나섰다”고 주장했다.

재판은 연방항소법원으로 옮겨졌으나, 별 성과 없이 1심으로 환송됐다.

엘르 역시 캐럴을 해고하기로 한 결정은 트럼프와 무관한 사업적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렇게 사그라들던 이 이슈는 2022년 뉴욕주 의회의 ‘성인 생존자법(Adult Survivor Act)’ 통과를 계기로 되살아났다.

뉴욕주, 성범죄 공소시효 1년간 무효화

‘성인 생존자법’은 만 18세 이상 성범죄 피해자에게 범죄 발생 시기와 관계없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았다. 시효를 무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다만, 법안 발효일로부터 1년 동안만 한시적으로 허용하도록 했다.

민주당 소속 캐시 호철 주지사는 법안에 서명하면서 “성폭행 근절은 이 가증스러운 행위의 가해자를 정의의 심판대에 세울 수 있도록 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말했다.

앞서 뉴욕주는 2019년 성범죄 피해 아동이 1년간 시효에 상관없이 소송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아동 피해자법’을 채택한 바 있다.

그러나 피해자가 성범죄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소송을 결심하기까지 수년의 세월이 필요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이번에 ‘성인 생존자법’을 마련했다.

캐럴의 소송은 이 법이 적용된 첫 사례다. 그녀는 ‘성인 생존자법’이 발효된 첫날인 작년 11월 24일 트럼프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뉴욕남부연방지방법원의 루이스 캐플런 판사가 배심원단에게 숙의 과정에 대한 절차를 설명하고 있다. 2023.5.9 | 로이터/연합뉴스

배심원단 “성폭행 기각, 성추행은 인정”

9일 재판에서 배심원단은 증거 부족을 이유로 성폭행 혐의를 기각했다.

배심원단은 다만, 트럼프의 폭행(성추행 포함) 혐의를 인정했으며 명예훼손 혐의에 대해서도 모두 인정했다.

트럼프 측 변호사는 이를 “이상한 평결”이라고 평가했다.

원고가 성폭행을 주장했는데, 배심원단이 이를 기각하고 그 대신 성추행으로 판단했다는 점에서 평결이 석연치 않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그는 자신의 SNS에 “나는 이 여자가 누군지 전혀 모른다. 이번 평결은 사상 최악의 마녀사냥이자 (미국의) 불명예”라고 썼다.

또한 뉴욕주 사법 시스템이 민주당에 의해 완전히 장악됐다면서 배후에 차기 대선에서 압도적으로 유력한 후보인 자신을 낙선시키려는 정치적 동기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번 재판은 27년 전 사건을 다룬 것인 만큼, 이번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피고인의 진술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느냐는 점이었다. 트럼프 측이 항소하면 2심에서도 같은 문제가 다시 부각될 수 있다.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 쟁점

캐럴 측 변호사인 로베르타 카플란은 “피고인의 모든 진술은 다른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거나 확증됐다”며 피고인의 진실성을 강조했다.

또한 카플란 변호사는 트럼프에게 성폭행당했다고 주장하는 다른 여성 2명의 증언을 예로 들어 트럼프의 위법 행위에서 특정한 패턴이 있었고 캐럴의 증언에서도 같은 패턴이 포착됐다고 말했다.

트럼프 측 타코피나 변호사는 캐럴이 범행의 세부 사항에 대해 기억해 내지 못했다며 그녀의 증언을 신뢰하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타코피나 변호사는 “캐럴은 사건이 무슨 요일에 발생했는지 말하지 않았다. 100%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며 “우리는 무엇이 허구인지 목격함으로써 사실을 알아낼 수 있다”고 덧붙였다.

뉴욕 맨해튼 5번가에 위치한 버그도프 굿맨 백화점 쇼윈도 앞을 행인이 지나고 있다. 2013.4.10 | 사미라 바우어/에포크타임스

미국의 유명 헌법 및 형법학자인 앨런 더쇼비츠 전 하버드 로스쿨 교수는 에포크타임스에 법 절차적 측면만 놓고 봤을 때 이 사건은 잘못된 소송이라고 평가했다.

더쇼비츠 전 교수는 “시효는 역사적으로 25년 전, 그 이전에 발생한 사건에 대해 소송을 면하도록 하자는 취지”라며 “25년 전 일에 대해 어떻게 기억하겠나”라고 말했다.

덧붙여 원고인 캐럴이 사건이 발생한 해를 1995년 혹은 1996년으로만 기억했을 뿐, 날짜와 시간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더쇼비츠 전 교수는 “일반적으로는 거부될 사건이지만 이번에도 역시 도널드 트럼프였다”며 트럼프였기에 재판으로 이어졌을 수 있음을 시사했다.

그러면서 “중도층 유권자들은 어쩌면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싶을 수 있다. 하지만 연기는 누군가의 방화로 발생할 수도 있다. 내 생각에 이런 불길의 다수는 트럼프를 겨냥한 정치적 설계에 따른 것”이라고 논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