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빈 ATM, 하루 19만원 출금제한…중국 곳곳 뱅크런

니콜 하오
2022년 06월 26일 오후 12:33 업데이트: 2022년 06월 26일 오후 12:33

세계 2위 경제 대국 중국에서 최근 일주일 이상 ‘뱅크런’(예금 지급불능을 우려한 고객이 몰려드는 사태)이 일어나고 있다. 대부분 은행이 중앙정부 혹은 지방정부와 연계된 중국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중국 경제침체를 드러낸 또 하나의 지표로 풀이된다.

현지 언론보도를 종합하면 중국 경제수도 상하이를 비롯해 중국판 실리콘밸리인 광둥성 선전, 랴오닝성 단둥, 장시성의 항만도시 주장에서 은행 고객들이 예금 인출에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초 중국 중부 허난성에서 수조 원 규모의 예금동결 사태로 100만 명 이상이 예금을 인출하지 못해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진 이후에도 비슷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은행들은 하루에 제한된 고객만 받거나 1인당 하루 최대 인출금액을 1천 위안(약 19만원) 이하로 제한했다. 아예 지점을 폐쇄하고 ATM 기기도 내부 현금을 텅 비워버린 은행도 있었다.

중국 문제평론가 왕허는 “뱅크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은 중국 경제 시스템 자체가 위기에 봉착해 있는 데다 중국 정권이 이를 해결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지적은 중국고등연구원 원장 정융녠(鄭永年)의 발언을 염두에 둔 것이다.

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의 책사로 외교와 경제 분야 전문가인 정융녠은 지난 1일 한 논평에서 “중국 경제가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며 중국은 현재 공급망 위기와 현금 부족으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논평은 발표 직후 중국 인터넷에서 삭제됐다.

상하이 징안 지구의 한 은행 앞에서 은행 직원이 현금을 인출하려는 고객들과 이야기하고 있다. 2022.6.1 | Hector Retamal/AFP via Getty Images=연합뉴스

중국판 실리콘밸리 선전의 현금 인출난

뱅크런은 지방은행에만 한정된 일이 아니다. 지난 21일 선전에 거주하는 천모씨는 에포크타임스 계열 위성채널 NTD와의 인터뷰에서 “오늘 시내에 있는 한 중국농업은행 지점 앞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다. 이런 긴 줄은 처음 봤다”고 말했다.

중국농업은행은 중국 4대 국영은행 중 하나다. 이 은행 고객이기도 한 천씨는 은행 측이 실수로 고객 계좌를 동결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흥미로운 점은 은행 측의 대응이다.

중국농업은행은 자기네 실수로 동결한 계좌를 해제하려면 고객들에게 선전시 ‘거주증’을 은행에 직접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거주증’은 중국의 일반적인 신분증인 ‘거민신분증’과는 다른 증서다. 지방정부에서 발행하며, 해당 지역에 거주할 때 발급해주는 신분증이다.

중국은 거주지 이전의 자유가 없기에, 누구나 자신의 법적 거주지에 거주해야 한다. 취업, 학업 등으로 다른 도시에 거주하려면 해당 도시 지방정부가 발급하는 ‘거주증’이 필요하다. ‘거주증’이 없다고 다른 지역에서 거주 자체가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본권이 대폭 제약돼 생활이 매우 불편해진다. 상황에 따라 원래 법적 거주지로 강제 송환될 수도 있다.

즉, ‘거주증’을 제출해야 동결된 은행계좌를 해제해주겠다는 것은 선전이 아닌 다른 도시 출신 사람들에게는 은행계좌 해제를 포기하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선전은 중국에서 가장 발전된 도시의 하나다. 이곳 직장인 대부분은 다른 도시 출신이다.

천씨는 “실수를 가장해 은행계좌 동결했다는 합리적 의심을 떨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현재 선전에서 은행에 들어 있는 현금을 찾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 됐다”며 “긴 대기줄이 늘어선 은행 창구를 피해 현금인출기를 이용하려고 해도 현금이 들어 있는 기기를 찾기가 어렵다. 시내 여러 곳을 돌아다녀 봤지만 마찬가지다. 실은 두 달 전부터 현금인출이 어려워졌다. 중국농업은행과 중국건설은행 두 곳에서 인출하려 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쉽지 않았다”고 했다.

천씨와 인터뷰를 진행한 이날, 중국 소셜미디어에는 선전 바오안구에 산다는 한 남성이 올린 영상이 논란이 됐다. 이 남성은 “사람들이 오전 6시부터 은행 앞에서 줄을 섰으나, 9시에 은행이 문을 열었을 때 은행에 지급해줄 현금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며 “은행은 왜 지급해줄 현금이 없는지 설명하지 못했다”고 했다.

중국 랴오닝성 단둥의 단둥은행 지점 앞에 길게 늘어선 대기줄 | 화면캡처

북한과 인접한 랴오닝성 단둥에서도 뱅크런

단둥은 중국 북동부 랴오닝성의 주요 도시다. 북한과는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인접해 북중 교역 중심도시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최근 몇 주간 단둥 시민들은 잔고가 아무리 많아도 은행 계좌에서 이를 인출할 수 없다고 불평해왔다.

지난 20일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영상에서 한 단둥 시민은 “이런 상태가 지금 일주일째다. 매일 아침 사람들이 현금을 인출하기 위해 긴 줄을 늘어서 있다. 오후에 우리 차례가 됐지만, 은행은 돈이 없다고 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 남성은 단둥의 고용주들은 직원들 급여를 은행계좌로 입금하고 직원들은 이를 현금으로 인출해 생활비로 사용하지만, 현금 인출이 어려워지면서 생활도 어려워지고 있다고 했다.

또 다른 단둥 시민은 은행 여러 곳을 돌았지만 현금을 인출할 수 없다고 했다.

장시성 구장시에서도 중국농업은행 전 지점에서 현지 거주증이 없는 고객은 1000위안(약 19만원) 이하의 현금만 인출할 수 있다는 주민 제보가 있었다.

중국에서 가장 발전된 도시인 상하이에서도 아침부터 은행 앞에 선 대기줄을 볼 수 있었다. 상하이 시민 황모씨는 이날 NTD에 은행들이 하루 고객을 300명으로 제한해 사람들이 새벽부터 줄을 서야 했다고 말했다.

상하이 현금 인출 행렬 | 연합뉴스

황씨는 “은행 앞에서 만난 80대 남성은 자신이 이날 오전 4시부터 기다렸다고 말했다. 그는 오전 9시에 은행이 문을 열었을 때 대기표를 받았는데 107번이었다고 했다. 자신이 언제 호명될지 알 수 없지만, 몇 시간이든 현장에서 기다려야 했다고 했다. 번호를 불렀을 때 자리에 없으면 바로 다음 차례로 넘어갔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중국에서는 위챗페이, 알리페이 등 간편결제 시스템이 잘 구축돼 있어, 현금이 없더라도 일상생활에는 큰 불편이 없다. 하지만, 자신의 계좌에서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 현금을 인출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예금주에게 단순한 불편 이상의 불안감을 주고 있다.

간편결제에 익숙하지 않아 현금사용을 선호하는 노인들은 더욱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모바일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70~80대 고연령층은 전기요금, 수도세 등 공과금을 제때 납부하지 못하는 일도 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