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화룡춤 축제,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된 ‘불꽃의 전통’

제니 정(Jenny Zeng)
2023년 10월 10일 오후 6:55 업데이트: 2024년 01월 19일 오후 5:21

매년 중추절이 되면 홍콩의 타이항 지역에는 불꽃이 일렁인다. 홍콩의 전통문화인 화룡춤(Fire Dragon Dance) 축제가 열리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 전염병을 막기 위한 주민들의 염원에서 시작된 이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며 홍콩 전역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에포크타임스는 2022년 별세한 ‘화룡춤의 아버지’ 찬 탁 파이를 생전에 인터뷰한 바 있다. 인터뷰에서 그는 이 유서 깊은 전통에 관해 이야기하며 ‘화룡춤 전통문화 박물관’을 설립하고 싶다는 소원을 밝혔는데, 그는 기적처럼 마지막 소원을 이루고 세상을 떠났다.

‘화룡춤의 아버지’로 불리는 고(故) 찬 탁 파이가 에포크타임스의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 Zeng Lian/The Epoch Times

살아있는 유산, 찬 탁 파이

그는 1946년 홍콩의 타이항 지역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만 해도 타이항은 논, 밭이 많고 그 주변에 개울이 흐르는 조용한 시골마을이었다. 마을사람들은 주로 농업이나 어업 등에 종사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리고 매년 중추절에 화룡춤 축제를 펼치며 건강과 번영을 기원했다.

타이항의 화룡춤은 1880년경에 처음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에 전염병이 창궐해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는데, 용 모형을 제작한 뒤 향을 피워 전염병이 사라지게 해 달라는 의식을 치렀다.

이 의식 이후 기적적으로 전염병이 사라졌다. 그때부터 마을사람들은 중추절에 용 모형으로 독특한 의식을 치렀고, 이것이 전해져 내려와 화룡춤으로 발전했다.

찬 탁 파이는 어린 시절부터 화룡춤 축제를 즐겼다. 6세 무렵에 등불을 만드는 일에 참여하는 등 축제 준비를 도왔고, 성인이 된 이후로도 화룡춤 행사에 꾸준히 참여했다.

1997년 화룡춤 축제를 주도하던 원로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자, 찬 탁 파이는 이 소중한 전통문화를 지켜내기 위해 직접 나서야겠다고 결심했다. 이후 그는 매년 화룡춤 축제의 기획부터 준비, 진행 등을 도맡았다.

찬 탁 파이는 홍콩의 문화적 유산을 보존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헌신과 노력 덕분에 화룡춤 축제가 약 150년간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다.

2023년 화룡춤 축제에서 펼쳐진 어린이 연등 행사 | Song Bilong/The Epoch Times

화룡춤, 위기를 극복하는 힘

2003년 홍콩은 사스(SARS)가 창궐해 공포에 휩싸인 바 있다.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홍콩 전역이 전염병의 공포로 꽁꽁 얼어붙었다.

당시 찬 탁 파이는 화룡춤 축제가 홍콩의 얼어붙은 분위기를 녹일 수 있다고 믿었고, 정부의 승인을 받아 도시 전체에서 화룡춤 공연이 이뤄지도록 행사를 기획했다. 그렇게 2003년 5월 17일 홍콩 곳곳에서 화룡춤 축제가 펼쳐졌다.

찬 탁 파이는 “그때의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화룡춤으로 인해 모든 시민이 힘을 얻었다. 화룡춤이 위기를 극복할 힘을 준 것”이라고 고백했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에도 찬 탁 파이의 노력은 계속됐다. 결국 엄격한 집합금지명령으로 인해 대규모 공연은 무산됐지만, 그는 홍콩의 문화적 생명줄이 끊기지 않도록 화룡춤의 핵심 의식을 이어갔다.

당시 그는 “홍콩의 경제나 관광을 활성화하려는 게 주요 목적이 아니다. 한마음으로 전염병이 사라지길 기원하는 전통적인 본질과 가치를 보존하기 위함”이라고 강조했다.

불꽃에 새겨진 유산, 찬 탁 파이의 소원

찬 탁 파이는 전통문화와 가치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시대와 맞서 싸우며 화룡춤 축제를 보존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또한 이 귀중한 문화유산의 살아있는 아카이브 역할을 하길 바라며 화룡춤 전통문화 박물관을 설립하고자 했다.

찬 탁 파이는 그 원대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2015년 6월 타이항의 3급 역사건물(홍콩 유물관리국에서 역사적 기념물로 지정한 건물)을 인수했다. 이후 정부에 박물관 설립 계획을 제출했고, ‘홍콩 역사건물 활성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선정돼 설립 승인을 받았다.

이에 감격한 찬 탁 파이는 화룡춤에 관한 모든 자료, 사진, 영상 등을 검토해 박물관의 구성 및 전시 내용을 기획했다.

2022년 6월 11일, 마침내 화룡춤 전통문화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찬 탁 파이는 개관식에 참석해 화룡(火龍)보다 더 밝게 자리를 빛냈다.

2023년 9월 28일에 촬영된 홍콩의 화룡춤 축제 현장 | Song Bilong/The Epoch Times

마지막 공연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열리지 못했던 화룡춤 축제가 중단 3년 만인 2022년 11월 20일 화려하게 불타올랐다. 당시 76세의 찬 탁 파이는 수많은 무용수들과 함께 축제 현장에 참여했다.

안타깝게도 이 축제는 그의 마지막 무대가 됐다. 그로부터 불과 2주가 지난 2022년 12월 4일, 찬 탁 파이는 타이항 주민복지협회에서 홀로 일하던 중 심장마비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온라인 평론가들은 “전통문화를 보존하는 데 평생을 바친 그의 삶이 팬데믹 시대의 종말과 함께 마무리됐다”며 찬 탁 파이를 추모했다.

찬 탁 파이는 마지막 공연을 끝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문화유산은 앞으로도 계속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김연진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