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가치 2조원’ 전 재산 독립에 바친 이석영 선생을 아십니까

황효정
2024년 02월 16일 오후 5:53 업데이트: 2024년 02월 16일 오후 6:23

90년 전 오늘인 1934년 2월 16일, 중국 상해에서 백발이 성성한 한 노인이 쓸쓸히 숨을 거뒀다.

죽기 전 노인은 먼저 떠나간 가족들을 떠올린다. 자신보다 먼저 간 아들들부터 모든 것을 함께했던 형제들…

그로부터 90년이 흐른 2024년 2월 16일, 서울 중구 이회영기념관에서는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 90주기 추모식이 거행됐다. 이 자리에는 이석영 선생의 직계 후손 등 주요 내빈 30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추모식은 추모 묵념에 이어 고인 약력 보고와 추모사 낭독, 후손 대표 인사, 추모 공연 및 헌화 순서로 엄수됐다.

이종걸 우당이회영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추모사에서 “선생께서 순국하신 지 벌써 아흔 해가 됐다. 선생은 조선 최고 부자였으나 이역만리 차디찬 겨울에 아사(餓死)했다. 해마다 2월 16일이 다가오면 자랑보다는 부끄러움이라는 자책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면서 “90주기가 된 오늘은 더 죄인이 된 심정”이라고 밝혔다.

이 이사장은 “(선생께서) 처음 열어 가셨던 그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벼리지 않으면 자칫 길이 끊어질 수 있다는 염려를 지우기 어렵다”면서 “개척하면서 나아가셨던 자주독립의 길, 보편적 인간 양심에 기초한 민주사회의 길을 저희 후손들이 반드시 지켜내겠다”고 다짐했다.

2월 16일 서울 중구 이회영기념관에서 영석 이석영 선생의 후손 김창희 씨가 후손 대표로 인사를 하고 있다.|한기민/에포크타임스

이석영 선생의 후손 김창희 씨는 “이석영 할아버지를 이야기할 때는 전 재산을 바쳤다는 돈 얘기가 주로 나오는데, 할아버지는 재산만 바친 게 아니라 실은 선각자적인 생각을 가지고 계시던 분이었다”며 고인을 기렸다.

영석 이석영 선생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1910년 형제들과 결의해 함께 만주로 떠났다.

당대 최고의 자산가로 꼽혔던 이석영 선생은 전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그 돈으로 간도에 무장항일투쟁의 초석이 되는 기관인 신흥무관학교를 건립했다.

당시 이석영 선생이 형제들과 합심해 마련한 자금은 40만 원,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무려 2조 원에 이르는 액수였다. 그 돈으로 학교를 운영하고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을 토지를 매입했다.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모여든 사람들의 식비도 댔다.

1918년, 일제의 ‘불령선인’으로 지명수배된 이석영 선생은 중국 각지를 떠돌면서 은거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두부 비지로 끼니를 연명하는 등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당시 상해에서 발행되던 ‘한민(韓民)’지는 “이석영이 수많은 재산을 신흥무관학교 운영에 모두 쏟아붓고 나중에는 지극히 곤란하게 생활하면서도 일호의 원성이나 후회가 없고 태연하여 장자(長子)의 풍이 있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1934년 2월 16일, 이석영 선생은 중국 상해 빈민가의 어느 다락방에서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홀로 눈을 감았다. 자신을 뒤따라 독립운동에 투신한 아들을 일제에 의해 잃은 뒤였다. 사인은 아사(餓死)였다.

2월 16일 서울 중구 이회영기념관에서는 독립운동가 영석 이석영 선생 90주기 추모식이 거행됐다.|한기민/에포크타임스

가진 부로 편안히 살아갈 수 있었음에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영석 이석영 선생. 그러나 그간 이석영 선생의 고단한 삶과 업적은 비교적 널리 알려지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석영 선생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열린 이날 추모식에서 이석영 선생의 증손녀 김용애 여사는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지금 내가 아흔입니다. 어렸을 때 저희 어머니가 물을 떠놓고 늘 기도했던 모습이 생생해요. 어머니는 우리 조상을 위해서라고 하셨죠. 그러면 어린 저는 어머니께 기도한다고 다시 오시겠냐고 되묻고는 했습니다…”

“이런 날만 기억을 해주지 마세요. 이런 애국지사들 때문에 오늘날이 왔습니다. 전 재산과 모든 목숨을 바치신 그 위에 우리 대한민국이 이렇게 있습니다. 그들의 희생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만 기억하지 말아 주십시오. 항상 기억해 주십시오. 이것은 한 가정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의 한 페이지입니다.”

“이제는 다 함께 기도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2월 16일 서울 중구 이회영기념관에서 이석영 선생 영정의 바로 오른쪽, 증손녀 김용애 여사가 영정 옆에 나란히 서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한기민/에포크타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