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주어진 젊음 어찌 보내야 하는가” 내 것 버려 조국 구한 남자

이연재
2022년 02월 28일 오후 6:21 업데이트: 2022년 02월 28일 오후 6:21

일제는 1904년 한일의정서를 시작으로 을사늑약, 정미7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 토대를 구축한 후 1910년  ‘한일병탄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조건 |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 :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통해서 한국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해야 되겠다라고 마음을 먹게 되는 것이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게 ‘러일전쟁’이고 그리고  ‘한일의정서’입니다. 1905년에 (전쟁이) 끝난 직후에 을사늑약을 통해서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게 되는 것이죠.”. 

“외교권을 빼앗겼다라고 하면 단순히 외교부의 어떤 역할 하나가 없어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듭니다만 사실 그게 아니고 외교권을 빼앗겼다는 것은 대한민국이 세계 지도에서 사라졌다는 걸 의미한다는 거예요.”

“이 사건에 한국민들이 굉장히 많이 비분강개하는 그런 상황이 벌어지게 된 거죠. 그래서 한국의 지도층들, ‘을사오적’이라고 부르는 그런 분들은 을사늑약을 맺으면서 사실은 국권을 하나씩 하나씩 팔아먹는 그런 행위들을 했습니다만 한국민들은 거기에 저항해서 일본군의 강압적인 토벌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을 했던 것이죠. 그 대표적인 게 의병이었고요. 그 의병 활동이 1905년부터 또 굉장히 활발하게 벌어지게 됩니다.”

조선총독부는 양반들에게 작위를 내리고 막대한 은사금을 주면서 ‘독립운동은 상놈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선전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일제가 준 귀족 작위와 돈에 환호했습니다.

식민통치에 협력한 왕족들과 관료들은 일왕에게 작위를 수여받고 ‘조선귀족’이 됐습니다. 구대한제국 지배계급에 대한 회유정책으로 탄생한 조선귀족은 나라를 잃은 명문가 집안의 흔한 선택이었습니다.

[조건 |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 :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지 조선이라고 하는 이 영역을 통치하게 되면서 거기에 대한 통치 방침도 두 가지로 갈리는 거죠. 예를 들면 친일 부역자들과 의병이 나뉘어 있듯이 일본 제국주의가 이 둘을 상대하는 방법도 달라지는 것이거든요.”

“예컨대 친일 부역자들에게는 ‘아, 너네가 아주 열심히 우리를 도왔으니까 너네에게 상을 줄게’ 그래서 ‘은사금’이라고 해서 일본 천왕이 내리는 돈을 준다거나 토지를 준다거나 또는 작위를 주는 거죠.” 

”조선 왕조가 이씨 왕조라고 하니까 그 ‘이’를 따서 ‘이제 너네는 천황의 일족이야’ 이씨 왕조가 천왕의 일족이라고  포함을 시킨 거죠. 그래서 그걸 ‘이왕’이라고 불렀고 그 일족의 그 부류를 ‘이왕가’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관련된 사람들을 귀족으로 임명을 하고 이 사람들을 ‘조선귀족’이라고 불리게 되고 일본과 마찬가지로 작위를 주는 거죠.  백작, 자작, 남작 이렇게 작위를 주게 됩니다.” 

“채찍과 당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계속 민중들을 탄압만 해가지고는 안 되니까 한국 사회 내에 우리말을 잘 듣고 또는 우리를 대신해, 우리에게 저항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거나 또는 회유할 만한 세력들을 만들어야 된다는 것이죠. 그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 ‘조선귀족’이라고 불렸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조선귀족이 되길 자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작위를 수치로 여겨 자결한 이도 있었고 자신의 안위보다 나라를 위해 뜻을 둔 이도 있었습니다.

[조건 |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 :

“한말 때부터 의병 운동을 했던 가문도 있고 그리고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다가 ‘병탄 조약’이 맺어지니까 자결했던 매천(梅泉) 황현(黃玹) 같은 양반가도 있는 것이고요. 이회영 일가 같은 경우에는 그런 면에서는 굉장히 모범적이고 선구적이고 그리고 용기 있는, 우리 민족을 위해서 본인들의 가문 전체를 희생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거죠.”

임진왜란의 공신 이항복의 후손이자 대대로 정승을 배출한 조선 최고 명문가 출신 이회영과 그의 형제는 몇 대에 걸쳐 풍족하게 쓸 어마어마한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가족들을 데리고 중국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차라리 대의가 있는 곳에서 죽을지언정 왜적 치하의 노예가 되어 생명을 도모한다면 이는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

[신효승 |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 :

“대한제국의 위치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걸로 ‘일본을 중심으로 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1905년도 이후에 만들어지기 시작해요. 이 사람들은 이완용 같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해서 새롭게 분기되기 시작하죠. ‘고종으로는 안 돼’. 이완용 같은 사람들은 ‘일본을 중심으로 해서 새롭게 재편을 해야 돼’라고 생각해요. 근데 여기에 ‘이렇게 해서는 안 돼. 일본 중심으로는 안 돼. 외국 사람을 중심으로는 안 돼. 우리 민족 중심으로 해야 돼.’ 그래서 주체를 새롭게 형성하려는 사람들이 또 생겨요.”

“그 이 사람들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그런 모습으로 많은 모색을 하면서 찾아다니기 시작해요. 그 사람들이 간 곳이 중국 압록강 쪽이에요.”

해외에서 독립운동 터전을 일구겠다는 생각으로 나선 길.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서간도에서 형제는 그 재산을 모두 쏟아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이러한 고초는 망국대부(亡國大夫)의 가족으로서 국가에 속죄하는 것이며, 선열의 영혼에 사죄하는 것이고, 동시에 내일의 자주 국민이 되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신효승 |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 :

“군인으로 만들어서 세력을 양성해서 이들이 어느 정도 일정 기간이 되면 국내 세력들과 같이 공조해서 국내에 그 일본 세력을 몰아내겠다는 전략 . ‘국내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어.’  그것을 가장 깔끔한 사례로 보여줄 수 있는 게 ‘신흥무관학교’라는 거죠.”

형제는 해마다 신흥무관학교의 학생들의 학비와 숙식비를 지원했는데,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의 회고록을 보면 당시의 환경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잘해야 일중식(하루 한 끼만 먹음)이나 하고 그렇지 않으면 절화(밥을 짓지 못함)하기를 한 달이면 반이 넘으니 생불여사(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못한 삶)로다.”

[이종걸 |이회영 선생 손자 ]

“수기로 쓰신 할머니 책에 보면 실제 병마와 싸우는 것이 더 큰일이었다.  그리고 제대로 식량을 구하지 못해서 어려움들이 많았다. 그때 보면 한 절반은 군사전투 훈련도 하고 또 제식 훈련하고 한 절반 정도는 병마 그리고 추위와 더위와 싸우는, 역병 풍토병과 싸우는 일들이 훨씬 더 많은 고통을 주는 일이었다.”

신흥무관학교는 청년들에게 일본이 금서로 지정한 조선어와 역사를 가르치고 군대 전술과 총기 사용, 게릴라 전술을 훈련시켰습니다.

그 결과 신흥무관학교는1920년 폐교되기까지 10년 동안 3천여 명의 독립군을 배출하며 독립운동의 주축이 됐습니다.

무관학교 운영에 전 재산과 열정을 쏟아부은 지 10여 년.

6형제는 중국 각지에 흩여져 나라의 독립을 위한 투쟁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이종걸 \ 우당 이회영 선생 손자 ] :

“홍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열사가 시라카와라고 하는 일본 사령관을 사살한 그런 사건인데요. 그때 백범 김구 선생님은 윤봉길 선생을 도시락 폭탄으로 무장시켜서, 중국인으로 변장시켜서 그 현장에 잠입하게 했던 반면에 이회영 선생은 중국어에 능통한 구파 백정기 선생, 그분은 명사수였어요. 총을 소지하고 현장에 잠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윤봉길 선생님의 폭탄 투척이 아주 성공적으로 끝났기 때문에 우당 이회영 선생과 구파 백정기의 명사수로서의 거사 행동은 역사 속에서 보지 못하게 됐다.”

1945년. 일제로부터 독립한 날.  6형제 중 살아서 돌아온 이는 단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둘째 이석영은 상하이 빈민가를 떠돌다 아사했고, 여섯째 이호영은 일본군의 습격으로 가족 전체가 몰살당해 시신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넷째 이회영은 관동군 사령관을 암살하기 위해 만주로 가던 중 모진 고문으로 순국했습니다.

[신효승 |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 :

“우리나라가 1945년도 해방된 이후부터 48년도 정부 수립할 때까지 엄밀하게 따져서 ‘주어진 국가라고 얘기를 많이 해요. 지금 외국에서 우리나라에 대한 바라보는 역사적 관점에서는 주어진, 그냥 얻어걸린 권리라고 얘기하는 경우가 많아요.”

“왜냐하면 우리는 광복군이라고 투입됐다고 했지만 아쉽게도 실질적으로 우리는 우리에 대해서 희생을 별로 안 했어요. 근데 우리 역사에서 이게 과연 없는 건가라고 다시 한번 되묻는다면 우리는 꾸준히, 이 전쟁 한 번이 아니라 이전부터 1900년도 초반부터 그 이전 청일전쟁부터 그 이전부터 심지어 우리는 병인양요부터 우리의 주권을 지켜오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왔고 그 사람들의 피가 우리 땅에 흘려서 현재의 나라가 만들어진 거야라고 설명하는 거죠..”

“그래서 이회영이나 이시영 같은 분들을 그냥 대명사라고 얘기해요. 이분들은 하나의 대명사로서 전체의 대의를 표현해 준 거다. 결과론으로서 ‘뭐 안 됐지 않냐’라고 ’이회영 안 됐지 않냐’라고 질문 들어오면 그런 게 아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6형제. 한국의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입니다.

“누구나 단 한 번 살고, 단 한 번 죽는 인생. 그 한 번의 삶을 어찌 살아야 하는가. 또, 그 삶에 주어진 한 번의 젊음을 어찌 보내야 하는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목적 달성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는다면 이 또한 행복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