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형사재판 등 굵직한 사건 앞둔 연방대법원…“블록버스터급 한 해”

샘 도먼
2024년 04월 11일 오후 3:49 업데이트: 2024년 04월 11일 오후 3:49

민주당, 11월 미국 대선 전까지 형사재판 총공세
트럼프, 대법원 면책특권 심리 보루 삼아 방어전
양극화·정치논란 심해진 여론…대법원 판결에 압력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3월 7일(이하 현지 시각) 이례적으로 황금시간대에 발표한 국정연설(연두교서)을 통해 연방대법원에 강력하게 경고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여성 낙태권을 인정한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에 대한 대법원의 번복 결정이 정치적 후폭풍을 불러올 수 있다며 “여성들은 선거권이나 정치적 힘이 없는 존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미국의 행정부 수장은 사법부 최고 기관인 대법원을 향해 공개적으로 압박을 가했다. 이러한 압박은 오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상대로 한 소송전이 전개됨에 따라 그 수위가 계속 높아지고 있다.

트럼프는 오는 11월 미국 대선의 향방을 결정 짓는 주요 경합지 7곳 중 6곳에서 앞서고 있는 유력한 대선 후보이며, 대법원에서는 그와 관련된 2건의 사건이 심리 중이다.

피터 나바로 전 백악관 보좌관 등 트럼프 측근들도 각종 소송에 휘말리거나 옥고를 치르고 있다. 나바로 보좌관은 의회 모독 혐의가 인정돼 지난 1월 징역 4개월이 선고됐다. 항소가 기각돼 수감 중이다.

2020년 부정선거 논란 이후 수년간 이어진 소송전은 올해 최고조에 이를 전망이다. 미국 싱크탱크 헤리티지 재단의 존 말콤 부회장은 에포크타임스에 “법원으로서는 올해가 블럭버스터급 한 해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몇몇 판사들, 연방대법원장은 법원 판단의 ‘합법성’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심히 우려해 왔다”며 “어느 때보다 중요한 대선을 앞둔 올해 대법관들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가 대선 관전 포인트의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수도 워싱턴DC에 있는 연방대법원 청사. 2024.3.22 | Madalina Vasiliu/에포크타임스

4건의 형사재판 걸린 트럼프, 대법원에 쏟아지는 관심

연방대법원은 최근 수년간 미국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친 결정을 내려왔으나 올해는 더욱 파급력이 큰 결정을 내렸거나 앞두고 있다. 하나는 지난 3월 트럼프의 대선 출마 자격을 인정한 판결이다.

이 판결은 트럼프의 출마 자격을 박탈한 콜로라도주 대법원 결정을 뒤집은 것이다. 부시와 고어가 맞붙은 대선의 재검표 공방을 다룬 2000년 재판 이후 선거 관련 최대 재판으로 꼽힌다. 미국 안팎에서 엄청난 관심이 쏟아졌다. 그만큼 대법관들이 받는 압력도 컸다.

당시 대법원 재판부는 판결에서 ‘수정헌법 제14조’를 근거로 미국 시민의 특권이나 면책특권을 제한하는 법안 제정은 주정부나 법원이 아닌 주의회 권한이라고 선을 그었다.

대법원이 앞둔 또 하나의 주요 심리는 오는 25일로 예정된 트럼프의 ‘대통령 면책특권’ 변론기일이다.

이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은 트럼프가 당한 4건의 형사사건 중 하나인 기밀유출 혐의에 영향을 줄 수 있다. 트럼프가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리조트에 사적으로 기밀문서를 보관했다며 제기된 이 사건은 플로리다 마이애미 연방법원에서 진행 중이다.

15일에는 또 다른 형사사건 재판이 뉴욕 맨해튼 지방법원에서 시작된다. 트럼프 측은 대통령 면책특권에 관한 대법원 판결이 나올 때까지 재판을 연기해달라고 했으나 판사는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재판은 미 대선 전 열리는 유일한 형사사건 재판으로 초미의 관심사다. 트럼프가 성인물 출연 여배우 대응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고자 회계장부 조작을 지시했다는 혐의를 다룬다. 면책특권에 대한 결정이 나오기 전에 시작되긴 하지만, 대법원 판결의 영향이 없진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결국 트럼프가 마주한 4건의 형사사건 모두 대법원의 면책특권에 관한 판결에 따라 기각되느냐 혐의가 인정되느냐 일정한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대법관들이 받는 부담을 가중시킬 조건들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뉴욕시 뉴욕 대법원에서 법정 밖에서 언론과 대화하고 있다. 2023.10.2 | Ed Jones/AFP via Getty Images/연합뉴스

총기 제한, 소셜미디어 규제…줄지은 빅 이슈들

연방대법원을 비롯해 미국 사법부가 마주한 난제들은 트럼프에 관한 사건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 사법부에서는 ‘쉐브론 원칙’ 수정에 관한 논의가 열리고 있다. 이 원칙은 입법부가 어떤 법조문에 해석의 여지를 줬는지 분명치 않을 때 행정부가 해석할 수 있도록 한다는 원칙이다. 그 해석이 합리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 사법부는 행정부 해석을 존중해야 한다.

행정부 해석이 일종의 법률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원칙은 입법·사법·행정 중 행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주요 기반으로 작용한다. 원칙이 수정된다면 전통적으로 행정권이 강한 미국의 행정국가 면모에 변화가 불가피하다.

쉐브론 원칙 수정 논의는 미국 정부의 총기 규제 움직임과도 연관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현재 미국 법원에서는 총기 규제와 관련된 주요 재판 3건이 진행 중인데 이 재판 결과와 쉐브론 원칙 수정이 맞물릴 경우 총기 소유권이 대폭 축소되거나 총기 규제 정책이 좌절될 수도 있다.

이들 3건은 ‘범프스탁(반자동소총을 자동소총으로 만들어 주는 장치) 금지에 관한 ‘갈랜드 대 카길’ 재판, 가정폭력 전과자의 총기 소지 금지로 촉발된 ‘미국 정부 대 라미’ 재판, 2018년 고등학교 총격 사건 이후 뉴욕금융감독 국장 마리아 뷜로가 전미총기협회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 재판 등이다.

소셜미디어 대기업들의 콘텐츠 검열과 관련한 소송도 연방대법원에서 심리 중이다.

플로리다와 텍사스주는 트위터, 페이스북이 트럼프 등 공화당 주요 인사나 우파 인플루언서들을 검열하고 있다며 이를 저지하기 위한 주 법률을 제정했다. 그러자 컴퓨터 및 통신 산업협회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 수정헌법 1조 위반이라며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이 재판에서 위헌 판결이 나오면 소셜미디어의 검열 투명성을 목표로 한 플로리다와 텍사스의 주법은 시행이 차단된다. 합헌으로 판단되면 페이스북, 트위터 등 미국의 소셜미디어 대기업은 이른바 ‘콘텐츠’ 조정 규정을 모두 공개해야 한다. 기업 측의 자의적인 콘텐츠 삭제나 검열은 크게 줄어들 전망이다.

헤리티지 재단의 말콤 부회장은 “이들 사건은 삼권분립, 헌법적 권리를 다루고 있다”며 “현재는 물론 미래의 법 적용에 관한 뜨거운 쟁점을 포함한 중요한 사건들”이라고 말했다.

(왼쪽부터) 케탄지 브라운 잭슨 판사, 조 바이든 대통령, 카말라 해리스 부통령이 백악관 남쪽 잔디밭에서 열린 잭슨 판사의 대법관 인준을 축하하는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걸어가고 있다. 2022.4.8 | Chip Somodevilla/Getty Images

대법원, ‘당파성’ 비난 공세 극복 과제

미국 연방대법원은 9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돼 있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을 필두로 클레런스 토머스, 새뮤얼 얼리토, 닐 고서치, 브렛 캐버노, 에이미 코니 배럿은 보수 성향으로 분류되며 소니아 소토마요르, 엘리나 케이건, 커탄지 브라운 잭슨은 진보 성향으로 거론된다.

가장 마지막으로 임명된 잭슨 대법관은 흑인 여성이다. 그녀를 임명한 바이든 대통령은 대놓고 인종과 성별을 고려했다고 밝혀 미국의 소수인종 우대 정책인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 논란이 촉발됐다.

대법원은 지난해 6월 어퍼머티브 액션이 소수인종에 대한 우대가 아니라 오히려 혜택을 받지 못하는 백인과 아시아계 대한 역차별이라며 위헌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이 판결은 미국 역사상 가장 논란이 됐던 판결 중 하나인 ‘로 대 웨이드'(여성 낙태권 인정) 판결을 뒤집은 대법원의 행보와 함께 민주당 지지자들의 반발을 샀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대법원은 사회적 논란이 큰 사건들에 대한 판결을 피하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보수 성향으로 분류된 6인의 대법관 가운데 배럿은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자는 결정에 반대표를 던졌고, 캐버노 대법관은 심리를 연기하자고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대법원은 2022년 6월 사법부가 낙태권을 보장하는 것은 무리한 결정이며 낙태권 보장 여부는 주 의회에 맡겨야 한다는 취지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었고, 그 후 미국에서는 진보 성향 시민들의 격렬한 항의와 시위가 잇따랐다.

여론조사 기관 제네럴 소셜 서베이에 따르면 이 결정 이후 연방대법원과 사법부에 대한 미국인들의 신뢰도는 5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갤럽 조사에서도 사법부에 대한 지지도는 2020년 7월 이후 하락세를 기록했으며 부정적 평가는 58%로 나타났다.

2022년 5월 퀴니피악 대학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과반수(63%)는 연방대법원이 주로 정치적인 동기에 의해 결정하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응답했다. 법에 따라 결정한다는 응답은 32%에 그쳤다.

그럼에도 대법원 지지도가 그렇게 낮은 것은 아니라는 분석도 있다.

갤럽은 2023년 보고서에서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에 관한 미국인들의 신뢰도가 각각 32%, 41%, 49%라며 사법부가 가장 높다고 밝혔다.

시민단체 사법위기네트워크(Judicial Crisis Network) 세베리노 간사는 에포크타임스에서 “정부기관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도가 전반적으로 하락하는 추세”라며 “낙태권 인정 번복 판결 이전부터 대법원을 겨냥해 발생한 시위를 고려하면 오히려 이런 수준의 신뢰도는 놀랍다”고 평가했다.

그녀는 “좌파 진영은 대법원이 진보적 정책보다 헌법을 우선시한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다”고 몇몇 사례를 언급했다. 대법원의 낙태권 인정 판결 번복 검토는 판결이 나오기 수개월 전 알려졌고 그사이 시위대가 대법관 집을 찾아가 항의하거나 심지어 살해 협박을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미 연방보안청에 따르면 대법관을 향한 심각한 수준의 위협은 2021년 224건에서 2023년 457건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사회가 갈수록 양극화되면서 정치적 대립이 과격해지는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 국회의사당 경찰이 국회의사당 주변을 경비하고 있다. 2023.10.13 | Win McNamee/Getty Images

정치인들, 과격 행동 부추기며 사태에 기름

사법부을 상대로 일부 시민들이 과격한 행동을 보이자, 정치권은 이를 자제시키는 대신 오히려 장려했다. 여론 조사, 공개 성명 등을 통해 사법개혁을 촉구하는 이들도 있었다.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척 슈머 의원은 2020년 ‘루이지애나 낙태법’관련 청문회에 앞서 카바오, 고서치 대법관을 지목하며 “당신들은 분노의 바람을 일으켰고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상원 사법위원회 민주당 의원들은 알리토, 토마스 대법관의 윤리성을 문제 삼으며 소환장 발부를 시도했다. 진보 성향인 소토마요르, 잭슨 대법관도 윤리성 문제로 조사를 받아야 했다.

세베리노 간사는 “연방대법원은 늘 그 시대의 가장 복잡한 법적 문제가 걸린 중대하고 부담스러운 사건을 다뤄왔다”며 “그러나 오늘날처럼 극좌파의 집요한 당파적 공격을 받은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민주당 소속 셸던 화이트하우스 상원의원은 연방대법관 임기를 종신에서 18년으로 제한하는 법안을 발의했으며 임기직으로 그 임기를 제한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보수 대법원을 손질하겠다며 구성한 ‘법원개혁위원회’ 소속 하버드 로스쿨의 로렌스 트라이브 교수는 대법관 정원 확대안을 지지했다. 정원 확대안은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당이 지지해온 것으로, 늘어난 자리만큼 진보 성향 대법관을 임명해 대법원 구도를 뒤엎겠다는 의미가 담겼다.

당초 정원 확대안은 대법원을 망가뜨린다며 바이든과 민주당 중진 의원들이 반대하던 방안이지만, 정권을 쥐게 되자 입장을 바꾼 것이다.

한편, 오는 11월 5일에는 대선뿐만 아니라 상원 100석 중 34석을 뽑는 선거가 치러진다. 공화당은 상원 탈환을 자신하고 있으며, 민주당으로서는 힘겨운 방어전이 예상된다.

이미 하원을 장악한 공화당이 이번 선거에서 대통령과 상원까지 가져가면 민주당으로서는 최악의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 트럼프의 사법 리스크, 주요 이슈에서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될 연방대법원을 둘러싸고 장외 공세가 거세지는 또 다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