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중국 교잡벼의 아버지’ 위안룽핑의 죽음이 불러온 5대 논란

2021년 5월 28일
업데이트: 2021년 5월 29일

지난 22일 위안룽핑(袁隆平) 중국 공정원 원사가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에서 9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이 뉴스는 지난 주말 중공 관영 매체와 중국 인터넷상에서 뜨거운 화제가 됐다.

위안룽핑의 죽음은 사실 평범한 뉴스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많은 원사가 세상을 떠났지만, 그 누구도 이렇게까지 대대적으로 다뤄진 적이 없다. 언론들은 위안룽핑을 ‘민족의 구세주’로 떠받들었고, 그의 업적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엄하게 단속했다. 이는 위안룽핑의 존재감이 그만큼 특별함을 말해준다.

위안룽핑의 죽음을 대하는 중공 당국의 태도는 매우 이례적이다. 수많은 사람이 길가에 늘어서서 애도하는 웅장한 장면을 연출했고, 후난(湖南)성 당서기 및 성장 등 고위 간부들까지 그에게 애도를 표했다.

인터넷에는 ‘나라에 둘도 없는 인물(國士無雙)’이라는 천편일률적인 글이 넘쳤다.

이는 중공이 위안룽핑의 죽음 관련 보도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모든 관영 매체의 보도 초점은 일치했다. 바로 중국인들은 ‘교잡벼의 아버지’인 위안룽핑 덕에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래서 그는 ‘위대한 구세주’이자 ‘나라에 둘도 없는 인물’이며, 그의 죽음은 중국에 엄청난 손실이라는 것이다.

이는 인터넷상에서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중요 논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위안룽핑은 교잡벼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한 자격이 있는가? △중국인들은 정말로 교잡벼 덕분에 굶주림에서 벗어났는가? △위안룽핑의 업적은 범접할 수 없는 신화인가?△위안룽핑은 대기근으로 수천만 명이 굶어 죽었다고 했는데 중공은 인정하는가? △중공이 위안룽핑을 신처럼 떠받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위안룽핑은 정말로 ‘교잡벼의 아버지’라 불릴 만한가?

첫 번째 논점은 사실 전문가들이 다룰 문제다. 일반적으로 한 분야의 ‘아버지’라는 칭호에 대해 적격 여부를 평가할 수 있으려면 그 분야의 전문가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식선에서 볼 때, 위안룽핑의 업적이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정도는 아닌 듯하다.

관영언론의 과거 보도에 따르면, 위안룽핑의 교잡벼는 1무(약 200평)당 수확량을 20% 늘려 7000만 명을 더 먹여 살렸다. 그러나 관영 언론은 당시 위안룽핑이 개발한 교잡벼는 보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규모 도열병이 발생해 벼를 수확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당시 또 다른 전문가 셰화안(謝華安)이 개발한 교잡벼 ‘산여우(汕優)63’이 때마침 나와 상황을 수습할 수 있었다. 또한 셰화안의 ‘산여우63’은 단위 면적당 생산량 부문에서 16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셰화안은 업계에서 줄곧 ‘교잡벼의 어머니’로 존경받고 있다. 그의 공적이 위안룽핑에 못지않지만 중공 당국이 이미 위안룽핑을 ‘교잡벼의 아버지’라고 칭했기 때문에 ‘아버지’라는 칭호를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업적 면에서 위안룽핑에 견줄 만한 사람은 셰화안 말고도 꽤 있다. 예를 들어 위안룽핑과 같은 공정원(工程院) 원사였던 저우카이다(周開達)의 경우, 세간에서의 서열과 지위는 위안룽핑과 비슷했다. 그는 위안룽핑과 전혀 겹치지 않는 강(岡)계열과 D계열 교잡벼를 독자적으로 개발했지만, 이 볍씨들이 서남 지역을 거의 독점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는 ‘서남 교잡벼의 아버지’라고 불렸다.

많은 사람이 위안룽핑을 슈퍼벼의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약 2주 전까지만 해도 신화통신(新華社)은 위안룽핑의 슈퍼벼에 대해 보도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이 ‘슈퍼 교잡벼’ 개념은 일본인이 가장 먼저 제시한 것이다.

중국인 중에서도 슈퍼벼 개념을 처음 제시한 사람은 위안룽핑이 아니라 미국에서 돌아온 전문가 양서우런(楊守仁)이었다. 현재 중국 바이두(百度) 백과사전에서 양서우런을 검색하면 그의 이름 뒤에 ‘중국 슈퍼벼의 아버지’라는 칭호가 붙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다른 예로, 북방의 전체 메벼 지역에도 위안룽핑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베이다황(北大荒·헤이룽장성 북부의 거대한 황무지) 벼의 아버지’라 불리는 쉬이롱(徐一戎)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사실 교잡벼 분야에서 위안룽핑만이 독보적인 존재가 아니며, 전문 기술상의 기여도나 실제 재배량에서 위안룽핑과 맞먹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위안룽핑이 ‘교잡벼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것은 사실 어떤 특수한 정치 환경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안룽핑이 중국인들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일까?

두 번째 논점은 과연 위안룽핑 덕분에 중국인이 배불리 먹을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상식적인 문제다. 중공은 중국인들이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이름에 ‘핑(平)’이 들어간 사람 두 명 덕분이라고 선전해 왔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개방 정책을 대표하는 덩샤오핑(鄧小平)이고, 다른 한 사람은 기술개발을 대표하는 위안룽핑이다.

이 말이 맞고 안 맞고는 차치하고 그냥 이 말 자체만 봐도 중국의 ‘식량 문제 해결‘에 있어 제도적 요인이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현재는 정치 풍향이 크게 바뀌어 덩샤오핑의 치적에 물타기를 하거나 심지어 그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정치적 올바름’이 돼버렸다. 따라서 우리는 기본 상식이 결여된 사람들이 ‘위안룽핑이 중국인들을 배불리 먹게 했다’는 논지의 글을 여기저기에 올리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중국의 주식은 옥수수, 쌀, 밀, 감자, 콩 등 다섯 가지이며, 그 가운데 쌀은 3분의 1만 차지한다. 그렇다면 위안룽핑의 교잡벼가 차지하는 비율은 얼마나 될까?

누군가 이에 대해 대략적인 통계를 낸 적이 있다. 그의 통계에 따르면, 각종 교잡벼의 총생산량은 식량 총생산량의 약 12분의 1을 차지하고, 그중 위안룽핑의 벼는 30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물론 필자는 위안룽핑의 업적을 폄하할 의도는 없다. 그의 교잡벼가 수확량을 늘렸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지만, 그의 기여도가 공산당 매체의 선동적인 보도만큼 크지 않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세계의 주요 쌀 생산국에는 위안룽핑 같은 인물이 없지만, 중국 대기근 같은 비극 또한 발생하지 않았다. 한때 비슷한 대기근을 겪었던 소련, 캄보디아 같은 나라들의 기근 종식도 위안룽핑 같은 인물이 나타나 온 민족을 구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중공 당국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3년 대기근(1958~1961년) 시기에 특별히 큰 자연재해는 없었다. 기근이 발생한 근본 원인은 1958년 마오쩌둥(毛澤東)이 일으킨 대약진운동에 있었다. 이는 인재(人災)였다. 대약진 운동이 멈추자 기근도 곧바로 끝났다.

덩샤오핑이 개혁개방 정책을 시행한 후 위안룽핑이 교잡벼 개발에 착수했다. 그러자 중국인들은 배고픔에서 점차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는 제도야말로 중국인을 굶주리게 한 근본 원인임을 말해준다.

위안룽핑은 한 인터뷰에서 대기근의 참상을 목격하고는 교잡벼를 개발할 결심을 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을 틀렸다. 중공이 만들어낸 대기근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증언한 것은 맞는 말이다. 위안룽핑의 이 말은 대기근을 부정하고자 했던 우마오펀홍(五毛粉紅·여론조작 댓글부대)들을 힘들게 했다. 그들이 위안룽핑의 말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기근의 근본 원인이 쌀 생산량 부족에 있다고 본 것은 틀렸다. 그는 대기근의 본질이 쌀을 생산하는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공산주의의 제도적 문제라는 점을 간과했다.

중공이 위안룽핑을 신격화한 이유는?

현재 중공은 강도 높은 ‘(정권) 안정 유지’ 정책을 펴고 있으며, 위안룽핑에 대한 모든 의혹의 목소리를 짓누르고 있다. 수십 개의 웨이보(微博) 계정을 영구 폐쇄했을 뿐 아니라 당국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체포하기도 했다. 중공이 이러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자 우리가 다뤄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어째서 중공이 위안룽핑을 신격화하려 하는가’ 하는 것이다.

중공이 위안룽핑을 신처럼 치켜세우는 목적은 단 하나다. 중국인들이 굶주림에 허덕인 것은 벼 생산량이 너무 낮았기 때문이지 제도적인 문제나 정책적 잘못이 아니라는 인식을 중국인들에게 주입하려는 것이다.

중공은 이를 통해 공산 제도로 인한 대기근의 책임을 벗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중공이 14억 중국인을 먹여 살렸다’는 거짓말도 역설적으로 강화할 수 있게 됐다.

과거 중공은 ‘전 세계 농경지 7%로 전 세계 인구 22%를 먹여 살렸다’면서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중공의 뛰어난 리더십 덕분에 중국인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중들은 이 복잡하고 전문적이며 거대한 거짓말을 어떻게 쉽게 받아들였을까?

중공이 쓴 수단은 매우 간단하다. 바로 위안룽핑을 통해서였다. 중공은 위안룽핑이라는 매우 구체적인 인물을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 상징으로 만들었다. 대중은 ‘민족의 구세주’라는 위안룽핑의 영웅 이미지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중공이 중국인을 먹여 살렸다’는 잠재적인 주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이다.

이 둘은 아주 밀접하게 묶여 있다. 따라서 위안룽핑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단속하는 것도 진정으로 위안룽핑의 명성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들 정권의 정당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위안룽핑은 어쩌면 착실한 과학자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공산당에 가입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중공이 그를 십분 활용하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중공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모든 중국인의 지혜를 빼앗아 자기들 것으로 만들고, 그것을 공산당의 공이라고 한다. 이것은 중공이 항상 써온 수법이다.

/탕징위안(唐靖遠)·중국문제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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