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미국은 한국전쟁 때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상)

선저우(沈舟)
2021년 10월 31일
업데이트: 2021년 11월 10일

중국 공산당 당국이 한국전쟁 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중공군의 사상자 수가 미군의 7배인 점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38선을 넘는다는 목적을 이루지 못한 점도 창피하게 여기지 않고, 마오쩌둥의 참전 결정이 잘못됐다는 점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은 한국전쟁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미국은 수동적으로 참전하고 수만 명이 사망했기 때문에 미국 입장에서는 큰 대가를 치른 대가로 38선을 지킨 것 외에는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미국이 한국전쟁을 언급하지 않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미국이 오늘날에도 감당해야 할 것들, 즉 미국이 한국전쟁 전후에 저지른 실수로 인한 결과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제 더 심각하고 더 큰 중공의 도발에 직면했다. 미국이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경우 한국전쟁보다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안 하고는 전적으로 미 행정부의 역사 안목과 용기에 달려있다.

첫 번째 실수, 중공에 대한 순진한 기대감으로 사태를 수수방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기습적으로 한국을 침공했을 때 미국 정부는 아무런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당시 미국이 설정한 극동방어선에는 한국과 대만이 포함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한 후 동아시아에서 오직 일본만이 공산주의 진영에 대항하는 동맹으로 여겨졌다.

2차대전 후 미국의 관심은 유럽에서 구소련과 대항하는 데 쏠려 있었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예견했지만, 적극적인 억지책을 쓰지 않았다. 북한의 침공이 미국을 견제하기 위함이고 또 미국이 한반도 전쟁에 개입하면 구소련이 유럽을 침공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관망과 망설임은 김일성이 중공과 구소련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한국 공격에 나서게 했다.

트루먼 당시 미국 대통령은 공산주의 확장에 저항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 트루먼은 2차대전이 끝나기 직전인 1945년 초 부통령에 막 취임했고, 수개월 뒤 루스벨트 당시 대통령이 사망하자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같은 해에 연합군은 나치 독일을 격파했고, 트루먼은 미군의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 일본에 원자폭탄을 사용해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냈다. 이어 트루먼은 공산주의에 맞서 냉전을 시작했다.

트루먼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대위 신분으로 포병중대를 이끌고 프랑스 전장에서 활약했다. 이 군인 출신 정치인은 마땅히 더 강경해야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중국 공산당은 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내전을 일으켰다. 1947년 미국 조사단 보고서는 국민당이 군사적으로 열세이고 중국 공산당이 중국을 통일할 가능성이 크다며 미국이 국민당 정부를 지원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트루먼은 이미 국민당 정부에 대한 무기 금수 명령을 내렸고, 국민당과 공산당의 정전협정에 참여했던 조지 마셜 당시 국무장관은 중공의 속임수에 넘어가 국민당 정부에 대한 지원을 완강히 반대했다.

1949年10月25日,中共軍隊抵達香港以北3公里的深潭,唱著讚美毛澤東的歌。(STAFF/AFP via Getty Images)
1949년 10월 25일 홍콩 국경에서 북쪽으로 3km 떨어진 선전(深圳)에 도착한 중공군 병사들이 마오쩌둥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 STAFF/AFP via Getty Images

미 의회는 중공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보고서야 ‘1948 중국 원조법’을 통과시켰다. 트루먼이 이 원조법에 서명한 후 미국은 국민당 정부에 4억 달러 상당의 물자를 지원했다. 첫 지원 물자는 1948년 말에야 중국에 도착했다. 미국은 동맹국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아 중공으로 하여금 (국민당으로부터) 정권을 빼앗게 했고, 한국전쟁이 발발할 위험 요소를 묻어 놓았다. 그러나 1948년 미국 대선에서 트루먼은 예상을 깨고 재선에 성공했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난징(南京)을 점령했을 때 존 레이튼 스튜어트 당시 주중 미국대사는 각국 사절단을 따라 광저우로 내려가지 않고 난징에 남아 중국 공산당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민주당 내 좌익 사상의 영향을 받은 트루먼은 중국 공산당에 환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중국 공산당이 민족주의 성격을 띠고 있고 자본주의 사상을 받아들일 수도 있어 중국 공산당을 공산주의 진영에서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50년 중국 공산당이 소련으로 기울자 트루먼은 “미국은 어떠한 방식으로도 중국의 정세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고, 국민정부가 대만으로 이전한 후에도 “대만해협 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트루먼 정부는 공산주의를 배격했지만 공산 정권의 사악함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수수방관했고, 심지어 대규모 충돌을 피하면서 공존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고 있었다. 당시 미국 정부의 태도는 공산주의의 대외 확장 야욕을 부추겼다. 따라서 한국전쟁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미국 정부는 일이 터지고 나서야 어쩔 수 없이 뛰어들었다. 이는 미국에 큰 교훈을 남겼다.

지금 미국 정부는 중공의 더욱 거센 도발에 직면했지만, 정작 대결의 본질은 외면한 채 ‘경쟁’만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공개적으로 ‘냉전’을 부인하면서 ‘가드레일’을 정하고 소통을 유지하면 충돌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전쟁 전의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

중공은 지금 실력이 강하다고 자부하며 ‘동방이 뜨고 서방이 진다(東昇西降)’고까지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정부는 강경한 태도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고, 이런 태도가 중공 고위층이 미국이 약해졌다고 오판하게 해 도발이 이어지고 있다.

미국 정부는 충돌을 피하려 하지만, 이런 태도가 오히려 중공이 도발하게 해 충돌을 앞당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국은 여전히 충분한 대비를 하지 못하고 있다.

1950年,美軍的155毫米榴彈砲在韓國首爾附近開火。(MPI/Getty Images)
1950년 미군의 155㎜ 곡사포가 한국 서울 인근에서 발사되는 장면. | MPI/Getty Images

두 번째 실수,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는 격언의 망각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군은 총칼을 창고에 넣고, 경험 있는 장교와 병사들을 퇴역시켰다. 미군은 또 다른 전쟁에 투입할 준비를 하지 않았고, 군 장비와 훈련이 크게 부족했다. 미 정부는 핵 경쟁에 주력하면서 군비를 대폭 감축했고, 심지어 신속하고 강력하게 응전할 수 있는 재래식 전투 역량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전쟁을 일으켰을 때 미군은 전혀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북한의 침략 소식을 들은 미국 정부는 행동을 취할 의무가 있다고 보고 유화적으로 대응하는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며 독일의 침략 전쟁에서 보듯 한국 함락을 허용하면 공산당 지도자들은 더욱 서슴없이 이웃 나라를 위협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트루먼 정부는 이것이 구소련의 음모인지, 미국을 테스트하는 것인지 여전히 확인할 수 없었다. 유엔 안보리가 무력 사용을 승인했는데도 미국은 공군과 해군만 움직였다.

6월 27일 소련이 북한에 진입한 미군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발표한 후에야 미 정부는 지상군 파견을 결정하고 미 7함대에 대만을 보호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미국은 중공의 보복을 피하기 위해 대만의 작전 요청은 거부했다.

미군은 곧 일본에서 장병 540명을 차출해 한국 부산으로 공수했다. 1950년 7월 5일, 특수임무 부대 스미스부대는 북한군과 처음으로 교전했으나 대전차 무기가 없어 180명이 전사하거나 다치거나 포로가 됐다.

북한군은 탱크 274대, 대포 200문, 공격폭격기 110대, 전투기 약 150대, 정찰기 35대를 보유하고 계속 밀고 내려왔다. 뒤이어 투입된 미 24사단은 대전차 무기와 대포, 기갑차량이 부족해 다시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사상자가 3602명 발생했고 2962명이 생포됐다.

지난 6일 상하이 유명 사립 미술관인 룽(龍) 미술관에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에 포로로 잡힌 미군 병사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2019.9.9 | 상하이=연합

9월이 되자 부산을 포함한 남한 지역의 약 10%에 해당하는 지역에 유엔군이 배치됐다. 김일성은 전쟁을 곧 끝낼 것이라고 낙관했지만, 중공 지도자들은 미국이 개입하자 병력 26만 명을 북한 국경에 배치했고 구소련에 공중 엄호를 지원받는 약속도 받아냈다.

유엔군이 증원돼 북한군의 진격을 차단했고, 미군의 공습으로 낮 동안에는 도로와 철도가 대부분 끊겨 북한군은 밤에만 움직여야 했다. 미군의 중형 탱크가 속속 도착해 500대로 늘어났다. 9월 초순 유엔군 수는 약 18만 명으로 북한군 10만 명을 넘어섰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을 물리친 미군은 한국전쟁에 대응할 수 있어야 했지만 준비 부족으로 한동안 수세에 몰렸다. 이것이 미군이 범한 두 번째 과오다.

1941년 12월 7일, 미군은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해 막대한 손실을 입은 후에야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지만, 일본군의 전면 공격을 견뎌내지 못하다가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한 후에야 전세를 뒤집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군은 중국을 전면 침공한 지 4년이 됐고, 동남아를 침공하고 남진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미군은 관련 정보를 입수하고도 전쟁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갖고 전쟁 대비를 게을리했다.

지금의 중국 공산당은 미국과 패권 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대만해협, 동중국해에서 도발을 거듭하고 남중국해에 군용 기지를 건설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충돌을 피하겠다고 거듭 밝혔고, 미 합참의장은 중국 공산당 장성에게 선제공격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미군은 여전히 최강이지만 또 한 번 기습 공격을 받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게다가 전쟁에 대한 대비 미흡이라는 한국전쟁 당시의 잘못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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