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미국은 한국전쟁 때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중)

선저우(沈舟)
2021년 11월 7일
업데이트: 2021년 11월 10일

중국 공산당 당국이 한국전쟁 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중공군의 사상자 수가 미군의 7배인 점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38선을 넘는다는 목적을 이루지 못한 점도 창피하게 여기지 않고, 마오쩌둥의 참전 결정이 잘못됐다는 점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은 한국전쟁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미국은 수동적으로 참전하고 수만 명이 사망했기 때문에 미국 입장에서는 큰 대가를 치른 결과로 38선을 지킨 것 외에는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미국이 한국전쟁을 언급하지 않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미국이 오늘날에도 감당해야 할 것들, 즉 미국이 한국전쟁 전후에 저지른 실수로 인한 결과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제 더 심각하고 더 큰 중공의 도발에 직면했다. 미국이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경우 한국전쟁보다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안 하고는 전적으로 미 행정부의 역사 안목과 용기에 달려있다.

세 번째 실수, 유혈 충돌을 피하려다 더 많은 피 흘려

미국은 한국전쟁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힘이 있었고 백전노장 맥아더 장군이 일본에서 진두지휘했다. 1950년 9월 15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해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자 북한군은 급속히 와해돼 겨우 3만 명만 북한으로 후퇴했고, 미군은 반격에 나섰다.

9월 27일, 맥아더 장군은 소련군이나 중공군이 북한에 진입하지 않은 상황에서만 38선 이북 지역에서 군사행동을 할 수 있다는 백악관의 기밀 비망록을 전달받았다. 또한, 미국 합동참모본부도 맥아더 장군에게 ‘북한군을 무력화하는 것이 주목표이며, 가능하면 한반도 통일은 부차적 목표로 삼되, 이는 중공과 소련의 개입 여부에 달려 있다’고 지시했다. 9월 30일, 맥아더 장군은 미 국방장관으로부터 ‘전술과 전략에 지장을 받지 않고 38선을 향해 나아가길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9월 30일, 중공은 미국이 38선을 넘으면 출병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10월 7일 UN 승인하에 연합군은 북으로 진군했고, 10월 19일 미군이 평양을 점령했다. 미군의 임무는 북한군이 중국으로 올라가는 길을 차단해 북한 지도자의 평양 탈출을 막고 미군 포로를 구출하는 것이었다.

10월 말, 북한군은 약 13만 5천 명이 유엔군에 포로로 잡히고 33만 5천 명이 죽거나 다치는 피해를 입었다. 당시 북한에는 유엔군이 약 23만 명, 미군이 약 12만 5천 명, 한국군이 약 8만 3천 명 있었다.

1950년 맥아더 장군(왼쪽)은 해리 트루먼(오른쪽) 당시 미국 대통령과 웨이크섬에서 만난 뒤 한반도 전장 지휘관에서 해임됐다. | MPI/Getty Images

맥아더 장군은 한국전쟁에 물자를 공급하는 중국 국경 내 창고를 공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소련이 참전해 핵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우려해 승인하지 않았다. 맥아더 장군은 곧바로 자신의 생각을 공개했다. 그것은 ‘과거에 저지른 외교적 실수로 인해 자유 세계가 피의 대가를 치르게 됐다’는 것이다. 이는 항명(抗命)으로 간주됐다. 1951년 4월 11일,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을 보직 해임했다.

전쟁이 확대되는 것을 피하고 더 이상의 유혈을 피하려는 미국 정부의 의도는 그럴듯해 보였고 정치적으로도 비교적 안전해 보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중공은 처음부터 한반도를 통일하려 했다. 중공이 북한에 파병한 목적은 결코 ‘보가위국(保家衛國·집과 나라를 지킴)’도 아니고 김일성을 구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목적은 북한을 내세운 한반도 찬탈이었다.

소련이 중공의 참전을 종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마오쩌둥도 한반도에 개입할 적기라고 생각했다. 그는 미군에 맞서 싸우는 것이 신속하게 이름을 떨치려는 자신의 야심을 채울 수 있고 또 새로 수립한 정권을 공고히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만약 미국 정부가 맥아더 장군의 의견을 받아들여 중공군에 선제공격을 했다면, 중공군이 북한에 진입해 벌이는 공세 작전은 중국 국경을 방어하는 작전이 됐을 것이다. 그러면 중공군이 후퇴했을 수도 있고, 전쟁이 좀 더 일찍 끝났을 수도 있고, 한반도 통일도 일찍 이뤄졌을 수 있고, 중국 공산당 정권을 뒤흔들 수도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 북한 핵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미국 정부의 잘못된 결정으로 전쟁은 3년 더 지속됐다. 미군의 전략이 38선을 고수하는 쪽으로 선회하자 중공은 미군이 더 이상 싸울 힘이 없다고 오판했고, 이는 중공 지도자가 도리어 미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려고 광분하는 계기가 됐다.

곧바로 중공은 더 많은 병력을 파견하고 대규모 공세를 3차례나 펴 38선을 돌파했다. 미군은 제한된 반격만 하고 중공군을 38선 이북으로 몰아내고는 공격을 멈췄다. 미군은 중공군의 전쟁 물자가 7일 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로 방어에 치중했다.

이렇듯 미군은 자제했지만, 이것이 휴전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전쟁 속에서 미군은 더 많은 사상자를 내고 더 많은 피를 흘렸다. 마오쩌둥은 중공군이 공격을 이어갈 수 없게 된 1953년 어쩔 수 없이 휴전을 받아들였다.

2018년 3월 28일 중공이 인천국제공항에서 중공군 유해를 인수했다. 이로 인해 6·25전쟁 때 중공군이 한국을 침공한 사실이 거듭 확인됐다. | Chung Sung-Jun/Getty Images

트루먼 대통령의 정치적인 안전 조치는 기대했던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다.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의 보직을 해임한 후 국내에서 인기가 떨어졌다. 1952년 2월 그의 지지율은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낮은 22%를 기록했고, 1952년 대선 때 재선을 포기했다. 결국 공화당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해 민주당의 20년 집권을 끝냈다.

오늘날 미국 정부는 충돌을 피한다고 거듭 강조하며 중공과의 ‘경쟁’만 언급하고 있다. 이는 보이지 않는 38선을 긋고 각자 넘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중공 지도자는 미국의 리더십을 인정하지 않고 미국과 서방 국가들이 정한 국제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공언하며 도발과 확장을 이어가고 있다. 사실상 선을 넘은 지 오래다. 중공은 전염병 실상을 은폐하고 미국으로 바이러스를 퍼뜨려 미국인 72만 명 이상이 숨지게 했다. 그런데도 미국 정부는 지금까지 중공에 책임을 묻지 않고 있다.

미국은 또다시 방어만 하고 있어 중공 지도자의 거듭된 오판을 야기하고 있다. 미국이 양보하는 것이 중공이 자발적으로 대항을 멈추는 결과로 이어지기는커녕 더 큰 피해를 몰고 올 것이다.

6·25전쟁 당시 전선 야전병원에서 한 미 육군 목사가 부상당한 병사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 Hulton Archive/Getty Images

네 번째 실수, 중공의 사악함에 대한 인식 부족

미국은 처음에는 한국전쟁 개입을 주저했고, 참전한 후에는 38선을 넘지 않으려 했다. 미국은 소련군의 개입을 가장 우려했고, 중공군에 대한 우려는 그다음이었다.

국민당군과 공산당군은 8년 동안의 항일전쟁에서 일본을 꺾지 못했고, 그러한 일본군도 미군에 참패했다. 미군이 그만큼 전력이 강하고 중공군 장비 상황도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중공군이 미군과 전쟁을 하기로 한 것은 상식 밖의 일이다.

중공군 내부에서도 대다수가 한국전쟁 참전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당시 린뱌오가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자 마오쩌둥은 펑더화이(彭德懷)를 파견할 수밖에 없었다.

정상적으로 보면 중국은 한국전쟁에 참전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미국 정부와 미군 장성들은 중공 지도자의 사고가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미군은 소련과의 전쟁을 가장 우려했고 스탈린 역시 공개적으로 미군을 상대하는 것을 피했다. 냉전 시기 미·소의 핵전력은 서로를 파멸시킬 수준이었지만, 충돌을 피하려고 모두 자제했다.

하지만 중국은 구소련과 완전히 달랐다. 마오쩌둥은 중국의 절반이 파괴되더라도 미국과 같이 죽겠다고 해 구소련 지도자를 놀라게 한 적이 있다. 중국 공산당은 소련 공산당보다 훨씬 더 사악하다. 미국인과 대다수 세계인은 중공의 이런 사악함을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이 때문에 맥아더 장군과 같은 백전노장도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은 불가능하다고 보았고, 미국 공군의 보호가 없는 상황에서 중공군이 평양에 진입하면 대규모 학살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북한과 인접한 중공군 기지를 선제 공습해 미군의 피해를 줄이는 방안을 제시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지휘권까지 잃었다.

1950년 12월 6일, 미 해병대원들은 북한 전장의 눈 덮인 산속에서 전투를 벌였다. | Hulton Archive/Getty Images

마오쩌둥이 기어이 북한에 출병한 것은 그의 무지에서 비롯됐다. 그는 현대 무기와 현대전에 대해 무지했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만 열중했다. 이런 행위는 세계를 지배하려는 그의 오만과 야심을 드러냈다. 마오쩌둥은 또 이 기회를 빌려 대대적인 군중운동을 일으킴으로써 문화혁명을 위한 경험도 쌓았다.

중공은 대규모로 참전했을 뿐만 아니라 병사들에게 미군의 탱크, 대포에 맞서 육탄전을 벌이라고 명령했다. 미군은 중공의 인명 피해도 아랑곳하지 않는 인해전술에 크게 놀라 이른바 ‘장진호 전투’에서 퇴각했다.

미군은 유럽 전장에서 이런 상황을 겪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태평양 전장에서 미군은 상륙 초기에 일본군의 이판사판식 돌격과 일본 항공기의 자살 공격을 겪긴 했지만, 중공의 인해전술처럼 대규모 병사를 총알받이로 희생시키는 공격은 보지 못했다. 그 참상은 미군의 기관총 사수 중 일부가 사격을 거부할 정도로 참혹했다.

중공군의 사상자는 미군의 7배나 됐다. 중공 지도자는 중국인의 생명을 아끼지 않았지만, 미국인들이 생명을 중시한다는 것과 미국과 서방 국가 정부는 대규모 사상자를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정치 선전에 이용하기 위해 심지어 펑더화이에게 사상자가 아무리 많더라도 가능한 한 미군 1개 사단, 1개 여단, 마지막에는 1개 대대라도 섬멸할 것을 거듭 요구했다. 그러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50년 장진호 전투에서 미국 해병대가 중공군 포로들을 심문하고 있다. | FPG/Archive Photos/Getty Images

오늘날에도 중공군은 전력 면에서 미군과 큰 격차를 보이지만, 중공 지도자는 여전히 광기를 드러내고 있다. 중공 지도자는 미군을 공격해 사상자를 낼 수만 있다면 대가가 아무리 크더라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중공은 비겼다고 선전하고 심지어 승리했다고 우기면서 여전히 충돌을 일으킬 수 있다. 중공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것이다.

미국 정부가 충돌을 두려워할수록 중공 고위층은 모험을 더 많이 할 것이다. 심지어 미군이나 미국인에게 막대한 인명 피해를 주는 것을 목표로 삼고서 제1열도선 또는 서태평양에서 미군을 쫓아낼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중공은 여전히 사악한 집단이다. 미국 정부와 미군이 이 점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면 더 큰 피해를 입을 것이며, 수세적으로 나설수록 더 수세에 몰리게 될 것이다.

이 기사는 저자의 견해를 나타내며 에포크타임스의 편집 방향성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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