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3) – 만대의 기틀을 닦은 성군 통치

2016년 7월 6일 업데이트: 2019년 11월 13일

1. 천하를 평정하고 영토 확장하다

진시황은 원대한 포부와 큰 뜻을 지닌 성군(聖君)으로서 평생 나랏일을 돌보는 데에 힘썼다. 사서에는 진시황이 ‘낮에는 옥사를 판결하고 밤에는 업무를 보았다(晝判獄而夜理書)’다고 기록해 밤낮없이 부지런히 일했다고 전했다. 기록에 따르면 진시황이 매일 처리한 각종 상소문 간찰은 무게가 130여 근에 달했다고 한다.

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룬 후에도 진시황은 비상한 재능과 원대한 계략을 통해 영토 확장을 계속해나갔고, 새로운 법령과 조치를 빠르게 제정·반포함으로써 중국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통일 황조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진시황이 제정한 황조의 예절은 이후 2천 년간 이어지는 중국 역사에 있어 같은 튼튼한 기틀이 되며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진나라 이전의 하(夏)·상(商)·주(周)는 모두 대국이었다. 중간 규모의 국가를 가리켜 방국(方國) 혹은 제후라고 하고, 촘촘히 분포되어 있던 소규모 국가는 민족명을 따라 이름 붙였다. 이러한 국가들 사이에는 융·병합이 끊임없었다.

하나라 영토는 오늘날의 황하 중류의 남북 양측 일대였다. 상나라는 하나라를 멸망시킨 후 영토를 황하 중하류 양측 일대로 확장했으나 국경을 명확히 설정한 적은 없었다. 서주(西周)는 상나라를 멸망시킨 후 “천하에 왕토 아닌 곳은 없다”(溥(普)天之下,莫非王土)’(<시경·소야·북산>)고 자처했다.

춘추시대 전기 왕실 대부였던 첨환백(詹桓伯)은 “우리(주나라는) 하나라 때 후직(後稷)의 공로로 위(魏)·태(駘)·예(芮)·기(岐)·필(畢) 지방을 서쪽 영토로 삼았고, 무왕이 상나라를 이긴 후 포고(蒲姑)·상(商)·엄(奄) 지방을 동쪽 영토로 삼았고, 파(巴)·복(濮)·초(楚)·등(鄧) 지방을 남쪽 영토로 삼았고, 숙신(肅慎)·연(燕)·박(毫) 지방을 북쪽 영토로 삼았다”(<좌전·소공9년>)고 말했다.

주나라 왕실은 이러한 범위 내에서조차 통일을 이루지 못했던 관계로, 왕실은 다만 방기(邦畿) 이내의 구역만을 점거했고 이외에는 모두 크고 작은 제후국들로서 독립 혹은 반독립 상태를 유지했다. 춘추시대 왕실이 쇠퇴함에 따라 대국들이 서로 패권을 다투기 시작했다.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7웅이 서로 다투니 통일을 논할 상황이 아니었다. 이러한 영토 판도는 진시황 당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본질적인 변화를 나타냈다.

진시황은 6국을 멸망시킨 이후에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초나라를 멸망시킨 군사통수 왕전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동남쪽으로 진군하도록 했다. 동월(東越)이 투항한 이후 그 영토를 회계군(會稽郡·오늘날의 장쑤성 쑤저우)으로 편입시켰다. 민월(閩越)이 투항한 이후에는 그 영토에 민중군(閩中郡·오늘날의 푸젠성 푸저우)을 세웠다. 이후 장군 도휴(屠睢) 등을 보내 영남(嶺南) 지방에 진군, 남월 북구에 남해(南海·오늘날의 광둥성 광저우), 계림(桂林, 오늘날의 광시성 구이핑), 상(象, 오늘날의 충쭤(崇左)) 3군을 설치했다. 또한 상안(常頞)을 서남이(西南夷)로 보내 오척도(五尺道)를 열었는데, 오척도는 오늘날의 쓰촨성 이빈(宜賓) 남쪽에서부터 윈난성 취징(曲靖)을 포괄했다.

진시황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중원 남북의 영토 대통일을 이루어냈다. 진나라 영토는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조선에 미쳤으며, 서쪽으로는 임조(臨洮)와 강중(羌中)에 다다랐고 남쪽으로는 북향호(北向戶, 오늘날의 베트남 중부), 북쪽으로는 황하를 요새 삼아 음산(陰山)에서 요동까지 이르렀다.”(<사기 진시황본기>) 이는 서주 시대 영토에 비해 최소 5배 이상 확대된 것으로, 현대 중국의 영토 판도에 있어 기틀이 되었으며 중화 문화가 보다 많은 종족들과 지역까지 포괄하도록 하였다.

기원전 770년부터 기원전 221년까지 총 549년간 지속된 춘추전국시대 동안 제후국들 간에는 혼전이 끊이지 않았으며 백성들이 전란을 피하느라 갈 곳 없이 이곳저곳 떠돌아다닌 탓에 경작지가 대량으로 황폐해지는 등 농업이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중원 각지에서 전쟁을 벌이느라 북방을 신경 쓸 여력이 없던 틈을 타 남쪽으로 진격해 온 흉노족은 진나라, 조나라, 연나라 3국의 북쪽 변경 지대를 공략, 주변 지역의 백성들을 괴롭히고 화하 민족의 자손들에게 경제 및 생활상의 각종 재난을 안겨주었다.

진시황 32년(기원전 215년), 명장 몽염(蒙恬)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북진, 흉노족을 공격하여 하남(河南, 오늘날의 내몽고 이커자오멍(伊克昭盟))을 수복하고 34현을 설치했다. 그 후 북쪽으로 황하를 건너 음산을 기반으로 옛 진나라, 조나라, 연나라의 장성을 하나로 이었다. 이렇게 연결된 장성은 서쪽으로는 임조(오늘날의 간쑤성 민(岷)현), 동쪽으로는 압록강까지 약 1만 리에 달했으며 북방의 흉노족을 방어하는 용도로 쓰였으니 이것이 바로 유명한 만리장성이다.

흉노족의 위협을 제거한 직후 진시황은 곧바로 공격 방향을 전환, 월족(越族) 거주 지역을 굴복시켜 대거 개발하고자 했다. 그는 50만 명에 달하는 인구를 월족 지역, 월인 잡거 지역으로 이주시킴으로써 중화 문화를 주변 지역과 그 거주인들에게 전파시켰다.

진시황 재위 기간의 영토는 전국시대의 지도를 기준으로 볼 때 전국 7웅의 세력 범위의 거의 2배에 달한다. 진시황은 군현을 설치해 정복한 토지에 대한 관리와 제도 수립에 힘썼는데 이는 통일한 토지에 대한 통치를 안정시키기 위함이었다. 후세 사람들은 진시황과 한 무제의 공이 가장 크다고 평가하는데 이는 진시황의 역사적 업적이 한 무제와 나란히 평가될 정도라는 의미다.

2. 황제 아래 3공과 9경을 두다

황제를 국가의 원수로 삼다 : 진시황은 왕(王)이라는 호칭을 폐지하고 황제(皇帝)로 이를 대신했는데 이는 역사를 새로 연 위대한 업적이다. 옛날에는 삼황과 오제만 있었을 뿐 황제라는 칭호는 존재하지 않았다.

황제는 이미 옛 제도상의 원주민 중 대종(大宗)을 넘어선 지고 무상의 국군(國君)이었다. 이에 걸맞도록 황후 역시 옛 제도상 국왕의 여러 비빈 중 정실에 불과했던 존재에서 6궁을 관장하는 천하의 어머니 격인 존재로 탈바꿈했다. 황태자 또한 더 이상 옛 제도상 원주민 가운데 종자(宗子)가 아니라 법률상 황위 계승자인 저군(儲君)이 되었다.

황제는 군(君)과 왕(王)의 위에 위치한 존재로, 군과 왕에 대한 임명권을 가졌다. 황권은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었기에 황제는 인간 세상에서 가장 높은 존재였다. 진시황은 2천여 년에 걸친 선진(先秦)시기를 종결시킨 동시에 이후 2천여 년의 역사를 개창함으로써 이번 인류의 중화 역사상 최초의 황제가 되었다.

<사기> 제6권 <진시황본기> 고서 판각본 | Bjoertvedt/위키피디아

<사기 진시황본기>에 따르면 진시황은 최초로 천하를 통일한 후 승상들과 어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고 한다.

“한나라 왕은 영토를 헌납하고 옥새를 바치면서 번신(藩臣)이 되기를 간청했던 바 있으나 얼마 되지 않아 약속을 어기고 조나라, 위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를 배반하였기에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토벌하고 한나라 왕을 사로잡았다. 과인은 이로써 전쟁을 멈출 수 있기를 바랐다. 이후 조나라 왕이 어사 이목(李牧)을 사신으로 보내 맹약하였으므로 그의 질자를 돌려보냈거늘, 얼마 후에 맹약을 위배하고 태원(太原)에서 우리 진나라에 모반하였기 때문에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고 그 왕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러자 조나라 공자 가(嘉)가 스스로 대왕에 즉위했으므로 다시 군사를 일으켜 격멸하였다. 위나라 왕이 처음에는 진나라에 복종하기로 약속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나라, 조나라와 함께 진나라를 습격할 것을 모의했기에 그들을 토벌하여 무찔렀으며, 초나라 왕이 청양(青陽) 서쪽 땅을 헌납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맹약을 배신하고 진나라 남군을 공격했기에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고 초나라 왕을 사로잡아 마침내 초나라 땅을 평정했던 것이다. 연나라 왕이 혼미하여 태자 단이 몰래 형가를 자객으로 삼아 나를 죽이려고 했기에 군사를 보내 물리치고 연나라를 멸망시킨 것이며, 제나라 왕이 후승의 계책을 사용하여 진나라와 왕래를 끊고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기에 군사를 보내 토벌하고 그 왕을 사로잡아 제나라 땅을 평정한 것이다. 과인이 보잘것없는 몸으로 군사를 일으켜 폭란을 토벌할 수 있었던 것은 조상의 혼령이 돌보았기 때문이며, 6국의 왕들이 모두 처단되자 천하가 크게 안정되었으니 이제 호칭을 바꾸지 않는다면 그간 이루어 놓은 공업을 드러낼 수 없고 후세에 전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대들은 황제의 호칭을 논의하도록 하라.”

그러자 승상 관(綰), 어사대부 겁(劫), 정위(廷尉) 사(斯) 등이 이렇게 아뢰었다.

“옛날 오제 때에는 영토가 사방 천 리에 지나지 않았고, 그 바깥에는 후복(侯服), 이복(夷服) 등의 제후가 있었는데 그들이 어떤 때에는 조현하고 어떤 때에는 조현하지 않아 천자는 그들을 제압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폐하께서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잔적을 토벌하시고 천하를 평정하여 전국에 군현을 설치하고 법령을 하나로 통일시켰으니 이는 상고 이래 없었던 일로 오제라고 할지라도 이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신들이 삼가 박사들과 함께 논의하기를 ‘고대에는 천황(天皇), 지황(地皇), 태황(泰皇)이 있었는데 그 중 태황이 가장 존귀했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황공하게도 존호를 올리나니 왕을 태황이라고 하고 명을 ‘제(制)’라고 하고 영을 ‘조(詔)’라고 하며 천자가 스스로를 칭할 때는 짐이라고 하십시오.”

그러자 진나라 왕은 “태(泰)자를 없애고 황(皇)자를 취하고, 상고시대의 제(帝)라는 호칭을 채택하여 황제라고 칭할 것이며, 다른 것은 그대들이 논의한 대로 하라”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가(可)하다”고 재가하였다.

또한 장양왕(莊襄王)을 태상황(太上皇)이라고 추존하고, 이렇게 분부하였다.

“짐이 듣건대 태고에는 호는 있었으나 시호는 없었으며, 중고에는 호가 있었고 죽은 후에 생전 사적에 따라 시호를 정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자식이 아비를 논의하고, 신하가 군주를 논의하는 것과 같은데 이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니 짐은 이러한 제도를 채택하지 않겠노라. 그래서 지금부터는 시호를 추서하는 법을 폐지하노라. 짐을 시황제라고 칭한다.”

<사기 진시황본기>: “과인은 미약한 몸으로 군사를 이끌고 폭동을 정벌했고, 종묘의 영기에 힘입어 여섯 왕을 정벌하였으니 이에 천하가 정해졌다.” | NTD TV <소담풍운(笑談風雲)> 제공진시황은 이번 화하 문명에서 첫 번째로 등장한 황제로서 명실상부한 ‘시황제’라고 할 수 있다. 진시황은 승상, 3공, 9경을 두어 조정 각 부문의 사업을 맡아보도록 했다. 승상 등은 각자 황제에 대해 책임을 졌으며 황제의 명령에 일체 복종했다. 승상·어사·정위는 각자 국가의 정무·감찰·사법을 맡아보았으며 관할 구분이 무척 명확해서 서로 간섭하지 않았는데 이는 오늘날 서양의 삼권분립체제와 무척 유사한 것이었다.

한편 세경세록제(世卿世祿制)를 폐지, 중앙 및 지방 관원 직위가 세습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황제에 의해 임명되도록 하였다. 비록 한 왕조의 천자와 신하들, 중생, 문화는 그 왕조 당시에만 존재하고, 각 왕조의 중생들은 각자 다른 천국(天國)에서 오기는 하지만, 진시황이 건립한 황권 체제는 이후 청나라 말에 이르기까지 2천여 년간 여러 조대에 걸쳐 유지됐다. 중국에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황제가 존재했으며 군·왕 모두 황제에 의해 분봉되었다.  

3. 지방행정 및 군현제도

진시황은 분봉 제도를 폐지하고 중앙 정부가 직접 관리하는 군·현·향·정(亭)·리 등 다층적인 기초 행정 구조를 수립했다. 이러한 관리 구조는 2천여 년간 지속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계승되고 있다.

군현제에 의한 지방행정 : 처음에 천하를 36군으로 나눴던 진시황은 이후 40군으로 군 수량을 늘렸다. 중앙 정부에 직접 소속되어 있는 군에는 수(守)·위(尉)·감(監)의 3장(長)을 두어 각각 행정, 군사, 감찰을 맡아보도록 했다. 군의 하위 단위로는 현을 두고 현에는 영(令, 혹은 장)·승(丞)·위의 3장을 두어 각각 행정, 문자옥(文字獄), 군사를 관할하도록 했다. 군과 현의 주요 장관은 황제가 직접 임면하는 명관(命官, 친임관)으로 충당했다.

군현제는 중국 역사에 있어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사기 진시황본기>에 따르면 기원전 221년(진시황 26년) 최초로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에게 승상 관(綰) 등이 이렇게 아뢰었다.

“제후들을 이제 막 평정했으나 연나라, 제나라, 초나라의 땅이 너무 멀어서 왕을 두지 않으면 그들을 제압할 수 없사옵니다. 청하나니 황자(황제의 아들)들을 왕으로 세울 것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진시황이 군신들에게 이 의견을 논의하도록 하자 군신들은 모두 좋은 의견이라고 여겼으나 정위 이사(李斯)가 다음과 같이 이의를 제기했다.

“주나라 문왕, 무왕은 많은 자제와 일족을 왕으로 봉했지만 후손들이 점차 소원해지고 멀어져서 서로 원수처럼 공격했고, 심지어 제후들끼리 서로 주벌했음에도 주의 천자는 그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천하가 폐하의 신령에 의하여 통일되어 모두 군현으로 삼았으니 황자나 공신들에게 국가의 부세로써 후한 상을 내리신다면 그들을 다스리시기에 무척 쉬울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면 천하에 다른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하를 안녕케 하는 책략이오니 제후를 설치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이에 진시황은 이렇게 말했다.

“전쟁이 멈추지 않아 천하가 모두 고통받고 있는데 이는 제후와 왕들이 있기 때문이다. 선조의 신령에 의지하여 이제 천하를 평정했는데 또다시 제후국을 세운다는 것은 다시 전쟁을 조성하는 것이니 안정과 평정을 구하는 것이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정위의 의견이 옳도다.”

시황제는 이사가 상소한 내용을 지지하고 분봉제를 폐지한 후 군현제를 시행했다.

진시황은 대(大) 진황조를 건립함으로써 이후 1700년에 달하는 중국 역사에서 서양 각국의 그것보다 선진적인 관리 제도를 누릴 수 있도록 했다. 소위 ‘한승진제(漢承秦制)’나 ‘진나라 이후로 그 제도가 바뀐 적이 없다’, ‘백 대에 걸쳐 진나라 정치제도와 법령을 사용했다’는 <후한서 반표전(班彪傳)>의 표현처럼 중국의 2천년 황권시대는 제도상에 있어 기본적으로 진나라 제도를 세습했다.

진시황이 수립한 황조 제도는 고대 중국의 제도문명의 모범이자 중화 민족의 수호신이었다. 2천여 년간 영토를 수호하고 신전(神傳)문화가 한층 풍부해질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 황조 제도에 힘입은 것이다.

4. 치도를 건설하고 장성을 증축하다

전국을 통일한 다음 해 진시황은 명령을 내려 원래 진나라의 영토였던 구역과 원래 6국 영토였던 구역 내의 도로를 서로 연결하도록 하는 한편 천자가 천하를 순행하는 치도(馳道)로 확장하도록 했다. 치도의 중간 부분은 ‘어도(禦道)’, 좌우 양측 부분은 ‘방도(旁道)’라고 불렀다. 치도는 좌우 폭이 일정했기 때문에 치도 위에서 마차를 달리면 속도가 무척 빨랐다. 한나라 때 기록을 보면 치도 위에서는 반나절 만에 이백 리 이상을 달릴 수 있었다고 한다.

진시황은 함양(鹹陽)을 중심으로 바퀴살 형태로 퍼져나가는 치도를 건설하도록 명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치도는 북쪽으로는 구원군(九原郡, 오늘날의 내몽고 바오터우), 동쪽으로는 성산두(成山頭, 오늘날의 동룽청), 남쪽으로는 남해군(오늘날의 광저우), 남서쪽으로는 전(滇, 오늘날의 윈난 뎬츠 부근), 서쪽으로는 롱서부(隴西郡, 오늘날의 간쑤성 민현)에 이르렀다. 치도의 좌우 폭은 11~15장이었으며 중간에 산을 만나면 산을 뚫고 지나갔고 강을 만나면 다리를 깔았으며 석회와 아교를 섞어 노면을 다졌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치도는 2천여 년간 비바람을 견뎌냈고, 일부 구간은 오늘날까지도 당시의 노면 형태가 남아 있어 건축 수준이 무척 높았음을 보여준다.

진시황은 여러 차례에 걸쳐 발생한 북방 유목민족의 침략을 뿌리 뽑기 위해 장성을 건축해 외침을 방비하도록 하는 한편 몽염으로 하여금 병사를 이끌고 토벌하러 가도록 했다. 본래 각 국가들 사이에 장성이 있기는 했으나 북방의 장성은 온전하지 못했는데, 통일 직후 진시황은 명령을 내려 원래 각국 사이에 있던 장성을 철거하고 원래 진나라, 조나라, 연나라 3국 북방에 있던 장성을 연결해 북방 흉노족의 남침을 방비하도록 했다. 이로써 진시황은 그 유명한 만리장성을 후손들에게 남기게 되었다.

진시황은 장자 부소(扶蘇)로 하여금 변경의 관문으로 가 몽염(蒙恬) 장군을 도와 만리장성을 짓고 흉노의 공격을 방어하며 경험을 쌓도록 했다. 사진은 베이징 팔달령 장성의 모습. | 위키피디아 커먼스후세인들 가운데 일부는 진시황이 흉포했다고 모함하기 위한 목적으로 춘추시대 제나라 장군 기량(杞梁)을 범기량(範杞梁)으로 와전하고 맹강녀가 그 남편 범기량을 찾다가 장성에서 울다 쓰러졌다는 전설을 만들어냈는가 하면 맹강녀를 사당에 모시고 그 동상을 만드는 헛수고를 하기도 했다. 사실 맹강녀가 울다 쓰러졌다는 장성은 진나라 때의 것이 아니라 제나라의 장성이었다.

명나라 작가 풍몽룡은 <동주열국지>에서 수백 년 전의 사건에 대해 진상을 밝혀냈다. 제나라 장공(莊公)수하의 대장군이었던 기량이 저우문(且於門)에서 전사하자 “그 부인인 맹강씨가 남편의 관 옆에서 3일간 노숙했다. 그녀는 관을 어루만지며 슬피 통곡했는데 눈물 콧물을 모두 흘려낸 나머지 피가 나왔다. 제나라 성곽이 돌연 수 척가량 무너졌는데… 이는 통곡하는 소리가 너무나 애절한 나머지 그 정성에 감복한 것이리라. 후세 사람들은 진나라 범기량이 장성 공사에 차출되었다가 죽고 난 후 그 처인 맹강녀가 겨울옷을 공사 터로 가지고 왔다가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고 통곡하자 성곽이 무너졌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는 제나라 장군 기량의 이야기로, 와전된 것일 따름이다”고 기록했다.

전국 시대에는 각국의 문자와 화폐 및 도량형이 모두 달랐다. 진시황은 전국적으로 사각형의 구멍이 뚫린 원형 화폐로 통일해 발행하도록 지시하고 진나라의 도량형을 기준으로 도량 단위를 십진제(十進制)로 바꾸도록 했으며 수레는 바퀴 폭이 같고, 책은 문자가 같고, 일상생활은 윤리가 같게 하도록(“車同軌, 書同文, 行同倫) 명령했다.만리장성 건설은 진시황의 위대한 업적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업적이다. 쑨원(孫文·손중산)은 만리장성에 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남긴 바 있다. “진나라와 한나라 이후의 사적 가운데는 우임금의 구하(九河)와 진시황의 장성에 비견할 만한 것이 없다”,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육지 건축물은 만리장성이다”, “오늘날의 각도에서 볼 때 장성이라는 보호막이 없었다면 중국은 송나라, 명나라까지 갈 것도 없이 초한 시대에 이미 북융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현재 세계 7대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인 만리장성은 그 자체로 인류의 문화, 기술적 기적이 후대로 전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존재 자체가 중화라는 큰 무대 위에 신전 문화가 펼쳐지는 데 있어 방해되는 요소를 효과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중화 정통 문화를 보호해 주었다.

진시황은 영남 백월(百越) 지역을 중국 판도로 편입시켰으며, 도휴(屠睢)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50만 대군을 이끌고 백월 지역으로 남진하도록 했다. 그러나 진나라 대군은 백월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힌 데다 영남 지방의 험한 산길로 인해 군량 운송이 어려워짐에 따라 타격을 입고 3년간 전진하지 못했다.

영거(靈渠)의 수로 가운데 일부 | Farm/위키피디아

양쯔강(長江) 유역은 본래 우링(五嶺) 산맥을 사이에 두고 주강(珠江) 유역과 분리되어 있어 서로 연결되는 수로가 없었다. 그런데 양쯔강의 지류인 상강(湘江) 상류와 주강 지류의 상류는 둘 다 모두 오늘날의 광서성 싱안(興安) 경계에서 흘러나왔고 서로 1.5㎞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두 강을 서로 잇기만 하면 중원에서 생산한 식량을 우링 산맥 건너편 영남까지 배로 운반할 수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을 눈여겨본 진시황은 이를 적절히 이용, 진시황 29년(기원전 218년) 감사 사록(史祿)에게 병졸들을 이끌고 오늘날의 광서성 싱안현 경내에 식량 운수용 인공 운하를 건설하도록 명령하고, 분수령에 수로를 뚫어 상강을 리강(漓江)으로 유입시킴으로써 인류 하운사(河運史)에 있어 불후의 명작을 남겼으나 바로 영거(靈渠) 운하다.

영거 전경도 | Zhuwq/위키피디아

진시황 30년(기원전 214년) 완성된 영거 운하는 상강과 리강을 연결함으로써 양쯔강과 주강 수계를 잇고 중국 남부의 수운망을 연결, 진나라 군대로 하여금 끊김 없는 군량 공급과 지원병 공급을 확보하도록 하여 빠른 속도로 영남을 통일하도록 했다. 두장옌(都江堰), 정국거(鄭國渠)와 함께 ‘진나라 3대 수리시설’로 일컬어지는 영거 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운하 가운데 하나이자 오늘날까지 사용되는 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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