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처법 유예 무산…與 “중소 눈물 외면” 野 “생명 안전 우선”

황효정
2024년 02월 2일 오후 1:49 업데이트: 2024년 02월 2일 오후 2:42

일터에서 노동자가 숨지거나 크게 다치는 등 중대한 산업재해가 발생하면 사업주를 처벌하는 중대재해처벌법(중처법)을 근로자 50인 미만 사업장에까지 확대 적용하는 것에 대해 정부와 여당이 제안한 재유예안을 야당이 거절했다. 더불어민주당은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을 우선한 것”이라는 입장이지만,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은 “총선을 앞두고 노동계 눈치를 본 것”이라고 비판했다.

지난 1일 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는 “중대재해처벌법과 관련해 당의 의견을 모았다. 산업현장에서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이 더 우선한다는 기본 가치에 충실하기로 했다”며 “정부 여당의 제안을 거부하기로 했다. 현재 시행되는 중대재해처벌법은 그대로 시행하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고 밝혔다.

앞서 2022년 1월 50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우선 시행된 중처법은 2년 유예기간을 거쳐 지난달 27일부터는 5인 이상~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해서도 확대 적용되기 시작했다.

정부와 국민의힘은 대상 사업장 중 절반 이상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고 경영난이 우려된다는 이유 등을 들어 중처법 확대 적용을 2년 추가 유예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이를 두고 민주당은 해당 법안과 관련해 지난 2년간 준비하지 않았다는 정부의 공식 사과, 2년 추가 유예 후에는 반드시 이를 시행하겠다는 정부와 경제계의 공개 약속 등을 촉구했다. 정부와 국민의힘은 이를 수용했다.

이에 민주당은 한 발 더 나아가 노동자 안전을 위한 산업안전보건청(산안청) 설치를 요구했다. 국민의힘은 민주당이 요구한 산안청의 기능 중 단속 부문을 축소하고 예방 부문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수정하고 2년 후에 산안청을 개청하자는 조건을 제시했다.

지난 1일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의원총회 앞에서 노동계 관계자들과 정의당 관계자들이 회의장으로 향하는 의원들을 향해 중대재해처벌법 유예 반대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연합뉴스

그러나 이날 민주당이 끝내 중처법 재유예를 거부하기로 결정하면서 같은 날 본회의에서도 중처법 개정안 처리는 불발됐다.

민주당 윤영덕 원내대변인은 “노동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산업안전보건청이 필요하다는 데는 변함없지만, 법안 시행 유예와 산업안전보건청을 맞바꾸지 않겠다는 것이 오늘 의총 결과”라고 전했다.

국민의힘은 즉각 규탄하고 나섰다.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는 “민주당의 최종 조건을 수용하겠다는 전향적인 자세로 협상안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생 현장의 절절한 목소리를 외면하고 800만 근로자와 83만 중소기업, 또 영세자영업자들의 눈물을 외면했다”며 “민주당 1순위는 민주노총, 한국노총 등 기득권 양대 노총일 뿐이다. 선거에서 이들의 도움을 받을 생각에 민생을 내던졌다. 오로지 표만 생각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윤 원내대표는 “국민과 함께 분노하고 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통령실 역시 “정부·여당이 중소기업, 영세상공인의 어려움과 절박한 사정을 대변해 유예를 촉구한 부분이 있는데 민주당이 이를 외면했다”고 지적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여당 원내대표가 민주당이 그동안 요구해 온 산업안전보건청을 수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이 거부한 것은 결국 민생보다 정략적으로 지지층 표심을 선택한 것 아니냐”면서 “83만 명 영세사업자들의 절박한 호소와 수백만 근로자들의 일자리를 어떻게 이토록 외면할 수 있는가”라고 유감 입장을 표명했다.

여의도에서와 마찬가지로 경영계와 노동계에서도 각자 다른 입장이 강하게 부딪치고 있다. 경영계는 중처법 유예 불발에 실망스럽다는 목소리를 냈다. 노동계는 환영의 뜻을 표했다.

지난달 31일 국회 앞에서 열린 50인 미만 사업장 중대재해처벌법 유예 불발 규탄 대회에서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이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에게 호소문을 전달하고 있다.|연합뉴스

한국경영자총연합회(경총) 임우택 안전보건본부장은 “어제 중소기업인들이 절박한 심정으로 법안 처리를 호소했지만 법안 처리가 무산돼서 매우 실망스럽다”며 “중소기업 현장에 많은 혼란이 올 것 같다. 현장에서 처벌 사례가 계속 늘어나지만 (중처법을) 준비하기 위한 지원은 부족해 걱정이 크다”고 말했다.

이어 남은 2월 임시국회 등 이날 이후라도 중처법 유예를 통과시킬 수 있도록 국회에 건의하겠다면서 “경영계 입장에서 입법 개정과 관련된 건의를 계속해 나갈 예정”이라고 했다.

중소기업중앙회와 대한전문건설협회, 소상공인연합회 등 17개 중소기업 단체 또한 논평을 내고 “오늘 법안 처리가 무산되면서 83만이 넘는 영세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은 예비 범법자로 전락할 위기에 처하게 됐다. 지금 복합 경제위기로 산업 현장에서 느끼는 중소기업들의 체감 경기가 급속하게 얼어붙고 있는 와중에 형사 처벌에 따른 폐업 공포를 더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라고 주장했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은 기자회견을 통해 “이미 시행된 법을 가지고 유예를 논의하는 것 자체가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죽어도 된다는 의미와 다름없다”며 “중대재해처벌법은 노동자들이 수십 년 동안 일터에서 죽고 다치고 병들어간 노동자의 핏값으로 만들어진 법이다. 특히 작은 사업장에서 떨어져 죽고 치여 죽고 끼여 죽고 맞아 죽는,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재해가 반복되고 있다.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죽음을 국회가 방치해선 안 된다”고 이번 유예 불발 결정을 환영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도 성명에서 “정부와 여당의 중대재해처벌법 개악 시도가 무산된 것을 환영한다”면서 “이제야 비로소 사업장의 규모와 상관없이 더 많은 노동자들이 중대재해처벌법의 적용 대상이 됐다”고 강조했다.

중처법의 추후 협상 여지는 남아있는 상태다. 윤영덕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이후 상황 변화에 따라, 국민의힘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