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을 딛고 예술혼을 불사르다…‘빛’을 찾은 화가, 존 사전트

마리 오스투(Mari Ostu)
2024년 03월 27일 오후 12:02 업데이트: 2024년 03월 27일 오후 12:02

예술가들은 영감을 얻어 작품을 만들지만, 때로는 자신의 정체성과 자아를 찾기 위한 수단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19세기 미국의 화가 존 싱어 사전트(1856~1925)는 실패를 이겨내는 과정에서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1886)를 그림으로써 예술에 대한 열정을 다시금 불태웠다.

실패를 이겨내다

존 싱어 사전트와 ‘마담 X’, 아돌프 기라우던 | 공개 도메인

이탈리아 피렌체에 거주한 미국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사전트는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 큰 어려움 없이 꿈을 펼칠 수 있었다. 초기 인상주의 화가인 그는 초상화와 풍경화 등을 그리며 프랑스 파리의 주류층으로부터 인기를 얻었다.

‘마담 X(피에르 고트로 부인)’(1883), 존 싱어 사전트 | 공개 도메인

그러나 1884년, 그가 공개한 한 작품으로 인해 프랑스 예술의 중심지인 파리 전체가 논란에 휩싸였다. 그의 작품 ‘마담 X(피에르 고트로 부인)’는 공개와 동시에 대중으로부터 외면받았다. 그들은 작품 속 여인의 피부가 너무 창백하고, 지나치게 관능적이고 선정적이라며 혹평했다.

사전트는 그림 속 여인을 통해 당시 세속적 풍토와 도덕적 쇠퇴를 나타내고자 했다. 그러나 예술계는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고, 결국 그는 파리를 떠나 영국으로 가 요양하기로 결심했다.

빛을 관찰하다

‘비커스 아이들의 정원 연구’(1884), 존 싱어 사전트. 캔버스에 오일 | 공개 도메인

사전트는 영국 시골로 이주해 삶의 터전을 꾸렸다. 그러던 중 그는 후원자 토마스 비커스 대령 가족의 초상화를 그리러 갔다가 그 곳에서 비커스의 자녀들이 정원에 있는 모습을 목격한다. 어린 남매가 화분에 물을 주는 모습을 본 그는 아이들의 아름다움에 영감을 얻어 ‘비커스 아이들의 정원 연구’를 탄생시켰다. 단순한 화면 구성이지만 물 주기에 집중하고 있는 소녀와는 대조적으로 화가와 눈이 마주친 소년의 천진난만함이 돋보인다.

1885년, 사전트는 동료 화가 에드윈 오스틴 애비와 여행을 떠났다. 어느 날 그는 강에서 다이빙하다 머리에 부상을 입었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강변에 앉아 있던 그의 눈에 강변의 나무와 백합꽃, 그 사이에 매달린 중국식 등불이 들어왔다. 그 순간의 풍경과 어우러진 빛을 놓치지 않으려고 그는 열정을 다해 스케치했다.

비커스 아이들을 그린 경험과 그의 뇌리에 강렬하게 남은 풍경이 함께 어우러져 걸작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를 탄생시켰다.

사전트는 머리 부상이 회복될 때까지 영국 코츠월드구의 브로드웨이 마을에 머물렀다. 그 곳에서 그는 앞서 경험한 강렬한 인상을 토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색채를 포착하다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는 1885년부터 2년 동안 브로드웨이 마을의 해 질 녘을 관찰해 그린 작품이다. 그는 지인의 자녀 돌리와 폴리를 모델로 세워 눈부시게 아름다운 작품을 완성했다.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1886), 존 싱어 사전트. 캔버스에 오일 | Sailko/CC BY 4.0

짙은 초록빛 잔디를 배경으로 백합과 카네이션,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그 속에 하얀 드레스를 입은 소녀들이 각자 등불을 들고 조심스레 그 속을 관찰한다.

이 작품은 실재하는 장면을 들여다보는 듯 독보적인 생동감을 지녔다. 소녀들의 다리 주위 소용돌이치듯 자라난 풀들과 화면 전체에 흩날리듯 피어난 꽃송이는 바람에 흔들리는 듯 생기 있다. 사전트는 순식간에 지나가는 삶의 아름다운 한 장면을 물감과 붓으로 화폭에 새겨 넣어 영원히 존재하게 했다.

캔버스에 오일 | Sailko/CC BY 4.0

해 질 무렵의 햇빛은 연한 보라색으로 소녀들의 옷을 물들인다. 금빛 머리카락에도 황혼의 빛이 물들고, 우아한 붉은 빛을 뿜어내는 등불 또한 소녀들의 머리카락에 반사돼 반짝인다. 노을의 오묘한 색과 등불의 색은 서로 어우러져 화면 전체에 따뜻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사전트는 사실적인 묘사를 위해 약 1년 동안 매일 해 질 무렵 3분씩만 그림을 그렸다. 따사로운 햇볕이 부드러운 보랏빛을 띨 즈음, 그는 붓을 들고 이젤로 다가가 3분 동안 그림을 그렸다. 주위에 거주하던 예술가들은 그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매일 관찰하며 그의 노력에 감탄했다. 빛과 색채에 대한 깊은 연구와 노력의 결과로 탄생한 이 작품은 희대의 걸작으로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다.

아름다움을 포착하다

‘피스케 워렌 부인과 그녀의 딸 레이첼’(1903), 존 싱어 사전트. 캔버스에 유채 | 공개 도메인

사전트는 파리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영국으로 귀향한 초기에는 예술을 포기하고 다른 직업을 찾을지 고민했다. 대중과 평론가들에게서 큰 상처를 입고 예술에 대한 열정을 거의 잃어버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영국의 작은 마을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깨닫고, 다시금 탐미와 창작에 대한 불꽃이 일어났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 탄생한 작품인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는 그가 예술적 정체성에 대한 의심과 고민을 겪은 후 다시 자아를 찾고 예술혼을 불태우게 된 계기이자 결과물이다. 이 작품 이후 그는 많은 풍경화와 초상화를 남겼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그의 작품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영감을 주고 있다.

마리 오스투는 미술사와 심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그랜드 센트럴 아틀리에의 핵심 프로그램에서 고전 드로잉과 유화를 배웠다.

*류시화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기사화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