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물화에 담긴 다양한 의도…과일 그림 ‘3인 3색’

미셸 플라스트릭(Michelle Plastrik)
2024년 03월 12일 오전 8:20 업데이트: 2024년 03월 12일 오전 8:20

일상의 여러 사물을 주제로 한 회화를 통칭하는 정물화는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시작됐다. 이어 프레스코화, 모자이크화에서도 음식과 연회가 주 소재로 등장했다. 이 장르는 17세기 초 네덜란드에서 화려하게 부활해 번성했고,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등 유럽 전역으로 확산했다.

정물화 장르에는 꽃·사치품·일상품·과일 등을 그린 회화, 인생의 무상함과 죽음을 상징하는 바니타스화 등 다양한 범주가 존재한다. 우화적이고 철학적인 정물화도 있지만, 단순히 사물 표면을 감상하기 위한 것도 있다. 그중 과일을 주제로 한 정물화의 역사를 살펴보면 사실주의와 예술적 표현, 종교적 상징주의 등 다양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멜렌데스의 정물화

‘학술 연구를 하고 있는 자화상’(1746), 루이스 멜렌데스. 캔버스에 오일 | 공개 도메인

18세기 스페인의 위대한 정물화가 루이스 멜렌데스(1716~1780)는 생전에는 동시대 화가였던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에 가려져 과소평가됐다. 그의 작품은 20세기에 이르러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멜렌데스는 이탈리아 나폴리 태생으로 어린 시절 스페인으로 이주했다. 저명한 예술가였던 아버지 덕에 스페인 마드리드 왕립 아카데미에서 미술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곳에서 근무했던 아버지가 해고당하자 아들인 멜렌데스도 퇴학당했다.

가난 속에서도 미술을 포기하지 않았던 멜렌데스는 왕실 화가가 되기를 갈망했다. 1771년 음식을 통해 사계절을 묘사한 그림을 그리라는 왕실의 부름을 받았으나 그 왕명은 1776년 갑자기 취소됐다.

‘멜론과 배가 있는 정물’(1772), 루이스 멜렌데스. 캔버스에 오일 | 공개 도메인

그로부터 4년 후 멜렌데스는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100여 점의 작품들은 스페인 정물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멜론과 배를 담은 정물화(1772)’는 왕실의 의뢰로 그린 작품 중 하나로 추정된다. 사실주의의 걸작으로 꼽히는 이 작품은 절제되고 세심하게 구성된 기하학적 구조가 돋보이면서도 과일의 표면이 강렬하고 풍부하며 인상적인 색채로 묘사됐다. 배경은 단조롭고 어둡게 표현됐고, 탁자 위는 식기와 조리도구로 혼잡한 듯 하지만 조화를 이룬다.

과일과 탁자, 물건들이 정면을 향해 평면적으로 놓여 있지만, 멜렌데스는 과일의 입체감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화면 가운데 눕혀진 배의 꼭지와 멜론이 탁자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입체감을 부각한다.

프랑스의 ‘위대한 마술사’

‘챙 모자를 쓴 자화상’(1776),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푸른 종이에 파스텔 | 공개 도메인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1699~1779)은 18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정물화가다. 멜렌데스와 달리 샤르뎅은 전 생애에 걸쳐 유럽 전역의 귀족, 왕족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샤르댕은 노동 집약적 작업 방식을 선호해 한 작품이 인기를 끌면 그 작품을 여러 버전으로 재구성해 그리며 인기를 누렸다. 당대 철학자이자 미술 평론가였던 드니 디드로(1713~1784)는 그를 두고 “위대한 마술사”라고 평했다. 샤르댕의 작품 속 색채의 조화와 구도는 마술로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샤르댕은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평생을 보냈다. 화단(畵壇)에 오른 초기에는 동물과 정물화를 그리는 데 집중했고, 이후 생활 풍속화를 주로 그려 장르화가로 이름을 알렸다. 미술계에서 큰 사랑을 받던 그는 약 20년 후 다시 정물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대담한 붓놀림으로 평면적인 그림에 생기를 불어넣어 평범한 음식을 세심하게 묘사한 그의 작품들은 시적이라는 평을 받았다.

‘야생 딸기 바구니’

‘산딸기 바구니’(1761),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캔버스에 오일 | 공개 도메인

1761년 작 ‘야생 딸기 바구니’는 그의 유명한 작품 중 하나다. 그는 생전 약 120점의 정물화를 그렸는데, 이 작품은 딸기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유일한 작품이다.

바구니에 딸기가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여있다. 그는 묘사된 대상을 강조하기보다는 그 형태와 부피를 세심히 연구해 정확히 묘사하는 것에 중점을 뒀다. 또한 그는 당대 화풍의 경향을 중시하기보다는 자신만의 예술적 가치를 추구했기에 작품의 서정성과 순수성이 돋보인다.

영적 상징주의

종교적 서술화 장인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1598~1664)은 17세기 스페인의 주요 예술가다. 수르바란은 영적인 의미를 담은 정물화도 다수 남겼다. 그는 종교계와 왕실의 사랑과 후원에 힘입어 수많은 벽화, 종교화를 그렸다. 그러나 말년에는 화단의 유행 변화에 뒤처져 도태됐고, 가난에 허덕이다 외로운 죽음을 맞이했다.

‘무염시태’(1630),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산 페드로 예배당 | 공개 도메인

수르바란은 예술과 열정의 도시 세비야에서 미술 교육을 받고 자라 그 지역을 대표하는 예술가로 성장했다. 이후 남부 스페인 전역을 대표하는 화가로서 유럽 전역을 넘어 신대륙에서도 후원자를 얻었다. 이탈리아 초기 바로크를 대표하는 화가 카라바조(1571~1610)의 사실주의적 작품에 영향을 받은 그는 빛과 그림자를 효과적으로 사용해 일상을 초월한 강렬한 작품을 창조했다.

‘레몬, 오렌지, 장미가 있는 정물’(1633),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노턴 사이먼 박물관 | 공개 도메인

1633년 작 ‘레몬, 오렌지, 장미가 있는 정물화’는 그의 걸작이자 이 장르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또한 이 작품은 수르바란이 서명을 남긴 유일한 작품이다. 학계는 이 작품에 대해 “17세기 스페인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이 작품은 중요한 종교적 의미를 지닌다. 세 가지 사물을 신중히 배치한 것은 삼위일체에 대한 신성한 암시로 여겨진다”라고 평했다.

명상적이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이 작품은 독보적인 입체감이 눈에 띈다. 또한 작품 속 사물은 각각 종교적 상징을 내포한다. 화면 가운데 바구니에 담긴 오렌지와 꽃은 성모 마리아에 대한 찬양을 뜻한다. 오른쪽 가시 없는 장미와 깨끗한 물은 각각 신성한 사랑과 순수함을 의미해 성모에 대한 찬사에 의미를 더한다. 왼쪽 주물 접시에 담긴 레몬은 부활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의 부활을 상기한다.

‘레몬, 오렌지, 장미가 있는 정물’(1633)의 세부 | 공개 도메인

수르바란은 짙은 검은색으로 칠한 어두운 배경과 빛을 활용해 입체감과 신비로움을 더했다. 왼쪽에서 쏟아지는 빛은 과일의 따뜻함을 강조하고, 과일을 받친 주물 그릇은 차가운 빛을 내뿜으며 대조를 이뤄 화면의 균형을 유지한다.

평범함에 가치를 더하다

각기 다른 시대를 살아온 세 명의 화가 멜렌데스, 샤르댕, 수르바란은 평범한 사물을 매혹적이고 사유적인 주제를 전하는 소재로 승화했다. 세 화가의 대표적 정물화는 과일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갖고 있지만, 각자의 독특한 예술적 스타일이 뚜렷이 드러난다.

미셸 플라스트릭은 뉴욕에 거주하며 미술사, 미술 시장, 박물관, 미술 박람회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류시화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기사화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