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일대일로 프로젝트 가입과 탈퇴 : 역사적 배경

[특집] 중국의 하이브리드 위협과 정치전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⑨

최창근
2024년 02월 1일 오후 12:04 업데이트: 2024년 02월 1일 오후 12:04

공격적 현실주의에 기반하여 팽창주의 전략을 구사하는 중국의 위협에 대한 국내외의 우려와 경고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중국몽(中國夢)’의 감춰진 이면은 ‘중화제국(中華帝國)’ 부활, 중화 패권주의하의 세계질서 재편이라 하겠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을 지배하는 중국공산당이 자신들의 이념과 질서하에 세계를 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중국은 이를 위하여 새로운 전쟁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무력과 비(非)무력, 군사와 민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종전의 ‘전쟁’ 개념으로는 정의할 수 없는 수단, 방법을 총동원하는 것입니다. 중국은 ‘하이브리드전’을 전개하여 ‘개방성’을 특징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약점을 공격하고 나아가 체제 붕괴를 추구합니다. 이 속에서 국내외 중국 문제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중국의 하이브리드 위협과 정치전에 대응하여 민주주의를 지키는 방법을 논의하였습니다.

에포크타임스는 에포크미디어코리아 중국전략연구소와 공동으로 1월 9~11일 한반도선진화재단, 한국세계지역학회, 국가안보전략연구원, 한국국가전략연구원이 공동 주최한 ‘국제자유네트워크 2024 국제회의: 하이브리드 위협과 중국의 정치전에 대응하는 방어적 자유민주주의’ 국제 세미나의 핵심 내용을 지상(紙上) 중계합니다.

발제

이탈리아 일대일로 프로젝트 가입과 탈퇴 : 역사적 배경

마테오 가를리니_시에나대 교수, 나토 펠로우

근대 유럽과 중국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895년 체결된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으로 청일전쟁(제1차 중일전쟁)이 종전됐다. 강화조약에서 청(淸)제국은 일본제국에 대만 섬을 할양하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유럽에 금융 부채를 지게 됐다.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이 중국에 차관을 공여했다.

당시 이탈리아왕국은 유럽과 일본제국 관계의 근본적인 전환기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 이후 의화단운동(義和團運動) 발발 시 이탈리아왕국은 다른 열강들과 함께 베이징을 함락시켰다. 신축조약(辛丑條約·Boxer Protocol)을 통해 톈진(天津)의 일부를 조차(租借)해 ‘이탈리아령 톈진’을 성립했다. 톈진 조차(租借)지는 연합국 8개국  중 가장 작은 규모였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 결과 1912년 1월 1일 청제국이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성립했다. 이탈리아왕국과 청제국 외교관계는 중화민국이 승계했다.

중국과 이탈리아 관계가 본격 형성된 것은 지난 20세기 초이다.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의 파시즘 정권(1922~1943년)하에서 이탈리아왕국은 중국과 관계 개선을 했다. 무솔리니의 사위 갈레아초 치아노(Galeazzo Ciano) 제독은 주(駐)베이징 공사, 주상하이 총영사를 역임했다. 그는 파시스트 정권을 중국에 홍보했다. 1922~1925년 재무부 장관을 지낸 경제학자 알베르토 데 스테파니(Alberto de’ Stefani)는 1937년 장제스(蔣介石)의 수석 경제 고문을 맡았다. 법률가 아틸리오 라바냐(Attilio Lavagna)는 1933~1935년 중국에 체류하며 중화민국 국민정부(國民政府) 사법 개혁에 일조했다.

갈레아초 치아노가 외교부 장관으로 재임했던 1936-1943년 중국과 관계가 소원해졌다. 그 시절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나치 독일, 제국주의 일본과 밀접해졌다. 이탈리아왕국은 중화민국과 외교 관계를 잠정 중단했다. 1940년 이탈리아왕국은 나치 독일, 일본제국과 이른바 추축국(樞軸國)협정을 체결했다. 일본제국은 중화민국의 적성국이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終戰), 1947년 파리 강화조약 체결 후 이탈리아공화국은 중화민국과 관계를 회복했다. 이탈리아령 톈진은 공식적으로 중화민국에 반환됐다. 도쿄(東京)의 주일본 이탈리아대사관이 중국 업무를 겸했다. 이 시기 중국 본토에서는 제2차 국공내전(國共內戰)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1949년 10월, 마오쩌둥(毛澤東)의 중화인민공화국(PRC)이 성립했다. 그해 12월 장제스의 중화민국(ROC) 정부는 대만으로 천도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영국, 네덜란드, 덴마크 등 유럽 국가들과 달리 미국의 입장에 동조했다. 본토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승인하지 않고 대만의 중화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했다. 1950년 영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외교적으로 승인했다. 서방 자유 국가 중 최초였다. 영국령 홍콩의 안전 문제가 주된 이유였다. 1950년 중국 공산당 정부는 이탈리아인 안토니오 리바(Antonio Riva) 등을 마오쩌둥 암살 음모 누명을 씌워 처형했다. 이탈리아의 반중국 감정의 원인이 됐다.

1949년 국공내전 종전 후 이탈리아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외교적으로 승인하라는 좌파 정당의 요구에 지속적으로 반대했다. 반공(反共)을 이념으로 하고 공산주의 중국에 경계심을 보이던 이탈리아기독교민주당(Italian Christian Democratic) 등 우파 정당은 이념으로 공산주의 국가와의 수교에 반대했다.

중화인민공화국과 경제·무역 관계는 수립했다. 중국 본토와 경제 관계의 물꼬를 틔운 것은 사업가 디노 젠틸리(Dino Gentili)였다. 그는 1958년 COGIS(Compagnia Generale Interscambi)를 설립했다. COGIS는 이탈리아의 대중국 무역 업무를 총괄했다. 피아트(FIAT)를 비롯한 이탈리아 주요 대기업들의 대중국 협력 창구였다.

1964년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대통령의 프랑스 정부가 중화인민공화국을 외교적으로 승인했다. 대만과는 단교했다. 그해 이탈리아는 중국과 ‘민간 협정’을 체결했다. 그 결과 중국은 로마에 무역대표부(commercial office)를 개설했다.

데탕트(Detente) 시기 이탈리아는 중국과 관계 정상화를 모색했다. 당시 집권당 이탈리아기독교민주당 구성원 다수가 중화인민공화국을 외교적으로 승인하는 것으로 정책 전환에 찬성했다. 다만 1963년 발발한 베트남전쟁, 문화대혁명(1966~1976년) 등으로 인하여 실제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1967년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은 미국의 대(對)중국 정책 재고(再考)를 촉구했다. 이 속에서 1969년 이탈리아 정부는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국무원 총리와 수교 협상을 시작했다. 협상 과정에서 난제(難題)는 중화민국(대만)과 외교 관계 문제였다. 베이징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들어 수교 시 타이베이와 외교 관계 단절을 요구했다.

1970년 11월 5일 이탈리아는 중화인민공화국과 공식 수교했다. 시대 배경으로는 1969년 3월 소련-중국 국경 분쟁(전바오섬 분쟁), 1970년 10월 중국-캐나다 수교 등이 꼽힌다. 이탈리아-중국 수교는 ‘대만 지위’에 대하여 중국의 요구를 수용한 선례를 남겼다. 중국은 대만의 중화민국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중국과 수교 시 단교를 요구한다.

이탈리아-중국 수교 후 10년간 상호 경제 교류가 이어졌다. 1980년대부터는 국면이 전환되어 ‘경쟁’ 체제가 됐다. 이탈리아와 중국은 경제 면에서 유사한 속성을 지녔다. 2000년대 초반 세계 시장 경쟁에서 중국 기업이 동종(同種) 이탈리아 기업을 능가하기 시작했다.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여타 유럽 국가와 달리 이탈리아는 중국 고도 경제 성장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그 속에서 2009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가 촉발한 글로벌 경제 위기가 이탈리아를 덮쳤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총리는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 주석을 로마로 초청했다. 양국 정상은 상호경제교류협정을 체결했다. 다만 협정의 혜택은 크지 않았다.

2012년 마리오 몬티(Mario Monti) 총리가 베이징을 방문했다. 이탈리아-중국 관계는 ‘전략적 동반자’로 격상됐다. 2년 후인 2014년 마테오 렌치(Matteo Renzi) 총리는 ‘6대 전략 분야 협력 행동 계획’ ‘6대 전략 분야 협력 양해 각서’에 서명했다. 그 시기 이탈리아 외교 정책 기조는 유럽연합(EU)이 중국에 시장 경제 지위를 부여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2015년 이탈리아는 중국이 설립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가입했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은 일대일로 프로젝트 관련 자금 조달을 주 목적으로 설립됐다. 2016년 렌치 총리는 베이징을 방문하여 주요 국유기업, 은행 대표를 면담했다.

2017년 세르조 마타렐라(Sergio Mattarella) 이탈리아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다. 같은 해 파올로 젠틸로니(aolo Gentiloni) 총리는 베이징에서 열린 일대일로 국제 협력 포럼에 참석했다. 2019년 3월 21일 시진핑 주석의 이탈리아 국빈 방문 시 양국 정부는 일대일로 프로젝트 양해 각서에 서명했다. 당시 총리는 주세페 콘테(Giuseppe Conte)였다. 극우 성향 북부동맹(Northern League), 포퓰리즘 성향 오성운동(Five Star Movement), 무소속 연립 정부였다.

이탈리아는 주요 7개국(G7) 중 유일하게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참여 전 2000~2019년 중국의 대이탈리아 직접 투자 금액은 159억 유로였다. 같은 기간 독일은 227억 유로, 영국은 503억 유로를 기록했다.

일대일로 프로젝트 양해 각서, 하위 협정에는 항만을 포함한 국가 인프라스트럭처 분야 협력을 포함했다. 미디어, 금융, 연구, 고등교육 분야도 망라한다.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양해각서는 이전에 체결한 다른 종류의 이니셔티브와 대동소이했다. 프로젝트 참여는 정치적 측면에서 의의가 있었다.

나와 동료 연구자들이 펴낸 ‘이탈리아의 일대일로 이니셔티브: 5대 사례 연구(The Belt and Road Initiative in Italy: Five Case Studies)’에서는 이탈리아가 체결한 일대일로 프로젝트 가입 협정의 위험성을 평가했다. 대표적인 위험 요소는 ▲부채 함정 ▲상호 연결성, 허브 장악 ▲투명성 결여 ▲지역 경제 대한 불이익 ▲법적 보호 부족 ▲기술·노하우 탈취 ▲기업 간 파트너십 활용 기술 탈취 ▲대학 연구 프로그램, 연구소 자금 지원으로 인한 영향력 행사 ▲미디어 교류 ▲일대일로 프로젝트 정치적 정당화 등이다.

이에 대하여 이탈리아 정부는 황금주(golden share)를 적극 활용하는 방법 등을 통해 폐해를 방지할 수 있었다. 특히 중국의 이탈리아 주요 기간 산업에 대한 투자, 주주권 행사 관련 위험을 차단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2015년 중국 국유기업 중국화공그룹에 매각한 타이어 제조사 피렐리(Pirelli) 경영권이 추가로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고자 중국이 피렐리에 미치는 영향력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다. 중국공산당 정부가 피렐리의 최대 주주 중국화공그룹을 앞세워 기술을 탈취하고 경영에 간섭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자 선제 대응에 나섰다. 조르자 멜로니(Giorgia Meloni) 내각은 해외 투자 유치 시 자국 기업을 보호하는 ‘골든 파워(Golden Power)’ 규정을 활용했다.

2023년 12월 이탈리아 정부는 일대일로 프로젝트 탈퇴를 선언했다. 프로젝트 양해각서는 기본적으로 구속력 없는 계약 서면이다. 양해각서 체결 후 이탈리아-중국 간 무역 수지 불균형을 해소하지 못했다. 중국의 대 이탈리아 수출액이 이탈리아의 대중국 수출액을 능가했다. 결론적으로 이탈리아는 중국의 보복 없이 일대일로 프로젝트에서 탈퇴할 수 있었다.

마테오 가를리니(Matteo Gerlini)

마테오 가를리니 | 한기민/에포크타임스

현재 이탈리아 시에나대(University of Siena) 정치·국제관계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피렌체대(University of Florence)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 후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나토 펠로우(NATO Fellow)로 활동하며 나토 평화안보학 프로그램, 나토 방위대 강의 프로그램 등에 참여했다. 아시아권에서는 대만 펠로우십으로 국립정치대(國立政治大), 국방대에서 방문학자로 연구·강의 활동을 했고 일본 게이오대(慶應大)에서도 강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