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문화를 변화시킨 최고의 후원자, 헨리에타 마리아

제임스 바레셀(James Baresel)
2023년 12월 14일 오후 11:00 업데이트: 2024년 02월 5일 오전 11:28

잉글랜드(영국) 왕 찰스 1세의 왕비 헨리에타 마리아(1609~1669)는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 프랑스 전역을 호령했던 부르봉 왕가 출신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실 예술품 감정가 중 한 명인 찰스 1세는 17세기 영국의 예술, 문학, 건축계의 헌신적인 후원자로서 엄청난 기여를 하였다.

예술 후원의 계보

‘헨리에타 마리아 왕비’(1636), 안소니 반 다이크. 캔버스에 오일.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공개 도메인

그녀는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그녀는 앙리 4세의 막내딸로 1625년 결혼 후 처음으로 프랑스 국경을 넘는다. 이후 영국에서 생활하던 중 영국 남북전쟁에서 왕당파가 패배하자 1644년 고국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아들 찰스 2세가 왕정을 복원하자 영국으로 돌아갔으나 1665년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4년 후 생을 마감했다.

헨리에타는 예술계에 관심이 많았던 어머니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녀의 어머니 마리 드 메디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발상지인 피렌체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예술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이후 프랑스의 왕 앙리 4세와 결혼해 프랑스 궁정의 문화생활 활성화에 여러 가지 기여를 했고, 마리의 영향을 받은 헨리에타 또한 문화계에 큰 관심을 가졌다.

영국은 그녀의 모국과는 매우 다른 문화적 환경에 처해 있었다. 당시 영국인들은 처음으로 예술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유럽 전역의 예술가들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고 있었고, 건축 미학도 영국 특유의 자코비안 양식에서 엄격한 고전주의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월계관을 들고 있는 찰스 1세와 헨리에타 마리아’(1632), 안소니 반 다이크. 캔버스에 오일 | 공개 도메인

찰스 1세는 이러한 영국 문화 변화의 선두에 있었다. 그는 세계 최대의 르네상스 예술 컬렉션을 보유한 스페인 왕실을 방문한 후, 영국에도 그러한 문화적 발전을 이룩하고자 결심했다. 그리고 헨리에타는 찰스의 뜻을 따라 많은 도움을 주었다.

여왕의 후원

그리니치 왕립 자치구에 위치한 ‘여왕의 집’ | 마이클 코핀스 / CC BY.SA 4.0

남편과 함께 문화계에 많은 후원을 시작한 헨리에타는 영문학 및 연극 분야에 가장 큰 관심을 뒀다. 당시 무명이었던 극작가 제임스 셜리를 고용해 극단을 꾸려 그를 16세기 영국 최고의 극작가로 키웠다. 또한 건축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던 그녀는 건축가 이니고 존스에게 ‘여왕의 집’ 설계를 의뢰했다. 이니고 존스는 고전주의에 기반한 팔라디오 양식을 영국에 처음 도입한 인물이다. 그리고 헨리에타의 의뢰로 완성된 ‘여왕의 집’은 영국에서 최초로 건설된 고전주의 양식 건축물로 영국 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건축물 중 하나이다.

헨리에타는 그림 분야보다는 문학과 건축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지만, 남편인 찰스가 그림 분야 후원에 열성적인 모습을 보이자 많은 지원을 해주며 문화계 인재 발굴에 일조했다. 그 일환으로 헨리에타는 여왕의 집 연회장(그레이트 홀) 천장화를 그리는 데에 이탈리아 출신의 여류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를 추천했다.

고전주의를 이은 화가

‘자화상’(1638),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캔버스에 오일. 영국 로얄 컬렉션 | 공개 도메인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1593~1652)는 피렌체 예술가들에게서 교육받으며 전통 고전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이후 바로크 양식의 작품을 그렸다. 또한 그녀는 이탈리아 초기 바로크의 대표적인 화가로 꼽히는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후대 화가 중 가장 높은 성취를 이룬 인물로 평가받는다.

‘여왕의 집’의 천장화. ‘평화와 예술의 우화’(1635~1638),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영국 로얄 컬렉션. | 헬비오 리시나/ CC BY.SA 4.0

프랑스에서 예술 활동을 펼치던 젠틸레스키는 버킹엄 공작의 요청으로 영국 왕실을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후 바로크 양식에서 고전주의 양식으로 회귀한 그녀의 작품은 당시 바로크 양식에 심취한 영국인들에게 크게 환영받진 못했다. 그러나 헨리에타는 고전주의를 추구하는 그녀의 작품 가치를 알아봤다. 젠틸레스키의 작품을 가능한 한 많이 사들이고 찰스에게 고전주의 예술품의 가치를 전달해 그가 젠틸레스키를 더 적극적으로 후원하도록 했다.

영국을 문화 중심지로 만들다

‘모세의 발견’(1633),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캔버스에 오일.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 공개 도메인

1669년, 헨리에타는 프랑스에서 사망했다. 영국은 그녀와 찰스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엄청난 문화적 발전을 이뤘고, 영국 출신 예술가들의 수준과 위상 또한 높아졌다. 헨리에타의 노력으로 영국은 예술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하게 되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제임스 바레셀은 파인 아트 감정, 군사 역사, 뉴 에스턴 유럽 등 다양한 잡지에 기고한 프리랜서 작가입니다.

*류시화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기사화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