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종언’ 시대의 종언 : 새로운 위협, 중국

[특집] 중국의 하이브리드 위협과 정치전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③

최창근
2024년 01월 25일 오후 3:12 업데이트: 2024년 02월 6일 오전 9:50

공격적 현실주의에 기반하여 팽창주의 전략을 구사하는 중국의 위협에 대한 국내외의 우려와 경고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중국몽(中國夢)’의 감춰진 이면은 ‘중화제국(中華帝國)’ 부활, 중화 패권주의하의 세계질서 재편이라 하겠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을 지배하는 중국공산당이 자신들의 이념과 질서하에 세계를 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중국은 이를 위하여 새로운 전쟁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무력과 비(非)무력, 군사와 민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종전의 ‘전쟁’ 개념으로는 정의할 수 없는 수단, 방법을 총동원하는 것입니다.

중국은 ‘하이브리드전’을 전개하여 ‘개방성’을 특징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약점을 공격하고 나아가 체제 붕괴를 추구합니다. 이 속에서 국내외 중국 문제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중국의 하이브리드 위협과 정치전에 대응하여 민주주의를 지키는 방법을 논의하였습니다.

에포크타임스는 에포크미디어코리아 중국전략연구소와 공동으로 1월 9~11일 한반도선진화재단, 한국세계지역학회, 국가안보전략연구원, 한국국가전략연구원이 공동 주최한 ‘국제자유네트워크 2024 국제회의: 하이브리드 위협과 중국의 정치전에 대응하는 방어적 자유민주주의’ 국제 세미나의 핵심 내용을 지상(紙上) 중계합니다.

기조연설

‘역사의 종언’ 시대의 종언 : 새로운 위협, 중국 

월러스 그렉슨_전 미국 국방부 동아시아·태평양 안보 담당 차관보

중국의 하이브리드 위협과 정치전(Political Warfare)에 대응하는 자유민주주의에 관한 중요한 국제회의를 주최한 용기와 혜안(慧眼)에 감사한다. 회의 주제가 설명해주고 있듯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의 협력을 촉구하고 있다. 이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는 ‘하이브리드 위협(Hybrid Threat)’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군사, 비(非)군사 수단은 물론 허위 정보(가짜 뉴스), 사이버 공격, 정규군 사용, 비(非)정규 무장 단체 사용, 경제적 압박 수단 사용 등 은밀한 수단과 가시적인 수단을 결합한 것이다.

정치전의 대략적인 정의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가 유럽을 지배하던 시절 군 복무를 했던 프러시아 출신 군사전략가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의 정의에서 찾을 수 있다. 클라우제비츠는 서양 군 관련 기관에서 성자(聖子) 혹은 예지자(叡智者)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그의 통찰의 핵심을 인용하자면 ‘전쟁은 인용되지 않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지속’이다. 클라우제비츠의 정의를 원용하면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전은 무력 충돌의 연속’이라는 의미가 된다.

19세기 저명 미국 유머가 중 한 사람은 “알고 모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라고 지적했다. 미국에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네 가지의 일반 신념이 존재한다. 실제는 알고 있지 못한 것으로 밝혀졌다. 첫째, 미국의 외교 정책, 안보 전략에 있어 당국자들은 늘 ‘전쟁은 짧을 것이다.’라고 예측한다. 1990~1991년 중동 쿠웨이트에서 단기전(걸프전쟁)이 발생했다. 훗날 미국 행정부의 선택으로 장기전(이라크전쟁)으로 비화했고 미국의 예측은 빗나갔다. 둘째, 우리는 늘 가장 최근 발발한 전쟁을 ‘마지막 전쟁’이라고 믿는다. 셋째, 우리는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더 이상 싸울 대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믿는다. 넷째, 무력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평화로운 상태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국은 더 이상 싸울 대상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 후 소련의 행동과 글로벌 제패 야망은 미국의 ‘현명하지 못한 가정’을 급속히 무너트렸다. 독일 베를린 봉쇄를 시도한 소련은 핵무기 실험에도 성공했다. 동유럽 공산권 정부도 지원했다. 소련이 부추기고 지원한 한반도 분쟁(6·25전쟁)이 발생했다. 동유럽 다수 국가의 민주주의 정부가 전복되면서 우리의 생각은 조변석개(朝變夕改)했다. 우리는 군사적 측면은 물론 심리적 준비도 미비(未備)한 상태에서 참전했고 수많은 생명을 잃었다. 대한민국을 공산주의의 마수(魔手)에 잃을 뻔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終戰) 직전 미국이 깨달은 사실이 한 가지 있다. 20세기에 제3차 세계대전 발발을 막기 위한 ‘새로운 글로벌 시스템’의 필요성이다. 새로운 글로벌 시스템은 소련이 초래한 냉전에 성공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게 될 것이었다.

냉전 정책 수립에 영향력을 끼친 현자(賢者) 중 한 사람은 조지 케넌(George Kennan)이다. 그는 1946년 모스크바에서 소련의 본질을 설명하는 ‘긴 전문(Long Telegram)’을 보낸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봉쇄(containment)’ 개념의 탄생이었다. 이후 케넌은 또 다른 영향력 있는 메모를 작성했다. ‘조직적 정치전의 출범(The Inauguration of Organized Political Warfare)’ 제목의 메모는 관료 사회에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정치전을 ‘전쟁이 아닌 한 국가 지휘하에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세대가 인식한 전쟁, 달리 말하여 즉 국가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작전은 명백하고 은밀한 것이다. 정치적 동맹, 경제적 조치, 백색선전(White Propaganda) 등과 같은 가시적인 행동부터 우호적인 외국 정부 기관에 대한 비밀 지원, 심지어 적대국에서의 지하 저항 운동을 장려하는 등 은밀한 작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정치전 영역에서 성공은 냉전 과열을 방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냉전이라는 ‘우산’ 아래에서 미국은 몇 가지 악랄한 정치 캠페인을 벌였다. 하지만 전 세계적 규모의 무력 충돌 없이 세계 질서가 유지될 수 있었다.

20세기 들어 세 번째로 수립된 세계 질서이자 냉전 시기 정치 전략의 초석(礎石)이 된 회의는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던 1944년 7월 개최된 브레턴우즈회의(Bretton Woods Conference)다. 44개 연합국 대표 730명이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턴우즈에 모였다. 회의의 주요 목표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와 같이 전후(戰後) 특정 국가를 처벌하는 징벌적 조약의 폐해를 방지하는 것이었다. 미국과 연합국은 전쟁 승리를 확신하기도 전에 전후 체제를 설계했다.

브레턴우즈회의의 대(大)구상은 체제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개방형 시장’ 개념이었다. 제1·2차 세계대전 발발 원인이 됐던 약탈적 경제 제도, 식민지 통치 관행을 없애고자 했다. 이는 각국이 자국의 국익을 지키면서도 배타적 무역 블록을 구성하여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더 이상 용납되지 않음을 의미했다. 당시 세계 대부분을 지배했던 식민지 체제에서 탈피하기 위한 작업이 시작됐다. 해당 작업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동맹국이었던 ‘식민제국(植民帝國)’ 영국, 프랑스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이뤄졌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식민주의 종식에는 수십 년이 소요됐다. 평화로운 과정도 아니었다. 1947년 중국, 인도네시아, 베트남에서 본격적인 전쟁이 발발했다. 한반도, 말레이시아에서는 공산 게릴라전이 격화됐다. 탈(脫)식민지 이후 전쟁과 사변으로 인해 250만 명의 전투원과 수백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브레턴우즈회의의 두 번째 구상은 서방 정치·경제 질서 공동 관리이다. 산업화된 주요 민주주의 국가들이 무역·자본 이동의 장벽을 낮춰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해당 국가에 시스템 관리 책임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회의가 도출한 합의에 담긴 철학은 세계대전이라는 악순환을 초래한 국제적 상황을 최소화하거나 없애는 것이었다. 미국은 우방과 동맹의 성공을 도우면서 정치적, 경제적, 이념적으로 위대한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마셜 플랜(The Marshall Plan)’이 대표적인 예다.

우리는 브레턴우즈협정을 이끌어 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공공기관을 만들었다. 수감 중이던 소련 반체제 인사들이 우리의 이야기를 들었다. 소련 반체제 인사이자 훗날 이스라엘 정치가가 되는 작가 나탄 샤란스키(Natan Sharansky)는 “세계는 공정한 사회와 자유로운 사회로 나뉜다.”는 말을 했다. 자유유럽방송(Radio Free Europe), 미국의소리(VOA)를 비롯한 타지역 유사 기관들은 공포 국가의 압제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이야기를 전했다.

소련 붕괴로 냉전이 끝난 후, 조지 H. W. 부시(George Herbert Walker Bush) 대통령은 ‘냉전 체제’를 종식시켰다. 부시 대통령은 “냉전은 인류의 영혼을 위한 투쟁이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되돌아가서 ‘더 이상 싸울 대상이 없다.’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국방 예산이 줄어들면서 평화 배당을 추구했다. 미국 방위 산업은 효율성, 적시(適時) 납품 명목으로 통합됐다. 포로를 줄이거나 없앤다는 명분으로 포로수용소를 운영했다.

인권은 경제 발전 논리에 밀려 부차적인 문제가 됐다. 주요 기업들은 부당노동행위, 지적재산권 도용 문제를 무시한 채 중국 내 사업 공간 확보 경쟁에 돌입했다. 미국의 정책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브레턴우즈회의에서 시작하여 지난 70년 동안 또 다른 글로벌 분쟁을 방지했던 기존 국제 질서에 중국이 재통합되도록 돕는 정책이 됐다. 근본 가정은 ‘중국이 더 성공하면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나쁜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미중 관계가 냉전 종식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지만 이후 4번의 미국 대통령 임기에 걸친 대통령 미국의 초당(超黨)적 실수는 중국이 자유화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고 그럴 의지도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국, 미국, 일본, 호주, 대만, 독일, 캐나다, 이탈리아 등 모든 자유민주주의가 위협을 받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냉전 시대와 같은 높은 수준의 조직 교육, 작전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중국, 러시아의 점증하는 위협, 미국과 동맹국을 약화시키기 위한 그들의 무제한적 파트너십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충분하지 않다. 독재국가 이란, 북한은 그들의 공격을 지원하기 위한 최일선에 있다. 위협을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사회 전체가 노력해야 한다.

월러스 그렉슨(Wallace Gregson)

월러스 그렉슨 전 미국 국방부 동아시아태평양 안보 담당 차관보. | 한기민/에포크타임스

오바마 행정부이던 2009~2011년 미국 국방부 동아시아·태평양 안보 담당 차관보로 근무했다. 예비역 해병대 중장(中將)으로 미국 해병대 태평양사령부 사령관, 중부사령부 사령관, 주한미군 해병대 사령관, 제3해병원정군 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베트남전쟁 참전 전공으로 미국 동성훈장(Bronze Star Medal)을 수훈한 것을 비롯하여 한국, 대만(중화민국), 일본 정부로부터 각종 훈장을 수훈했다. 미국 해군사관학교 졸업 후 동(同)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살베레지나대(Salve Regina College)에서 국제관계학 석사, 미국 메릴랜드대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