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의 숙청 ‘현재 진행형’ 최측근 자오러지 관련자도 줄줄이 낙마

최창근
2023년 12월 21일 오후 5:38 업데이트: 2023년 12월 21일 오후 7:17

대만, 홍콩, 마카오, 시짱자치구(티베트), 신장위구르자치구는 이른바 중국의 ‘핵심 이익’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중국 공산당 정부가 주장하는 ‘국토 완정(完整)’의 의미와 더불어 외교안보‧경제 분야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높다. 이런 가운데 신장위구르자치구 지역 관리 대상 숙청이 집중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대상에는 시진핑 국가주석의 최측근도 예외는 없다.

지난 12월 11일, 대만 ‘연합보(聯合報)’ 자매지 ‘경제일보(經濟日報)’는 리펑신(李鵬新) 신장위구르자치구 중국 공산당위원회 부(副)서기의 체포‧조사 소식을 보도했다. 중국 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중국 국가감찰위원회 소식을 인용한 ‘경제일보’는 “리펑신 전 부서기가 심각한 법률‧규율 위반 혐의로 중국 공산당 중앙기율건사위원회‧국가감찰위원회 등 당(黨)‧정(政) 최고 감찰기관에서 강도 높은 징계 심사‧감독 조사를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리펑신은 1960년 산시(山西) 신저우(忻州)시 션치(神池)현 태생으로 칭하이(青海)성 칭하이사범대학(青海師範學院) 중문학과 졸업 후 중국 공산당 중앙당교에서 사회학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77년 17세 나이로 칭하이성 더링허(德令哈)농장 중학교 교사 생활을 시작했고 1984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입당 후 칭하이성 좡족자치주(藏族自治州) 하급 관리로 임용됐고 1980년대에 걸쳐 칭하이성 좡족자치주 일선 지방행정 책임자로 일했다. 1990년 1월 중국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칭하이성위원회 조직부 부(副)부장을 맡았고 이듬해 1월 부장으로 승진했다. 1991년 11월 공청단 칭하이성위원회 부서기로 전보됐고 1997년 서기로 승진했다. 1998~99년 중국공산당중앙당교 청년간부훈련반 연수를 했고 이후 칭하이성 내 몽골족(蒙古族)‧좡족(藏族)자치주 당 서기로 일했다.

2005년 45세 나이에 중국 공산당 칭하이성위원회 상무위원(부부장급)으로 선출됐고, 2011년 중국 공산당 네이멍구자치구(內蒙古自治區)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전보됐다. 그러다 2016년 신장위구르자치구 당위원회 부서기를 거쳐 이듬해부터 자치구 당위원회 비서장을 겸직하고 있다. 리펑신은 올해 들어 45번째 감찰‧조사를 받은 부부장급 이상 고위 간부이자 시진핑의 오른팔로 알려진 자오러지(趙樂際)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의 측근이다.

중화권 정치 평론가들은 ‘민감 지역’인 신장위구르자치구 지역 중국 공산당 간부들의 잇따른 낙마에 주목하고 있다.

‘에포크타임스’ 중문판에 따르면, 4월 11일 왕훙신(王洪欣) 신장위구르자치구 공업‧정보통신청(工信廳) 당조(黨組) 서기가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왕훙신은 자치구 내 화학기업 신장중타이그룹(新疆中泰集團)에서 장기간 일했으며 당위원회 서기, 회장 등을 역임했다. 이후 올해 3월 신장위구르자치구 공업‧정보통신청 부청장 겸 당조 서기에 올랐으나 1개월 여 만에 낙마했다.

8월 19일 젠팅웨이(簡庭衛) 신장위구르자치구 내 아러타이지구(阿勒泰地區) 당조위원회 부주임도 감찰 당국의 조사를 받았다. 젠팅웨이는 아러타이지구 내 당‧정 일선 행정책임자로 장기 재직 중이었다.

8월 31일에는 신장위구자치구 간부 두 명이 낙마했다. 마궈창(馬國強) 자치구 정법위원회 서기, 차오즈(曹志) 국유자산감독관리위원회 부주임이다. 동시에 낙마한 마궈창과 차오즈는 197년생 동갑내기이다.

10월 19일 한융(韓勇) 산시(陝西)성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주석도 조사를 받았다. 한융은 신장위구르자치구 당위원회 부서기를 지냈다.

11월 21일 리원주(李文祖) 신장위구르자치구 정협 경제위원회 부주임도 피조사자가 됐다. 이원즈는 자치구 내 농촌신용금고‧농업은행 관련 업무를 수행하며 회장, 당위원회 서기 등을 역임했다.

신장위구르자치구 중국 공산당 간부의 연이은 낙마를 두고 자오러지 상무위원 주변 인사 숙청의 일환이라는 분석도 제기됐다. 미국에 망명한 왕루이친(王瑞琴) 전 칭하이성 정협 위원은 올해 5월 낙마한 뤄위린(駱玉林) 국무원 국유자산감독관리위원회 감찰팀장의 사례를 들어 “이번에 낙마한 리펑신과 뤄위린은 ‘칭하이’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며 서로를 잘 아는 사이다.”라는 점을 강조했다. 뤄위린은 독직(瀆職), 뇌물 수수, 성 관련 비위 혐의로 조사받은 후 중국 공산당에서 제명됐다. 왕루이친은 “자오러지도 공직 생활 시작을 칭하이성에서 했으며, 주요 보직을 역임했다.”며 자오러지-리펑신-뤄위린 등 3인의 연결고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자오러지의 원적(原籍)은 산시성 시안(西安)시이지만 실제  칭하이성 시닝시에서 태어났다. 1975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농촌에서 일했고 마지막 ‘공농병대학생(工農兵大學生)’으로 1977년 베이징대 철학과에 입학하여 1980년 졸업했다. 이후 칭하이성상업학교 교사를 거쳐 성(省) 재경 부문에서 일했으며 1993년 성장 조리(助理) 겸 재정청장, 1994년 부성장, 1999년 성장 대리를 거쳐 2000년 42세로 당시 최연소 성장이 됐다. 이후 2007년 산시성 중국공산당위원회 서기로 전임됐다.

지방 관리로서 중앙 정계에서는 ‘무명’에 가깝던 자오러지가 베이징에서 출셋길을 달린 배경에는 시진핑이 있다. 산시성 당위원회 서기 시절 자오러지는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 전 국무원 부총리의 묘역을 ‘성역화’했다. 시진핑 부자의 원적이 있는 산시성 푸핑(富平)현에 있던 시중쉰의 묘지를 ‘능묘’로 개조했고 기념관도 건립했다. 묘소와 같이 있는 시중쉰기념관의 면적은 7000㎡이며 주변 전용도로와 주차장까지 합치면 2만㎡ 이상으로 왕조시대 천자의 능(陵)과 비견될 만한 규모이다.

자오러지는 ‘시(習)황제’ 성역화도 추진했다. 문화대혁명 시기 시진핑이 하방(下放)하여 15세부터 약 7년 인고의 세월을 보낸 산시성 옌안(延安)시 량자허(梁家河)에도 예산을 쏟아부어 기념 시설을 조성했다.

이런 배경의 자오러지는 2012년 시진핑의 중국 공산당 총서기 선출 후 승승장구했다. 시진핑 집권 1기(2012~17년) 그는 중국 공산당 중앙조직부장을 맡아 정부 부처, 국유기업, 매체, 대학 등의 고위직 약 4000명의 인사를 좌지우지했다.

시진핑 집권 2기(2017~22년)에는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서열 6위)로 피선되어 권부 핵심에 진입했다. 왕치산(王岐山)의 뒤를 이어 중국공산당 중앙기율위원회 서기를 맡아 부패와의 전쟁을 총지휘했다. 그러다 시진핑 집권 3기에는 서열 정치국 상무위원 서열이 3위로 뛰어올랐고 전인대 상무위원장을 맡았다.

왕루이친은 “자오러지가 신임하던 리펑신의 실각은 이례적이다.”라며 “해당 조치는 시진핑의 측근이자 동시에 그의 권력을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자오러지의 손발 자르기의 일환이다.”라는 분석을 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