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존재를 부르는 순수성…‘천사들의 주방’

이본 마르코트(Yvonne Marcotte)
2023년 11월 24일 오전 8:17 업데이트: 2024년 02월 5일 오전 11:28

스페인의 바로크 시대를 선도했던 화가,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는 스페인의 라파엘로라고 불린 인물이다. 무리요는 16세기 베네치아파와 17세기 플랑드르 미술에 큰 영향을 받아 화려하면서 신성성이 돋보이게 묘사하는 화풍으로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다.

신성을 그린 화가

‘무염시태’(1652),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캔버스에 오일, 436x297cm | 공개 도메인

무리요는 초기에는 어두운 화풍으로 작품을 묘사했으나, 종교화의 영향을 받아 차츰 온화하고 부드러운 화풍으로 발전했다. 그는 후기에 성모 마리아와 천사를 주 소재로 삼았다. 그의 작품 중 하나인 ‘무염시태(無染始胎)’에서 신성에 대한 이해와 존경이 최고조로 발현되었다고 평가된다. 우아한 형태와 색채로 자애로운 성모의 모습을 경건하게 표현한 이 작품은 많은 이들에게 신성성의 가치를 다시금 일깨웠다.

천상의 존재를 부르는 순수성

무리요는 섬세하고 따뜻한 표현 기법으로도 유명했지만, 그림 속에 그가 구현한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고, 보는 이를 쉽게 감화시키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스페인 세비야에 위치한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은 당시 성화로 명성을 크게 얻던 무리요에게 13점의 작품을 의뢰했다. 그때 그가 그린 작품 중 하나인 ‘천사들의 주방’은 신실한 신도를 돕고자 지상에 모습을 드러낸 천상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천사의 주방’

‘천사들의 주방’(1646),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캔버스에 오일, 180x450cm.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 공개 도메인

그림 속 주인공인 페레스는 무리요보다 수백 년 전에 실존했던 인물로,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페레스는 프란치스코 수도원에서 신을 모셨던 인물로, 주방 보조로 일생을 보냈다. 평신도였던 그는 부엌에서 수사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일을 맡았다.

어느 날, 페레스는 손님이 오기로 예정되어 있어 열심히 식사를 준비했다. 그러나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누군가 주방에서 준비된 음식을 모두 먹어 치웠다. 음식이 사라진 것을 안 그는 망연자실한 채 해결법을 얻기 위해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기도하던 그는 영적 황홀경에 휩싸였고, 몸에서 밝은 빛이 나며 공중에 떠올랐다. 기도를 마치고 깨어났을 때 주방에는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림의 왼쪽에는 수도원장이 식사에 초대한 손님들을 모시고 식당으로 들어오던 중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다. 주방 한편에는 페레스가 빛에 둘러싸여 공중에 떠 있고, 좀 더 안쪽에는 천사가 물병이나 포도주를 들고 있거나 요리와 설거지를 하고 있다. 그림 가장 오른쪽에는 수도원의 손님들을 위해 천사들이 식탁을 차리고 있다. 천사들은 사람들이 주방으로 들어왔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맡은 바 일에 집중하고 있다.

‘천사들의 주방’(1646)의 세부,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캔버스에 오일, 180x450cm.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 공개 도메인

무리요는 그림 속 주인공인 페레스를 한 곳에 더 배치했다. 그림의 오른쪽 아치 아래에는 마치 다른 시공간에 있는 듯 배치된 또 한 명의 페레스가 있다. 그는 본인이 해야 할 업무를 천사들이 대신하고 있는 현장을 목격해 놀란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현실이 된 영적인 세계

무리요는 그림 속에 프란치스코 수도원의 실제 부엌을 그대로 구현했다. 아궁이와 식탁의 위치, 사용하는 식기류 또한 실제의 것을 그대로 묘사했다. 그리고 그 실존하는 현장 속에 신성하고 영적인 세계를 함께 나타냈다. 화면 가운데 서 있는 두 천사를 기점으로 왼쪽은 인간계, 오른쪽은 영적인 세계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 페레스는 순수하고 올곧은 마음과 신실함을 담은 기도를 통해 그 영적인 세계를 현실로 불러왔다.

무리요는 현실 세계와 영적인 차원을 동등하게 실재하는 것으로 여겼다. 또한 바르고 진실한 마음으로 신성성을 좇는다면 분명 영적인 차원에서도 그를 알아봐 줄 것이라 여겼다. 그는 그러한 자신의 믿음과 신실함을 ‘천사의 주방’ 속에 아름답고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신실함으로 꽃피운 재능

스페인 세비야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무리요는 생계를 위해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평생 겸손하고 신실한 마음가짐으로 예술과 신성을 추구한 그는 재능을 꽃피워 아름다운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그는 스페인 바로크 시대가 사랑했던 화가이자 현대까지도 사랑받는 예술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류시화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기사화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