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시험 문제에 시진핑 어록…이념에 매몰된 中 초등교육

강우찬
2024년 03월 19일 오후 4:14 업데이트: 2024년 03월 19일 오후 5:59

대학 교과서에도 시진핑 어록 싣고 세뇌

중국의 한 초등학교 수학 시험 사진이 SNS에 올라와 논란이 되고 있다. 중국 역사상 가장 끔찍한 재난의 하나로 손꼽히는 문화대혁명 시절의 분위기를 짙게 풍긴다는 평가가 나온다.

사진 속 시험 문제는 85, 82, 86, 82, 83, 92 등 6개의 두 자리 숫자를 제시한 후 여러 가지 평균값에 관해 묻고 있다.

그러나 문제 본문에서는 ‘제20차 당대회 정신’, ‘(중국의) 문화적 자신감’ 같은 수학과는 무관한 시진핑 어록이나 중국 공산당(중공)의 정책을 가리키는 용어들이 곳곳에 인용돼 있다.

이런 용어들은 없더라도 문제에서 요구하는 수학적 능력을 평가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것들이다.

중국의 초등학교 수학 시험 문제. 통계와 관련된 문항의 본문에서 ‘제20차 당대회 정신’, ‘문화적 자신감’ 등 정치적 용어들이 등장한다. | 웨이보 캡처

그래프가 보기로 주어진 한 문제는 ‘사이버 공간의 운명공동체’에 관한 시진핑의 장황한 연설로 시작한다.

운명공동체는 시진핑의 새로운 국제 질서 구상을 가리키는 용어다. 그 실체는 세계 각국에 중공과 연대하자고 촉구하는 내용이다. 전 세계가 중공과 한 운명이 돼야 한다는, 수긍하기 어려운 주장을 담고 있다.

시진핑의 ‘사이버 공간의 운명공동체’ 연설이 지문으로 들어간 수학 문제. 해당 지문은 문제에서 요구하는 수학적 능력과는 무관하다. | 웨이보 캡처

중국 전문가 리닝은 “반세기 전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절에나 성행했던 ‘세뇌-선전 교육’이 21세기 현대 중국에서 반복되고 있다”며 “21세기판 홍위병 양성 교육이 아닐 수 없다”고 비판했다.

흔히 문화대혁명으로 불리는 이 사건의 공식 명칭은 ‘프롤레타리아(무산) 계급 문화대혁명’이다. 1966년 시작해 1976년 종료된 이 혁명은 수천만 명의 아사자를 발생시킨 대약진 정책의 실패로 일선에서 물러난 마오쩌둥이 자신의 후임자 류샤오치로부터 권력을 되찾기 위한 무력 투쟁이었다.

그 투쟁의 선봉이 된 것은 스스로 홍위병이라고 칭하면서 마오쩌둥 어록집을 들고 중국 전역에서 ‘봉건주의 적폐’를 찾아다니며 파괴를 일삼은 광신적 10대 마오주의자들이었다.

홍위병의 폭력과 파괴 행위는 문화대혁명 초기에 특히 심했다. 이들은 못이 박힌 곤봉을 휘둘러 자기 학교의 교사를 때려 죽이는 것을 ‘혁명적’이라고 여겼다. 리닝은 “살인을 찬양하는 광기 그 자체였다”고 평가했다.

중국의 대학 수학 교과서(좌)와 영어 교과서(우). 모두 시진핑 어록집의 내용이 수록돼 있다. | 웨이보 캡처

리닝은 “그 시절 교과서의 각 단원 머리말이나 시험문제는 대부분 마오쩌둥 어록의 문구에서 시작됐다”며 현재의 중국 교과서가 점점 마오쩌둥 시절로 퇴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에서는 지난 2021년 9월부터 초등학교부터 대학, 대학원까지 모든 교육과정의 교과서에 ‘시진핑의 정치사상’을 포함하도록 한 교육 개혁이 시행됐다.

리닝은 “이런 환경에서 장기간 교육받고 자란 중국 학생들은 자신의 의지나 생각과는 달리, 공산당의 정치적 요구에 따라 정답을 찍는 또 다른 자아를 생성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소위 인성(人性)이 아닌 당성(黨性)에 충실한 이런 자아는 평소 잠자고 있다가도 중국이나 중공을 비판하는 일에 마주치면 ‘정답’에 맞는 반응, 즉 격렬한 공격성을 나타낸다”며 “실은 매우 불행한 상태에 빠져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