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서울대 음악대학장 최은식 “현악 4중주 통해 인생을 배웠죠”

이연재
2022년 07월 25일 오후 5:48 업데이트: 2022년 07월 25일 오후 6:32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디렉터가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음악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현명해지기 때문이라고요. 물질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정신적으로 바로 서야 다시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음악은 세계 공통의 언어이고 세계는 음악을 통해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요. 음악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파워풀’한 메시지가 있거든요.”

19일 비올리스트 최은식 교수를 만나기 위해 서울대학교 음악대 학장실을 찾았다. 문을 열자 학장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는 회의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10분 정도 기다렸을까. 그는 “갑자기 학장이 돼서 정신이 없어요”라고 수줍게 웃으며 취재진을 맞았다.

무엇보다 눈에 띈 것은 최 학장의 소탈함이었다. 그는 요즘 챙겨야 할 일이 또 하나 생겼다. 전주에서 열리는 ‘비바체 실내악 축제’가 코앞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최 학장은 이 축제의 예술감독이다.

와인처럼 깊고 묵직한 C현의 매력

비올라는 활로 연주하는 현악기 중 하나다. 바이올린과 첼로 사이에서 진하고 깊은 소리를 내는 비올라는 베토벤, 모차르트 등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에게 사랑받았던 악기다. 

“비올라는 다른 악기를 서포트해 주는 악기입니다. 그러면서 리듬감이 좋아야 하고 음악의 밸런스를 잘 맞춰주는 역할이 필요한 악기입니다.”

누군가 현악 4중주를 와인에 비유한 말이 있다. 멜로디를 연주하는 제1 바이올린은 와인의 라벨, 첼로는 와인 전체를 감싸주는 병, 제2 바이올린은 와인병이 숨쉬게 해주는 코르크 마개, 그리고 비올라는 그 속에 담긴 와인이다. 현악 4중주에서 그만큼 비올라의 비중이 높다는 의미다.

비올리스트 최 학장은 “좋은 와인은 굉장히 향도 좋고 은은한 맛이 있는데, 비올라가 그렇다”라며 비올라 사랑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최근 한 외국 손님과 만나 음악 이야기를 하다가 “다시 태어나서 악기를 하더라도 다시 비올라를 선택할 것 같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최 학장의 약력은 꽤 화려하다. 서울예고 재학 중 LA 필하모닉 수석 비올리스트 오야마 헤이치로에게 발탁돼 미국으로 건너가 커티스 음악원을 거쳐 보스턴 뉴잉글랜드 콘서바토리의 아티스트 디플롬을 획득하고 같은 학교에서 3년간 교수로 재직했다.

이후 신시내티 컬리지 뮤직 콘서바토리, 뉴 잉글랜드 음악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보르메오 4중주단,  에머넷 현악 4중주단 멤버로 활동했다. 1997년, 1999년, 2001년 3차례에 걸쳐 한국을 빛낸 7인의 음악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최은식 학장은 초등학교 5학년 담임 선생님의 권유로 음악을 시작했다. 그가 처음 선택한 악기는 바이올린이었다. 그러나 2년 뒤 비올라로 전공을 바꿨다. ‘라 살레 현악4중주단’에서 제2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연주했고 신동옥 선생의 권유 때문이었다.

“신동옥 선생님께서 ‘너는 손이 크고 힘도 있으니 비올라를 해보면 어떻겠냐’며 비올라를 보여주셨어요. 한번 현을 그어보라고요.”

최 학장은 금방 비올라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특히 바이올린에 없는 C현의 깊고 묵직한 울림이 좋았다. 이렇게 비올라에 입문하게 된 최 학장은 서울예고 재학 중 우연히 미국 유학 기회가 주어졌다. 정명훈 지휘자와 명 비올리스트 겸 지휘자 오야마 헤이치로에게 오디션을 받고 미국 크로스로드 예술고등학교 장학생으로 선발됐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고등학교 때부터 상당한 실력자였던 것 같습니다.

“오디션에 합격하리라고 생각도 못 했어요. 왜냐하면 비올라를 늦게 시작해서 저보다 뛰어나고 잘하는 친구들이 많이 있었거든요. 제가 나중에 헤이치로 선생님께 여쭤봤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실력이 안 됐던 것 같은데 왜 그때 저를 뽑으셨냐고. 그랬더니 웃으시면서 그냥 느낌이 왔다고 하시더라고요. 음악적으로 더 발전할 수 있다고 느껴져서 저를 뽑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유학시절 가장 기억에 남은 연주가 있다면요?

“커티스 음악원에는 학생 연주회가 있어요. 제가 1학년 때 연주를 하겠다고 신청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근데 무대에 막상 올라가니 너무 긴장돼서 연주를 못 하겠더라고요. 굉장히 연습을 많이 하고 나갔는데 제 평생 무릎까지 떨려 보기는 처음이었어요. 그냥 주저앉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 순간 ‘연주를 그만할까, 그냥 멈춰버릴까’ 하는 생각이 한순간 들더군요. 제가 그때 어떻게 넘길 수 있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어쨌든 그 고비를 넘기고 끝까지 연주했었죠. 그리고 평은 좋았습니다. 그 연주가 항상 기억에 남고 그때 포기하지 않고 연주했던 것이 ‘정말 잘한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뒤로 무대 공포증을 완전히 극복했나요.

“전문 연주자들도 떱니다. 안 떠는 사람은 없어요. 그냥 안 떨리는 척하는 거죠. 연주자가 가장 공포스러울 때가 무대 들어가기 1분 전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도 떱니다. 밤에 잠도 못 잡니다.”

결혼 생활보다 더 힘들다는 현악 4중주 생활

“제가 현악 4중주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과테르니 콰르텟’이 베토벤 후기 작품 전곡을 연주하는 것을 들었는데, 비올라의 매력은 앙상블에서 빛이 나더군요. 그때 커티스 음악원에 진학해 현악 4중주를 하겠다고 결심했죠.”

커티스 음악원 4학년 때 그는 동창생들과 보르메오 현악 4중주단을 결성하고 본격적으로 실내악 활동에 나섰다. 여기에는 결성한 지 불과 1년 만에 프랑스 에비앙 콩쿠르에서 2위로 입상한 경험이 큰 힘이 됐다. 그는 보르메오 현악 4중주단, 아마넷 현악 4중주단에서 활동하며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연주자들 사이에서는) 현악 4중주 생활이 결혼 생활보다 더 힘들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연주 때문에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다 보니 너무 자주 보니까 나중에는 서로 안 보고 싶은 거예요. 어떤 그룹은 공연이 있으면 아예 호텔을 따로 잡고 비행기도 따로 탄다고 해요. 그렇지만 (연주를) 계속하는 이유는 음악이 너무 좋으니까 하게 되는 거죠. 네 사람이 조화를 이루어서 음악을 만들어내는 그 자체가 굉장히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 음악의 정신을 함께 공유한다는 자체가 훌륭한 것 같습니다.”

현악 4중주 활동은 그에게 프로 연주가로서 성장하는 소중한 기회가 됐다. 좋은 연주를 통해 청중들과 대화하는 세계가 얼마나 감동적인지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시기였다.

“저희의 음악을 듣고 청중들이 감동하시는 것을 보면 정말 행복했습니다. 어느 때는 연주가 끝나고 너무 좋아서 네 명이 부둥켜안고 운 적도 있었고요. 그러다가 어느 때는 서로 싸워서 연주 안 한다고 하기도 하고요. 그러면서 음악을 통해 인생을 배웠습니다. 그 시기가 제 인생에 큰 밑거름이 됐어요.”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음악가는 누구인가요.

“저는 베토벤을 참 좋아합니다. 청각장애가 있었던 후기에 작곡했던 곡들은 지금 연주해봐도 ‘어떻게 이런 훌륭한 작품들을 작곡할 수 있었을까’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감탄이 나옵니다. 모차르트, 슈베르트 등 당대 유명한 음악가들이 비올라를 좋아했는데 베토벤도 작곡 기법을 보면 결코 아마추어 비올리스트는 아니었어요.”

-현악 4중주로 해외에서 활동을 많이 하셨죠?

“20대 때에는 전 세계를 다 돌았던 것 같습니다. 미국 같은 경우는 워낙 땅이 넓다 보니 연주를 위해 8시간 운전하고 간 적도 있었고요. 그때는 돈이 없으니까 모텔에서 자기도 하고요. 그때 퍼스트 바이올린을 했던 친구가 연주 횟수를 세봤는데, 1년에 150회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어떤 분들은 세계를 다니니 얼마나 좋으냐고 하지만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연주는 긴장감의 연속이거든요.”

역량 있는 음악인의 산실, 실내악 축제

최 학장은 1998년 귀국하며 서울대 교수로 임명됐다. 그는 후학을 양성하며 한국의 실내악 성장을 위해 두 팔 걷고 나섰다.

-한국 귀국을 결심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한국에 오기 전 고민이 많았는데, 부모님도 여기에 계셨고 제가 한국 사람이다 보니 한국에 호기심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좋은 대학에서 후학 양성에 힘을 쏟는 것도 참 좋겠다 싶었습니다.”

-그러고는 실내악 페스티벌을 시작하셨는데요.

“맨 처음 음악 교수들과 학생들의 캠프로 시작했습니다. 음악인들이 화합하는 자리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제가 다리 역할을 했었어요. 그런데 좀 지나면서 아쉬운 마음이 들더군요. 이렇게 훌륭한 연주를 우리끼리만 보기에는 아까운 거예요. 그래서 무대에 올리고 싶었죠.”

최 학장은 2008년부터 저스트 비바체 페스티벌을 운영했다. 국내에도 해외처럼 실내악 페스티벌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초기의 저스트 비바체는 비올라 주자들 중심으로 흘러갔다. 비올라로 구성한 앙상블 사운드도 꽤 괜찮았지만, 그의 목표는 다른 데 있었다. 정통 클래식 음악회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런 그의 꿈은 10년의 세월에 걸쳐 조금씩 무르익어 갔다. 2017년부터는 저스트 비바체를 ‘전주 비바체 실내악 축제’로 이름을 바꾸고, 매해 전주에서 개최하고 있다. 이 축제는 명실공히 국내외 최정상급 연주자들이 참여하는 정통 클래식 음악회로 자리 잡았다.

-음악회 이름에 비바체를 붙인 데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

“비바체(VIVACE)는 음악 용어로 생기 있고 활발하다는 뜻도 있고요. 브이아이(VI)는 바이올린, 브이에이(VA)는 비올라, 씨이(CE)는 첼로라는 뜻도 있습니다. 훌륭한 음악가들이 수준 높은 실내악과 오케스트라를 연주하고 청중은 그 음악을 감상하며 서로 배우는 나눔의 장입니다.”

-실내악만의 특별한 매력을 소개해주세요.

“실내악은 하나의 사회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네 명이 싸우면 완전히 망가지는 음악이 되는 거고 서로를 배려하고 서로의 아이디어를 존중해 주고 존경해주면 좋은 음악이 나옵니다.”

“음악을 들으면 행복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것이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실내악을 활성화하기 위해 전주에서 축제를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실내악이 많이 활성화되어 좋은 연주자들이 한국으로 많이 돌아옵니다. 외국 못지않게 한국에도 훌륭한 연주자들이 많아요. 그래서 앞으로 발전할 기능성이 너무 많습니다.”

이번 축제는 한 번 진행되던 예년과 달리 여름(7월)과 가을(10월), 두 차례로 나눠 진행한다고 한다. 그는 “외국에는 가족이 잔디에 앉아 피크닉을 하면서 연주를 듣는 야외무대가 많다”며 “공연 보기 좋은 가을에 야외 공연을 진행하고 싶었다”고 했다.

“전주 성지 순례길에 세계평화의전당 건물이 있어요. 건물이 굉장히 멋있습니다. 한 1000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데 그곳에 야외무대를 설치해 10월에 페스티벌을 합니다. (10월) 6일과 7일은 세계평화전당 안에서 공연하고 8일에는 야외에서 진행합니다. 비가 안 오기를 기도해야겠죠.”(웃음)

두 시간 가까이 대화하면서 최 학장의 음악에 대한 열정이 느껴졌다. 이번 페스티벌의 주제도 ‘열정’이다.

“(전주 비바체 축제가) 올해로 6회인데 제가 목표하는 것이 있습니다. 국제 실내악 콩쿠르를 계획하고 있어요.”

언제쯤 가능하겠냐는 질문에 그는 “1년 안에 되지 않을까 싶어요”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이번 전주비바체 실내악축제는 여름(7월)과 가을(10월) 두 차례에 걸쳐 관객들과 만날 예정이다.

◇2022년 전주 비바체 실내악 축제는 7월 26~31일과 10월 6~8일로 두 차례에 나뉘어 치러진다. 7월 축제는 전주시 그랜드힐스턴호텔과 세계평화의전당에서 진행된다. 축제 공식 홈페이지 www.justvivac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