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中 공산당, 목숨 걸린 ‘당내 노선투쟁’ 징후

허칭롄(何淸漣)
2022년 02월 1일 오후 4:50 업데이트: 2022년 02월 1일 오후 4:50

시진핑(習近平) 중국 공산당(중공) 총서기의 3연임 여부가 올가을에 열리는 20차 당대회에서 결정된다. 현재 중공 고위층의 내부 투쟁은 시진핑을 후계자로 정한 2007년 17차 당대회 때에 못지않게 살벌하다.

시진핑이 공산당 내 도전할 능력이 있는 마지막 세력인 장쩌민(江澤民)·쩡칭훙(曾慶紅) 세력에 총력을 다해 대응하고 있다는 징후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베이징에 본부를 둔 미국의 중국어 매체 둬웨이(多維)가 최근에 ‘덩샤오핑(鄧小平) 남순(南巡) 30주년’ 시리즈 글을 게재했다. 둬웨이는 이 글에서 장쩌민의 정치적 과오에 대해 언급했다.

장쩌민 집권 시기에 부정부패가 만연했지만, 그의 과오는 이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특히 둬웨이가 지난 24일 게재한 ‘남방 담화 전후의 두 가지 역량의 게임(이하 게임)’이라는 기사(시리즈 중 일부)에서는 처음으로 장쩌민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을 부정한 인물로 규정하고, 이를 노선 투쟁 차원으로 격을 높였다.

목숨이 걸린 당 내부 싸움 ‘노선투쟁’

중공의 역사를 잘 아는 사람들은 ‘노선투쟁’이라는 표현에 엄청난 무게가 실린다는 것을 알 것이다. 중공은 창당한 후 100년 동안 총 11번의 노선투쟁을 거쳤다. 기본적으로 중공 최고위층 사이에 목숨을 건 권력투쟁이었다.

‘게임’에 따르면, 1989년 5월 20일 덩샤오핑 등 중공 고위층은 장쩌민 당시 상하이시 당서기를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를 대신할 후임으로 내정했다. 이어서 31일 덩샤오핑은 리펑(李鵬) 총리, 야오이린(姚依林) 부총리와의 대담에서 자신의 ‘정치적 유산, 즉 개혁·개방을 제기했다.

덩샤오핑은 “개혁개방 정책은 변하지 않아야 한다. 수십 년 동안 변하지 않고 끝까지 계속돼야 한다. 11기 3중전회 이후의 노선·방침·정책을 계속 관철해야 하며, 표현조차 변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 핵심이 바로 ‘하나의 중심, 두 개의 기본점’을 견지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도 덩샤오핑은 개혁 개방을 가장 중시했고, 가장 중요한 정치 유산으로 여겼다.

하나의 중심은 경제 건설이고, 두 개의 기본점은 개혁 개방과 4가지 기본 원칙으로 나뉜다. 4가지 기본원칙이란 중국 공산당의 영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 인민민주 독재, 사회주의 노선 등 4가지를 반드시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공산당 내부에는 원로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덩샤오핑과 천윈(陳雲) 두 원로가 ‘양두정치(雙頭政治)’ 체제를 형성하고 있었다.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하려 했고 천윈은 계획경제를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1989년 톈안먼 사태 이후 중공 내 주류는 개혁을 반대했기에 천윈이 덩샤오핑을 압도했다.

장쩌민은 이해득실을 따져 자연스레 천윈 쪽에 붙었다. 장쩌민은 1989년 그의 첫 ‘7.1(창당 기념일) 강화’에서 두 가지 개혁관, 즉 사회주의 개혁관과 자본주의 개혁관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평화연변(和平演變·평화적 방식에 의한 사회주의 체제 전복)’에 반대하는 기조를 당의 교육 방침으로 끝까지 견지해야 한다고 했다.

1991년, 장쩌민은 중공 창당 70주년 연설에서 ‘부르주아 자유화’를 8번, ‘평화연변’을 9번 언급하면서 “현재 계급투쟁의 초점은 4가지 기본원칙과 부르주아 자유화 간의 투쟁”이라고 했다. 후계자 양성을 언급할 때 그는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과 개혁개방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부르주아 자유화와 평화연변을 반대하는 투쟁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간부들을 감찰하고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쩌민은 개혁개방을 부르주아 자유화 반대 및 평화연변 반대와 함께 언급했다. 이는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과 ‘제3 세대’ 간부 양성 계획을 완전히 부정한 것이다.

둬웨이의 이 글에서는 당시 항간에 나돌던 “완위안후(萬元戶·1980년대 연간 소득이 1만 위안 이상인 부자)를 모두 빈털터리로 만들겠다”는 장쩌민의 독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이 중단되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다. 그는 1991년 설을 맞아 천윈을 만나러 상하이에 갔지만 거절당했다. 하지만 상하이에서 중앙군사위 업무를 주관하는 양상쿤(楊尚昆)과 두 차례 만나 뜻을 모았다.

양상쿤을 주축으로 하는 군부의 지지하에 덩샤오핑은 1992년 1월 18일부터 2월 21일까지의 ‘남순(南巡·남쪽 지방 순시)’을 통해 성공적으로 국면을 반전시켰다.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2월 24일 ‘개혁을 더 대담하게’라는 사설을 발표하며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양상쿤이 덩샤오핑 편에 합류하면서 정치적 무게 추(錘)가 덩샤오핑 쪽으로 기울자 2년 8개월 동안 망설이던 장쩌민은 결국 덩샤오핑 편에 섰다.

그 후 장쩌민, 후진타오 시대의 고위층이 모두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을 견지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로 인해 장쩌민이 덩샤오핑과 천윈 사이에서 흔들렸던 일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미국 골드만삭스 고문 로버트 로렌스 쿤이 지은 ‘중국을 변화시킨 거인 장쩌민’이란 책에서도 이 사실은 언급되지 않았다. 또한 ‘게임’에서도 중국 관영 신화통신의 양지성(楊繼繩) 기자가 쓴 ‘중국 개혁연대의 정쟁’이라는 책의 내용을 인용하면서도 이 책이 2010년 홍콩에서 출간된 이후 중앙선전부가 여러 차례 저자를 찾아가 책을 유통시키지 말라고 압박한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물론 장쩌민이 당시 덩샤오핑을 버리고 천윈에게 붙었던 ‘노선 오류’ 등 민감한 내용을 덮기 위함이다.

둬웨이가 장쩌민에게 항상 이처럼 엄격한 것은 아니었다. 시진핑 집권 이후인 2015년 1월 17일 둬웨이는 ‘국내외 정세가 급변하는 위험한 시기에 부임한 장쩌민의 공과는 한 캠페인에 달려있다’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장쩌민을 두둔한 바 있다. 이 글은 시작부터 장쩌민의 억울함을 대변했다.

“여러 차례 ‘죽임을 당한’ 전 중공 국가지도자 장쩌민은 지금 생애 최악의 정치적 허리케인(고난)을 겪고 있다. 시진핑이 18차 당대회에서 집권한 이후 지금까지 2년 동안 ‘호랑이(고위관리)와 파리(하급 관리)를 함께 때려잡는다’는 구호를 하늘이 진동하도록 외치며 반부패의 칼을 휘둘렀는데 잘린 것은 모두 장쩌민파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여러 문제점을 제기했다. “문제는 부하들의 부정부패 정도만으로 한 세대 지도자의 공과(功過)를 규정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장쩌민에게 적용한다면 장쩌민이 주변 인사의 불찰로 인해 역사적 죄인으로 낙인 찍혀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기사는 물론 장쩌민 시대의 심각한 부패가 ‘과(過·과실)’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기사는 “종종 항간에는 ‘마오쩌둥의 간부는 청렴결백하고, 화궈펑(華國鋒)의 간부는 흔적도 없고, 덩샤오핑의 간부는 백만장자이고, 장쩌민의 간부는 국고를 털었다’는 민요가 돌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공(功·공로)’을 강조하며 이렇게 썼다.

“장쩌민 시대에 성장한 관리들의 행적이 비행으로 얼룩졌지만 절대다수가 개혁개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절대적인 주력을 맡았다. 총설계사로서 덩샤오핑의 가장 큰 업적이라면, 연로한데도 원칙을 지켰고, 사설(邪說)의 공격에도 개혁개방을 추진함에 흔들림이 없었고, 또 몸소 남순에 나섰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장쩌민의 공적은 덩샤오핑이 설계한 개혁개방의 큰 그림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장쩌민에 대한 둬웨이의 태도 변화는 2019년 전후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몇 년 전 트위터에서 둬웨이를 중공의 대외선전 매체라고 했다. 내막을 아는 이가 트위터에 “둬웨이, 이 매체는 대외선전 매체가 아니라 당내 한 계파의 매체다”라는 답글을 달아주었다. 필자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둬웨이가 당시 장쩌민 계열을 두둔한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둬웨이, 시리즈 기획으로 장쩌민의 공과 평가…왜?

둬웨이는 중공이 창당 100주년을 기념해 ‘무대 앞과 뒤, 주목받는 중난하이 정계 원로들’이라는 특별 시리즈를 연재했다. 그중에는 ‘장쩌민은 어째서 중공 정계의 가장 주목받는 원로가 됐을까’라는 제목으로 장쩌민의 공과에 대해 자세히 평가한 글도 있는데, 이 글 가운데 일부 내용을 곰곰이 짚어볼 필요가 있다.

하나는 장쩌민은 16차 당대회에서 정권을 후진타오에게 이양할 때 모든 권력을 이양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장쩌민은 퇴임 후에도 2년간 군사위 주석직을 유지했고, ‘팔일대루(八一大樓·중국 국방부 청사)’에 있는 그의 집무실은 18차 당대회 직전에야 폐쇄됐다. 장쩌민의 집무실이 2012년까지 유지됐다는 것은 후진타오 집권 시기 10년 내내 그의 영향력이 군(軍)에 미쳤음을 뜻한다.

후진타오는 중공 18차 당대회에서 모든 직을 내려 놓음으로써 물러나는 지도자가 새 지도체제에 끼어들 가능성을 원천 차단했다. 후진타오가 그의 임기 전반에 개입한 ‘원로 정치’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또 하나는 18차 당대회 이후 실각한 고위 관료들이 모두 장쩌민 시대에 벼슬길에 올랐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군사위 부주석을 지낸 쉬차이허우(徐才厚)와 중공정법위원회 서기로 정치국 상무위원 서열에 올랐던 저우융캉(周永康)은 2013년에 반부패 운동이 시작되자 가장 먼저 실각했다. 사실상 이들은 모두 정치에 개입한 자들이다.

이 글은 저우융캉이 중공 무장경찰 부대를 이용해 2012년 3월 19일 심야에 베이징 신화먼(新華門) 일대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지난 24일 둬웨이는 ‘게임’을 통해 끝내 장쩌민의 세 번째 과오이자 가장 중요한 과오를 평가했다. 즉 장쩌민이 톈안먼 사태 이후 2년여 동안 개혁개방을 반대한 ‘노선 착오’다.

대외선전 매체가 내보내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인민일보 22일 자 논설을 보면 이미 장쩌민·쩡칭훙 파벌을 청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첫머리에 시진핑의 담화를 언급했다.

“무관용 태도로 부정부패를 처벌하고, 대중의 이익을 해치는 모든 부정부패와 나쁜 기풍을 시정하며, ‘핵심 소수’를 처단해 위계를 바로 세우며, 당과 국가의 감독제도를 지속적으로 보완하고, 위대한 자기혁명으로 위대한 사회혁명을 이끌며, 전면 종엄치당(從嚴治黨·엄격한 당 관리)을 끊임없이 심층적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이다.”

장쩌민은 고령에 지병으로 빈껍질만 남았다. 이제 장쩌민·쩡칭훙 파벌의 실질적 리더는 쩡칭훙이다. 그리고 현재 공산당 내부 파벌 중 시진핑에 대적할 수 있는 파벌은 장·쩡 파벌이 유일하다. 시진핑에게 불만을 품은 세력들은 모두 이 세력이 나서기를 기대하고 있다.

장기집권을 노리는 시진핑은 반대 세력들의 결집을 차단하려 한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반대 세력의 거두인 짱·쩡 파벌을 쓰러뜨리는 일이다. 올가을 20차당대회를 앞두고 이 같은 움직임이 더욱 가시화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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